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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
명 칭 |
지정번호 |
위 치 |
비고 |
1 |
심복사석조비로자나불좌상 |
보물 565호 |
현덕면 덕목리 1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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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만기사철조여래좌상 |
보물 567호 |
진위면 동천리 5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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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원릉군 원균 선무공신교서 |
보물 1133호 |
평택시 도일동 4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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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대동법시행기념비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0호 |
평택시 소사동 14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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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삼봉집 목판 |
경기도 유형문화재 132호 |
진위면 은산리 1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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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팽성읍 객사 |
경기도 유형문화재 137호 |
팽성읍 객사리 1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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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평택 원정리 봉수대 |
향토유적 제1호 |
포승면 원정리 109-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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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정도전선생 사당 |
향토유적 제2호 |
진위면 은산2리1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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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한온 장군 충신정문 |
향토유적 제3호 |
서탄면 금암리 5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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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수성군 묘 및 사당 |
향토유적 제4호 |
평택시 독곡동 산 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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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충의각 |
향토유적 제5호 |
평택시 이충동 산3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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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원균 사당 |
향토유적 제6호 |
평택시 도일동 산 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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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평택 원정리 유적 |
향토유적 제7호 |
포승면 원정리 산1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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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
신숙주 영정 및 감실주독 |
향토유적 제8호 |
청북면 고잔3리 9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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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형문화재
번호 |
명 칭 |
지정번호 |
위 치 |
비고 |
1 |
평택농악 |
중요무형문화재 제11-나호 |
팽성읍 평궁리 28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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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서각장(이규남) |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40호 |
비전동 524-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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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재자료
번호 |
명 칭 |
지정번호 |
위 치 |
비고 |
1 |
평택향교 |
경기도문화재자료 제4호 |
팽성읍 객사리 1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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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홍학사 비각 |
경기도문화재자료 제5호 |
팽성읍 본정리 3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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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진위향교 대성전 |
경기도문화재자료 제40호 |
진위면 봉남리 1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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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념물
번호 |
명 칭 |
지정번호 |
위 치 |
비고 |
1 |
이대원장군 묘 및 신도비 |
경기도기념물 제56호 |
포승면 희곡리 산8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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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원균장군 묘 |
경기도기념물 제57호 |
평택시 도일동 산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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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농성(農城) |
경기도기념물 제74호 |
팽성읍 안정리 산4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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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안재홍생가 |
경기도기념물 제135호 |
고덕면 두릉리 6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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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평택무성산성지 |
경기도기념물 제202호 |
청북면 옥길리 산1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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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평택자미산성지 |
경기도기념물 제203호 |
청북면 용성리 산68 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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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평택비파산성지 |
경기도기념물 제204호 |
청북면 용성리 산6-1 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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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평택용성리성지 |
경기도기념물 제205호 |
청북면 용성리 455 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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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평택덕목리성지 |
경기도기념물 제206호 |
현덕면 덕목리 647-1 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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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답사일정 : 심복사(13:30분) →이대원장군 사당 및 신도비(15: 00분) →수도사(16:00분)
2.문화재 안내
1)심복사
●위치 :평택시 현덕면 덕목리 115
●지정 :보물 제565호
현덕면 덕목리의 심복사는 보물 제565호인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을 보유한 사찰입니다. 이 지역은 고려시대 광덕현의 중심이었고 신왕나루, 구진나루와 가까이 있어 일찍부터 수로교통과 어업이 발달하였습니다. 심복사의 창건도 수로교통이나 어업활동과 관련이 많습니다. 이 절은 창건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옵니다.
“조선 명종5년(1549년) 파주 문산포에 사는 천을문이라는 어부가 같은 마을의 박씨, 문씨와 덕목리 앞 바다에 고기잡이하러 왔다. 하루는 바다에 나가 고기잡이를 하는데 그물을 올릴 때마다 큰 돌덩이가 걸려 올라왔다. 장소를 옮겨도 계속 돌덩이가 올라오자 이상하게 여겨 돌덩이를 자세히 살폈더니 놀랍게도 돌로 된 불상이었다. 평소 불심(佛心)이 지극했던 천을문은 불상을 끌어올려 부처님께 치성을 드리고는 모실 곳을 찾았다. 그 때 전날 밤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서 “내가 머물 곳은 심복사다”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꿈속의 말에 따라 나루터에 내렸지만 이제 어디로 가야할지 막막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불상이 입을 열어 “나를 업고 심복사로 갈지어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천을문은 용기를 내어서 불상을 업고 옛 절터가 있었던 광덕산(고등산) 기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현재의 절터에 이르러 불상을 내려놓고 잠시 휴식을 취하다가 다시 업으려 하자 움직이지 않았다. 이 곳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터임을 직감한 천을문은 임시거처를 마련하고 불상을 모셨다. 그러나 절을 세울 일이 큰 문제였다. 하루는 큰 풍랑이 이는 밤 꿈속에 부처님이 나타나서 이르기를 “내일 바닷가에 가면 임자 없는 소와 파손된 배 조각이 있을 것이니 가져다가 절을 짓도록 하여라”라고 하였다. 다음날 아침 동트기를 기다려 꿈에서 보았던 바닷가에 가보았다. 바닷가에는 부처님의 말씀대로 파손된 배 두 척과 임자 없는 검은 소 두 마리가 노닐고 있었다. 천을문은 소 등에 나무를 실어다 문씨, 박씨와 함께 절을 지었다. 절을 짓는데 큰 공을 세웠던 검은 소는 심복사가 창건되자 죽었다. 사람들은 보살이 절을 세우기 위하여 나타났다가 사라진 것이라고 하여 무덤을 만들고 비를 세웠다.“
심복사 중심 건물은 대적광전입니다 이곳에는 보물 565호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이 불상은 자애롭고 도톰한 얼굴에 단정한 표정, 조화로운 신체, 통견에 뚜렷한 삼도가 새겨졌고 비로자나불인 점으로 미루어 신라하대에 제작된 것으로 판단됩니다. 대좌는 8각에 상, 중, 하대석으로 구분되었는데, 중대석에는 두 마리의 사자가 연꽃모양의 상대석(앙련)을 떠받치고 있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현재는 종무소와 요사로 사용하는 능인전은 본래 불전이었던 건물로 대목수 신응수가 지은 것입니다. 삼성각은 건축시기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단아하고 고졸한 멋이 있습니다. 삼성(三聖)이란 산신, 칠성, 독성을 함께 모시는 건물로 불교가 수용되는 과정에서 토속신앙이 불교와 융합된 흔적을 보여줍니다.
*참고 : 삼성각
칠성(七星)은 천지만물의 근본이 도(道)라는 도교(道敎)에서 수명장생을 주관하는 별인 북두칠성을 말한다. 기우, 장수, 재물을 비는 신이다.
산신(山神)은 토속 신으로 수염이 하얀 노인이 호랑이와 같이 나타나서 신령으로 받들어지며 재물과 만사형통을 비는 신이다.
독성(獨聖)은 스승 없이 혼자 이치를 깨달은 성자로 복을 비는 신이다.
2)이대원 장군 묘 및 신도비
●위치 : 포승면 희곡리 산83-6
●지정 : 경기도 기념물 56호
포승면 내기리는 함평 이씨의 동족마을입니다. 함평 이씨는 조선 초 이중길이 입향한 후 약 6백여 년 동안 세거하며 많은 학자와 관직진출자를 배출하여 서평택지역 최고 명문가를 일구었습니다. 함평 이씨 가문의 상징적 인물은 충렬공 이대원(1566~1587)입니다.
이대원은 조선 중기 무신으로 본관이 함평, 자는 호연이며 1566년(명종 21년) 포승면 내기리 정문동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어려부터 학문과 무예가 남달라서 1583년 불과 18세에 무과에 급제, 21세에 전라도 고흥의 녹도만호가 되었습니다. 1587년 2월 10일 고흥 앞바다 손죽도에 왜선 서너 척이 출몰하자 이를 격퇴하여 공을 세웠습니다. 전투가 끝난 뒤 전라좌수사 심암이 장군의 공을 탐내었으나 응하지 않자 마음에 분하게 여겼습니다. 2월 17일에 왜선 20여척이 다시 침입하자 앙심을 품었던 수사 심암은 피로한 병사 1백 명만 내주면서 무리한 출전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자 이대원은 날이 저물고 준비가 불충분하니 밝은 뒤 출정하자고 주장하였지만 심암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구원군을 약속받고 손죽도 해상에 출정한 이대원은 3일 동안 사력을 다하여 싸웠지만 심암은 약속했던 구원군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심암의 간계로 자신이 죽을 것을 직감한 이대원은 속적삼에 절명시를 지어 본가로 보낸 뒤 힘을 다해 싸우다가 사로잡혔습니다. 왜군은 이대원을 돛대에 매달고 고문하며 항복을 요구하였지만 오히려 호령하며 굴복하지 않다가 처형되었습니다.
역사 속에 묻힐 뻔한 이대원의 공적은 전라감사 한준의 장계로 조정에 보고되었습니다. 보고를 받은 조정은 이대원에게 ‘전라좌수사에 특진한다는 교지’를 내렸고 전라좌수사 심암을 문초하여 처형하였습니다. 하지만 교지가 도착하기 전 이대원이 전사하면서 전라좌수사 임명은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이대원의 전사를 알게 된 본가에서는 속적삼을 유품삼아 대덕산 기슭에 묘를 썼습니다.
1592년에는 우계 성혼의 건의로 병조참판에 추증되었고, 충렬(忠烈)이라는 시호와 충신정문이 내려졌습니다. 1587년경에는 이대원 휘하의 녹도만호 수군들의 요청에 의해 고흥 쌍충사가 건립되었으며, 포승읍 내기리 정문동에는 나라의 명에 의해 확충사가 건립되었고, 장군이 전사했던 손죽도에는 충렬사가 건립되었습니다. 또 1668년 이대원의 증손자이며 충청수사를 지낸 이석의 건의로 충신정려와 병조참판에 추증되었고, 1699년에는 약천 남구만이 찬(撰)한 신도비가 세워졌다.
이밖에도 장군의 사후 손죽도 주민들은 애가(哀歌)를 지어 슬퍼하였고, 정기명의 녹도가, 안방준의 이대원전 등이 지어져 장군의 뜻을 기리었습니다.
3)안성천과 청일전쟁
●위치 : 포승면 권관리 산83-6
아산만과 안성천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입니다. 고조선의 준왕이 위만에게 쫓겨 남하한 곳이라는 주장도 있고, 5세기 후반 고구려 장수왕이 남하한 하한선이기도 합니다. 신라가 한강유역을 점령한 뒤 대당교역 창구로 역할 하였으며, 진흥왕이 당항성을 개척한 뒤로는 대당교류의 창구였습니다. 고려 말 아산만과 안성천 일대는 왜구의 침입으로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서평택지역의 용성현, 광덕현과 팽성읍의 평택현은 고을이 불타고 민중들은 살육과 약탈을 당했습니다. 왜구의 침입으로 조선 초기에는 화성의 화량진에 수군절도사가 배치되었으며, 포승읍 만호리에는 수군첨사와 수군만호가 설치되었습니다. 아산만 일대가 역사적으로 주목받은 것은 1894년 7월 청일전쟁 때였습니다. 동학농민군 진압을 명분삼아 조선에 출병한 청, 일 양군은 아산만 입구의 풍도해전에서 1차 격전을 치렀고, 이어 평택과 성환 사이의 소사벌에서 대 격전을 벌여 청군이 크게 패하였습니다.
안성천은 평택평야의 젓줄입니다. 하지만 1974년 이전만 해도 조수간만의 차가 크고 내륙 깊숙이 바닷물이 유입되어 수로교통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농경에 큰 피해를 주었습니다. 평택평야의 경작지는 안성천의 침식작용으로 유실되기 일쑤였으며, 반복적인 수해와 염해는 수확량을 크게 저하시켰습니다. 평택평야가 수해와 염해에서 벋어난 것은 1974년 아산만방조제가 준공되면서입니다. 방조제의 준공은 평택평야의 수해와 염해를 방지하였을 뿐 아니라 넓은 간척지를 만들어주었고, 풍부한 농업용수와 공업용수를 제공하여 평택시가 도농복합도시로 발전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현재 안성천 하류 평택호 일대는 관광지로 조성되고 있습니다. 이곳에는 평택호 예술관을 비롯하여 평택농악상설전시관이 준공을 기다리고 있으며, 수변테크, 요트장 등 위락시설이 갖춰져 있습니다.
4)평택노을
화가 이동진은 홍익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한 화가이며 동화작가, 삽화가입니다. 다채로운 이력을 가진 그가 평택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70년대 한광고등학교에 미술교사로 부임하면서입니다. 10년 경력의 미술교사를 그만둔 뒤에는 맥화실, 홍익화방 등을 운영하며 후학들을 기르셨고, 다양한 사회활동에 참여하였습니다. 1990년대 중반 서울로 상경하였던 이동진은 현재 충북 괴산에 거주하며 여전히 글쓰기와 그림, 판화, 삽화그리기를 하고 있습니다.
mbc 창작동요제에서 대상을 받은 노을은 이동진이 어느 가을날 남도를 여행하고 돌아오던 중에 평택평야에 붉게 타고 있는 노을을 보고 작시하였습니다. 이것을 서울음대를 졸업한 제자 최현규에게(작곡자로 알려진 안호철은 성동초등학교 지도교사였음) 곡을 붙이도록 하였고, 엠비씨 창작동요제에서 성동초등학교 어린이가 불러 대상을 받았습니다.
노을
이동진 작사
최현규 작곡
바람이 머물다간 들판에 모락모락 피어나는 저녁 연기
색동옷 갈아입은 가을 언덕에 빨갛게 노을이 타고 있어요.
허수아비 팔 벌려 웃음 짓고 초가지붕 둥근 박 꿈꿀 때
고개 숙인 논밭의 열매 노랗게 익어만 가는
가을바람 머물다간 들판에 모락모락 피어나는 저녁 연기
색동옷 갈아입은 가을 언덕에 붉게 물들어 타는 저녁 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