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밋빛 모퉁이의 남자 «Hombre de la esquina rosada» 1927
in 불한당들의 세계사(Historia universal de la infamia 1935), 보르헤스, 황병하, 민음사, 1994, 2011. pp. 87-100. (P. 251)
fr. L'homme au coin du mur rose.
-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 1899-1986: 본명 Jorge Francisco Isidoro Luis Borges Acevedono), 아르헨티나 작가. / Histoire universelle de l’infamie (Historia universal de la infamia) (1935)
** 한번 쓱 읽으면서 느낀 것은 무협소설에서 나오는 한 무대 같았다. 한 문파가 지배하는 마을에 주막이 있는데, 다른 사파에서 도전하듯이 와서 주막의 가장 예쁜 색시를 데리고 나가려 한다. 그 문파의 중간보스가 결투를 하지 않고 나가버리고, 사파의 강자(도전자)는 색시를 데리고 나갔다가 칼을 맞고 돌아와서 죽는다. 색시가 그 사파 도전자를 죽인 자는 문파의 중간보수는 아니라고 한다. 주막에 있던 사파 패거리가 색시를 죽이려 하자, 화자인 나는 저 여린 손으로 어떻게 고수에게 칼로 찌를 수 있느냐고 말함으로써 무마된다. 여기서 이야기를 전하는 화자인 나는 사파 강자를 세 번이나 보았다고 하는데, 글 속에는 두 번 밖에 표현되지 않았다. 한번은 술집에 들어와 거들먹거리는 장면, 그리고 색시를 데리고 나갔다가 칼 맞고 들어왔다는 장면이다. 그러면 칼로 찌른 것은 문파의 중간보스가 아니라 나가 된다. 그 나는 그날 사건이 벌어진 이후에 그 색시가 자기 집을 찾아왔다고 한다.
* 서설 상에 바라데스 문파의 중간보스 로센도 후아레스와 그 문하들이 울리아 술집에서 놀고 있는데, 북쪽 패거리의 보스인 프란시스꼬 레알이 들어온다. 화자인 나는 이름만 들었던 레알을 세 번이나 보았다고 한다. 레알을 술집을 휘어잡고, 제일 예쁜 여인인 루하네라를 차지한다. 로센도 문하들은 로센도가 레알과 한판 붙기를 바랐으나, 로센도는 그냥 나갔고 그 이후로 이 동네에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라 한다. 레알이 루하네라를 데리고 나갔을 때도 문하의 누구도 별명이 <새장수>인 레알에 제지하지 못했다. 그리고 레알이 루하네라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 무엇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서 <새장수>가 칼에 맞아 치명상을 입고 죽게 된다. 루하네라는 루센도는 아니지만 누군가가 레알을 찔렀다고 한다. 루하네라는 로센도의 애인이었으니 알아보았을 것인데 말이다. ‘북쪽파’가 루하네라를 의심하자, 화자인 나가 나서서 “이여자의 손을 좀 보시오. 도대체 이 손 어디로 칼로 찌를 힘이 들어 있겠는지” 경찰이 왔을 때, 거기에 있는 사람들 누구도 사건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기체를 술집의 창 넘어 강으로 던져버렸다.
[마지막 문단] <나는 담담히 약 세 블록 떨어져 있는 내 오두막을 향했지요. 나는 내 집의 창가에서 어른거리다가 금세 꺼지는 작은 불빛을 보았지요. 나는 섬뜩한 예감에 사로잡혔고, 집을 향해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지요. 그래서, 보르헤스 씨, 나는 늘 여기 이 조끼의 왼쪽 겨드랑이 밑에 넣고 다니던 작고 날카로운 단도를 다시 꺼냈지요. 그리고 나는 그것을 다시 한 차례 천천히 살펴보았지요. 그것은 마치 순진무구한 새 칼 같았어요. 그리고 거기에는 피 한방울 묻어 있지 않았었지요. (100)>(강조는 마실이 한 것이다)
새로운 강호의 맹주로 ‘나’가 된 것이다.
은연중에 화자인 ‘나’는 하루 저녁에 <새 장수> 레알을 세 번이 보았다고 하고, 그날 이후로 전 맹주 로센도는 더 이상 이 동네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소설 속에는 그가 레알을 본 장면은 세 번 중에 두 번 밖에 없다. 한번은 <새 장수>가 마을의 주점에 들어와서 수작을 부릴 때이다. 그리고 소설상 다음은 <새 장수>가 칼을 맞아 치명상을 입고 들어왔을 때이다. 그는 레알이 설치는 동안에, 동네 맹주인 로센도가 술집을 빠져나갈 때 나도 빠져나가려다가 로센도에게 걸그적거린다고 한소리 듣고 나갔다. 레알이 루하네라를 데리고 나간 동안에 그는 바깥에서 밤하늘을 보았고, 어둠 속에서 루센도의 비겁한 행동과 그에 반해 너무도 당당한 외지인의 모습을 떠올리며 치를 떨었다고 한다. 그리고 들어왔는데, 레알이 칼을 맞고 다시 되돌아 왔다고 한다.
강호의 고수가 바뀌는 것이 아니겠는가. 제목이 불한당의 세계사라기보다, 강호 제현이 과거사의 이야기를 하는 ‘보편적 이야기(Histoire universellel)’ 즉 탑골 공원에서 옛날에 잘 나갔다고 하는 어떤 영감님의 ‘왕년의 활극’ 이야기 정도가 아닐까 한다.
(51RKC)
이번 글을 쓰는 것은 보르헤스가 전미래의 글을 쓰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으로 보르헤스의 픽션들(Ficciones, fr. Fictions (1944)을 빌리려 했으나, 이 책은 이미 대출되고 없어서 불한당들의 세계사(Historia universal de la infamia 1935)를 빌렸고, 그 중에서 이 단편을 읽었다. 단편소설의 특징으로 “무엇이 일어났는지”가 잘 표현되어 있다.
나로서는 이보다 보르헤스의 어떤 글에서 20권의 백과사전이 있는데, 23권째에 이른 글이 실려 있다든지, 복음서가 4권인데 제6권 3장 16절에 이런 이야기들이 있다든지 하는 투로 쓰인 것을 읽은 적이 있는 것 같다. - 아마도 픽션들(1944)에서
프랑스 문법 시제에는 ‘과거 대 복합과거’, ‘단순과거 대 대과거’처럼 이에 비래해서 ‘미래 대 전미래’가 있다. 단편소설이 과거와 이전과거의 시제로 있었던 사건이지만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사건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모리스 블라쇼가 이야기했던가? 전미래의 글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갑자기 든 생각으로 전미래의 글은 보르헤스의 픽션들(1944)이 아닌가라는 생각에, 작년에 읽은 노트를 보니 “환상”(fantasie) 정도로 이해한 것 같다.
그런데 벩송의 아이러니를 보니 조건법인데 미래의 가능성을 그럴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들뢰즈의 아이러니는 한걸음 더 나간 것 같다. 가능성보다 확장하여 가상성인데 있을 수 있는지 없는지를 확정할 수 없지만 서술할 수 있는 것으로 보는 듯하다. 그러면 자기 안에서 반복(en soi)은 과거에 있을 수 있었던 단편소설이라면 위하여 반복(pour soi)은 미래의 결정은 아니지만 결정되기 이전의 가상성으로 있으리라는 단편소설이어야 할 것 같다. 그렇다면 도르비이이에서 도데와 모파상, 그리고 헨리 제임스와 피츠제럴드 등의 단편소설은 있었던 사건인데 비해 보르헤스는 나중에 있으리라는 단편소설을 쓴 것이 아닌가 한다. 즉 보르헤스의 후기 단편들에서는 주사위가 공중에 떠있는 듯 한 사건을, 즉 있을 수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번호는 나올 것이라는 사건을 쓴 것이 아닌가 한다. 들뢰즈가 니체의 주사위 설명을 보르헤스 작품으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말이다.
미래는 모르지만 그래도 가까운 미래에 이런 저런 행동과 실천이 있을 것이라는 것은 인지적 사고라면, 공중에 떠있으면서 그래도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는 생성적 사유는 다른 것이리라. 그러나 자기 안에(en soi) 현재와 과거의 연결성이란 자기를 위한(pour soi) 미래와 전미래의 확장성은 매우 큰 차이가 있을 것 같다.
확장성에서 그 결정성(규정성)을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아이러니(l'ironie)일 것이다. 그런데 현재와 과거, 과거와 이전과거 사이의 계열은 웃음거리(le comique)을 생산하거나 풍자(satire)를 생산할 것 같다는 느낌이다. 벩송은 웃음(1900)에서 아이러니와 웃음거리를 구분하였다. 나로서는 과거에 대해 웃음거리도 있지만 쓴 웃음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참고: 바타이유가 벩송의 웃음을 읽고 크게 실망했다고 한다. <블랑쇼(Maurice Blanchot, 1907-2003)가 바타이유(Georges Bataille, 1897-1962)를 만난 것은 1940년이라 한다. 바타이유가 블랑쇼 보다 열 살 많다. 바타이유가 블랑쇼에게 자신의 저술 내적 경험(L'Expérience intérieure 1943)을 읽게 했다고 한다. 바타이유가 1920년 런던에서 벩송을 만났는데, 그는 웃음을 읽고, 실망했다고 하면서, 웃음이 사람들이 나중에 고통의 웃음(쓴 웃음)인 ‘바타이유식 웃음’이라 부르는 것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그는 이런 이야기를 처음에는 내적 경험(L'Expérience intérieure 1943)에서 그리고 1953년 강연 「Non-savoir, rire et larmes」에서도 이야기 한다. [벩송이 웃음거리가 되는 “웃게 하는‘ 것이 주제인데 비해, 바타이유는 “쓴 웃음”을 말한 것 같다. 쓴 웃음은 풍자에 가깝지 않을까? (51RKB)]
나중에 벩송의 아이러니와 웃음거리, 문학에서 아이러니와 풍자, 들뢰즈가 쓴 의미의 논리(1969)에서 철학자들의 아이러니를 다루어 보아야 할 것 같다.
(3:12, 51RK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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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한당들의 세계사(Historia universal de la infamia 1935)”(보르헤스 전집 1)에는 아홉편이 실려있다.
잔혹한 구세주 라자루스 모렐 «El atroz redentor Lazarus Morell»
황당무계한 사기꾼 톰 카스트로
여해적 과부 칭
부정한 상인 몽크 이스트맨
냉혹한 살인자 빌 해리건
무례한 예절 선생 고수께 노 수께
위장한 염색업자 하킴 데 메르브
장밋빛 모퉁이의 남자«Hombre de la esquina rosada», (Man on Pink Corner)
기타 등등
참조:
# 잔혹한 구세주 라자루스 모렐 «El atroz redentor Lazarus Morell»(1934) pp. 15-27.
fr. Le rédempteur effroyable: Lazarus Morell.
en. The Dread Redeemer Lazarus Morell
[먼저 소설 제목 「잔혹한 구세주 라자루스 모렐 «El atroz redentor Lazarus Morell»(1934)」에서 나오는 라자루스 모렐은 실제인물이 아니라, 보르헤스가 내용의 주인공으로 붙인 이름이다. 그 시대에 그런 인물이 있을 수 있다고 가정(공상)한 것이다. 이야기는 과거시제와 복합과거시제에 관한 것이라기보다, 단순과거와 대과거인 것처럼 꾸며서, 역사적 사실들 몇 가지를 섞어서 모렐이 역사적 사건의 일부를 담당했던 것 같이 쓴 것이다. / 이에 비해 「장미빛 모퉁이의 남자(1927)」는 과거 대 대과서 시제라고 할 만하다. 그래서 인지 보르헤스는 1935년 초판 서문에서 <한 사람의 전 생애를 두세 개 장면으로 축약 등과 같은 몇가지 기법들을 차용하고 있다. (이러한 가시적 의도는 또한 「장미빛 모퉁이의 남자」라는 틀을 끌고 가는 축이 되고 있다.) 이 단편들은 심리학적인 것들이 아니며, 또한 그렇게 하려고 의도하지도 않았다.(12-13)> 언급하였듯이, 불한당들의 세계사(Historia universal de la infamia 1935) 속에서 「장미빛 모퉁이의 남자」는 들뢰즈/가타리 기준으로 단편소설의 범주에 속한다. 그렇다면 「잔혹한 구세주 라자루스 모렐(1934)」은 보르헤스가 말한 대로 “허구(fiction)”에 속하지만, 미래의 전미래라는 측면이 아니라는 점에서 “아자르”에 속하지는 않을 것이다. “허구”는 교육적이며 교훈적인 “우화”도 아니다. 아마도 무협지가 “픽션”에 속할 것 같은데,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51RK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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