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산(雲山)금광을 찾아서
1.
이전의 글에서 백두산인 현 알타이산의 아래쪽 현 중국지명인 부얼진(布爾津)-조선의 의주-에서 우측으로 이어진 동압록-청천강의 줄기를 따라 강북-하북-쪽으로 구성(龜城)과 운산(雲山), 안주(安州), 영변(寧邊)이 위치하고 있음을 지도로 표시해 보았다.
평안도 운산이 어떻게 현 신강자치구 북쪽의 알타이산 아래로 비정될 수 있는지 아래에서 기록과 지형분석을 통해 고찰해 보도록 하겠다.
2.
운산금광은 평안북도 운산군 북진읍에 있는 금광산으로, 1864년 대원군이 집정을 하면서 조선시대 이후로 개발이 금지되어 있던 광업(鑛業)을 허가하여 징세를 늘리는 방편으롯 삼게 되었다. 금은(金銀)광산의 개발이 허가되자 서구열강은 조선정부로부터 광산개발권을 얻기 위해 분주해지기 시작했으며 그 주대상물은 금(金)광산이었다.
1885년경 영국과 일본이 조선의 광산업에 진출하였는데, 이보다 10년쯤 늦게 운산광산의 개발이 시작되었다. 1896년 미국인 모스(Morse,J.R.)가 조선정부로부터 25년계약으로 운산군 일원의 금광개발을 획득하게 되었다. 모스는 동양합동광업회사를 조직하고 황실(皇室)에 자본주 100에 대한 25주(株)를 주고 일시금 25만원을 헌금하였고, 또한 매년 2만 5000원을 헌상하였다.
당시의 이권(利權)은 엄청난 것이었으며, 1910년 우리 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로 침해당하자 일본의 광업한 일원화 정책에 따라 운산광산을 포함한 모든 광산은 1939년경 일본인이 경영하게 되었다. 광복 전에 운산광산은 대유동(大楡洞)·광양(光陽) 등의 금광산과 더불어 우리 나라 3대 금광으로 알려졌던 곳이다.
운산광산은 구룡강(九龍江) 상류인 대암천(大巖川) 상류에 있는데, 계곡의 서쪽에 있는 호미봉(好尾峰)·죽암산(竹巖山)과, 동쪽에 솟은 대암산(大巖山)·삼봉산(三峰山) 등에 매장된 광산이다. 이들 동서 산지 사이를 흐르는 대암천은 사금 채취를 하던 곳이었으며, 조선 초기에 청나라가 금의 요청을 보챘으므로 사금의 채취를 엄히 금하여 이를 뿌리쳤다고 하는데 이 광산은 운산군의 북쪽 끝을 이루는 북진읍(北鎭邑)이 그 중심지이다.
광석은 자체 운영인 제련소에서 제련을 하였고, 이를 위하여 1905년 우리 나라 최초로 건설된 500㎾용량의 자가용 수력발전소의 전력을 이용하였다고 하는데 이 발전소의 설치위치는 청천강의 지류인 구룡강에 세워졌다고 한다. 아래 지도그림에서 고찰해 보도록 하겠다. 또, 갱목의 수송을 원활히 하기 위하여 북진의 북쪽에 있는 북선암산(北仙巖山)에 이르는 24㎞에 달하는 운산금광운재궤도(雲山金鑛運材軌道)를 설치하여 북선암산 일대에서 벌채된 갱목을 운반하였다고도 한다.
이 광산은 이후 일본 모(某)회사가 8 ·15광복 전까지 채굴하였으며 1896년부터 40년간 순금 80여ton을 채굴한 세계적 광산이라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알아보면 운산광산은 1884년 미국 공사관의 조지 C. 포크(George C. Foulk)와 스미소니언 박물관의 J.B. 버나도우(J.B.Bernadou)가 전국 각지의 유망 금광상을 탐사하여 운산금광에 대한 보고서를 낸후 호러스 알렌의 주선으로 조선 정부는 미국 실업가 J.R. 모스(J.R.Morse)에게 1895년 운산금광 채굴특허를 주었다. 그러나 모스가 자본 부족으로 개발에 소극적 태도를 보이자 알렌은 레이 S. J. 헌트를 끌어들여 운산금광 개발권을 인수하도록하고 헌트는1897년 동양광업개발주식회사(Oriental Consolidated Mining Company)를 설립하였다. 이후 동양광업개발주식회사는 40여년간 900만톤의 광석을 채굴해 5600만 달러의 금을 생산하였고 1500만 달러의 순이익을 올렸으며 이후 일미관계가 악화되면서 1939년 대유동금광을 운영하던 일본광업주식회사에 800만 달러 가격으로 인수되었다고 한다.
3.
1930년 미국에서 출판된 로 알려진 고종의 고문관이었던 William Franklin Sands(1874-1946)는 이전의 글에서 분석한대로 당시 세계적인 정치인이었다.
그는 고종(高宗)에게 만주지역의 장작림을 제거하여 조선북방의 우환을 없앨 것을 건의하고, 고종은 샌즈에게 밀지를 내려 장작림 제거를 윤허하게 됨에 따라 결사대를 이끌로 평양을 지나 안주(安州)에서 강을 건너다 유사(流沙)에 빠졌음을 기록해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기도 한다.
그의 글중에 운산금광의 위치를 가늠하게 해주는 중요한 구절이 있어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어느 여름 나는 말을 타고 미국이 채굴권(採掘權)을 가지고 있는 금광(金鑛)근처인 북방지역을 여행했다. 우리는 조그마한 배를 타고 江(안주강)을 건너고 말들은 가죽끈으로 매어 헤엄치게 하면서 강을 건너 넓은 모래사장에 내렸다.
내가 말 안장위에 앉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갑자기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순간, 우리는 강들을 건너 때마다 주의해 온 유사(流砂)에 빠졌음을 알게 되었다.---우리와 같은 많은 일행은 결국 표면을 무너뜨렸으며 나의 큰 말이 그 속에 빠져 들었다. 나는 뒤에 있는 행렬을 향하여 널리 흩어지라고 소리 지르면서 말의 머리위를 기어올라 표면이 무너지지 않는 곳으로 뛰어 들어감으로써 가까스로 빠져 나왔다. 모래 표면이 마치스케이트를 타는 연못뒤의 얼음처럼 말의 무게에 눌러 무너졌다.“
이 글은 조선의 북방에 유사(流沙)가 있음을 고증하기 위해 인용한 글이었다. 그런데 앞부분 글에서 미국이 채굴권을 가지고 있는 금광근처인 북방지역을 여행하는데, 안주지역의 강을 건넜다고 기록한 것이다.
당시 미국의 금광채굴권이면 당연히 운산(雲山)금광이다.
따라서 평안도 운산은 안주(安州)에 있는 청천강(淸川江)을 건너서 위쪽에 존재한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청천강의 북쪽에서 흘러내려오는 구룡강이 있어야 하고, 그곳에 조선 최초의 수력발전소가 설치된 것임을 알수가 있게 된다. 이 부분도 아래의 지도그림을 통해 살펴보면 정확히 알아낼수 있는 사항이다.
4.
당시 조선의 북방 즉 알타이산(백두산)의 남쪽, 청천강의 북쪽인 운산금광을 중심으로 산출되던 금의 순도(純度)는 일반적인 금(金)가치기준의 세배를 넘었다고 한다. 엄청난 양질의 금이 생산되었음을 서양인들이 기록으로 알려주고 있는 것이며, 1903년에 가동중인 금광이 무려 169개 였다고 한다.
당고개지역의 독일운영 금광에는 독일의 하인리히 황태자가 다녀가기도 했으며, 독일의 지리학자이자 신문기자였던 지그프리트 켄테(Sigfried Genthe)는 당고개 금광에서 작업하던 조선인 인부들이 넉넉한 점심시간을 단축하려된 회사측과의 싸움에서 석전(石戰)으로 대응하는 조선인들의 돌날라오는 소리가 정말 귀신 같았다고 하면서, 노조(勞組)도 모르는 조선인들이 어떻게 저리 순식간에 단합되어 조직적으로 대응하는지 알수 없는 일이라고 기록해 놓기도 했다. 결국 1미터가 넘는 곰방대를 30cm의 신형으로 무상 교체해주는 조건에서 타협했음도 알려주고 있다.
당시 미국이 조선정부로부터 허가받아 개발하던 소유지의 크기는 무려 약 2,072㎢였다고 한다. 현 반도 제주도의 크기가 1,849㎢임을 감안하면 그 크기를 짐작할 수가 있다. 현 반도 북쪽 지명이동된 운산지역에 어디 그런 크기의 광산지역이 있을 것이며, 미국인이 개발한 운산금광이 이 반도땅하고는 하등 관계가 없음을 명확히 알수가 있는 사안이다.
백두산인 알타이산은 만주인들에 의해 금산(金山)이라고 불리운다. 또한 일천개의 봉우리중 어느 한 봉우리는 선비산(鮮卑山)이라고도 불리우기도 한다.
현 알타이산의 북쪽 북압록인 송화강(松花江)줄기의 발원지근처에는 고르노 알타이(Gorno-Altai-러시아령)라는 지역이 있는데 이 지역에서는 러시아 금(金)의 90%가 생산되고 있다고 한다. 알타이산맥을 따라 수백킬로미터의 지역에 금광이 산재해 있는 것이다.
또한 백두산인 알타이산의 정상보다 조금 낮은 지역중 장백산쪽에서 파지리크 고분이 발견되었는데 이 고분군은 기원전 700년 형성된 것으로 밝혀지고 있으며, 부장품에 쌍어(雙魚)와 금의 박편(薄片)들이 발견됨으로써 이미 오래전부터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금을 사용했음을 알수가 있기도 하다. 한마디로 금 천지인 지역이 백두산 지역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구한말 거대한 조선의 북방지역에 금이 엄청날 정도로 많이 생산되었다고 한다면 당연히 백두산인 알타이산을 중심에 놓고 보아야 하는 것이 정확한 이치이고, 이미 고증한 청천강(淸川江)과 안주(安州)의 북쪽 알타이산의 기슭에 위치했던 운산금광을 또한 정확히 고증해 낼수가 있다.
만약 조선이 현 반도에 있었고, 청(淸)나라가 대륙전체에 걸쳐 있었다면 그 많은 금이 산출되는 현 알타이산을 그냥 놔두었을 리가 만무한 일이며, 따라서 청나라는 금이 넘쳐났어야 하는 일이지 없어서 조선에 요청할 일이 전혀 아닌 것이다.
위의 내용을 근거로 현 대륙 신강자치구 북쪽에 위치했던 운산금광을 지도로 고찰해 보면 다음과 같이 볼수 있다.
2020.10.26. 송계(松溪)
첫댓글 조선 초기에 청나라가 금의 요청을 보챘으므로 사금의 채취를 엄히 금하여 이를 뿌리쳤다고 하는데 이 광산은 운산군의 북쪽 끝을 이루는 북진읍(北鎭邑)이 그 중심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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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청나라의 요청을 거부할 정도의 대단한 나라였다고 생각되네요.
청은 조선보다 200년 후에 일어난 나라 아닌가요?
낙타를 사육하는데 당연히 사막지대였겠네요. 평안도.함경도지역은
목재집 제10권 / 잡저(雜著)
병지〔兵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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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장(牧場)을 설치한 것이 무릇 10곳으로, 황주(黃州)에 있는 것을 용양(龍驤), 통주(洞州)에 있는 것을 농서(隴西), 백주(白州)에 있는 것을 은천(銀川), 개성(開城)에 있는 것을 양란(羊欄), 정주(貞州)에 있는 것을 좌목(左牧), 청주(淸州)에 있는 것을 회인(懷仁), 견주(見州)에 있는 것을 상자원(常慈院), 광주(廣州)에 있는 것을 섭호현(葉戶峴), 강음(江陰)에 있는 것을 동주(東州)라 했는데, 풀이 누런 절기〔黃草節〕와 풀이 푸른 절기〔靑草節〕에 따라 지급하는 콩에 차등을 두었다. 노새〔驢〕, 당나귀〔騾〕, 낙타(駱駝)를 모두 길렀으며, 섬 말〔島馬〕 중에는 탐라(耽羅)에서 나는 것이 가장 많았다.
隴西(롱서)가 참 어려운 부분입니다. 현재 농서는 감숙성에 지명이동되어 있지만, 원래의 농서는 신강북부와 카자흐의 경계에 있는 지역으로 보여지는데..기록에 따르면 현 천산에 화림산이 있어서 그 산의 물줄기가 세렝가강을 이루어 카라코룸을 지나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카라코룸은 우리카페에서 고증한 신강성 동북..평양근방이 되어야 하는데..그럼 천산이북이 모두 고구려, 조선의 강역이었는지...이 부분의 고증이 참으로 어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