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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공식 경기, 눈물을 참지 못한 베컴 |
최근엔 ‘잦은 번복’과 ‘잠정’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꼬리표까지 달릴 정도로 은퇴라는 단어에 담긴무게감이 퇴색됐지만, 베컴의 경우에는 이 단어가 갖고 있는 의미가 온전했다. 그 동안 베컴을 사랑해온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은퇴를 아쉬워하고 있겠지만, 그 누구보다 베컴 본인에게 가장 가슴 아픈 일이다. 프로축구 선수 베컴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더 이상 승리를 위해 전력을 쏟아내는 베컴의 모습을 볼 수 없다.
잉글랜드 축구의 전설적인 윙어 크리스 워들은 베컴의 은퇴에 쏟아주는 수 많은 찬사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는 “베컴은 좋은 선수였지만 위대한 선수는 아니었다. 그 정도의 선수는 많았다”고 평가했다. 베컴이 지니지 못했던 폭발적이고 화려한 드리블 기술을 지녔던 워들의 입장에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누구나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다. 다만, 나는 워들의 말에 이렇게 답해주고 싶다. ‘베컴이 그저 좋은 축구 선수 중 한 명이었을지는 모른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가 위대한 프로 선수였다는 것이다.’
세계에 가장 위대한 프로선수, 데이비드 베컴과의 추억
TV 속에서만 볼 수 있었던 베컴의 모습을 실제로 마주할 수 있었던 것은 2008년 2월 말이다. 당시 미국프로축구 LA갤럭시로 이적했던 베컴은 FC서울과의 아시아 투어 경기를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2월 26일 인천공항 입국장에서부터 한국 축구 역사상 처음으로 진행된 훈련장 유료개방 행사, 차범근축구교실 아이들과의 축구클리닉부터 3월 1일 FC서울과의 친선 경기까지 베컴의 일거수일투족을 취재했다. 지금까지 많은 스타들의 내한 행사를 취재했고, 또 유럽현지에서도 축구 스타들의 모습을 지켜봤지만, 베컴의 프로정신은 단연 돋보였다.
장기비행 뒤의 피로감에도 사진기자들을 위해 오랜 시간 자세를 취하며 환하게 웃었다. 버스로 향하는 길에 팬들의 사인 공세에 적극적으로 화답했다. 그의 입꼬리는 내려가는 법이 없었다. 버스에 탑승한 뒤에도 창밖의 팬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는 이국의 환대에 진심으로 반응하고 있었다.
이어진 유료공개훈련에서는 표값이 아깝지 않도록 자신이 가진 모든 킥 기술을 시연했다. 아이들과의 축구클리닉 시간에는 마치 자신의 자녀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친밀하고 즐겁게 공을 찼다. 진지하게 기술을 보이다가 아이들과 엉켜 놀며 장난을 치고, 좋은 플레이를 할 때 마다 하이파이브를 나눴다. 두 손을 하늘로 뻗어 공을 달라고 소리치던 베컴에게 아이들과의 시간은 의무적인 행사의 하나가 아니라, 그의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축구 경기 하나였다. 뛰는 내내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베컴은 “LA갤럭시 유니폼을 입은 뒤로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예정에 없던 기자회견도 자청했다. 자신을 직접 보기 어려운 먼 나라의 기자들을 위한 배려였다. FC서울과의 경기에는 65분 간의 의무 출전 조항이 있었는데, 그는 체력적으로 힘든 모습을 보이면서도 90분 풀타임을 소화하고 승부차기까지 찼다. 자신이 킥을 해야 하는 차례에 FC서울 팬들이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내리며 야유하자 킥을 성공 시킨 뒤에는 엄지 손가락을 위로 올리며 재치있게 대응했다. “환호해주시는 분들도 많았지만 내가 킥을 실패하길 바라는 팬들도 있더라. 나도 나름 재미있게 대응하고 싶었다. 넣지 못하라고 손가락을 내렸으니, 난 넣었다는 의미로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이날 경기에 베컴은 축구화에 태극기를 새기고 뛰기도 했다.
베컴은 내한 행사 내내 축구에 대한 자신의 열정 그리고 진정으로 그가 축구를 즐기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자신을 믿고 축구를 즐겨라. 축구는 즐길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는 한국에 와서 남긴 이 말을 온 몸으로 표현했다. 영국을 대표하는 오른발의 주인 베컴은 영국이 ‘신사의 나라’라는 것을 보여준 최고의 외교대사였다.
영화 홍보를 위해 얼마 전 내한했던 헐리우드 배우 톰 크루즈의 남다른 매너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의 모습은 팬 서비스의 교과서와 같았다. 베컴의 당시 모습도 그랬다. 영국 컬럼니스트 헨리 윈터는 늘 팬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베컴이 배우 톰 크루즈 보다 뛰어난 프로라고 극찬했다.
"베컴은 마치 톰 크루즈와 같이, 팬들의 소중함과 그들에 대한 감사함을 깨닫고 살았다. 마치 레드 카펫을 걷듯이, 웃고 사인하고, 또 웃고 또 사인하고, 또 웃었다. 그러나 베컴은 크루즈가 아니다. 크루즈와 다른 점이 있다면, 베컴은 많은 팬들과 사람들과의 관계 자체를 즐겼다. 맨유 원정이나 잉글랜드 원정에서, 베컴은 절대로 팬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실제로 베컴은 몇 시간이든 팬들과 시간을 보내고 사인을 해줬으며, 공개 훈련의 경우 볼도 차주고 농담도 건넸다."
베컴이 2007년 여름 레알마드리드를 떠나 LA갤럭시로 향할 때 많은 이들이 그의 축구 경력이 이제 종착역을 향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서른 하나였다. 미국으로 향한 많은 스타들이 소리소문 없이 황혼기를 보내고, 현역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베컴은 예외였다. 그는 AC밀란으로의 단기 임대 활약, 잉글랜드 대표팀으로 복귀, PSG 입단 등 불꽃 같은 노장 투혼으로 꾸준히 스포트라이트를 잃지 않았다. 은퇴를 선언한 2012년까지 세계 최고액 수익을 올리는 축구 선수 자리를 지켰다. PSG에서 받은 급여를 모두 파리의 아이들을 위해 기부하고도 세운 기록이다.
![]() 세계에서 가장 비싼 벽을 세우던 갈락티코 시절 |
은하수군단의 중심, 베컴의 레알 시절
라리가의 이야기를 다루는 칼럼에서 베컴의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그가 라리가의 세계화에 가장 크게 이바지 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베컴은 영국에서 ‘축구를 바꾼 남자’로 통한다. 그의 경기 스타일이 세계를 지배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상업적 영향력은 축구 마케팅 업계를 송두리째 바꿔놨다. 스페인에서 우수 외국인의 유치를 위해 도입된 세율 혜택 제도는 당시 베컴의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입성과 맞물려 ‘베컴 법’(Ley Beckham, 스페인 거주 고소득 외국인의 세금을 만 5년 간 43%에서 24%로 낮춰주는 법안. 2010년에 폐지됐다)이라 불렸다. 미국프로축구 역시 베컴을 안착시키기 위해 운영되던 샐러리캡 연봉 제도에 팀 당 한 명씩의 연봉 제한 예외 선수를 둘 수 있게 한 ‘베컴 룰’을 만들었다.
페레스 회장과 갈락티코 군단을 밀착 취재한 영국 저널리스트 존 칼린은 “페레스는 우승이 신의 손에 달린 일이라고 생각한다. 대신 환상적인 선수들이 있다면 엄청난 흥미를 끌고 재미를 줄 수 있다. 이를 전 세계적인 관심과 돈으로 바꿀 수 있다. 갈락티코스는 전 세계 어느 클럽 보다 많은 수익을 창출해낼 수 있는 선수들”이라고 말했다. 갈락티코의 이상에 가장 잘 부합하는 선수는 이미 맨유의 7번 유니폼을 전 세계에서 가장 잘 팔리는 유니폼으로 만든 베컴이었다.
페레스 회장은 “베컴의 영입으로 레알 마드리드의 스폰서십 계약 매출이 700만 유로에서 무려 4,500만 유로로 증가했다”며 베컴의 영입이 성공적이었다는 이유를 수치로 입증했다. 선수 영입과 연봉 지급으로 2억 유로 가까이를 투자했지만, 4억 유로에 이르는 수익을 거뒀다.
물론 갈락티코 군단에서 베컴의 영향력이 상업적으로만 막강했던 것은 아니다. 베컴은 그라운드 위에서 누구보다 많이 뛰는 선수였다. 레알마드리드는 베컴의 영입과 맞물러 클로드 마켈렐레를 방출해 경기력의 균형을 잃었다. 베컴의 입단과 함께 치른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대회 우승컵을 들었지만, 그 이후 3년 간 무관의 암흑기를 보냈다. 마켈렐레의 부재는 레알마드리드의 수비력에 타격을 줬지만, 베컴이 게으른 선수였기 때문은 아니었다. 레알마드리드 시절 베컴의 경기당 활동량은 평균 13km, 최대 15km에 육박했다.
베컴은 스페인 무대에 빠르게 적응했다. 장기인 마법 같은 오른발 킥으로 호나우두, 지네딘 지단, 루이스 피구와 같은 동료 선수들의 멋진 골을 도왔고, 프리킥으로 만 10골을 넣었다. 레알베티스와의 라리가 데뷔전에서 경기 시작 2분 만에 득점했고, 이후 비야레알, 바야돌리드와 연속 경기에서 3개의 도움을 몰아쳤으며, 말라가와의 4라운드 경기에서는 첫 프리킥 득점을 올렸다. 마르세유와의 챔피언스리그 레알 데뷔전에서 오른발 코너킥으로 호베르투 카를루스의 왼발 득점을 도운 장면은 아름다운 그 자체였다.
파비오 카펠로 감독의 부임 이후 주전 경쟁에서 밀렸지만, 레알마드리드에서 보낸 마지막 시즌은 가장 드라마틱했다. 전반기에 후보로 밀렸고, 시즌 도중 LA갤럭시행이 결정되며 전력 외로 분류됐다. 그럼에도 후반기에 특급 조커로 맹활약을 펼쳐 라리가 우승을 이뤘다. 2007년 치른 14경기 중 10경기에 결장하던 베컴은 4월 21일 발렌시아와의 31라운드 경기에 교체 투입되어 2-1 승리를 이끈 어시스트를 기록했고, 이후 38라운드 최종전까지 4개의 결정적인 도움을 기록했다. 유종의 미를 거두는 데 성공한 것이다.
베컴은 레알마드리드에서 4년 간 159경기에서 20골을 넣었다. 라리가와 챔피언스리그에서만 41도움을 기록했다. 맨체스터유나이티드와 레알마드리드에서 우승을 함께 했던 네덜란드 공격수 뤼트 판니스텔로이는 그의 인간 승리에 찬사를 보냈다. ”그는 단 한 마디의 불만도 없이 오로지 훈련에만 열중했다. 도저히 출전 기회가 없어 보이는 데도 그는 혼자서 훈련에 매진했다. 99%의 다른 선수였다면 떠나버렸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정신력과 능력으로 이를 반전시켰다.”
![]() 라리가에서 보낸 4년, 유종의 미를 거두다 <그래픽-마르카 캡쳐> |
헌신과 진심, 도전정신으로 반짝반짝 빛난 별
레알의 갈락티코(Galactico)를 이끌다 미국의 갤럭시(Galaxy)로 건너간 베컴은 늘 축구계의 은하수에 자리했다. 그러나 슈퍼스타 베컴에게 흔히 ‘뜨고 나서 변한 사람들’에게 보이는 오만과 편견은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베컴과 함께 활동한 포르투갈 윙어 루이스 피구는 "베컴의 가장 위대한 덕목은 한결 같이 매 경기마다 열심히 경기에 임하는 자세"라고 말했다. 레알마드리드의 전 주장 라울 곤살레스는 “그는 좋은 경기를 하고 못하고를 떠나 경기 내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낸다. 그의 투지와 팀에 대한 희생은 그 무엇으로도 측정할 수 없다”고 찬사를 보냈다. 지네딘 지단도 “선수와 인간으로 최고였다. 데이비드와 함께 뛴 것은 영광이었다”고 거들었다.
LA갤럭시의 감독으로 베컴을 지도했던 뤼트 훌리트는 "내가 베컴에게 가장 감명받은 것은 그 누구보다 투지 넘치는 그의 플레이다. 그는 볼을 향해 몸을 던질 수 있는 선수다.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베컴과 갈등이 있었던 카펠로 감독 역시 잉글랜드 대표팀으로 베컴을 다시 불러들이며 “베컴은 완벽 이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준비했다. 우려했던 것이 실수였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함께 싸우고 싶다며 프로다운 모습을 보였다. 베컴은 완벽한 선수이며 리더”라고 극찬했다.
잉글랜드 대표팀에서 주장 완장을 내주었지만 뛰고 싶다는 의지를 보였다. 등번호 7번을 달지 못한 경기도 있었고, 대부분의 시간을 벤치에 보내면서도 대표팀을 지켰다. 베컴에게 중요한 것은 자존심이 아니라 축구 그 자체였다. 그는 축구를 사랑했고, 축구화를 벗는 마지막 순간까지 축구 앞에 진실했다. 그래서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그와 이별하던 모든 이들이 눈물로 아쉬움과 경의를 표했다. 언제나 100% 그 이상을 그라운드에 던졌던 선수이기 때문이다.
베컴은 세계에서 가장 정확하다는 찬사를 받은 자신의 오른발 킥의 비밀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내 프리킥에 특별히 숨겨진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니다. 어렸을 때부터 많은 연습을 해 왔다. 아직도 같은 양의 연습을 하고 있고, 더 나아지기 위해서 노력한다."
불가능,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베컴은 이 마을 광고 문구로 외친 것이 아니라 직접 온 몸으로 실천했다. 베컴이 최고의 축구 선수는 아닐지 몰라도, 최고의 프로 선수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다.
글=한준(풋볼리스트 기자, 스포츠원 축구해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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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부러워서 미워할거야ㅋㅋ베꼼..ㅋ
최고의 프로선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