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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구간 (간수간산 간인간세, 看水看山 看人看世)
단성 여정(旅程)
우리는 둘레길 제8구간의 시작점 운리로 향한다.
원지(산청군 신안면 소재지)에서 20번 국도를 타고 경호강을 건너면 지리산의 초입, 단성이다.
곧바로 단성면 소재지인 성내리를 만나게 되는데, 이곳은 1862년 임술농민항쟁의 효시 ‘단성민란’의 역사 현장이다.
소재지를 벗어나면서 우리는 또 다른 역사의 현장, 단성면 사월리 배양마을의 문익점의 목화시배지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살고개 초입에서 경호강을 건너면 조계종 제7대 종정이신 성철스님의 생가터 겁외사가 있는 단성면 묵곡리이다.
물론 우리는 그곳을 먼발치에서 쳐다만 보고 살고개를 넘게 되는데, 곧바로 접하게 되는 곳이 단성면 남사리 예담촌 고가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단속사의 정당매, 산천재의 남명매와 더불어 산청3매의 하나인 원정매가 꽃을 피웠던 곳이기도 하다.
산모롱이를 돌아가다 지금까지 함께한 20번 국도를 버리고 1001번 지방도를 따라 우회전하여 호암교를 건너면 단성면 입석리이다.
이곳 사람들은 선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선돌이란 선사시대 거석문화를 나타내는 신앙물로서 이곳의 산청선비학당(구 입석초등학교) 운동장에 1기, 남사천변 들판에 2기가 현존하고 있다.
그리고 호암교에서 입석리 사이의 남사천에는 호랑이바위가 있는데, 웅석봉의 곰과 연결하면 단군신화가 연상되기도 하는 곳이다.
입석마을, 용두마을을 지나면 좌측 남사천변의 자그마한 독뫼를 만나게 되는데, 도로의 아래로 내려서면 ‘광제암문(廣濟嵒門)이라 각자된 남사천변의 아담한 직벽단애를 볼 수 있다.
이곳의 마애석각(磨崖石刻)은 그 옛날 단속사의 입구를 표시한 것으로 최치원의 글씨라고 한다.
계속하여 1001번 지방도를 따라 조금 가면 오늘의 제8구간 출발점 운리에 도착하게 된다.
여기까지 얼마 되지 않는 단성의 여정(旅程)에서 우리는 역사와 신화와 전설들의 유적을 만나면서 단성고을의 범상치 않음의 기운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현재의 단성은 원래 강성현(江城縣)이었는데 조선 세종 때 인근 단계현(丹溪縣)과 합해지면서 두 현의 이름에서 한자씩 따서 단성현(丹城縣)으로 되었고, 현청은 현재의 단성면 성내리에 두었다.
한때는 산음현(산청)보다 큰 고을이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단계(현재 신등면), 원지(현재 신안면) 등으로 분리하면서 면으로 강등되었다.
그러나 단성이란 이름까지 공중분해된 것은 아니었다.
둘레길에 앞서 스친 역사의 현장 중 단성민란과 문익점의 목화이야기라도 잠깐 언급하는 것이 단성고을에 대한 최소의 예의가 아닐까?
출발 전 일별(一瞥)하련다.
단성민란(丹城民亂) -농민운동의 발원
현재의 단성면소재지인 성내리는 임술민란의 효시 ‘단성민란’의 현장이다.
임술민란, 또는 임술농민항쟁은 1862년(임술년), 조선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농민 봉기인데 단성민란이 그 시발점이 되었다.
사건의 발단은 환곡(還穀)의 폐해에 있었다.
환곡이란 원래 흉년에 구휼미로 사용되던 것이었는데, 조선 후기에 들어서 이자를 받아 지방 재정과 수령 경비, 기금 조성 등에 사용되었다.
그래서 농민이 원하지 않아도 억지로 환곡을 배급하고 이자를 붙여 갚게 했다.
환곡 규모가 늘어나면서 횡령 또한 빈발하게 되자 정작 흉년이 들었을 때는 환곡이 부족한 일까지 생기게 되었다.
이렇게 결손된 것을 포흠이라고 했다.
포흠을 메꾸기 위해 농민들을 수탈하고 곡식에 돌과 짚 등 불순물을 섞었으며, 또한 환곡을 빌려주지도 않고 이자만 거두는 백징도 발생했다.
이런 가운데 1861년 12월 단성현의 현감과 아전들이 환곡을 착복하였다는 사실이 발각되어 감영에서 이를 변상하도록 하였는데 아전들은 가마니 속에 솔가지 겨 짚 등을 채워 거짓으로 변상하였다.
또한 포흠을 보충하기 위해 거둬들인 곡식을 단성민에게 돌려주라고 명령했으나 이들은 이를 시행하지 않았다.
그러자 1862년 1월 들어 단성현 단계(현재 신등면)에서 김령・김인섭 부자가 주도하는 사족(士族)회의가 열렸는데, 논의가 확산되면서 평민들도 참가하여 1월 25일(음력) 단성향교에서 향원들이 회의를 열었다.
2월 4일 단성민들은 관가로 몰려가 시위를 벌이면서 포흠곡을 쌓아둔 창고를 불 지르고 환곡장부를 빼앗았다.
그리고 읍의 장터에 모여 며칠 동안 시위를 하자 현감은 감영으로 피신했으나 파직 당했고, 이후 아전들도 모두 흩어졌으므로 김령을 위시한 사족들이 읍권을 장악했다.
단성민란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열흘 뒤 2월 14일 진주 민란을 일으켰고, 이어 전국적인 민란으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는 오히려 임술농민항쟁의 직접적인 기폭제 역할을 한 것이 진주민란이었으며 단성민란은 단지 진주민란의 촉매역할을 한 것에 불과한 것이라 평가되고 있다.
말하자면 진주민란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로 단성민란은 진주민란과 지역적・시간적으로 연접되어 하나의 사건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이다.
즉 단성은 진주민란의 출발지인 수곡・덕산과의 경계가 모호한 동일 생활권역이며, 또한 진주민란의 구체적인 작업이 진행되던 중 단성민란이 발발하였는데 시간적 간격이 불과 열흘 밖에 되지 않다는 점에서 동일 사건으로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단성민란은 농민항쟁으로 더 이상 확산되지 않고 주동자인 사족(士族)들이 현의 행정을 장악하는데 그쳤으므로 타 지역으로의 파급력이 크지 않았다는 점도 그 이유 중에 하나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당시 조정에서는 단성민란의 독자성을 인정하지 않고 진주민란과 한 묶음으로 판단하였다는 데에 더 큰 비중을 들 수 있겠다.
그런 이유로 조정에서는 박규수를 진주안핵사로 임명하여 진상파악과 사태수습을 위해 진주에 파견하면서도 단성민란에 대한 별도의 지침을 내리지 않았다.
이에 박규수는 민란 수습을 위하여 진주에 머물던 약 3개월 동안 단 한 번도 단성을 방문하지 않았고, 단성민란에 대하여 그 어떠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단성현의 행정은 김령을 중심으로 한 사족의 수중에 있었던 것이었다.
아무튼 단성민란이 없었더라도 진주민란은 발생하였을 것이고, 전국적 임술농민항쟁 역시 진주민란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것도 사실이나, 이는 단성민란의 역사적 비중을 너무 축소시킨 것이 아닌가 한다.
단성민란은 엄연히 진주민란과 별개의 독자적인 사건이며, 오히려 잠깐 만에 끝난 진주민란과 달리 단성민란은 상당 기간 현정(縣政)을 장악하여 타 지역 민란의 롤 모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단성민란은 진주민란의 촉매제로서의 역할을 거쳐 임술년 전국적 농민항쟁의 견인차 역할을 한 것이 된다.
뿐만 아니라 이로부터 30년 후에 발발한 동학농민운동 역시 단성민란이 그 발원지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삼우당 문익점 -솜꽃 같은 삶
단성면 소재지를 벗어나 고속도로 단성IC 사거리에서 그대로 직진을 하면 곧바로 만나는 곳이 문익점의 목화시배지이다.
이곳의 마을이름은 사월리 배양(培養)마을로서, 문익점이 목화를 키우고 가꾼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원래의 이름은 배암마을(뱀마을, 巳洞)이였으나, 이를 한자로 차음(借音)하면서 배양으로 되었다.
빌려온 이름이 본래의 이름보다 더 본명 같은 의미로 개명된 것이다.
아무튼 이곳은 문익점을 빼놓고 이야기 할 수 없는 곳이다.
문익점은 1331년(1329년 출생했다는 설도 있음) 이곳에서 태어났다.
1360년(고려 공민왕 9), 문과에 급제하여 김해부 사록과 순유박사 등을 거쳐 1363년 사간원 좌정언으로 재직 중 서장관이 되어 계품사 이공수를 따라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목화씨 몇 알을 가지고 와서 고향인 단성(당시의 지명은 강성)에서 장인과 목화를 재배하였다.
그 후 목화를 전국적으로 보급하게 되었고 일반 백성들의 의류생활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문익점에 대하여 역사적으로 몇 가지 의혹과 논란이 있다.
첫째로는 원나라가 금수품목으로 지정한 목화씨앗을 목숨을 걸고 붓두껍 속에 숨겨 밀반입을 하였다는 사실에 대한 의혹이다.
태종실록에는 문익점이 고려로 돌아올 때 길가의 목면(木棉)나무를 보고 그 씨앗 10여개를 따서 주머니에 넣어 가져왔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근거로 당시 원나라에서 정한 금수품목에 목화씨가 해당된다는 기록이나 목화씨를 특별히 포함시켜야 할 합리적 이유도 발견할 수 없으므로, 목숨을 걸고 밀반입하였다는 것은 과장에 지나지 않는다는 반론이 있다.
둘째로는 문익점이 원나라 사행 중의 행적에 관한 것이다.
당시 원나라 순제와 기왕후는 반원정책을 취하고 있는 공민왕을 폐하고 원에 머물고 있던 덕흥군(충선왕의 3남)을 고려왕으로 책봉하려 하였다.
원의 사행 중이던 문익점이 이를 반대하여 원 순제의 미움을 사게 되고 이 일로 운남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는 이야기의 진위여부가 그것이다.
당시 문익점은 오히려 덕흥군의 옹립을 지지하면서 원에 머물었으나 원의 지원을 받은 덕흥군 군대의 고려 침공이 최영과 이성계에 의해 실패로 돌아가자 어쩔 수 고려에 돌아와 파직되었다는 고려사절요의 기록을 그 근거로 하는 반론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논란은 목화의 보급으로 백성들의 의류생활에 커다란 혁명을 가져온 그의 공로에 비하면 하찮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오죽하면 남명 조식은 문익점을 중국의 농업신으로 숭배되는 후직(后稷)에 비유하여 같은 신의 반열에 올려놓고 “의피생민 후직동(衣皮生民 后稷同 ; 백성에게 옷을 입힌 것은 농사를 시작한 중국의 후직과 같다)”이라 찬양하였을까.
아무튼 그는 공민왕이 죽고 우왕(1375년)이 즉위하자 목면을 보급한 공으로 전의주부(典儀注簿)에 임명되어 정계에 복귀하였으나 이듬해 모친상을 치르며 3년의 시묘살이를 하였고, 1389년(창왕 1) 좌사의대부(左司儀大夫)에 올랐으나 그해 이성계, 정도전, 조춘 일파에 의하여 추진된 전제개혁에 반대하면서 조춘의 탄핵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1392년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었으나 그는 관직에 나가지 않고 고향에서 은거하다 1398년(조선 태조 7)에 70세 나이로 사망하였다.
이렇듯 그의 생애에 있어서 관료생활은 평탄하지 않았을 뿐더러 정치적으로도 결코 성공했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목화 보급의 공적만 가지고도 우리 역사를 찬란하게 빛낸 위인의 반열에 오르기에 충분한 스팩을 가진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사후에 이르러 참지의정부사 강성군(江城君)을 증직(조선조 태종 때)되고 영의정부사 부민후에 가증(세종 22년 때)되었다.
목화를 빼 놓고 그의 업적을 이야기 할 수 없듯이 그의 인생 역시 목화와 너무나 닮은꼴이다.
목화(木花)는 7월 중하순에 개화한다.
처음에는 흰 꽃으로 개화했다가 분홍으로 변하면서 꽃이 지는데, 이 기간이 짧고 꽃으로서의 특별히 내세울게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낙화 후 열매가 맺는데 이를 다래라고 하며, 이것이 익으면 껍질이 터지면서 하얀 솜이 부풀어져 솜꽃을 피우게 된다.
문익점이 피운 꽃은 생전의 목화꽃이 아니라 사후에 다시 피어난 솜꽃이었다.
하얗게 조용한 꽃, 아늑하게 만개한 꽃, 포근하게 따스한 꽃으로 영생의 솜꽃처럼 피어난 것이었다.
박노해 시인의 “목화는 두 번 꽃이 핀다”라는 시이다.
꽃은
단 한 번 핀다는데
꽃시절이 험해서
채 피지 못한 꽃들은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가
꽃잎 떨군 자리에
아프게 익어 다시 피는
목화는
한 생애에 두 번 꽃이 핀다네
봄날 피는 꽃만이 꽃이라
눈부신 꽃만이 꽃이라
꽃시절 다 바치고 다시 한 번
앙상히 말라가는 온몸으로
남은 생을 다 바쳐 피워가는 꽃
패배를 패배시킨 투혼의 꽃
슬프도록 환한 목화꽃이여
이 목숨의 꽃 바쳐
세상이 따뜻하다면
그대 마음도 하얀 솜꽃처럼
깨끗하고 포근하다면
나 기꺼이 밭둑에 메말라가며
순결한 솜꽃 피워 바치겠네
춥고 가난한 날의
그대 따스하라
백운계곡과 마근담계곡
우리가 걷는 8구간의 둘레길은 백운산과 수양산 능선을 가로지르는 길이다.
그리하여 926봉(웅석봉의 남쪽 능선인 달뜨기 능선의 마지막 봉우리), 수양산, 시무산으로 이어진 능선을 사이에 두고 맞맞이로 자리 잡은 백운계곡과 마근담계곡을 거치게 되는 것이다.
이 두 계곡은 각각 웅석봉의 남쪽 줄기인 달뜨기 능선의 끝, 926봉(정확하게 말하자면 감투봉・이방산으로 이어지는 능선과 수양산 능선이 갈라지는 지점으로서 마근담봉이라고 하나 공식명칭은 아님)의 좌・우 사면에서 발원하여 덕천강에 합류하는데, 군데군데 아름다운 소와 폭포가 어우러져 선경을 이루고 있다.
둘레길은 백운계곡의 상류를 가로질러 스쳐 지나고, 마근담계곡의 상류에서부터 덕천강에 합류하는 하류까지 함께한다.
백운계곡은 백운리 점촌마을을 지나 계곡이 꺾어지는 팬션촌에서부터 시작하여 둘레길을 만나는 지점까지 거슬러 오르는 물길을 일컫는 말이다.
목욕을 하면 절로 아는 것이 생긴다는 ‘다지소(多知沼)’, 옳은 소리만 듣는다는 ‘청의소(廳義沼)’를 비롯하여 아함소, 장군소 등과 용문폭포, 백운폭포, 직탕폭포 등이 상류까지 이어진다.
이렇듯 수많은 절경을 가진 백운계곡은 일찍이 남명이 제자들과 함께 자주 찾았던 곳으로 지금도 ‘남명선생장구지소(南冥先生杖屨之所)’라고 각자된 바위가 있다.(‘장구(杖屨)’란 지팡이와 신발을 의미하고, ‘장구지소’란 지팡이를 짚고 신발을 끌며 찾아와 머물던 자리라는 뜻이다)
뿐만 아니라 조선조 말기 경상우도의 선비 만성 박치복, 단계 김인섭(1862년 단성민란의 주역) 등 7인이 ‘백운동 7현’이라는 유계(儒契)를 만들어 이곳을 찾아 즐겼으며, 만성 박치복은 ‘백운동십팔곡(白雲洞十八曲)’을 지어 이곳의 경승 18곳을 노래하기도 하였다.
마근담계곡 역시 백운계곡 못지않은 청담옥류를 이루고 있으며, 둘레길은 안마근담 입구에서부터 산천재가 있는 사리까지 마근담계곡과 함께한다.
그렇다면 마근담계곡 또한 남명이 자주 소요(逍遙)하던 곳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백운계곡과 마근담계곡은 이렇듯 남명의 채취에 벗어날 수 없듯이 이곳을 지나는 둘레길 역시 남명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남명 조식(南冥 曹植)Ⅰ
마근담 계곡과 함께하던 길은 사리마을에서 끝나게 되는데, 이곳에는 남명 조식 선생이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가르치던 산천재가 있다.
조선 중기의 거유, 남명 조식은 이곳에서 자신의 학문을 완성하여 실천하면서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내 미천한 지식으로 감히 선생의 학문과 업적을 논하기에 부족하지만 무모한 용기를 내어본다.
영원한 처사
남명 조식은 1501년(연산군 7년) 삼가현(현재의 합천군 삼가면) 토동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부친이 과거에 급제하면서 아버지를 따라 한양으로 이주하여 약20년의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낸다.
26세에 부친의 별세로 고향인 삼가현에서 3년상을 치르고 의령 자굴산에서 독서하다가 30세 되던 해 처가가 있는 김해로 이주하였다.
처가의 도움으로 신어산 밑에 산해정을 짓고 학문에 열중하다 37세에 이르러 어머니를 설득하여 과거를 위한 공부를 청산하였다.
이 시기 그는 진정한 학문의 길로 방향을 잡고 연마하게 된다.
45세에 모친의 별세로 다시 삼가에서 3년상을 치르고 48세에는 아예 고향인 삼가현 토동에 자리 잡고 계부당과 뇌룡정에서 본격적으로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자신의 학문의 틀을 확립하였다.
회갑인 61세에 이르러 지리산 깊숙한 곳 덕산에 산천재를 짓고 문생들에게 강학(講學)하게 되는데, 72세 사망할 때까지의 12년은 자신의 학문을 완성하여 실천하였던 시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8세 때 중종으로부터 벼슬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음을 필두로 명종, 선조 때까지 삼조(三朝)에 걸쳐 10여 차례 제수 받은 벼슬을 거절하고 오로지 산림처사(山林處士)로 학문을 궁구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코 머물러있는 이론적 학문이 아닌 실행에 중점을 두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의 사상을 집약하면 경(敬)과 의(義)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경과 의에 대하여 주역의 문언전(文言傳)에는 ‘경으로써 안을 곧게 하고(敬以直內), 의로써 밖을 평정케 한다(義以方外).’라 하고 있다.
이를 남명은 ‘안으로 마음을 밝히는 것이 경이요(內明者敬), 밖으로 행동을 결단하는 것은 의이다(外斷者義).’라 하면서 평소 지니고 있던 칼자루에 이 글귀를 세기고 좌우명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를 제자들에게만 강론한 것이 아니라 임금에게도 훈계하듯 논구(論究)하기도 하였다.
66세 때 상서원 판관의 제수되어 처음으로 소명에 응하여 명종과 독대하면서 그는 “임금의 학문은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이며, 학문은 마음으로 체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음에 얻기만 하면 천하의 이치를 훤하게 알 수 있고, 사물의 변화에 대처할 수 있어서 온갖 정사를 한꺼번에 끌어 잡아도 스스로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 방법은 오직 ‘경(敬)’에 있습니다.”라면서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가 개인에 있어서나 국가의 치국 원리에 있어서 모두 ‘경’에 집약된다고 하였다.
또한 68세 때 선조에게 올린 무진봉사(戊辰封事)에서도 “왕도는 ‘경(敬)’을 근본으로 삼아야 합니다. 경은 정제하고 엄숙해서 깨우치고 깨우쳐서 혼돈하지 않고 한마음에 주장을 두어 온갖 일을 다루는 것이니 공자도 ‘몸을 닦기를 경으로 한다’고 하였으므로 천하를 궁구하려면 ‘경’이 있어야 합니다.”라고 경을 강조하였다.
그는 벼슬을 거부하고 임금을 훈계하는 까칠한 처사였다.
더 나아가 거침없는 직설로 임금을 준엄하게 꾸짖기도 하였던 대책 없는(조정에서 볼 때) 처사이기도 하였다.
그의 나이 55세 때 단성 현감으로 제수되었으나 고사하면서 쓴 '단성소(일명 을묘사직소)'에서 그는 “…전하의 정사가 이미 잘못되고 나라의 근본은 이미 망해버렸습니다. 하늘의 뜻은 이미 가버렸고 인심도 떠났습니다. 마치 큰 나무가 백 년 동안이나 벌레가 속을 파먹고 진액도 다 말라버렸는데 회오리바람과 사나운 비가 언제 닥쳐올지 까마득히 알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 지경까지 이른 지는 이미 오래되었습니다.”라고 명종을 질책하였다.
그리하고는 “자전(紫殿)께서 생각이 깊으시다고 해도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일 뿐이고, 전하께서는 나이 어려 선왕의 고아일 뿐입니다. 천 가지, 백 가지나 되는 천재(天災), 억만 갈래의 인심을 대체 무엇으로 감당하고 무엇으로 수습하시렵니까?”라고 하면서 문정왕후를 과부, 명종을 고아라고 무엄한 돌직구를 날린다.
남명에게 있어서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임금이라고 달라질 것은 없다.
그리하여 미수 허목(眉叟 許穆)은 남명을 일컬어 “구차하게 따르지 않았고(不苟從), 그렇다고 구차스럽게 가만있지도 않았다(不苟默)”라고 하였다.
그렇다. 그는 꼿꼿한 선비, 영원한 처사였다.
천명유불명(天鳴猶不鳴)
남명은 61세 때 자신의 마지막 거처이자 평생의 염원이었던 지리산 자락 덕산에 자리 잡게 되었다.
봄 산 어느 곳엔들 향기로운 풀이 없겠는가마는(春山底處無芳草)
천왕봉이 상제 있는 곳에 가까운 것을 사랑하기 때문(只愛天王近帝居)
맨손으로 왔으니 무엇을 먹고 살 것인가(白手歸來何物食)
은하 같은 저 십리 물 아무리 떠 마셔도 오히려 남으리(銀河十里喫猶餘).”
‘덕산복거(德山卜居)’라는 이 시에서 그는 덕산에 터를 잡은 이유를 상제가 사는 천왕봉이 가까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먹을 것을 걱정할 정도의 빈한한 형편이지만 평생을 갈구하던 염원을 이루었다는 자족감에 즐거이 안빈낙도(安貧樂道)를 노래하였다.
이곳 덕산의 산천재(山天齋)는 남명 사상의 본산지이나 그가 이곳에 정주한 기간은 12년에 불과하였다.
30세부터 45세까지 김해 산해정의 16년, 48세부터 61세까지 삼가 뇌룡정의 14년에 비하면 짧은 세월이었다.
그리고 인생의 황금기인 중장년을 산해정과 뇌룡정에서 보낸 후 황혼의 노년에 이르러서야 산천재에 자리 잡게 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 지리산 산천재의 12년이 그의 인생과 사상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생애의 가장 중심적인 축이 된 이유가 무엇일까?
딱히 무엇이라 단언할 수 없으나 남명의 지리산에 대한 천석고황(泉石膏肓) 같은 그 무엇이 아닐까하는 막연한 추측만 할 뿐이다.
남명이 지리산을 처음 오른 것은 28세 때 대곡 성운의 형 성우와 함께였다.
아마 그때부터 지리산을 동경하면서 지리산을 닮고자 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58세 때 그는 12번째의 지리산 산행을 하였다.
이때 쓴 ‘유두류록’에는 “두류산을 덕산동으로 들어간 것이 세 번, 청학동과 신흥동(현 하동 화개)으로 들어간 횟수 또한 세 번, 용유동(하동 청암) 세 번, 백운동 한 번, 장항동(산청 삼장)으로 들어간 것이 한 번”이라고 하면서 그 이유를 “나름대로 평생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니, 오직 화산(華山: 중국 오악 중의 하나이나 여기에서는 지리산을 의미함)의 한 쪽 모퉁이를 빌어 그곳을 일생을 마칠 장소로 삼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이 마음과 어긋나서 머무를 수 없음을 알고 배회하고 돌아보며 눈물 흘리며 나오곤 하였으니, 이렇게 했던 것이 무려 열 번 이나 되었다.”고 이야기 하였다.
그 3년 후 남명은 드디어 지리산 자락에 자리 잡게 되었고, 그 심정을 앞의 시로써 노래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자신의 염원이 이루어졌다는 내적 자족감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 남명의 사상이나 인생의 객관적 평가의 잣대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덕산 산천재 생활에서 지은 그의 또 다른 대표작 ‘제덕산계정주(題德山溪亭柱)’에서 남명은 자신의 흉금을 은유적으로 드러내었다.
덕산 시냇가에 정자를 짓고 그 기둥에 시를 지어 적었다는 내용의 시제이다.
청컨대 천석종을 보시오. (請看千石鐘, 청간천석종)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오. (非大扣無聲, 비대구무성)
어찌하면 두류산처럼 (爭似頭流山, 쟁사두류산)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을 수 있을까? (天鳴猶不鳴, 천명유불명)
여기서 나는 남명의 평생소원은 지리산 자락에 터 잡고 사는 것에 안주하려던 것이 아니라, 진정 지리산을 닮고자 했던 것이라 생각해 본다.
지리산을 ‘거대한 종(千石鐘)’으로 여기고 그 지리산이 되고자 자신의 학문과 사상을 완성한 곳이 이곳 덕산의 산천재가 아닐까?
산천재 정주(定住)를 기준으로 그 이전의 생활을 학문을 연마한 것이라 한다면 이곳 산천재에서의 생활은 그것을 완성하여 실천하였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결코 현실에 눈을 감고 은둔하기 위하여 지리산에 터 잡은 것이 아니다.
지리산화(化) 된 자신을 완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의 인생과 사상이 이곳에서 결실을 맺게 되었고, 그를 지리산과 분리하여 평가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천석종 같은 지리산처럼 하늘이 울어도 결코 울지 않는 지리산인으로 영원히 남게 된 것이리라.
천명유불명(天鳴猶不鳴)!
남명과 퇴계
남명의 생애와 사상을 논하기에 내 얕은 지식으로서는 장님의 코끼리 만지기식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지리산만큼이나 심오하고 거대한 그의 인생 담론은 ‘하늘이 울어도 울리지 않는 천석종’만큼이나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남명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기는 불가능하지만 개략적으로 일견할 수 있는 좋은 소재가 있다.
그것은 동시대의 거유, 퇴계 이황과의 비교이다.
1501년(연산 7) 태어난 동갑내기인 남명과 퇴계는 조선중기를 대표하는 유학자로서 기질과 학풍 등 여러 면에서 비교되곤 한다.
한양에서 볼 때 영남을 가르는 낙동강을 기준으로 우측을 경상우도, 좌측을 경상좌도라 구분하는데, 남명은 우도에서 퇴계는 좌도에서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을 이루면서 후학들을 양성하였다.
실학자 이익은 “퇴계의 학문이 바다처럼 넓다면, 남명의 기질은 태산처럼 높다”고 함축적으로 표현한 바 있다.
퇴계가 온건하고 합리적인 기질의 소유자로 성리학을 이론적으로 심화 발전시킨 모범생 유학자라면, 남명은 벽립천인(壁立千仞) 기상의 과격하고 직선적인 언변으로 조정을 발칵 뒤집어놓았던 인물이다.
이러한 상이한 기질은 그의 제자들에게도 전해져 임진왜란 때에는 남명의 제자 곽재우, 정인홍, 김면, 조종도 등 많은 제자들이 의병장으로 활약하기도 하였지만, 퇴계의 제자 유성룡 등은 조정에 남아 선조와 함께 피란에 동행한 정도였다.
퇴계의 제자 유성룡과 남명의 제자 정인홍 역시 스승의 기질을 그대로 이어 받았다.
같은 동인이었던 퇴계와 남명은 사후에 이르러 제자인 유성룡과 정인홍에 의하여 각각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서게 된다.
서인에 대하여 온건파인 유성룡과 강경파인 정인홍의 정치적 대립을 계기로 남인・북인으로 분파되고,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면서 북인인 정인홍 일파는 정치적 숙청을 당하여 그 맥이 끊어질 정도였다.
이런 연유로 조선조 내내 남명은 철저하게 폄훼되고 퇴계는 상대적으로 존숭받게 된 것이었다.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한 선비가 명망이 높았던 남명 조식을 찾아가 물었다.
"보지(保之)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남명은 얼굴을 찌푸리며 상대하지 않았다.
선비가 다시 "자지(刺之)는 무엇입니까?" 하고 묻자 남명은 크게 화를 내며 제자들을 시켜 그를 내쫓았다.
내쫓긴 선비는 포기하지 않고 이번에는 역시 명망 높은 퇴계 이황을 찾아가 같은 질문들을 내놨다.
그러자 퇴계는 "보지는 걸어 다닐 때 숨어 있는 것으로 보배처럼 귀하지만 살 수는 없는 것이고(步藏之者 而寶而不市者也), 자지는 앉아있을 때 숨어 있는 것으로 사람을 찌르기는 하지만 죽이지는 않는다(坐藏之者 而刺而不兵者也)"는 답을 내놨다.
이를 보고 선비는 남명보다 퇴계의 덕이 더 높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상은 조선 후기의 음담패설집인 '기이재상담(紀伊齎常談)'에 실린 내용으로 남명을 퇴계의 하수 정도로 폄하한 것이다.
신도비(神道碑)의 수난
남명이 수난 당한 것이 또 있다.
그것은 남명의 사적을 기리는 신도비였다.
신도비(神道碑)란 죽은 이의 행적을 기록하여 묘 앞에 세운 비석을 말하는데, 남명의 그것은 여느 인물과 달리 네 개나 존재한다.
내암 정인홍, 미수 허목, 우암 송시열, 용주 조경이 지은 신도비가 그것이다.
첫 번째 신도비는 제자 정인홍이가 세웠다.
인조반정으로 정인홍이가 역적으로 몰려 처형되자 죄인이 지은 신도비를 둘 수 없다하여 즉시 없애버렸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다시 당대의 명사들의 글을 구하였다.
서인의 대표적 학자 청음 김상헌에게 청문하였으나 지어주지 않았다.
다시 남인의 영수였던 용주 조경에게 청문하였으나 처음에는 지어주지 않다가 세월이 흐른 나중에 지어주게 된다.
용주가 오랫동안 지어주지 않자 다시 용주보다 후배인 남인의 영수 미수 허목과 서인(노론)의 영수 우암 송시열에게 청문하였는데, 어쩌다 두 사람의 글을 동시에 받게 되었다.
그러나 대립하는 남인과 노론의 영수의 신도비를 함께 세울 수 없었다.
그리하여 두 번째의 신도비인 미수가 지은 비를 덕산에 세우고, 우암이 지은 신도비문은 나중에 남명의 고향인 삼가에 세우게 되었다.
한편 정세가 남인들이 득세를 하면서 북인인 남명 후학들이 더 심하게 배척을 당하게 되고, 더욱이 미수가 지은 신도비의 내용을 탐탁치 않게 여기던 남명의 후학들은 강한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조선 말기에 이르러 노론계 학자들은 미수가 지은 신도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우암이 지은 신도비를 칭찬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을 거쳐 미수가 지은 신도비에 대한 불만이 더욱 크게 고조된 남명의 후손들이 급기야 1926년 미수의 비를 넘겨 버렸다.
그리고 우암의 비를 다시 세우게 되는데 그것이 세 번째의 신도비였다.
그러자 남인(특히 진주향교)들은 남명 후손(덕산조씨 문중)들을 대대적으로 성토하면서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였다.
진주향교는 미수의 글을 없앴다는 이유와 조상의 신도비를 훼손한 것은 명백한 잘못이므로 비석을 원상복귀하고 도내 유림에게 사죄하라고 주장하였다.
반면에 덕산 조씨 문중은 미수가 지은 비문의 내용에 자기들의 조상이자 만인이 추앙하는 남명 선생을 비하하는 내용이 들어있기 때문에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폈다.
결과적으로 1차 2차 소송에서는 남인들이 이겼지만 최종심에서는 조씨들이 이겼다고 한다.
결국 미수가 지은 신도비는 다시 서지 못 했고 묘소 입구에는 우암이 지은 신도비만 서 있게 되었다.
현재 남명기념관 마당에 있는 신도비는 이때 우암이 찬(撰)한 것이다.
그리고 남명의 묘소에는 평생의 친구였던 대곡 성운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있는데, 이는 6.25전쟁 후에 세운 것이다.
그 이전에 있었던 원래의 비석은 하단의 부인 묘역 후면에 있다.(3기의 비석 중 1기는 부인 은진송씨의 것이며, 이 모두 얼마 전까지만 해도 쓰러져 있던 것이다)
묘역 후면에 팽개치듯 서 있는 이 비석 역시 온전치 못하였다.
군데군데 총상의 흔적은 6.25의 또 다른 남명비의 수난이었다.
후기 (구간전체 13.4km) 2018. 12. 1
(운리 ⇨ 원정마을 : 0.8km)
제8구간의 시작점은 운리 본동마을 주차장이다.
우리는 그것을 무시하고 이번 제8구간의 들머리를 단속사지로 잡았다.
지난 제7구간을 점촌마을 입구의 삼거리에서 마무리하면서 단속사지를 들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동서 삼층석탑 앞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정당매는 구간 순레를 끝내고 돌아올 때 보기로 하고 제8구간의 발걸음을 시작하였다.
아무튼 이곳은 탑이 있다하여 탑동마을이라 하는데, 마을 뒤 옥녀봉에서 흘러온 비단(錦) 같은 시내(溪)가 있어 신라 경덕왕 때 금계사(錦溪寺)라는 절을 지었는데, 후에 절 이름을 단속사로 고치고는 망했다는 단속사의 또 다른 이야기도 전해지기도 한다.
그리고 옛날, 마을사람 46인이 합심해 이곳에 서당을 짓고 송나라 주희 선생을 사모하는 뜻으로 무이산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떠 금계구곡이라 하고, 제호(齊號)를 운곡재(雲谷齊)하였으며, 마을이름을 운리(雲里)라 불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운리는 단속사지가 있는 이곳의 탑동마을과 본동마을 그리고 원정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둘레길은 이 마을 모두를 거치게 된다.
단속사지에서 운리 본동마을의 주차장까지는 1001번 지방도를 따라 걷는 길이다.
둘레길은 제8구간의 시작점인 본동마을 주차장에서 1001번 지방도를 버리고 우측 시멘트 농로로 꺾어든다.
원정마을을 향하는 진입로이다.
(원정마을 ⇨ 백운계곡 : 4.8km)
원정(圓亭)마을은 마을에 큰 정자가 있었다하여 유래되었다 하며 이곳 사람들은 원정거리라 부르기도 한다.
둘레길이 거치는 마을 중심에는 제법 큰 정자나무가 있고 그 아래 아담한 정자가 있는데, 예전의 그 정자는 아니겠지만 길녘에 자리한 정자의 푸근한 정취는 원정거리라는 이름과 참으로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은 곧바로 마을 후면의 뒷들로 이어진다.
산자락 아래 자그마한 몇 두락의 논밭이 전부이지만 뒷들은 포근한 산골 특유의 소박한 서정을 담아내고 있었다.
뒷들을 벗어나면 오름의 임도이다.
이 임도는 달뜨기 능선 바특한 곳까지 올랐다가 능선을 넘어 마근담으로 연결된다.
우리는 임도변 쉼터의 정자에서 한숨을 돌리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백운산이 봉긋한 자태로 정면에 마주하고, 뒤돌아보면 눈 아래의 운리골이 예사롭지 않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넓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협소하지도 않은 운리골의 풍경은 자족의 여유를 느끼기에 충분하였다.
둘레길은 임도를 버리고 좌측의 자스락 산길로 꺾어든다.
잠깐의 오름길이 끝나면 백운산 능선을 가로지르는 흙길이다.
참나무가 빽빽하게 늘어선 고즈넉한 산길이다.
사실 이 길은 낙엽 진 겨울보다는 이파리가 무성한 여름과 가을이 어울리는 길이다.
여름과 가을의 이곳은 참나무 군락의 건강함, 눅진한 흙길의 호젓함, 싱그러운 산내음의 청량감이 어우러지는 환상적인 길이 된다.
그러나 겨울의 초입 오늘 이 길에서 나는 여름과 가을의 그것에 못지않음을 확인하였다.
이파리를 털어낸 참나무의 엉성한 가지 사이로 비치는 은혜로운 햇빛과 나목의 고요함이 그렇게 평화로울 수 없음을 발견한 것이다.
이 길은 백운계곡 상단으로 이어지는데 이러한 감상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행복한 구간이 되었다.
(백운계곡 ⇨ 마근담마을 입구 : 2km)
우리는 계곡 상단 반석 위에 자리를 잡고 점심을 준비하였다.
언제나 그랬듯이 오늘 역시 돼지 삼겹살과 라면이 전부이지만 일류 식당이 부럽지 않은 만족한 오찬이었다.
경기도 평택에서 왔다는 둘레객 아주머니가 우리의 오찬에 합석하였다.
그녀는 제3구간의 매동마을에서 출발하여 오늘 3일째 걷고 있는 중이라 했다. 여자 혼자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운계곡에서 수양산 능선을 넘는 길 역시 고즈넉하고 한적한 명품길이다.
나뭇가지사이로 건너편의 이방산 능선이 묵직하게 다가선다.
산길이 끝나면서 시멘트 임도를 만나게 되는데 직진하여 오름길을 따르면 우리가 지나왔던 운리 마을 후면의 임도와 연결된다.
둘레길은 이곳에서 왼쪽으로 꺾어 내림의 임도를 따르게 되는데 한 모롱이를 돌면 마근담 마을 입구의 정자 쉼터를 만나게 된다.
마근담은 막힌 담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실재로 안마근담 후면의 감투봉과 926봉(혹자는 마근담봉이라고도 함)이 담처럼 꽉 막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한편으로 골짜기가 마의 뿌리처럼 길게 생겼다고 하여 마근(麻根)담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최근 들어 안마근담은 사회 각계각층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 ‘있고 없는 것이 서로 통한다’는 유무상통(有無相通)을 기치로 하여 이곳에 모여들어 ‘마근담 농촌체험 휴양마을’이라는 동네를 형성하였다.
현재 이곳은 각종 농촌 체험프로그램 등을 운영하고 있다.
둘레길은 마근담 마을을 거치지 않는다.
지난번 순례 때에는 마근담 체험마을을 둘러보았으나 오늘은 그것을 생략하기로 하였다.
(마근담마을 입구 ⇨ 산천재 ⇨ 덕산 : 6km)
여기서부터 길은 마근담 계곡과 함께하는 기다란 내림길이다.
이곳 마근담골은 웅석봉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린 달뜨기 능선의 끝자락인 954봉(큰등날등이라 부르기도 함)을 지나 안마근담 후면의 926봉에서 좌측의 수양산으로 흐르는 능선과 우측의 감투봉을 거쳐 이방산으로 이어진 능선이 길게 감싸 안은 좁다란 협곡이다.
이 협곡의 중심을 이루는 물길이 마근담계곡이다.
시리도록 푸른 소와 담이 어우러진 마근담계곡은 그 자체로만으로도 아름다운 그림이 된다.
둘레길은 이 계곡 옆의 임도를 따라 걷는 길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딱딱한 콘크리트 포장로를 계속하여 걷는 피로감 때문에 이 아름다운 계곡의 진면목을 느낄 여유를 상쇄한다는 것이다.
길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이 전부인 그저 그렇고 그런 매너리즘으로 포장된 구간이다.
몇 년 전 이 곳을 지나면서 해인사 소리길처럼 계곡과 함께하는 둘레길을 조성한다면 그에 못지않은 명품길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시리도록 푸른 계곡을 따라 걷는 천변의 길, 생각만 하여도 설레임이 인다.
다음 이곳을 지날 때는 이 바램이 꼭 이루어졌으면 하는 생각을 또 해본다.
마근담길은 사리마을의 삼거리에서 끝나게 되는데, 사리(絲里)라는 이름은 골짜기가 마치 실처럼 길고 가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풍수설에 의한 또 다른 이야기로 이곳은 늙은 누에가 실을 뽑는 ‘노잠토사(老蠶吐絲)’의 형국이라 하여 ‘실골’이라 하였고, 이를 한자화하면서 ‘사리(絲里)’가 되었다고도 한다.
이곳은 남명이 말년을 보낸 산천재와 그의 묘소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는 묘소 참배는 생략하고 산천재에 들렀다.
산천재 기둥에는 남명의 시, 덕산복거(德山卜居)가 주련으로 걸려있었다.
둘째 연 ‘지애천왕근제거(只愛天王近帝居; 상제가 있는 가까운 곳의 천왕봉을 사랑하기 때문)’를 읽으면서 산천재 지붕 너머의 천왕봉을 올려 보고, 넷째 연 ‘은하십리끽유여(銀河十里喫猶餘; 은하 같은 저 십리 물 아무리 떠 마셔도 오히려 남으리)’를 읽으면서 담장 너머의 덕천강 물줄기를 내려 보았다.
감히 이곳에 터 잡고 자족하였던 남명의 심경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마당에 있는 남명매를 둘러보고 덕산 소재지로 향하였다.
오늘은 이렇게 지리산둘레길 제8구간을 갈무리한다.
첫댓글 파조이신 조종도 할아버지께서 조식 선생님 문하생이기도 해서 반갑네요. 유년시절에는 정두선생님 문하생이였구요
정유재란 때 황석산성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하신 대소헌 조종도 선생의 후손임을 널리 자랑할만하군.
오랜만에 다시 들러 고귀한 글을 훔쳐보는 실례를 범했습니다
주변에 둘레길을 완주한 친구들이 몇 있어 산행기를 올려놓았지만
선생님의 글을 읽어야만 궁금중이 확 풀릴 것 같아서요!
감사합니다!
생생한 설명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