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로 그 순간 여미아가 중얼거렸다.
“오, 어진님, 불쌍히 여기소서!”
“밥맛 떨어지게, 어진님은 왜 찾고 난리······.”
여기까지 말하다 괴한은 갑자기 낮은 신음소리를 냈다.
“으헉!”
이어서.
괴한의 몸이 힘없이 옆으로 쓰러지며 나뒹굴었다.
여미아의 발길질에 남자의 급소를 정통으로 가격 당했던 것이다.
괴한은 여리고 매혹적이고 성스럽게 보이는 여미아가 눈을 가린 상태로, 이런 절묘한 기예를 발휘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고 있다가 여미아의 기습공격을 피할 수 없었다.
여미아는 시간 전, 무후군 차림의 괴한들이 던진 가루탄을 마신 후 해독제를 먹고 깨어났을 때, 비록 정신을 차리긴 했으나, 몸이 나른해 아무런 힘도 쓸 수 없었다. 그런데 이 때 기적적으로 기력이 회복되며, 온몸에 기운이 충만해졌으므로 색한에게 발로 일격을 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쓰러진 괴한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가씨, 어딨어요?”
여미아가 땅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나 여기 있어.”
이루하의 음성을 듣고 여미아는 이루하 쪽으로 걸어갔다.
“아가씨는 눈을 가리지 않으셨죠? 제 가슴 속에 은장도가 있으니 발로 꺼내주세요.”
여미아가 나무에 묶여 있는 이루하 앞에 가서 무릎을 꿇고 앉으며 가슴을 똑바로 벌렸다.
이루하가 신발을 벗고 발가락으로 여미아의 가슴을 풀어헤쳤다.
“여기 왼편 가슴 아래예요.”
이루하는 여미아의 가슴에서 은장도를 찾아냈다.
“죄송하지만, 아가씨 발로 제 얼굴의 수건을 벗겨주세요.”
“몸이 나른해서 힘을 쓸 수가 없어.”
여미아가 이루하의 회복을 위해 하늘의 상제께 간절히 기도하자, 즉시로 이루하도 기력을 완전하게 회복한다. 이루하가 여미아의 수건을 벗기자, 여미아는 두 발로 은장도를 집어 자루를 입에 물었다.
“아가씨,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여미아는 속삭이며, 이루하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이루하의 뒤쪽으로 가서 고개를 상하좌우로 휘저으며, 어둠 속에서 시력을 최대한 북돋운 채, 입에 문 은장도로 이루하의 포승줄을 매우 조심스럽게 자르기 시작했다. 잠시 힘을 쓰고 나자 이루하를 칭칭 묶은 줄이 끊어지고 이루하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이루하는 신속하게 여미아의 은장도로 여미아의 결박을 풀었다.
“아가씨, 이 사람은 한 시진이 지나야 깨어날 거예요.”
여미아의 말에 이루하가 말했다.
“이 놈의 낯짝을 좀 보아야 하겠어!”
그녀가 괴한에게 다가가자 여미아가 다급히 말렸다.
“아가씨, 잠깐만요! 그의 두건을 벗기지 않는 게 좋겠어요. 얼굴을 본다 하더라도, 하등 좋을 게 없습니다.”
“그래? 넌 마음씨가 너무 착해서 탈이야.”
“아가씨, 죄송합니다. 너무 착한 것은 탈이 아니에요. 덜 착할 때 탈이 나죠.”
아래쪽에서 기다리고 있던 졸개들은, 한참이 지나도 두목이 내려오지 않자 투덜거렸다.
“제기랄! 대왕님은 무슨 재미를 이렇게 오래 보고 있는가?”
“이 놈아, 하나가 아니고 둘이잖아!”
“그리고 어쩌면 처음인지도 모르잖아.”
한 친구가 입맛을 쩍쩍 다셨다.
조영은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아픔과 슬픔에 가슴이 막혀 한숨도 나오지 않았다.
꽁꽁 묶인 몸을 조금도 움직일 수 없던 조영은 돌연 속에서 피가 역류하는 듯한 고통이 다시 몰려오자,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괴성을 질렀다.
“으아아아!”
그를 지키던 자들이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야, 이놈아! 입 닥치지 못해! 이거 안 되겠구먼.”
누군가가 조영의 입에 재갈을 물렸다. 조영은 몸부림치며 신음소리를 냈다.
그 때였다. 아래쪽에서 여인의 웃음소리가 낭랑하게 울렸다.
“호호호호호!”
몹시 놀란 흑룡방의 졸개들이 귀를 곤두세웠다. 한 차례 스산한 밤바람이 산을 휩쓸고 지나간 후 다시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온산에 메아리쳤다.
“호호호호호, 으히히흐흐끄끄꺾꺽!”
웃음소리는 마치 귀신의 호곡소리 같았다.
소스라치게 놀란 한 괴한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누구냐! 사람이거든 속히 모습을 나타내고 귀신이거든 썩 꺼져라!”
다시 여인의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산야를 뒤흔들었다.
“꺼꺼꺼끌끌끌으히히히!”
그 기분 나쁜 괴음성은 메아리가 되어 계속 되울려왔다.
흑룡방의 졸개들이 잔뜩 긴장한 채 괴성이 들리는 어둠 속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을 때, 숲 속에서 새하얀 옷을 입고 머리를 풀어헤친, 여인 같은 두 물체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두 그림자는 밤바람에 머리털을 날리며 서서히 괴한들이 있는 곳으로 접근해왔는데, 도중에 몸을 흐드러지게 비비 틀며 다시 한 번 사람의 간담을 끊어놓을 듯, 웃음도 아니고 울음도 아닌 괴성을 터뜨렸다.
“으히히끌끌꺅꺅으어억꺽!”
등골이 오싹해진 괴한들은 일순간 얼어붙어 말을 하지 못하다가 한 사람을 필두로 일제히 무기를 꺼내 들었다.
“사람이든 귀신이든 가만두지 않겠다!”
어떤 용기 있는 자가 한 소리 내 뱉었다.
“으악깎깍으히히히!”
두 그림자는 연신 괴성을 질러대며 몸을 날렸다. 여인 같은 두 그림자에게서 가장 가까이에 있던 괴한 둘이 손에 든 무기를 미처 휘두르기도 전에 풀썩 쓰러졌다.
두 사람이 나둥그러지자 다른 괴한들은 간담이 아주 오그라들어,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귀, 귀, 귀··· 귀신이다!”
누군가가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거리며 내뱉었다. 두 그림자 가운데 하나가 바닥에 쓰러진 괴한의 칼을 집어 들더니, 곧장 나무에 묶여 있는 조영에게 몸을 날려 신속한 동작으로 그의 묶임을 풀어버렸다.
그 여인 같은 그림자는 다시 한 번 간드러지게 웃더니 괴한을 덮쳐갔다.
“휘리리리릭!”
괴인의 옷자락소리가 밤공기를 가르는 순간 또 한 사람이 땅바닥에 넘어졌다.
조영은 몸이 풀리자마자, 약물의 효력이 가셔 체력을 완전히 회복한 듯, 무기를 찾아들고 괴한들을 향해 크게 고함을 지르며 몸을 날렸다.
두 여인의 그림자와 조영의 발길질로 삽시간에 이십여 명의 괴한들이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들이 이토록 어이없이 당한 것은, 귀신같은 두 여인의 출현으로 몸이 얼어붙어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기 때문이다.
“공자님, 이 자들을 꽁꽁 묶어 모조리 관아에 넘겨야 하겠어요.”
이루하가 제안했다.
“그냥 내버려 두는 게 낫겠어요.”
여미아의 말이다.
조영은 관심이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아가씨, 아무 일도 없었습니까? 몸 괜찮아요?”
조영이 몹시 근심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네, 염려해주셔서 감사해요. 다행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무사했습니다.”
“휴! 수십 년 감수減壽한 것 같습니다. 두 분이 잡혀 간 후 억장이, 아니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습니다.”
“정말요?”
이루하가 물었다.
“그럼요!”
조영이 힘주어 대답했다.
이루하는 감격했는지 갑자기 눈물을 글썽거렸다.
“공자님이 저희를 그토록 생각하셨다니, 고맙기 이를 데 없어요.”
“그야 당연한 걸 가지고, 뭘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조영은 그녀들을 위로한 후 말했다.
“생각 같아서는 이 녀석들을 모조로 결딴내고 싶지만, 한 번만 용서해 줍시다. 가만히 살펴보니, 과히 나쁜 놈들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니, 나쁜 놈들이 아니라니, 무슨 뜻이에요?”
“이 놈들 대화를 들어보니, 두 분 아가씨를 해치려는 뜻은 전혀 없고, 오로지 내 목숨을 노렸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나쁘지 않다니요?”
“젊은 놈이 참으로 아깝다는 둥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여러 가지 말을 늘어놓았는데, 제가 한어에 능통하지 않으나, 시정잡배들과 무뢰배들의 속어를 별로 사용하지 않고, 지체 높은 대갓집 하인들의 말투를 쓴 것 같습니다.”
조영은 두 여인의 얼굴을 잠시 훑어본 다음 덧붙였다.
“이들은 좀 내력이 있는 집안의 종들인 듯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누군가와 접선하기로 한 것 같습니다.”
“사실이에요?”
이루하가 놀라며 물었다.
“네. 이 친구들이, 두 아가씨는 풀어주고 저는 그들에게 팔아넘기려고 한 듯합니다.”
“팔아넘긴다면?”
“노예로 파는 거죠.”
조영이 하늘의 별을 쳐다보다가 속삭였다.
“조금 있으면 아마도 이 친구들과 만나기로 한 놈들이 이곳으로 올 것입니다. 성가신 일이 생기기 전에 속히 이곳을 떠나는 게 좋겠습니다.”
“아니, 이 나쁜 놈들을 어떻게 가만히 놓아두고 가요? 관아에 넘겨야죠.”
“이 놈들이 오늘 혼쭐났으므로 이것으로도 충분한 징벌이 된 것 같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줍시다. 우리는 이민족이므로 여기 당인唐人의 땅에서 가급적 원수를 만들지 않는 게 좋습니다.”
“하지만 이놈들의 신원이라도 확인하고 가야 되지 않나요?”
“지난 번 우리 고가장에서 했던 것처럼, 이 친구들에게 금을 주지는 못하더라도, 그냥 놓아두는 게 우리의 신상에도 유리하리라 봅니다.”
조영의 말은, 몇 달 전 고가장에 도적들이 침입했을 때 그들을 붙잡았으나, 두건을 벗겨 얼굴을 확인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에게 돈까지 주어 놓아 보냈던 일을 지적한 것이다.
여미아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조영과 두 여인은 자신들의 말을 잡아끌고 길까지 내려온 다음, 별 빛으로 방향을 가늠해 보았으나, 눈을 가리고 끌려온지라 이곳이 어디쯤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대충 남쪽으로 십여 리쯤 내려 온 것으로 짐작되었으므로, 아마도 이곳은, 처음에 무후군을 만났던 그 산중인 것 같았다. 그들은 어느 쪽이 낙양성으로 가는 길인지 알 수 없었으나 무작정 낮은 쪽을 향해 말을 몰았다.
그 때였다. 앞쪽에서 은은하게 말발굽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놀란 세 사람은 잠시 멈추어 서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땅에 귀를 대고 고요히 귀를 기울여 보았다.
“근 백여 필의 말이 이쪽을 향해 오는 것 같습니다.”
조영의 말이다.
“혹시 우리를 넘겨받은 그 자들의 일당이 아닐까요?”
“글쎄요. 지방토호들과 세가世家들의 집에는 왕왕 남자 하인들이 수백 명도 넘게 있는지라,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쓰러진 그 무리들이 어느 세족世族의 종들이라면 말이죠.”
“우리, 몸을 숨기는 게 좋겠어요.”
여미아가 속삭였다.
세 사람은 즉시 길옆의 산으로 올라가 말과 몸을 숨겼다. 한참이 지난 후 과연 수십 필의 말발굽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오더니,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는데, 놀랍게도 그것은 울음 섞인 목소리였다.
“조영! 조영!”
세 사람은 동시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것은 다름 아닌 태평공주 이영월의 음성이었기 때문이다.
“이영월이 당신을 찾네요.”
이루하가 약간 차가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루하의 목소리에서 냉기를 느낀 조영은 입을 다물고 그녀의 얼굴을 바라다보았다.
이영월의 애절한 목소리가 밤바람을 타고 다시 들려왔는데, 거리가 더 가까워졌는지 목소리가 좀 더 크게 들렸다.
“조영! 조영!”
음성에는 여전히 울음이 배어 있었다. 조영은 가슴이 갑자기 뭉클해졌다. 태평공주 이영월이 조영 자신을 잃어버리고 이토록 슬퍼할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이영월은 낙양성의 무후군 복장을 한 놈들에게 끌려갔는데, 어떻게 된 걸까요? 그들이 무후군이었던 게 맞을까요?”
조영이 물었다.
“아마도 그랬으니까, 멀쩡한 몸으로 나타나 지금 저토록 애절하게 당신을 찾는 게 아니겠어요?”
이루하가 여전히 냉엄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태평공주가 우릴 찾고 있는데, 밖으로 나가봐야 하지 않을까요?”
조영이 조심스레 물었다.
“흥! 말을 똑바로 하셔야 해요. 우리를 찾는 게 아니라, 당신을 찾는 거예요.”
이루하가 여전히 냉기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조영은 이루하의 말에서 모종의 질투심 같은 것을 느끼고 속으로 난감해하며 입을 다물고 말았다.
“하지만, 아가씨, 우리가 여기에 숨어 있으면 태평공주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온 사람들이 고생할 터인데요.”
여미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고생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이루하는 여미아에게 핀잔을 준 후 조영에게 말했다.
“당신은 좋겠어요. 저토록 애절하게 찾아주는 사람도 있고. 우린 찾아주는 이가 없어서 너무나 외롭고 서러워요.”
밤빛 속에서 조영이 이루하의 얼굴을 쳐다보니 그녀의 표정이 매우 우울하고 침울해 보였다. 조영은 속으로 깊이 탄식하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루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을 저토록 간절하게 찾고 있는데, 왜 여기서 머뭇거려요? 빨리 나가서 맞이하세요. 우린 나가지 않겠어요.”
조영은 참으로 난감했다.
“조영! 조영!”
흐느끼는 듯한 이영월의 목소리는 산울림을 만들며 더욱 가까운 곳에서 말발굽 소리 사이로 대기를 진동시켰다.
그 때 여미아가 입을 열었다.
“아가씨, 우리가 나가는 게 좋겠어요. 여기에 숨어 있으면 그들이, 방금 전 헤어진 그 괴한들을 찾아낼지도 몰라요. 그러면 그 괴한들은 죽은 목숨이에요.”
그 와중에도 여미아는 마음씨 착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넌 그들에게, 얼굴을 들고 세상에 나다닐 수 없는 치욕을 당할 뻔했으면서도, 그들을 걱정하고 있는 거니?”
이루하가 어이가 없는 듯 고소하며 자신의 비자婢子에게 말했다. 여미아도 여주인의 책망에 입을 다물었다.
그 때 다시 이영월의 외침이 매우 가까운 곳에서 들렸다.
“조영! 조영!”
그녀의 목소리는 아이를 잃어버리고 찾아 헤매는 어미의 그것처럼 어떤 맹목적인 애절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 때다. 이영월의 목소리에 이어 갑자기 말울음소리가 산야를 진동했다.
“이히히히잉!”
말울음소리도 역시 매우 구슬프게 들려왔다. 이는 마치도 새끼 잃은 어미말의 애처로운 울음 같았다. 말울음소리가 나자, 이루하 곁에 있던 말이 돌연 앞발을 번쩍 들더니 크게 울었다.
“이히히히잉!”
울음소리는 어미 잃은 새끼의 울부짖음을 닮았다. 그와 동시 이 말은 산을 박차고 내려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세 사람은 말을 제어할 틈이 없었다.
세 사람이 어안이 벙벙해 서로를 쳐다보고 있을 때 세 사람을 떠난 말은 울음소리를 내며 길을 내달렸다. 그 때 어둠 속에서 등불을 들고 말을 탄 무리들이 세 사람의 시야에 들어왔다.
경각간에 한 필의 말이 소리를 지르며 나타나자 조영을 찾는 이영월의 일행은 깜짝 놀란 듯, 제자리에 멈추어 섰다. 어미를 찾아간 말은 어미 말과 만나 몸을 비비며 요란을 떨었다.
“아니, 이 말이 어디서 나타난 거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글쎄요. 우리 군마와 같은 혈통이라면, 아무래도 이건 괴한들의 말이 아니라, 고조영 일행이 탄 말 같은데요?”
다른 사람이 대답했다.
“그렇다면, 말만 여기에 두고 사람만 잡아갔단 말입니까?”
“말이 여기 있다는 건, 그들이 사로잡혀 가지 않았다는 뜻이다. 도적놈들이 말을 놓아두고 갈 리가 없다.”
“장군님, 근데 왜 사람은 없을까요?”
“글쎄 말이네. 혹시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말 한 필을 남겨두고 도망간 게 아닐까?”
그 때다.
“조영 공자! 조영 공자! 혹시 조영공자께서 여기 계신가요?”
태평공주 이영월이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에서는 애달픈 눈물이 함께 흘러나오고 있었다. 메아리의 대답만이 밤공기를 가른다.
조영이 이루하를 바라보니, 그녀는 긴장된 얼굴로 눈을 감고 있었다.
“장군님, 여기서 시간을 지체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누군가가 말했다.
“그래, 자네 말이 맞아. 말 한 필을 여기에 놓아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시간을 지체하도록 하기 위한 적들의 속임수임이 분명하네.”
군사들은 말을 몰아 이곳을 떠나간다. 그와 더불어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태평공주 이영월의 목소리도 점점 멀어져가고 있었다.
“조영! 조영!”
숨을 죽이고 있던 이루하가 속삭였다.
“공자님, 우리 이 길로 곧장 영주營州 계성薊城으로 떠나가도록 해요.”
조영은 우두커니 허공을 응시하며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이루하가 조영의 팔을 잡아 흔들었다.
“어서요. 지금이 이곳을 떠날 기회예요.”
조영이 그녀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떠나서는 안 됩니다.”
“당신은 그녀를 생각하고 있는 건가요?”
“아닙니다. 아무 말도 없이 비겁하게 자취를 감추는 것은 대장부의 할 일이 아닙니다.”
“흥! 당신은 대장부라서 좋겠네요. 여기 남으면 이영월도 다시 만나고.”
이루하가 빈정거렸다.
“아가씨, 그런 게 아닙니다. 간다 온다 말도 없이 사라지는 것은, 저나 아가씨나 떳떳하지 못한 일입니다. 우리가 뭘 잘못했기에, 여기에서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고 집으로 간단 말입니까? 그렇게 하면 저들이 오히려 우리를 의심하지 않겠습니까?”
조영은 이루하를 조용히 응시하며 부언했다.
“게다가 여기엔 아가씨의 부친과 저의 조부, 이해고 등도 있습니다. 그분들을 놓아두고 우리만 종적을 감추는 것은 현명한 처사가 아닙니다.”
조영이 일어서며 이루하에게 재촉했다.
“아가씨, 어서 일어나시죠. 이곳을 떠나 낙양성으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조영이 무심코 밤하늘을 쳐다보니 맑은 기운 가운데 은하와 북두칠성이 이경二更을 가리키고 있었다.
“급히 서두르면 날 새기 전 낙양성 가까이에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 밖의 객잔에 들어가서 성문이 열리길 기다리죠.”
조영의 말에 이루하는 말없이 따라 일어섰다. 조영과 두 여인은 두 필의 말에 올라타고 길을 나섰다. 길에 들어서자, 조영은 뒤를 돌아다보며 말했다.
“우리가 때려눕힌 그 자들이 혹시 우리를 추격해올까 염려됩니다. 달립시다.”
(다음장으로 계속)
*************
샬롬.
2023. 12. 15. 겨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