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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아동문학인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Lim정진
송강 정철과 담양
글.사진 / 김경식
우리나라의 사월과 오월은 눈이 부시도록 찬란하다.
연둣빛 잎으로 자신의 색깔을 표현하며 각자의 몸을 숲속에 감춘다.
숲은 자신의 색을 지니고 침묵으로 살아가는 나무들의 마을이다.
담양 메타쉐쿼이아 가로수길
이즈막 나무들은 자신의 가지에 새 잎을 달고 팔랑거린다. 차별화된 녹색의 향연이 시작된 것이다. 이 시기는 가을의 단풍보다도 어쩌면 더 신비하고 아름답다.
앙상하던 나뭇가지에 새 잎이 돋아 초록 숲이 된다.
이 녹색의 향연 속에 우리의 사월과 오월은 사람들의 가슴을 흔든다.
세계 경제의 한파에도 이렇게 봄은 또 와서 꽃들이 피고 나무들은 자신의 색을 발하고 있다.
그러나 세상살이는 하루도 편안할 날이 없다. 걱정들이 태산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다.
한숨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린다. 우리에게 언제 태평성대의 시대가 있었던가.
늘 가난과 굶주림이 이 땅을 지배했고 지배자들의 농락이 민중들의 삶을 파탄 나게 만들곤 했다.
이민족의 침략으로 사람과 국토는 유린당했다.
우리나라의 산과 골짜기, 들, 강과 아니 전 국토에는 이런 조상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스며있는 곳이다.
오천년의 역사를 이어온 우리 국토를 순례하는 일은 그래서 숭고하다.
특히 역사의 질곡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미래를 준비하던 장소를 답사하는 일은 의미 있는 작업이다.
이런 답사를 찾아 가는 날은 설레임에 가슴이 벅차다. 풍경이 아름다우면 상처도 깊어질 수 있다고 했던가. 전국적으로 흐릴 거라는 예보를 들으며 푸르른 봄날1000년의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담양을 향해 출발한다.
담양은 역사와 전통의 고을이다.
담양(潭陽)이란 명칭이 처음 사용된 것은 고려시대다.
삼한시대 때는 마한 땅이었으며, 백제(추자혜군), 신라(추성군), 고려(담주군)이었다가담양이란 명칭이 정착되어 오늘에 이른다.
제목을 <송강 정철과 담양>으로 정했지만 실은 면앙정 ‘송순’에 더 기울어진 기행이 될지 모른다.
이미 송강 정철은 충북 진천 편에서 그의 삶과 문학을 조명한 일이 있기 때문이다.
올해가 마침 기축년으로 송강 정철에 의해 주도되었던 기축사화가 일어난 지 420년이 되는 해다.
60년씩 7번이 지나갔다. 만약 정철이 이런 일을 도모하지 않았다면 그는 우리 국문학사의 가장 큰 거봉이며 존경의 대상이 되었을 사람이다.
그러나 송강 정철은 기축옥사를 일으켜 자신의 문학적인 근거지였던 호남 선비들 까지정적으로 만들어 참살하고 귀양가게 하는 참사를 일으켰다.
어찌되었던 정철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문장가다. 담양은 그가 청소년기와 중년기를 보낸 매우 중요한 장소다. 우리의 국토를 답사하며 문학의 발자취를 찾는 일은 매우 의미 있는 여행이다.
먹고 사는 일에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면 삶의 의미를 찾고 싶어진다.
문학기행은 자신이 지금까지 읽었던 문학작품의 배경지를 찾고 싶어질 때 떠나면 제격이다.
역사 속의 인물로 남아 있는 관념적인 작가를 현실 속으로 모셔오는 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의 삶은 바야흐로 의미를 찾는 것에 관점이 모아지고 있다. 세상에는 많은 의미들이 존재한다.
우리는 이제 400년 전 담양에 살았던 선비들의 삶과 죽음에 관한 의미를 찾아 떠나려고 한다.
결코 뜬금없이 어떤 역사적이며 문학적인 의미를 꺼내어 여행을 무겁게 하자고 하는 것이 아니다.
흥미를 가지고 떠나고 싶기 때문이다. 흥미는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다. 답사지의 지식이 있어야 생기는 것이다.
사전 지식과 문학적인 상상력이 없으면 의미가 삭감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면앙정
1580년 1월 송강 정철은 울진의 바닷가에 서서 “바다 밖은 하늘이니 하늘 밖은 무엇인고”라는 물음을 던진다. 이런 궁금증이 있었기에 그는 관동별곡을 쓸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송강 정철의 나이 45세, 하늘과 하늘 밖의 어떤 존재를 찾기 위한 스스로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질문을 찾기 위해 그는 기행을 하였으며 문학작품을 남기게 된다. 이것이 관동별곡이다. 경치 좋고 전망이 좋은 곳에는 정자가 있다. 담양은 이런 정자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곳이다. 정자 문화가 가장 활발하고 발달되었던 곳 이라고 할 수 있다. 정자는 그냥 노는 곳이 아니었다.
사상과 철학을 설파하고 현실적인 정치를 비판하고 대안을 논하던 곳이다. 또한 귀양살이 후에 고향으로 돌아온 선비 들의 은신처가 되기도 하였으며 지조를 이어가던 선비들의 거처였다. 담양의 정자 문화권에는 서로 다른 집안과 선비들의 인맥이 실타래처럼 엉켜있다. 그들의 학맥관계를 찾아가다 보면 16세기의 정치사와 문학사, 사회사가 함축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면앙정은 담양읍의 남쪽 제월봉 언덕에 앉아 있다. 드넓은 담양 평야 저 너머에는 병풍산이 그 이름값을 하며 병풍을 두른 듯 누워 있다. 퍽 경사진 계단 따라 올라야 하는데어르신들이 오르기에는 쉽지 않다. 면앙정을 오르는 왼쪽 켠엔 참나무들이 우측에는 대나무 숲이 푸른 물결처럼 일렁인다. 이렇듯 대숲사이로 난 돌계단을 따라 가파른 경사를 오르면 비로소 시야가 확 트인 언덕 위에 면앙정이 모습을 드러낸다.
뜻밖에 정자 입구에 오르니 제법 넓고 아늑한 마당이 반긴다.
면앙정은 안정적인 기반위에 조성되어 있음을 한눈에 보아도 알 수 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 담양군 봉산면 제월리에 속한 면앙정은 송순(宋純1493~1583)이 1533년에 건립하였다. 그의 나이 마흔 한 살 때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다. 앞과 뒤 좌우에 마루를 만들고 마루 중앙에는 방을 배치한 것이 면앙정의 특징이다. 그러나 이 정자의 최초의 모습은 초가집으로 바람과 비를 겨우 가릴 정도로 초라했다고 전한다.
면앙정에서
정자를 빙 둘러 사방에 마루가 깔려 있고 가운데 한 칸 정도의 온돌방이 궁금해 방문을 열어본다.
당장이라도 군불을 좀 지피고 그곳에 앉거나 눕고 싶다.
면앙정 내부에 걸린 목판들이 고색창연하다. 익숙한 목판이 걸려서 읽고 해석해 본다.송순의 유명한 삼언시(三言詩)이다.
俛有地(면유지) 내려다보면 땅이요
仰有天(앙유지) 올려다보면 하늘이네.
亭其中(정기중) 그 가운데 정자를 지으니
興浩然(흥호연) 호연지기 일어나네.
招風月(초풍월) 바람과 달을 불러들이고
揖山川(읍산천) 산과 냇물도 끌어 들이네
扶藜杖(부려장) 명아주 지팡이 짚고서
送百年(송백년) 한 백년 살고 싶어라.
-- 송순 삼언시 김경식 번역
면앙정 송순은 91세까지 장수를 누렸다. 당시의 수명으로는 정말 천수를 누린 것이다.이런 수명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다음과 같은 안빈낙도의 삶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1533년 면앙정을 초가집으로 처음 세우고 쓴 시조이다.
십년을 경영하여 초가 세 칸 지어내니
나 한 칸, 달 한 칸에 청풍 한 칸 맡겨 두고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라.
송순의 이 시조는 조선 선비들의 전원주의적이며 가난한 삶에도 만족할 줄 알며 즐겁게 살아가는 자세가 표현되어 있다. 이런 의식을 가진 이가 일찍이 이곳에서 나고 정자를 세웠으니 바로 이곳 면앙정이 호남에서 제일가는 시문의 산실과 가사문학의 원조를 형성할 수 있었으리라. 정자는 노인들이 화투치고 바둑이나 장기를 두고 술을 마시며 노는 장소가 아니었다.
정자의 이름을 짓는데도 세상의 가장 고매한 철학과 사상이 녹아 있다.
면앙정(俛仰亭)의 면(俛)은 ‘머리를 숙이고 땅을 본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앙(仰)은 ‘하늘을 우러러 본다’는 의미를 가진 글자다. 결국 면앙정은 ‘겸손하게 국토를 바라보면서 하늘을 우러러 보는 집’이다. 하늘과 땅 사이에 사람이 존재한다고 하는 사상은 ‘역경’에 나온다. 사람이 위대한 것은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며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지 못할 때 인간은 동물과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면앙정은 결국 우리의 국토와 우주를 바라볼 수 있다는 원대한 이름을 지닌 곳이다.
면앙정의 현판 글씨는 성수침(1493~1564)의 글씨이다. 그는 이 현판 글씨를 받기 위해 경기도 파주까지 찾아 갔다. 천리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가서 받아온 현판 글씨 그러나 이 현판은 정유재란 때(1597년)에 사라졌다. 지금 글씨는 그의 글씨를 모방한 글씨일 것이다.
성수침은 여러 고을의 현감을 지냈지만 세상을 떠나 좌의정 칭호를 붙여 주었으니 걸죽한 인물이었음이 분명하다. 당시 서예에는 가장 명망 높던 사람이었기에 송순은 직접 그를 찾아가 현판 글씨를 받아 왔던 것이다. 성수침의 아들이 우계 성혼(1535~1598이다.
정유재란(1597년) 때 불에 타버린 면앙정은 1654년에 재건하였으며 몇 번의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른다. 우리나라의 어디를 가나 목조 건축물은 이민족의 침략 때 마다 파괴되었다.
국토를 보전할 수 없이 허약하기만 했던 나라에서 사상과 철학 문학이 꽃을 피웠다는 사실은 어쩌면 기적이 될 만하다.
면앙정 오르는 길
면앙정은 정면보다 뒷면에서 앞의 경관을 보는 것이 절경이다. 들녘이 아름답다. 넓은 평야는 이곳의 선비들의 경제적인 토대확보가 되었을 것이다. 노령에서 뻗어 내린 병풍산 추월산의 영봉들이 안개 같은 엷은 구름 속에 살포시 싸여 있다. 한 칸의 방에는 구들을 깔아 놓았기 때문에 아궁이에 군불을 지피면 겨울날을 보낼 수 있게 만들었다. 정자에는 어디나 방이 존재한다. 이 방에는 정자 주인의 애장서가 몇 권은 반드시 있었으며, 붓과 먹 벼루 화선지가 준비되어 있었다. 시 모임이 있을 때에는 정자 주변에서 하인들이 음식장만을 하였을 것이다.
나는 문학기행이나 역사기행을 하게 될 때는 늘 눈을 지그시 감고 당시의 시대 배경을 가지고 답사지를 음미한다.이곳에서도 당시의 광경들을 상상해 본다.
당시 송순의 자택은 이곳에서 멀지 않은 담양군 봉산면 상덕리에 위치 해 있었다. 그곳에서 늘 음식물을 운반하던 하인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가지고 왔을 음식들이 궁금하며 급경사를 오르던 하인들의 숨소리를 감지해 보는 것이다. 지금은 이렇듯 갈참나무와 대숲들이 정자를 가리고 있지만 당시에는 아마도 민둥산이었을지 모른다. 아궁이에 불을 지펴야 하는 한옥구조에선 땔감을 산에서 얻어야 했기에 마을주변의 산엔 나무들이 자랄 겨를이 없었다. 아무튼 생활도구들과 음식물을 이곳 까지 매일 배달했을 송순 선생 집안 식구들의 수고를 생각하면서 면앙정 앞뜰을 거닐고 있는 것이다.
송순 선생이 1533년에 심었다고 전하는 상수리나무 만이 아마도 이때의 모습들을 기억할 수 있으리라.
면앙정 송순(1493∼1583)은 면앙정 인근의 담양군 봉산면 상덕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신평이고, 자(字)는 수초, 성지이다. 호는 기촌 또는 면앙정이다. 이조판서를 역임한 송태의 아들이다. 1519년(중종14)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한다. 1520년 사가독서를 마친 뒤 1527년 사간원 정언이 된다. 1533년 김안로가 권세를 잡자 담양의 고향에 돌아와 면앙정을 짓고 시를 읊으며 은거생활을 한다.
1537년 김안로가 사사된 뒤 홍문관 부제학과 충청도 어사 등을 지낸다.
경상도 관찰사와 사간원 대사간 등의 직무를 맡는다. 1542년 전라도 관찰사가 된다.
그러나 그에게도 시련은 있었다.1547년 양재역벽서사건에 연루되어 1년 이상 유배살이를 해야 했다. 1550년에 대사헌과 이조 참판에 부임한다. 선산 도호부사가 되던 해에 면앙정을 증축한다. 송순은 후덕한 사람이었다. 그의 철학은 수기안인(修己安人)이었다. “ 항상 자신의 수양에 힘쓰고 타인을 편안하게 만든다”는 신조를 가지고 살았다.
면앙정의 편액
면앙정에는 송순의 제자들이 걸어놓은 편액들이 즐비하다. 기대승이 면앙정기를 쓰고, 임제가 부를, 김인후와 임억령. 박순. 고경명 등이 시를 지어 면앙정에 목판으로 건다.면앙정에는 많은 일화가 전하는데 그중에 하나는 호남 지역을 위한 별시를 치를 때 정조가 시험제목을 정한다. 이 제목이 ‘하여 면앙정’이다. 송순의 회방연 때 그의 제자들이 그를 가마에 태워 집까지 모셔다 드린 것에 대한 각자의 생각을 쓰라는 내용이었다.
1579년 이곳 면앙정에서는 송순의 회방연(回榜宴)이 열렸다. 회방연이란 선비가 과거에 합격한 후 60년이 되는 해에 열리는 잔치를 말한다. 당시 수명으로 60세를 넘기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거늘 회방연을 맞이한다고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송순의 나이 87세 때이다. 이 무렵 정철은 홍문관 교리로 잘 나가고 있었다. 그는 선조의 어사화와 어사주를 가지고 담양 이 곳의 면앙정으로 왔다. 때를 맞추어 전라도의 관찰사는 물론 각 고을 원님들과 호남의 문인들이 거의 모두 모였다. 아마도 면앙정 마당이 비좁았을 터이다. 잔치가 어느 정도 끝나가고 있었다.
이때 성격이 호탕한 송강 정철이 나서며 “면앙정 선생님을 댁까지 우리 제자들이 모시겠습니다.”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우리 제자들이란 기대승, 고경명, 임제, 정철이다.의자모양의 간편한 가마인 ‘남여’에 스승 송순을 태우고 네 명의 제자들은 길을 떠난다.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은 큰 감동을 받았을 것이다. 당대 최고의 문장가들이 자원해서 앞과 뒤에 가마의 멜빵을 어깨에 걸었다는 것이 후세에 까지 미담이 되어 오늘에 전하고 있는 것이다. 송순의 이런 회방연의 호사는 조선 사회에서 전무후무한 사례가 될 것이다.
늘 권모술수가 판을 치고 폭압정치로 인해 감히 이런 모임을 가질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 아름다운 미담의 이야기에 의문이 있다. 기대승은 이미 1572년에 사망한 사람인데 어찌 가마를 멜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다. 그는 대사헌을 지내고 병이 나서 고향 장성으로 내려오다가 전북 고부에서 객사하였기 때문이다. 모든 문헌들이 아마도 이런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나는 다행히 년도에 관심이 많아서 인지 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때 가마를 메었던 사람 중에서 기대승 아닌 다른 한명을 찾아내는 것이 내 의무인지 모른다. 내가 추측하는 인물은 김성원(1525~1597)이다. 이때 누가 송순의 가마를 멘 것이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리라.
다만 전쟁과 사화로 일그러진 참혹한 시대 배경 속에도 한 폭의 아름다운 송순의 회방연 분위기를 연상하면 마음이 흐뭇하다. 스승과 제자의 분위기가 적어도 이 정도라면 살만한 세상이 아닌가. 당시의 아름답고 감동적인 일이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것이 다행이다. 이 미담은 면앙정이 존재하는 한 다음세대로 전달 될 것이다.
300년이 지난 어느 해에 한 선비가 면앙정을 지나가고 있었다. 강화도 출신의 대문호 영재 이건창이었다. 그는 보성에서 유배살이를 하고 돌아가던 길에 면앙정에 들린다.
면앙정이란 시 한편을 짓고 송순 선생을 부러워 했다.
송순 선생의 큰덕을 생각 하나니
풍류가 그 시대엔 풍성했었네.
면앙정은 의연하게 강 위에 서 있네.
가마꾼 그런 분들이야 이 땅에 우뚝 했고
산 빛은 멀고 멀어 물은 천 굽이로 꺾이고
들에 비친 그림자 질펀하여 사방으로 하늘 드리웠네
쳐다보고 굽어보다가 부질없이 서글퍼짐은
오늘 누군가 내 가마 메주고 나는 또 누굴 메줄것인가.
--이건창의 시 ‘면앙정’에서
결국 이건창 시인도 송순의 회방연때 그의 제자들이 가마를 메고 집까지 간 것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가마에 자신의 스승을 태우고 면앙정을 내려가던 훌륭한 제자들의 모습을 기억하는 일은 부러움이었을 것이다.
'면앙정가비'
송순의 벼슬길은 길었다. 전주 부윤과 나주 목사를 거쳐 70세에 ‘기로소’에 들었으니 말이다. 기로소는 나이 많은 문신을 예우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인데 정2품 이상으로 70세 이상의 노인에게만 주어진 특권 기구였다. 조선을 통틀어 송순은 90세의 천수를 누렸는데 이 보다 나이가 많았던 분들도 몇 명이 있었다. 기로소에 든 최고령자는 해주목사를 지낸 윤 경(1567~1664)으로 98세였으며, 숙종 때 97세의 이구원(李久源), 한성부판윤을 역임한 96세의 민형남(1564~1659) 등이다.
송순은 1568년 한성부 판윤이 되고, 뒤이어 의정부 우참찬이 된 뒤 은퇴한다. 그의 나이 76세 때였다. 송순의 성격은 너그럽고 후덕하였다. 이러한 성격의 소유자였기에 그의 벼슬길도 순탄했고 장수할 수 있는 비결이지 않았을까. 가야금을 잘 탔을 정도로 음률에 밝았으며 풍류를 알고 삶을 즐긴 분이다. 이런 예술적인 여유로움이 관용을 간직하며 살 수 있는 토대가 되었을 것이다.
김동욱 교수가 번역했던 송순의 ‘면앙정가’ 몇 줄을 읽어본다.
무등산 한 줄기의 산이 동쪽으로 뻗어 있어
멀리 떨치고 나와 제월봉이 되었거늘
끝없이 넓은 들에 무슨 생각하느라고
일곱굽이를 한데 머움쳐서 무더기무더기 벌여 놓은 듯
가운데 굽이는 구멍에 든 늙은 용이
선잠을 막 깨어 머리를 얹어 놓은 듯하네.
넓은 바위 위에 소나무와 대나무를 헤치고
정자를 앉혔으니 구름을 탄 청학이
천 리를 가려고 두 날개를 벌린 듯하구나
옥천산 용천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정자 앞 넓은 들에 올올이 펴진 듯하구나
넓거든 길지나 말거나 푸르거든 희거나 말거나
- 김동욱 교수 번역 송순의 면앙정가 일부
고봉 기대승(1527~1572)이 적은 ‘면앙정기’를 읽어 보면 면앙정의 건축 내력이 사뭇 상세하다.
면앙정기는 긴 문장이다. 면앙정기에는 송순이 이 터를 잡을 때 꿈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면앙정의 터는 본래 곽씨라는 분이 살았으며 하루는 그가 이상한 꿈을 꾸게 된다.
금과 옥으로 만든 어대(魚帶)를 찬 선비들이 면앙정 터에 모여 앉아있는 꿈 이었다.
곽씨는 꿈에서 깨어나 자신의 집안이 미래에 번성할 징조라고 생각해서 자기의 꿈 이야기를 하고 자신의 아들 지응을 노승에게 부탁하여 과거시험 공부를 시킨다. 그러나 그 아들은 성공하지 못하고 가세가 곤궁하게 된다. 결국 1521년 이 땅을 송순이 매입하게 된다.
12년 지난 후에 1533년 관직을 포기하고 이곳에 초가집을 짓고 5년을 살았다. 다시 조정으로 돌아가자 이 집은 몇 년이 못 되어 쓰러지고 터는 초목만 무성했다. 송순은 늘 이를 안타깝게 여기며 벼슬을 해야 했기에 객지로 떠돈다. 송순의 이런 마음을 알았던 사람이 있었다.
1552년 담양 부사 오겸(吳謙)이 협조하여 면앙정은 완성을 하기에 이른다.
송순이 이 땅을 매입한 후 30년 만에 면앙정이 지금의 모습이 된 것이다.
이 때 나이어린 제자 기대승에게 ‘면앙정기’를 부탁한다.
기대승은 자신은 자격이 되지 않는다며 한사코 사양하였지만 스승의 부탁을 어쩔 수 없었다.
기대승은 면앙정기 맨 끝에 이렇게 썼다
“아! 우리 공이 아니면 그 누가 능히 면앙이라는 이름을 감당하리오.”
‘우리 공’은 물론 송순 선생을 칭한다.
송순은 정치인이기 이전에 위대한 시인이었다.
그의 유명한 다음 시조는 중고등학교를 다닌 사람은 다 인지하고 있으리라.
風霜(풍상)이 섯거친 날의 갓 피온 黃菊花(황국화)를
金盆(금분)에 가득 담아 玉堂(옥당)에 보내오니
桃李(도리)야 곳인 체 마라 님의 뜻을 알괘라
-- 송순 시조 '옥당가'
이 시조는 송순이 명종을 위해 1547년에 지은 ‘자상특사황국옥당가’이다. 줄여서 옥당가라고 부른다.
당시 임금인 명종이 궁중에 핀 황국화를 꺽어 옥당관에게 주면서 시조를 지어보라고 하였다. 왕의 이런 분부에 옥당의 관리들은 순간 당황한다. 마침 숙직이었던 송순은 이 말을 듣고 시 한 수를 옥당관에게 지어 보낸다. 이 시를 읽고 난후 왕은 감탄하여 누구의 작품인지 묻는다. 송순은 명종에게 칭찬을 받은 후에 상을 받는다.
이 시조는 바람과 서리가 내리는 절망의 시대에 황국화가 시련을 견디며 피는 꽃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복숭아나 자두 꽃을 은유적으로 대조하면서 찬바람이 불고 서리가 내리는 늦가을까지 피는 황국화를 지조와 충성이 있는 선비임을 표현하고 있다.
다음 시조는 이와 정 반대 되는 시조이다. 왕을 비판하는 소리 일수도 있고 당시 정국을 탄식하는 시조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꽃이 진다고 새들아 슬퍼마라
바람에 흩날리니 꽃의 탓 아니로다
가노라 희짓는 봄을 새와 무삼하리오.
--송순 상춘가(傷春歌)
이 시조는 을사사화에 죽거나 귀양을 간 선비들을 위해 지은 시라고 전한다.
송순의 정적이었던 진복창은 어느 잔치에서 이 노래를 불렀던 기녀에게 누가 지은 것이냐고 물었지만 그녀는 끝내 모른다고 대답을 하였다.
만약 송순의 이름을 대었다면 송순은 살아남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 역시 송순의 관용과 대덕으로 일관한 삶의 지혜의 덕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아들 이름을 해관(海寬)과 해용(海容)으로 붙인 데서도 잘 드러난다.
두 아들의 이름 끝 자를 합치면 관용(寬容)이 된다. 송순의 삶의 일관된 태도와 길 역시 관용(寬容)이었다.
면앙정 송순은 우리 담양 가사문학의 산실을 탄생시킨 분이다. 그렇기에 1978년에는 국문학계의 교수들이 ‘전국문학비건립동호회를 만들고 가장 먼저 이곳에 문학비를 세웠던 것이리라. 고 김동욱 박사가 회장으로 있던 이 단체를 지금은 이상보 박사가 10년 이상을 이끌어 가시고 있다.
송강정
면앙정에서 송강정은 지척이다. 송순이 세상을 떠난 1년 후인 1584년 서인에 속했던 정철은 대사헌이 된다. 그러나 동인들의 탄핵을 받아 1585년 대사헌직에서 물러나고 절망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소년기의 추억이 깃든 창평으로 돌아온다. 지금의 송강정 자리에 초가집을 짓고 죽록정(竹綠亭)이라 부른다. 송강정은 1770년 그의 후손들이 초가집 자리에 세운 것이다. 송강 정철은 이곳에 4년간 머물면서 20리 거리에 있던 식영정을 오고 갔다. 그러면서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비롯한 시조와 가사를 짓는다.
아마 그는 면앙정의 추억도 떠올렸을 것이다. ‘사미인곡’을 쓴 연대는 1587년으로 추정한다. 제목처럼 임금의 정을 읊은 가사이다. 임금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남편과 이별하고 사는 부인의 심정과 비교하였다.
담양의 한 산골에서 임금을 그리워하며 살아가는 충정을 고백한 내용으로 그의 대표적인 가사 중에 하나다.
이 시기에 정철은 세상을 비관하며 음주와 방황의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이다.
이것이 훗날 기축옥사를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는지 모른다.
지금의 송강정은 동남향으로 앉아 무등산과 식영정과 소쇄원을 바라보며 앉아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형태의 기와집이다. 전면과 양쪽이 마루이고 가운데 칸에 방을 만들었다. 송강정 옆에 서 있는 ‘사미인곡’시비를 읽는다. 소나무 숲 사이로 평야가 보이고 바로 앞으로 죽록천이 흐른다. 송강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그의 호를 따온 것이다.
전국적으로 흐린다는 일기예보에 맞게 무등산은 구름에 가려 그 얼굴을 보여주지 않고 있다.
이곳에서 4년간 살면서 그는 정치의 허망함을 알았을 터인데 다시 정계로 나아갔다.
이때 정계로 나아가지 않고 계속해서 문학적인 창작을 하였다고 한다면 우리 국문학사에 더 큰 발전이 있었을 것이다. 그 악명 높던 기축옥사도 없었을 것이고 그는 호남에서도 큰 호평을 받는 작가로 평가 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의 운명이었을 것이다.
이곳 송강정에서 4년동안 그는 매우 고독하며 절망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 정국이 회오리바람에 휩싸이게 하는 사건이 일어 난다. 일명 ‘정여립 내란 음모 사건’이었다. 그는 선조의 부름을 받는다.
정여립은 선조 때에 자신이 벼슬에 오르지 못함을 불평한다. 호남으로 낙향한 후 대동계를 조직하고 유언비어를 만들어 내어 불만세력을 규합한다. 목자망전읍흥(木子亡奠邑興) 즉 해석하면 이씨는 망하고 정씨(鄭氏)가 일어 난다’는 설이다. 정씨는 정여립 자신이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조작이었을 것이다. 모진 고문이 만들어 내었던 책략이었을 것이다.
1589년 10월에 황해도 관찰사 한준들의 밀고로 대동계의 책략은 탄로난다. 정여립은 그의 아들 정옥남과 지금의 전북 진안 죽도로 피신한다. 도저히 현실적인 대안이 없던 정여립은 자살하고 아들은 붙잡힌다.
이 모반 사건을 처리하는 책임자로 송강 정철이 임명된다. 그는 담양에서의 비관적인 생활을 청산하고 한양으로 올라와 호기를 부리면서 주동자를 잡아 처벌한다.
서인이었던 정철은 이 사건을 자신들의 정적이며 자신을 능멸하던 동인을 처단하는 기회로 삼는다.
이 사건을 기축옥사라고 한다. 이 사건을 맡아 처리한 사람은 정철이었다. 기축옥사는 무고한 사람을 많이도 죽였다. 이발, 이호, 백유양, 유몽정, ·최영경 등은 단지 정여립과 친한 이유로 처형당했다. 정언신, 정언지, 정개청 등은 귀양을 보내고 노수신을 파직 한다.
1589년이 기축년이기 때문에 기축옥사라고 하는데 이 사건 처리는 2년이나 걸렸다. 이때 동인들은 1,000여 명이 화를 입는다. 이때 동인들은 거의 전멸을 당하다 시피 했다. 기축옥사에 희생된 사람들의 후손들은 정철을 생각하면 그 분노를 표시할 때마다 정철의 끝 자인 “철 철 철”에 욕설을 섞어 부르며 분노에 몸서리를 쳤다고 한다. 조선 정치사는 어느 편으로 기울든 모두 위험한 때였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스승 면앙정 송순 선생의 처세는 정말 뛰어났다.
이번 기행의 제목을 <송강 정철과 담양>으로 한 것을 마땅치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나는 그런 분들도 이해시키고 싶다. 문학기행에서는 문학이 주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의 문학적인 업적을 조명하는 일은 조선의 정치사와는 좀 다르기 때문이다.
죽녹정
소나무 숲에 난 경사로 계단을 오르면 송강정의 측면에는 죽녹정(竹綠亭) 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아마도 송강 정철 선생이 이곳에 살 때는 소나무 숲 아래로는 대나무 숲이었을 것이다. 그 숲 너머 죽녹천이 은빛물결로 흘렀을 것이다. 수양버들이 춤을 추는 아래로 뱃사공들은 부지런히 노를 저었을 곳이다. 지금은 그 곳에 음식점들이 차지하고 있고 죽녹천은 수량이 적어 배가 떠갈 수 없는 곳이 되었다.
송강 정철은 이곳에 초가집을 지어 살았다. 자신이 잘 나가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저기 빤히 보이는 병풍산을 올랐을지도 모른다. 넓은 들판을 거닐면서 농민들의 애환도 생각하였을 것이다.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3년 강화도에서 그는 거의 굶어죽었다고 전한다. 그가 강화도로 유배를 간 것은 동인들의 탄핵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일생은 모두 결국은 죽음으로 이어진다. 살아생전에 많은 덕을 쌓은 사람은 죽어서도 후세에게 많은 귀감이 된다. 송강 정철도 정치 세도가의 호기만 아니었다면 또한 정권욕만 없었다면 조선 최고의 문장가와 더불어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을 사람이었다.
송강정에서 가사문학관이 있는 식영정으로 향하는 길은 수월하다. 그러나 이 길 위로는 호남고속도로가 지나가고 국도가 훤하게 넓혀져 이제 옛 길을 찾기가 쉽지 않다. 애써 송강이 걸어갔을 길을 더듬거리며 상상하면서 승용차를 몰고 있다. 이 길은 무등산을 보면서 따라가면 된다. 그러나 오늘은 몇 시간 동안 구름에 가려 무등산은 도통 그 얼굴을 보여주지 않고 있다.
담양은 국도에 모두 메타세쿼이아를 심어 놓아 그 경치가 장관을 이룬다.
담양읍에서 금성산성 방향으로 펼쳐진 메타세쿼이아 길은 차의 출입을 막고 인도가 되어 관광객의 필수코스가 되고 있다.
메타세쿼이아 길로 승용차를 운전하면서 달리는 일은 매우 상쾌했고 옛 나의 유년시절 미루나무길의 추억을 연상하며 또 하나의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 내고 있다.
담양은 대나무 고장이다. 시간이 갈수록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은 담양의 상징이 될 듯 보인다. 메타세쿼이아 가로수는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처럼 원근법적으로 사라져 가는 절묘한 아름다움을 제공한다.
지구상에서 거의 멸종 단계였던 이 나무를 어떻게 이렇게 울창하게 번성시킬 수 있었는지 놀라움이 앞선다. 불과 30년 전에 심었다는 메타세쿼이아 길, 키가 보통 30m 이상 씩 자란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약 3km는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로수길이 되어 관광명소가 되어 있었다.
1박2일 동안 담양을 답사하면서 길을 달릴때면 곳곳에 시원하게 죽죽 뻗은 나무들이 환영해 주는 듯 하여 감동을 받게 된다. 이제 막 심어 놓은 저 작은 메카세쿼이아가 다 자라고 나면 담양은 더 아름답고 풍요로운 고장이 될 것이다.
식영정
송강정에서 식영정을 향해 달린다.
푸르른 산과 들은 나그네의 심기를 낭만적 그리움으로 안내한다. 며칠 전에는 여름 같은 봄날 이었지만 이 곳 담양의 날씨는 이슬비도 내리면서 바람이 찬 겨울 같은 봄날이다.
무등산은 아직도 구름 속에 얼굴을 묻고 갈매빛의 등성이만 조금씩 보여주고 있다.
무등산을 생각하면 미당 서정주의 ‘무등을 보며’ 라는 시 한편이 떠오른다.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산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청산이 그 무릎 아래 지란(芝蘭)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자식들을 기를 수밖엔 없다.
목숨이 가다 가다 농울쳐 휘어드는
오후의 때가 오거든
내외(內外)들이여 그대들도
더러는 앉고
더러는 차라리 그 곁에 누워라
지어미는 지애비를 물끄러미 우러러보고
지애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
어느 가시덤불 쑥굴헝에 누일지라도
우리는 늘 옥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할 일이요
청태라도 자욱히 끼일 일인 것이다.
-- 서정주 시 ‘무등을 보며’ 전문
이 시를 접했을 때 가장 좋은 문구는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였다.
가난을 누더기로 보았던 미당의 사상이 좋았던 때가 있었다.
광주의 무등산(無等山)은 계급이 없는 산이란 뜻이어서 좋아하였던 산이다.
6.25 전쟁 후 몇 년인가를 서정주 시인은 조선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당시 교수의 급여는 밥을 굶을 정도로 적었다. 절대빈곤의 상황에 몰린 그는 물질적 궁핍 속에서, 저렇게 크고 의젓하고 늘 변함없는 무등산을 보며 이 시를 썼을 것이다. 무등산은 미당에게 아마도 의인적인 형상으로 보였을 것이다. 무등산의 짙은 초록색 등성이에 눈부신 햇살이 퍼지는 것을 바라보며 그는 가난한 자신의 현실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였을 것이다.
식영정
가난이란 다만 우리들의 몸에 걸친 헌 누더기 같은 것이다. 가난할수록 허리가 드러나듯이 우리의 '타고난 마음씨'는 오히려 빛나게 된다고 미당은 역설한다. 사람의 본성은 가난으로 인해 비굴해 지기 보다는 오히려 더욱 빛을 발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오늘날 우리들의 가난도 그러하던가. 자신이 없어진다.
광주호를 지나니 이내 왼쪽으로 ‘식영정’이 절벽 위에서 기다리고 앉아 있다.
‘가사문학관’ 근처에 승용차를 주차하고 식영정을 오른다. 식영정은 송강 정철의 대표적 유적지이다. 성산별곡을 쓴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래 식영정은 1560년 서하당(棲霞堂) 김성원이 석천 임억령을 위해 건축한 정자이다.
임억령은 김성원의 스승이자 장인이다. 식영정(息影亭)은 ‘그림자가 쉬고 있는 정자’라는 뜻이다. 이런 식영정이란 정자의 이름은 임억령(1496~1568)이 지었다.
그는 강원도 관찰사와 담양부사를 지낸 인물이다. 당시 사화와 정치사에 환멸을 느끼면서 모든 공직을 사퇴하면서 이 곳을 중심으로 살았다.
김성원(1525~1597)은 정철의 처당숙으로 정철보다 11살이나 연장자였지만, 정철이 성산에 와서 머물 때 환벽당에서 같이 공부하던 동문이다.
환벽당은 식영정의 건너편에 있는 정자로 소년 시절 정철의 운명을 바꾸어놓게 한 그의 사촌 김윤제가 살았던 곳이다. 이런 의미에서 정철은 운이 좋았다. 이곳에 내려와 당시에 대단한 인물들에게 배우고 친구를 사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식영정 입구에는 수출탑 같은 모양을 한 날카로와 보이는 ‘송강 정철 가사의 터’가 서 있다. 송강 정철을 높이기 위한 탑인데 그의 날카롭고 무서운 이미지만 강조한 듯 보인다.
그러나 이 비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이런 차갑고 모난 문학비의 형상을 잊게 만든다.
<위대한 시인은 종이가 아니라 아름다운 풍경 위에 시를 쓴다. 이 곳 식영정 마루턱에 서면 바람도 옛 운율로 불고 냇물도 푸른 글씨가 되어 흐르나니, 우리는 지금 풀 한포기 흙 한줌에서 송강의 가사 성산별곡을 온 몸으로 읽는다.>
정철, 임억령, 김성원, 고경명, 네 사람을 당시 사람들은 ‘식영정 사선(四仙)’이라 불렀다. 이들은 성산의 경치 좋은 20곳을 선택한다. 각자 20수씩 모두 80수의 식영정이십영(息影亭二十詠)을 짓는다. 이때 지은 ‘식영정이십영’은 훗날 정철의 ‘성산별곡’을 짓는데 활용된다.
정철은 이 곳에서 식영정잡영 10수, 하당야좌(霞堂夜坐) 1수, 서하당잡영 4수 등 많은 한시와 단가 등의 작품들을 창작한다. 정철은 이 지역을 중심으로 송순, 김인후, 임억령 등을 스승으로 모시며 학업에 열중했다. 고경명, 백광훈, 송익필 등과 교우하면서 청소년기와 청년기 10년을 이 곳에서 보낸다.
식영정은 정면 2칸, 측면 2칸이고 단층 팔작지붕이다. 대청마루와 온돌방이 절반씩이다. 송강정과 면앙정과 달리 한쪽 귀퉁이에 방을 만들었다. 막돌 기단 위에 원주 기둥을 세웠다.
이 식영정이 세상에 많이 알려지게 된 것은 정철의 성산별곡 때문이다. 식영정 뒷산인 별뫼 즉 성산을 노래한 성산별곡은 식영정 주인을 부르는 가사로 시작된다.
성산별곡 시비
식영정 뒷 터에는 검정 대리석에 새긴 '성산별곡' 시비가 매우 크게 서 있다. 늙은 소나무는 풍파 많았던 세월에도 아랑곳없이 그 기풍을 겸손하게 감추며 다소곳하게 서 있다. 세로 행으로 빼곡하게 새겨 넣은 성산별곡의 시를 제대로 읽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방문객들은 훤칠하게 자란 소나무에게 눈길을 보내고 있다.
식영정 앞에 서 있는 소나무는 정말 고고한 늙음이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소나무다. 잘 생긴 풍모와 식영정 정자의 고상함에 오고 가는 사람들은 옛 사람들의 멋을 부러워한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살았을 시대의 비정한 정치사와 지금의 정치사가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 정권이 바뀌는 지금도 이런 저런 정치박해가 판을 치고 있는데 당시에는 오죽하였겠는가. 왕을 중심으로 벌어지던 신하들의 이합집산이 눈에 선하다. 그런 것을 보고 살 수 없었던 사람들이 산과 골짜기로 찾아 들어 정자를 짓고 원림을 만들면서 우리의 국문학은 발전할 수 있었다. 문학은 어쩌면 고통의 산물인지 모른다. 잘 먹고 잘사는 사람이 글을 잘 쓴다고 하는 것은 퍽 드문 일이리라. 문학은 처참하게 시련당하고 가난과 절망으로 몸부림치는 작가에게 신이 내린 축복일지 모른다.
감옥에서도 문학은 태어난다. 절망하고 시련을 맞이하여 혼자 남게 될 때 그때 비로소 자신의 작품을 쓸 수 있는 것인지 모른다. 조선의 연속적인 사화 속에서 삼족이 멸할 수 있는 위기를 맞이한 선비들은 자신의 고향과 산중으로 몸을 숨긴다. 이렇게 찾아 들었던 산중에서 그들은 안빈낙도를 위안으로 삼고 다음 시대를 기약하였던 것이다. 그들이 만약 이곳에서 가만히 있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정자를 지어놓고 사람들을 불러 모았으며 제자를 교육시켰다. 고대 중국의 역사와 우리의 정치사를 논하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토론하기도 하였다. 과거를 보기위해 떠나는 제자들에게 그들은 정성을 다했다. 과거에 합격하고 벼슬자리를 얻은 제자들은 이곳을 찾아와 절을 하면서 스승께 그 고마움을 잃지 않았다.
식영정의 소나무는 이곳을 찾는 사람들을 맞이하고 배웅하며 수백년을 서 있다. 우리들의 수명을 이 소나무에 견주어 보니 참 딱하다. 모두들 자신들의 수명이 이 소나무처럼 오래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듯 보인다. 그렇지 않고서야 너나할 것 없이 부질없는 욕심을 부리며 살 일이 무엇인가 말이다.
식영정 주변에는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즐비하다. 소나무 숲 사이로 보이는 광주호의 모습이 아름답다.
식영정의 아름다운 소나무
식영정을 내려와 부용당에 닿는다. 부용당 아래에는 작은 연못이다. 연잎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다만 부용당의 뒤쪽 아궁이에서는 군불을 지피고 있다. 연기가 모락 모락 나오는 아궁이 앞에서 잠시 머물렀다. 이내 그 군불을 지핀 방에서 잠들고 싶어진다.
이제 식영정의 주인이 살았던 서하당을 둘러본다. 서하당은 마루가 넓다. 40명은 앉을 수 있는 공간이다. 서하당(棲霞堂)은 머무를 서(棲), 노을 하(霞) 자를 가지고 집 이름을 만든 집이다.
결국 집 이름은 ‘노을이 머무는 집’이다. 이런 낭만적인 집의
이름을 붙일 줄 알았던 김성원 이란 사내가 매력적이지 않은가.
그런 그였기에 자신의 장인에게 식영정을 지어 드릴 수 있었던 것이리라.
광주호의 은빛 물결에 퍼지는 물결은 소나무 사이를 뚫고 들어와 파란 바람으로 휘몰아가고 있다. 식영정 기둥에 기대어 장인을 위해 이 집을 지었던 김성원의 사람됨과 그와 더불어 환벽당으로 공부하러 걸어가던 청소년기의 송강 정철의 모습을 회상해 본다.
그리고 이곳에서 쓴 성산별곡의 앞부분을 번역본으로 읽어본다.
어떤 지나가는 나그네가 성산에 머물면서,
서하당 식영정의 주인아 내 말을 들어 보소.
인간 세상에 좋은 일이 많건마는,
어찌 한 강산을 갈수록 낫게 여겨,
적막한 산중에 들어가고 아니 나오시는가.
솔뿌리를 다시 쓸고 대나무 침대에 자리를 보아,
잠시 올라앉아 어떤가 하고 다시 보니,
하늘가에 떠 있는 구름이 서석을 집을 삼아.
나가는 듯하다가 들어가는 모습이 주인과 어떠한가.
시내의 흰 물결이 정자 앞에 둘러 있으니,
하늘의 은하수를 누가 베어 내어,
잇는 듯 펼쳐 놓은 듯 야단스럽기도 야단스럽구나.
산 속에 달력이 없어서 사계절을 모르더니.
눈 아래 헤친 경치가 철을 따라 절로 생겨나니,
듣고 보는 것이 모두 신선이 사는 세상이로다.
-- 송강 정철 성산별곡 서문부분
이 부분은 정철이 식영정에 머물면서 출세의 길로 나서지 않는 집주인 김성원의 풍류와 기상을 노래하고 있다. 이어서 아름다운 식영정의 자연경관을 노래하고 있다.
3,4조 형태의 총84행이나 되는 성산별곡은 춘하추동의 성산의 자연경관으로 구성되었다.
담양의 소쇄원, 명옥헌, 식영정, 면앙정, 환벽당, 송강정을 포함한 많은 담양 지역의 정자와 원림들은 사림들의 자발적이거나 타의에 의해 숨어 지내며 기회를 엿보던 집이었다.
16세기와 17세기의 사화와 당쟁에서 화를 입은 호남의 사림들은 무리를 이루어 이곳 저곳에 정자를 짓고 은거한다. 삼족이 멸문지화를 당할 수 있는 위기에 조선 정치사에 이곳 담양은 어쩌면 낙원이었을 것이다. 이런 자연과 정자 속에서 스승과 동료에게 가장 많은 은혜를 입은 사람이 송강 정철이다.
한국가사문학관
이제 식영정 옆에 있는 '가사문학관'을 향한다. 가사문학관을 들어서니 피리를 불고 있는 목동의 조형물이 반긴다. 가사문학관은 담양군에서 가사문학의 유산과 전승 보전을 위해 2000년에 완공하였다. 이 지역이 바로 가사문학의 모판이라 할 수 있는 곳인데 이렇듯 번듯한 문학관을 멋지게 지어 놓았다. 문학관에는 송순의 면앙집과 정철의 송강집 및 친필 등 귀중한 자료도 전시되어 있다.
귀한 가사문학의 자료와 임억령, 양산보, 김인후, 김성원, 고경명 등의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무엇보다 이상보 교수님이 새롭게 옮겨 쓴 관동별곡이 있어 반가웠다. 이름을 알만 한 벗들이 기증한 자료들이 보여서 또한 반갑다.
가사문학관에 왔으니 한국의 가사문학에 관해 확실한 인식이 필요하다.
시조와 함께 가사는 한국 고시가의 대표적 장르이다.
가사의 발생 시기는 고려 말이나 조선 초일 것으로 추정한다. 특히 나옹화상(320~1376)이 지었다는 서왕가와 정극인의 상춘곡(賞春曲)은 그 발생기를 가늠하는 초기의 작품으로 간주하고 있다.
‘서왕가’란 극락왕생을 권면하기 위해 지은 ‘서방정토로 가는 노래’이다. 1957년 가람 이병기 선생은 ‘서왕가’를 쓴 시기를 고려말엽으로 주장했다. 가사문학의 효시문제가 이때부터 서왕가로 옯겨 간 듯 보였다. 그러나 아직도 가사문학의 효시작품을 정극인의 상춘곡으로 볼 것인가, ‘서왕가’로 볼 것인가 하는 설에 관해서는 결론을 내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다. 고려말에 지어진 ‘서왕가’가 훈민정음 창제 시기인 1443년 보다 앞서 쓰여 졌는데 어떻게 가사문학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가? 궁금하지 않은가. 서왕가는 영조 17년(1741)에 간행한 신녕 수도사판본의 ‘보권염불문’ 최초본이다. 신녕의 수도사는 지금의 영천 팔공산 자락에 있는 절이다. 이곳에서 나옹화상의 서왕가는 드디어 활자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이렇듯 서왕가는 무려 400년이 지난 후까지 승려들의 입을 통해 전승되다가 비로소 1741 한글로 쓰여졌다.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구비문학은 고려가요를 한글로 남기지 않았던가. 이 서왕가 첫 부분을 쉽게 해석하면 다음처럼 시작된다.
나도 한때는 속세에 살던 사람의 자식이었네
인간의 수명을 생각하니 모든 것이 허망하다.
부모가 주신 얼굴은 죽은 후에는 소용없고
잠깐 명상 후에 속세의 일들을 다 버렸네
부모님을 이별하고 표주박 하나 지니고
누더기 옷에 명아주 지팡이 들고 명산을 찾아 들었네
불경을 아는 훌륭한 사람을 찾아가서 마음을 밝히리라
--나옹화상 ‘서왕가’ 첫 부분 해석 김경식
내가 나옹화상을 좋아하게 된 것은 나옹화상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 시 때문이다.
靑山兮要我以無語(청산혜요아이무어)
蒼空兮要我以無垢(창공혜요아이무구)
聊無愛而無惜兮 (료무애이무석혜)
如水如風而終我 (여수여풍이종아)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목계장터’의 16행의 시도 이렇게 시작된다.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 신경림 시인 시 목계장터 부분
신경림 시인의 ‘목계장터’라는 시는 나옹화상의 가칭 ‘청산은 나를보고’와 많이 닮아 있다.
그렇다고 이 시를 신경림 시인이 모방하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이 시를 이미 일찍이 좋아하였던 애늙은이였다. 신경림 시인의 목계장터 라는 시를 먼저 알고 난후 20년 전인가 어느 절에 가서 이 시를 읽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지금 신경림 시인의 시 목계장터는 유명시가 되었다. 그러나 나옹화상의 시를 모방하였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하고 있다. 정말 신경림 시인이 창작한 것인지 그래서 더욱 궁금해진다. 이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신경림 시인 자신일 것이다.
조선 중기 이후 가사는 선비들에 의해 주도 되었다. 사대부의 시가문학으로 자리를 잡았으며, 자연과 자신이 일체적 삶을 구현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조선 후기에 가사는 많은 변화를 겪는다. 양반 곧 선비들의 전유물이었던 가사가 상민들과 여성 등으로 확대된다. 서민가사와 여성가사가 새롭게 성행하기에 이른다. 작품의 내용도 전쟁과 기행을 비롯한 애정과 현실 비판 등으로 다양화 된다. 결국 가사는 개화기에 이르러 종교가사와 개화가사 및 의병가사 등으로 발전한다. 이러한 변신을 거치면서 가사는 창가와 신채시, 현대시로 옮겨왔다.
담양의 들녘
담양의 숲과 계곡은 의리와 명분을 중시하던 선비들의 은신처가 되어 주었다. 이것은 농경사회에서 대토지소유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다행히 담양은 땅이 넓고 비옥하고 기후가 따듯하여 인심이 넉넉했다. 이를 기반으로 누정을 건립한다. 우정을 도모하고 인재양성은 물론 시단(詩壇)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시회(詩會)를 통하여 감동을 주는 훌륭한 시가문학을 창작하였다.
담양은 호남 가사문학 창출의 옥토가 되어 주었다. 이서의 낙지가를 시작으로 약 600여 년 동안 담양은 가사문학의 중심을 이루어 왔다. 이서(1482~ ?)의 낙지가(樂志歌)는 담양에서 가장 먼저 지어졌다. 이서는 양녕대군의
증손이다. 그의 중형 이찬이 종친 이과를 추대하려 하는 역모를 꾸민다는 무고에 연좌되어 중종 2년(1507)에 맏형 이면은 초계군으로 유배된다, 이서는 명양현(현담양군 창평면)에서 14년간 유배된다. 1520년에 귀향살이가 끝나자 한양에 가는 것을 포기하고 담양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난다. 그의 저서에는 ‘몽한연고’가 있다.
이서의 낙지가는 서사, 본사, 결사의 3단 구성되었다. 중국의 처사 ‘중장통’의 삶을 흠모한 내용이지만, 자연과 함께 한 안빈낙도의 삶을 노래하였다.
송순의 면앙정가의 내용은 서사, 본사, 결사의 3단 구성이다. 서사는 면앙정의 위치와 그 모습에 관해 쓰고 있다. 본사는 면앙정에서 바라보는 멀고 가까운 자연의 모습을 춘하추동 사계절의 경치를 표현하였다. 마지막으로 결사는 이 곳에서 살아가는 삶의 행복과 임금을 그리워하는 정을 노래하였다.
가사문학관 전시관에서 내가 유독 관심이 가는 것은 송순 선생의 ‘분재기’ 앞에서 였다.
다 해석은 못했지만 이 분재기(分財記)는 면앙 송순이 80세 되던 해인 융경 6년(1572)에 8남매에게 전답 및 노 비 등 재산을 분배한 기록문이다. 송순의 친필 기록이기에 감동적이다. 길이가 무려 3.65m라고 한다. 글자 수가 무려 4510자, 총 124행으로 이루어진 국내 최대급의 분재기이다.
가사문학관에서 소쇄원까지는 지척이다. 소쇄원은 양산보가 만든 큰 정원이 있는 집 이름이다.
양산보(1503∼1557)는 양사언의 장남으로 담양군 창평에서 태어나 소년시절 한양에 올라가 조광조의 문하에서 수학한다.
그의 자는 언진, 호는 ‘소쇄공’이다. 17세가 되던 1519년에 조광조가 중종에게 건의하여 만든 현량과에 급제한다. 그해 기묘사화가 일어난다. 그의 스승인 조광조는 전남의 화순(능주)로 유배된다. 유배지로 간 양산보는 스승 조광조를 봉양한다. 그러나 그해 겨울 조광조가 중종이 내린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나자 벼슬길을 포기하고 낙향한다.
물론 그는 과거에 합격하였지만 나이가 어려서 관직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17세의 나이에 은거하기로 마음먹고 이곳 소쇄원을 구상하였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소쇄원의 주차장에는 차를 주차하기 어려울 정도 인산인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고 생각해 본다.
소쇄원
사람들은 이 곳 소쇄원에서 어떤 의미를 발견하려고 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렇게 협소한 곳을 찾아 왔단 말인가. 경치가 좋지만 아주 뛰어난 곳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소쇄원의 역사성과 이 곳을 거쳐갔던 사람들의 삶과 죽음을 알지 못하면 실망하기 딱 좋은 곳이다. 이 정도의 분위기는 다른 곳에 얼마든지 많지 않은가.
서두에서 말했지만 사람들은 어떤 의미를 발견하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입장료까지 받고 있다. 소쇄(瀟灑)는 맑을 소(瀟), 깨끗할 쇄(瀟)라는 한자어의 합성어다.
‘맑고 깨끗한 정원의 집’이다. 소쇄원은 이제 국민관광지가 된 듯하다. 쉽지 않은 정원의 이름이다.
양사언은 소년기에 이곳에 정착한 후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 무등산 동쪽 바로 이곳에 소쇄원을 경영하며 죽는 날까지 처사로서 은거한다. 출세를 위해서 한양을 넘보지 않았다.
소쇄원을 많은 장서를 갖추고 은둔한 선비들과 처사들이 찾아와 독서와 학문을 논하는 장소로 만들었다.
그 당대의 명사인 송순, 임억령ㆍ김인후, 오겸, 유희춘 등과의 교분을 가지게 된다.
물론 이후백(1520~1578),기대승, 고경명, 정철 등에게도 존경을 받는다. 양사언은 면앙정 송순과는 이종 사촌간이었다. 장성출신의 하서 김인후는 ‘소쇄원 사 십 팔 영’을 지음으로써 그소쇄원은 명원으로서 더욱 알려졌다.
하서 김인후의 문학작품의 배경이 되었던 소쇄원은 조선 선비들이 찾고 싶어 하는 명승지가 되어 갔던 것이다. 결국 소쇄원이 유명하게 된 것은 김인후의 시가 한 몫을 한다.김인후는 양산보와 사돈이었다. 소쇄원은 이후에도 많은 문인들의 작품의 배경이 되었다.
내가 처음 소쇄원을 찾은 것은 1981년 5월이었다. 광주사태의 참혹상에 모두들 숨죽이며 있을 때 나는 몰래 광주의 충장로와 금남로를 걸었다. 그리고 담양행 버스를 타고 어렵게 찾아왔던 곳이 이 곳이었다. 지금은 아스라한 추억이 되었지만 그때는 지금처럼 역사적인 소견이 없었기 때문에 양산보를 둘러싼 인맥들과 당시의 시대적인 배경을 제대로 알리가 없었다.
양산보는 평소 효행이 독실하였고 후손들이 튼실하였다. 이런 그의 덕과 효행들이 소쇄원을 보존하여 오늘까지 오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임진왜란 때 이곳 소쇄원도 참화를 입었다. 건축물이 모두 소실되었다. 그러나 그의 후손들은 자신들의 조상인 양사언의 유지를 받들어 이 곳을 원형처럼 보존하면서 왔다. 특히 임진왜란이 지난 후 그의 손자인 양천운(梁千運1568∼1637)이 1614년에 재건하지 않았다면, 소쇄원은 아마도 산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소쇄원의 많은 시문들은 전쟁과 세월의 흐름에 따라 많이 자취를 감추었지만, 후손들의 노력으로 ‘소쇄사실’이 엮어졌다. 그리고 원형은 아니지만 이처럼 원림이 보존되어 있다.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소쇄원 전경
산에서 내려오는 강한 기를 막고 편안한 안식감을 주는 담장을 따라 걸어본다.
우암 송시열이 썼다고 전하는 소쇄처사양공지려(瀟灑處士梁公之廬 )를 읽는다.
제월당(霽月堂) 마루에는 약 40여명 정도의 사람들이 나이 많은 해설사로부터 소쇄원에관한 해설을 듣고 있다.
소쇄처사 양산보는 1557년 3월에 소쇄원에서 세상을 떠난다. 양산보의 아들에게 시집을 간 김인후의 딸은 이미 죽은 지 7년이 지난 후였다.
그래서 양산보의 죽음소식에 하서 김인후의 슬픔은 매우 크고 슬펐다.
이 슬픔을 그는 조시, 즉 만가를 써서 달래보려고 했다. 소쇄원주인만 (瀟灑園主人挽) 이란 시이다.
서로를 애타게 그리워한 것이 몇 해던가
고요하고 한가한 소쇄원이네
자네는 지금 이미 저승 사람이 되었으니
병든 나 또한 무슨 말을 하겠는가.
-- 하서 김인후 소쇄원주인만( 瀟灑園主人挽) 중에서 김경식 번역
제월당에는 여러 개의 편액이 걸려 있다. 면앙정 송순, 송천 양응정, 고봉 기대승, 석천 임억령, 하서 김인후, 소쇄원 주인 양산보, 김성원, 고경명, 송강 정철의 시가 쓰여진 현판이 보인다. 양산보가 이 곳에서 지내면서 얼마나 큰 덕을 베풀었는지를 실감한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집을 지어 다른 이들에게 개방한 양산보는 행복한 사람이었다. 소쇄원은 앞으로도 자신의 후손들을 먹여 살리는 집이 될 것이다. 제월당의 현판 역시 우암 송시열 글씨라는 것을 확인하고 제월당 뒤 언덕을 오른다.
소쇄원의 담
소쇄원 담벼락의 오곡문(五曲門)이란 글귀는 우암 송시열 글씨다. 그 옆으로 난 담 밑으로 계곡물이 흐르고 있다. 이 수문의 구조가 소쇄원의 가장 인상적인 경관이다. 산중의 물을 집안으로 끌어 들일 때 담을 그대로 두고 밑으로 물이 통할 수 있도록 설계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부터 400년 전 담양에서 살다가 떠나간 사람들의 궤적을 찾아 떠나왔던 기행은 이제 막을 내리고 있다. 노을이 지고 있다. 사월에서 오월로 이어지는 우리 국토의 아름다운 푸름 속에는 조상들의 슬픔과 아름다운 삶이 녹아있다. 담양은 특히 아름답고 행복한 인연의 사람들이 살다가 떠나간 고장이다. 오월에는 많은 기념의 날들이 있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 스승의 날들이 연속적으로 이어진다.
송강 정철은 그의 훈민가에서 우리가 다 잘 알고 있는 시조를 지었다. 사랑은 역시 부모님의 사랑이 최고다. 이 시조를 읽으며 담양을 떠날 준비를 한다. 날이 조금씩 개이면서 담양들녘 너머 붉게 타고 있는 노을에 눈이 부시다.
어버이 살아실 제 섬길 일란 다 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닯다 어이 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은 이뿐인가 하노라
첫댓글 담양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나와있어서 스크랩해 왔습니다. 담양 여행 하실 분들은 참고하세요.
메타쉐쿼이아 가로수길구경갔다가 잎이 나질 안ㅎ아 별 감흥 없이 왔었는데 이제 잎이 제대로 나왔네요.
여름에 담양쪽 여행을 계획 중인데, 참 좋은 자료네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