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원은 북경 서북부의 해정구에 위치한 정원 공원이자 궁전이다. 주로 60m 높이의 만수산과 쿤밍호에 많은 공을 들여서 공사를 하였다.
이화원의 면적은 2.9평방킬로미터이고 이중에 3/4이 호수로 구성되어 있다. 쿤밍호는 2.2평방킬로미터를 차지하며, 사람을 동원해서 바닥을 파낸
완전 수작업 호수이다. 파낸 흙은 만수산을 쌓는 데 사용되었다. 7만 평방 미터의 공간에 궁과 정원 그리고 고전적인 건축을 살려낸 것이 특징이다.
1764년 청나라 건륭제가 청의원(淸漪園)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이후 서태후에 의해 1886년과 1902에 서태후에 의해 재건되었는데
1888년 현재의 이화원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위키백과참조)
이화원의 유래와 역사는,
1153년 금나라 완안량 황제가 행궁을 설치한 것이 시초가 되어 원나라때 완서우 산과 쿤밍호를 만들었다.
이후 1750년 건륭제 재위 15년에 공사를 개시하였다. 솜씨좋은 장인들은 정원양식의 다양한 궁궐을 창조해 내었다. 쿤밍호는 기존의 작은 연못을
확장하여 항저우의 서호를 모방하여 만들어졌다. 1764년 개축하여 청의원(淸漪園)이라는 이름을 붙혔다.
1860년 제2차 아편 전쟁으로 영프연합군의 공격에 의해 불타는 수난을 당했고, 모조리 약탈 당했다.
1900년에도 의화단의 운동당시에 일본과 서양 8개국의 연합군에 공격당하였다. 다행히도 완파되지는 않아서, 1886년과 1902에 서태후에 의해 재건되었다.
1888년 현재의 이화원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는데, 서태후는 이곳을 여름 피서지로 사용하였다. 서태후는 이곳을 재건하기 위해, 해군 예산
30만은을 유용하여, 재건과 확장에 쏟아부었다고 한다.
1998년 12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되었다. 유네스코는 중국의 조경과 정원예술의 창조적인 예술을 빼어나게 표현하였다고 선언하였다.(위키백과 참조)
이화원 매표소. 대형전광판에 중국어와 영어로 써 있다.
이화원 관람은 개인이 오면 통합표를 구입해야되는데 5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각 구역을 들어갈 때마다 펀치로 구멍을 뚫어 준단다.
오늘은 안내하는대로 주요코스만 둘러볼 것 같다.
입구를 들어서면 문창각을 바로보며 들어간다.
지춘정 다리를 건너기 전 큰 문은 문창각이다.
이화원 내 6개 성관 건축물 중에 최고의 규모를 자랑한다. 건룡 15년(1750)에 창건했고, 1860년 영국 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불태워졌고, 광서때 재건했다.
주각은 2층이고 내부에는 동제 문창제국과 선동 , 동특을 모시고 있다. 문창각과 만수산 서쪽에 모신 무성의 숙운첨은 "문무보필"을 상징한다. .
입구 맞은편 벽에 그려진 3개의 그림 중 좌우 동일한 연꽃 문양이 새겨져 있다.
지춘정은 문창각 서북부의 호수 기슭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화원에서 가장 처음 봄을 느낄 수 있는 곳이라고 하며 곤명호 동쪽 기슭 중
가장 경기가 좋은 곳이 바로 이곳이라고 한다.
지춘정으로 가는 다리에서 기념사진을 남긴다. 멀리 불향각이 보인다.
옥란당. 서기 1750년 청나라 건륭 15년에 창건한 옥란당은 원래 사방에서 인접가능한 천당전이었다. 서기 1860년 청나라 함풍 10년에 영국 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불살라졌고, 서기 1886년인 광서 12년에 재건하여 광서황제의 침궁으로 이용했다. 서기 1898년인 광서 24년에 무술변법 운동이 실패 한 후,
자희태후가 옥란당을 봉쇄라라는 명령을 내리고 이곳은 광서황제가 감금되었던 곳이다.
옥란당의 뜻이 '호수가 빛나고 물결이 넘실거린다' 이네요. 글구 광서황제는 10년동안 감금되다 병으로 죽었는데... 즉 옥란당은 광서황제에게는 감옥이었다.
옥란당 정전으로 "광서황제가 이화원에 거할 때의 침실이다. 옥란당 안의 앞방에는 자단목감침향의 보좌와 어안을 설치하였으며, 유리병풍의 산수화 ,
물총새의 부채모양 날개 등 황권 상징물이 그려져 있으며, 광서황제가 당시 상주문을 읽고 지시하거나 정무를 처리하던 곳이었다.
1898년 9월 16일에 광서황제는 이곳에서 병권을 장악한 원세개를 만나 "유신변법"을 지지해줄 것을 기대하였다.
서북쪽의 방은 광서황제의 침실이다."
의운관. '의운'이란 서적을 수장한다는 뜻이다. 건륭 15년(1750년)에 건설되었다. 의운관의 양쪽 행랑에는 곁채가 있고 기중이 5개 있으며,
동쪽은 도존재이고 서쪽은 근서헌이다. 함풍 10년(1860년)에 영국-프랑스 연합군에 의하여 불타버렸고 광서 12년(1886년)에 재건된후
광서 황후가 거주하는 곳이 되었다.
의운관 정전. 광서황제의 황후침실이다. 광서황제 황후의 성씨는 엽혁나랍씨이며, 자희태후의 질녀이다. 광서 15년(1889년)에 황후로 책립된후,
1908년에 광서황제 및 자희태후가 병으로 죽고 부의가 즉위함에 따라 황태후가 되었으며, 미칭은 '륭유'이다. 1911년 무창봉기후에 태후의 신분으로
퇴위 하였다.
영수재는 광서 연간에 건설되었다. 자희 태후의 침실인 낙수당과 이어져 있으며, 청나라 말기의 총감인 이연영 태감이 이화원에 거처하던 곳으로
'총관원'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곳을 지나면 장랑(이 나온다. 장랑은 273칸의 회랑으로 구성된 728m의 무식할 정도로 긴 복도로 동쪽의 요월문에서 서쪽의 석장정까지 이어져 있으며,
서태후의 산책로 겸 야외 갤러리인 곳으로 벽 위에는 각종 산수화나 [서유기] [홍루몽] [삼국지연의] [수호전] 등에서 따온 총 1만4000여점의 그림을
그려놓아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해준다.
또, 동쪽에서 서쪽으로 육가 , 기란 , 추수 , 청요 의 사계절을 상징하는 4개의 팔각정이 있다.
장랑(長廊, 긴복도)은 건륭 15년(1750년)에 창건했고, 후에 영국 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불태어졌고 광서 12년(1886년)에 재건하였다.
장랑은 동쪽 요월문(邀月門)에서 시작하여 서쪽 석장정까지 모두 273칸이 있고, 총길이 728m이다. 대들보에는 인물, 산수, 화초, 조류등
각종 채색화 8천여폭이 그려져 있고, 중국 고전원림중 최고의 길이를 자랑하는 복도이다. 장랑 중간에는 류가, 기란, 추수, 청요 4개 8각
처마로의 정자가 있고, 산을 등지고 강을 끼고 있는 백운전을 중심으로 동,서쪽으로 마수산을 따라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저 멀리 보이는 다리가 십칠공교. 십칠공교는 동쪽으로는 곽여정, 서쪽으로는 남호도와 연결된 길이 150m , 너비 8m의 중국 원림(공원) 중 최대의 교량으로
이화원의 가장 아름다운 풍경 중 하나로, 다리에 모두 17개의 구멍이 나 있어서 17공교란 이름이 붙혔단다.
마치 하늘의 일곱빛깔 무지개가 곤명호에 내려온 듯한 형상이며 다리 난간에 조각된 544마리의 사자 상은 그 모양이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
입구부분에 자리잡은 곽여정은 중국의 정자 형식 고건축물 중 규모가 가장 커. 곽여정의 건너편에 있는 청동으로 조각된 동우의 몸에는 홍수방지를
기원하는 80자의 문구가 새겨져 있다.
이곳은 인수전으로 원래 근정전으로 '정무를 부지런하고 성실히 보라'는 뜻으로 광서황제 때 '어진 정치를 베푸는 자는 장수한다'는 뜻의
인수전으로 바뀌었단다. 여기서 서태후와 광서황제가 왕의 업무를 보았다.
인수전은 1750년 청나라 건륭 15년에 창건되었고, 청 의원 때 근정전이라 불렀다. 서기 1860년 함풍 10년에 영국 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불살라졌고,
1886년에 광서 12년에 재건하여 '논어'중 '인자수(仁者壽)'의 뜻을 빌어 인수전으로 이름을 고쳤다. 자희와 광서황제가 이화원에 있을때 인수전은
국정을 다스리고 축하행사를 벌이며, 외국사절을 접견하는 장소였다. 이화원에서 인수전은 정무를 보는 주체 건축물이다.
기린(麒麟)은 건륭황제 연간에 주조한 것으로 모양이 기이하다. 용의 머리, 사자의 꼬리, 소의 발쪽, 사슴의 뿌리, 온몸은 인갑상태로서 전설속에
상서로움을 표현하는 짐승이며, 악을 누르고 사악한 것을 없애는 역할을 한다.
인수전 앞에 커다란 돌들이 놓여 있다. 1886년에 현 북경대학교 내에서 옮겨왔는데 그 이름이 수성석으로 형태가 기이하고 빛깔이 윤택하다.
마치 장수를 상징하는 수성과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서태후가 장수를 기원했던 것인가. 중국 사람들은 돌도 참 좋아 하는 것 같다.
인수전 앞에 돌과 나무들이 어우러져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이곳도 바닥은 돌로 덮혀 있다.
돌아나오니 아쉽기 그지없다. 이 넓고 아름다운 지역을 이렇게 짧은 시간에 보고 나왔다.
이곳에 세워진 이화원 소개를 다시한번 옮겨본다.
이화원은 중국 청나라의 황가화원이자 행궁이며 원명은 청의원이다. 기원 1750년에 건설된후 1860년에 영국-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불타 버렸고
1888년에 재건된 후 지금의 이름으로 변경하였다.
이화원의 주요 풍경구는 만수산과 곤명호로 구성되었고 전체 면적은 300.59ha이며 수면면적이 약3/4을 차지한다. 이화원안에는 다양한 형식의
궁전과 원림 및 고대 건축물들이 7만여제곱미터에 범위내에 보존되어 있고 진귀한 문화제 수장품은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다.
1961년 전국의 제1차 중점 문화재 보호기관이 되었고 1998년에 '세계유산명록'에 편입되었다.
이화원은 크게 정치구와 생활구, 그리고 광대구 3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우선 정문에서 가장 먼저 볼 수 있던 정치구는 인수전을 중심으로 정치활동을...
청조말기 서태후와 광서황제가 내정을 종사하던 곳.
그 다음으로 본 곳이 낙수당 , 옥란당 , 의운관 등으로 대표되는 생활구. 물론 서태후와 광서황제의 거주지역으로 쓰이던 곳.
광대구는 장랑, 후산 , 서구 등으로 이화원 내의 가장 넓은 지역을 차지하는 휴식과 유람의 공간이며 원내에서 가장 경치가 좋은 곳이라 할 수 있다.
늘 그렇듯이 이제 또 다음을 기약하며 화교성 대극장으로 그 유명하다는 금면왕조를 보러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