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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일곱째 날(8월 30일)
(24)
태풍 덴버가 훼방놓은 삼천포 해안길
새벽녘에 바람과 함께 비가 적잖이 내렸다.
강도는 약해졌으나 계속되는 빗속을 걸어 박재삼(朴在森) 문학관이 있는 바닷가 노산
공원(魯山)으로 간 시각은 아침 8시.
예전에는 작은 섬이었다는 노산공원에 '노산당산지위(魯山堂山之位)' 비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 주민의 일상에 깊이 자리잡은 공원인 듯.
주민의 안녕과 행복, 만선을 책임진 이 비는 1969년에 노산 금우위친계에서 세웠단다.
주민들이 찾아와 소망을 빌던 이 비를 승공경신 연합회라는 무속단체가 땅에 묻고 다른
비로 대체했는데도 순진한 주민들은 반공단체의 처사로 알고 그냥 지나쳐 왔다나.
호연재의 복원공사중 이 사실을 알게 된 주민들이 다시 세웠다니 이런 어이없는 일이.
주목되는 점은 반공단체의 막강한 힘과 전횡에 주민들이 기를 펴지 못하고 산다는 것.
아직도 '반공'이라면 귀신도 놀랄 정도로 미개한 민족인가.
노산공원 호연재(浩然齋)는 영조 46년(1770/이조 21대)에 건립된 이 고장의 대표적인
학당(書齋)으로 지역의 인재들이 모여 학문을 논하고 시문을 짓던 곳이란다.
구 한말 이후 일제 강점기에 호연재는 무수한 문객들이 모여 망국의 비분을 시문집으로
펴내고 실학사상을 숭상하는 장이었는데 불온사상의 소굴이라며 일제가 강제철거했다.
이 호연재를 고장 문운의 역사성과 넋을 일깨워 충. 효. 예의 중심학당으로서 호연지기
정신을 길이 전하기 위해 복원했단다.
그러나, 이처럼 큰 뜻을 품은 호연재도, 삼천포가 낳은 우리의 대표적 서정시인 박재삼
문학관도, 정상에 우뚝선 이순신장군 동상까지도 음기에 갇힌 듯 풀죽어 보이는 아침.
얼굴과 손가락들이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늙은 길손의 기분까지도 을씨년스러운 아침.
태풍 덴버가 처들어오기 직전의 정적이 압박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구항과 신항 사이의 노산공원 바닷길에는 볼거리도 많건만 밀어닥치는 비바람에 살펴
볼 겨를 없이 쫓기듯 횟집거리로 나왔다.
철시한 팔포횟집단지, 조금 전까지도 어지러이 있던 배들이 어디론지 사라진 목섬 앞과
사람도 차도 없는 해변거리 모두 죽은 듯 정적에 감싸였고 비바람만 좌충우돌식이었다.
어차피 우산은 무용지물이고 판초도 거센 바람에 제 몫을 온전히 할 수 있는가.
비란 처음 맞을 때가 문제일 뿐 한번 젖으면 개의되지 않는다.
사량도가 통영땅인데도 삼천포 들머리를 선호하는 이유를 사량도 선착장에서 확인하고
삼천포 신항만길을 강행했다.
항운노조 사무실에서 찬물을 얻을 때 모두 태풍이 진정되면 떠나라는데도 일어섰다.
비록 경량급이지만 배낭의 무게가 있는데 설마 날려보내기야 하겠는가.
여기에도 이순신 바닷길이 있는데 어떤 길일까.
향촌(어촌)에서 남일대해수욕장으로 가는 해안길을 잇는 제법 튼실하게 보이는 다리가
불안하게 보일 정도로 파도가 높이를 더해가기 시작했다.
남일대(南逸臺)는 고운 최치원(孤雲崔致遠/857~ ?)이 남유중 들렀다가 남녘에서 가장
빼어난 경관이라고 감탄하여 지은 이름이란다.
해풍과 파도에 깎인 기암괴석과 수림이 강한 인상을 준다.
고운 모래와 붓어진 조개껍질이 섞인 백사장도 일품이다.
촉감이 그만일 듯 하나 덴버의 훼방이 대단했고 긴 코로 바닷물을 마시는 듯한 코끼리
바위를 디카에 담으려 인내심을 발휘했으나 매번 집채만한 파도에 실패하고 돌아섰다.
내 동네 북한산 우이능선의 코끼리바위와 달리 바닷물에 긴 코를 박은 듯한 해안절벽의
바위가 인상적인데.
남일대에서 해변길은 일단 끝난다.
77번도로로 나와 걷다가 나지막한 고개에서 사천쓰레기매립장(사동)으로 잘못 들었다.
삼천포화력발전소 연돌들이 뒤에 우뚝우뚝 서있는 위치다.
다시 시작한 서남동 길에서 첫 알바다.
되돌아 나와서 얼마 내려가지 않은 지점, 고성과의 경계인 봉현천 다리(덕포교) 앞에서
진품 덴버를 만났다.
지금까지 겁준 것들은 전령에 불과했다.
2002년 이무렵(8월 31일)의 일이 생생히 떠오르게 했다.
태풍 루사 뉴스를 듣고도 낙동정맥 백병산(태백 통리 앞)에 오르다 무참히 패퇴한.
제주도에 머물러 있다고 해서 오늘은 괜찮겠거니 했다가 루사와 반보 전진 일보 후퇴의
혈투를 한 백병산의 백병전이었는데 덴버와의 싸움도 이에 버금가는 듯 했다.
전진을 포기하고 부근 정자의 기둥에 밀착해 앉았으나 흔들거리는 기둥이 겁을 주었다.
진정하려고 담배를 피려 했으나 바람이 라이터의 점화를 막았다.
가공스런 바람소리가 악귀의 울부짖음 처럼 들렸다.
한편, 전주의 전선들이 연주하는 현악기의 현에 다름 아니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되놈이 번다?
공포의 1시간여가 지난 후 웬만하여 걷기를 다시 시작해 고성땅으로 넘어섰다.
하이면 소재지에 도착했을 때는 시치미를 뚝 떼는 듯 말짱한 날씨.
조금 전에 벌어졌던 일이 악몽같으며 이 지역에서는 치명적인 피해가 발생하지 않은 듯
하여 걷기도 편했다.
피해지역을 지날 때는 마치 큰 잘못이라도 저지르고 있는 것처럼 마음이 무거운데.
일손이 모자라 쩔쩔매는 농촌지역을 지날 때도 늘 그러하지만.
하이면에 도착한 늙은 길손의 기분을 환하게 전환시킨 공로자는 단연 하이초등학교다.
내가 보아온 전국의 각종 학교중 최고로 잘 가꾼 환경 학교.
돈으로 된 게 아니고 세월과 함께 땀과 정성으로 가꾸었기에 더 아름답고 값진 것이다.
지나가는 나그네도 흡족한데 땀을 쏟는 이들의 보람이야 언급이 필요하겠는가.
특히 나무와 꽃의 번성은 사람의 지극한 마음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가장 중요한 세월은 언제나 그들의 편이니까.
내집 앞마당을 단지 마음으로 가꾸면서 터득한 진리다.
보건소에 들렀으나 의사의 치료가 필요한 상처인데 면단위 보건소에는 의사가 없단다.
외과의원 위치를 가르쳐 주는 것으로 임무를 마치는 보건소 직원, 참 편하겠다.
의과대학 6년을 엄벙덤벙 허송했다 해도 당구(堂狗) 삼년 음풍월이라는데 이럴 수가.
또, 허술하기 짝이 없다 해도 의사국가고시는 최후의 관문인데 어떻게 패스했는지 몹시
궁금하게 하는 외과의사의 치료를 받았다.
봉화대로에서 노은면(충주시) 보건의를 떠올리게 한 의사다.
환자는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받을 권리가 있다.
이 권리를 누리기 위해 도시 대형병원으로 집중하는 환자를 막으려고 약가의 차등 적용
이라는 치졸한 방법을 쓰기 전에 지방 의사의 질 검사부터 하는 것이 순서 아닌가.
하이면사무소 직원의 친절은 돋보였다.
지도를 프린트하여 내가 갈 가장 바람직한 길을 상세하게 알려주었으니까.
통영별로 때 사천읍사무소 직원도 그랬거니와 전국의 많은 지방공무원들이 그러하다.
친절의 온도가 날로 더욱 상승하고 있는데도 일어탁수(一魚濁水)적 피해를 입게 되어
억울할 것이다.
사천(또는 삼천포)화력발전소가 지근이다.
고성군 하이면(固城郡下二面) 땅에 있으면서도 이름이 사천화력인 까닭은 내 모르지만
여기에도 이론(異論)이 분분해 가고 있단다.
원자력발전소 정도로 첨예하지는 않으나 발전기의 증설계획으로 인해 지역여론이 양분
되고 있다면 불을 보듯 뻔한 이유다.
수혜(受惠) 다툼이다.
발전소건립에 따른 혜택은 고성에 돌아가고 환경오염 피해는 사천시민들이 떠안는다는
것이 반대 이유라면 정답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
나이아가라 폭포는 캐나다의 온타리오 주와 미국 뉴욕 주 사이에 있다.
경치는 캐나다에서 보는 것이 일품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관광객이 뉴욕 주를 들머리로 하여 캐나다로 간다.
나이아가라 폭포의 명물 스카일런 타워(Skylon Tower/160m,폭포에서236m)에 올라가
실컷 구경하고는 도로 미국으로 가기 때문에 캐나다는 치다꺼리만 할 뿐 실속이 없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되놈이 번다?
그래서 늘 불만이라는 말을 현장에서 들었는데(나도 미국에서 넘어갔다가 구경만 하고
도로 미국으로 왔으니까) 사천쪽이 그런가.
환경재앙을 이유로 내세우나 피해보상 지원금이 고성군에 미치지 못한데 대한 불만의
우회적 표현이다.
그러나, 발전기 신규 건설 환영파의 논리도 있다.
발전소가 "인구유입과 지역경제 활성화,지방재정 확충 등에 많은 도움이 되었고 신규로
2기가 추가 건설되면 일자리 창출 등 지역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것.
"화력발전소 직원들과 협력업체 가족들의 생활권이 주로 사천이라 서비스업과 지역의
관련산업 활성화는 물론 신규 업종의 수요가 발생할 것"이라는 기대도 한단다.
원자력발전소와 달리 해결책은 간단할 것 같다.
돈에서 시작해서 돈으로 끝나겠다.
고약한 덕명인심에 상족암군립공원이 피봤다.
면사무소 직원의 안내대로 77번도로를 따르다가 정족삼거리에서 상족암 길을 택했다.
온통 공룡 조형물들이다.
완만하나 긴 오르막과 내리막 끝에 덕명마을에 도착했다.
차라리 마을로 내려가지 않고 공룡박물관으로 직행했더라면 몰랐을 것인데 이 마을이
늙은 나그네에게 큰 실망을 주었다.
"이 곳 휴게소(정자)는 덕명마을 주민을 위한 시설물이므로 외지인은 사용을 삼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덕명마을청년회' 이름의 알림판이다.
이 무슨 해괴한 '알림' 이며 이런 못나고 덜 떨어진 청년들, 머리와 가슴이 이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젊은이들이 이끌 마을이라면 이름 덕명(德明)부터 바꿔야 할 것이다.
덕이란 찾아볼 수도 없으며 밝기는 커녕 어둡고 음산한 마을 아닌가.
전라남도 구례땅의 모든 정자에는 '무더위쉼터'라는 간판이 붙어있고 지나가는 길손을
붙들 듯 편히 쉬었다 가게 한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데 이 마을 젊은이들이 하늘에서 떨어졌는가.
"그 노인에 그 젊은이",
"과일을 보면 나무를 알 수 있다."는데 이 마을 젊은이들의 행태로 보아 늙은이들에게서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제대로 된 노인들이라면 당장에 청년들을 불러 호통을 치고 알림판을 철거하게 할 텐데
버젓이 그 자리에 버티고 있으니 말이다.
옛 풍수지리의 대가 이중환의 말을 빌리면 "농경지가 좁고 수원이 좋지 못한 지대"(고성
군지)는 사람 살만한 곳이 못된다.
그래도 여기는 고성의 상족암군립공원.
고을의 명운이 걸린 듯 군(郡)이 올인하는 고성 공룡나라다.
바다에서는 덴버의 위력이 아직 사그러들지 않았는지 여간 아닌 파고.
작은 채석강(부안 격포항)이라 불려도 될 만큼 암반과 켜켜이 싸인 기암의 해안 절벽을
돌고 방부목 계단을 통해 공룡박물관에 올랐다.
2억 3천만년 전, 중생대 초에 지구상에 모습을 드러내 약 1억 6천 5백만 년 동안 지구의
지배자로 군림했으나 백악기가 끝남과 동시에 멸종되었다는 공룡.
화석이 되어 다시 지구상에 위용을 떨치고 있는 공룡의 흔적을 우리나라에서 가장 쉽게
만날 수 있는 곳이 바로 여기 고성이란다.
국내 최초로 공룡 발자국이 발견되었으며 군 전역에 걸쳐 거의 모든 곳에서 약 5,000여
점의 공룡발자국 화석이 발견되고 있다니까.
"오비랩터(Oviraptor)와 프로토케라톱스(Protoceratops) 진품화석을 비롯해 클라멜리
사우루스(Klamelisaurus)와 모놀로포사우루스 (Monolophosaurus) 등 아시아공룡,
세계의 다양한 공룡들을 감상할 수 있게 했다"는데 무지 탓인지 별무관심인 늙은이.
오히려 시야가 사방으로 탁 트인 전망대에 올라 지호지간으로 다가오는 지리망산, 사량
도와 맑고 푸른 한려해상 국립공원에 심취하는 것이 더 낙이 되었다.
상족암으로 내려갔다.
바위가 '밥상다리' 같다 하여 상족암(床足), 또는 굴 입구 두개의 굴을 받친 바위가 다리
모양을 하고 있다 해서 '쌍족(雙足)', '쌍발'이라고도 한단다.
상족암은 전체가 층암 단애로된 수성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암벽 깊숙히 동서로 돌며
암굴이 있고 남북으로 뚫린 굴은 변화 무쌍하고 기묘하단다.
갖은 전설이 만들어지는 것이 당연한 일.
선녀들이 하강해 석직기를 차려놓고 옥황상제에게 바칠 금의를 짰던 곳.
선녀들이 목욕했다는 선녀탕과 화장한 분통, 촛대 등 여러 물형에 이름을 붙여 놓았다.
경상남도 청소년수련원을 지나 맥전포항(하일면 춘암리) 한하고 조성된 탐방로에.
내 머리가 아둔하기 때문일까 고성군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성군 뿐이냐)
이 긴 해안 탐방로를 조성한 방부목의 수명이 몇년쯤 될까.
중장비의 힘으로 지천인 바위를 쌓아 자자손손 걸으며 조상의 은덕을 칭송할 길을 만들
수 있으련만 왜 곧 골칫거리가 될 짓을 하는지.
온 난라에 만연된 이 몹쓸 병은 과연 불치병이 되었는가.
닥나무밭이 많아 이름이 '닥밭골','제전(楮田)'이 되었다는 마을을 지나는 중이었다.
닥나무가 많다면 저전(닥나무 저)이라 해야 하는데 왜 제전인가.
괜히 말 걸었다가 동네 초로 몇사람에 붙들렸다.
길가에 앉아 담소중이던 그들은 마을 이름에 이의 제기한 사람은 평생 처음이라는 것.
예사롭지 않은 노인으로 보인다며 자꾸 말을 거는 그들을 뿌리치느라 애먹었다.
그래도 하룻밤 쉴만한 곳 맥전포 정자에 대한 정보를 받았으니 공친 것은 아니다.
이웃 마을 덕명의 처사를 말했더니 그들도 혀를 차며 맥전을 추천했다.
고약한 덕명 인심에 상족암군립공원이 피본 것이다.
입암(立岩)마을과 병풍바위를 지났다.
주상절리(柱狀節理)는 마그마(magma)가 냉각 응고함에 따라 부피가 수축하여 생기는
다각형 기둥 모양의 금을 말한다.
마그마는 땅속 깊은 곳에서 지열(地熱)로 녹아 반액체로 된 물질을 말하며 이것이 식어
굳어져서 생긴 것이 화성암이고, 지상(地上)으로 분출하여 형성된 것이 화산암이다.
주상절리를 멀리서 보면 병풍을 세워놓은 것처럼 보여서 병풍바위라 부르고 돌기둥이
서있는 것 같이 보여서 입암마을이란다.
맥전포항의 단상(斷想) : 지금 행복한가
해안은 다시 막혀 산으로 난 산책로를 걸어야 한다.
고맙게도 산주(山主) 창녕조씨(맥전포거주?) 문중이 사용을 동의해서 가능한 길이란다.
개인과 문중, 종교와 기타, 불문하고 이처럼 너그럽게 문을 열어주는가 하면 철조망의
높이를 더욱 올릴 뿐더러 경고의 강도를 세게 하기도 한다.
강제할 수 없는 일이지만 도량을 가늠할 수는 있다.
군(軍)의 경계지역을 지나고, 데크 해안로를 얼마쯤 더 걸어서 당도한 맥전포(麥田浦)
초입에서는 입이 벌어지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북쪽 와룡산 향로봉에서 뻗어 내려온 줄기가 여기 바닷가에서 주산을 이루면서 동으로
하일면 입암을 경계로 청룡을 이루고,서로는 하이면 입암을 경계로 백호를 이룬 지대로
마을 앞바다에 방파제가 길다랗게 설치되어 주작(朱雀)을 이룬 형상"이라는 마을.
풍수지리상으로 그렇다 해도 농경지가 좁고 수원도 좋지 않다는 마을인데 이처럼 산뜻
하게 잘 정비된 국가어항이라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으니까.
동.서 방파제, 호안, 선양장, 동.서 물양장, 급수 급유시설 및 저온창고 등 열거하는 제반
시설에 대해서 무지무식한 늙은이가 아는 척 주절대는 것은 무례한 짓이다.
얼핏 보아도, 하일면과 하이면이 동서로 천연 바람막이가 되고 남으로만 출구가 나있는
안온한 해변이라는 느낌은 들지만.
그러나 국가어항, 지방어항, 어촌정주어항, 소규모어항 등을 가릴 것 없이 어항이란 늘
비린내 나고 다소 지저분하다는 고정관념 탓일까.
규모는 작으나 내가 본 어항중에서는 국내외를 망라해서 최고로 깨끗한 어항이다.
음악분수대를 비롯해 여유롭고 다양한 휴식공간 만으로도 늙은이는 놀랄 수 밖에 없다.
서쪽 한 귀에 자리잡은 정자도 분위기에 어울리게 일품이다.
야간의 정자 사용에 대해 살짝 떠본 노파들의 의중은 합창하듯 환영이며 저녁 식사때에
맞춰 자리를 비웠던 노파들중 몇이 식사 후에 다시 나왔다.
한 분은 먹음직스런 빨간 배추김치를 중쯤 되는 락앤락 통에 가득 담아 가지고 왔다.
3일은 먹고도 남을 양이며 기막힌 맛이지만 배낭 안에서 무더위를 이겨내겠는가.
필요할 텐데 가지고 가라하나, 아깝고 아쉽지만 돌려줘야 했는데 다른 노파가 가져갔다.
이 노파가 이날 밤 나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문화적으로 아주 업그레이드 된 시골생활인 듯 하나 사정은 그렇지 않다.
예전에는 김치가 없으면 아무집 밭에서나 좀 뜯어 담아먹을 수 있었으며 김치를 비롯해
반찬 정도는 나눠먹는 인심이었으나 이즈음은 전혀 다르다.
남의 논밭을 출입했다가는 절도죄로 몰리고 곤욕 치르기 십상이다.
문화라는 괴물이 사람의 따스하고 편안한 정을 빨아먹는 불가사리라 그렇게 된 것이다.
소위, 문화생활을 하려면 시루에 물붓기식 돈이 필요한데 우리의 전통적 인정까지 모두
돈으로 환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도농이 동시 생활권이 됨으로서 가장 큰 지출과목이 교통 통신비와 여가생활비다.
활동 수대로 차가 있으며(다는 아니지만) 하나같이 모바일에서 스마트폰으로 바뀌었다.
아웃도아 시장은 등산복에서 자전거, 오토캠핑으로 전이되고 있는 추세다.
자전거 장비와 복장, 오토캠핑의 제 장비를 기죽지 않게 갖추려면 거금이 들어야 한다.
대도시와 달리 시골은 작은 집단이기 때문에 이웃간의 경쟁도 치열하다.
현실을 거부할 수 없다면 전통적인 선린관계를 버려야 한다.
문명은 창조가 아니고 개조일 뿐이다.
그것(끊임없는 개조)이 인간생활에 기여한 것이 사실이지만 과연 지금도 그런가.
전쟁 억지라는 명분으로 발달하는 무기는 전쟁을 부추기고 있다.
IT(Information Technology)산업은 인간의 일상을 편리하고 윤택하게 하기 위해 개발
한다는 명분과 전혀 반대로 그것 때문에 인간은 바보로 전락중이다.
유선전화에서 시작한 음성 통신기기가 지금은 인간에게 어떤 물건인가.
네비게이션이 등장해 인간을 길치로 만든지 수년에 그 공장이 문을 닫아야 한다.
스마트폰(smartphone)이 대신 하니까.
필름을 대신한 디카(digital camera)도 스마트폰이 밀어내고 있다.
바야흐로 지능 통일천하를 이룬 스마트폰이 인간의 삶을 지배하고 인간은 그것에 의존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포스트(post) 스마트폰 시대는 어떤 괴물이 이어가며 언제쯤이 될까.
양대 산맥의 사활을 건 전쟁으로 미루어 아마도 곧 도래할 것이다.
물량의 재고(dead stock)가 늘기 전에 그래야 하니까.
기억이 필요없기는 이미 오래 전 일이고, 눈과 손으로만 하다가 말만 하면 다 되고, 말도
필요치 않고 의중을 알아서 다 처리해 주면 무엇이 인간의 낙으로 등장할까.
당장, 스마트폰이 일제히 스톱한다면 가장 쇼킹한 뉴스는 자살자 속출일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문명의 이기가 아니고 인간에게 치명적인 도구요 재앙이다.
그것들 덕에 인간의 삶이 윤택해지고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인간의 정서를
교란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