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서는 전쟁의 참화로 무너지는 니느웨성 몰락에 붙이는 시로서 고대 히브리 애가의 특이한 리듬으로 기술되었다. 그러나 이 곡조는 흔히 히브리 공동체에서 찾아볼 수 있는 어떤 도덕적 악을 시정하려는 예언적 서술과는 달리 무너지는 대적에 대한 조롱조의 노래이다. 따라서 본서의 분위기는 니느웨가 몰락하기 직전의 사회사에 대한 청사진과 같은 현실 묘사와, 그 안에서 운명을 피하려고 몸부림치는 도성 주민들의 안타까움이 뒤엉켜서 나타난다. 또한 나훔서는 일종의 애가와 조롱조의 노래를 그 특색으로 하고 있지만, 언어의 구사법은 매우 간결하며, 운율은 짧고, 그 표상은 생생한 면을 갖춘 뛰어난 작품이다. 그래서인지 본서를 혹독하게 다루는 비평 학자들마저도 본서에 내포된 예언의 생생함이나 강력한 도덕성을 높이 평가하였다(Duhm). 한편 요나가 니느웨에서 회개를 선포 한지 100여 년이 흐른 뒤, 나훔의 니느웨에 대한 최후통첩이 선포되었다. 앗수르는 애굽의 등장과 함께 몰락의 길을 걸었다. 역사적으로 애굽은 B.C. 640년에 분열된 왕국을 통일 시켰고, 팔레스틴으로 진군해 왔다. 팔레스틴의 민족들은 애굽에 의한 보복의 잔인함을 보면서 앗수르에 대한 축적된 증오를 표출하였다. 이러한 증오의 한 예가 예언자 나훔의 시들이다(Meyer). 따라서 본서의 예언이 아무리 순수한 예언에 그친다고 할지라도 민족적, 정치적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다. 더구나 본서는 미학적인 영역에서 그 비상한 시적 표현 능력이 두드러진다. 그러므로 본서가 역사적 상황과 윤리적 교훈, 그리고 종교적 순수 영역을 조화시킨 민족적 정열의 위대한 작품이라는 평을 받는 것도 당연하다 하겠다.
제1부: 나훔서의 역사적 배경
Ⅰ. 명칭
히브리어 성경은 본서의 명칭을 선지자의 이름을 따라<
!Wjn"; 나훔>이라 명명하였으며, 70인역(LXX)에서는 <
Naouvm; 나움>, 그리고 불가타역에서는
이라고 하였다. 나훔은 '위로하다, 연민하다'라는 뜻의 동사<!j'n"; 나함>에서 나온 면사이기도 하다. 또 다른 학자는 나훔의 뜻이 '위로, 애정'(참조, 사 57:18)이나 나 3:7의 '위로할 자들'이라는 히브리어<!ymij}n"m; 메나하밈>에서 왔다고 주장한다(Haldar). 더 나아가 '랑게'(Lange)는 '나훔'이 긍휼, 자비, 위로를 뜻하는 <@Wnj] !Wjr'; 라훔 헤눈>이라는 말의 강조형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러 의견들이 논증하는 형식은 서로 다르다 할지라도 본서의 명칭이 '나훔'이라는 것에 대해 의심하지 않으며, 또한 그것의 의미가 긍휼이나 자비, 위로하는 것에 동의한다.
Ⅱ. 저자 및 기록 연대
1. 저자
1) 전통적인 견해
본서의 저자 문제에 대해 전통적인 학자들은 비록 저자에 대한 본서 이외의 자료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훔을 본서의 저자로 인정하였으며, 그의 생애에 대한 재구성을 시도하였다.
본서에서 나훔은 '엘고스'의 사람이다. 그러나 엘고스가 어디에 위치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학자들은 북갈릴리에 위치한 '알쿠쉬'(Al-Qush)를 주목한다. 이 지역은 '모술'(Mosul)에서 북쪽으로 약 80㎞ 떨어진 곳으로 니느웨의 맞은편 티그리스강 곁에 있는 도시이다(Harrison) 그러나 이것 역시 분명한 견해는 아니다. '에피파니우스'(Epiphanius)에 따르면, 엘고스는 '엘류테오폴러스' 근처의 유다 땅이라고 한다(Strauss).
나 1:15에 유다에 대한 언급이 있음을 보아 선지자 나훔은 유다 출신으로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Young). 한편 선지자 나훔은 니느웨의 몰락이라는 주제를 서론적인 시로부터 출발하여 하나님의 장엄성과 여호와의 원수들에 대한 형벌과 여호와를 믿는 자들에 대한 여호와의 선의를 알린다. 그리고 그 다음에서 생생한 문체로 니느웨의 포위와 멸망을 진술하였다. 그러므로 본서에서 나훔의 것이 아니라고 주장할 만한 아무런 근거도 없으며, 본서는 통일성을 견지한 단일한 저자 나훔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비평 학자인 '파이퍼'(Pfeiffer)는
나 2:3-3:19만을 나훔의 기록으로 본다. 그는 나훔이 니느웨의 멸망을 목격하고
나 2:3-3:19의 승리의 시를 기록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객관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는 다분히 주관적인 판단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그가 나훔의 기록에서 의문을 제기한
나 1:11-2:2은 유다 출신의 저자가 유다를 향한 예언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본서의 저자는 나훔이며, 그의 독자적인 기록이라는 것이 전통적인 학자들의 일치된 입장이다.
2) 진보적인 견해
진보적인 견해를 주장하는 학자들도 본서의 저자로 알려진 나훔의 출생지에 대해 주목하였다. 물론 진보적인 학자들은 본서의 저자를 나훔 한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그리고 그 중요한 증거로 엘고스라고 하는 지명의 불분명함과 다른 문서에는 나훔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을 제시한다. 먼저 진보적인 학자들은 엘고스를 '제롬'(Jerome)의 보고에 따라 '갈릴리의 엘고스'와 동일시한다. 그리고 다른 주석가는 가버나움이 아마도 '나훔이 살던 마을'일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비평 학계 내에서도 인정받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갈릴리나 가버나움의 위치와 예언자 나훔 사이에 어떤 연결을 지을 만한 분명한 근거가 없다는 것이었다. 최근 비평 학자들이 대부분 인정하는 나훔의 출생지는 한때 시므온 지파의 변방이었던 유다 남단에 위치한 소도시였을 것이라는 견해이다. 두 번째로 본서 이외의 문서에서 나훔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이 비평 학자들이 본서의 저자로 나훔을 인정하기를 꺼려하는 중요 이유이다. 그들은 본서에 나타난 생생한 역사적인 서술로 미루어 보아 본서의 저자를 B.C. 721년 이후 앗수르에 살았던 이스라엘 유랑민의 한 후예로 추정하였다. 그리고 저자는 니느웨의 최후를 목격한 자로 생각할 수 있다. 또한 '노아몬'(참조,
나 3:8)이라는 도시명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나훔이 애굽에 간 일이 있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상에서 제시된 조건들을 충족시키자면 본서의 저자는 유다의 변방 출신 나훔이 아니다. 더욱이 1장에서 유다의 대적이 누구인지 특별하게 지목되어 있지 않다는 점과 2장에서 전쟁의 와중에 잇는 니느웨의 상황에 대한 묘사, 그리고 3장의 전쟁 종결을 눈앞에 둔 저자의 입장들을 살펴볼 때 본서의 저자는 나훔의 개인일 수 없다. 왜냐하면 본서의 내용상 편집자의 문학적 계획이 뚜렷하게 드러나며, 본서에 나타난 시의 길이로 볼 때 저자가 직접 보거나 소식을 듣고 썼으리라는 추측을 불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서의 저자를 나훔이라고 보는 데는 불분명한 점이 많고,
나 2:3-3:19을 나훔 자신의 것으로 돌린다 할지라도 나머지 부분에 대한 의문은 계속 사라지지 않는다(Humbert, Sellin, Fohrer, Elliger, Rudolph).
2. 기록 연대
1) 전통적인 견해
본서의 기록 연대에 대한 전통적인 학자들의 기본 입장은 앗술바니팔의 '테베'(Thebes) 침략(B.C. 663)에서 B.C. 612년의 니느웨 멸망에 이르는 기간 동안 선교 활동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주장을 다음과 같이 논증한다. 먼저
나 2:1은 유다를 향한 예언이고, 사마리아는 이미 파괴되었다(B.C. 722). 즉 선지자 나훔은 과거의 것을 회상하여 기록하였다. 그런데 나훔의 회상은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예루살렘 멸망 115년 전의 일이다. 그는 또 같은 방법으로 나훔의 예언에 근거하여 예언의 회상 시기를 요담 말년으로 생각하였다. 또한 '유세비우스'(Eusebius)는 나훔의 사역 시기를 히스기야 6년이라고 한다. 따라서 사마리아가 오래 전에 멸망당하고 유다는 이미 앗수르의 무서운 공격에 의해 쇠진해지고 있을 때라고 잠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 둘째, 나 1;12의 예언은 니느웨의 멸망에 앞선 선포였다. 왜냐하면 이 예언은 니느웨가 망하기 4년 전에 선포된 것이기 때문이다(Lange). 더구나 나훔은 몰려오는 군대가 누구의 군대인지를 밝히지 않으며, 쫓기는 니느웨의 상황만을 언급하였다(참조,
나 2:2). 또한 그는 묵시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 속에서 예언을 선포하였다. 따라서 본서의 기록 연대는 '콕세이우스'(Cocceius)가 주장하는 것처럼 여호야김 시대도 아니요, 알렉산더의 '클레멘스'(Clemens)가 주장하는 것처럼 시드기야의 통치 시대도 아니다. 오히려 본서의 기록 연대는 메대 왕에 의한 니느웨 공격(B.C. 626)과 관련하여 주장되었다. 세 번째 나훔의 니느웨에 대한 예언은 앗수르에서 기록되었다(Ewald). 왜냐하면 그의 예언에는 고향에서 멀리 떠난 사람의 말투가 엿보이며(참조,
나 2:1 ; 3:5), 앗수르 적인 특수한 어법이 나타나기 때문이다(참조, 나 3;17). 네 번째는 B.C. 652-648에 본서가 기록되었다는 증거로 나훔서에는 바벨론의 반란에 관하여 서술하고 있다는 점을 든다. 이상과 같은 주장들은 나훔의 예언이 역사적인 사건에 기초하고 있음을 증거해 준다.
2) 진보적인 견해
진보적인 학자들은 본서의 기록 연대에 대해 일치된 입장을 내세우지는 않았다. 마카비 시대로까지 추정하는 극단적인 입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견해들이 주장되어 왔다. 그리고 그 혼란의 원인 중 하나는 본서의 표제가 기록 연대에 대한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내외적인 증거에 기초하여 진보적인 학자들도 전통적인 견해에 무리 없이 동의한다. 본서의 기록 연대는 B.C. 662-612년으로, 이 시기는 애굽의 노-아몬(No-Amon)의 멸망(B.C. 663) 직후에서 니느웨의 멸망(B.C. 612) 사이이다. 한편 나훔서를 니느웨의 함락 후에 기록된 작품으로 간주하는 학자들은 본서의 기록 연대를 B.C. 612년 이후 B.C. 605년의 갈그미스 전투 이전이라고 본다(Cocceius). 이 시대는 여호야김 왕이 유다를 통치하던 시기로 느부갓네살에 의해 근동 지역 전체가 바벨론의 통치 아래 들어간 시기이다. 따라서 앗수르의 중요 도시였던 니느웨의 함락을 유다인들이 조롱조로 노래하던 시기였다. 또 다른 견해는 보다 후기에 기록된 것으로 보려는 시도인데, 본서의 기록 연대를 마카비 시대라고 본다(Happel). 본서의 기록 연대를 마카비 시대로 보는 학자들은 마카비 시대에 니느웨의 멸망은 좋은 교훈을 주는 사건이었기 때문에 선지자 나훔의 이름을 빌어서 쓴 위작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본서의 기록 연대에 대한 최근의 동향은 테베 멸망에서 니느웨 멸망 사이, 보다 정확하게는 B.C. 614-612년 사이라는 주장에 대부분 동의한다.
Ⅲ. 기록 목적
본서에는 이방의 압제자들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차 있다. 때문에 비평 학자들은 본서의 신앙적인 중요성을 과소평가하여 나훔이 이방 국가들의 죄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졌다고 평가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평가는 다분히 주관적인 것이다. 오히려 본서의 기록 목적은 당시 앗수르의 압제 아래 있던 하나님의 백성을 위로하는 것이었다. 곧 유다의 고통은 앗수르의 죄를 전제하고 있으며, 앗수르의 굴레로부터의 벗어남을 하나님의 자비의 행위로 보았다. 한편 나훔의 예언에는 앗수르와 관련된 하나님의 심판의 역사가 나타난다(참조,
사 10:5-34; 14:24-27; 17:12-14; 18:4-6; 30:27-33; 31:5-9; 37:21-25). 동시에 니느웨에 대한 유다의 입장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따라서 나훔의 예언은 그 이후의 계시 역사와 연결된다. 특히 니느웨를 음녀로 묘사한 것이 계시록에서 반영된 것을 살펴볼 때 계약 백성으로서의 유다와 이방 간의 관계가 분명하게 드러난 작품이라 할 수 있다(참조,
계 17:1, 2, 15; 18:23). 이렇게 볼 때 본서의 기록 목적은 하나님의 계시의 역사에 기초하여 앗수르의 압제에 시달이던 유다의 고통을 위로하기 위함이었다고 하겠다.
Ⅳ. 특징 및 구조
1. 특징
본서의 특징은 우선 선지자 나훔이 성전 예언자 출신이라는 점에 있다. 그는 역사적인 적이 이미 태초에 정복되었으며, 그 세력과의 투쟁을 신년 축하 제의에서 재현되는 우주적 악마와 동일시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물론 본서가 적을 향해 선포된 예언자적 저주의 성격을 지녔다는 점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본서는 독특하게도 악의 화신에 대한 저주를 하나님께 대한 충성으로 제시하였다. 즉 신앙을 역사화 한 것이 나훔서의 독특성이다.
본서의 두 번째 특징은 문학적인 특징이다. 대다수의 학자들이 인정하는바 나훔서에는 천재적인 시적 재능이 엿보인다. 즉
나 1:2-9의 알파벳 시(acrostic: 각행의 처음과 끝을 맞추면 하나의 어구가 되는 시 형식인데, 본서에서는 시행의 첫 글자가 알파벳의 순서로 되어 있음)이다. 몰론 이 시의 문학성에 앞서 비평 학자들의 비평적 연구가 있었다. '궁켈'은 이 시의 양식과 내용, 그리고 그 뒤에 따르는 예언적인 신탁들 사이의 뚜렷한 차이점을 발견한 최초의 비평 학자였다. 그는 이 시가 후대의 편집자에 의해 편집된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아이스펠트'(Eissfeldt)는 이 시의 행간의 위치를 약간 변동시켜 더 많은 행수를 '아크로스틱'(acrostic)시로 보았다(그는 10절도 알파벳 시의 범주로 생각한다). 그러나 본서를 편집사적인 입장에서 보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본서의 문학적 가치는 평가 절하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알파벳 시가 본서의 문학적 특징 중에서도 우선되는 것은 분명하지만, 본서에서 보이는 수많은 문학 양식(만가, 조롱, 신탁시, 환상시)과 생생한 표현들도 알파벳 시 못지않은 훌륭한 재능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특히
나 2:3-5의 기병대와 병거의 돌격이나
나 2:7의 왕후와 시녀의 당황 등에 대한 묘사는 그 전쟁을 눈으로 보듯이 생생하고 자세하게 묘사하였다. 이러한 면에서 나훔서는 다른 구약의 문서들보다 문학적으로 뛰어나다.
세 번째는 신학적인 특징이다. 즉 나훔의 메시지는 재난-구원의 일반적 도식적 예언의 내용과는 다르다. 하지만 ① 여호와를 모든 나라의 구주로 인정하는 점, ② 앗수르의 정책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렸다고 비판한 점, ③ 앗수르를 유다를 치는 도구로 보았다는 점에 있어서 매우 민족주의적인 예언이라고 할 수 있다. 곧 나훔의 메시지의 요지는 여호와가 비록 열방들을 이용하여 유다를 치시더라도 여호와의 궁극적인 목적은 유다를 유익하게 하실 것이라는 확신이었다. 나훔은 이러한 신념을 조롱과 잔인한 보복시(참조,
나 3:8-17)를 통하여 표출하였다.
네 번째 특징은 본서에 나타난 세 개의 예언적인 예배 의식문이다. 첫 의식문(참조,
나 1:12, 13, 15,; 2:2)은 유다에 대한 약속, 동기가 명시된 절기의 선포, 그리고 회중의 응답송으로 되어 있다. 둘째 의식문(참조,
나 1:10, 11, 14; 2:1-13) 은 동기가 언급된 니느웨에 대한 위협, 환상과 음성에 대한 보고, 조롱 적인 만가, 위협 등으로 구성되었다. 셋째 의식문(참조,
나 3:1-7)은 환상과 음성에 대한 보고, 여호와의 위협, 조롱시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의식문은 위의 신학적인 특징을 심화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다섯 번째로 예언적인 예배 의식문의 특징과 관련된 통일성의 문제이다. 그동안의 비평 학자들의 견해는 단지
나 2:3-3:19만을 예언자 나훔의 기록으로 보고 나머지 부분은 추가 부분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그들이 본서의 통일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것은 앞에서 지적한 본서의 특징과 관련된 것이었다. 즉 알파벳 시는 본서가 편집되었다고 주장하기에 충분했다. 왜냐하면 알파벳 시는 매우 불완전하고, 행을 나누는데 있어서 서로 다른 견해들이 주장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불리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본서의 통일성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본서 애에서 예언적 예배 의식문이라는 특징적인 문학 구조를 밝혀내었다. 그리고 그것들이 본서 전체를 통하여 나타난다는 점도 논증하였다. 그리하여 본서의 통일성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이 예배 의식문들이 니느웨의 멸망을 감사하는 찬송으로서 신년 축제 때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불려지기 시작하였다고 주장하였다(Humbert, Weiser, Sellin-Rost).
2. 구조
제2부: 나훔서의 특별 주제들
Ⅰ. 니느웨
앗수르의 철저한 멸망의 상징이었던 니느웨는 메소포타미아 최고, 최대의 도시 중 하나로 전성기의 앗수르 수도였다. 니느웨가 학계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은 1820년 고고학자 '리치'(Rich)에 의해 유적지의 지도가 발간되면서부터이다. 그 후 프랑스 학자인 '보타'(Botta)를 비롯한 많은 신학자들이 니느웨의 유적지에 관심을 쏟았다(Layard, Rassam, Smith, Budge, King, Mallowan). 특히 1850년에 니느웨의 유적지, 앗술바니팔 궁전 폐허 속에서 두 개의 방을 발견하였는데, 그곳에서는 문화의 신이며, 문자의 발명가인 '에아'(Ea)가 어피로 된 예복을 입고 있는 모습을 비롯한 많은 토서판들이 발견되었다(Layard, Rassam). 그 후 '스미스'는 토서판들 가운데서 홍수 설화를 발견하였으며, 대영 박물관 탐사대는 궁중 도서관을 발견하였다. 이들 고고학의 발굴 결과는 많은 부분이 학계에 알려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니느웨의 당시 규모에 대한 많은 정보를 준다.
1. 위치
니느웨는 티그리스강 동편으로 800m 가량 떨어진 곳으로 현대의 '모술'(Mosul)에서 바로 강을 건전 곳에 위치했다. 니느웨는 두 개의 유적지, 곧 많은 양들이라는 의미를 가진 '큐우니크'(Quyunjig) 유적지와 예언자 요나의 무덤으로 알려진 '네비유누스'(Nebi Yunus) 유적지가 있는데, 큐우니크 유적지가 보다 크고 북서쪽에 위치하였다. 두 유적지 사이로는 코슬강이 흘렀으며, 거의 13㎞나 되는 정사각형에 가까운 성벽으로 둘려진 매우 넓은 지역이었다.
욘 3:3에 따르면 니느웨를 일주하는데 사흘 길이 걸린다고 하였다. 물론 이 기사는 확대된 것임이 분명하지만 니느웨의 규모에 대한 외부인(팔레스틴 사람들)들의 소문을 앗수르의 강한 국력과 함께 니느웨의 규모에 대해서도 과장하여 전해졌음이 분명하다(Smith). 1932년까지 이 유적지에 대한 발굴이 간헐적으로 계속되었으며, 현재 이곳에서 나온 유물들에 대한 연구가 한창이다. 지금까지 드러난 자료만 가지고도 니느웨는 당시 메소포타미아 지역 내에서 가장 현저하게 발전했던 도시였음이 분명하다.
2. 니느웨의 역사
고고학의 연구 결과 이곳에는 B.C. 4500년경의 선사 시대 이래로 인간이 거주하였던 곳이었다.
창 10: 11, 12에 의하면 니느웨는 '니므롯'(B.C. 2천 년에 바벨론을 정복한 카시족의 최대 영웅)에 의해 건설된 북방의 큰 도성이다. 또한 고대 '아카드'(Akkad) 시대에 니느웨는 번창하였으며, '이쉬타르'(Ishtar)의 신전을 재건하였다. 거의 같은 시기인 B.C. 2300년경에도 니느웨는 '아카드의 사르곤'의 통치 아래 도시로 건재하였다. 그러나 다음 세기인 B.C. 2200년경 '라가쉬'(Lagash)의 '구데아'(Gudea)가 이 지역을 원정하였다. 한편 B.C. 1800년대에 등단한 '함무라비'(Hammurabi)는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자기 지배 하에서 통일하고 몇 해가 지나지 않아서 '이신'(Ishin), '우륵'(Uruk), 그리고 티그리스강 동편의 일부 지역을 정복하였다. '함무라비'와 주요 경쟁자들 중의 하나는 '삼시 아닷 1세'(Shamshi-Adad)였는데, 그는 니느웨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는 독립심이 강하였으며, 고대 앗수르의 유능한 지도자로서 추앙을 받았다. 때문에 니느웨는 앗수르의 위대한 왕 '삼시 아닷 1세'에 재한 제의 중심지고 발전해 갔다(Layard). 뿐만 아니라 이 시기 이후로 니느웨는 교역의 중심지로 끊임없이 사람들이 거주했던 지역이었다. 한편 '삼시 아닷 1세'의 뒤를 이은 '이스메-다간'(Ishme-Dagan)은 훌륭한 자질을 갖춘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목민들의 침략과 '이아블리아'(Iablis)의 발란, 그리고 북쪽에서 온 산악 지방 족속들인 '투룩쿠'(Turukku)족의 침입으로 치세 기간 동안 매우 분주했다. 그는 후에 '에스눈나'(Eshnunna)와 협력하여 함무라비 왕국과 접전하였는데 그 결과는 알 수 없지만, 또 다른 자료에 의해 앗수르가 함무라비 왕국에 병합된 것으로 추측된다. 왜냐하면 함무라비는 그의 유명한 법전 서문에서 자신이 니느웨를 보호하며 관리하고 있다고 자랑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스메-다간'은 함무라비 왕국의 분봉왕으로 계속 니느웨를 다스렸던 것 같다. '골사밧'(Khorsabad)왕의 목록에 의하면 '이스메-다간'의 뒤를 이은 사람은 왕의 혈통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무적자'로 불리는 어떤 '앗술두굴'(Asshurdu-gul)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는 여섯 명의 왕위 찬탈자들이 각기 2년씩 다스렸었다. 이것은 곧 혼란 상태를 암시하는 것으로 이 시기 이후로 앗수르는 200년이나 계속된 암흑시대로 돌입하였다.
앗수르 역사가 망각된 지 이백 년이 지난 뒤에 다시 앗수르 역사의 새 막이 오르게 되었을 때는 아람 족속들이 수리아와 메소포타미아 상부를 견고하게 지배하고 있었으며, 바벨론에서도 변화가 일어나서 메소포타미아 하부 지역을 점령하였다. 이러한 와중에서 강력한 중기 앗수르 왕들인 '살만에셀 2세'(Shalmaneser)와 '투쿨티-니누르타 1세'(Tukulti-Ninurta)의 지배 아래서 니느웨는 크게 확장되었고, 재 요새화되었다. 특히 '살만에셀Ⅰ세'는 동쪽에서 '쿠티'(뼈샤)족과 싸워 승리하였으며, 전리품들을 이용하여 신전들을 재건하였다. 그리고 니느웨로부터 티그리스강 상류 쪽으로 74㎞ 떨어져 있는 '칼라'(Kalah)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였다. 이때부터 칼리와 더불어 니느웨는 왕의 행정의 주요 중심지들 가운데 한 도시가 되었다. '디글랏빌레셀 1세'(B.C. 1114-1076), '앗술바니팔 2세'(B.C. 883-859), '사르곤 2세'(B.C. 722-705)는 이곳에 자신들의 궁전들을 건축하였다. 특히 앗술바니팔의 도서관에서 발견된 시조의 목록을 보면 B.C. 909년 '아닷-니라리'(Adad-nirari) 이후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디글랏빌레셀 3세'(B.C. 745-727)는 군사적인 반란을 일으켜 왕위에 올랐으며, 그의 치세 동안에는 비옥한 초승달 지대를 완전히 지배하였다. 그는 가장 만만치 않은 적인 다메섹의 '르신'(Rezin)을 B.C. 732년에 다메섹을 정복하고 죽였으며, B.C. 744년에는 '므나렘'(참조,
왕하 15:17-22)을 압제하여 팔레스틴과 수리아 영토를 앗수르의 일개 지방으로 통합하였다. 또한 그는 바벨론의 '나부나실'(Nabunadir)이 죽고, 나라가 아람 족속의 추장들에게 희생되어 버리자, 바벨론에 침략하여 주요 반역자인 '우키젤'(Ukizer)을 쳐부수었으며, '에사질라'(Esagila)의 신전에서 '마르둑'(Marduk)의 손을 잡은 후인, B.C. 729년에 고대의 의식에 따라 바벨론의 왕이 되었고, 그것으로 인해서 그는 '불'(Pulu)로 알려지게 되었다(참조,
왕하 15:19). '디글랏빌레셀 3세'는 이제 '우주의 왕', '앗수르의 왕', '바벨론의 왕', '수메르와 아카드의 왕', '세상 사방의 왕'이라는 완전한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의 시대에 앗수르는 가장 전성기였으며, 수도는 니느웨였다. 그와 그의 아들 '살만에셀 5세'에 의한 모든 전리품은 니느웨로 수송되었다.
'살만에셀 5세'의 뒤를 이은 '사르곤 2세'도 전쟁을 통하여 영토를 확장하는데 자신의 온 정력을 다 소비하였다. 그러나 '산헤립'(B.C. 705-681)은 아버지 '사르곤 2세'에 의해 건설된 '두르-사루킨'(Dur-Sharrukin)에 버금가는 수도를 세우기 위해 웅장한 규모로 니느웨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새 궁전은 라기스의 함락과 유다의 공물 강제 징수 등을 포함하여 자신의 승전 장면으로 장식하였으며, 새로운 수자원을 개발하기 위하여 '아예일라'에 댐을 건설하였다. 그는 B.C. 701년 팔레스틴 원정을 마친 후에도 니느웨로 귀환하여 자신의 치세 동안 이 도시에서 지냈다. 이후 니느웨는 산헤립을 암살한 사람들에 의해 잠시 점령되었으나 산헤립의 젊은 아들인 '에살핫돈'에 의해 재탈환되었다. 하지만 그는 '칼라'에서 많은 기간을 거주하였으며, 니느웨를 재탈환한 후에 그곳에서 자신의 왕궁을 지었다. 한편 이시기에 앗수르의 경제는 침체되었고, 정력적인 무력 전쟁은 노쇠한 왕으로 인해 더 이상 계속될 수 없었다. 이러한 틈을 타서 봉신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중에서도 새로이 세력을 확장하던 바벨론의 원조를 받는 메대인들이 B.C. 614년에 니느웨와 칼라를 약탈하였으며, 유다는 잠시 동안이나마 세력 공백에 힘입어 독립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니느웨는 B.C. 612년에 '움만만다'(Ummanmanda)에 의해 결성된 연합군에 의해 포위 된지 석 달 만에 함락되고 말았다. 바벨론 연대기에 의하면, 이 연합군은 티그리스와 코슬강의 범람기에 니느웨의 수비벽을 돌파하여 예언자 나훔과 스바냐에 의해서 예언된 것처럼 그 도성을 약탈하였다. 니느웨는 이때 이후 수 세기 동안 망각되었고(참조,
나 2:10, 13), 양들이 와서 풀을 뜯게 되었는데(참조,
습 2:13-15), 그 황폐함이 하도 심해 '크세노폰'과 헬라 군대가 B.C. 401년에 퇴각하면서도 니느웨를 인식하지 모살 정도였다.
3. 요나와 나훔의 언급
니느웨에 대한 최초의 성경에서의 언급은 창 10;11에서 발견되었는데, 여기에서 니느웨는 니므롯에 의해 건설된 메소포타미아의 주요 중심지들과 함께 언급되었다. 또한 니느웨에 대한 언급은
왕하 19:36과
사 37:37에서 제시되었다. 그러나 이 구절들은 니느웨를 산헤립의 아들들이 그를 살해한 것을 증언하는 장소로 기록하였다. 보다 정확한 진술은 니느웨의 최후를 기록한 스바냐와 나훔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전자는 니느웨에 대하여 부수적으로 언급하였지만 나훔서는 '니느웨에 대한 묵시'라는 표제가 붙여질 만큼 니느웨의 멸망에 대한 생생한 감동과 상상력과 권능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이는 앗수르와 바벨론의 분쟁을 그린 앗수르의 문학 작품과 비교해 볼 때 분명히 뛰어나다. 한편 니느웨를 중심으로 다룬 다른 성경은 요나서이다. 나훔서와 약 100년간의 시차를 두고 기록된 것으로 알려진 요나서는 도덕적인 교훈을 주기 위해 재편집되었다는 주장(Ewald)에도 불구하고 니느웨가 누렸던 영광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면에서 그 가치가 매우 뛰어나다. 여하튼 요나는 자신의 독특한 방식으로 니느웨의 규모와 명성에 대해 말하였다. 결국 요나는 니느웨의 영광에 대해서, 그리고 나훔은 세계사의 중요한 매듭인 니느웨의 멸망에 대해서 각기 독특한 방식으로 전달하였던 것이다.
4. 앗술바니팔의 도서관에 대한 고고학적 고찰
이 도서관은 1850년 니느웨를 발굴하던 '래이야드'(Layard)팀에 의해 앗술바니팔의 궁전 폐허 속에서 발굴되었다. 이 도서관에는 흙으로 된 점토판에 설형문자를 긁어서 쓴 토서판들이 다량 소장되어 있었다. 도서관의 역사는 바벨론 에서부터로 알려져 있는데, 바벨론의 문화를 받아들였던 앗수르의 왕들은 다른 문화의 수용처럼 도서관 제도도 답습하였다. 그중에서도 앗술바니팔은 가장 대범하게 학문을 후원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1) 저술 도구
바벨론과 앗수르인들이 사용하였던 저술 도구는 점토였다. 점토는 이 지역에서 파피루스나 양피지에 비하여 쉽게 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설형문자의 글씨를 적는데 적합한 것이었다. 또한 점토판은 오래 보존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비교적 온전한 자료가 보존되었다는 면에서 학계로서는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저술 방법에 있어서 바벨론에서는 글씨를 새긴 후 점토판을 말렸다가 가마 속에서 구워 말리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또한 점토판에 글씨를 새겨 넣는데 있어서 다량의 본문이 좁은 공간에 압축이 되어야만 했던 이유로 때로는 그 글씨가 너무 작아서 그것을 읽으려면 확대경이 필요할 정도였다. 니느웨 도서관의 선반에서 확대경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수정 확대경으로 책을 읽는데 사용했던 것이 분명하다.
2) 소장 도서의 분야별 내용
앗술바니팔의 도서관에는 여러 분야의 학문을 포함하는 토서판들이 소장되었었는데, 그것들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토서판 가운데서도 으뜸가는 것들은 언어학 분야의 것들이다. 토서판에 기록된 문자는 설형 문자로 우랄 알타이어족에 속하는 교착어의 언어 체계를 갖는다. 이는 언어의 문법적 기능을 어근과 접속사와의 결합 연속에 의해 나타내는 언어로 고대 수메르 언어였다. 수메르어는 고대 근동에서 통용되었던 언어로 오늘날 영어의 용례와 같은 세분화된 언어였다. 특히 이 수메르어로 쓰여진 앗술바니팔 도서관 소장 토서판들에는 수메르어의 다양한 활용을 이용한 사상의 전개를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것들로 볼 때, 앗수르의 토서판은 진보된 문자 문화를 암시해 준다.
두 번째로 앗술바니팔 도서관 소장 토서판 중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문서는 천문학과 점성술에 관한 것들이다. 천문학은 대개 점성술과 결부된 것으로서 월력과 일식을 산정하고 12 궁(宮)의 명칭을 만들었다. 특히 이들은 천체의 관측을 위해 왕실에 천문대를 두었다고 한다.
세 번째로 이들 토서판에는 수메르의 종교시들이 앗수르어로 번역되어 마련되어 있었다. 그것들 가운데는 신들에게 드리는 찬송시가 주류를 이루고, 성전에서 사용된 의식서 들도 포함되었다.
네 번째로 상당한 법률 서적이 있었는데 그중에는 함무라비 법전도 보존되었다. 처음에는 수메르어로 쓰여졌었으나 함무라비 법전에 이르러서는 바벨론어로 쓰여졌음이 특이하다. 더욱이 이들 법률 서적에는 법률뿐만 아니라 판례집도 상당수 포함되었다.
다섯 번째로 역사와 연대기에 대한 문헌은 오늘날 학계에서도 많은 관심을 쏟는 분야로서 성경 시대에 대한 중요한 자료들을 제공하였다. 특히 앗수르의 연대기는 상업상의 목적 때문에 정확한 기록표를 갖는 것이 필요했던 당시의 정황에 비추어 보아 신빙성을 갖는 자료로 인정받을 만하다.
그 외에 앗술바니팔 도서관 소장 토서판에 기록된 내용들은 과학, 문학, 상업, 서한 등을 비롯하여 다양하다. 더욱이 이 도서관의 토서판들은 자세히 분류, 보존되었기 때문에 오늘날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된다. 뿐만 아니라 니느웨 도서관은 당시 일반인들에게 대출했던 흔적을 찾을 수 있기 때문에 더욱 흥미롭다. 즉 당시 앗수르에는 제학문 분야에 있어서 상당한 발전을 보였음을 알 수 있다.
Ⅱ. 나훔의 메시지
나훔의 메시지는 문학적인 웅장한 묘미, 사건 묘사에 있어서의 생동감에도 불구하고 외국 압제자들에 대한 혐오감으로 가득 찼다는 평을 받기 때문에 사실상 해석에 있어서 난문제를 제시 한다. 물론 본서의 신랄한 적개심의 표현은 시인과 독자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함한 하나님의 적개심을 표상한 것이기도 하지만, 반면에 이것은 실로 장엄하고도 두려운 장면이기도 하다. 이처럼 문학적인 가치에서 본다면 본서는 소선지서 가운데 드문 보물이다. 그러나 단순한 문학적인 면에서가 아니라 본서에 포함된 신학적인 면에서 살펴보면, 니느웨의 몰락을 정당하게 보려는 히브리적 관념의 발현이란 점이 엿보인다. 즉 시인이 자신의 언어로 니느웨 몰락의 번민을 그리는 가운데, 대적의 거대하고도 어마어마한 몰락의 정당성을 시적으로 읊을 수 있었던 데서, 시인은 이를 하나님의 지배를 입증하는 사건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본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관점은 하나님의 정의와 구분의 절대적인 능력이 그분의 목적을 수행하는데 있다는 점이다. 더욱이 본서는 오늘날 흔히 소선지자들에 편만하게 나타나는 질투의 하나님으로서의 성격을 제공한다. 곧 이 질투의 성격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의 권위를 비웃거나 혹은 자기 이웃에게 행패하는 모든 자들에게 적대적인 행동을 취하게끔 한다. 한편 이 질투는 자기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세상의 압박으로부터의 구출을 약속하였다.
1. 보수자 하나님
나 1장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언 가운데는
출 34:6;
시 103:8; 145:8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크신 자비와 신실하심의 선언을 발견하게 된다. 특히 그 후반부는 출애굽기나 시편의 언급과 다분히 유사한데, 여기에서 하나님은 본서에 강조된 대적에 대한 자비나 인내보다도 오히려 질투와 보수 정신에 가득 차 있음이 엿보인다. 하나님의 품성에서 인내에 대한 구절은
나 1:3의 '노하기를 더디하신다'는 표현에서만 암시되었을 뿐이다.
1) 하나님의 두 가지 성격
본서의 시인은 하나님이 지니신 두 가지 대조적인 성격을 제시하였다. 그 하나는 하나님께 반항하는 인간들에 대한 하나님의 성격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베푸시는 택한 백성들에 대한 태도이다. 그런데 시인은 전자의 모습을 자연 가운데서, 자연의 힘을 통하여 하나님의 과감한 행동을 계속 묘사함으로써 제시하였다. 즉 하나님은 강을 말릴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바다까지도 말리는 맹렬한 열로 인간의 생활을 지배하신다. 그러나 여기에서 시인이 강조하고자 한 점은 자연의 힘이라고 불리는 것을 통하여 자연 가운데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에 관한 것이다. 곧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만물을 파괴할 수 있다. 바로 하나님께 반항하는 인간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이러한 파괴적 성격에서 드러난다. 따라서 하나님의 대적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는 완전한 파괴의 보수뿐이다. 그러나 시인은 재난의 날에 여호와가 자기에게로 피난하는 자를 아신다는 것을 선언하였다. 곧 하나님의 또 다른 모습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비의 성격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는 백성들에 대한 보호로 나타났다.
2) 하나님의 선고와 평화의 선포
나훔은 그 대적과 대적으로 인하여 고통 받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예언적으로 선포하였다(
나 1:12-14). 즉 여호와에 대하여 악을 꾀한다는 관점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압박하는 것은 심판을 면할 수 없는 죄목이라는 것이 시인의 관점이다. 어떤 학자들은 이를 두고 피압박 민족 이스라엘의 민족주의적인 요소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여호와를 대적하는 대적자들이 아무리 강할지라도 멸절시키겠다는 하나님의 선고에는 보수자 하나님의 의지가 담겨 있다. 하나님의 선고는 그 대적의 이름이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할 것이며, 그러므로 후손도 남지 않을 것이고, 그 백성들은 멸절하여 땅에 묻힐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더욱이 새긴 우상과 부어 만든 우상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대적의 신전에서 없어질 것이라고 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선고는 그 대적들의 최고 가치로 간주된 신전에서 그들을 파멸해 버리시겠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일반적으로 최고의 가치관을 가진 네 가지 중요한 기준에 의해서 그 대적들을 꾸짖었다. 즉 ① 강한 능력의 소유, ② 안정된 생활의 지속, ③ 자손을 통하여 그 가족의 이름을 계승시키는 것, ④ 우상 숭배의 실상 등 네 가지이다. 하나님과 대적한 자들의 거짓된 가치관은 먼저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거부한 것에서부터 적극적으로 악을 도모하는 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이 저들을 거부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아무리 강한 군대와 국력을 자랑할지라도 그것들은 모두 허약하고 무기력한 것들이 된다. 곧 하나님의 선고는 하나님의 권위에 항거한 니느웨의 비참한 운명을 취급한 것이라고 하겠다. 한편 본서에 나타난 여호와의 선고에는 고통 받는 신실한 자들에 대한 평화의 선언이 담겨져 있다. 곧 그들은 고통이 끝나고, 대적의 멍에가 깨뜨려지고 그들의 결박이 끊어져 자유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소식은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길이 산 위에 있을 대 한 전달자를 보는 것으로부터 알게 된다. 그 전달자가 전한 메시지의 요지는 '평화'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히브리인들의 평화에 대한 생각을 살펴보면 평화는 무장 충돌이 단순한 정지를 의미하지 않는다. 곧 평화는 무장 충돌의 단순한 정지뿐만 아니라 각 개인의 평강과 그 백성의 평강과 번영을 가져오는 지역 사회의 평화, 그리고 신적인 혹은 국가 권력에서 확립된 생활 질서 등과 연관된 개념이다. 특히
나 1:15에 선포된 평화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이 여호와는 평화를 선포할 때 절기와 서원을 통한 평화의 인식을 지시하였다. 동시에 하나님의 축복 아래 주어진 생활 의식을 지키도록 요구하였다. 그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은 유다를 대항하여 일어날 대적이 없음을 선포하셨다. 곧 진정한 평화의 도래는 무장 충돌의 단순한 정지를 뛰어넘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으로 가능하다. 이러한 면에서 보수자 하나님의 모습은 결국 택한 백성의 평화와 안녕을 위한 대적자에 대한 철저한 보수하고 하겠다.
2. 니느웨의 몰락
1) 니느웨에 대한 경고
유다의 선지자 나훔은 자신을 니느웨 멸망의 파수인으로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B.C. 612년에 바벨론에 의하여 파멸하기 적전에 니느웨를 향하여 하나님의 경고를 전달하였다. 하지만 이미 니느웨의 멸망은 그들이 하나님을 대항하여 악을 도모한 죄로 이하여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이 니느웨의 파멸에 대한 파수인으로 자처한 것은 왜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 니느웨 파멸의 위기에 대한 이방 족속들의 태도를 살펴보자, 이미 이방에는 니느웨 파멸의 소문이 돌고 있었다. 새로이 등장한 바벨론으로 말미암아 위협을 느끼고 있던 많은 이방인들은 앗수르의 폭압 정치에서 벗어날 좋은 기회로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바벨론은 하나의 해방자의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나훔이 니느웨의 위기에 대한 경고를 선포한 것은 니느웨 파멸을 안타까워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파멸의 때를 맞이한 니느웨를 들어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이는 그가 유다에서 예언을 선포한 것으로도 짐작 가능한 일이다. 여하튼 니느웨의 파멸은 이미 정해진 바요 그것을 전달한 의무를 부여받은 선지자지만 그의 신앙의 모토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에 대한 경외에 있었다. 이와 같은 선지자의 입장은 그의 야곱과 포도나무에 대한 언급에서도 잘 나타난다(참조,
나 2:2). 즉 선지자는 포도나무의 가지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야곱과 이스라엘의 회복을 선언하였다. 그 가지를 꺾어 없이하여 버리는 약탈자들은 분명히 니느웨 백성과, 처음부터 자신들의 파멸의 요소를 내재하고 시작한 앗수르 군대의 침략에 대한 경고임이 분명하다.
2) 니느웨에 닥친 혼란
나훔서의 생생하고 감동적인 표현을 높이 평가하는 학자들은 니느웨성이 당할 혼란의 모습에 대한 시인의 묘사를 주목한다. 즉 본서에는 니느웨성이 패배하기 직전의 혼란 장면이 생생하게 묘사되었다(참조,
나 2:3-9). 최후 순간에 직면한 니느웨의 거리와 그 주변에는 백성들을 위시한 관리들, 그리고 병거들이 미친 듯이 내달렸다. 선지자 나훔은 니느웨 백성들에게 무장을 하고 산성을 지키도록 사기를 고취시키지만, 이미 운명의 니느웨성에는 대적의 군졸들이 깃들어 있었고, 파멸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선지자는 이러한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였는데, 번쩍이는 색깔로 단장한 방패와 옷, 잘 다듬어진 창과 병거들의 위협, 그리고 의기양양한 병마의 대열과 사방으로 뻗친 병거의 날랜 모습들이 위협적이다. 선지자는 공격하는 침략자의 모습과 아울러 허둥대는 니느웨성의 백성들도 빼놓지 않았다. 즉 급하게 허덕이며, 성에 이르러, 이 성읍을 둘러싸고 쳐들어오는 대적들을 막기 위하여 여러 가지 방패와 숨겨 논 무기를 찾는 피로에 지친 관원들의 모습을 선지자는 홍수가 난 상태의 혼란처럼 묘사하였다. 더욱이 선지자의 문학적인 예지가 번득이는 부분은 부녀자들의 허둥대는 모습이나 통곡하며 도망치는 처참한 모습이다. 왕후가 벌거벗은 몸으로 끌려가며, 시녀들이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모습은 한 나라, 한 도성의 파멸을 더욱 처참하게 만들었는데 이 같은 혼란 상태는 곧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3) 폐허가 된 니느웨
패배한 니느웨성의 참상은 마치 공포에 사로잡힌 사자 굴과 같았다. 다시는 사자가 암사자를 위하여 먹이를 가져오지 못할 것이며, 그 새끼들을 위하여 짐승을 찢어 오지 못할 것이다. 폐허가 된 니느웨성에 대한 후대의 보고에 의하면 B.C. 401년에 이곳을 지난 헬라의 퇴각하던 군대들이 니느웨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Xenophon). 이처럼 폭력과 박해에 대하여 공의로우신 여호와께서는 한 발자국도 양보하지 않고 니느웨성을 파멸시켰다. 이제 앗수르의 병거는 연기 속에 사라지겠고, 젊은 사자 앗수르는 이제 영영히 파멸될 것이다. 따라서 이제 앗수르의 약탈이 끊어짐은 물론 앗수르 왕에 대한 공납의 의무도 사라지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주변의 민족들은 앗수르의 멸망에 갈채를 보냈을 것이다. 실제 역사적으로 앗수르의 앗술 바니팔이 니느웨 몰락 이후 하란에서 앗수르의 통치권을 지속하려 하였지만, 그의 노력은 갈그미스 전투(B.C. 605)의 실패로 인해 수포로 돌아갔고 그의 백성들도 바벨론에 흡수되고 말았다.
3. 니느웨에 대한 조롱시
1) 포악의 대가
나 3장에 이르러 시인의 어조는 다소 조롱조의 위협적인 정서를 나타낸다. 우선 정서적으로 예언이라는 선언적인 면은 한 걸음 물러나 있고 관조적인, 다분히 시적인 감상에 의해 포악의 대가를 비교하였다. 즉 시인은 이제까지의 예언 선포적인 위협과 경고의 어조에서 벗어나 니느웨성 안에 쌓인 '악의 소굴과 수 없는 죽음과 시체 무더기' 속에 나타나 있는 악의 대가를 비교하였다. 하지만 시인의 관조적인 느긋한 정서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은 상당한 공포를 일으켰다. 왜냐하면 시인의 어조가 위협적이지는 않다 하더라도 앗수르의 악독한 행동에 관한 언급은 일종의 도덕적 관념에서의 정죄와 늑탈한 성읍에 대한 증오에 찬 형벌이 그대로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곧 시인의 요지는 앗수르에게 임한 형벌은 정당한 것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니느웨의 패배로 인하여 부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인 수치와 굴욕을 받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여호와는 니느웨를 벌하실 것이며, 음란한 행위와 그 외의 도덕적 타락에 대하여 공공연하게 폭로하실 것이다. 이러한 폭로의 목적은 모든 사람의 구경거리로 만들어 수치와 굴욕을 당하게 하려는 것이다. 여기에서 기독교의 자비 정신은 은유적으로조차 언급되지 않았다. 결국 하나님의 자비는 사전에 회개할 것을 촉구하는 것이지 사후에 형벌을 감해 주는 것과 같은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시인의 관점이다.
2) 니느웨에 대한 조롱시
시인은 니느웨를 노아몬 성읍과 비교하여 조롱하였다. 노아몬은 앗수르가 B.C. 663년에 약탈한 성읍이다. 시인은 이 성읍의 약탈 사건을 회상하면서 니느웨도 역시 그 몰락하는 날에 처음 익은 무화가 열매같이 그 요새지가 무너지고, 군대는 여인같이 행동하는 무능한 군대가 되어 버릴 것이라고 하였다. 시인이 노아몬을 비유로 든 것은 아마도 노아몬의 지형적 위치와 니느웨의 지형적인 위치가 비슷했던 때문인 듯하다. 노아몬도 니느웨가 티그리스강에 둘려 있는 것과 같이 나일강의 물로 둘려 있고, 다른 이방의 도움을 받았으나 몰락하였다. 학자들은 노아몬과 니느웨의 몰락에 관한 조롱시가 고대 근동에 널리 퍼진 조롱시였다고 생각한다(Smith, Davidson, Nowack, Sellin). 그만큼 두 도시의 몰락은 고대 근동의 역사 변화에 있어서 중요한 단락이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도 두 도시의 몰락은 하나님의 섭리하심에 대한 감사의 축제(절기 제사)를 드릴 만큼 큰 기쁨이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신년 축하 제사에서 이 조롱시를 불렀다(Smith).
3) 헛된 노력
니느웨 몰락에 대한 조롱시에는 니느웨 포위를 대비한 저항의 태세를 갖추라는 시인의 권고가 포함되었는데, 이는 주목할 만한 아이러니이다. 즉 선지자 나훔의 권고는 포위한 대적들이 성으로 통하는 물줄기를 막을 지도 모르니 물을 길어 놓으라는 것이다. 그리고 방어벽을 쌓고 군대를 준비하라고 권고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노력이 헛된 것임을 시인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난에 대비하라는 선지자의 권고는 이해가 안 된다. 그러나 나 3장이 니느웨 멸망에 대한 조롱시라는 것을 생각할 때 선지자의 권고 또한 조롱의 한 방편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니느웨는 파멸에 앞서 많은 준비를 하겠지만 그것은 이미 닥친 운명을 모면할 만한 것이 못 된다. 오히려 군비 확충을 위해 모든 백성이 허덕이고 허둥대는 운명의 도시, 패배의 도시에 대한 조롱이 역설적인 권고를 통하여 드러났다. 즉 그들은 헛된 노력에 동원되느라고 전쟁이 임하기도 전에 지쳐 버릴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들의 준비가 완벽하리만큼 잘 되었다 할지라도, 또 그 백성들이 메뚜기 떼처럼 무수하게 많을 지라도 그들의 준비는 물거품이 될 것이며, 바람과 기후의 변화로 인해 날아가 버린 메뚜기 떼처럼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결국 그들의 저항은 헛된 노력에 그치고 말 것이다.
4) 앗수르 마지막 날
선지자 나훔의 마지막 메시지로 앗수르 왕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그것은 일종의 조롱으로 군사적 지도력과 왕으로서의 특권을 한 몸에 지녔던 앗수르 왕의 최후에 대한 애가이다(참조,
나 3:18, 19). 또한 니느웨 최후의 날에 목자들과 귀족들의 나태함에 대해서도 조롱하였다. 결국 선지자는 니느웨와 앗수르의 멸망은 하나님의 거역할 수 없는 징계라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