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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종 상
Lee, Jong Sang
정년퇴임기념 작품전
2003. 7. 28 ~ 8. 9
서울대학교 박물관 현대미술전시실
35年의 '停年退任記念展'을 갖는
一浪 李鍾祥 藝術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미래를 전망한다.
김남수 / 미술평론가
작가의 아호가 말해 주듯 한국화단에 격랑과 회오리를 몰고 온 일랑 이종상은 한국화단의 입지전적 인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신이 그에게 신필을 하사했다는 말이 두고두고 회자될 만큼 그가 그릴 수 없는 것은 무엇이며, 주어진 소재는 무엇이나 소화가 가능하다는 것이 주변 선후배, 동료들의 평가다. 그에게 형식이나 규제 혹은 장르나 양식 따위는 가설에 불과할 만큼 일상적인 조형행위에서 언제나 만나는 일이다. 40년의 작품활동을 한결같이 실험정신으로 일관해 온 그는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연금술사로 정평이 나 있다. 앞서 상술한 바와 같이 서울대학을 졸업하던 63년부터 근 10년 동안 그는 인물을 집중적으로 천착한다. '인물화를 연구하지 못한 작가와 그림을 논하지 말라'는 고사처럼 모든 예술의 기본기는 인물화에서 비롯되고 한치의 어긋남이나 정당주의가 용납되지 않는 것이 인물화의 세계다.
그는 훗날까지도 조선시대의 궁중화를 비롯한 영정이나 초상화, 여인군상이나 해학과 풍자가 넘치는 우륵도, 육오도, 원효대사와 오천원권 지폐의 율곡 이이의 초상화 등 실로 엄청난 인물화 작업을 연찬했다.
70년대 진경정신에 바탕한 진경산수의 발현은 <독도>나 <남산> 시리즈 등에서 명징하게 나타나고 있다. 민족과 역사의식이 극명한 자생미술을 통한 민족의 정체성 확립, <남산> 시리즈를 통하여 친환경적인 아스팔트 문명의 고발, 남산타워와 케이블카, <손 없는 날> 트럭에 이사짐으로 실려 가는 길게 누 은 고목나무의 희화적인 장면
그리고 77년 동산방에서 발표한 '독도진경전'은 이 모두가 당시의 한국화단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일부 전통양식을 최후 보루처럼 수성을 해 온 작가들에게는 시대의 반항아, 이단자로 매도되기도 했다. 그가 추구했던 '진경'전은 겸제 정선의 <인왕제색도>나 <금강산도>처럼 視點分析에 따라 표현질의 진수만을 축쇄, 감필, 精選 등 일랑만의 독자적인 조형어법을 <독도>의 연작에서 창조적으로 또 다른 '독도'를 재현해 낸 것이다.
작품 <獨島遺興>이나 <氣-獨島-4> <氣-獨島-2> <獨島日出> 등은 진경산수의 진면모를 구현하고 있으며 이렇듯 자생적인 우리의 것을 통한 민족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작업의 하나로 고구려 고분벽화와 고려 불화에 몰입하기 시작한다. 이미 작가가 연구한 인물화 등도 일련의 이 벽화운동과도 맥을 같이 하고 있으며, 일랑의 현대벽화연구 등에 많은 기여를 한 것이다. 일랑에게 있어 매재로서의 채료나 천연물감, 동양 삼국에서 유독 우리만이 가지고 있는 장지나 닥지, 창호지 등은 작가의 운필행위와 똑 같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프랑스 루불박물관 까루젤 샬르르 5세의 전시관에서 가진 루브르 사상 초유의 일랑 이종상의 현대미술초대전은 놀랍게도
일랑이 고안해 낸 '설치성 韓紙壁畵' 총 길이 71.3m, 높이 6m 등 파리인은 물론이요, 유럽인 등 지구촌의 미술 애호가를 경악케 한 일대 역사적 사건이었다. 작가는 이 벽화의 재질로써 한지를 오브제로 사용한 것이며 일랑이 최초로 창안하고 발명해 낸 '원형상'이 이 벽화전에서 연출된 것이다. 프랑스 문화성과 루브르박물관 당국은 두 번이나 연장전을 요구하여 11월 하순경 시작된 이 벽화전시회가 이듬해 1월 하순까지 계속되었다.
또한 물성이 갖는 접착성과 내구성에 취약성을 보완하기 위해 그가 고안해 낸 것은 바로 동판에 물감을 밀착시키는 동유화(銅釉畵)다. 한지의 철학을 완성한 율곡 이이의 5000원권 지폐의 초상화도 종래의 견사를 쓰지 않고, 처음으로 장지로 완성을 한 것이다. 또한 작가의 혼이 투영된 그리고 최소한의 언어로 축쇄시킨 <원형상> 시리즈는 전술한 장지와 조상이 물려준 천연염료, 감이나 치자, 꽃자주, 쪽물 등 한국의 오방색 물감을 손수 만들어 쓰고 있다.
結論
본지는 지난호에 작가 이종상을 표지 특집으로 평론가 이재언,김종근, 김남수씨를 통하여 '선화랑재개관초대전' '파리 루브르박물관 이종상 현대미술 초대전' '이종상 40년 가나아트 초대전' 등을 심층분석하여 재조명을 해 보았다. 이번에는 현재 서울대학교박물관에서 갖고 있는 '남산' '독도'의 문명고발전과 진경전, 그리고 '원형상'전을 誌上展으로 재조명해 보기로 한다.
한국화단의 역량 있는 거목으로 자리를 굳혀 온 일랑 이종상은 우리미술계의 지도급 산 증인이며 그동안 대학강단에서의 어렵고 힘든 모든 짐을 벗어버리고 전업작가로서의 본격미술을 구현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고 있다.
앞으로 세계미술시장에의 진출 등 그에게 거는 기대는 자못 크다. 21세기 한국미술의 미래상은 국가와 문화예술 당국, 뜻 있는 문화예술계 인사와 기업인, 그리고 한국의 미술계가 하나가 되어, 유능하고 역량 있는 세계적인 작가를 발굴하는 작업이며, 이들 정상의 미술인들을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우뚝 세우는 것은 정보화 시대의 첨단 IT산업에 못지 않은 국익을 위한 국가 전략사업으로 절박하리 만치 필요한 시점에 와 있다.
세계미술의 심장부요, 메카인 프랑스 같은 나라는 정부나 문화성 당국이 문화예술, 특히 미술부문에 엄청난 예산을 쏟아 붓고 있다. 이 분야가 외화창출의 무진장한 보고이기 때문이다. 선진국은 가능성이 있는 유능한 미술인들을 국가가 예산을 투자하여 관리하고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제 전업작가로 전향하는 일랑 이종상 같은 화가는 세계적인 미술인으로 각광 받을 수 있는 가능성과 노하우를 가지고 있으며 국가는 이들을 특별관리를 통하여 보호하고 지원해야 한다. 국가백년대계의 초석을 다지는 것은 만시지탄이 있지만 이토록 버려진 옥석을 하루 빨리 가려내어 국가사업으로 경영하는 일이 초미의 과제이며, 이들에게 투자한 재원의 몇 십만 배의 보상이 이들 미술인들을 통하여 과실이 되돌아온다는 것을 국가나 관계당국은 알아야 한다.
편집자註본란은 오늘 8월 정년퇴임을 하는 동양화가 일랑 이종상을 표지작가 특집으로 엮었다. 해방과 함께 한글 1세대인 그가 대학 교수로서의 35년을 마감하고 작품활동 40년의 중간결산을 시점에서 이번 '선화랑'재개관 기념 초대전은 큰 의미를 갖는다. 그의 아호가 말해주듯 한국화단에 격랑과 회오리를 몰고 온 입지전적 인물이 일랑 이종상이다. 그가 그릴 수 없는 것은 무엇이며 그가 못 그리는 것은 무엇인가 할만큼 신은 그에게 신필을 하사한 것이라는 뒷 이야기들이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그에게 장르나 양식은 사치스러운 가설에 불과하다. 그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예술행위는 무엇이나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가 걸어 온 행적을 쫓아 그 몇 가지 사례를 요약해서 검증해 본다. 그는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연금술사다. 화력 40년의 작가의 역사는 실험정신으로 일관해 온 불사신이다. 4.19와 5.16은 인물화 등 군중을 주제로 한 민중의 삶과 서민들의 고초를 그렸고, 70년대는 진경정신에 바탕한 진경산수를 그렸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민족과 역사의식이 극명한 작품 <독도>나 <남산> 시리즈를 지적할 수 있다. 그후 자생적인 우리의 것을 통한 민족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고구려 고분벽화와 고려 불화에 심취한다. 오늘날 현대적 감각의 프레스코의 완성에 성공한 것도 여기에 기초한다. 또한 조선시대의 영정이나 초상화, 궁중화 등도 우리의 것을 찾자는 일련의 벽화운동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일랑에게 매재로서의 재질은 그의 운필행위와 함께 똑 같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동양 삼국에서 우리만이 가지고 있는 장지나 닥지, 창호지 등의 기법과 고안은 일랑이 창안하여 예술로 승화시킨 최초의 선례가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물성이 갖는 접착성과 내구성에 취약성을 보완하기 위해 그가 고안해 낸 것이 바로 동판에 물감을 밀착시키는 동유화(銅釉畵)다. 장지(漢紙)의 철학을 완성한 그는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5000원권 지폐 율곡 이이의 영정을 종래의 비단을 쓰지 않고 장지로 완성을 했다. 또한 최소한의 언어로 축쇄시킨 최근작 <원형상> 시리즈는 장지와 조상이 물려 준 천연 염료, 감이나 치자 물감 등 오방색으로 작품을 완성하고 있다. 그가 프랑스 루블 박물관의 까루젤에서 사상 초유의 한지로 설치벽화 초대전의 앵콜 연장전을 가졌다던지, 98년 프랑스의 월드컵 문화축전에 세게 80대 작가로 선정되어 아르망, 팅겔, 세자르 등과 함께 축구를 소재로 한 전시회를 가진 것 등은 현대미술사의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이 칼럼은 일랑 이종상이 선화랑 초대전과 함께 이미 가졌던 대표적인 작품전을 평론가들의 글과 함께 그의 예술세계를 재조명함으로서 후학들의 귀감으로 삼고자 한다. |
다면적 경험들의 종합적 테제
이재언 / 미술평론가
필자가 일랑(一浪) 이종상을 처음 대면한 것은 약 10여 년 전 문예진흥원 대강당에서 있었던 한국미학예술학회 심포지엄에서였다. 그가 한국미술의 자생력을 위한 미학예술학적 정초를 가늠하고자 하는 주제의 심포지엄에 발표자로 초대된 것이었다. 보통 미학 관련 학자들이나 이론가들이 나오는 자리에 작가의 등장은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였다. 그는 그날의 심포지엄에서 참가자들에게 가장 큰 호응을 얻었다. 작가로서 오랫동안 고뇌해 온 '우리'라는 정체성의 문제가 왜, 그리고 어떻게 문제가 되었는지, 아울러 그 문제의 논의는어떤 방향으로 정리되어야 하는 지에 까지 논리 정연하고 설득력 있게 설파하는 그의 모습은 좌중을 압도하고도 남았다. 무엇보다 정체성의 문제에 대해 체험과 논리가 잘 조화된 점도 인상적이었지만, 그가 작가로서 확고한 신념과 가치관을 정립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미술에 일말의 기대와 희망을 가진 바 있다.
그 후부터 필자가 멀리서나마 지켜본 작가 이종상의 모습은 한 마디로 간단하게 기술하기 어려운 문제의 작가였다. 캐면 캘수록, 그리고 알면 알수록 작가의 진면목은 더 복잡하고 어려워지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작가는 창작만이 아니라 이론에까지 두루 해박하고 논리 정연하며, 또한 오래 전에 짜여진 각본이 실행되기라도 하듯이 시대에 따라 그의 예술세계는 길고 짧은 호흡들이 조화를 이루며 무수한 화두를 던지며 부각되었던 것이다. 그의 예술세계가 복잡하고 어렵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에 대한 비평적 기술은 부담스럽기 마련이다. 아니 어렵다기보다는 범접하기 어려운 것일 수도 있다. 우리 혹은 전통에 대한 작가의 신념이 진지하고 심오하며, 나아가 경건하게까지 느껴지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조형세계는 오래고 치밀한 예술철학적 논리의 무장으로 말미암아 어느 정도 신비화되어 있을 수 있다.
작가는 지금까지 우리 미술계에 무수한 이슈와 화두를 제기해 왔다. 많은 이슈들이 있지만 그것들은 바로 우리 미술의 정체성, 전통의 문제로 수렴된다. 작가는 굴절되고 왜곡된 우리 현대사의 증인으로서, 그리고 교육 현장에 있는 작가로서 정체성의 혼돈은 간과할 수 없는 문제였다. 사실 정체성의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고뇌하고 있는 문제다. 하지만 그것이 인식의 측면에서 간과할 수는 없지만 자칫 잘못하면 그것의 역효과도 적지 않게 된다. 적지 않은 이들이 우리의 정체성 상실 혹은 왜곡에 대해 현대사의 굴곡에 의한 운명적으로 피할 수 없는 현실쯤으로 여기고 있다. 개탄스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더 심각한 일은 오히려 정체성에 대한 대응이 어설프거나 혹은 과잉으로 치달을 경우이다
상당수의 식자들이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우리의 전통적 그림을 '한국화'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우리 제도 속에 정착시키는 등 나름대로 노력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럴수록 우리의 정체성이라는 것은 특수성 속에서 더욱 고립되기만 할 뿐 보편성 획득이 요원해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작가는 전통 회화를 한국화로 부르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프랑스인들이 자기들의 전통회화를 프랑스畵라 부르지 않는 이유를 통해 충분히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이다. 우리 전통적인 그림을 회화로 부르고 근현대에 도입된 외래의 그림들을 서양화라고 부르면 될 일이고, 그것이 자연스럽고 바람직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사실 이런 점들에 대해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필자의 입장에서 이는 새롭게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마찬가지로 작가에게서 전통이라는 것도 그것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내면에서 유출되는 것이지 어떤 형식 논리로 규정될 수 없는 것이라 한다. 오히려 전통은 극복되고 해체되어야 할 대상이기도 함을 힘주어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작가는 철저한 실학적 혹은 실용주의적 입장을 표방하고 있다(실학과 실용주의가 일치하는 것은 아니나 현실의 문제에 접근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병용하였다). 작가에게 우리 것이기 때문에 막연히 두둔한다는 식의 편협한 논리는 용납되지 않는다. 냉철하게 현실을 직시하고 반성하며 예술은 바로 그 맥락에서 대입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실 필자는 화가 이종상을 프래그마티스트로 부르고 싶다. 많은 오해가 있을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부르고자 하는 이유는 이렇다. 우선 자칫 그의 여러 입장이 편협한 이데올로기의 국수주의로 비쳐질 것으로 우려해서다.
당연히 탐구의 대상으로서 '자아'와의 함수관계를 가지는 전통 혹은 공동체, 신화 등의 문제는 국수주의라 불릴 수 없다. 자주와 자존을 지나치게 이데올로기로 포장하여 그것을 이미 생명 밖의 영역으로 내몰았을 때 그것은 국수주의인 것이다.
다음으로는 그의 그림이 언제나 현실과의 긴밀한 관계와 컨텍스트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이다. 작가와 주변의 식자들이 생산하는 작가에 대한 담론들이 다분히 관념적인 측면으로 흐르는 경향이 없지는 않으나, 어디까지나 작가의 몫은 현실과의 유기적인 관계 속에 예술을 대입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작가가 초기 현실 참여적인 혹은 고발적인 주제들에 관심을 가진 것에서나 오늘날 '원형상'이라는 범자연적인 문제들 전체가 바로 프래그마티즘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예술은 인격 도야의 한 도구'라는 식의 도구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인 인식이 예술창작의 기저를 이루고 있다.
끝으로 그의 예술관은 다분히 전통에 대한 해체주의적 입장이며 이를 이해시키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미국의 실용주의가 인간과 현실과의 관계를 조화적으로 복원시키고자 하였던 수준에서의 해체에 가깝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과의 상생적 조화를 강조하는 철학이 그의 예술세계 전체를 흐르고 있다는 사실이 더 부연될 필요가 있다. 세계 속에서 대립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많은 요소들이 작가의 작품세계 안에서 결합되거나 혹은 동일시되고 있다는 점 말이다. 그는 현실의 문제를 자신의 화면 안으로 끌어들이는 데 기본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리얼리스트로서의 측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런 관점에서 보노라면 작가는 어느 사이 예술 혹은 자신의 작업을 최고의 이상과 소통 그 자체로 간주하는 이상주의자로 변해 있는 것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작가는 작가이기 이전에 예술철학자 혹은 이론가이기도 하다.
하늘과 땅이 순환되고, 상호작용하며, 긴밀히 연관되며, 윤회의 가설이 개연성을 갖는 비가시적 질서를 조형으로 승화시키고자 하는 것이 원형상인 것이다.
이 지점에서 일랑의 회화는 사유와 관조, 행위의 자유를 얻고 있는 듯하다. 물론 재현적 그림의 단계에서부터 진화되어 온 과정을 보면 그의 그림은 분명히 추상적으로 경도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작가에게 추상과 구상의 구분 자체가 무의미하다.
<원형상(源形象)- 천지(天池)>56 x 56cm 동유화(銅釉畵) 1995
작가가 초기 '진경'의 정의를 내리는 데서 이미 오늘의 원형상이 가지는 개념적인 것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범자연의 변화무쌍한 기(氣) 혹은 에너지의 대사가 인간에게 전이되어 인간이 희구하는 자연과 자유를 동화시키고 아울러 참된 자유와 해방으로 인도할 것이라는 가정은 선대의 현인들이 해온 터이다.
일랑의 원형상 테제를 담은 화면들이 다름 아닌 바로 그러한 범자연의 기의 순환을 담고자 하고 세계 생성의 원형질을 투영시키고자 한 것이다. 관객의 입장에서 작가가 누렸음직한 자유를 마찬가지로 공감할 것을 시사하고 있다. 작가가 조그만 획 하나 하나에도 불어넣는 무엇인가가 삽입 혹은 투영되어 있다는 사실은 우리의 시선을 좀 더 긴장 속의 여유로 가져가게 한다.
점차 근작으로 올수록 호방하고 다이나믹한 서법적 필선들이 이제 절제되고 정제된 기호나 상징으로 탈바꿈해나가고 있다. 무슨 일이든 즉흥적이기보다는 치밀하게 준비해 들어가는 작가의 작업 호흡은 참으로 길다. 오랜 동안 작가는 무언가를 작품에 싣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가 이제 작가는 다시 그것들을 덜어내는 방향으로 선회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작가의 오랜 정체성 회복이라는 대장정 속에 덜어낼 무엇이 있으랴마는 여백과 여운이 한층 많아진 화면에서의 관조는 관객의 참여에 훨씬 관대해진다작가와 관객의 진정한 하나됨의 계기가 이제 긴 호흡 속에 자연스럽게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특히 매재의 물리적 성질 스스로 말하게 하는 것 같은 여유는 유유히 흐르는 대하와 같은 경건함 바로 그것이다. 작가의 그림들 앞에서 우리는 유유하게 흐르는 큰 강의 긴 흐름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 강의 도도한 수면 위에서 우리 미술의 밝은 미래를 볼 수 있으니 참으로 행복한 일이 아닌가.
一浪 李鍾祥
파리 루브르 博物館 까루젤 샬르르 5세 展示館에서의 招待展-
史上 初有의 現代美術 進出,파리 市民의 抵抗이 앵콜로 反轉,
두 번의 延長展까지 가져
김남수 / 미술평론가
프레스코 등 고구려벽화의 현대화 작업으로 이미 명성을 얻고 있는 작가는 세계 최장. 최대의 평면구성의 설치성 韓紙壁畵-길이 71.3m, 높이 6m-를 루브르에서 연출하고 있는 것과 관련하여 당시 현지를 참관한 세계의 미술전문가, 학자, 석학, 현지의 매스컴 등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국내의 매스컴 등이 일제히 보도를 한 바 있지만 본란은 올 8월 정년을 앞두고 대학강단을 떠나는 작가의 고별전의 의미를 되새기고 화단 40년 활동의 중간결산을 하는 전환점에서 작가의 본격예술을 심층분석을 해 보자는 뜻으로 루브르초대 작품의 역사성, 시대성, 예술성, 작품성을 심층 분석하여 재조명해 보기로 하였다.
그러나 한국의 현대미술초대전에 일부의 반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외무성이 그 역사적인 개최를 결정하고 문화성이 적극 후원함으로서 이루어진 쾌거였다. 당시 주최측은 전시 기간 중 샤를르 5세 전시관 입구에 홍보현수막 1개를, 전시공간 반대편에 2개를 설치했으며, 파리시내 주요 10개 장소에 대형 안내 포스터를 설치했다이 작품의 歷史性 이 작품을 통하여 우리는 예술성과 작품성을 초월한 한 시대를 살아가는 작가의 투철한 역사의식과 애국적인 민족사관, 그리고 한·불 문화교류의 새 지평을 여는데 큰 기여를 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866년(고종3년), 프랑스 로즈 제독이 극동함대를 이끌고 강화 섬에 상륙했다. 당시 기독교 선교 활동을 하고 있는 프랑스신부 12명 가운데 9명을 살해한 대원군의 쇄국정책과 카톨릭 탄압에 대한 응징으로서의 군사적 행동이었다. 이 사건을 우리는 병인양요라 불렀고, 이해 대원군은 내국인 카톨릭신자 8천명을 학살하는 병인사옥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렇듯 한·불 관계는 종교문제로 발단한 사건이 군사문제로 비화되었으며, 다시 경제교류와 외교관계를 맺은 후 이제 와서 호혜평등의 한·불 문화교류를 향유하게 된 것이다. 물론 150여년 동안에 한·불 관계는 군사적 강약의 불평등, 경제교류를 통한 상호이익의 추구 등 국가적으로 볼 때 쌍방이 많은 혜택을 누려온 것도 사실이다. 작가 이종상은 한·불 문화를 상징하는 역사적인 작업의 하나로 파리의 심장부 루브르의 샤를르 5세의 대 성벽을 차경(借景)하여 江華섬의 마리산(마니산)으로 도치(到置)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
프레스코 등 고구려벽화의 현대화 작업으로 이미 명성을 얻고 있는 작가는 세계 최장. 최대의 평면구성의 설치성 韓紙壁畵-길이 71.3m, 높이 6m-를 루브르에서 연출하고 있는 것과 관련하여 당시 현지를 참관한 세계의 미술전문가, 학자, 석학, 현지의 매스컴 등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국내의 매스컴 등이 일제히 보도를 한 바 있지만 본란은 올 8월 정년을 앞두고 대학강단을 떠나는 작가의 고별전의 의미를 되새기고 화단 40년 활동의 중간결산을 하는 전환점에서 작가의 본격예술을 심층분석을 해 보자는 뜻으로 루브르초대 작품의 역사성, 시대성, 예술성, 작품성을 심층 분석하여 재조명해 보기로 하였다.
그 이유 중 하나는 프랑스함대의 강화섬 치략의 악연이 역사적 변천과 더불어 그들의 자존심인 루블에서 20세기말 세계최초로 갖는 현대미술전에 한국인 작가가 첫 번째 영광을 안음으로써 화해와 융합의 기초를 다졌으며, 그 작품의 경이성에 감격, 연장 앵콜전을 두번씩이나 주최측의 요청을 받은 사건 등을 지적할 수 있다.
2) 세계 최대, 최장의 한지(韓紙)가 설치벽화로 완성되어 예술의 심장부인 파리에서 연출되고 있는 점을 지적할 수 있고, 특히 평면회화로서의 설치오브제의 차경(借景), 배면조명법(背面照明法), 표리의 투명화법 등 새로운 예술양식의 창조적 의미를 지적할 수 있다.
3) 이 작품의 주제와 정신에서 한국인의 겉과 속이 일치하는 윤리관에 바탕한 관용의 미학, 한국인만의 자생적인 미학을 세계 속에 알리는 기폭제가 되었고, 일부에서 주장해 온 한국화의 위기가 아니라 세계 속에 한국화가 도약할 수 있는 새로운 전기가 마련된 것이며, 우리 미술의 우월성이 사실상 공인이 된 것이다.
4) 재료, 기법학적 시각의 새로운 창출을 이 작품을 통하여 음미할 수있고, 루브르 까루젤의 미술사 속에 이 역사적인 이벤트는 기록될 것이다.
다음에는 작가 이종상의 작업노트에 수록된 글 중에서 이 자품제작과 관련한 글귀의 일부를 소개함으로 이 작업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고자 한다.
- 작업일지 '設置를 끝내고'중에서 -
李 鍾 祥
● CARROUSEL의 성벽이 현대문명의 콘크리트벽 속에 가두어져 있었던 것을 한국의 너그러운 관용미학으로 포용하여 원래의 자연의 모습으로 해방시키고 싶다.
● 한·불의 관계는 처음 종교문제에서 출발하여 군사문제-경제-외교-문화로 비화, 발전되는 과정에서 군사적 강약의 불평등으로 많은 잘못도 있었고, 서로의 혜택도 있었다.
불란서 문화를 상징하는 대 성벽을 오브제로 차경(借景)하여 조화를 이룰 수 있는 한국회화의 관용미학을 현대미술 속에 시험하는 기회로 삼고 싶었다.
● 한국의 창호문화, 이것은 관용을 의미하며 자연과 일치를 이루는 소통문화다. 한국의 창호는 반투명의 스크린 막을 內外에서 인간과 자연, 주관과 객관을 사이에 두고 그 양쪽을 동일시 합일시하며, 동창이 밝아오거나 달이 밝을 때 창호에 맺히는 빛과 그림자를 보며 방안에서 대자연과 하나가 됐고, 방안에 등잔불이 밝아 인기척의 그림자가 창호지에 비치면 밖에서 안쪽과 교감할 수 있는 일치의 창호문화의 아름다운 미학을 불란서의 가두어진 성벽과 조화를 꾀하고 싶었다.
● 성벽은 구시대의 무력으로 땅 뺏기를 할 때의 유물이다. 20세기 경제전쟁 시대를 넘어 2천년대는 문화전쟁, 정보화시대를 맞는다. 한국과 프랑스 문화를 새롭게 조화시켜 고부가의 문화창조를 해야하는 예시적 작품이다.
● 세계최초의 활자 인쇄 책 <직지심경요체>가 존재할 수 있었음은 위대한 한지가 있었기 때문임을 잊고 있다. 나는 그와 똑같은 한지를 71m 30cm 이어 붙여 전통적인 지공예 채색인 자연채료를 써서 가장 현대적인 그림을 그려보고 싶었다. 그림의 재료는 국산 100% 백닥지 이며, 2장 맞배접, 엇물림법을 써서 71m 30cm의 길이가 1장처럼 투명도를 유지토록 했으며, 고열에 견딜 수 있는 것은 한지의 우수성 때문이다. 기법에서 한지의 독특한 분광효과(分光效果)를 응용한 투명도를 최대로 높여야 함은 물론, 71m 30cm의 거대한 화면에 변화를 주기 위하여 여러 가지의 묵법(墨法)을 시대별로 사용하였다. 오방색(五方色)은 백색만 종이의 두께로 조정하고 나머지 4색은 모두 전통적인 치자, 쪽물. 꼭두서니, 감 등 착염도가 가장 높은 천연 채료만을 제조하여 썼다. 작품의 크기, 조명방법, 설치벽화의 개념, 최대 건축물의 오브제 사용, 그 밖에 특수 배접 등 참으로 어렵고 험난한 제작과정을 거쳤다. 이 작품은 인간 일랑의 힘만으론 불가능했다. 창호의 뒤에서 밝은 햇살이 있어야 하듯이 그리스도의 영혼의 빛살이 비춰주기를 기도로서 간절히 구했던 결과이며, 나를 도왔던 많은 착한 이들과 열심히 배우고 싶어하는 제자, 그리고 끝까지 지친 나에게 용기를 밤낮 없이 기도를 드려준 아내의 힘이 컸다. 정말 나로서는 최선을 다한 작품이다. 하느님께서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주기를 간구하면서 말이다. 이 작품이 프랑스 사람들의 자존심의 한 복판인 루브르 까루젤 대 전시장에서 한국미술의 독자적 자생성을 알리고 한국화의 무한한 잠재적 가능성을 고구려벽화의 맥을 이은 이번 <源形象-97061-마리안>에서 찾게 된다면 더 없는 영광으로 생각한다. 일랑 이종상은 1938년 충남 예산에서 출생했다. 대전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한 그는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철 |
一浪, 그 40년의 波濤와 그칠 줄 모르고 타오르는 鎔鑛爐 김종근 / 미술평론가 |
일랑, 하나의 파도 이종상, 무엇보다 그의 예술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벅차다. 가슴 벅찰 뿐만 아니라 오히려 눈부시기까지 하다. 그가 붓을 들고 화폭을 지나칠 때마다 그는 언제나 새로운 형상을 가지고 화단에서 주목을 받아왔다. 그 새로운 모습은 규모에서나 왕성한 창작열에서나 여느 작가들이 감히 근접하기 힘들 정도로 큰 것이었다. 따라서 그를 지칭하는 수식어들은 예술가로서 그의 작업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평가가 주종을 이루었다. 이러한 이유로 그의 회화에 대한 예술적인 평가나 비평적인 시각은 언제나 우호적이었고 그것으로 곧 이종상은 한국화 2세대의 가장 뛰어난 작가군 가운데 하나로 자리매김 되어 졌다. 그의 활동과 노력은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에서도 이목을 집중 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적인 평가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랑의 작품세계를 정의하고 평가하는 데는 얼마간의 어려움이 뒤따른다. 그것은 일랑(一浪)의 작품세계가 다양한 회화 양식을 부단히 보여왔고, 뿐만 아니라 표현양식이나 주제에 있어서도 몇가지의 실험적 양식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마치 일랑(一浪)작업의 흐름을 개관한다는 것은 한국회화를 일별하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의 작가로서의 의식 형성은 서울대 미대 시절인 1960년 23살 장욱진과 권옥연의 강의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가 이들에게 강의을 들으면서 '서구의 것을 흉내내고 있었던 자신의 모습을 부끄럽게 생각하며 유화도구를 불지르고 청전선생을 만나 동양화를 시작했다'는 이 일화는 사실 그의 작업세계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준다. '자신의 것'이라는 단어는 후에 그가 수없이 되뇌이고 고민했던 '자생회화'와 관념산수를 떠나 진경산수 작업을 향하게 되는 관점 등 그의 회화 역정과 그대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회화 세계를 형성하게 되는데 있어 일랑(一浪)이 어떠한 형태로든 사숙했던 동양화의 선생들을 지나칠 수는 없다. 전통적인 소재의 인물이나 산수는 심산 노수현(盧壽鉉)에게서, 월전 장우성(張遇聖)에게서는 '문인화의 멋과 운치'를 산정 서세옥(徐世鈺)에게서는 주제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단순화시키며 조형화 시 |
키는 것을 배운 것으로 일컬어진다.
그 외에도 박세원, 박노수 씨 등에서도 그의 작가로서의 영향이 있었고, 그로 인해 그의 예술세계 형성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여진다.
젊은 그에게 1961년이라는 해는 또 하나의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해주는 계기가 된다. 그것은 프랑스 작가 발랑제씨가 시연한 벽화강의와 프레스코 기법제작을 통해 고구려 벽화연구와 한국회화의 자생성 획득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자생성의 획득이라는 숙제를 안고나선 그의 예술가로서 화단 데뷔는 화려하게 시작되었다.
1962년 가을에 열린 제11회 국전에서 일랑은 300호라는 대작<작업(作業)>을 출품 내각수반상의 영예를 얻었다. 여기서 그는 운보(雲甫)를 만났고 그의 데뷔는 '이 작가를 얻은 것은 동양화단의 가장 큰 수확'이라고 동아일보 심사평에 극찬 할 정도로 주목을 받았다.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 준 작품 <작업(作業)>은 용광로의 작업장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심사위원들은 '참신한 소재와 재료의 불편과 제약을 극복'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1966년 17회 국전에 그는 구상적인 작업세계를 버리고 추상적 형태와 벽화를 연상시키는 작품<침윤(浸潤)>등을 시작으로 벽화연구에 몰두하게 되는데 1967년의 16회 국전에 <승화(昇華)>등을 출품했다. 이 작품들은 당시 그의 작품으로 주목 받은 <시원(始原):88x88cm>이라 붙여진 신벽화 작업들은 고구려 고분벽화 양식과 분위기를 잘 반영한 작품이다.
이 때부터 그는 구상의 세계에서 추상의 세계로 변모를 예감하는 비구상 형태의 추상성 강한 작품을 줄곧 발표한다. 그 이후에도 그는 벽화를 연상시키되 색채나 구성에서는 전혀 다른 작품인 <속신:125x125cm>등의 신벽화 작품들을 지속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그의 벽화에 대한 열정을 확인시켜 주었다. 이런 그의 벽화작업은 한국적인 전통회화의 구현 또는 전통의 계승과 한국적 미감의 실현이라는 의미를 가져다주었다.
전통적인 계승과 한국적 미감의 추구라는 명제 안에서 고뇌했던 일랑에게서 우리가 발견 할 수 있는 중요한 것 중 하나는 그가 어떤 작업을 시작함에 있어서는 항상 그 작업에 대한 이론적 혹은 학술적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느 작가에게서 발견하기 어려운 이러한 그의 연구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를 벽화기법에 대한 논문에서 볼 수 있다. 그는 벽화 관한 내용과 그 의의를 두 번에 걸쳐 발표했는데 1971년 「미대학보」에 <신벽화연구>이고, 또 다른 하나는 1973년 「한국민족문화논총」에 실린 <신벽화연구에 대한 사적고찰과 기법연�>등이다. 이와 같이 창작에서나 이론 면에서 매우 진지한 태도를 보여왔던 그에게 후에 운동으로까지 전개되기 시작했던 '진경산수와 진경정신' 그리고 '수묵화와 필묵론'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의 개인사적인 작업의 변천, 혹은 양식의 변화는 이렇게 개략적으로 2, 30대의 묘사적이며 사실적인 표현에 기본을 둔 전통적인 동양화의 기법과 30대 후반으로 이어지는 벽화작업, 40대의 진경산수를 기본으로 한 수묵 담채화 작업으로 전개되면서 그는 일랑 고유양식의 화풍을 서서히 확립시켜 나갔다.
이미 70년대 중반 화풍에서 그는 진경산수와 수묵화로 요약되는 작품에서는 중국회화의 관념성을 배제하고 우리만의 독창적인 산수를 표현하려는 노력들을 보여주었다. 우리 나라의 곳곳을 그가 발로 찾아다니며 그려 왔다는 사실들이 이를 잘 말해준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그가 최근까지 필생의 노력을 위해 탐구해 온 '자생회화'의 기본적 정신이 정신적 지주가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었다.
그의 이런 작가정신은 신항섭이 지적한 바와 같이 겸재 정선이 중국화를 통해서 비록 그의 세계를 펼쳤지만 결국에는 독창적인 그만의 진경산수를 이룩할 수 있었던 것과 능히 비유될만하다.
70년 중반 80년 초까지 그의 작품들은 기본적으로는 수묵에 바탕을 두고 있으면서 채색을 가미하는 수묵담채의 형식을 견지하고 있었다. 나는 이런 그의 수묵담채 중에 가장 주목할만한 작품을 들라 하면 주저 없이 1981년 <無墨>이라 불리는 186.5x56cm의 작품을 천거하고 싶다. 매우 사려 깊은 구도 아래에 거침없이 내려그은 선, 그 하모니가 빚어내는 폭포와 선의 농담, 완벽한 조형성의 구성은 그가 이런 세계를 왜 더 꾸준히 지속시키지 않았는지 묻고 싶을 정도로 이 작품은 그의 그림 가운데 단연 백미로 꼽힌다.
<氣-獨島Ⅱ(89x89cm)> 1982년의 작품 또한 구도의 안정성과 빈틈없는 균형으로 독도 풍경의 단순미를 드러내놓음으로써 그는 수묵화의 본질과 예술성을 널리 확산시키는데 기여했고 큰 역할을 담당했다. 비판 보다도 찬사가 지배적인 일랑에게는 많은 비평가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하나의 천착된 자기세계로의 이행에 다소 무관심해 보이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시각에 대해 평면적인 차원이 아닌 또 다른 차원에 그의 예술적 이상을 상정하고 있음을 감지하게 하는 요소가 보인다'는 변론이 있음에도 나는 그의 작품에 대한 좀 더 분명한 자기세계를 열어 보일 것을 기대 해 왔다.
유홍준이 잘 지적하고 있듯이 그는 '중국 동양화의 전통이 아닌 한국회화 고유한 예술정신을 한 순간도 버리지 않고 꾸준히 미학적 측면에서 이론적으로 탐구'해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런 고유한 예술정신은 80년대 중반 그가 기존해 해왔던 작업을 버리고 죠셉 간트너가 예술사적으로 접근 한 바 있는 서양미술의 선형상(prefiguration)에 대한 원형상 시리즈의 작품에서 그 가능성을 확인시켜 주었다.
원형상은 형식적으로는 강한 조형성을 바탕에 가지고 있으면서 그 형태상으로는 산수나 산세, 풍수 등에서 일정한 이미지를 추출해놓은 듯한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었다. 여기서 그가 대상으로 삼은 것은 한국의 자연이었으며 산수였다. 그러나 그의 풍수도나 고지도를 떠올리는 이 원형상 시리즈에서 그는 단순히 그 주제에만 탐닉하지 않고 그 내재적 의미를 탁월한 조형성으로 끌어올리는 회화적 가치를 획득하고 있었다. 더욱이 초기에 그는 장지나 순지에 수묵과 채색을 병행했지만 후에 그는 장지만을 사용하는 재료에 대한 개발까지 그 영역을 넓혔다. 그리하여 이 원형상 작업은 재료의 발굴뿐만 아니라 특히 그의 회화에 조형성의 완결, 한국적 추상이라 불릴만한 한국화의 한 지평을 열어 보였다. 그는 거기서 색채의 혼합, 선의 기능과 구성의 힘, 공간의 배치, 형태의 완벽한 조화등으로 성숙된 원형상 회화의 가치로까지 상승화시켰다. 그의 이러한 새로운 것에 대한 열성적인 노력과 재능은 그대로 동유화시대(銅釉畵時代)로 불리는 새로운 장르로 이행되었다.
이런 그의 정열은 서양화작가 뿐만 아니라 한국화 작가로서도 보기 드문 결실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그가 언제나 우리를 엉뚱한 부분에서 변신을 가져와 놀래켜 왔듯이 1989년의 동유화로 이루어진 호암갤러리의 대형 개인전은 우리를 당혹하게 했다. 그런 그의 새로운 아이디어는 프랑스에서의 설치작업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관점에 따라서는 다른 시각도 있겠지만 우리가 간과 할 수 없는 것은 루브르미술관 영내 까루젤 성벽을 하나의 오브제로 인용, 샤를르 5세홀에 설치한 <원형상 97061-마리산>의 작업이다.
이미 여러 지면을 통해 그의 이 작품들은 프랑스 미술전문가들에 의해 상세하게 소개되었듯이 이 전시는 프랑스 외무성의 AFAA<프랑스 예술활동협회>와 프랑스문화성이 공동 주최하고 가나회랑이 주관, 후원은 톰슨그룹·루브르 까루젤, 삼성문화재단 등이 맡아 진행되었었다.
전시 디렉터는 프랑스 외무성의 장 디뉴였고 AFAA는 프랑스의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임무를 전담하는 외무성 산하기구이다. 내가 그의 40여년의 작업 중에 다른 작품 못지 않게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 단연 까루젤전시의 설치작품이 중요하게 논의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데는 이 작품이 설치된 위치가 루브르 미술관이라는 사실도, 이작품의 크기가 70여 미터라는 대작이라는 사실 때문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 작품은 우리 회화사에 다시금 보기 드문 불행한 역사를 위한 용서와 화해의 대서사시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이종상의 까루젤 설치 원형상에 관한 평가에 있어 나의 근본적인 관심은 무엇보다 그가 여느 다른 작품에서 가질 수 없었던 예술가로서의 역사 인식을 날카롭게 담아내고 있다는 것이다. 벽화이자, 설치작품이자, 그림인 <원형상 97061-마리산>은 예술가가 역사에 대한 인식을 어떻게 이상적으로 표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한 규준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나는 그의 이 작품을 다음의 몇 가지 측면에서도 논의 할 만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다음과 같이 이미 분석한 바 있다.
그것도 우리와는 불미스럽게 교류가 시작된 나라, 바로 프랑스의 심장이라고 불려지는 루브르 영내의 역사적인 땅, 그 성벽에서 그가 보여줄 수 있는 예술언어는 이것이었다.
그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다. 이 사실은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왜냐하면 말할 것도 없이 병인양요 사건의 본질은 천주교를 전파하려는 프랑스측 주교와 신부를 처형, 이들을 박해한 대원군에 대한 종교 핍박의 보복으로 비롯된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쩌면 그가 아니면, 아니 천주교 신자가 아니면 이런 역사적 비극의 단초를 예술가가 그림으로 만들겠다고 상상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그의 작업은 그가 평소에 일관되게 추구 해오던 원형상 작업에 마니산의 인상을 안치하고 이 모습을 그 성벽 위에 웅장하게 묘사함으로서, 구성으로서 루브르의 성벽은 바로 프랑스 함대들이 침략시 허물어 놓은 강화성으로 전이시키는 한 포치법으로 안정되게 구사해놓고 있다.
까루젤의 거대한 벽화에서 받는 일차적 경이감은 장대한 그 크기도 크기려니와 이 작품이 전해주는 사랑과 용서의 메시지이자 웅장함과 그것을 두루말이처럼 펼쳐 대서사시를 읽는 듯한 그 비장감에 있다.
그의 그림은 오른쪽에서 시작한다. 한국과 프랑스간의 역사 첫머리, 병인양요 시기에 강화도 앞바다에 떠 있는 7척의 프랑스 극동함대에 탄 프랑스 신부와 조선인 신자들을 태운 바로 그 역사 속의 군함을 그리는 반추상 형식으로 구체화 해내고 있는데 강렬한 필치에서 배어나는 유려함과 그 극적인 긴장의 모습과 피흘림의 표현은 마니산의 신성함과 장중함을 거쳐 마지막 왼쪽 성벽에서는 그의 원형상 작업에 도형과 색채에서 마무리되어 대단원의 화합을 보여준다.
이 그림에서 우리는 그가 이전에 견지했던 것보다 성숙된 예술관을 엿 볼 수 있다. 그가 이전에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 한국인의 숨결과 정신문화를 원형상의 예술로 보여준 것이라면, 이 작품은 그의 성숙된 정신문화뿐만 아니라 역사관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훨씬 심화된 그의 예술관과 자세를 보여준다. 명확한 주제의식을 갖고 역사를 바라보는 통찰력 있는 시각, 문제의식을 표현하는 사관과 시대를 추월하는 작가정신 등은 제한된 공간에도 불구하고 그의 그림은 이 역사적 공간을 압도하고 있다.
여기서도 그는 모든 재료 또한 한국적인 것을 고집했다. 종이를 만들어 쓰거나 자연 채료, 장지 먹을 재료로 하여 전통적이고 한국적인 기법과 정확한 색채의 사용, 빈틈없게 이루어진 그의 좁은 틈새에 조명 설치 등 계획적으로 짜여진 그의 구성은 반면에 끝없는 자유로움을 동반하고 있다.
관람객들은 그의 이 분방하고 거침없는 시대정신에 입각한 작품을 보면서 우리에게는 아득했던 이야기를 다시금 되돌아보게 하는 매력을 남기고 있다. 물론 그가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쓴 재료는 평소 그가 작품에 활용하고 있는 순 국산 흰 닥지이며 배접 방법도 두장을 서로 맞 배접, 엇물리는 방법을 써 마치 어릴적 야외에서 보는 큼지막한 영화 화면을 연상시킨다. 무려 71미터 30센티에 달하는 길이. 그는 여기에 전통적으로 쓰여오던 지공에 채색에 자연 채료(예를 들면 치자, 쪽물, 꼭두서니, 땡감물) 등 착염도가 높은 천연재료를 쓰고 있다.
한 눈으로 돌아보기에는 불가능한 길이에 62쪽의 한지를 이어 성벽을 완벽한 하나의 요새처럼 포장한 그의 스케일은 무엇보다 이 작품을 가볍게 평가 할 수 없게 한다. 여기에 틈새가 15센티밖에 안되는 작은 공간에 조명시설을 설치, 뒤에서 비춤으로서 이것은 흡사 서양의 스테인드 글레스를 능가하는 기법과 효과를 주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가 여기서 그의 이미지를 전달하기 위해 채용하고 있는 '뒤에서 비춤의 방법'은 동서양 회화기법상으로서도 아주 독특하게 제작 된 방법으로 이채롭다. 이 작품의 제작 동기와 근본세계 등을 밝히고 있는 각기 다른 두 개의 작업일지를 보자. '이제 까루젤의 유서 깊은 샤를르 5세의 성벽 앞에서 600년의 세월을 삼킨 채 말없이 서 있는 역사의 표정을 본다. 형상의 서사시를 읽는다. 갑곳돈의 포성을 듣는다. 절두산의 선혈을 떠올린다. 한불의 160년 교분을 그려본다. 14세기 블란서의 샤를르 성벽과 한국의 천신제를 올리는 마니산, 아무리 생각해봐도 어우러질 것 같지 않은 두 개의 언어 개념을 원형상의 문법으로 엮어내어 대희년을 맞는 2000년, 대 용서와 화해의 새로운 언어로 탄생시켜 보고 싶은 의욕이 생겼다'고 이 작품을 만들게 된 궁극적인 제작 의도를 극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는 또한 창호문화에 관해 오래 전부터 관심을갖고 있음을 도처에서 보여주고 있다. '동창이 밝아오거나, 달이 밝을 때 창호에 맺히는 빛과 그림자를 보며 방안에서 대자연과 하나가 됐고, 방안에 등잔불이 밝아 인기척의 그림자가 창호에 비치면 밖에서 안쪽과 교감 할 수 있는 일치의 창호문화의 아름다운 미학을 불란서의 가두어진 성벽과 조화를 꾀하고 싶었다' 고 작업 노트를 남기고 있다. 그가 그림제작에 있어 빈번하게 사용하는 오방색의 색채는 80년대 이후 그의 원형상 그림에서 빈번하게 쓰여지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 오방색이 지니는 상징적인 의미 또한 각별한 의미 파악을 필요로 하고 있다. 변하지 않는 믿음과 신뢰, 군왕을 상징하며 대지를 나타내는 노랑색, 여름과 봄 그리고 난초와 예절을 의미하는 빨강, 겨울, 물, 지혜를 상징하는 북쪽의 검정, 봄과 어짐을 나타내는 파랑, 가을과 정의를 의미하는 서쪽의 하양 등 그의 회화에는 이 색채들이 그의 <원형상>을 형성하는데 언제나 기본이 되어 왔다. 이 색들은 또한 노랑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상하좌우에 위치하면서 각자의 고유한 의미를 띄고 있는데 이것은 서양에서의 색채가 감각적 인상력의 고유가치, 빛과 그림자 원근 등의 관계를 고려하는 양자의 통일원리 속에 색채론의 기본 원리가 있는 것과 현격한 차이를 보여준다. |
그렇다고 그가 단순히 이러한 색채만을 나열하거나 병치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최근의 그의 작품들은 여기에 도형성격이 강한 기호와 형태들을 끌어들이면서 오방색에 도형들의 상징형태가 하나로 되는 통합된 형식의 징후를 보여준다.
그 주요기법은 일반적인 화법이 주는 단순함과 지루함을 피하기 위해 그는 홍염법(烘染法) 퇴묵법(退墨法) 연묵법(軟墨法) 몰골법(沒骨法) 파묵법(破墨法) 탄묵법(炭墨法) 북묵법(北墨法) 등을 우측에서 좌측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적절하게 다변화 된 기법을 구사하고 있다. 더욱 그에게 놀라운 점은 회화의 미적 형식이라든가 미적 규범이 그의 그림을 지배하지 않고 자유롭게 적재적소에 그의 그림 속에서 용해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풀림과 맺힘이 화면에서 자유롭고, 강약의 힘과 흩어짐이 질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 여기 저기에는 전통과 현대가 만나 어우러져 있고, 역사가 숨쉬고 있다.
사람들은 그가 성벽에 완벽하게 장치한 '작가의 상상력과 역사를 보는 통찰력, 그 설치예술에 신선함'에 관심을 표명했다. 까루젤의 무너져 버린 성벽 앞에서 작가는 130여년전 프랑스와 치렀던 병인양요 시대의 강화성의 아픈 역사를 회상하고 읽어 낼 줄 알았고, 그들은 강화성의 경치를 까루젤 공간으로 빌려오는 차경(借景)의 세계는 흥미롭지 않은가.
보자르의 기자 마리 오딜 앙드라드는 그의 이 작품을 "<원형상>이란 영원한 주제를 가지고 만든 기념비적인 작품"이라고 상찬했다. 아마도 이것은 높이 3∼6미터에 길이 70여미터의 닥지 위해 한불간의 역사적 관계에서부터 미래까지를 형상화한 서사적 표현에 주목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흔치 않은 규모의 작품을 보면서 역사의 새로운 발현을 보는 것은 기쁨이다. 진정한 예술은 무엇인가. 우리들에게 진실과 새로운 깨달음의 모습을 일깨워주는 것이 아닐까.
경치를 빌려오는 차경(借景)의 세계를 이렇게 극적으로 전이시키는 방법 또한, 이 작가에게서만 발견 될 수 있는 독특함이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초월적 예술정신, 그 울림을 70여미터의 한지 종이에 풀어내는 한 조선인 화가의 역사적인 서사시. 프랑스와 한국이 가져야 했던 불행한 역사와 그 상처들은 이 그림에서 용해되고 있다. 그의 회화에는 이것에 그치지 않고 용서하는 마음으로서의 관용, 그리고 화해까지 포함하는 그의 예술의 심연에는 지고한 동양정신의 승화가 흐르고 있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주장한다.
"우리그림은 중국과 일본과도 변별되는 너그러움의 미학 즉 관용의 미학을 가지고 있다"고 전제하고 그것을 그는 곧 한국의 독창적인 주거양식인 '창호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나무가 건조되면서 문틀과 문짝 사이에 벌어진 틈을 새나무로 어거지스럽게 맞추어 쓰지 않고 자연스럽게 문풍지로 막아 씀으로서 밖의 바람소리를 안에서 다 듣고 인간과 자연이 늘 교감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 민족은 바로 이 틈새를 이용할 줄 아는 민족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틈새는 "주관과 객관이 만나는 소통의 통로"라는 것이다. 또 이 틈새는 "용서와 관용이 있음으로 가능하다"고 역설한다.
이 얼마나 우리들 삶의 모습과 자연의 일체를 바라보는 마음에 여유와 여백을 갖고 있는가. 그의 이 사색에 옳고 그름을 떠나 한국인의 마음 한구석을 보는 따뜻함과 세밀한 관찰이란 말인가. 그는 또한 '창호문의 햇살'에 관한 흥미 있는 철학을 논하고 있다.
"우리는 반투명의 한지로 제작한 인간과 자연의 내외간에 중간자로 살았다. 주와 객사이에 그 둘을 문풍지처럼 '소리'가 아닌 '빛살'로 가시적인 스크린을 두어 안팎의 통로로 삼았다"는 것이다. "창호에 동이 트면 그 빛살의 밝기로 날이 샘을 알았고 달이 밝으면 나무 그림자의 미동을 보고 날씨를 알았고 창호에 비친 그림자로 누가 찾아 온 것을 알았다. 또 방안에 불이 밝으면 등잔불에 비친 그림자로 방 속과 소통하였다."
그가 이해하고 있듯이 '창호문화'는 한지의 뒷면에서 빛살이 비쳐나오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는 작업노트에서 '한국은 이런 빛살(영혼의 빛)의 신비를 생활 속에서 늘상 얻었다"고 지적하고 우리 선조들의 생활감각과 지혜를 창호문화로 해석하는 독자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창호문화'라고 부르는 이와 같은 혜안 속에서 나는 마치 한국문화를 읽어내는 한 노철학자의 모습을 보기도 한다.
"관람객들은 프랑스의 성벽이 극동함대의 포격을 맞아 무너진 강화성벽으로 도치되고, 강화의 성벽너머로 마니산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 게 될것"이라면서 "이런 역사적 아이러니를 통해 한국과 프랑스 문화의 결합, 2000년대를 이끌 새로운 문화비전의 창조를 보여 주고자 했다"는 그의 작업에 관한 고백처럼 그는 이 작품에 생명력과 생동감을 웅변해 주고 있다. 그런 우리의 기대를 그는 "예술가가 이 땅에서 가져야할 중요한 역사의식에 대해 우리는 한 작가가 그 시대를 살면서 어떤 역사의식을 갖는 가는 매우 중요합니다. 역사는 과거의 기록이 아닌 것처럼 현실적 상황만도 아닙니다. 부단히 관통하며 창조해야 할 미래지향적 에너지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작가는 과거의 기록에 안주하거나 현실적 상황에 침몰해서는 안됩니다. 한국의 관용미학은 긍정적 역사관을 가져왔다고 믿습니다. 내가 말하는 관용의 미학은 용서와 화해, 너그러움과 사랑의 힘으로 어떤 역사적 어려움 속에서도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문화적 소생력을 지녀왔습니다. 한국인의 핏속에 잠재된 이런 유전적 에너지를 극대화시킨다면 우리 미술의 가능성은 세계 속으로 열려있다고 믿습니다." 라고 술회 한 바 있다. 그의 작가로서의 역량과 예술가적 힘을 깊이 신뢰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제 그의 회화작업을 다시 한번 주목 할 것이다. 이번 40여년의 화업을 정리하는 그의 전시는 그래서 그의 작업에 미래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는 일랑으로서는 중요한 역사의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이미 그가 걸어온 길이 한국미술을 위해 얼마만큼 기여한 것일까를 묻는 사람에게도 이 전시는 그 물음의 답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이 전시는 일랑 전시의 남다른, 그러면서도 총체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의 모든 작업을 이제 총체적으로 드러내놓고 볼 때 우리가 그의 작품에서 발견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반가운 사실은 그가 밟고 온 작품과 예술에 대한 풍부한 편력이 이제는 이제까지의 작업을 총체적으로 정리 종합하는 단계에 다다르고 있다는 징후와 사실에 있다. 이제 그의 화업 40년의 예술세계는 결코 일랑의 것만이 아니다. 왜냐하면 바로 한국미술 속에서 한국화 2세대의 중심에 언제나 그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작업을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
이 종 상 I Lee, Jong Sang
*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
* 동국대학교 대학원 석사과정 철학과 졸업(문학석사 : 비교미학 전공)
* 동국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철학과 졸업(철학박사 : 동양철학 전공)
* 제1회 '신인예술상' 최고특상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상 수상
* 제11회 '국전' 무감사 특선 내각수반상 수상
* 제12회 '국전' 무감사 특선 문교부장관상 수상
* 초대 개인전 18회
* 국전 추천작가·초대작가·심사위원 역임
* 국내외 300여회 단체전 초대출품, 15회 초대개인전 개최
* 중앙·동아· MBC 미술대전 등 심사위원(장) 및 운영위원(장) 역임
* 사단법인 서울국제미술제 운영위원회(SAFEC)
* 서울국제미술제 부이사장 역임
* 서울미술대전 운영위원장 역임
* 1995 중앙비엔날레 운영위원장 역임
* 제2회 광주비엔날레 조직위원회 부원장 역임
* 문예진흥원 미술회관 운영자문위원장 역임
*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부설 조형연구소 운영위원 역임
* 제3회 광주비엔날레 전시기획위원 역임
* MBC 미술대전 운영위원 및 심사위원 역임
* 서울특별시립미술관 운영자문위원회 위원장 역임(서울특별시장)
* 대전시립미술관 운영자문위원 역임(대전시립미술관)
* 의상, 장신구의 만남 - 역사와 의식, 고구려의 숨결을 찾아서
전시기획(서울대학교 박물관)
* 서울특별시 건축위원회 위원 역임(서울특별시)
* 사단법인 남북문화교류협회 자문위원 역임(남북문화교류협회)
* 001 동아미술대전 운영위원 겸 문인화부 심사위원장 역임(동아일보)
* 문화재위원회 박물관분과위원회 전문위원 역임(문화재청)
* 서울시립미술관 개관준비기술위원회 위원장 역임(서울특별시)
* 제2회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심사위원 역임(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 대한민국 청년비엔날레 2002 자문위원 역임(대한민국 청년비엔날레 2002)
현재
*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교수
* 서울대학교 12대 박물관 관장
* 문화재관리국 박물관분과 전문위원
* 한국벽화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