省略.
요즘에는 덜 쓰이지만 예전에는 책이나 문서를 보면 이 ‘생략’이라는 단어가 자주 나왔다. 중략(中略), 하략(下略)이라는 말도 종종 쓰였다. 예전에는 한자를 드러내 썼지만 지금은 그냥 음으로 쓰는 경우가 더 많다.
‘생략’의 생(省)은 성찰(省察), 반성(反省)과 같이 대부분 ‘살필 성’자로 쓰인다. 그래서 省略이라고 쓰인 걸 보면 ‘성략’이라고 읽어야 할지 ‘생략’이라고 읽어야 할지 헷갈릴 때가 있다. 같은 글자가 ‘살필 성’과 ‘덜 생’자로 뜻이 아주 다르고 음은 비슷해서 생기는 문제다. 한자의 묘미이기도 하지만, 부적절한 자리에서 혼동하면 망신을 살 수도 있다.
박상률의 청소년 소설 [봄바람](사계절)을 읽다보니 재미난 장면이 나온다.
방학이 끝날 무렵이면 누구나 그렇듯, 이 소설의 주인공인 초등학교 6학년 훈필이도 밀린 숙제에 매달린다. 더구나 짝사랑하는 옆집 은주가 방학책을 빌려달라고 하지 않는가. 밤을 새워 방학책을 푸는데, 도저히 알 수 없는 문제가 있다.
나는 괄호 넣기 문제 때문에 끙끙 앓았다. 몇 개는 앞뒤 문장을 봐서 적당히 말만 되게 엮어서 채웠다. 그래도 안 되는 것이 몇 개 남았다. 그건 할 수 없이 빈 칸으로 남겨 두기로 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머리를 휙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맞다! 바로 그거다!”
언젠가 학교에서 일제 고사를 치르고 나서 채점을 할 때 담임 선생님이 가지고 있던 모범 답안지에 ‘생략’이라고 쓰여진 칸이 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던 것이다.
아, 살았다! 괄호 넣기 중 어려운 것은 대부분 ‘생략’이 답이다! (줄임)
나는 ‘생략’이라는 말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볼 겨를도 없이 곧바로 비어 있는 괄호마다 ‘생략’이라는 말을 꾹꾹 눌러 가며 열심히 써 넣었다.
마침내 나는 의기양양해하며 은주를 기다릴 수 있었다. (100~101면)
모범 답안에 ‘생략’이라고 되어 있으니 답이 ‘생략’이라는 것인가, 답을 ‘생략했다’는 것인가? 하여간 훈필이의 머리가 기발하게 돌아갔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생략’의 뜻을 알았던 아이들이 얼마나 될까? 일제 시대도 아닌데 왜 늘 일제 고사만 보고, 국산 고사는 없는가.
생략, 중략, 하략, 이하 생략 등은 다른 글을 따올 때 많이 쓰인다. 옛날이야 누구나 다 이렇게 썼고 한자를 노출해 쓰는 글에서는 이런 표현을 쓸 수밖에 없었지만, 요즘 대중적인 글에서 이렇게 쓰면 고리타분하고 어색하다. 물론 …와 같은 부호로 대신하기도 하는데, 부호는 경우에 따라서는 원래 문장에 있던 것으로 혼동될 우려도 있다. 그래서 뭐라고 바꿀까 생각해보니 ‘줄임’ ‘중간 줄임’ ‘아래 줄임’ 같은 것이 생각난다. 그런데 굳이 ‘중간 줄임’ ‘아래 줄임’같이 쓸 필요가 있을까? 줄였다는 말이 들어 있는 대목에서 줄인 것이니까, 구태여 중간이니 아래니 뒤니 앞이니 하고 붙여줄 필요가 없다. 그냥 ‘줄임’ 해버리면 간단하고 분명하지 않은가.
위 인용문 중에도 중간에 한 문장을 ‘생략’한 곳이 있어, 중략(中略) 대신 ‘줄임’을 넣었다.
*
[봄바람]의 훈필이는 ‘괄호 넣기’ 문제 때문에 끙끙 앓았는데, 나는 이 ‘괄호 넣기’의 ‘괄호’라는 말을 몰랐다. ‘괄호’란 말이 책에 쓰여 있었거나 선생님이 칠판에 써주었더라면 사전을 찾아서라도 해결했을 것이다.
※선생님이 (4×6)÷8=3을 쓰면서
“자, 가로 열고 4 곱하기 6, 가로 닫고, 나누기 8 니꼬르는…… 3이니까……”
산수 시간에 늘 ‘가로 열고’ ‘가로 닫고’가 나왔는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가 왜 “가로 열고”가 되고 ‘)’가 “가로 닫고”가 되는지 알 수 없었다. =는 또 왜 ‘니꼬르’ ‘니꼴’ ‘니콜’인지 아리송하기만 했다.
아무도 가끔 한번쯤 ‘괄호’라고 정확히 발음하는 사람이 없었고, ‘니꼬르’는 equal이라고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다. 글쎄, 다른 아이들이 나보다 크게 명민하지도 않았으니 적어도 십중팔구는 나처럼 아리송하게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절 도대체 아이들은 수업시간에 질문을 하는 적이 없었다.
하긴 그렇다고 해서 무슨 일이 벌어지거나 크게 곤란을 당한 적도 없다. 그리고 중학생 때인지 고등학생이 때인지 모르지만 그 말뜻도 자연히 깨치게 되었다.
괄호는 ‘묶음표’라고 한다. “묶음표 열고” “묶음표 닫고” 하면 어색하니까, “4×6을 (괄호로) 묶고, 8로 나누면 3이다”와 같이 써도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