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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의 역사인물 신미대사와 김수온
1. 2009년도 충북의 역사 인물
(1) 권근(權近) 1352~1409.
〇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학자, (음성)
양촌(陽村) 권근은 조선왕조 개국공신이자 사병혁파를 주장하여 왕권확립에 큰 공을 세운 대학자이다. 정계와 학계에서유교 국가를 만드는 활동을 활발히 수행하였으며 조선 최초의 예문관 대제학 겸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어 시(詩)와 문(文) 양면에서 새 왕조의 규범을 마련하였다. 권근의 서거 600주년을 맞아 주자학적 유교의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해보는 측면에서 ‘충북의 역사인물’로 선정되었다.
(2) 김수온(金守溫) 1410~1481
〇 조선전기 문신, 8대문장가. 대학자, (영동)
괴애 김수온(金守溫)은 관료 문인으로 숭문원 교리, 한성부윤, 상주목사, 공조참판, 호조판서, 영산부원군의 관계를 거쳐 관직이 극품에 올랐으며 세종의 특명으로 집현전에서 『치평요람』『월인천강지곡』『월인석보』등을 편찬하였으며 학문과 문장에 뛰어나『명황계감』을 국역하는 등 국어 발전에 힘쓴 분이다. 오늘날 대중매체로 인한 국어의 올바른 사용이 왜곡되고 있는 상황에서 탄신 600주년을 기념하면서 한글의 의미를 재조명해보고자 ‘충북의 역사인물’로 선정되었다.
(3) 손병희(孫秉熙) 1861~1922
〇 천도교 제3세 교조, 독립운동가, (청원)
의암(義菴) 손병희는 천도교(東學)의 지도자이자 호방한 기질을 가진 독립 운동가이다. 1906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제 3세 교주에 취임하였으며, 3•1 동립만세운동의 33인 중 1인으로 참가하기도 하였다. 올해 3•1운동의 90주년을 맞아 3•1운동의 의미를 되새겨보고, 천도교단의 철학과 실천운동을 재조명해보고자, ‘충북의 역사인물’로 선정되었다.
(4) 신규식(申圭植) 1879~1922
〇 독립운동가, 종교인, (청원)
예관(睨觀) 신규식은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 대한협회 등에서 활동한 항일 독립 운동가이다. 중국의 신해혁명(辛亥革命)에도 가담한, 투쟁적 신념과 뛰어난 행동력을 지닌 인물로 조국의 장래를 근심하며 단식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탄생 130주년을 기념하고 진정한 독립의 의미를 재조명하는 측면에서, ‘충북의 역사인물’로 선정되었다.
(5) 신잡(申磼) 1541~1609
〇 조선중기 문신, (진천)
독송(獨松) 신잡은 이조참판, 형조참판을 지낸 이로. 임진왜란 때 선조임금을 의주까지 호위한 공을 인정받아 호성공신(毫聖功臣) 2등에 봉해진 인물이다. 이후 진천 노은 마을에 낙향하여 서원을 세우고, 민족의 얼을 고장 젊은이들에게 심어주었다. 이에 서거 400주년을 맞이하여 그의 충〮•효의 현대적 의미를 재조명해 보는 측면에서 ‘충북의 역사인물’로 선정되었다.
(6) 우탁(禹倬) 1263~1342
〇 고려 말 유학자, (단양)
역동(易東) 우탁은 원나라를 통해 들어온 정주학(程朱學) 서적을 처음으로 해득하여 이를 후진에게 가르쳤으며, 경사(經史)와 역학(易學)에 통달한 인물이다. 또한 군왕의 폐륜행위를 바로잡기 위해 지부상소(持斧上疏)를 감행한 강직한 선비였다. 그의 충의와 절조를 기리고, 성리학의 이론적 바탕과 함께 실천행동의 현대적 의미를 재조명해보고자 ‘충북의 역사인물’로 선정되었다.
*1986. 11. 괴애기념사업회
용산면 상용리 고속도로 입구에 『속동문선』에 전하는 김수온 시비는 영동군 괴애 기념사업회에서 1986년 11월에 세웠으며 여남(지명)의 매자(교유 스님)가 운월헌 시를 지어줄 것을 청하여 어린아이를 꾸짖어 사리를 깨닫게 하는 내용의 시이다.
前文에
今 汝南梅子 辱知有年 而求題雲月軒 則意有不可孤焉者矣
雖然 母誚 其小兒强解事也.
금 여남매자 욕지유년 이구재운월헌 즉의유불가고언자의
수연 모초 기소아강해사야.
『題 高峯雲月軒』
雲有浮沈月晦明(운유부침월회명)
구름에는 뜨고 가라앉음이 있고, 달에는 밝고 어두움 있어
從來未若大虛淸(종래미약대허청)
이는 처음부터 태허의 맑음만 못하다.
憑君爲語高遁客(빙군위어고둔객)
그대를 빙자해 고고한 은둔자에게 말하느니
莫把陰晴弄一生(막파음청농일생)
음청을 가지고 일생을 조롱하지 말게나.
1. 자유로운 영혼을 낳은 땅
(1) 아름답고 풍요로운 문향의 고장
(2) 김수온선생의 고향
1)용산면 상용리 오얏골(괴애골의 변형)
2)탄생 설화 - 혜각존자 신미대사의 동생으로 신미대사와 같이 두 가지가 있다. (신미대사 탄생설화 참조)
3)김수온의 연보
*1409년( 1세) 충북 영동군 용산면 상용리 오얏골에서 태어남
*1438년(30세) 진사시험에 합격함
*1441년(33세)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子)에 임명됨, 왕의 특명으로 집현전에 출사(出仕)하여 『치평요람』수찬(修撰)에 참여함, 왕이 때때로 집현전 유신(儒臣)들에게 글제를 내어 시문(詩文)을 짓게 하 였는데 여기서 여러 번 장원을 차지하여 文才를 드러냄.
*1445년(37세) 훈련원주부, 숭문원 교리 역임, 3년 작업 끝에『醫方類聚』편찬 완성
*1446년(38세) 부사직(副司直)에 올라 『釋迦譜』를 증 보수 찬함.
*1448년(40세) 승문원교리(承文院校理)에 제수됨.
*1449년(41세) 1월 兵曹正郞에 특별 제수됨, 2월 병조정랑지제교를 겸임, 5월 불당의 경찬에 부처의 공덕을 기리는 글을 지음, 11월 佛堂의 藥師齋에 참여.
*1451년(43세) 典農侍少尹에 임명, 徐居正 安希孟 崔恒 朴元亨 등과 함께 湖堂에 선발됨.
*1452년(44세) 知榮川 郡事가 됨, 詩『次榮川東軒韻』을 지음.
*1456년(48세) 9월 成均館 司藝 講說官이 됨.
*1457년(49세) 1월 製進祀天 宴會의 樂章을 지음, 文科 重試에 2등으로 합격, 2월 通情大夫 僉知中樞院事가 됨, 永同縣으로 모친을 찾아뵙고 문안함, 3월 명나라 사신 진감 고윤을 맞고 詩『丁丑年陪明使陳內翰鑑高太常閏遊於漢江及楊花渡船中次高韻』와 喜晴賦』를 지음, 8월 行上護昭格殿 行香使가 되어 세자의 치병을 위해 기도함.
*1458년(50세) 嘉善大夫 同知中樞院事가 됨, 왕명으로 梵書를 구하러 명나라에 가 甘露寺 주지를 만나 사언구를 지음, 이때『書漁陽館璧』과 『吉昌權公榮親詩』를 지음.
*1459년(51세) 2월 友善堂에서 『月印釋譜』繕寫한 것을 기림, 3월 嘉靖大夫 漢城府尹
• 行僉知中樞院事 임명, 4월 명나라 사신 陳嘉猷 • 王軏의 한강 유람에 동행, 9월 商州牧使 임명.
*1460년(52세) 詩 『과음사』를 지음.
*1461년(53세) 모친의 상을 당함 『모부인만장』을 지음.
*1463년(55세) 5월 『明皇誡鑑』諺解. 7월 工曹判書 임명.
*1464년(56세) 2월 『金剛經』諺解 참여, 5월 명나라 사신 金湜 張誠을 맞아 한강을 유람하고 『甲申年陪明使金太僕湜張舍人誠遊漢江次金韻』을 지음, 7월 對策考課에서 장원을 함.
*1465년(57세) 1월 上書하여 免職을 청하였으나 왕이 允許하지 않음.
*1466년(58세) 3월 임금의 상원사 거동에 隨駕, 5월 拔英試에 장원하여 崇政大夫로 加資되고 쌀 50석에 3일 잔치를 하사, 中樞院判事 승급과 함께 犀帶를 特賜, 7월 登俊試에 장원하여 戶曹判書에 임명, 『金剛山曲』을 지음, 임금의 治病을 기도하기 위하여 內佛堂 孔雀祈禱齋에 行香使를 맡아 봉행.
*1468년(60세) 8월 崇政大夫 追敍.
*1469년(61세) 10월 輔國崇祿大夫 陞級.
*1471년(63세) 3월 純誠佐理功臣 4등에 책록되고 永山府院君에 봉해짐. 8월 廣平大君의 부인 申氏가 노비와 전지를 佛寺에 施納한 文券을 집필한 사건으로 상소가 올라옴.
*1472년(64세) 輔國崇祿大夫 行判中樞府事가 됨.
*1473년(65세) 11월 領中樞府事로 승진, 辭職을 청하였으나 왕이 불허하다.
*1474년(66세) 詩 「甲午元日」를 지음.
*1475년(67세) 詩 「을미원일을 지음.
*1476년(68세) 『皇華集』序跋을 지음, 토지사건으로 司憲府가 推鞠, 이에 兩司의 탄핵를 받음.
*1477년(69세) 1월 사직을 청하나 윤허하지 않음, 2월 다시 輔國崇祿大夫, 永山府院君에 봉해짐.
*1481년(73세) 4월 輔國崇祿大夫 上護軍에 제수됨, 6월 7일 卒, 충북 영동군 한곡리 재상골에 안장됨, ‘文平’(勤學好問日文, 惠無內德日平)이란 諡號를 받음.
2. 유교국가에 남은 불교 가문
(1) 시대적 배경
1) 고려후기의 혼란과 멸망
고려 후기의 불교는 왕권의 비호아래 권문세가와 결탁하여 지주로서의 노비를 소유하고 소작과 고리대 등을 통해 물질적 이익을 꾀하며 날로 타락해 갔다. 권문세력과 양대 모순으로 인식될 만큼 부패한 불교는 나라의 존망을 가를 만큼 심각한 것이었으나 고려는 끝내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멸망했다.
2) 신왕조(이씨) 창립
고려말 성리학을 받아들여 불교의 부패와 폐단을 날카롭게 비판하며 공민왕의 개혁정치를 계기로 급속히 성장한 신진 사대부들이 결국 왕조를 바꾸게 된 것이다.
3) 억불숭유 불교 탄압
당연히 그들은 유교적 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노력에 적극적이었고, 불교를 이단시 하며 불교인은 배척 될 수밖에 없었다. 태조의 제도정비로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고, 성균관과 향교를 세워 유교사회의 토대를 구축하는 한편 사찰의 면세특권을 빼앗는 등 억불숭유정책을 펼쳤다.
4) 세종의 왕실불교로 호불정책
세종은 태종의 억불정책을 계승, 강력한 통치이념으로 배불에 적극적이었다. 7개 종파를 선교양종으로 통폐합, 승려들 성내 출입 금지, 유소년의 출가 금지 등의 엄한 불교 탄압.
사적으로 불교에 대한 애정이 있어 왕실 불교를 부활시킨 군주, 내불당 건립(1448, 대군과 수온 신미의 불경편찬을 적극 지원했다.
5) 호불왕 세조
왕권 찬탈, 계유정란, 동생과 노산군(단종)을 죽임, 가뭄의 계속으로 흉년, 민심이 흉흉해짐
피부병의 원인이 죄의 값, 신병을 불심에 의지, 복천사 행행, 노비 전답 공물 하사(실록;세조 10년 2월 28일), 대궐터 정이품송 말티재 돌기둥과 땅 상원사 중창 약속, 복천사에서 마음의 병 치료, 상원사에서 몸의 병을 치료한 왕으로 김수온과 신미의 후원이 컸다.
(2) 김수온의 가계
관조이며 고조 김영이(신라 45대 신무왕의 후손), 증조 영산부원군 김길원, 조부 우찬성 김종경, 부친 좌우동시학 김훈, 신미대사 혜각존자 맏형, 동생 강진현감 김수화, 세종조부터
성종조까지 불교신앙의 뿌리 깊은 가정으로 괴애의 외가까지도 불교신앙이 두터운 가족이었다. 신미와 괴애의 불교활동으로 보아 조선 초 불교숭상 활동으로 불교의 맥을 이어준 고승이고 유불선의 학자로 조선 초 4대 문장가이며 조선 8대 문장가로 청주목 관내 군현 토성의 위상을 더욱 높였다.
(조선왕조실록 세조 10년 3월 15일)
〇 세조 32권, 10년(1464 갑신 / 명 천순(天順) 8년) 3월 15일(무진) 2번째 기사 *原文
*工曹判書金守溫上書曰:
臣近蒙恩旨, 歸省故園, 得上父母丘壠, 卽以賜奠, 編祭祖考, 恩及九泉, 光動一方。 未何素望, 敢以及此, 頓首頓首。 臣於去年五月服闋, 自先母李永訣, 于今四年。 日月幾何, 墳草已荒, 遺迹完然, 形影莫覩。 臣循撫痛哭, 宛轉于地, 鄕人扶起, 良久乃立。 臣竊惟念先母李將終, 臣呼曰, “願母安心乘化。 和尙旣出家得道, 子亦非常俗人。 儻不諱子當長往出林, 成就道業, 必見母所生之處, 必救母所受之苦, 願母安心乘化。” 母嗚咽執臣手曰, “吾雖出家, 未斷汝等煩惱, 不能專精向佛。 今已報盡, 非惟目不能見, 耳亦不聞汝言矣。 以何夤緣旣生和尙又生汝, 驟蒙上德, 官至宰相, 今雖將死, 尙未忘情。” 於汝等母子, 恩深無刼可盡, 脫吾入地, 儻如汝言, 吾亦何憾?” 母言如在, 曷敢忘懷? 而賦性耎懶, 無自勇決, 尙未能上一章乞退, 叨冒聖上之寵, 虛抛歲月之久, 是臣事先母, 爲忘孝之子, 事殿下爲慕祿之臣。 子職旣曠, 臣儀亦虧。 且臣年五十六矣。 去年冬寒, 家無溫房, 布被轉輾, 呼吸冷氣, 精神斗覺於衰朽, 鬚髮尤增於皓白, 所謂豈惟歲遷? 兼復月化。 以臣所料, 寖加老憊如此。 決非浦質, 能久於世。 若又淹引數年, 縱殿下憐而放臣, 筯力旣違, 志慮益竭, 更復修何道、成何業, 以復老母臨死之言哉? 伏惟殿下興自首邸爲子之孝, 爲臣之忠, 聖德所隆, 天下所知。 伏望憐臣孝母之至情, 許臣求道之至意, 特免臣職, 遣使優閑。 限以三年, 如道不成, 付諸有司, 以治誣妄之罪, 以彰非孝之罰。 當今文武之臣如雲, 以之興化致治, 以之征伐四夷, 天心所向, 無不如意。 一介老儒無適於用, 有臣無臣決無所關。 比如乘雁集而滄海不爲之盈, 一毛去而九牛不爲之空, 堂堂聖朝, 豈乏人材而獨惜臣哉? 伏望聖慈。
上不允, 親書其尾曰: “道在方便濟世, 豈藉削髮乃修?” 後守溫令家人備酒果, 若餞客然, 到城東普濟院, 脫帽帶着便服, 盡還騶從, 使不得尋蹤, 到檜巖寺, 未幾還, 人譏執心不固。 守溫性疎闊不拘險, 文章浩妙, 時無比倫, 名於上國, 儒林推重。 家世學佛, 兄卽信眉, 封慧覺尊者, 母亦祝髮爲尼, 遵母遺意, 有是書。 居家寒素, 雖爲大臣, 蕭然有衲子之風。 國有大佛事, 守溫作疏語, 鋪張演溢。 嘗謂 “道可證而佛可効”, 爲人所笑。
〇 세조 32권, 10년(1464 갑신 / 명 천순(天順) 8년) 3월 15일(무진) 2번째 기사
공조 판서 김수온이 면직을 청하는 상서를 올리다. *해석문
공조 판서(工曹判書) 김수온(金守溫)이 상서(上書)하여 이르기를,
“신(臣)이 근자에 은지(恩旨)를 받아 고향에 귀성(歸省)하여 부모(父母)의 산소에 올라가 즉시 하사(下賜)하신 전물(奠物)로 조고(祖考)를 두루 제사지내니, 은혜가 구천(九泉)에 미치고 영광이 한 지방에 떨쳤습니다. 어찌 평소의 소망(所望)이겠습니까마는 감히 여기에 미치니, 머리를 숙여 사례합니다. 신이 지난해 5월에 〈어미의〉 상을 마쳤는데, 선모(先母) 이씨(李氏)가 영결(永訣)한 때부터 지금까지 4년이나 되었습니다. 날과 달이 얼마나 되었기에 무덤의 풀이 이미 거칠어 유적(遺跡)이 완연(完然)하여서 형영(形影)을 볼 수가 없었으므로, 신이 어루만지며 통곡(痛哭)하여 땅에 쓰러졌는데, 향인(鄕人)이 붙들어 일으키므로 얼마 있다가 일어섰습니다. 신이 가만히 선모 이씨가 임종(臨終)할 때를 생각하건대, 신이 〈어미를〉 불러 이르기를, ‘원컨대 어머님은 안심하고 승화(乘化)하소서. 화상(和尙)6428) 이 이미 출가(出家)하여 득도(得道)하였고, 저도 또한 범상한 속인(俗人)이 아닙니다. 만일 거리낄 것 없이 말한다면, 저는 마땅히 영구히 산림(山林)에 가서 도업(道業)을 성취하여, 반드시 어머니의 소생(所生)한 곳을 볼 것이요, 어머니의 받은바 괴로움을 구(救)할 것이니, 원컨대 어머님은 안심하고 승화하소서.’라 하였더니, 어미가 흐느끼면서 신의 손을 잡고 이르기를, ‘내가 비록 출가(出家)하였으나, 아직도 너희들에 대한 번뇌(煩惱)를 끊지 못하여 전심전력하여 부처님께 마음을 향하지 못하였다. 이제 이미 업보(業報)가 다하여 다만 눈으로 능히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귀로도 또한 너의 말을 듣지 못한다. 무슨 인연(夤緣)으로 이미 화상(和尙)을 낳고 또 너를 낳아서 크게 성상(聖上)의 은덕을 입어 재상(宰相)에 이르렀으니, 이제 비록 죽음에 다 달았다 해도 오히려 너희들에게 정(情)을 잊지 못하겠다. 모자(母子)의 은혜는 깊어서 영겁(永劫)토록 다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땅에 들어간 뒤 만일 너의 말과 같이 한다면 나도 또한 무엇을 걱정하겠느냐?’라 하였습니다. 어미의 말이 〈아직 귀에〉 쟁쟁한데, 어찌 감히 품고 있던 생각을 잊어버리겠습니까? 그런데, 천성이 약하고 게을러서 스스로 용단을 내리지 못하고, 아직까지 한 장의 글을 올려 물러가지 아니하고 함부로 성상(聖上)의 은총(恩寵)을 더럽히고 헛되이 오랜 세월(歲月)을 보냈으니, 이는 신이 선모를 섬기는 데에는 효(孝)를 잊은 자식이 되었으며, 전하(殿下)를 섬기는 데에는 녹(祿)만을 생각하는 신하가 되었습니다. 자식 된 직분이 이미 없어졌고 신하의 의표(儀表)도 또한 이즈러졌습니다. 또 신의 나이도 56세입니다. 지난해 겨울 추위에 집에 따뜻한 방이 없고 베 이불에 전전(轉輾)하면서 찬 기운을 호흡(呼吸)하니, 정신(精神)이 갑자기 쇠하고 썩은 것을 깨닫게 되고, 수염과 머리털은 더욱 흰 것이 많아져 이른바 어찌 해[歲]로만 변합니까? 달마다 변하는 것입니다. 신의 헤아리는 바로는 점점 늙고 고달픔이 이와 같이 더합니다. 결코 포질(蒲質)이 아니면 세상에서 더 오래 살 것이나, 만일 또 수년(數年)을 더 끌면 비록 전하께서 불쌍히 여기어 놓아주신다 하더라도 신의 근력(筋力)이 이미 쇠하고, 지려(志慮)가 더욱 없어지게 되니, 다시 무슨 도(道)를 닦으며, 무슨 업(業)을 이루어서 노모(老母)의 임종할 때의 말을 갚겠습니까? 엎드려 생각하건대, 전하께서는 수저(首邸)로부터 일어나서 자식 된 효(孝)도 하시고, 신하된 충(忠)도 하셔서 성덕(聖德)이 높으신 것은 천하(天下)가 아는 바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신의 부모에게 효도하는 지정(至情)을 불쌍히 여기시고, 신의 구도(求道)하는 지의(至意)를 허락하여, 특히 신의 직분을 면(免)하게 하여 〈신으로〉 하여금 우한(優閑)하게 보내게 하소서. 3년의 기한을 정하고 만일 도(道)를 이루지 못하면, 여러 유사(有司)에게 분부하시어 무망(誣妄)한 죄(罪)를 다스리시고, 효도하지 아니한 벌(罰)을 드러내게 하소서. 방금 문무(文武)의 신하가 구름과 같아서 이로써 태평의 치를 이루어 교화를 일으킬 수 있고, 이로써 사이(四夷)를 정벌(征伐)하여, 전하의 하고자 하는 것은 뜻과 같이 되지 아니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일개(一介)의 늙은 선비는 쓸만한 곳이 없으니, 신이 있고 없는 것은 결코 관계되는 바가 없습니다. 비유하건대, 나는 기러기가 모이더라도 창해(滄海)가 차지 아니하고, 한 털을 버리더라도 구우(九牛)에 빈 곳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당당(堂堂)한 성조(聖朝)에 어찌 인재(人材)가 모자라서 홀로 신만을 아끼겠습니까? 엎드려 성자(聖慈)를 바랍니다.” 하였다.
임금이 윤허(允許)하지 아니하고 친히 그 말미(末尾)에 글을 써서 이르기를, “도(道)는 세상을 구제하는 방편인데, 어찌 삭발(削髮)하고 중이 되어야만 닦겠는가?” 하였다.
뒤에 김수온이 집 사람들로 하여금 술과 과일을 갖추게 하고, 손님을 전송하는 것과 같이 하여 성(城)의 동쪽 보제원(普濟院)에 이르러 모대(帽帶)를 벗고 편복(便服)을 입고 추종(騶從)하는 자를 다 되돌려 보내고, 뒤따라오지 못하게 한 뒤에 회암사(檜巖寺)에 이르렀다가 얼마 안 되어 되돌아왔으므로, 사람들이 집심(執心)이 굳지 못한 것을 조롱하였다. 김수온은 성질이 소활(疎闊)하여 험한 것에 구애하지 아니하였고, 문장(文章)이 호묘(浩妙)하여 당시(當時)에 비교될 만한 사람이 없었으며, 이름이 중국(中國)에까지 알려져 유림(儒林)에서 추앙하여 존중하였다. 집안이 부처를 믿어 형(兄)은 신미(信眉)로서 혜각 존자(慧覺尊者)로 봉하였고, 어미도 또한 축발(祝髮)6429) 하고 여승[尼]이 되었는데, 어미의 유지(遺志)에 따라서 이 상서(上書)가 있었던 것이다. 집이 한소(寒素)하여 비록 대신(大臣)이 되었다 할지라도 납자(衲子)6430)와 같이 쓸쓸하였다. 국가(國家)에 큰 불사(佛事)가 있으면 김수온이 소어(疏語)를 지었는데 문장을 꾸민 것이 연일(演溢)하였다. 일찍이 ‘도(道)는 증명할 수 있고, 불(佛)은 본받을 만하다.’라고 하여, 사람들의 웃음을 받았다.
(3) 김수온과 조선초 불교
*호국불교를 자랑한 교려의 멸망도 불교의 탓이었다면,
*척불하며 숭유정책의 기반을 닦는 국정과 숭유유신들의 억압에서도 9대 성종대까지 시드는 불교를 마지막 꽃피운 신미대사와 괴애 김수온 선생의 업적을 알고 길이 후세에 전하자.
*국교를 국정의 바탕으로 했던 조선 초기 불교와 유교의 과도기에서 1500년의 긴 세월 동안 백성의 정신을 닦아 온 불교문화가 새로이 잠입한 유교문화에 동화될 수 있었겠는가 김수온 선생이 이 시대에 태어나지 아니했다면 태종이나 세종대왕 같은 임금도 빛을 발하지 못했을 것이 틀림없다.
*세종의 한글 창제로 김수온의 월인천강지곡을 시초로 한글(훈민정음)을 국민의 글로 만든 원조를 이룬 전무후무한 업적과 역경 속에서 조선 초 불교문화를 찬란히 빛낸 업적 또한 전무후무한 사실이기에 역사 속의 가장 훌륭한 인물로 높이 추앙하며 二大 업적을 자랑으로 길이 빛내고 영동 땅에 아니 전국 방방곡곡에 부각 시켜야 한다고 본다.
3. 청정한 도는 마음 안에 있거늘
(1) 신미대사의 위상과 영향
세조가 속리산으로 피접을 왔을 때, 지금 복천암이라 불리는 복천사에는 김수온의 맏형인 신미대사(수성)가 머물고 있었다. 그는 당대에 굴지의 명승으로 세종의 부름을 받은 후 성종대에 적멸할 때까지 역대 제왕의 존숭을 받았다. 세조대왕이 훈민정음 창제에 보필을 받은 대가로 법호를 준비하여 승하하며 문종에게 유허 하였으니 문종이 부왕을 대신하여 즉위년 7월 6일 하사하니 『선교종도총섭(禪敎宗都摠攝) 밀전정법(密傳正法) 비지쌍운(悲智雙運) 우국이세(祐國利世) 원융무애(圓融無礙) 혜각존자(慧覺尊者)』이다. “우국이세(祐國利世)와 혜각존자(慧覺尊者)”가 유신들에게 못마땅하여 상소를 빗발치듯 올렸다. 당대의 성군이었던 세종이 유신들의 거센 반발을 무릅쓰는 부담을 감수하며 기어이 사호(賜號)한 배경을 어떻게 해석하고 성종에 이르기까지 제왕이 존숭했으며 왕실의 힘을 얻어 복천사 도갑사 상원사 등 도처의 사찰을 중수, 중창한 불가의 큰 업적을 남긴 일과 세조 때 훈미정음을 널리 보급하기 위하여 『간경도감』을 설치하는 일을 주관 운영했고, 『법화경』『반야심경』 『영가집』 같은 불경을 언해 또는 법어(범어)의 해석 번역하여 유통, 『금강경오가해설』 1책 편찬, 『선문영가집』의 교정, 『증도가』의 주를 모아 책으로 간행, 간경도감본 중에도 『목우자수행결』 『사법어』 『몽산화상법어』 『원각경언해』 『선종영가집』 등을 번역하였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훈민정음 창제에 집현전 학사들이 관여한 사실이 전혀 없는데도 신미의 주역을 실록의 기록에 나타내지 않은 억불정치의 시대적 억압에 의한 고의적 사실이다. 김수온에 관한 실록의 기록에는 거의 예외 없이 ‘중 신미의 아우라’ 부기하여 괴롭히고 반발이 컸으니 김수온은 형의 덕을 본 것이 아니고 자력으로 유불의 위인이 된 것이다.
(2) 김수온의 유불사상
김수온의 불교성향은 가문의 전통에 바탕을 두고 있었으나 숭불억제 정책인지라 당당하게 숭불활동을 하기에는 쉽지 않은 시절로 왕실의 절대적인 신뢰를 얻고 있었던 형 신미의 영향으로 어느 정도 신변보장은 받고 있었으나 불교활동은 비난과 빈축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항상 변하지 않는 불심이 자리 잡고 있었으나 먼저 儒學者가 되었다. 과거시험이나 준비하는 유학의 공부가 아니라 학문적으로 깊이 천착하는 철저한 유학자였다. 부친의 면직된 이후 몰락된 불운한 가정에서 8세의 소년시절의 성장기에도 굴하지 않고 타고난 文才와 유별난 학구열로 학문에 전념하여 성현의 “용재총화”에 조선 8대문장가로 기록 되었으며 이름이 중국에까지 알려져 사신으로 가서 김희청으로 우대를 받았고, 불교숭상을 비난하던 유신들도 그의 문장에 대해서는 모두가 인정을 하였다한다.
그리고 그의 진리탐구 열정은 불교의 논리까지 이어져 학덕이 높은 고승들과 교유했다. 이와 같이 유불을 넘나들며 자유롭게 토론하니 정보의 교류와 학문적 인식의 폭이 넓혀져 서거정의 “필원잡기”에 문장의 훌륭함이 최고라 평했다. 이와 같이 유불에 통달한 유불사상가이다. (성종실록)
〇성종 36권, 4년(1473 계사 / 명 성화(成化) 9년) 11월 6일(계사)
4번째 기사
〇 영중추부사 김수온이 사직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김수온(金守溫)이 와서 아뢰기를, “신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어 이미 분수에 넘쳤는데, 이제 영중추(領中樞)로 승진시키시니, 능히 감당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청컨대 사직(辭職)코자 합니다.” 하니 전지(傳旨)하기를,
“경이 늙은 것을 측은히 여겨 특별히 제수한 것이니, 경은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김수온이 심취했던 화엄사상은 관음신앙, 영험과 공덕신앙 민간신앙까지도 수용한 염불신앙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세종실록)
〇세종 121권, 30년(1448 무진 / 명 정통(正統) 13년) 9월 8일(신묘)
1번째기사
〇 이개·임종선·여섯 승지·김수온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개(李)로 순성군(順城君)을 삼고, 임종선(任從善)으로 경주 부윤(慶州府尹)을 삼았으며, 여섯 승지(承旨)로 모두 첨사원(詹事院) 첨사(詹事)를 겸하고, 김수온(金守溫)으로 수승문원교리(守承文院校理)를 삼았는데, 수온(守溫)은 본래 부처에 아첨하는 자이다. 그 형 중 신미(信眉)가 승도(僧道)를 만들어 꾸며 임금께 총애를 얻었는데, 수온(守溫)이 좌우를 인연(夤緣)하여 수양(首陽)과 안평(安平) 두 대군과 결탁해서 불서(佛書)를 번역하고, 만일 궁내에서 불사(佛事)가 있으면, 사복소윤(司僕少尹) 정효강(鄭孝康)과 더불어 눈을 감고 도올하게 앉아서 종일 밤새 합장(合掌)하고 경(經)을 외고 염불을 하며 설법하여 조금도 부끄러워하는 빛이 없었다. 또 항상 대군(大君)을 꾀이기를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이 법화(法華)나 화엄(華嚴)의 미묘(微妙)함에 미치지 못한다 하므로, 여러 대군들이 임금에게 충성하는 것이라 여기어 임금이 특별히 정조(政曹)를 제수하라고 명하였는데, 마침 빈자리가 없기 때문에 우선 이 벼슬을 준 것이었다.
(3) 김수온의 활동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남다른 노력으로 학문에 매진한 김수온은 세종 20년 30세의 늦은 나이에 진사시에 급제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아 3년 후 신년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 정자에 임명되면서 세종이 그의 재주를 듣고 특명으로 집현전에 나아가 『치평요람』『의방유취』편찬에 참여했다. 세종이 글제를 내어 시문할 때마다 장원, 38세에 부사직에 올라 『석가보』를 편찬하고 승문원교리와 병조정랑지제교에 특별 제수, 하니 그의 빠른 승진에 조정 신하들의 반대여론이 거셌다. (세종실록 ; 세종 30년 9월 8일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종의 신임을 얻어 승진의 혜택을 본 것은 『찬불시가』와 같은 찬불가를 지어 왕실의 불사를 감당한 대가의 총애였다. 문종 1년에 전농시소윤이 되고, 정인지의 추천으로 서거정, 성간, 강희맹, 최항, 박원형, 등과 함께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의 기회를 얻었다. 문종 2년에 영주군사로 외직에 나갔다. 세조 2년에 성균관 사예(司藝)에 나아가 강설관이 되니 유신들의 참소가 심했다. 세조 3년(1457)에 문과 중시에 2등급제하여 통정대부첨지중추원사로 발탁, 이 때 영동에 계신 어머니 문안, 왕명에 의하여 내관에게 어주를 내려 임영대군과 영응대군 등 여러 대군들이 한강에서 전송하였다. 이 해 3월에 명나라 한림원 학자인 진감일행의 사신 방문 때 진감의 희청부(喜晴賦)에 화답(和答)하니 명나라까지 문명을 떨치어 2년 후 세조 5년에 명나라에서 진가유와 왕월이 사신으로 와서 한강 유람잔치에 진가유가 김수온을 찾을 정도였고, 후에 김수온이 행상호군으로 하정사신(賀正使臣)으로 가니 명나라 학자들이 김희청이라 불을 정도였다. 세조 4년에 동지중추부사, 가 되고 정조부사로서 명나라에 가니 중국 명승들이 김수온을 동국대유라 칭한다.
세조 9년(1463)에 『명황계감』을 언해, 공조판서에 임명, 이듬해 금강경언해, 세조 12년(1466) 발영시에 장원 조1품인 숭정대부가자, 판중추부사에 올랐다. 김수온 집이 가난함을 알고, 서대, 금낭, 의복 등 귀한 물건과 안마와 쌀 10석을 하사하였다. 이때부터 문과 무과의 장원에게 쌀을 하사하는 제도가 생겼다. 이해 등준시에 또 장원하여 호조판서에 올랐다.
예종 대에 보국숭록대부, 성종 대에 순성좌리공신 4등에 채록되고, 영산부원군에 봉해지고, 영중추부사를 겸하였다. 김수온은 재리에도 마음을 두지 않아 평생 청빈검약 하여 늙어갈 수록 가난이 심하였으나 천상 문인이요 학자였다. (성종실록 12년 6월7일 참조)
〇 성종 130권, 12년(1481 신축 / 명 성화(成化) 17년) 6월 7일(경술) 1번째 기사
永山 府院君 金守溫의 卒記 *原文
○庚戌/永山府院君金守溫卒。 輟朝、弔祭、禮葬如例。 守溫字文良, 永同人, 贈領議政訓之子也。 守溫生而穎秀, 正統戊午, 中進士, 辛酉, 中文科, 補校書正字。 世宗聞其才, 特命仕集賢殿, 預撰《治平要覽》。 上時時命題, 令集賢諸儒製詩文, 守溫屢居首。 歷訓鍊主簿、承文校理, 景泰庚午, 特除兵曹正郞, 辛未, 守典農少尹, 壬申, 出知榮川郡事, 丙子, 除成均司藝。 天順丁丑, 中重試第二人, 擢通政僉知中樞院事。 時守溫省母永同縣, 世祖遣中使, 賜醞于漢江, 命臨瀛大君、永膺大君及諸君, 往餞之。 戊寅, 拜嘉善同知中樞院事, 己卯, 陞嘉靖漢城府尹, 庚辰, 出判尙州牧事, 甲申, 資憲知中樞院事, 俄拜工曹判書。 成化丙戌, 魁拔英試, 特加崇政, 又魁登俊試, 陞判中樞府事。 世祖以守溫家貧, 命司饔院諸司, 供辦慶宴, 命政府諸相, 齎宮醞往押宴, 又遣中使, 賜犀帶、錦囊、羅、綺、衣服、靴、帽等物四十餘件, 鞍馬及米十碩。 自國朝設科以來, 登第之榮, 無此比也。 文武科壯元賜米, 自此始。 戊子, 陞崇祿, 己丑, 上卽位, 加輔國, 辛卯, 賜純誠佐理功臣號, 封永山府院君, 甲午, 拜領中樞府事, 丁酉, 復封永山府院君。 至是卒, 年七十三。 諡文平, 學勤好問: ‘文;’ 惠無內德 ‘平。’ 守溫博覽書史, 爲文雄健疏宕, 汪洋大肆, 爲一時巨擘。 嘗和大明使陳鑑喜晴賦, 蹈厲發越, 後守溫入朝, 華士爭指之曰: “此是和喜晴賦者耶。” 世祖屢策試文士, 守溫輒居魁。 嘗撰圓覺寺碑銘, 主文者多有刪改, 守溫見之曰: “大手所作, 小手其能竄改乎?” 然以信眉之弟, 酷耽禪學, 侫佛太甚。 嘗投檜巖寺, 欲爲髡不果, 其詭行如此。 又無檢身之律, 或鋪書籍, 寢處其上, 或衣布, 加金帶履屐見客。 性迂拙無幹局, 有心治産, 而居計甚疏, 處官事, 闊略無執守, 殊不類爲文氣象, 朝廷終不以館閣之任畀之, 與梁誠之、吳伯昌, 上書請封功臣, 得參佐理。 嘗自號乖崖, 有《拭疣集》行于世。
《번역문》영산 부원군(永山府院君) 김수온(金守溫)이 졸(卒)하였다. 철조(輟朝)하고 조제(弔祭)·예장(禮葬)하기를 예(例)대로 하였다. 김수온의 자(字)는 문량(文良)이고, 본관은 영산(永山)이며, 증 영의정(贈領議政) 김훈(金訓)의 아들이다. 김수온은 나면서부터 영리하고 뛰어나 정통(正統) 무오년11333) 에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고, 신유년11334) 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에 보임(補任)되었다. 세종이 그 재주를 듣고 특별히 명하여 집현전(集賢殿)에 사진(仕進)하게 하고, 《치평요람(治平要覽)》을 수찬(修撰)하는 일에 참여하게 하였다. 임금이 때때로 글제를 내어 집현전의 여러 유신(儒臣)을 시켜 시문(詩文)을 짓게 하면, 김수온이 여러 번 으뜸을 차지하였다. 훈련원 주부(訓鍊院主簿)·승문원 교리(承文院校理)를 지내고, 경태(景泰) 경오년11335)에 병조정랑(兵曹正郞)에 특별히 제수되고, 신미년11336) 에 수전농시소윤(守典農寺少尹)이 되고, 임신년11337) 에 외임(外任)으로 나가 지영천군사(知榮川郡事)가 되고, 병자년11338)에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가 되었다. 천순(天順) 정축년11339)에 중시(重試)11340)에서 제2인으로 입격(入格)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로 발탁되었다. 그때 김수온이 어머니를 성문(省問)하러 영동현(永同縣)에 가는데, 세조가 중사(中使)를 보내어 한강(漢江)에서 술을 내리고 임영대군(臨瀛大君)·영응대군(永膺大君)과 여러 군(君)들에게 명하여 가서 전송하게 하였다. 무인년11341)에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제배(除拜)되고, 기묘년11342) 에 가정대부(嘉靖大夫) 한성부윤(漢城府尹)에 오르고, 경진년11343)에 외임(外任)으로 나가 판상주목사(判尙州牧事)가 되고, 갑신년11344)에 자헌대부(資憲大夫)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가 되었다가, 이윽고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제배되었다. 성화(成化) 병술년11345)에 발영시(拔英試)11346)에 으뜸으로 입격하여 특별히 숭정대부(崇政大夫)를 가자(加資)받고, 또 등준시(登俊試)11347)에 으뜸으로 입격하여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올랐다. 세조가 김수온의 집이 가난하다 하여, 사옹원(司饔院)과 여러 관사(官司)를 시켜 경연(慶宴)을 준비하게 하고, 의정부(議政府)의 여러 정승들에게 명하여 궁온(宮醞)을 가져가서 압연(押宴)11348) 하게하고, 또 중사를 보내어 서대(犀帶)·금낭(錦囊)·나(羅)·기(綺)·의복·화(靴)·모(帽) 따위의 물건 40여 건(件)과 안마(鞍馬)11349) 와 쌀 10석(碩)을 내렸다. 우리 조정에서 과거(科擧)를 설치한 이래로 급제의 영광에 이런 전례가 없었으며, 문과(文科)·무과(武科)의 장원(壯元)에게 쌀을 내리는 것은 이때부터 비롯되었다. 무자년11350)에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오르고, 기축년11351)에 금상(今上)11352) 이 즉위하여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를 가자하고, 신묘년11353)에 순성좌리공신(純誠佐理功臣)의 호(號)를 내리고 영산부원군(永山府院君)에 봉(封)하고, 갑오년11354)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제배하고, 정유년11355) 에 다시 영산부원군(永山府院君)에 봉하였다. 이때에 졸(卒)하였는데 73세이다. 시호(諡號)는 문평(文平)인데, 배움이 부지런하고 묻기를 좋아함이 문(文)이고, 은혜로우나 내덕(內德)11356)이 없음이 평(平)이다. 김수온은 서사(書史)를 널리 보아 문장이 웅건(雄健)하고 소탕(疏宕)11357)하며 왕양(汪洋)11358) 하고 대사(大肆)11359)하여 한때의 거벽(巨擘)11360) 이었다. 전에 명(明)나라 사신 진감(陳鑑)의 희청부(喜晴賦)에 화답(和答)하여 흥을 돋우고 기운을 떨쳤는데, 뒤에 김수온이 중국에 들어가니, 중국 선비들이 앞을 다투어 지칭하기를, ‘이 사람이 바로 희청부에 화답한 사람이다.’ 하였다. 세조가 자주 문사(文士)를 책시(策試)11361) 하였는데, 김수온이 늘 으뜸을 차지하였다. 전에 원각사 (圓覺寺)비명(碑銘)을 지었는데, 주문(主文)11362) 한 자가 많이 고친 것을 김수온이 보고 말하기를, ‘대수(大手)가 지은 것을 소수(小手)가 어찌 능히 고치겠는가?’ 하였다. 그러나, 신미(信眉)의 아우로서 선학(禪學)에 몹시 빠져 부처를 무턱대고 신봉하는 것이 매우 심하였다. 전에 회암사(檜巖寺)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중이 되려다가 그만두었는데, 그의 궤행(詭行)11363)이 이러하였다. 또 자신을 단속하는 규율이 없어, 혹 책을 깔고 그 위에서 자기도 하고, 포의(布衣)를 입고 금대(金帶)를 띠고 나막신을 신고서 손님을 만나기도 하였다. 성품이 오졸(迂拙)11364) 하고 간국(幹局)11365) 이 없어 치산(治産)에 마음을 두었으나, 계책이 매우 엉성하였고, 관사(官事)에 처하여서는 소략하여 지키는 것이 없어 글하는 기상(氣象)과는 아주 달리 하므로, 조정(朝廷)에서 끝내 관각(館閣)11366) 의 직임을 맡기지 않았으며, 양성지(梁誠之)·오백창(吳伯昌)과 함께 상서하여 공신으로 봉해 주기를 청하여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참여되었다. 일찍이 괴애(乖崖)라 자호(自號)하였고, 《식우집(拭疣集)》이 세상에 간행되었다.
4. 진리를 얻을 수만 있다면
(1) 학문세계와 문학관
숭불을 전통으로 하는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김수온은 유학적 규범을 사회인식의 기준으로 삼고 있었으며, 학문하는 체계적인 방법과 구체적인 순서에 대해 뚜렷한 주관을 갖고 있었다. 김수온은 태재 유방선의 제자다. 유방선은 이색의 외증손으로 권근과 변계량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학맥의 적통을 이은 인물이다. 가화로 인해 평생 관직의 길로 나아가지는 못했지만 김수온을 비롯하여 강효문, 서거정, 성형, 이승소 등이 조선 초 관각문화를 이었다. 결국 김수온은 이색과 정몽주의 학풍을 계승하였으며 성리학적 사유는 기본적으로 주자학이다. 김수온은 학문의 근본을 유교의 경학에 두고 출발하였지만 평생을 심신수련을 통한 불교의 구도를 실천함으로서 유불사상 모두를 나름대로 조화하여 수용하였다. 외형적 차이를 떠나 유,불을 모두 수용하겠다는 것은 목적지향형의 학문적 특성을 지녔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학문문적 특성은 그의 문학의식 속에 반영되어 작품 속에서 구현 되고 있다.
(2) 문학관
김수온은 ‘사물을 통한 민심의 교화’ 라는 유교적 윤리관을 갖고 작품 활동을 했다. 文에는 사회적 윤리는 물론 현실적 치세의 道가 담겨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따라서 성현의 글을 통해 그 명확한 뜻을 밝히어 치세와 민생에 도움이 되는 진리를 깨닫고 그것을 올바르게 펼치는 것이 유자의 소임이요 문학의 길이라는 태도를 분명히 했다.
서거정의 동인시화에 써준 글과 같이 시의 최종 목표는 도에 있으므로 학식이 뛰어난 사람이 품평하는 것은 도를 함양하는데 있어 매우 긍정적이라는 입장을 엿볼 수 있다.
김수온은 실용적 문학을 충실히 구현하고자 노력하였고 당대의 문풍(文風)을 적극 수용하면서도 독특한 사유를 바탕으로 쏟아낸 개성 넘치는 시작품들은 우리 한시사(漢詩史)에서 그 의의가 자못 크다 하겠다.
5. 시공을 넘는 학문과 문학의 향기
(1) 명당인 생가의 구전
신미와 김수온의 조모의 장례에 지관의 말이 박장을 하여야 한다 해서 시역을 하니 한자 깊이가량 팠는데 암반이 나온지라 아무리 박장이라지만 한 자 깊이의 암반위에 모실 수 없어 망설이다 바위를 들어내어 더 파려고 바위를 힘겹게 재끼는 순간 밝은 빛이 비치며 벌이 한 마리 밖으로 날아갔고, 안을 들여다보니 두 마리가 더 보여 얼른 바위를 도로 덮고 그 위에 흙을 모아 시신을 모시고 봉분을 만들어 성분을 했으며 한 마리의 벌이 날아가는 것을 본 지관이 얼른 저 벌이 날아가는 곳을 따라가서 앉은 곳을 알아 두고 그 곳에 집을 지으면 명당으로 큰 인물의 자손이 태어난다 해서 하인을 시켜 따라가서 벌이 앉은 곳을 찾은 곳이 상용리 오얏골(괴애골)로 앞쪽으로 멀리 백화산까지 탁 트여 보이는 곳 앞에는 바리때 산 이라고도 하고, 붓끝같이 생겼다하여 필봉이라고 하는 곳의 옆에 있는 명당인 생가 터다.
(2) 드센 터에 어렵게 집을 짓다
벌이 잡아준 명당인 터에 집을 세우기로 정하고 집터를 닦아 집을 짓기 시작하였다. 기둥을 세우고 들보를 올려놓으면 밤새 무너지기를 몇 번, 그러던 어느 날 밤 꿈에 험상궂은 한 사내가 나타나 “내 터에 집을 짓게 둘 수 없으니 다른 곳으로 옮겨가라”고 호령하는 것이다. 김훈이 아무리 생각해도 단념할 까닭이 없어 “나는 내 뜻을 굽혀본 일이 없으니 중지할 수 없다.” 고 하자 “네가 끝내 고집을 한다면 네 아들을 내가 잡아 가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튿날 김훈은 꿈이 언짢았지만 무시하고 다시 집을 짓기를 계속하였다. 그런데 큰 아들이 갑자기 피를 토하고 쓸어져 죽는 것이 아닌가. 기가 막혔지만 물러설 수 없다며 일을 계속하자 사내가 또 꿈에 나타나 작은아들 마져 잡아 가겠다고 하더니 과연 둘째 아들도 잃고 말았다. 기왕지사 이렇게 된 바에야 더욱 그만둘 수 없다고 마음먹고 집을 완성하니 다시 꿈에 나타난 사내는 “운수가 네게 넘어갔으니 넘겨줄 수밖에 없구나.” 하며 이 터에서 쓸만한 자식을 얻을 것이다“하며 사라졌다. 그 후 수성(신미) 수경 수온 수화 4형제를 두어 과연 예언대로 큰 인물이 되었다.
(3) 문향의 향기
용산면 상용리 4번국도 옆 고속도로 진입로 입구에 『속동문선』에 전하는 김수온 시를 세긴 시비는 영동군 괴애 기념사업회에서 1986년 11월에 세운것으로 『高峯雲月軒』이다. 여남(지명)의 매자(교유 스님)가 운월헌 시를 지어줄 것을 청하여 어린아이를 꾸짖어 사리를 깨닫게 하는 내용의 시이다.
〇 高峯雲月軒 前文에
今 汝南梅子 辱知有年 而求題雲月軒 則意有不可孤焉者矣
雖然 母誚 其小兒强解事也.
금 여남매자 욕지유년 이구재운월헌 즉의유불가고언자의
수연 모초 기소아강해사야.
〇『題 高峯雲月軒』
雲有浮沈月晦明(운유부침월회명)
구름에는 뜨고 가라앉음이 있고, 달에는 밝고 어두움 있어
從來未若大虛淸(종래미약대허청)
이는 처음부터 태허의 맑음만 못하다.
憑君爲語高遁客(빙군위어고둔객)
그대를 방자해 고고한 은둔자에게 말하느니
莫把陰晴弄一生(막파음청농일생)
음청을 가지고 일생을 조롱하지 말게나.
이곳에서 용산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김수온의 신도비가 영산김씨 세거 비와 나란히 서 있다. 신도비를 지나 용산쪽으로 가다 오른 쪽 용산리 에 풍천당과 김수온과 부 조부 증조부를 모시는 풍계사가 있다. 상용리 사거리에서 한곡리로 가면 천관산 자락 재앙골(재상)에 김수온의 묘(지방문화재)가 있다. 김수온이 타계한 성종대에 문평 시호를받고 불천지묘(不遷之廟)인 부조묘가 보은읍 지산리에 있다. 1471(성종 2)년에 세운 서울 종로 탑골공원 안에 있는 대원각사비(보물 제3호)의 압면의 비문을 김수온이 지었다. 낙산사 동종의 종명을 김수온이 썼고 보물 제479호였는데 2005년 양양지역 산불로 녹아 없어져 2006년 10월에 복원하였으니 문화재 지정이 해제되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세종 때 안평대군이 낮잠을 자다 꿈에 본 도원을 화가 안견에게 그리게 한 몽유도원도 찬시를 썼다. 임진왜란 때 일본에서 유출하여 현재 일본 조도전대 박물관에 보관 중으로 일본의 국보로 지정하고 있으며 반환을 하지 않는다.
원각사 비 낙산사 종 부조묘 입구 물푸래나무(송시열 심음)
(4) 김수온이 관여한 서적들
치평요람, 의방유취(보물 1234호), 명황계감 언해본, 석보상절(보물 523호), 월인천강지곡(보물398호), 월인석보(보물745호, 935호), 식우집 24권중 현존 2권과 4권 (사진 참조)
1)치평요람
이 책은 중국역사와 우리나라 역사 중에 정치 사회 문화 등 각 방면에 걸쳐 임금 ․신하․ 백성들에게 권장하여 경계할 것들을 추려 내어 후손들의 귀감으로 삼고자 한 것으로 1445년(세종 27)에 완성한, 세종이 정성을 기울여 편찬한 책이다.
2)월인천강지곡
또한 1447년에 왕명에 따라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석보상절(釋譜詳節)》을 지어 올리자 왕의 측근이었던 김수온 (金守溫)이 왕명을 받들어 석가의 공덕을 찬송하는 노래를 짓기도 하였다.
3)의방유취
유성원 등 여러 문관 의관들과 더불어 모든 의술의 처방을 망라한 의 학 책을 편찬하는데 참여했다.
4)석가보
1446년(세종28) 부사직의 관직으로 있을 때는 석가의 족보 책인 석가 보를 다시 보완하고 수정하여 더욱 자세히 했다.
5)월인석보
1459년(세조 5) 간행된 석가의 일대기, 보물 제745호(11, 12권은 보물 935호).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과 세조가 지은 《석보상절(釋譜詳節)》을 개고(改稿)해 합편한 책이 다. 1457년(세조 3년)에 왕세자였던 도원군(桃源君)이 죽자 임금은 이 를 애통히 여겨 부왕과 죽은 아들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근 2년 동안 에 걸쳐 증보(增補) 수정하여 간행하였다. 세조의 명으로 당시 편찬에 종사한 사람은 신미(信眉) ․수미(守眉) ․설준(雪竣) ․홍준(弘濬) ․효운(曉 雲) ․지해(智海) ․해초(海超) ․사지(斯智) ․학열(學悅) ․학조(學祖) 등의 고승과 유학자인 김수온(金守溫) 등 11명으로, 이들은 당대의 불학(佛學)을 대표하는 선지식(善知識)들이었다. 내용은 《월인천강지곡》의 각절(各節)은 본문이 되고, 그에 해당하는 내용의 《석보상절》은 주석(註釋)같이 하여 엮어졌다.
《월인석보》 편찬은 세종 말엽에서 세조 초엽까지 양 대에 걸친 약 13년 동안에 이룩된 사업으로, 석가일대기의 결정판일 뿐만 아니라,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 이후 제일 먼저 나온 불경언해서(佛經諺解書)이며, 당시의 글자나 말을 그대로 보전하고 있어 국어사상(國語史上) 매우 귀중한 문헌이다. 원본이 완전히 전하지 않아 당초 몇 권으로 되어 있었는지 명확하지 못하나, 30권 이내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 전하는 것은 원간본(原刊本)과 중간본(重刊本)을 합하여 1 ․2 ․7 ․8 ․9 ․10 ․13 ․14 ․17 ․18 ․21 ․22권 등 모두 12권인데, 이 중에서 권7(崔南善 소장본), 권8(大同出版社 소장본), 권9 ․10(梁柱東 소장본), 권17 ․18(강원도 封陀寺 소장본)이 연세대학교 동방학연구소(東方學硏究所)에서 《국고총간(國故叢刊)》 제5 ․6 ․7로 1956년에 영인(影印) 간행되었고, 그밖에 국어학회편 《고전선총(古典選叢)》에 권1이 영인되어 있다. 권1 ․2는 경북 영주(榮州)의 희방사(喜方寺) 소장이고, 권13 ․14 ․23은 연세대학교 도서관 소장, 권21은 초간본 외에 경북 안동(安東)의 경흥사판(慶興寺板)과 충남 논산(論山)의 쌍계사판(雙溪寺板) 등 2종이 있고, 권23은 낙질(落帙)하여 63장(張) 이후만 전한다. 완질(完帙)이 24권으로 알려졌으나, 95년 12월 전남 장흥 보림사에서 제25권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오대산상원사중창권선문(五臺山上院寺重創勸善文) 국보 292호
金守溫 著書 및 關聯 寫眞
의방유치(보물 1234) 능엄경 언해 김수온발선종영가집 목우자수심결부4법어
석보상절(보물523) 월인석보(보물745) 상원사 중창 권선문(국보292)
몽상법어약록 몽유도원도 찬시 사리영웅기 허여문기(서울대 박물관)
(보물 1171)
〇 성종 101권, 10년(1479 기해 / 명 성화(成化) 15년) 2월 1일(무자) 1번째 기사
설경도 한 폭을 꺼내어 김수온·서거정 등에게 칠언 율시를 함께 지어 바치게 하다
내장(內藏)한 설경도(雪景圖) 한 폭을 내어, 영산 부원군(永山府院君) 김수온(金守溫)·달성군(達城君) 서거정(徐居正)·예조 판서(禮曹判書) 이승소(李承召)·함종군(咸從君) 어세겸(魚世謙)에게 명하여 칠언 율시(七言律詩)를 함께 지어 바치게 하였는데, 그 시(詩)는 이러하였다.
“큰 산은 하늘 찔러 만길토록 높다란데
눈송이 내려 한밤새에 흰빛으로 덮이니,
봉우리는 안팎이 깎은 듯이 분명하고
나뭇가지 높게 낮게 부러질 듯 늘어졌네.
얼어붙은 우레는 비를 일으키지 못하고
차가운 바위에는 원숭이를 못 보겠으니,
길이 희미하니 어느 곳에 그윽한 절 찾으랴
다리 끊겨 묵은 이끼 밟는 사람 없구나.
하늘 땅 사이는 온통 맑은 기운이요
누대(樓臺) 위 아래에 티끌 하나 없으니,
구학(丘壑)을 덮는 것은 본디 능사이지만
새싹에 윤택 줌이 바로 큰 재주로다.
추위가 산중에서 공연히 힘을 쓰나
양기는 땅 밑에서 벌써 비롯한 것을,
인간에선 풍년 상서 기뻐하건만
팔방에 찰 남풍(南風)을 늦게 보겠네.”
또 청산 백운도(靑山白雲圖) 한 폭을 내어, 승정원(承政院)·홍문관(弘文館)에 명하여 율시(律詩)를 짓게 하였는데, 그 시는 이러하였다.
“아지랑이 여기 저기 봉우리에 덮이고
바위 구덩이 들쭉날쭉 둘러 서려 있는데,
한 덩이 맑은 구름 뭉게뭉게 비껴 있고.
천 리 뻗은 봉우리 뾰죽뾰죽 솟아 있네.
이끼는 돌에 끼어 푸른 벼랑 촉촉하고
나무는 하늘 닿아 파란 산이 서늘한데,
냇물은 숲을 뚫어 콸콸 흘러 내리고
다리는 시내 걸러 아득히 걸려 있네.
대울타리 초가집의 마을터가 고요하고
절간과 탑이 있는 신선 마을 넓도다.
솜씨 좋은 화공(畫工)이면 본뜰 수 있을텐데
이경(異境)은 못 옮긴다 뉘라서 말하더냐?
비부(秘府)에 신품(神品)있다 들은 지 오래더니
기쁘게도 여기서 좋은 경치 얻어 보네.
산과 물의 풍경이야 노리개일 뿐이니
《무일(無逸)》9400) 그려 편안할 때 경계하고 싶어라.”
곧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성임(成任)에게 명하여 그 〈그림〉 위에 쓰게 하였다.
감 사 합 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