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위대한 질문> - 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
배철현 지음 21세기북스 펴냄
6장 네가 손에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주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네가 손에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모세가 대답하였다. “지팡이입니다.” (탈출기 4, 2)
아브라함과 모세
신은 누구를 선택하는가? 자신을 선택하도록 충분히 준비한 자들이다. 신으로부터 선택을 받은 사람들은 선택받을 만한 준비가 되어있는 자로,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는 자며, 그것들을 행동으로 옮기는 자다.
영웅의 탄생
모세는 이집트에 거주하는 어느 이주 노동자의 자손으로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모세가 태어나자 그 부모는 3개월 동안 이를 숨기다가 갈대 상자를 구해 역청과 송진을 발라 방수 처리한 뒤 그곳에 아이를 담아 강가의 갈대 사이에 놓아둔다.
여기서 사용된 ‘상자’의 히브리어는 ‘테바(tebah)'인데, 이 동일한 단어가 성서에서 노아의 ‘방주’를 묘사할 때도 쓰인다. 노아의 방주가 혼돈의 세계에서 새로운 창조의 세계로 인도할 노아 가족이 탄 것처럼, 갈대 상자도 떠돌이 히브리인들 가운데 선별해 신앙 공동체를 이룰 영웅을 담는 그릇이다.
모세가 갈대 상자에서 태어난 이야기는 고대 근동 지방에 널리 퍼진 영웅 탄생의 전형적인 공식이다. 기원전 24세기 메소포타미아에 최초로 셈족제국인 아가데(Agade)를 건설한 사르곤 1세에 관한 탄생 신화도 이와 흡사하다.
“신발을 벗어라!”
신은 신에 대한 담론, 신에 대한 이론, 신을 위한 종교보다 크다. 신은 종종 인간이 부수적인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할 때 ‘말씀’을 들려준다.
탈출기 3장 1절에는 “그는 광야를 지나서 뒤편으로 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바로 모세의 이런 결심이 신을 만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광야를 지나서 뒤편으로”라는 표현은 의미심장하다. 사람들은 광야 자체가 신을 만날 수 있는 장소라고 생각하지만, 모세는 그 광야를 훨씬 지나 더이상 갈수 없는 곳, 다시는 돌아올수 없는 장소까지 나아간다. 다시 말해 그는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죽음의 장소로 간 것이다. 자신이 알고 있던 사막을 지나 지상에서 볼 수 없는 아주 높은 산으로 들어갔다. 이 산이 “신의산,호렙”이다. 여기서 ‘신의산’이란 신만이 들어갈수 있는 거룩한 산이다.
모세가 본 가시떨기나무는 실제로 불에 연소되지 않는 나무를 본 것이 아니라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시선을 갖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 시선이란 일상 속에서 특별함을 볼 수 있는 능력이다. 가시떨기나무에서 들려온 소리는 신의 소리이자 모세 내면의 목소리다.
모세의 위대한 점은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소중하게 여기고 반응했다는 점이다. 그는 결심하며 말한다. “힌네니.”
‘힌네니’는 ‘네,준비되어 있습니다. 무슨 말이든 하십시오. 바로 행동으로 옮기겠습니다.’라는 의미다. 모세는 자신의 심연에서 미세하게 들려오는 소명에 즉각 대답한다.
가시떨기나무는 지성소(至聖所)다. 이 지성소는 사회가 부여한 페르소나를 벗어야만 들어갈 수 있다. 모세가 이 순간 남다른 경지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과거의 오래된 자아, 특히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부여한 명칭과 기대를 버려야 한다. 과거의 유산을 끌어안고서는 혁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은 모세에게 “신발을 벗어라”고 명령한다. 신발은 당시 유목민들의 재산 목록 1호나 마찬가지였다. 또한 신발은 모세의 오래된 자아를 의미한다. 신은 네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포기하고 과거의 자아로부터 벗어나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신발을 벗는 행위는 거룩한 공간과 세속의 공간을 나누는 표식이다. 신발을 벗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 땅이 거룩한 땅이기 때문이다.” 그 거룩한 공간이란 하늘에 있는 장소가 아니라 바로 우리가 서 있는 이 장소가 거룩한 땅인 것이다.
아브라함은 위대한 비전을, 이삭은 헌신을, 야곱은 깨달음을 상징한다. 그런데 모세에게 자신을 드러낸 이 새로운 신은 인간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는 신이다. 신은 모세에게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며 그럭저럭 배고픔을 채우고 있는 히브리인들을 이집트에서 해방시켜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나는 나 자신이다”
이렇게 말하는 신에게 모세는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 신은 자신의 첫 번째 이름을 히브리어로 ‘에흐에 아쉘 에흐에(ehye asher ahye)'로 소개한다. 이 부분을 한글성서에서는 “나는 스스로 있는 나다”라고 번역한다. 신은 신 그 자체로만 정의되는 존재, 즉 현상과 실체가 일치하는 존재, 현실과 이상이 동일한 존재다.
모세가 들은 내면의 소리 ‘나는 있는 나다’라는 말은 고대 인도 경전인 『우파니샤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경전에서는 “진흙 한 줌을 이해하면 진흙으로 만든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진흙 한 줌과 진흙으로 만든 모든 것의 차이는 이름뿐이다.… 결과는 원인일 뿐이다. 육체는 음식이고, 음식은 물이고, 물은 불이며, 불은 존재다. 존재만이 진실하다. 네가 바로 그것이다(tat tvam asi)."라고 이야기한다.
온 우주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고 인간이 추구하는 최고의 선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나는 나 자신이다’는 ‘내가 바로 그것이다’와 같은 말이다. 내가 탐구하고 추구해야 할 대상은 바로 나 자신이다.
거룩함은 일상에 있다
영웅들은 남들이 가본 적이 없는 길을 선택한다. 지도에도 없고, 가본 사람도 없기에 조언도 들을 수 없다. 이들의 공통점은 바로 부정적 수용능력(negative capability)'으로 설명되는 불안감, 초조함, 질시, 외로움, 우울증, 경계성, 애매모호함을 자신이 꿈꾸는 미래의 굳건한 발판으로 만들었다는데 있다.
‘부정적 수용능력’이란 삶에서 흔히 마주하는 모순들을 기존 질서 안에서 쉽게 해결하려는 유혹을 뿌리치고 혼돈을 있는 그대로 자신의 삶의 일부로 가져가는 태도다. 이것은 사실을 성마르게 추구하지 않고, 불확실하고 신비하고 의심스러운 상태에 의연하게 머무는 능력이다. 삶은 우리가 경험한 것에 대한 질문을 끝없이 발굴하고 그 질문과 함께 사는 것이다. 미지의 세계가 과학을 움직이는 원동력이며, 가장 아름다운 경험은 바로 신비다. 신비한 아름다움에 대한 감정은 다른 모든 생각들을 극복하고 심지어는 제거해버린다. 모세는 바로 이 부정적 수용능력의 화신이다.
신이 모세에게 준 최고의 가르침은 ‘바로 네가 서 있는 그 장소, 네가 40년 동안 지겹도록 다녔던 그 먼지 나고 더러운 그 장소가 바로 천국’이라는 생각의 전환이다.
유대인들은 히브리어로 ‘네가 서있는 그곳’의 의미를 지닌 ‘마콤(maqom)’을 바로 거룩한 장고, 천상의 장소라고 여겼다. ‘신과 만나는 곳’은 특별한 장소가 아니라 희로애락을 경험하는 삶의 현장이다. 모세가 이스라엘인들을 구원할 장비 역시 특별한 것이 아니라 그가 지난 40년 동안 가지고 다니던 지팡이였다. 신은 우리에게 “네가 손에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묻는다.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는 영원히 불타 없어지지 않는 가시떨기나무가 있다. 그 나무는 우리에게 “나는 나 자신이다”라고 속삭인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마음속 소리를 그냥 지나친다. 가시떨기나무처럼 흔하다고 생각해서 무시한다. 이 불타는 가시떨기나무는 지금도 우리의 눈과 귀를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