성경본문: 전도서 7장 1-4절
슬픔의 결과는 기쁨이다.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전7:1)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는 속담이 있듯이 “아름다움 이름”은 명예스러운 이름 곧 죽음 후의 업적 등으로 볼 수가 있다. “보배로운 기름”은 감람유 정도로 보아야 하고 근동지방 사람들은 감람유를 피부 보호제로 특히 잔치 때에 치장하는 로션 정도의 화장품 용도로 사용하며 품위 유지 정도로 사용하였다.
본문에서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란 같은 문장에서 해답이 있다. 곧 아름다운 이름은 죽는 날을 의미하고, 보배로운 이름은 출생하는 날을 의미한다. 더욱이 2절에는 초상집과 잔칫집이 언급되었는데 이 모든 용어들은 상호관계를 맺는다. 초상집의 슬픔과 잔칫집의 기쁨이라든지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우매자의 마음은 잔칫집에 있다는 말씀은 모두 같은 맥락을 유지한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전7:2)
초상집의 슬픔은 위로가 필요하고 잔칫집의 웃음에는 축하가 필요하다. 슬픔의 위로는 하나가 더 아쉽고 웃음의 축하는 하나가 덜 하여도 아쉬움이 없다. 그러므로 나의 마음의 표 한 장은 초상집에 던져 위로를 더 해 주고 싶다. 왜냐 하면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기 때문이다. 잔치의 즐거움은 다시 행할 수도 있고, 뿐만 아니라 그 즐거움은 사람의 결국인 죽음을 예비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이러한 일련의 말씀들은 인생만을 생각했을 때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성도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상황이 180∘ 전환된다. 성도는 죽음이 내세에서의 삶이 시작되므로 이미 죽음을 예비한 상태이기에 초상집에서의 분위기는 슬픔이 아니라 기쁨이고, 반면에 잔치의 즐거움은 오히려 삶의 깨달음을 주는 교훈이 되는 것이다. 본문은 산 자가 이것에 유심(명심)하리라는 교훈을 아끼지 않고 있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전7:3)
우리가 슬픔 일이나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에 한바탕 울고 나면 속이 시원한 느낌을 받는 것과 같다. “근심함으로”란 말은 삶 속에서 긴장감을 늦추지 않으므로 영생을 향하여 소망이 넘침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지혜자의 마음은 더욱 잔칫집보다 초상집에 있게 되는 것이다.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전7:4)
성도의 위로는 성령님께 받는 것이다. 성령의 위로함을 받은 성도는 세상 모든 이들을 위로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그 권한으로 이웃을 위로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품어야 한다. 슬픔을 당한 이웃을 사랑으로 품을 때에 곧 모두의 기쁨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