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농촌 계몽 운동을 향해 대학으로 나아가다(1950~1953)
박우승
어머님은 내게 어릴 적부터 ‘배재중학교’에서 공부하여 변호사가 되고 억울한 사람들을 돌보는 삶을 살라고 말씀하시곤 하셨다. 그러나 나는 입학금을 내지 못해 국비생으로 공부할 수 있는 대전사범학교로 진학하였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은 소련제 탱크를 앞세우고 남침을 감행했다. 38선을 넘어 3일 만에 서울을 함락하고, 폭파된 한강 철교에도 불구하고 한강을 넘어 남침을 계속했다. 얼마 뒤 유엔군과 미군이 참전했다. 며칠 후 대전사범학교는 휴교하였다. 학생들은 학도병으로 떠나고 연령 미달인 나는 할일없이 고향으로 귀향하였다. 무심코 들고 온 일기장과 신약성서를 읽었다. 나의 고향은 차령산맥 깊은 산속 두메산골로, ‘피난 십승지’와 가까운 곳이어서 전쟁통에 군인들을 구경하지도 못하는 곳이었다.
부모님께서는 일찌기 반상(班常)을 철폐하고 집안의 재산을 나누어 주며, 병약자를 돌보시는 등 동리에 음덕(陰德)을 베푸셨기 때문에 인민재판과 같은 흉흉한 사태에 휘말리지 않으셨고, 그 사이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서울을 수복하고 북으로 진격, 압록강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중공군의 참전과 인해전술로 그해 겨울 후퇴하여 전선은 평택까지 내려왔다. 천안 이남 부산까지 피난민으로 아비규환 떠도는 유랑민과 부모 잃은 고아들, 굶주리는 사람들의 고난은 이루 형언하기 힘든 것이었다.
피난민들이 세운 교회에 다니면서 농사짓는 어머니와 봄을 맞이하였으나, 피난 온 친척과 일년치 양식을 다 먹고 난 터라 호구지책이 막연했다. 집주변에 호박 3백 포기를 심어 새 곡식이 나올 때까지 연명하면서 공부를 시작했다.
예산 읍내에 있는 예산농업고등학교에 전시(戰時) 학급이 부설되었다. 학교에서 4H 운동이 시작되었다. 나는 대술 지역 대표가 되어 교무부장 백운봉 선생님의 지도 아래 산야를 개간하고 고구마를 심어 식량 증산 운동에 참여하고 토끼를 길렀다.
그 옛날, 시골에는 5일마다 장이 섰다. 장날이 되면 인근 각처의 농민들이 농산품과 생활용품을 교환하거나 매매하는 날이다. 산을 넘고 하천을 건너 이십 여리를 가면 읍내 시장이 나온다.
등교하던 어느 날, 나무를 지게에 지고 장에 팔러 가는 농민들이 문맹 퇴치 공무원들에게 단속받는 모습을 보았다. 땅에다가 지게 작대기로 ㄱ, ㄴ, ㄷ 자를 써보라 하여 아는 자는 통과시키고 모르는 자는 배울 때까지 집으로 가라고 한다.
그날 오후 하교 길에 대술 면장님을 찾아뵈었다. 그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겠다고 했다. 나는 심훈의 상록수와 이광수의 흙을 읽고 깊게 감명을 받은 적이 있어서 늘 소설 속의 주인공들처럼 농촌에 봉사하고 싶었다. 그리고 ‘대한청년단 회관’에서 야학당을 열었다. 교재를 만들고 열심히 가르치니 학생의 수가 늘었다. 대술면장께서 면사무소 창고의 한쪽에 교실을 만들어 주었고 대술감리교회는 분필을 사주었다. 그 당시 미국 선교사들이 웨슬리 학당 운동을 하는 원조금이 있었다.
여름 방학이 되었다. 그때 연희대학교 학생이면서 훗날 나의 선배가 되는 김경신 선배가 우리 지역에 농촌 계몽 운동차 방문하였다. 그리고 대술 교회에서 주일 학교 교사를 하면서 야학당과 4-H 식량 증산 운동하는 나를 유심히 관찰하더니 떠날 때 “더 큰 농촌운동을 하려면 대학으로 진학하라”고 조언하였다. “나를 보라, 함경도에서 피난 와서 가진 것도 없어도 대학 공부를 하고 있다. 내가 공부하는 길을 안내해 줄 터이니 진학을 하라” 강권하며 주소를 적어주고 떠났다. 그때부터 나는 마음에 강렬한 소망이 생겨났다. 상록수와 흙의 주인공들처럼 대학 공부를 하여 농민의 지도자가 되고 싶었다.
우리 집은 어머니께서 가내수공업을 하였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갑자기 실시한 농지개혁으로 하루아침에 소농가가 되었기 때문이다. 농사일을 전혀 모르시는 어머니가 호미를 들고 농사를 지으시니 나도 함께 도울 수밖에 없었다. 당시 나의 소원은 초등학교 교사가 되어 노모님을 모시고 교회, 야학당, 4H 운동을 하는 농촌계몽지도자가 되고 싶었다.
청양농촌지도소장을 하시던 아버지께서 농촌 현장 지도 중 미친 개에 물리셨는데, 세브란스병원에서 치료를 받으셨으나 아직 그 후유증으로 퇴직하시고 요양 중이셨는데 나를 부르셨다.
“쌀 열가마 받는 터를 너에게 분재해 줄 터이니 네 인생은 네가 결정하여라” 하신다. 그 당시 대학등록금이 쌀 한가마 반 값이었다. 어머니는 기뻐하였다. 서울에서 피난 오신 선생님들은 대학진학을 권고하면서 방과 후 특별지도를 무상으로 해주셨다. 용기를 내어 진학하였다. 더 큰 농촌계몽지도자가 되기 위해서였다.
나도 아버지나 어머니처럼 경제적인 호주가 되어 농촌 잘살기 운동을 하겠다고 다짐하면서 새벽 다섯시 천안발 부산행 완행 보통 열차를 탔다. 당시 연희대학교는 부산에 있었다. 어머니가 챙겨주신 쌀 한 말을 등에 지고 고추장 단지를 대롱대롱 들고 있었다. 부산행 완행 보통 열차는 군용 열차를 먼저 보내기 위해 역마다 쉬고 대기하기를 거듭하며, 다음날 새벽 02시 경에 부산역에 도착했다.
부산에서 영도 다리(바다)를 건너 영도(섬) 끝자락에 판자와 천막 교사(연희대학교)가 있었다. 그곳에서 남쪽 마차길 산길을 따라 오르면 바다 건너에 송도 해수욕장이 보이고 남쪽 먼 바다길에는 오륙도가 보이는 공동묘지가 있었다. 그곳에 학생들이 돌집을 짓고 공부를 하고 있었다. 박천흠 선배의 집에 짐을 풀고, 식사는 판잣집 세를 얻어 살고 있는 김경신 선배와 그 친구들이 지어주는 식사를 하게 되었다. 대술교회의 남병희 전도사 님의 추천으로 오경린 목사의 추천서를 첨부, 입학원서를 제출하였다.
김경신 선배의 지도 아래 대학 YMCA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당시 회장이 김동길 선배였다. 매일 학교 첫 수업 한 시간 전에 등교하여 예배를 드렸다. 당시 문교부 장관이신 백낙준 박사는 명예총장으로서 수시로 학교에 오셔 강의를 하셨다. 청산유수같이 흐르는 명강의는 젊은 나의 심금을 울렸다. 사람다운 삶의 봉사를 강조하실 때 본교 출신 동문이 경상남도 함안에서 농촌계몽 운동으로 중학교를 설립하고 고아원을 한다고 모범동문 칭찬을 하셨다. 토요일 오후에는 YMCA 학생회 주최로 저명인사 초청 경영을 하는 강연회가 있었다. 함석헌 옹도 그때 만났다. 매주 채플 시간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외국 강사, 국내 저명 인사, 교수님들의 강연과 강의와 설교였다.
그 분들은 한결같이 “지식보다 지혜”를 강조했다. 대학 1~2학년 때는 교양과목으로 각 대학 학과에 가서 공부하라 했다. 36학점을 신청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 학생처럼 주 6일 동안 아침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학교에서 공부와 특별활동을 하였다. 농촌계몽 운동을 하기 위해서 다양한 과목을 수강했고 교수님들의 지도를 받았다.
주일에는 항도 감리교회 주일학교 봉사를 했다. 부산 시내는 전국에서 모인 피난민과 군인(외국 군인 포함) 기지, 국제시장, 비행장, 항구가 있었다. 그때 부산은 세계의 다양한 인종들이 모이는 시장 같기도 했다. 거기서 나는 마음껏 공부하고 교수님들의 사랑도 듬뿍 받으며 내 세계관을 넓혀 갔다.
그 시절 부산에는 소나기가 내린 직후에 오륙도 너머 멀리 대마도가 선명하게 보일 때가 있었다. 원래는 조선 땅이었는데 동래 군수가 일본인들에게 먹고 살라고 주었다고 한다. 진리를 추구하고 자유를 실천하는 학문을 배우고 연구하여야 한다. 미국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오신 한영교 박사의 지도와 일본에서 신학을 연구하신 지동식 교수가 지도해 주셨다.
희랍어 원어공부도 시작했다. 앞으로 구체적인 전문분야를 찾아야 한다. 구체적인 전공 분야는 다양하였다. 학자의 길, 목회자의 길, 종교 음악의 길, 사회사업(농촌계몽)의 길, 종교교육자의 길, 상담자의 길 등. 구체적인 전공 분야를 찾기 전에 먼저 다양한 교양과목을 많이 이수하라고 하셨다. 다양한 학과의 학생들과 함께 다양한 과목을 수강하면서 나는 전공을 찾기로 하였지만 주로 농촌계몽 운동의 길을 탐구하였다.
그렇게 대학생이 되고, 첫 여름 방학 때 경상도 함안으로 여름 농촌계몽 운동을 가려고 계획하였으나 지원자가 많아 1학년은 제외되었다. 여름 방학 전에 미군과 유엔군들이 휴전을 한다고 하여 이를 반대하는 운동이 시작되었고 나는 고향으로 돌아와 대술 교회에서 여름성경학교를 주관하면서도 농촌계몽 운동을 모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