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안녕하세요... 로드러브 입니다.
날씨가 많이 쌀쌀한데 감기들 조심하시구요..
이곳 김해는 아직 눈 한송이 내려주질 않네요..
아 눈이 보구싶다..어떻게 생겼는지 기억도 안나요.ㅎㅎ
제가 섬기는 교회인 김해시 외동 시온중앙교회(기독교 대한 성결교)에는
귀하신 전도사님이 한분 계십니다.
물론 최영걸 목사님 이하 모든분들이 너무 귀하고 하나님의 축복된
자녀들이지만 특별히 오늘 이 분의 간증을 올려드립니다.
혹시 아시는분도 계실거라 믿어요... 안미영 전도사님이라구요..
한때 미국 마약조직의 대모로 활동하다가 죽음직전, 감옥에서 하나님을
영접하신 후, 지금은 간증사역과 교도소 제소자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시고 계십니다.
2003년도 11월엔 KBS TV "이것이 인생이다"프로그램의 주인공으로 나오
기도 하셨구요. 신앙 간증집인 "I say I love you"를 출간하셨습니다.
이 글은 국민일보에 나온 그분의 신앙 간증입니다.
장문의 글이지만 일독하신 분들께서도 새로운 마음으로 재일독 하시면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실거라고 확신합니다.
참고로 안미영전도사님 연락처(e-mail)를 남겨드립니다..
그럼 오늘하루도 성령충만과 믿음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지금부터 내가 들려드릴 얘기를 믿지 못하겠다고 하는 독자분들도 있을
것이다.
사실 나도 믿을 수 없을 정도다. 한국무용을 전공한 무용 강사,공군
조종사의 평범한 아내였던 내가 미국 땅에서 홀로 불법체류자로 떠돌
다가 마약조직의 대모로 한때 살인까지 결심했다가 40년동안 꼼짝없이
교도소에 있어야 할 처지가 됐던 일,영어도 못하는 한국 여자가 아무런
희망도 없이 미국의 교도소에 3년동안 갇혀있다가 지금은 전도사가 되어
한국에서 전국의 교도소와 감호소,구치소에서 재소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살게 됐다.
소설이나 영화 속에 나오는 얘기라고 해도 터무니없다고 할 일들인데
평범한 아줌마 같은 외모에 눈물 많고 늘 덤벙대는 성격의 나에게 그런
인생이 있었다는 것을 누가 믿겠는가.
나는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다고 믿는다. 내가 절망
속에서 성령의 힘으로 마약을 끊은 경험이 있기에 마약에 중독돼 구치소
에 들어온 사람들에게“마약은 끊을 수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내가 세번이나 교도소를 오갔기에 그들의 아픔과 설움을 헤아릴 수 있다.
미국의 갱스터들을 좌우에 거느리고 다녔던 나였기에 아무리 흉악한 범
죄를 저지를 사람이라도 담대하게 만날 수 있다.지난날의 방황이 가슴
아프긴 하지만, 하나님을 원망하진 않는다.오히려 가장 차가운 교도소
안에서 하나님의 따뜻한 품을 체험할 수 있었다.
나같은 사람을 구원하셔서 이렇게 쓰시는 하나님이 감사할 뿐이다.
지금도 그때 교도소의 철대문 소리가 귀에 생생하다.
‘철커덕, 철컥’너무도 차갑고 무거우면서도 서늘한 그 소리에 눈을
떠보려고 했지만 의식만 가물거릴뿐,눈꺼풀이 올라가질 않았다.
수감자들의 머릿수를 세는 헤드 카운트(인원점검)였을 것이다.
마약 제조·운반·판매에 복용까지 한 혐의로 미국의 마약특별수사대
(DEA)에 체포된 나는 한국의 가족들에게 버림받고 세번째 교도소에
갇힌 절망감에 몰래 모아두었던 수면제 50알을 먹었다.
의식의 세계너머 저기 긴 강을 건너기 위해 그리운 이들의 얼굴을
차례로 떠올렸다.
뜨거운 눈물이 귓가에 고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침인지 저녁인지 모를 헤드카운트 소리에 의식이 서서히 돌아왔다.
무거운 눈꺼풀을 왜 이리 뜨고 싶을까.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자 살고 싶다는 강렬한 바람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더럽고 추한 눈물의 찌꺼기가 귀밑 머리에 고였다.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 그때 너무도 크고 인자한 모습의 그분이 나를
감싸주셨다.몸을 일으키고 싶었지만 말을 듣지 않았다.
그냥 그대로 죽기 위해 누운 채로 그 분의 품에 안겨있을 수 밖에
없었다.
감격스럽고 혼란스러웠지만 나는 그분이 누구냐고 묻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내 곁에 계셨던 주님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캔 유 히얼 미?”(Can you hear me?)깜짝 놀라 눈을 뜨자 짙은
베이지색 유니폼의 여간수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알몸에 발목과 팔목은 쇠처럼 느껴지는 짙은 밤색 가죽벨트에 묶여
있었고 배와 허벅지만 얇은 가운으로 덮여 있었다.
추위와 갈증이 밀려왔다.알수없는 분노와 그리움,외로움이 나를 조여
왔다. 그래도,왜 그런지는 이해할 수 없지만,무섭기보다는 감사하다
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주님의 품에 돌아왔다.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그 당시 학교에서는 청소 당번이나 형편이
어려운 집 아이들에게 옥수수빵을 배급했다.
내가 기억하기에 우리집은 그 빵을 배급받을 만큼 형편이 어려웠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그 빵이 먹고 싶어 친구를 어르기도 하고
억지로 빼앗아 먹기도 했다.
여름방학이 시작하기 전날 학교에서 새 교과서를 나눠줬다.
그 책을 친구의 옥수수빵과 바꿔먹어버렸다.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빵을 다 먹었다.
빵이 없어지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선생님이 책을 안 주셨다고 할까? 잃어버렸다고 할까?’.
집에는 오빠와 아빠뿐이었지만 오빠는 평소에도 날 자주 때렸다.
엄마는 며칠전 동생만 데리고 친척집에 간다고 집을 비우셨다.
마침 집에 도착하니 먼 곳에 살던 사촌언니가 와 있었다.
반갑기 그지 없었다.방학을 했으니 언니가 나를 데려 간다고 했다.
난 팔짝팔짝 뛰며 이왕이면 오빠 없을 때 언니를 따라가려고 서둘렀다.
한치 앞을 모르고 사는것이 인생이었다.
그것이 오랜 이별이 되고 결국은 남이 되어버리는 슬픈 이별이 됐다.
그런 사실도 모른 채 나는 버스를 몇 번이나 갈아타고 멀리멀리 갔다.
낯선 골목을 여러 번 지나 작은 쪽문을 열고 언니와 함께 들어갔다.
내 동생 은혜가 세숫대야에 흰 고무신을 넣고 물장난을 치고 있었다.
엄마가 나오셔서 날 부둥켜안고 마구 우셨다.
그 옆에는 낯선 아저씨가 있었다.은혜는 그 아저씨를 아빠라고 불렀다.
깜짝 놀랐지만 못 들은 체했다.
아저씨는 저녁식사 때 정말 우리 아빠인 것처럼 생선살을 발라주시면서
“우리 딸 많이 먹어라” 하셨다.
그렇게 우리는 새로운 가족이 됐다.
아주 가끔은 아빠와 오빠가 어떻게 지내는지 걱정도 됐지만 잊어야
한다고 다짐하며 돌아눕곤 했다.
같은 동네에 사는 다른 아이들은 방학이 끝나서 모두 학교에 가는 데
나는 늘 은혜와 소꿉놀이를 하며 지냈다.
그 날도 은혜와 놀고 있는데 누군가가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빠였다.
아빠는 우릴 중국음식집으로 데리고 가셔서 자장면을 사주셨다.
깊은 한숨을 쉬면서 아빠와 할머니가 우릴 찾아다녔다고 말씀하셨다.
은혜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나만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아빠가 묻는 말에 꼬박꼬박 대답했다.
얼마후 엄마와 아저씨는 보따리를 쌌다.
나는 우리가 숨어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얼마쯤 지난뒤 엄마는 남자아이를 낳으셨다.아기는 더할 수 없이 예뻤
지만 엄마는 병원에서 돌아오신 뒤에도 피를 많이 흘리셨다.
아기가 배 고파 울었지만 젖도 먹일수 없을 정도로 많이 아프셨다.
아빠가 엄마를 업고 병원에 가시면 내가 아기를 이불로 싸서 옆집
아주머니에게 가서 젖동냥을 했다. 아직 건강하지도 않은 엄마와
우리 식구는 기차를 타고 또 이사를 했다.그곳이 어린 마음에 처음으로
평화를 맛본 곳 강원도 원주시 일산동이었다.
지금도 사람들이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나는 강원도 원주라고 말한다.
비탈진 동네의 큰길을 지나 학교 옆 샛길로 가면 능수버들이 하늘을
가득 가린 별천지가 있었다.작은 시냇물이 졸졸졸 소리를 내며
흐르고 새들은 나무 사이에 숨어 지저귀고 있었다.
나무 냄새는 향긋했다.
은혜를 데리고 그 시냇가에서 놀았다.흐르는 물에 몸을 적셔가며
모래와 나뭇잎으로 시간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엄마의 병이 조금씩 나아가면서 집안형편도 펴지기 시작했다.
집앞에서 국화빵을 굽던 아빠는 원주 시청에 취직이 되셨다.
엄마가 아팠을 때 집에 찾아와 찬송가도 불러주고 기도도 해줬던
교회 사람들이 고마워 가족이 함께 손을 잡고 교회를 찾기도 했다.
나는 중학생이 됐고 학생회 간부로 선출될 정도로 인정을 받았다.
그때쯤 엄마는 무용학원을 시작하셨다.부축을 받아야만 일어설 정도로
병약했던 엄마가 무용가 였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알록달록한 옷감이 나비 날개처럼 하늘거리는 무용복을 입고 원생들
앞에서 춤을 추는 엄마의 모습은 천사 같기도 하고 선녀같기도 했다.
어느 해‘원주시민의 날’이었다.
엄마는 제자들과 함께 무용을 공연했다.
나도 여러 명이 함께 하는 부채춤과 중국무용에 출연했다.
동생 은혜도 장구춤을 췄다.
갑자기 우리 무용학원이 유명해졌다.
원주라는 조용한 도시에 한국무용붐이 불었다.
학교에서도 행사 때마다 나를 불렀다.
세상의 모든 눈길을 피해 원주로 내려와 가난하고 초라하게 살았던
게 불과 몇년 전이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고등학교로 진학할 때쯤 사춘기가 시작됐다.
학교에서 친구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고 선생님들의 사랑을 받았던
나는 서서히 문제아가 되어가고 있었다.
패싸움을 하다가 잡혀 도서관에 무릎꿇고 있는 날이 교실에 앉아있는
날보다 많아 졌다.
등록금을 가지고 며칠씩 가출하기도 했다.
여고 2학년 때는 친구의 우표수집책을 빼앗아다 남자친구에게 생일
선물로 준 일때문에 정학을 당하기도 했다.
답답한 마음에 1주일동안 여행을 다녀왔더니 퇴학이라고 했다.
학교에 다니지 않는 친구들과 어울려 기타 치고 노래하고 춤추며 노는
것이 재미있었다.
남들이 보기에 친구들은 문제아요 골칫거리들이었지만 저마다 가슴속에
아픔을 달래며 어렵고 힘겹게 사춘기를 보내고 있는 좋은 아이들이었다.
나도 아빠의 외도 때문에 더 거칠게 반항했다.엄마 속을 무척이나 썩였다.
그래도 대학 진학을 포기하지 않았다.대학은 지겨운 집을 공식적으로
떠날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대학을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집을 떠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예비고사를 며칠 앞둔 어느 날 엄마의 무용학원에 큰 사고가 났다.
학원 난로 위에 올려뒀던 큰 물동이를 아이들이 잘못 건드려 4명이
뒤집어 쓴 것이었다.
1명만이 경상이고 나머지는 중태였다.무용연구소는 영업정지 처분을
받았고 그동안 모아뒀던 재산을 모두 털어 치료비와 보상금, 위로금으로
지불했다.
잠깐 맛봤던 집안의 평화는 다시 깨어졌다.
다행히 예비고사는 턱걸이로 합격했지만 대학은 포기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럴수록 나는 집을 떠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졌다.
오기로 서울의 한 예술대학에 실기시험을 치렀다.
합격했다는 소식에도 마음은 혼란스러웠다.이젠 정말 지긋지긋한 집을
떠나게 됐지만 마음 한구석이 아파왔다.
서울특별시 성북구 보문동.수돗가가 있는 마당을 삥 둘러가며 10개가
넘는 방이 있던 집의 맨 구석방에 나만의 공간을 만들었다.
앉은뱅이 책상에 비키니 옷장이 전 재산이었다.
가끔 엄마와 동생들이 보고싶었지만 견딜 만했다.
서울에서의 대학생활은 생각보다 재미가 없었다.
여유있어 보이는 동기들의 모습을 보면 나는 오지 말아야 할 곳에 온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오히려 비슷한 처지에 있는 자취방 사람들이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옆방에 사는 여학생은 나와 동갑이었다.
미대 지망생이었지만 가정형편 때문에 대학은 못 가고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다.
한번은 몸이 아파 입맛은 없고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었다.
세수도 하지 않은 얼굴로 구멍가게에 아이스크림을 사러 갔다.
그때 청바지에 청재킷을 입은 남자가 내게 길을 물었다.
같은 집에 사는 사람을 찾아온 것 같았다.
아는 대로 가르쳐줬는데 그 사람이 또 물었다.
“저기, 혹시 어디 아프세요?”“네?”엉겁결에 되물으면서 아이스크림도
못 사고 다시 방으로 돌아와버렸다.
어느 방 사람인지 모를 아주머니가 문을 두드렸다.
“우리 삼촌에게 길 가르쳐줘 고마워요.어디 아픈것 같다던데 괜찮아요?”
“몸살인가 봐요.아이스크림 사러 가는 길이었어요”
그 아주머니는 쏜살같이 나가더니 삼촌이 사준 것이라며 아이스크림을
10개나 가져다줬다.
왠지 기분도 좋고 갈증도 나서 10개를 그 자리에서 다 먹었다.
“정말 잘 먹네?”
삼촌이라는 사람은 아주머니 남편의 후배였다.
그뒤부터 나도 모르게 그 후배라는 사람이 기다려졌다.
나를 바라보고 씽긋 웃던 그 모습이 자꾸 생각났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가끔씩 그 남자가 오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다림에 며칠씩
아르바이트로 다니던 학원도 빠졌다.
내가 학원에 가는 날이면 그가 다녀갔다는 소릴 들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때 깡패였던 나는 그때도 남자친구를 사귀었다.
처음 보는 남자 앞에서도 주눅들지 않았었다.
그런 내가 그냥 말 몇마디 스쳐간 사람을 학원까지 빠져가며 기다리
다니 왜 그랬는지 정말 모를 일이다.
그 사람의 이름은 태욱이라고 했다.젊은 나이에 독립해자전거와
오토바이 중간도매업을 한다고 했다.
나는 잘 길들여진 망아지처럼 그를 따랐다.
원래 식성이 까다로운 편이어서 생선을싫어했는데 태욱씨가 사주는
동태찌개는 그렇게 맛이 있었다.
그도 거의 매일 자취집에 왔다.
특별한 볼 일이 있어서 오는 게 아니라 나를 보러 오는것이라 믿었다.
첫사랑은 열병과 같다고 했던가.
그를 알고난 뒤부터 나는 엄마나 동생들을 생각하며 마음 아파할 겨를
이 없었다. 남의 옷을 걸친 것 같은 학교생활도 흥미가 없었다.
이대로 그와 결혼해 살고 싶었다.
여름방학 때 잠시 원주에 내려갔다.
동생은 학교를 휴학하고 집안살림을 도맡고 있었다.
아빠의 바람기는 더욱 심해져 집을 돌보지 않았고 엄마는 고혈압에
시달리고 있었다.서울까지 오는 고속버스 안에서 내내 울었다.
어딘가 기대고 의지할 곳이 필요했던 나는 그에게 더 매달렸다.
방학이 끝났지만 2학기 등록은 포기했다.
우리는 왕십리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를 위해 밥짓고 빨래하고 그를 기다리고 같이 저녁을 먹는 것이
행복했다.
그 첫사랑이 나를 범법자로 만들 줄은 그때까지 까맣게 몰랐다.
태욱씨는 일정하지 않은 시간에 나갔다가 들어왔다.
며칠씩 집에 들어오지 못하는 날도 있었고 며칠을 집에만 있는
때도 있었다.
한번은 그가 사흘동안이나 아무 연락도 없이 집에 들오지 않았다.
견디다 못해 찾아나섰지만 어디로 가서 누구를 찾아야 할지 막막했다.
막상 이런 일이 닥치고 보니 내가 그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없었다.
친구들 연락처 하나 알 수 없었다.
다음날 오후 그가 남대문경찰서에 있다는 소식이 왔다.
이런 기분은 맑은 하늘에 날벼락을 맞는다고 표현해야 할까.
특수절도 및 장물취득이라는 죄목이었다.
담당 형사를 이틀동안 따라다니며 사정해 겨우 특별 면회를 했다.
그는 열흘만에 증거불충분으로 집에 돌아왔다.
비로소 그는 과거를 털어놓았다.
고아였던 그는 우범지대를 떠돌며 자랐다고 했다.
그의 어린 시절 얘기에 가슴이 아팠다.
그의 아픔을 싸매주고 덮어주고 싶었다.
그가 하는 일은 장물로 나온 오토바이를 처분하는 것이었다.
같은 일을 하는 친구들이 경찰에 잡혀가는 일이 자주 있었다.
조금만 더 돈을 모으면 이 일을 그만두고 조그마한 가게라도 시작할
것이라고 했지만 불안한 마음은 가시질 않았다.
어느날 새벽 그도 돌아오지 않았는데 형사들이 들이닥쳤다.
다짜고짜 설명도 없이 방안을 구석구석 뒤졌다.
중년쯤 돼보이는 형사가 내게 말했다.
“아직 어린 것같아 하는 얘긴데 아가씨야 정신 차려.
아직 장래가 구만리 같은데 왜 이런 놈과 어울려 살고 있어?”
이번엔 지난번과 분위기가 달랐다.
공범들이 함께 잡혀 빠져 나올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했다.
서대문구치소까지 버스를 타고 면회를 다녔다.
한동안 얼굴도 보이지 않던 그의 동료가 어느날 집에 찾아왔다.
이런저런 얘기끝에 그는 슬며시 용건을 말했다.
태욱씨가 잡혀갔기 때문에 그 밑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모두
굶어죽을 형편이라며 태욱씨의 거래처를 알려달라고 간청했다.
그의 거래처는 내가 알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고민끝에 다음날 나 혼자 거래처를 찾아갔다.
뜻밖에도 어느 아주머니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원래는 아저씨가 일을 하다가 경찰에 체포되자 부인이 그 일을 맡아
하고 있고 태욱씨와는 남매처럼 지낸다고 했다.
내가 사정을 털어놓자 그 아주머니는 “꼭 해야겠다면 네가 해라”
고 했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어떻게…”“겁이 나면 못 하는 일이야”
“겁이 나는 게 아니라 태욱씨가 알면 혼날텐데…”
나도 양식이 떨어졌고 옥바라지를 해야 할 형편이라 거부할 수 없었다.
일꾼들이 어느 장소에 물건을 갖다 둔 다음 내게 연락을 했다.
그러면 나는 아주머니에게 연락해주고 돈을 받아 일꾼들에게 전해주는
역할이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가슴이 뛰었다.두번쯤 심부름을 했을까?
어느날 쌀을 씻고 있는데 누가 찾아왔다.“계십니까?”
얼굴이 익은 형사였다.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나도 형사도 말을 잇지 못했다.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형사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날이 몹시 추워.거긴 더 춥다구.따뜻한 옷이나 챙겨 입어”
내 생애 처음으로 경찰서 유치장에 들어간 것이다.
특수범죄단체 조직’‘장물 취득’.내게는 이런 무시무시한 죄명이
붙여졌다.
엄마가 원주에서 달려오셨다.
검사에게 조사를 받기 위해 움직일 때마다 길목을 지키고 계시다
통곡하셨다. 포승에 줄줄이 굴비처럼 엮여 오가며 가끔 태욱씨와
마주치기도 했다.한번은 공범들이 모두 검사실에서 만났다.
그는 검사실에서 난동을 부렸다.
“저 여자를 내보내주시오!내가 다 갖고 가겠소”소리를 질러대는
그를 교도관들이 수갑을 채워 끌고나갔다.
구치소에선 15명이 한 방을 썼다.
`봉사’ 마크를 단 40대쯤 되어보이는 아주머니가 방장이었다.
신고식이 있다는 말에 잔뜩 긴장했지만 헛소문이었다.
다들 친절하게 맞아줬다.
일요일엔 한 방에서 5명씩 교회에 갈 사람을 신청받았다.
절차가 복잡해서 안 가겠다는 사람 덕분에 신참인 내가 갈 수 있었다.
찬송가가 내 마음을 울렸다.
“어서 돌아 오오/어서 돌아만 오오/지은 죄가 아무리 무겁고
크기로/주 어찌 못 감당하고 못 받으시리요/우리 주의 넓은
가슴은/하늘보다 넓고 넓어”가사가 구구절절 우리 엄마의 마음을
대신 표현해놓은 것 같아서 계속 흐느꼈다.
그해 성탄절을 그곳에서 보내고 흰눈이 펑펑 내리던 날 나는 엄마의
품으로 돌아왔다.정상이 참작돼 기소유예로 나왔다.
엄마를 따라 원주로 내려온 나는 무용학원을 시작했다.
학원을 운영하면서 태욱씨의 옥바라지를 했다.
그가 수감된 김천교도소를 찾아가 작은 여관방에서 하룻밤을
잔 뒤 아침 일찍 서둘러 면회를 하고 서울에 가서 학원에 필요한
소도구를 산 뒤 원주에 도착하면 한밤중이었다.
2년 가까이 그런 생활이 되풀이됐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조금씩 바뀌어져 갔다.우선 말수가 적어졌다.
이곳저곳에서 청혼이 들어오고 학원이 순조롭게 운영되면서 내 마음이
흔들렸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조금씩 성숙해져가는 것을 느꼈다.
그런 내가 그의 눈에는 마음이 변했다거나 거만하게 비춰졌을 것이다.
때로는 면회가 시작해서 마칠 때까지 아무 말 없이 얼굴만 바라보고
서있다가 오기도 했다.
다시 거리에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퍼지던 겨울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김천과 서울을 거쳐 밤늦게 학원에 도착했다.
한밤중인데도 학원에는 온통 불이 밝혀져 있었다.
학원 문을 열자 여러 켤레의 남자 구두가 있었다.
사무실에서는 여러 명이 큰소리로 얘기하느라 내 인기척도 못
느끼고 있었다.
내 사무실이니 노크도 없이 문을 열었다.
담배연기가 자욱한 가운데 젊은 남자들이 앉아 있었다.
무용학원 직원인 우선생이 그들과 얘기하고 있었다.
은근히 화가 나서 아무 말 없이 창문을 열어 담배연기를 쫓아냈다.
우선생이 그들은 근처 공군부대에 근무하는 현역 장교라고 소개했다.
그들은 얼마 남지 않은 연말 대대파티를 준비하고 있는데 행사를 위해
탈춤을 배우고 싶어 찾아왔다고 했다.
정중하게 도움을 요청하는 모습을 보니 거칠게 굴었던 것이
미안해 성의껏 돕겠다고 약속했다.그것이 새로운 만남의 시작이었다.
매일 학원에 와서 연습하던 장교들 가운데 남대위는 여자처럼 부드러운
성격에 인상도 성격도 참 좋은 사람이었다.
그는 연말 대대파티에 나를 파트너로 초대했다.
탈춤을 선보인 대대파티 날.
기분좋게 술에 취한 남대위는 갑자기 앞으로 나와 마이크를 잡고
“안선생님과 결혼하기로 했다”고 깜짝 발표를 했다.
나에게는 사전에 한 마디도 없었던 돌출행동이었다.
부대 대대장님과 파티에 참석한 학원 원생들이 모두 축하해주었다.
황당했지만 그렇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공연을 돕기 위해 오셨던 엄마는 오래 놀다오라는 듯 원생들을
데리고 먼저 가셨다.
파티가 끝난 뒤 준비해준 지프로 집에 돌아오면서 가슴이 내내 뛰었다.
엄마도 채근했다.태욱씨를 잊고 남대위와 맺어지길 바랐을 것이다.
엄마는 내가 태욱씨 면회 가는 것을 막기 시작했다.
내놓고 가지 말라고 하지는 않으셨지만 이일 저일을 만드시면서
못 가도록 했다.
그가 출감하던 날 교육청의 학원검열이 있어 김천에 가지 못했다.
며칠이 더 지나서야 서울에서 만난 우리는 너무도 서먹서먹했다.
“이젠 됐어.그동안 너무 고생을 시켜서 뭐라고 말해야 할지.
정말 미안하다.하고싶은 일이 있으면 마음가는 대로 해.나는 괜찮아”
그렇게 첫사랑은 끝이 났다.
한동안 나 자신이 싫어지고 우울해졌다.
남대위와의 관계는 급진전했다.
나는 몇번이나 내 지난 이야기를 털어놓으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그는 입을 막았다.
하루는 시골에 있는 그의 집에 인사를 드리러 가자고 했다.
사전에 아무 연락도 없이,그것도 혼자도 아니고 여자까지 데리고
나타난 아들 때문에 식구들은 당황스러워했다.
아버님은 누워계셔서 어머님께만 절을 하고 앉았다.
작은 방이 꽉 차버렸다.
그가 왜 그렇게 술을 많이 먹는지 알 것 같았다.
종가의 장손,5남매의 장남,남동생 1명에 여동생 3명.시장 어귀까지
따라나오는 큰여동생의 눈에 눈물이 어른거리는 것 같았다.
원주까지 오는 길 내내 그는 말이 없었다.
터미널에 도착했을 때 남대위는 말했다. “이제 모든 것을 다 보여
줬습니다.충분히 생각하고 후회없는 결정을 하세요”
그의 말이 내 마음을 더 아프게 했다.
“나 괜찮아요.그리고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어요.
처음부터 당신을 사랑했지 당신의 배경에는 관심이 없었어요”
그해 6월 우리는 결혼했다.첫 결혼이었다.
결혼식 전날부터 눈물이 나왔다.식장에서도 막내동생이 불러주는
축가를 들으며 또 울었다.
시댁 식구들의 눈총을 받을 만큼 내내 울었다.유난히 아픔이 많았던
지난 시절들,영원히 묻어야 할 사연들,영원히 갚아야 할 엄마의
사랑이 아프고 감사해서 울었다.
신혼여행을 다녀온 뒤부터 월급날까지는 가족들이 전해준 축하금과
남은 여행경비로 생활을 꾸려야 했다.
날마다 선배 동기 후배들을 위해 술상을 차리기에 바쁜 나날을
보냈다.
첫달 월급은 차 떼고 포 떼고 나니 7만원이 남았다.
새댁 처지에 뭐라고 할 수도 없고 남편이 무안해할까봐 오히려 웃을
수밖에 없었다.
신혼살림을 궁금해하시는 시어머님께서 오셨다.
불고기와 고깃국으로 대접하고 가실 때 차비를 조금 드리고 나니
며칠만에 7만원을 다 썼다.
가진 돈이 다 떨어져 며칠동안 고민하다가 엄마에게 털어놨다.
엄마는 오히려 나를 위로하시면서 용돈도 주고 생활비도 가끔 도와
줬다.결혼한지 3개월만에 우리는 관사로 이사했다.
내 뱃속에는 3개월 된 아기가 자라고 있었다.
불경기여서 그랬는지 그 당시 주부들이 하던 계가 깨지는 일이 많아
사회문제가 됐다.
원주에서도 이곳을 발칵 뒤집을 만큼 큰 계들이 깨져 연일 매스컴에
보도됐다.
엄마가 계주로 있던 계들도 깨지기 시작했다.
어제까지 좋기만 하던 엄마의 친구들도,내가 가르치던 원생 엄마들도,
엄마의 제자를 자칭했던 순박한 사람들도 한순간에 모두 사나운
사람들로 변해버렸다.
돈 내놓으라고 아우성을 치며 달려드는 그분들에게도 가슴아픈 사연이
많았다.
입에 거품을 문 채 헐레벌떡 달려와 쓰러지는 사람도 있었고 남편
모르게 맡겼던 돈을 잃어 쫓겨나게 된 사람도 있었다.
10년간 모은 돈을 모두 잃은 사람도 있었다.
내게 찾아와 대신 차용증서를 써달라고 다그치는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나는 남편이 친정일을 알까 봐 전전긍긍하며 그들을 달래고 사정했다.
엎친데 덮친격이랄까 시어머님이 오토바이에 치이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오른쪽 다리와 엉덩이 사이를 잇는 뼈가 깨져버렸고 왼쪽 팔도 부러졌다.
남편은 조종복 차림으로 병원에 달려왔다.
어떻게 이런 참혹한 일이 한꺼번에 터질수 있는 걸까?
수술실 밖에서 남편의 손을 잡고 기다리던 나는 병원 건물이 빙글빙글
도는 듯한 현기증을 느꼈다.
수술이 끝나고 온 몸에 깁스를 한 어머님이 실려 나오셨다.
어렴풋이 마취에서 깨어나던 어머님은 나를 보는 순간 얼굴을 휙
돌리셨다.
문득 내게 또 다른 시련이 닥쳐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엄마는 무용학원,아파트,운영하던 카페를 모두 처분해 빚잔치를 했다.
나는 남편몰래 돈을 빌려 무용학원 간판을 다시 올리도록 했다.
엄마는 더 이상 돈거래를 할 수 없었다.
장교부인인 내 보증이 있어야만 작은 돈이라도 빌릴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이 불행의 씨앗이 됐다.
나도 남편의 월급만으로 살림을 꾸려가기 힘들었는데 엄마는 몇 달에
한번씩 내게 보증을 서달라고 했다.
이듬해 딸이 태어났고 남편은 소령으로 진급했다.
아기는 우리 부부에게 더할 수 없는 행복을 가져다줬지만 남편
챙기고 아기 돌보는 데도 시간은 늘 모자라고 돈은 늘 부족했다.
씻고 벗을 단 두 벌의 홈웨어로 임부복을 대신했고 양말 한짝도 내
것은 사보지 못했다.
친정에는 월급의 일부를 매월 보내줘야 동생들이 굶지 않았다.
그것도 남편에게는 곗돈이라고 둘러댔다.
관사 내에는 이런 문제를 터놓고 얘기할 만한 동기생 부인한 사람도
없었다.
오히려 잘 안 어울린다는 이유로 건방지다는 오해까지 받았지만
내게는 그분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여유가 전혀 없었다.
친정이 어려워지면서 시어머님으로부터 냉대도 받았다.
그런 일이 자존심을 상하게 했는지 나는 쓸데없는 허영을 부렸다.
남편이 출장가면 미리 엄마에게 돈을 줘 사위에게 용돈을 주게 하고
돌 때는 금팔찌를 엄마에게 전해주고 받았다.
그런 일들이 내 마음을 서서히 죄어왔다.
엄마는 친구의 도움으로 원주 시내에 조그마한 찻집을 개업하셨다.
나는 얼마 뒤 아들을 낳았다.
아들이 막 백일을 지날 무렵 남편이 서울로 전근 명령을 받았다.
눈앞이 캄캄했다.남편 모르게 엄마를 위해 보증을 선 데다 딸의
입원비,친정의 생활비 때문에 관사내에서 빚을 낸 곳도 여러 집인데
어느 날 갑자기 떠나야 하다니.
그렇다고 군인의 아내가 남편을 따라 나서지 않을 수도 없었다.
우리가 서울로 떠나면 빚쟁이들이 사기를 쳤다고 하지 않을지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엄마와 함께 돈을 빌리기 위해 여기저기 뛰어다녔다.
턱없이 비싼 이자였지만 이번엔 엄마가 보증을 서고 빌렸다.
급한 불은 껐지만 이대로 방치하다가는 불어나는 빚 때문에 큰일날 것
같았다.
집 근처에 무용학원을 다시 열기로 했다.지하가 넓고 임차료도 쌌다.
120평을 반으로 나눠 반은 학원을 하고 반은 찻집을 만들어 여동생과
함께 하기로 했다.
내부공사를 위해 은행에서 800만원을 빌렸지만 그것으론 인건비도 안돼
결국 3000만원을 또 관사내에서 끌어다 썼다.
찻집을 먼저 개업하고 학원은 조교까지 구해놓고 교육청의 허가를
기다렸다.
소문이 퍼져 아주머니들이 에어로빅을 배우겠다고 학원을 찾아왔다.
이제 조금만 기다리면 어려운 일은 다 끝날 것 같았다.
개업을 위해 엄마가 서울로 오셨다.그것이 돌이킬 수 없는 실수가 됐다.
삽시간에 원주에 엉뚱한 소문이 퍼졌다.
“빚잔치하면서 숨겨둔 돈으로 서울에다 빌딩 짓고 찻집을 차렸다”
빚쟁이들이 서울로 뛰어왔다.찻집과 학원 바닥에 드러눕고
남편의 직장인 국방부까지 찾아가겠다고 날뛰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학원허가까지 나지 않았다.
지하이기 때문에 절대 허가를 내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젠 모든 것이 두려워졌다.집주인과 빚쟁이들도 문제지만 남편에게
이런 믿을 수 없는 일들을 다 털어놓을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용서받을 길이 없었다.
약국마다 다니며 수면제를 사모았다.
수면제 한주먹을 털어넣고 녹음기를 틀었다.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못난 아내를 용서해주세요.
당신과 아이들을 두고 저는 떠납니다”
침대에 누우니 천장이 나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가물가물 의식의 끝자락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내가 하는 헛소리였다.“나 살아난 거야? 안 죽었어?”
응급실 천장의 큰 전등이 눈부셨다.
엄마는 따뜻한 손으로 내 입을 막았다.
약기운이 풀리지 않은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왔다.
남편은 차가운 기운이 섞인 눈빛으로 말했다.
“이제 그만 깨지.왜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들어? 이렇게 한다고
해결될 수 있는 일이야?”
차라리 죽어버리지 왜 살아났느냐고 질책하는 것 같았다.
목욕탕에 주저앉아 면도칼로 팔을 그었지만 온몸에 기운이 빠져
살갗만 베고 있었다.
결국 남편은 군복을 벗고 퇴직금으로 관사내의 빚을 정리했다.
시어머니가 집에 오신 날 남편은 나를 심하게 때렸다.
시어머니는 문 앞에서 더 때리라고 악을 쓰셨다.
나는 아이들을 업은 채 무작정 집을 나왔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먼 곳으로 가리라…”
여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내 계획을 말했다.
여동생은 두말도 안 하고 옷가지를 챙겨 뛰어나왔다.
우리는 제주도로 갔다.
그곳에 싼 방을 얻었다. 집주인 아주머니는
“아이를 데리고 살려면 힘들 텐데 일자리는 있어요?”하고 물었다.
대답 대신 눈물만 주루룩 흘렸다.
아주머니는 “사는 것이 그런 거지.산 입에 거미줄은 안 친다우”하며
나를 위로해줬다.
한여름이라 짧은 소매끝에 드러난 멍을 보고 내게 무슨 사연이 있을
거라 짐작했는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아주머니의 소개로 호텔 하우스키퍼 일을 구했다.
매일 밤 객실에서 걷어온 침대 시트와 수건들을 세탁기에 넣어 빨고
차곡차곡 정리해 다음날 직원들이 출근하기 전까지 층마다 나눠놓는
일이었다.
낮에는 무용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었다.
오후에는 학원에 나가고 저녁때 잠깐 아이들과 놀아준 뒤 밤이면
호텔에 가서 12시간씩 근무하는 생활이었다.
그렇게 서너달을 보냈을 때쯤 남편에게서 연락이 왔다.
부산 해운대에 있는 한 호텔에서 만났다.
아이들은 아빠품으로 파고들었다.
남편은 서둘러 아이들을 동생과 함께 다른 곳으로 보냈다.
남편의 행동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우리는 하루만에 이혼 절차를 끝냈다.
시골 가정법원 담밑에서 서로 어색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결혼한지 4년3개월만이었다.
서울에 갈 차비를 빼고 비상금을 모두 남편에게 털어줬다.
제주도의 짐을 정리하고 서울로 가기 위해 다시 공항에 갔다가
나는 경찰에 체포됐다.
남편이 사기죄로 고소해 전국에 지명수배돼 있었던 것이다.
사기라는 죄명도 싫고 남편이 고소인이라는 사실도 창피했지만
이렇게라도 남편의 분이 풀린다면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다른 사기범들과 같은 감방에 들어갔다.
대부분의 사람은 여기서 고생이 끝나면 돌아갈 집이 있고 남편과
자식이 면회를 오지만 나는 혼자였다.
수감된지 한달쯤 됐을 때 엑스선 사진을 찍었다.
내게 결핵이 있다는 판정이 나왔다.
결핵환자만 격리 수감시키는 결핵방으로 옮겨졌다.
갑자기 사형 판정이라도 받은 것 같았다.
교도관들도 오기를 꺼려하는 결핵방은 더 추웠다.
그곳에서 교회에 갔다.
한동안 멈췄던 눈물이 다시 마음과 눈에 괴며 뜻모를 감동과
그리움에 잃었던 기억을 찾아낸 사람처럼 들뜨고 흥분됐다.
교회에서 찬송가를 부르며 박수를 치자 7년전 꼭 이맘때쯤 이런
곳에서 느꼈던 그 감정이 되살아났다.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외웠고 2주 뒤 성탄절에 목사님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앞으로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겠습니다”
나는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
더 이상 원망도 슬픔도 외로움도 없었다.
선고 공판 전날 밤 나는 꿈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남편에게 빌었다.
“용서해주세요.살려주세요.나를 버리지 마세요”재판을 위해
구치소 문을 나가는 나에게 누군가 말했다.
“뒤돌아보지 말고 그대로 나가라.돌아보면 다시 오게 된다.
곧장 나가라”
정말 이대로 나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재판장은 나의 이력을 살펴보더니 “나가서 벌어 갚으면서 사시오”
라며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그 자리에 앉아 눈물을 펑펑 쏟았다.
구치소의 긴 복도를 지나 사복으로 바꾸어 입고 나오니 엄마가 두부를
들고 서계셨다.엄마의 눈에도 눈물이 방울져 있었다.
1987년 1월25일 오후 7시25분.
나는 11시간의 비행 끝에 미국 로스앤젤레스공항에 도착했다.
만약 내가 이 비행기를 타지 못했다면 나는 서울의 한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었을 것이다.
눈덩이처럼 불어난 빚은 숨막힐 듯 나를 죄어왔다.
남편도 언제 나를 고소할지 안심할 수 없었다.
살아보려고 발버둥쳤지만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랑하는 아들과 딸을 두고 난 무작정 미국으로 왔다.
어쩌면 살아서는 못 돌아가는 것은 아닌지 하는 불안감도 들었다.
샌프란시스코로 옮겨 먼저 이민했던 친구 영희를 만났다.
공항에서부터 나를 안내해준 미스터 리에게 일자리를 부탁했다.
조카와 그가 살고 있는 집에 얹혀 살게 됐다.
한달 체류기간은 금세 지나버렸다.
미스터 리는 영주권을 만들어주겠다고 서둘렀지만 불법 체류 상태
에서는 불가능했다.
처음에는 동정심으로 나를 보살펴주던 그는 차츰 내게 부담을 줬다.
자기와 결혼해달라고 했다.매일 힘겨운 싸움이 이어졌다.
하루는 크게 다툰 끝에 미스터 리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 한참
동안 영어로 말을 하더니 야수 같은 웃음을 지으며 비아냥거렸다.
“이민국에 신고했으니 곧 잡으러 올 거야”입안에 가득 괴어 있던
피를 그의 얼굴에 뱉어주고 나는 다시 미국땅에서 떠돌이가 됐다.
영희와 함께 달아난 곳은 뉴욕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낮에는 한국식당에서,저녁에는 야채가게와 빌딩 청소
일을 했다.
어깨뼈가 부서지도록 일했다.
영희는 뉴욕이 무섭다며 자신이 처음 발을 디뎠던 하와이로 떠났다.
뉴욕의 월 150달러짜리 단칸방에서 1년을 그렇게 살았다.
얼굴은 아직 20대인데 손은 50대처럼 거칠어졌다.
어느날 영희가 화려한 모습을 하고 찾아왔다.
“미련한 곰아,18세 순정의 처녀도 아닌데 돈 때문에 왔으면 빨리 돈
벌어가지고 돌아가면 될 것을 왜 이렇게 살고있니?”
영희의 질책은 삶에 지쳐 있던 나에게 감미로운 멜로디였다.
바텐더 드레서로 일자리를 바꿨다.
손님이 원하는 술을 만들어주고 약간의 말상대만 해줘도 2∼3일 일당
을 벌 수 있었다.
땀범벅이 된 채 일하는 대신 음악과 화려한 조명속에서 쉽고 빠르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아파트도 스튜디오라 불리는 월 650달러짜리 미국식 원룸으로 옮겼다.
젊은 한국 여자가 불법 체류자의 신분으로 뉴욕에서 혼자 살고 있으니
갖가지 유혹과 압력이 계속됐다.
바에서 음악을 연주하던 영준씨는 편하고 부담없이 내게 다가왔다.
하와이에서 잠깐 들른 영희는 나에게
“영준씨 조심해라.사람은 좋은 것 같은데 너보는 시선이 다르더라.
어쩐지 개운치 않아”라며 충고해줬다.
그때 영호씨를 알게 됐다.
말끔한 인상에 부유해보이던 그는 던킨도넛 가게를 여기저기 7개나
가지고 있다고 했다.그는 내게 새로 인수한 가게를 소개해줬다.
딸만 셋을 둔 유부남이었지만 그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날 영준씨가 아파트로 찾아왔다.
질투에 눈먼 그는 내게 달려들어 목을 졸랐다.
내가 정신을 잃었다가 눈을 뜨니 그는 눈물을 흘리며 미안하다고
말하고 돌아갔다.
한번은 영희와 전화 통화를 하는데 어디선가 ‘탁탁탁’ 하는 잡음이
들렸다.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가보니 소파 밑에 박스가 놓여 있었다.
소형녹음기가 연결된 도청기였다
나는 뉴욕을 떠나 영희가 있는 하와이로 갔다.
이미 내 몸과 마음은 만신창이가 돼 있었다.
한국에서 이어 미국에서도 몇차례 자살을 시도해 내 오른손목에는
흉한 칼자국이 있었다.
식당일을 하면서도 무거운 그릇을 들지 못할 정도였다.
그곳에서 한 남자를 만났다.
사업가라는 사람이었는데 영희와 나를 친절하게 대해줬다.
영희는 그가 대단한 사람이라고만 말했다.
어느날 그가 나에게 다급한 소리로 전화를 했다.
급한 일로 미국 본토를 다녀와야 하는데 그동안 가방 하나를 보관
해달라는 것이었다.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에 선뜻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다.
2∼3일이면 온다는 그는 일주일이 지나도록 연락이 없었다.
영희는 그가 하와이 마약 조직의 보스라는 놀라운 사실을 말해줬다.
하지만 두려움보다 연락없는 그에 대한 걱정이 먼저 앞섰다.
그는 9일만에 연락을 해왔다.
내게 맡겨둔 가방 안에는 달러가 가득 있었다.
그는 내 핸드백에 돈을 가득 넣어 주었다.
그는 내 영주권과 집,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겠다고 했다.
달디단 유혹이었지만 그것이 나를 수렁으로 밀어넣는 첫걸음이었다.
그는 뉴욕의 영준씨가 가져간 내 여권을 찾아주겠다고 했다.
나는 뉴욕으로 가서 그가 소개해준 미스터 안을 만났다.
미스터안은 영준씨가 갖고 있던 내 여권을 찾아줬다.
그 과정에서 영준씨는 피가 흐르도록 폭행을 당했다.
1989년 4월 5일. 나는 영주권을 얻기 위해 하와이 파라다이스 파크
에서 위장 결혼을 했다.
결혼식의 증인은 영희와 영희 남편이 서 줬다.
세계적인 전문의에게서 몇차례 내 손목을 수술 받았다.
자동차도 선물로 받았다.
하와이에 300개가 넘는 한국인 소유의 바 중 하나가 내 소유가 됐다.
한국의 어머니와 동생들에게도 넉넉한 돈을 보내줄 수 있었다.
모든 것이 꿈만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수렁 속으로 조금씩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마약 조직 보스인 그는 내 아파트를 창고와 접선 장소로 사용했다.
100kg이 넘는 마약을 내 옷장 속에 숨겨놓고 내다 팔았다.
그것을 보관한 죄만으로도 종신형이 되는 줄은 나중에 알게 됐다.
돈 세탁을 위해 하와이 곳곳의 은행과 마을금고 같은 금융기관들을
샅샅이 훑고 다녔다.
나는 그의 로보트가 돼 갔다.어느날 그는 나에게 어이없는 청을 했다.
뉴욕에 가서 갱단을 사오라고 했다.
누군가를 ‘손봐줘야’한다는 것이었다.
소름이 끼쳤다.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잡아먹는다던가.
이 일이 끝나면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래도 뉴욕으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어렵지않게 한국인 폭력조직인KP(Korean Power)를 만날 수 있었다.
뉴욕에서 1주일동안 머무르면서 KP와 나는 무척 친해졌다.
그쪽에서 사람을 보내 나를 경호해주기까지 했다.
“누님에 대한 느낌이 퍽 좋습니다.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누님이라고 생각하고 도와드리겠습니다”
하와이는 불경기였지만 그럴수록 마약경기는 더 호황인 것 같았다.
나는 돈냄새가 지긋지긋할 정도로 심부름을 해야 했다.
그런 와중에 나도 마약에 서서히 중독돼 갔다.
환각 상태에서 고속도로 운전까지 할 정도였다.
마침내 하와이에 KP대원 3명이 왔다.
보스는 내게 45구경 리벌버 권총을 줬다.
나는 디데이를 하루이틀 미루면서 안절부절 못했다.
마약에 취해 있던 어느날 아침이었다.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KP였다.“누님,큰일났어요.그쪽에서 우릴 알아보고 어젯밤 50명이
달려들었어요”다행히 죽진 않았지만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분노한 KP는 이번엔 28명을 보내왔다.
싸움은 하와이와 뉴욕의 갱단 대결로 번져갔다.
보스는 내게 10만달러와 총 7자루를 쥐어주고는 한국에 가기 위해
LA로 떠났다.
마침내 그날이 왔다.나는 KP단원과 호텔에서 점심을 먹고 나왔다.
내 차 뒤로는 하얀색 링컨 컨티넨털이 에스코트했다.
호텔 정문을 나와 와이키키 쪽으로 좌회전하려는 순간 갑자기 길가
에서 차를 세우라는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다.
총을 들고 차를 따라오면서 어서 세우라고 했다.
백미러를 보니 뒤차에 있던 KP단원은 이미 길바닥에 끌려나온 채
수갑을 차고 있었다.
차를 정지시킨 인원들은 생각보다 훨씬 많았다.
모두 총을 들고 있었다.얼마뒤 정복 경찰관들이 사이렌을 울려대며
여기저기서 모여들었다.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순찰차들이 모여들었다.
차에서 내린 나도 양팔을 뒤로 한 채 수갑을 찼다.
나는 주저앉고 말았다.
어느새 기자들이 몰려와 펑펑 플래시를 터뜨렸다.
내가 나서서 살인을 저지르지 않아도 돼 오히려 다행이란 생각마저
들었지만 트렁크에 실려 있는 총들이 걱정됐다.
누군가의 신고로 호놀룰루 경찰과 마약대책반(DEA) 90여명이 출동한
것 이었다.
내 차를 통해 매일 100㎏ 이상의 마약이 운반된다,
뉴욕 갱스터들이 마약공장을 세우기 위해 도착했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신문마다 대문짝만하게 내 사진이 실렸다.
다행히 KP의 어린 단원들은 호텔 방이나 차에서 마약이 전혀 발견되지
않아 풀려날 수 있었다.
나도 달아난 보스를 찾는데 협조하기로 하고 조건부로 풀려났다.
나는 경찰의 눈을 피해 LA로 도망갔다.
그곳에서 보스를 만났지만 그의 말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마약에 도박까지 손대면서 LA에서 라스베이거스로 떠돌아다녔다.
그러다 결국 DEA에 다시 잡혔다.
미국의 구치소에 다시 들어가는 순간은 내 인생 최악의 순간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삶이 시작된 출발점이기도 했다.
하나님께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이제 막 서른을 넘은 나이에 벌써 3번째 감옥에 온 것이다.
내가 다시 나간다 해도 가족에게 아픔만 될 것 같았다.
늘 감옥에 와서만 하나님을 찾는 내 모습도 초라하게 느껴졌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실수만 거듭하느니 스스로 당신 곁으로 가는게
낫겠다는 심정이 됐다.
미국에 와있던 동생 성욱이가 눈물로 얼룩진 편지를 보내왔고
국제전화로 엄마와도 통화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게는 모든 것이 끝났다는 생각뿐이었다.
교도관에게 잠이 오지 않는다며 수면제를 부탁했다.
하루에 한 알만 줄 수 있다고 했다.
죽음을 생각하며 수면제를 모았다.
동생에게 남길 마지막 편지를 쓰려고 하니 눈물이 나왔다.
그리운 얼굴들이 차례로 뇌리를 스쳤다.
수면제 50알을 입에 털어넣었다.
깨어났다 다시 잠속으로 빠져들고 다시 지독한 한기를 느끼며
깨어났다가 다시 정신을 잃었다.
꿈인지 환상인지 어디선가 따뜻한 음성이 들려왔다.
“사랑하는 딸아,네가 나를 사랑하듯이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차가운 감옥에서 무언가 나를 덮어주고 체온을 지켜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캔 유 히어 미(Can you hear me)?”
나의 몸을 흔드는 교도관의 목소리가 꿈인 것 같았다.
내 귀에는 눈물이 괴어 있었다.
아,다시 산 것인가.다시 병원 응급실에서 감옥으로 실려와 손발이
묶인 채 꼬박 3일을 보냈다.
6일동안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홀(Hall)이란 독방에 들어가 있다가
나왔다. 위장약을 가져다준 약사는 나를 위해 기도해주겠다고 했다.
그의 말에 또 눈물이 흘렀다.어느날 하와이에서 공무원들이 찾아왔다.
불법무기인 총 7자루와 마약 판매·운반·은닉에 흡연까지 내가 가진
혐의는 어떤 유능한 변호사라도 최소한 40년 형량에 보석도 불가능
하다고 말했다.
그들이 다녀간 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잠이 오지 않아 찬송가를 뒤적거렸다.
“마음이 지쳐서 기도할 수 없고/눈물이 빗물처럼 흘러내릴 때/
주님은 아시네 당신의 약함을/ 사랑으로 돌봐주시네/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네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그래,변호사를 선임하는 것보다 기도하는 것이 더 쉽다”
내 마음속에는 새로운 믿음이 생겼다.
마음 깊은 곳에서 회개와 감사가 나왔다.
저 높다란 담 밖에서 살던 33년은 그토록 힘들었는데 이제 새로운
시간이 주어진다면 최선을 다해 살고 싶었다.
죽고 싶던 마음은 어느새 사라져버렸다.
나는 재판 한번 받아보지 못하고 이곳저곳의 구치소를 떠돌았다.
이감될 때는 영화 빠삐용에서 본 것처럼 두 발목을 쇠사슬로 묶었다.
오른 다리에는 석고판을 감고 전신에 수갑을 채워 절대 뛰지 못하게 했다.
5명의 교도관들이 힘없고 연약한 동양 여자 한 사람을 에워쌌다.
내가 가진 한영찬송가는 나의 일기,마음,나의 영어사전이었다.
아직도 미숙한 영어 때문에 한계를 느낄 때마다 찬송가를 뒤적거리며
적절한 단어를 찾았다.
밑바닥 말과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지지 않으려고 배운 영어 욕설도
이젠 하지 않게 됐다.
재판을 마치고 교도소로 넘어가는 친구들에게 작은 카드를 만들어
성경구절을 적어주기도 했다.
잠자리에 들 때와 일어날 때 고국에 두고 온 자식들을 위해 기도하다
보면 늘 눈물이 흘렀다.
하와이의 구치소에 있을 때는 저만큼에 내 집이 있다는 생각에
눈물이 났다.
하와이에 도착한지 3일 뒤부터 재판정에 나갔다.
거기서 하와이의 모든 마약조직이 다 잡혔다는 것을 알게 됐다.
유일하게 보스만 한국으로 몸을 피했다.
로스앤젤레스의 특별재판소에서 선고를 받던 날 재판장은 이렇게
말했다.
“독실한 크리스천이 됐다는 보고가 여러 장 있군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6개월.열심히 사십시오.
기간이 됐으면 72시간내에 구치소를 나가세요”“꽝꽝꽝”
선고가 내려지는 순간 예수님을 보고 싶다는 생각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교도관의 안내를 받고 대기소에 와서도 나는 얼어붙은 사람처럼 서
있었다.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가슴까지 적셨지만 눈물이 말라서 더
이상 나오지 않을 때까지 울었다.
출감 3일전 프로베이션 오피스(보호관찰사무소)로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구치소 밖 5분거리에 있는 건물이었다.
나를 감시하는 교도관도 없었다.출감을 사흘 앞두고 홀로 외출이라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누구의 감시도 받지 않고 홀로 길에 나서자 심장이 뛰었다.
“지금이 기회다.뛰어라.
미국에서 불법체류자로 숨어사는 사람이 한둘인가.서둘러!”
도망가고 싶은 충동이 불일듯 일었다.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애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불렀다.주님,어떻게 해야 되나요.
선 채로 눈을 감았다.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말고,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말고”
이 구절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이 말씀을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생각하고 보호관찰사무소까지 갔다.
그곳엔 낯선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DEA와 연방수사국(FBI)의 에이전트였다.
그들은 마약단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나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다.
계약을 해주면 내가 미국에 무기한 머무를 수 있도록 해주고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돕겠다고 했다.
또 사건을 처리하는 중 압수한 재산에 대해선 0.1%를 내 몫으로
준다고 했다.
내가 전부 알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는 부분에서 정부를 돕는다면
어떤 결과가 있어도 내게 책임을 묻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내가 다시 범죄에 가담하면 특혜는 없고 여기 와있는 3명의
에이전트도 처벌을 받는다고 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을까.
우는 딸의 기도를 들어주신 주님께 마음 깊이감사했다.
1995년 나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하며 한국에 돌아가면 꼭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겠다고 결심했었다.
서울의 야경에서도 수많은 십자가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리움에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터져나왔다.
한국에 처음 들어올 때는 그토록 보고싶었던 아이들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설레었지만 연단의 수레바퀴는 아직도 멈추지 않았었다.
너무나 많이 커버린 아이들.
엄마를 그리워하며 쓸쓸히 커야 했던 아픔들은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여야 할 어미와 자녀의 사이를 어색하게 만들었다.
아직 다 이해할 수 없는 나이였지만 아이들에게 변명하거나 감추지
않고 그동안 미국에서의 사연들을 고백했다.
내 아이들 앞에 무릎꿇고 진심으로 잘못을 빌었다.
처음에는 공격하기도 했고 믿지 않으려고 거부하기도 했지만 내가
기도하면서 주님께 맡기자 아이들에게 용서받고 화해할 수 있었다.
내 가장 아픈 상처를 치료받은 느낌이었다.
예상 외로 나를 힘들게 했던 것은 형제들이었다.
어린 자식들과 떨어져 있을 때도 뒷바라지하며 보살폈던 두 동생
들은 막상 누나가 한국에 돌아오자 몹시 부담스러워했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런 고생을 했는데…’ 하는 마음 때문에 큰
상처를 받았다.
동생들은 나를 이해하고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왠지 가족과 함께
있어도 편하지 못했고 밀려난다는 느낌을 받았다.
여동생 내외가 극진한 사랑으로 보살펴줬지만 이미 고장날 대로
고장난 내 몸은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했다.
한국에 올 때 다시는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남은 삶을 주님의 일을
위해 바치겠다고 수도 없이 다짐했지만 막상 한국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또 다시 주님 앞에 털썩 주저앉아 울어야 했다.
오지 말았어야 할 곳을 왔다는 후회가 들면서 차라리 내 신앙의 첫
걸음을 뗀 미국으로 돌아가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한국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내 서원을 지키기 위해 책을 써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독하게 힘들고도 부끄러웠던 날들이지만 낱낱이 기록해 한권의
신앙간증집으로 남겨서라도 주님과의 약속을 지키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 있었다.
모두가 아픈 기억밖에 없었다.
한 줄을 써놓고 열흘을 앓았고 한 장을 써놓고 한달을 앓으며 힘겨운
작업을 했다.
주님의 은혜인지 순간순간이 생생하게 기억났다.
그렇게 다 털어놓고 지난 아픔을 잊으라는 말씀인 것같았다.
그렇게 2년만에 탈고한 원고는 책으로 3권이 되는 긴 내용이었다.
출판사에 가져갔더니 법적인 문제로 낱낱이 밝힐 수 없는 마약과 관련
된 부분 등을 줄여서 한권으로 만들어줬다.
원고를 출판사에 맡겨놓고 98년 1월 책도 보지 않고 다시 미국으로
떠났다. 다시는 한국에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었다.
2년 남짓 한국에 머무르면서 정신적으로 너무나 힘들었다.
막상 미국에 돌아오니 또 막막했다.
다시 마약과 범죄의 세계로 돌아갈까 하는마음까지 생겼다.
이런 나를 보시는 하나님은 얼마나 힘드실까.
그때 아이들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라고 불러주지 않았다면 나는
어떻게 됐을지 모른다.나를 불러주는 한국인이 또 있었다.
“다시는 울지 않게 하겠다.내가 책임질 테니 돌아오라”고 한 사람,
바로 지금의 내 남편이다.
그는 내가 한국에서 다니던 교회의 찬양 사역자였다.
원고를 쓰면서 지난 날들의 기억 때문에 아프고 힘들어할 때 나는
수요예배에 참석해 그가 인도하는 찬양을 함께 부르며 눈물을 흘렸다.
컴퓨터 프로그래머인 그는 직장에서 중역으로 있으면서도 교회를 열심
으로 섬기는 신실한 사람이었다.
한국을 떠나기 직전 교회에 작별 인사를 드리러 갔다가 우연히 그와
마주쳤다.그동안 찬양으로 많은 은혜를 받았다고 인사했지만 그는 나를
알아 보지 못했다.
매주 예배실의 앞자리에 앉아 눈물을 흘리며 찬양드렸는데도 날 기억
하지 못하다니 왠지 섭섭한 마음도 생겼다.
그런 그가 나를 잊지 않고 미국으로 떠난 뒤 불러주는 것이었다.
그는 내게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과분한 사람이었다.
동갑내기인 그와의 재혼을 내 딸과 아들도 이해해주고 진심으로
축하해줬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남편은 내 책 ‘I say I love you’의 초판을 여러 권 구입해 전국의
교도소와 구치소에 보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진 빚을 갚는 심정으로 쓴 책이었는데 기대하지
않았던 반응이 왔다.
여기저기의 교도소에서 나를 강사로 초청해왔다.
재소자들이 내 책을 읽고 나를 만나고 싶으니 불러달라고 교도소측에
요청한 것이었다.
아마 설교조의 책이 아니라 그들과 같이 재소자로 복역해야 했던 상황
을 풀어낸 이야기가 친근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책을 통해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소식을 편지로 받으면서 주님의 은혜
에 감격해 매일 감사의 눈물을 쏟았다.
처음 교정선교의 발을 디딘 곳은 강력범만 모여있는 청송 제2교도소였다.
떨리기도 하고 긴장도 됐지만 막상 강단에 서자 마음이 편안했다.
재소자들도 처음엔 나를 경계의 눈빛으로 바라보다가도
내가 한국에서도 실패하고 미국까지 가서 마약과 범죄에 휩쓸려 3년이
넘게 수감생활을 했던 얘기를 털어놓으니 눈빛을 반짝이며 귀를
기울였다.
사역을 시작한지 1년만에 법무부에서 교정위원으로 위촉해줬다.
나는 마약사범 전문강사가 돼 그들 앞에 선다.
대부분의 마약사범들은 복역하고 나가면 다시 마약에 손대지 않을까
스스로 두려워한다.
전문가들도 “마약은 한번 중독되면 끊을수 없다”고 강의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내 경험을 바탕으로 “마약은 끊을 수 있다”고
확신을 가지고 말한다.
그 방법은 하나님께 두손 들고 나와 회개하는 것이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마약을 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강의하면서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전한다.
주님께 나오라고,그분께 모든 것을 맡기라고 강조한다.
이렇게 하다보니 지금은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 부산지부에 속한
마약전문 강사로 활동하게 됐다.
전국의 구치소와 교도소,보호감호소에서 마약 관련 강의를 하고
매월 300여명의 재소자들을 만나 상담하고 있다.
내가 그들의 누나가 돼 영치금을 넣어주기도 하고 간식을 나누며
예배하고 상담한다.그중 내가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동생은 신창원이다.
청송교도소측의 요청으로 그를 만나게 됐다.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건네는 그의 모습은 세상에 그토록 악명을
떨친 사람이라는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순박해보였다.
“야,선수끼리 무슨 안녕하세요냐.우리 손 한번 마주치자”
나는 신창원과 하이파이브를 했다.
당시만 해도 그는 다른 재소자들과 함께 집회에 참석할 수 없어서
특별 면회를 해야 했다.
나도 손이 큰데 그도 손이 무척 커 동질감이 느껴졌다.
나와 남편은 그를 동생이라고 부르고 신창원도 우릴 누나,형님
이라고 부른다.
지금은 집회도 열심히 나오고 찬양도 부른다.
남편이 악보를 만들어주면 모르는 노래도 혼자 익힐 정도로 머리도 좋다.
무기수로 힘들게 생활하고 있지만 내가 넣어준 속옷이나 간식도 모두
다른 재소자 들에게 나눠주고 자신의 것은 남겨놓지 않을 정도로
모범적으로 생활하고 있다.
신창원은 그동안 그를 이용하려는 사람들 때문에 상처받은 게 많다.
그 때문에 나도 그의 생활이나 그가 보내온 편지를 더 자세히 소개하지
못하는 점을 이해해주면 좋겠다.
마약사범들에게 강의를 하러 가면 처음엔 강사가 여자라는 것 때문에
무시하고 질문을 퍼부어대기도 한다.
하지만 언제나 함께 계시는 성령께서 곧 그들을 제압할 수 있도록
도우신다.
경험한 것은 경험한 대로 얘기하고 모르는 것은 밤을 새우며
공부하고 준비해 그들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도록 준비한다.
국민일보에 내 얘기가 연재되면서 많은분들이 편지와 전화로 도움을
요청해 오셨다.
자식이나 남편이,아내가 마약에 중독돼 있다는 내용이었다.
대부분이 교회에서 장로와 권사,집사로 섬기고 계시는 분들이다.
이미 마약이 교회 안까지 깊숙이 들어와 있는 것이다.
나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이고 아픔일
것이다.
내가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책임을 느끼게 한다.
언제 어디서 어떤 방법을 통해 다가올지 모르는 것이 마약이다.
더욱이 한국 내에서 판매되고 있는 마약은 인체에 치명적인
불순물들이 섞여 있어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키는 실정이다.
교회와 사회가 좀더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예방교육을 해야 한다.
며칠 전 미국에 있다가 추방당해 한국에 왔다는 재소자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그는 미국에서 KP와 라이벌 관계였다며 밖에 있었으면 자기 총에
내가 당했을수도 있다고 말했다.
“하나님 품에 안주하게 되신 것을 축복드립니다.
저도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지만 아직 자신을 다 비우지 못한
것 같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습니다.
부디 제게도 은총이 있도록 기도해주십시오”
인간은 너무도 나약한 존재다.
특히 마약사범들은 주위 사람들이 다 떠나가기 때문에 삶에 회의를
심각하게 느낀다.
교정선교를 하면서 느낀 점은 교도소라는 곳은 특별한 사람들만 가는
곳이 아니라는 점이다.
적어도 운전면허를 가진 사람이라면 언제 어떻게 경험할지 모른다.
재소자들을 기억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를 해주시길 독자들께
부탁드리고 싶다.
나는 하나님 안에 우연이란 없다고 믿는다.
수많은 방황 끝에 재소자들을 만나고 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하신 것도 하나님의 계획이실 것이다.
내가 지금 섬기고 있는 경남 김해 외동 시온중앙교회에서는 내가
교회에서 제대로 봉사하지 못하는데도 나의 사역을 적극 밀어주고
후원해주신다.
최영걸 목사님과 오승철 전도사님,성도들께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