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3 : 1 - 12절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바울이 총 4번의 전도 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오늘 본문 말씀은 그 첫 번째 전도 여행의 시작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에서 바나바와 시므온과 루기오와 마나엔이라는 사람들과 함께 교사와 선지자로 사역을 하다가 2절 말씀에 보면 “성령이 이르시되”라고 되어 있는데 성령의 음성을 듣고서는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서 안수하여 보내는 절차를 밟게 됩니다.
안디옥에서 배를 타기 위해서 실루기아로 내려가고 그곳에서 구브로라는 섬으로 가게 됩니다. 구브로라는 섬의 동쪽인 살라미에서부터 시작을 해서 서쪽 끝 부분에 있는 바보라는 곳까지 복음을 전하게 되는데 구브로라는 섬은 지중해에서 세 번째로 큰 섬입니다. 섬의 동쪽에서 서쪽까지의 폭이 225km이고 남북으로는 80km입니다. 그렇게 말씀을 드리면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안 될 것 같은데 제주도의 5배 정도라고 보시면 됩니다.
섬이 커서 바나바와 사울이 전도 여행의 가장 첫 번째 지역으로 결정한 것도 있겠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구브로 섬은 바나바의 고향입니다. 사도행전 4장 36절에서 봤었는데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이렇게 바나바를 소개했던 말씀이 있습니다. 사울의 고향 다소는 더 가까운 곳에 있었지만 다소는 사울을 통해 이미 복음을 들었을 것이고 아직까지 복음을 듣지 못한 영혼들을 위해 배를 타고 굳이 구브로라는 섬으로 들어갔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건 추측일 뿐이고 보다 더 정확한 이유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구브로로 가장 먼저 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어떤 이유와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성령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 한 가지 이유로 인해 바나바와 사울은 안디옥을 떠나 전도 여행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성령의 음성을 들었을 때 이 두 사람의 모습처럼 해야 하는데 성령의 음성을 듣고서도 움직이지 않고 떠나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싶은 대로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전에도 한 번 말씀을 드렸지만 결혼을 한 신혼부부가 부부싸움을 했습니다. 결혼 초기인지라 기선 제압을 하기 위해서 서로 양보하지도 않고 냉랭한 관계를 계속 유지하며 화해하지도 않고 잠자리에 들게 되었습니다. 둘 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누워 있는 동안 계속해서 성령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화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라. 네가 먼저 그렇게 하라” 계속해서 들려오는 성령의 음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지면 평생 지고 살아야 한다는 자존심 때문에 양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집 안에 쥐가 들어오니까 난리가 난 겁니다. 아내는 쥐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였기 때문에 책상 위로 올라가서는 소리를 치기 시작을 했고 그런 아내를 보고 있던 남편은 어떻게 하든 쥐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온 힘을 쏟아서 결국 쥐를 잡았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보니까 싸웠던 어색한 분위기는 순식간에 사라지게 되었고 어느덧 같은 편이 되어 있더랍니다. 그렇게 정리가 되어서 부부싸움의 첫 위기를 잘 넘길 수 있었는데 그리고 나서 생각해 보니까 성령님께서 말씀하실 때는 끔쩍도 안 했던 자신들이 쥐 한 마리 때문에 화해한 모습을 보면서 ‘성령님이 쥐보다 못한 존재인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비둘기처럼 아니라 쥐처럼 오셔서 그렇게 하셨는지는 몰라도 이런 불순종의 모습이 우리에게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시는 성령님에서 때로는 말씀을 통해, 때로는 생각을 통해, 때로는 사건과 사고와 사람을 통해 계속해서 말씀을 해 주시는데도 그런 성령님의 음성을 외면한 채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자기 살고 싶은 대로 살아가고 있는 모습들이 우리들의 모습이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들을 통해 자신을 쳐서 복종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나타나고 있는 바나바와 사울처럼 우리가 성령의 보냄을 받았을 때 성령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자기의 생각대로, 자기의 뜻대로 사는 사람은 성령님께 온전히 순종할 수가 없습니다. 4절 말씀에도 보면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이 두 사람은 오로지 성령의 보냄을 받아서 나아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전도 여행의 시작이 성령님의 보내심이었기 때문에 여행 내내 성령님을 의지하고 성령님과 교통하고 성령님의 내주하심을 바라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요? 그 시작이 성령님 이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다 함께 주일에 예배를 드려도 예배를 마치고 나서 그냥 자신의 의지로 집에 가는 사람과 성령님의 보냄을 받은 사람의 믿음은 하늘과 땅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의 보냄을 받은 사람은 일주일 내내 성령님과 교통하고 의지하고 교제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지만 자신의 계획과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그냥 홀로 돌아가는 사람들은 이런 성령님의 교통하심과 교제하심의 은혜를 경험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시작을 보면 그 끝을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처음에 성령님의 보냄을 받는 것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 일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의 보냄을 받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전도 여행 중에 거짓 선지자를 만나게 되자 어떤 모습으로 변하게 되냐면 9절에 보면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성령님의 보냄을 받았던 바울이었기 때문에 그런 상황 속에서 다른 것으로 충만할 수가 없었던 것이고 성령 충만한 가운데 그런 상황들을 주목하여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 충만함 가운데 세상을 주목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능력을 보세요. 10, 11절에 보면 “이르되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이렇게 말을 했더니 “즉시 안개와 어두움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즉각적인 능력이 나타났고 그 능력을 보던 총독은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놀랍게 여겼던 것입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충만하게 임하시게 되면 우리가 아무리 약한 사람이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일지라고 우리에게 권능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강한 능력! 예수님께서 보여 주셨던 그런 능력들이 우리에게도 나타나서 세상을 이기고, 악한 영들을 이길 수 있는 값진 경험들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능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성령님의 보내심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루를 시작하면서도 성령님의 보내심을 받아 하루를 시작을 해야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나를 직장에 보내시고 학교에 보내시고 삶의 터전으로 보내주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하루를 시작을 해야 그 하루가 성령님께서 강하게 역사하시는 하루가 되는 것이지 어려움 당하고 힘들어졌을 때 겨우 마지못해 성령님을 찾는 것으로는 이런 놀라운 영적 경험들을 할 수가 없습니다.
또 우리가 성령님의 보냄을 받았을 때 성령님께서 우리를 책임져 주실 수 있는 것이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자신의 계획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에게 성령님께서 성령의 능력을 부어 주시는 것은 말이 되지를 않습니다.
영국이 낳은 청교도 신앙가 존 번연 목사님이 국왕의 명을 어긴 죄로 감옥에 갇혔던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감옥의 감독관이 번연 목사님께 윗사람 모르게 옥문을 열어주면서 집에 가셔서 사모님과 식구들을 잠깐 뵙고 오시라고 하였습니다. 얼마쯤 가다가 목사님이 되돌아오기에 왜 돌아 오셨냐고 묻자 존 번연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호의는 고마우나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길이 아니라서 돌아왔습니다." 그로부터 한 시간 후에 국왕이 직접 감옥을 시찰하면서 국왕의 명을 어겨 감옥에 있던 존 번연 목사님을 확인하고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이 일을 경험한 감옥의 감독관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목사님께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동하셨기에 목사님도 살고 나도 살았습니다. 이제 제가 언제 목사님께 가시라 오시라 하지 않을 테니까 목사님의 마음에 비쳐오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시고 싶을 때 가셨다가 오시고 싶을 때 오시기 바랍니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D. L. 무디(1837∼99) 목사님만큼 기독교를 부흥시킨 인물도 드물다고 합니다. 그는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했지만 복음적이며 영감 있고 열정적인 설교로 수많은 영혼을 주께 인도했습니다. 그의 집회가 있을 때마다 은혜를 받으려고 모여든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뤘습니다. 한 지역에서 무디 목사를 초청하여 전도집회를 가지려는 준비모임이 열렸는데 이때 한 젊은 목회자가 벌떡 일어나 “왜 강사로 무디만 고집합니까? 무디 외에는 설교자가 없단 말입니까? 그가 성령을 독점하기라도 했단 말입니까?”라고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러자 존경받는 원로 목회자가 조용히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무디만이 성령을 독점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러나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이 시대에 무디를 독점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순간 장내에는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고 합니다.
우리도 성령님께서 독점하시고 성령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데 간단합니다. 성령의 보내심을 받으면 됩니다. 우리가 성령의 초청과 부르심을 받고 오늘 이곳에 모인 것처럼 성령님의 보내심을 받아 교회를 떠나고 하루 하루를 성령님의 보내심을 받으며 시작하면 우리도 성령님께서 독점하는 영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하는데 왜 성령의 충만한 가운데 해야 합니까? 성령 충만함을 받은 상태에서 성령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기도를 했을 때 그 기도가 능력 있는 기도가 되는 것이지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한 기도가 되면 40일을 금식하여 기도할지라도 응답받는 역사가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그 시작은 성령님으로부터 해야 우리의 삶이 능력 있는 삶이 되고 악한 영을 물리치는 삶이 되고 하나님께 칭찬 받는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예배를 마치고 나면 각자의 삶의 처소로 돌아가게 되는데 자신의 발과 의지로 왔으니까 성령님과 상관없이 돌아가면 안 되고 성령님의 보냄을 받아서 가는 성도님들이 되셔야 합니다. 그렇게 한 주를 시작해야 바나바와 바울처럼 성령 충만한 가운데 세상을 보고 사람들을 주목하여 볼 수 있게 되고, 삶의 현장에서 성령님께서 강하게 일하심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주시는 감동대로, 은혜대로 오늘 이곳을 떠나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고, 한 주간 내내 성령 충만함으로 삶의 현장을 주목하여 바라보다가 성령님의 능력으로 승리하다가 다음 주도 성령님의 초청을 받고 이곳으로 올 수 있는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