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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고잔평강교회 New 원문보기 글쓴이: 훈훈한님
관상기도의 의식의 흐름과 치유
권 명 수(한신대학교 교수 / 실천신학 / 목회상담학)
“보아라, 내가 문 밖에서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계 3:20, 새번역)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요 7:38)
■ 초 록 ■
이 논문은 한국 그리스도교에서 요즘 관심이 증가하고 있는 관상기도의 내용을 일별하고 침묵 가운데 가슴으로 기도하는 신자의 의식의 변화를 연구하였다. 이 기도는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하나님께 간청하거나, 주님의 뜻을 명상가운데 성찰하는 기도와는 다른 형태의 기도이다. 관상 기도는 주 앞에서 이미지나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마음으로 주님을 지향하는 기도이다. 곧, 침묵 가운데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품안에서 쉬는 기도라고 할 수 있다.
주 앞에서 침묵으로 언어, 개념, 이미지 없이 기도하는 신자의 의식에는 다음과 같은 5가지 의식의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첫째는 표면적 의식의 단계이다. 주 앞에 앉아 있으면, 평상시의 생각들이 밀려오고 감을 보게 된다. 둘째 단계는 그러다가 특정한 생각이나 아이디어, 이미지에 끌림을 발견하게 된다. 셋째 단계는 평화 속에 머무나, 사고나 감정에 동의하게 된다. 넷째 단계는 평화 속에 있으나, 원하지 않는 사고들을 의식하는 단계이다. 마지막 다섯째단계는 무의식이 풀리며 배설되는 역동적 단계에 다다르게 된다.
이상의 단계들은 사실 엄밀한 구분이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크게 편의상 개념적으로 구분해본 것이다. 그러나 오랜 기도를 해본 사람이면 누구나 인정하는 것이 자신의 내면의 변화를 느끼며, 점점 평화를 맛보게 되면서, 자신의 내면의 어두운 면들이 올라오며 치유를 경험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키딩은 신적인 치료라고 말한다. 이같은 효과는 현상적으로 유사한 ‘마음챙김’에서도 관찰되고 과학적 연구가 활발히 시도되고 있다. 복잡다단한 현실에서 이같이 의식의 변형에 기여하는 기도가 많이 소개되고 수련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주제어
관상기도, 향심기도, 치유, 의식의 흐름, 영성 지도.
Ⅰ. 들어가는 말: 기도란?
관상기도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서는 먼저 기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래서 ‘기도란 무엇이냐?’는 질문에 여러 가지 대답이 있을 수 있다. 가장 자주 듣게 되는 대답은 ‘하나님께 인간의 간구와 소원을 아뢰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이 하나님께 간구하는 측면이 잘 드러내준다. 한국의 그리스도교인은 세계에서 가장 열심히 기도하는 민족이라고 알려져 있다. 수요기도회, 새벽기도회, 심야기도회, 철야기도회, 특별기도회 등 여러 기도회들은 신자가 소망하는 내용을 주님께 간청하는 모임들이다. 이런 여러 기도회들은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측면은 부각되고 있으나, 하나님의 활동의 영역이 간과되어 있어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간청하는 기도에 응답하시고, 찾아오시는 측면이 드러나지 않는다.
또 다른 기도 이해는 ‘하나님과의 대화’이다. 이 기도 이해는 인간과 하나님께서 서로 말을 주고받는 쌍방적인 대화를 강조한다. 신자가 하나님께 간청하는 상향식의 대화와, 이런 인간의 간구에 찾아오셔서 응답하시는 하향식 대화의 측면이 필요하다. 이 하향식 측면의 기도에서는 인간의 간구기도에 대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응답을 기다리며 경청과 순종하는 면이 강조된다. 첫 번째 기도 이해에서 부족한 측면을 대화적 기도 이해에서 보충해준다. 기도가 하나님과의 ‘대화’라는 말은 신자가 주님께 아뢰는 측면과 주님께서 인간에게 사랑으로 응답하시는 측면인 양자 간의 쌍방 통행적 특성이 잘 드러나는 기도라야 한다.
기도를 열심히 많이 하기로 소문이 나있는 한국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부족한 면은 기도의 두 번째 측면인 주님께서 인간에게 찾아오셔서 인간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말씀을 기다려 듣고 순종하는 청종의 부분이다. 온전한 대화는 쌍방이 적절하게 주고받아 서로의 이해를 높이는데 있다. 주님은 인간을 사랑하셔서 신자들에게 해주시려는 내용들이 많이 있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다(계 3:20). 한국 그리스도교인은 청종의 부분에 대한 관심이 보다 많이 요청된다. 그래서 온전한 기도란 두 측면이 조화롭게 공존하여 양쪽의 대화가 잘 소통되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Ⅱ. 관상기도란?
관상기도를 다루기 전에 관상에 대한 간략한 논의가 필요하다. 관상(觀想)이란 말은 ‘마음의 상을 바라본다’는 뜻이다. 곧 조용히 눈을 감고 호흡을 가라앉히며 있노라면 마음 속에서 여러 가지 생각, 영상, 정서들이 움직인다. 그래서 마음 속에서 떠올라 의식 속에 인지된 대상을 글자 그대로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관상은 영어로 contemplation이다. 영어 앞 단어인 con은 ‘함께’ ‘강하게’라는 뜻이고, 뒤의 temple은 ‘관찰하기로 표시된 특별한 장소’ ‘성전’ 등의 뜻이다. 이 단어의 뜻은 ‘주의를 기울여 집중적으로 바라보고 관조하기 위한 구별된 지역이나 장소’를 의미한다. 그리하여 관상은 대상에 주의를 기울여 바라보는 행위를 통해 그 대상과 일치를 이루어진 상태를 의미한다.
이러한 상태는 교회 역사상 여러 영성 전통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크게는 긍정(kataphatic) 전통과 부정(apophatic) 전통을 통해서 관상 상태에 도달하려 한다.2) 긍정 전통에서는 언어와 이미지와 논리를 통해서 주님과의 일치된 상태를 지향한다. 성경, 주님의 말씀, 자연 등을 들고 있다. 이 전통은 그리스도교 역사에 주류이며, 대세를 이루고 있다. 이에 비해 부정 전통은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나 상을 통해서 하나님과 일치를 지향하기 보다는 이런 것을 비우고 수동적인 상태에서 직관적으로 주님과의 일치를 지향한다. 이 전통은 제도권 교회에서 그리 유력한 목소리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깊은 신앙심을 갖고 주님과의 일치와 헌신을 지향하는 신자, 수도자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신앙생활의 방편이 되었다. 독자들 중 일부는 이미 예상했다시피, 필자가 말하는 관상기도는 비우는 기도인 부정 전통의 기도를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전통에 익숙한 상상적, 사색적 전통의 기도를 해온 신자들은 비우는 스타일의 부정 전통의 기도에 대해 부정적 시각이 존재하고 있다.3)
그래서 관상과 관상기도를 구별해야 한다. 관상 기도를 통해 관상상태를 지향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신앙심 깊은 여러 영성 전통에서 모두 자신들의 영성훈련이 관상를 목표로 하고 있다고 말한다. 곧, 그들의 영성을 통해 주님과의 일치를 목표로 하는 관상 상태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관상기도를 논의할 때, 해당 영성전통의 뿌리가 어디에 있으며 어느 방편을 통해 관상을 지향하는지를 유의해서 분별해가며 논의해야 혼란을 미리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과 같은 관상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관상기도란 호칭에 대해 살펴본다. 한국영성치유연구소 소장인 이만홍은 관상기도를 묵상(?想)기도라고 부른다. 관상이란 용어가 ‘동양 종교적’ 어감이 있기에 이를 배제하기 위하여 개혁주의 교회 전통에 친숙한 ‘묵상’기도라고 부르기를 제안한다.4) 또한 관상기도를 침묵기도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 이유는 관상기도는 입으로 소리 내어 간구하거나, 마음으로 주님께 간구하는 등의 행위를 하지 않고, 침묵 가운데 머무르며 주님께 마음 문을 여는 행위를 지칭하기 때문이다. 또한 관상기도를 ‘명상’기도로 번역하기도 한다. 이는 뭔가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는 것에서부터 눈을 감고하는 것까지를 포함한다.5)
관상 전통의 수도회에 속한 키딩과 페닝턴은 위에서 논의한 부정 전통의 기도를 향심기도로 부른다. 향심기도란 영어의 centering prayer를 번역한 말로서, 혹자는 ‘집중기도,’ ‘구심기도’로 옮기기도 하였다. 센터링 기도는 인간 존재의 중심에 계시는 그분을 지향하는 기도 또는 중심을 지향하는 기도라는 의미이다. 감리교신학대학교의 권희순은 키딩이 말하는 기도를 ‘센터링 침묵기도’로 옮기고 키딩의 관상기도 입문서의 동일한 책을 “센터링 침묵기도”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6) ‘센터링 침묵기도’란 인간 존재의 중심에 계시는 그분을 향해서 침묵으로 행하는 기도라는 의미에서다. 이상과 같이 무슨 말로 이 기도를 표명하든 이 기도는 전통적으로 행해져 온 인간의 의지와 논리를 사용하여 인간의 실존적 소망을 하나님께 간청하는 기도와는 다른 형태의 기도이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 인간의 의지적 노력에 초점을 두기보다는, 침묵 가운데 “모든 생각을 내려놓고” 오직 마음(heart)으로 주님을 향하여 행하는 기도를 말한다.7) 현재 한국 그리스도교계에서는 ‘관상기도’에 해당하는 기도를 위와 같은 여러 이름으로 말하고 있으나, 필자는 현재 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적절한 어휘를 발견할 수 없기에, 전통적으로 사용해오던 ‘관상기도’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왜냐하면, 키딩은 향심기도를 관상기도에 이르는 사다리의 첫 계단이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8)
그래서 필자가 이 논문에서 다루고 있는 관상기도는 언어와 이미지를 사용하여 기도하는 긍정적 전통이 아니라,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려는 기도이다. 다시 말해 이 기도는 인간의 이성을 사용하여 하나님께 간청하는 행위라기보다는 아무런 노력 없이 주님의 품안에 머물러 ‘하나님 안에서의 쉼’을 누리는 기도이다. 이 상태에서는 하나님을 능동적으로 찾지 않더라도 하나님을 경험하고 맛보기 시작한다.9) 관상기도는 내 존재의 근원에 계신 분과의 일치를 통해 그분과 템포를 같이 하려고 하는 시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신자가 개인의 욕망에 부양하기 보다는 이를 비우고, 그분의 뜻에게로 “지향”(intention)하여 그분의 뜻으로 수렴과 일치가 되도록 추구하는 기도라고 말할 수 있다.10)
이처럼 관상기도는 영성 전통에 따라 의미하는 바가 여러 가지로 표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본 논문을 통해서 연구하려는 관상 기도가 의미하는 바는 인간의 소망을 언어로 하나님께 간청하는 기도라기보다는, 신자의 마음을 주님께로 향하여 그분과 일치를 지향하여, 신자의 영혼에 그분께서 임재 하시어 활동하시도록 하려는 기도이다.
1. 관상기도와 일반 기도와의 차이점
필자는 위에서 다룬 내용을 아빌라의 데레사가 경험적으로 고백한 기도의 7궁방을 간략하게 아래의 3가지로 분류한다.11)
1) 구송(口誦) 기도(vocal prayer)는 소리를 내거나 마음 속으로 인간의 의사를 주님께 간청하는 기도이다.
2) 명상(meditation) 기도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영성수련의 일종으로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Q.T가 이 수준에 해당한다고 본다.12) 기도를 함에 있어 인간의 이성을 적극적으로 사용한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어떤 사람은 meditation을 ‘묵상’으로 번역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필자는 meditation은 명상, contemplation은 관상으로 번역어가 자리 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두 기도는 기도자가 능동적이냐 수동적이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앞에서 논의한 두 기도는 인간의 간구와 청원의 성격이 강한 기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귐의 기도로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응답을 경청하는 단계의 기도는 다음의 관상기도라고 할 수 있다.
3) 관상 기도(contemplative prayer). 이 말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며 ‘하나님 안에서 쉼’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과정을 거쳐 주님과의 일치(communion, 친교, 합일)를 지향한다. 관상기도를 이야기할 때 관상 기도와 관상 상태를 구별해야 한다. 관상기도는 주님과의 친교를 지향하는 기도라고 한다면, 관상 상태는 관상기도나 기타 다른 신앙 활동으로 인해 주님과의 일치나 친교의 상태가 유지된 현상을 말한다.
관상 기도의 단계를 크게 둘로 구분해 볼 수 있다.13) 첫째는 능동적(active) 관상기도이다. 이 기도는 신자인 우리가 의지력으로 시간을 들여서 주님께 나아와 하는 기도를 말한다. 관상기도를 한다고 말하는 대부분의 신자는 이 단계에서 관상기도를 수련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둘째는 주부적(infused) 관상기도이다. 이 기도는 능동적 관상기도를 수련하다 보면, 어느 땐가는 기도자가 의식적으로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는데도 기도가 영혼 깊숙이 들어가고 거기에 머물러 있을 때가 있다. 또는 기도 중에 은혜가 밀려오는 파도처럼 퍼부어주심을 경험하는 때가 있다. 곧 기도자의 의지적 의도보다는 수동적인 자세에 있음을 말한다.
이와 같은 기도의 단계와 종류를 크게 구분해서 다뤄보는 것은 필자가 다루려고 하는 관상기도 속의 의식의 흐름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관상기도는 단순하게 말해서, 인간의 자아 의지로 원하는 바를 간구하는 수준과, 이성을 통해 성찰하는 단계의 명상 기도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임을 밝히는 것이다. 이런 구별은 관상기도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관상기도를 하고 있는데, 내용적으로는 구송기도인 간구기도를 하고 있든가, 아니면 명상기도를 하고 있는 경우가 흔히 있음을 많이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은 관상기도를 하고 있다고 침묵 가운데 있으면서 머물러 있을 때, 의식의 여러 작용에 의해 어떤 때는 소리 내어 말은 하고 있지 않지만 간구기도를 하고 있을 수 있으며, 어떤 때는 특정 대상에 대해 사고하며 성찰하는 명상기도를 하는 경우가 있을 수가 있다.
이러한 현상은 관상기도 과정에서 너무나 흔히 일어나고, 전문적 식견과 경험이 있는 지도자와 함께 하지 않고, 관상기도와 관련된 몇 권의 서적을 읽고 기도를 실천할 때에 부딪히게 되는 현상이다. 이러한 현상에 부딪히게 되면 기도의 처음 기간에는 얼마간 열심히 진행해 가다가, 별다른 진전이 없이 비슷한 현상이 반복되게 되며 시간이 지날수록 오래 기도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에 대한 사전적 이해와 일반적 기도와 관상기도와의 차이에 대해 개념적으로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2. 관상기도와 명상의 차이
관상기도가 새로운 영역이면서 영혼의 은밀한 곳에서 이루어지는 기도이기에 이것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이해하기 쉽지 않다. 또한 외면적으로는 동양 종교의 수행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 오해와 혼동하기 쉽기 때문이다. 관상 기도를 대중적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게 공헌한 키딩은 관상과 관상 아닌 것을 간단하게 몇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키딩은 불교나 동양 종교의 명상과 관상을 분명하게 구별하고 있다.
키딩은 그의 책 “센터링 침묵기도” 1장에서 ‘관상과 관상이 아닌 것’을 분명하게 구별한다. 그는 관상은 첫째로 긴장해소 훈련이 아니다. 곧, 동양에서 행해지는 명상의 일종인 요가, 천천히 달리기, 초월적 명상(Transcendent Meditation)이 아니라고 본다. 이것들은 마음의 휴식이나 긴장을 완화하는 효과를 목표로 한다. 키딩은 ‘센터링 침묵기도’(또는 향심기도)는 관상 기도라는 사다리의 ‘첫 다리’로 본다.14) 필자는 또한 센터링 침묵기도(또는 향심기도)는 관상 기도의 첫 사다리이자 첫 단계라고 보기에, ‘향심기도’ 또는 ‘센터링 침묵기도’라는 용어 대신에 ‘관상기도’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둘째, 관상은 은사(charismatic gifts)가 아니다. 관상기도의 선물은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한 것이다. 이 기도는 믿음, 희망, 사랑의 성장을 깊게 해주며, 영혼의 실체와 그 기능들의 정화, 치유, 성화를 도와준다. 이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순수한 믿음의 수준에 까지 이르도록 해주는 방법이다. 순수한 믿음이란 내 자아가 관여하여 지적인 토론을 주로 하는 명상의 수준을 넘어서는 것을 말한다.
셋째, 관상은 초현실적인 현상적 경험이 아니다. 관상은 어떤 현상이 생기기 전에 알게 된다든지, 멀리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안다는 것과 같은 소위 예시의 은사나, 육체이탈경험, 초감각 심리 경험 현상들인 몸 밖의 경험(out of body experience), 또는 죽음에 임박한 경험(death experience)이 아니다. 심령의 선물이 “케이크 위의 아이스크림”과 같다고 말하는 것처럼, 이러한 선물을 가지게 되면 당사자는 겸손해지기 어렵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전통의 영성지도자들은 이러한 선물을 가능한 한 피하도록 권면하고 있다.
인격의 변형(transforming)이 일어나는 성숙 과정은 심리적 신비 경험이나 능력 그 자체 보다는 신앙, 소망, 신적인 사랑의 성장에 좌우된다. 관상 기도는 이러한 3가지가 자란 열매이고 이것들을 더 나아가게 한다. 이에 비해 심리적 경험이나 능력은 하나님과의 거룩함이나 하나님과의 관계의 성장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러한 것들을 영적 발달의 표징으로 보는 것은 오해(mistake)이다.
넷째로, 관상은 신비 현상이 아니다. 신체탈혼, 내적 환시, 외적 말씀, 상상으로 주시는 음성, 사람의 영 안에 새겨주시는 말씀 등이 아니다. 순수한 믿음만이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가장 지름길이다. 신자는 관상 기도를 통해 주님과의 일치를 지향하는 것에 일차적 관심이 있지, 심리적·신체적 느낌이나 경험에 쏠리게 되면, 목표를 잃어버리기 쉬움을 기억해야 한다.
이상의 진술을 종합하면, 관상기도 중에 경험하게 되는 관상 기도의 체험과 관상 기도 그 자체와 동일시하지 않아야 한다. 관상기도의 정수는 관상 기도를 하면서 무슨 체험적 경험을 했느냐가 아니라, 주님이 기도자 안에 내재하신다는 것을 순수한 믿음으로 믿고 순종하며 나아가는 데 있다. 관상기도 중의 체험은 하나의 부산물과 같은 것이지 관상기도의 본질과는 거리가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인간의 체험이나 인식능력으로 영혼에게 다가오는 ‘빛’을 평가하는 것은 어렵다. 그래서 키딩은 인간은 우리의 “삶 속에서 맺어진 열매를 보고 그 현존을 짐작할 뿐”이라고 단언하고 있다.15)
Ⅲ. 관상기도 속의 의식의 흐름
1. 의식의 흐름의 5단계
관상 기도 중에 일어나는 의식의 현상에 대한 연구가 아직 초보의 수준에 있다. 왜냐하면 기도 중에 나타나는 의식의 변화의 추적 연구와 관찰이 용의치 않아 이 분야에 대한 연구사가 짧기 때문이다. 그러나 점점 관상기도와 같은 수동적 기도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또한 동양 명상에 대한 경험적 연구가 상당한 수준에 이르고 있어 이 분야의 앞날이 밝다. 필자의 글이 이 분야에 관심을 환기시키고 대화를 위한 자리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필자는 관상기도의 의식의 흐름에 대해 키딩의 저술을 중심으로 다룰 것이다. 키딩은 관상기도 가운데 일어나는 의식의 변화를 크게 5가지 단계로 구분하고 있다. 이같은 구분은 자의적인 면이 강하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식 속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기도의 영역을 개념적으로 선을 긋고 나누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상기도를 오랫동안 수련해온 신자들은 기도하기 전과 후의 의식 상태의 변화를 확연하게 체험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관상기도의 심층적 이해를 위해서라도 의식의 흐름을 분석하고자 한다.
1) 표면적 의식의 단계
이 단계는 일상적 의식의 영역에 속하며, 관상기도의 초기에 일어난다. 키딩은 이 단계에서의 의식의 활동은 일상적이며 산만하게 움직이는 상상과 같은 것이라고 이해한다.16) 인간은 특정 대상을 의지적으로 의도하지 않는데도, 그 스스로 나름의 생각을 만들어내고 상상의 나래를 펴게 만들기도 한다. 이 수준의 의식은 보통 인간이 정상적으로 눈을 뜨고 일상적인 일들을 처리한다.
우리가 관상기도를 처음 시작할 때 경험하는 의식의 수준이 바로 이 단계이다. 눈을 감고 조용히 기도하고 있으면 일상생활을 하며 해결해야 할 것, 고려해야 할 것들을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이렇게 쉼 없이 이런 저런 생각들이 쉼 없이 일어나는 의식의 활동을 어떻게 하면 잠잠하게 할 것인가가 관건이다. 그러나 신자는 관상기도 중에 외적 침묵을 통해 언어적 표현인 말을 하지 않고 조용히 점점 내적 침묵으로 젖어들려고 추구한다. 인간의 마음에 여러 가지 생각과 사고로 채워져 주님께서 임재하시기 어렵게 된 상태에서, 영혼이 빈 그릇이 되어 주님을 초청하기 위해서 침묵하는 것이다. 사람은 외적 침묵을 통해 내적 침묵으로 진전되어 가기 때문에, 관상기도의 진보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의식의 활동을 침잠시키는 길고도 먼 수련의 단계를 거치게 된다.
2) 특정한 사고나 감정에 끌리는 단계
둘째 단계에서는 위와 같은 첫 번째 의식이 통제되지 않고 자율적으로 무수히 오가는 생각, 영상, 감정들을 인식하는 것 보다 한 단계 더 내려간다.17) 관상기도를 수련하면서 내면에 소음도 있지만, 얼마 되지 않아 기도하는 습관이 점점 형성되기 시작하면서 내적인 소음이 줄어들게 된다. 이 단계에 이르기 전에는 기도자가 자신의 의식 세계에 무수히 많은 생각과 이미지들의 소음들이 자신의 영혼을 차지하고 있음에 놀라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관상 기도를 하노라면 의식의 흐름에 관심이 끌림을 발견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기도자의 생각에 의미가 있었던 생각이나 감정들이 나타나고 끌리게 된다. 그러면서 특정 대상에 기도자의 호·불호를 느끼게 된다. 관상기도는 이러한 내적 반응이 일어나거나, 일어난다고 해도, 이에 휘둘리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왜냐하면, 감정이 수반된 사고는 “하나님의 현존의 신비 속에서 하나님을 갈망하며, 갈망하는 마음을 배양하려는 기본적인 의도에 방해”되기 때문이다.18)
키딩은 이 같은 의식의 현상을 강 표면과 강 자체라는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19) 기도자는 기도 중에 행하는 일을 인간의 주의력을 강 표면이나 강위의 배들에서 강 자체에 돌리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기도자가 강 위의 배나 배 속의 내용물에 관심을 갖게 되고, 배 위에 오르고 싶을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이런 생각의 활동은 내면의 깊은 침묵을 지향하려는 영혼의 의지를 방해한다. 관상기도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기다리는 태도를 유지하며 외적 침묵인 말을 하지 않고, 조용한 곳을 찾아 외부적 침묵을 유지하여 내적 침묵에 이르려고 한다. 곧, 강 위의 배나 물의 흐름에 신경을 쓰기 보다는, 강 자체에 관심을 돌리려고 한다. 강 자체인 “하나님의 존재에의 참여”하려고 하는 것이다.20) 인간의 내적 침묵을 통해 침묵이 깊어질수록 하나님은 기도자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의 내면에서 심오하게 역사하시게 된다.
위의 1-2단계의 기도는 개념적으로 구분할 수 있으나 실제적으론 구분이 쉽지 않다. 왜냐하면 관상기도를 하기 위해 자리에 앉아 기도를 시작하게 되면 표면적 의식과 특별한 사고나 감정에 끌림의 단계가 서로 중복되는 면이 발생하는 때가 많기 때문이다. 관상기도의 초기에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현존하시고 활동하시길 희망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기다리는 태도를 부드럽게 형성하는 단계로서 기도자의 자세는 하나님을 지향하나, 의식은 여전히 정화되지 않은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21)
3) 평화 속에 머무르나, 사고나 감정에 동의하는 수준.
위 두 번째 단계의 영역에서 어떤 특정한 생각, 영상, 느낌을 대면하면서 특정 대상에게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그리고는 자신도 모르게 그런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실제로 침묵가운데 기도를 하다보면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나게 된다. 그래서 기도자가 이런 자신의 관심을 끄는 사고, 감정, 영상들에 동의하는 일이 일어난다. 비유적으로 강위의 배를 보고, 배에 타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배에 올라타게 되면, 관상기도자는 배와 함께 떠내려가게 되는 것이다. 의식 속에 일어나는 사고와 감정에 이끌러, 이들이 이끄는 대로 어디론지 흘러가게 된다. 이렇게 되면 기도자는 비록 관상기도 중에 있다고 해도 관상기도가 지향하는 내적 침묵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으며, 외적 침묵 가운데 있는 것같이 보인다고 해도, 내면에서는 외적 소음에 파묻히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관상기도 중에는 이상과 같이 기도자를 유혹하는 것들이 여러 가지 존재한다. 이런 것들 중에는 멋진 생각들이나 통찰, 훌륭한 문제 해결방안들이 떠오르는 것이 포함된다. 이런 생각이나 통찰들은 주로 영혼이 깊은 평화 속에 들어가 있을 때 일어난다. 이것들은 마치 낚시의 미끼처럼 강한 유혹을 야기한다. 기도자에게 이런 것들은 강한 영적 위안으로 다가오기에 유혹을 물리치기가 쉽지 않다. 키딩은 이런 영적 위안이 “하나님의 현존의 빛”에서 나온다고 말한다.22)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영적 위안이 곧 하나님 현존이 아님을 유의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같은 평화는 영혼에게 깊은 휴식을 제공한다. 여러 해 동안 수련을 하고 나면 “고요와 쇄신된 기분과 안식의 깊은 감각”으로 들어가게 된다.23) 비록 몸이 대단히 피곤한데도 관상기도를 하고 나면, 마음과 몸이 쇄신됐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그래서 육체가 잠자는 것보다 더 큰 정도의 휴식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이 상태에서는 2단계에서 원했던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갈망이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감각”을 경험하는 단계로 나아간다.24)
4) 깊은 평화 속에 원하지 않는 사고들을 의식하는 상태
이 단계에서는 꾸준한 침묵의 수련으로 내면의 깊은 평화에 둘러 쌓여있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키딩은 이 단계에서 “빛나는 어둠과 같은 일종의 신비한 충만함이 우리를 감싸고 그것이 의식 속으로 스며드는 것처럼 보인다”고 이해한다.25) 그러면서도 어렴풋이 기도자 자신이 원하지 않는 사고들을 의식하면서도 깊은 고요함을 즐길 수 있는 상태이다. 이런 상태에서 기도자는 내적 존재가 부드럽게 기름을 바르는 것처럼 빛과 사랑에 잠기는 경험 외에 다른 어떤 것도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 수 있다. 이것은 마치 복음서에 나오는 변화 산상의 제자들이 산 아래 내려가고 싶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이 단계에서는 내적 침묵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 너무나 좋게 경험된다. 키딩은 이런 경험을 하나님께서 인간의 심령에게 커다란 입맞춤을 하고 계시며, 동시에 인간의 모든 상처와 의심, 그리고 죄책감의 치유가 일어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렇게 치유가 일어나는 상태를 인간은 인식하지는 못하지만 주님으로부터 신비롭게 사랑을 받는 체험을 경험하게 된다. 이렇게 긍정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함으로써 인간의 “두려움, 실수, 죄악들이 용서받았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26)
넷째 단계의 의식에서는 깊은 평화와 고요의 경험 속에서 사고 활동이 일어나지 않음을 경험한다. 키딩은 평화 속에서 아무 것도 사고하지 않는 “무념의 상태”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27) 키딩은 바로 이곳이 관상 기도가 지향하는 곳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무슨 경험을 하든지 이를 성찰하려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이 상태를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키딩은 이집트의 성자 안토니의 말을 인용하여 진정으로 “완전한 기도는 자신이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기도”라고 강조하고 있다.28) 그러나 이런 완전한 기도의 상태에서 자신이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를지라도 성령께서는 기도자 안에서 역사하고 계신다. 성령의 감동을 받는 삶이 이 세상에서 새로운 존재가 되는 길이다.
5) 무의식이 풀리며 배설되는 역동적 단계.
이 단계에서 내적 정화작업이 역동적으로 일어난다. 그래서 어릴 적 성장 과정을 통해 겪었던 정서적 상처들로 인한 고통스런 감정들이 우리 신체와 신경계통에 깊이 저장되어 있다. 그러다가 외적 침묵으로 인한 내적 침묵이 제공하는 깊은 휴식으로 내면 속에 깊이 잠겨진 정서적 장애들이 풀리기 시작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그래서 인간 유기체의 자연적 치유 능력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키딩은 이러한 역동적 작업이 “하나님의 심리치료”(divine therapy)의 일종으로 이해하고 있다.29)
이 단계에서는 기도 중에 무의식 속에 저장되었던 정서적 쓰레기들이 사고의 형태로 우리의 의식 속으로 들어온다. 물론 이 단계에서 깊은 평화를 경험한다고 하지만, 이런 내면의 저장된 고통스런 기억들의 정화작용은 평화롭게 진행되지 않는다. 키딩은 이런 기억들을 회피하려하거나 싸워 이기려하기 보다는 단순히 수용하는 방법을 권면한다. 단순히 고통스런 기억의 사실을 수용하면서 그냥 흘러가게 내버려 두어 ‘배설’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라는 것이다.30) 다시 말하면, 침묵 속에서 행해지는 관상기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내면에서 일어나는 의식의 여러 활동들을 의지적으로 어떻게 해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오고 가게 내버려 두고 흘러가게 한다.
관상기도를 통해서 흘러들어오는 깊은 평화가 무의식 속의 정서적 장애물들을 풀어내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기도자의 인격의 어둔 부분에 대한 통찰력이 하나씩 하나씩 의식 속으로 떠오르기 시작한다.31) 이기적이었던 모습들, 어릴 적 아픔 경험들을 통해서 형성된 거짓 자아의 모습들을 보다 분명하게 인식하기 시작한다.32) 인간이 하나님의 충만한 은총이 내면에 흘러넘치도록 하기 위해서는 “내면 속에 존재하는 본능적 성향들”과 씨름해야 한다.33) 왜냐하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과거의 아픈 기억들을 직면하기 보다는 회피하여 어릴적 대응방안으로 퇴행(regression)하게 되기 때문이다. 관상기도 중에 임하게 되는 내적 평화로부터 받는 긍정적 경험과 이에 대한 신뢰가 자신의 어둔 부분들을 직면하는 용기를 제공해준다.
키딩은 4-5단계부터는 의식이 인간의 주도성을 떠나 수동성의 단계로 이전한다고 본다. 키딩은 4-5단계를 기도의 수도성의 단계라고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필자 나름의 경험과 이 분야를 언급한 영성 대가의 견해를 종합하면 사 단계부터 기도의 수동성의 영역으로 들어간다고 보아도 큰 무리가 없다고 본다. 대표적으로 아빌라의 데레사가 말한 기도의 9단계 중 5단계인 관상기도부터 기도자의 노력보다는 수동성이 점진적으로 증가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곧, 관상 기도의 본질적 요소인 초자연적 은혜가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부어지는 “주부적”(infused) 상태가 됨으로서 영혼이 점점 초자연적 생명으로 충만하게 된다는 것이다.34)
2. 영혼의 어둔 밤
지금까지는 관상기도 중의 의식의 흐름을 곧장 일직선으로 발전해가는 양식으로 기술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실제 상황에서 2-5단계가 뒤섞여서 일어나는 것을 경험하곤 했다. 관상기도 생활을 꾸준히 수련해가다 보면 3-5단계를 오가곤 했다. 그러나 개인이 내적, 외적 사정으로 관상기도를 지속적으로 수련하지 못하면 2단계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을 경험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기도의 수련을 꾸준히 해가다 보면, 영적으로 메마른 경험인 아무런 맛도 경험도 없는 단계에 들어간다고 영성 대가들은 말한다. 곧, ‘영혼의 어둔 밤’이나, ‘감각의 어둔 밤’이라고 부른다. 어둔 밤은 위의 5단계에서 어디에 속할까? 키딩은 이것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문맥으로 판단해보면, 3단계 이후의 단계부터 간헐적으로, 어떤 때는 상당히 긴 시간을 영혼의 메마름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런 시기를 십자가 요한은 ‘영혼의 어둔 밤’이라고 불렀다.
영혼은 ‘어둔 밤’의 상태에서 고통스러움을 경험하게 된다. 그 이유는 이 상태에서는 기도하는데 어려움을 겪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내적 침묵을 통해 보다 깊은 무의식으로 들어갈 때, 당신은 마치 유전을 건드려서 깊은 내용물이 치솟는 경험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을 하게 되면, 몇 달 혹은 몇 년 동안 힘든 기간을 거치게 되기도 한다.
또한 ‘어둔 밤’의 시기는 기도자에게 아무런 영적 위안이 없이 메마른 기간이 지속되기 때문에 외부의 도움이 필요한 시기이기도 하다. 다른 어느 때보다 이 시기에는 영성 지도가 필요한 시기이다.35) 이 시기에 필요한 영성 지도는 기도자가 행하고 있는 것에 대한 신뢰를 갖고 확신을 심어주는 일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주변에 자신이 경험하는 것을 이해해주고 지지해주는 사람을 찾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무엇보다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는 순수한 믿음이 요청된다. 이 상태를 오래 지나게 되면, 자신이 갖고 있는 기름이 다 말라버리는 듯한 경험을 할 수도 있다. 키딩은 이런 상태가 지속될 때 우리에게 해주는 권면은 “기도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상태가 물러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권면한다.36) 이러는 과정에서 영혼 속에 이루어지는 일은 내부의 지저분한 쓰레기들을 성령께서 그 사람에게 적절한 방법과 시간으로 치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는 다음 장에서 다루게 된다.
Ⅳ. 의식의 흐름과 치유
필자의 핵심 연구 주제는 관상기도 속의 의식의 흐름이다. 관상 기도의 효과나 치유는 관상기도 중에 필수적으로 대면할 수밖에 없는 내면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과 경험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관리하는가에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은 관상기도의 질적 발전과 기도자의 내적 성숙, 치유를 위해서 핵심적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관상 기도를 하면서 침묵 가운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분께 기도자의 마음을 두고 있으면, 기도자의 내면 속에 흘려들어오는 생각, 사고, 감정, 이미지들이 우리의 주의를 끌게 마련이다. 그러나 거기에 우리의 관심을 기울이거나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흘러 보내는 것이 효과적인 관상기도 수련에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이러한 행위 때문에 관상기도란 용어가 생기게 된 유래이기도 하다. 곧, 눈을 감고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며 의식하고 있으면 의식 속에 들어오는 여러 가지 정신적 활동의 결과들을 대면하게 된다. 키딩의 비유처럼, ‘강위의 배’를 흘러가도록 내버려두는 것이다. 이렇게 기도의 수련을 계속하다 보면, 점차로 두 가지 집중력이 동시에 발달하기 시작함을 경험한다. 곧, “피상적인 사고를 인식”하면서 동시에 “당신을 끌어당기는 신비하고 분화되지 않은 하나님의 현존을 의식”하게 된다.”37) 이 집중력의 발달이 주님의 현존에 대한 인식 능력을 향상시키며 치유를 야기한다. 그래서 이러한 능력의 향상이 일상 속에서 주님의 현존을 인식하며 이것이 곧 기도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기도는 주님을 인식하고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실제로 임상 상담을 해가며 관상기도의 실천을 적극 추천하고 있다. 내담자에게 침묵기도나 관상기도에 대해 알려주거나 또는 관상기도 웍샵에 참여하여 이를 실천하도록 권장한다. 왜냐하면 이를 실천하는 내담자들은 그렇지 않은 내담자들과 비교하여 상담의 진전 속도나 질이 눈에 띄게 빠름을 자주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아래 필자의 상담 사례를 소개한다.
50대 중반의 여성도의 딸이 결혼 후 외국에 살게 되었다. 여성도는 얼마 전 그 딸을 방문하게 되었다. 방문해서 보니, 짐작하던 대로 딸의 결혼 생활에 약간의 문제가 있음을 목도하게 되었다. 사위가 자신의 딸을 부당하게 대하여 딸이 마음 고생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엄마의 마음이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화가 나고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들었다고 한다. 그녀는 이런 마음이 들 때마다 산책을 하기도 하고, 주 앞에 나아가 침묵 가운데 관상 기도를 틈틈이 하였다.
그녀는 우여곡절 끝에 한 달 정도의 딸을 방문하고 무사히 마치고 돌아오며 흐뭇해하였다. 그녀가 스스로 보기에도 자신이 처신을 꽤 성숙하게 잘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힘들고 견디기 어려워 고통스러울 때, 평소에 하던 대로 침묵 속에서 관상기도를 행하면서 자신의 내면의 상태를 바라보며 직면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를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에 대한 지혜도 기도 가운데 조금씩 생기게 되어 어렵고 힘든 상태를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지혜롭고 적절하게 대처하게 되었다. 예전 같았으면, 마음속에 있는 말을 직설적으로 말하며 바른 소리를 하였을 것이다. 생각 같아서는 사위에게 마음껏 퍼붓고 야단치고 싶었지만 잘 참고 넘겼단다. 그녀는 “내가 정말로 많이 커졌으며 달라졌다”고 기쁜 가운데 고백하였다. 그녀는 “이게 관상기도 덕분”이라며 필자에게 깊은 감사를 표하였다.
1. 생명의 에너지 접촉: 존재의 원천
관상기도가 침묵 가운데 지향하는 것은 존재 속에 계시는 하나님과의 일치이다. 키딩은 이를 ‘존재의 원천과의 접촉’ 시도라고 이해한다. 그는 마일클 워슈번의 이론을 근거로 다음과 같은 가설을 설정하였다. 워슈번은 “자아와 역동적 근거”에서 인간이 “독립된 자아 동일성을 발달시키는 첫 단계로서 인간 존재의 원천-‘역동적 근거’―과 자신이 하나라는 감각”을 억제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38) 워슈번은 자신의 존재의 근거가 될 만한 근본적인 체험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자신의 가설을 입증하려고 노력했다. 워슈번이 말하는 ‘근본적 체험은 키딩에게 있어서는 인간에게 안심을 줄 수 있는 강력한 체험을 의미하고 있다. 관상기도가 지향하는 기도의 목표는 존재의 근원을 지향하는 ‘센터링’ 침묵기도이다. 이때 경험하는 체험은 개인의 존재의 근원인 하나님에 대한 체험이기에 매우 강력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인간은 근원적 체험에 갈망하고 있다. 현대인은 본성상 불확실성의 시대 속에서 실존적 불안을 벗어나며 자신의 존재의 기반을 든든하게 해 줄 그런 근원적 경험을 갈망한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영적 갈급’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신자가 관상기도를 꾸준히 수련하여 의식의 4단계에 이를 정도가 되면, 평화를 경험하면서 이와 같은 근원적 체험에 가깝거나 순간적이라도 접촉한 것 같은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적의에 찬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현존 경험으로 희망을 빛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길을 먼저 갔던 경험자의 정확한 방법과 지혜로 안내를 받으면서 관상기도를 수련해가노라면 점점 자신에게서 생의 에너지가 증가하여, 자신 속에서 생수의 강이 흐르는 것과 같은 경험을 느낄 수 있다(요 7:38). 많은 기도 수련자들이 겪는 이런 경험은 기도자 자신을 지치게 만들었던 수많은 정서적 집착에서 그들을 점점 자유하게 해방되게 하기 때문이다.39)
왼 쪽 그림은 멕시코 시티의 ‘역사와 인류학 박물관’에 소장된 작품이다. 이 도자기 인형은 지금으로부터 약 3000년 전의 멕시코 틀라틸코(Tlatilco) 지역에서 발견된 점토 흙 작은 조각품이다.40) 이 여인의 풍만한 다리와 가슴은 그녀가 건강하며 생식능력이 왕성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조각품이 다른 고대의 출토된 인형과 다르게 눈이 셋이다. 왜 눈이 셋이나 될까? 어떤 이는 밤과 낮을 뜻한다고 해석하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 의견이 존재한다. 그러나 인류학자인 굳드만(Goodman)은 이 여인이 잘 통합된 인격을 지닌 사람을 뜻한다고 해석한다. 한 쪽의 두 눈을 통해 일상적 세계(ordinary reality)를 바라보고 또 다른 쪽의 두 눈을 사용하여 일상적 세계의 대안적 측면에 접촉하고 있어야 한다는 진실을 웅변적으로 나타내 준다. 이 조각품은 인간이 일상의 세계, 곧 객관적 현실 세계만으로는 건강하게 살 수 없음을 드러내고 있다. 고대의 인간은 건강한 생존을 위해서는 일상세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가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공존해야 한다는 것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2. 명상 연구에서 본 관상기도의 치유
요즘은 동양 명상의 르네상스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동양 명상이 각광을 받고 있다. 그런데 침묵 가운데 기도하는 관상기도와 위빠싸나 명상과 유사한 점이 몇 가지 관찰되고 있다. 물론 양 쪽의 형이상학이나 지향점은 달라도 동양 명상 연구에서 참고할 만한 점들이 몇 가지가 있다.
위빠싸나 명상의 전문가 중의 한 사람인 한국불교대학원대학교 초월심리학 교수인 박성현은 위빠싸나 명상의 핵심은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체의 현상을 있는 그대로 즉각적으로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것”이라고 주장한다.41) 이와 같은 이해는 관상기도가 기도 중에 마음을 주님께 지향하며 마음에 떠오르는 사고나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그 대상들을 흘러가도록 한다는 것과 매우 흡사하다.42) 위빠싸나 명상은 몸과 마음에 일어나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것’에 초점이 있다면, 관상기도는 마음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생각과 감정’등을 인식하고 흘러가도록 내버려 둔다는 점이다. 어쨌든 알아차리는 것이나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나 둘 다 의식의 활동으로 대상에 매이지 말고 인식만 하라는 점에서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동양의 3000여년 전통을 지닌 불교 명상에 대해 서양에서는 많은 과학적 연구를 시도되었다. 불교 명상 중에서 위빠싸나 명상의 심리치료적 요인에 대한 연구가 많이 시도하였다.43) 필자는 박성현의 연구에서 주장하는 5가지 심리치료적 요인이 관상기도의 치유효과와 유사함을 발견하고, 다음과 같이 유사한 점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였다. 먼저 1) ‘집착의 방지’이다. 관상기도를 통해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사고 작용의 결과들인 생각, 감정, 이미지들을 흘려보냄을 통해 특정 대상에 대한 집착 경향을 감소시키는 비슷한 효과가 나타난다.
2) 침묵 가운데 머무는 관상기도는 신체 이완 반응 효과를 가져온다. 불교의 명상으로 인한 생리적 이완상태에 대한 연구는 수면이나 최면상태의 변화와 구분되며 명상은 깊은 생리적 이완 상태와 더불어 뚜렷한 각성상태를 나타내었다.44) 뿐만 아니라 명상으로 유도된 이완상태는 스트레스 관리, 중독물질 사용 감소, 과도한 긴장의 감소, 심리치료에 보조적 도움을 주는 임상 효과를 매개한다고 확인되었다.
3) 탈민감화, 탈자동화 효과이다. 관상기도 중의 의식 현상을 보면, 대체적으로 기도자의 당시의 절실한 현안이 떠오르게 된다. 이런 현안들을 반복적으로 직시함으로써 강력한 정서와 반응을 일으켰던 대상에 대해 덜 민감하게 반응하는 탈민감화(desensitization) 효과를 얻게 된다. 비슷한 논리로서 반발적(reactive) 반응도 감소시키는 탈자동화 효과를 가져온다.
4) 부정적 감정의 수용능력 향상. 관상기도의 수련을 통해 경험하게 되는 부정적 정서를 회피하거나 따라가는 방식보다는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흘러가게 하는 과정을 통해 기도자가 그 경험을 완전하게 경험하는 수용능력의 향상을 기대할 수 있다. 이로 인한 심리적 안녕감과 자기 효능감을 향상시키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5) 탈 동일시(dis-identification) 효과. 관상기도 중에 흘러들어오는 사고들을 통해 개인 속에 인식되지 않던 왜곡된 지각들을 자각하여 자신의 사고 작용과 실재의 모습과의 차이를 구분하는 능력이 향상된다. 특히 거짓 자기와 참자기의 인식은 이런 탈동일시의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관상기도의 효과에 대한 경험적 연구가 초보적인 수준에 있다. 권명수의 관상기도 집중 수련의 경험적 연구에 힘입은 류충렬은 위 박성현의 연구 결과인 측정도구를 사용하여 관상기도 수련회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경험연구를 시도하였다.45) 연구 표본수가 충분치 않았음에도 관상기도 수련 참가자와 비참가자의 차이분석 결과 ‘심리적 안녕감’ 인자가 통계적 유의미한 값이 있다는 놀라운 연구결과를 얻었다. 위 네 번째 항목과 연관이 있는 내용이다. 관상기도의 경험적 연구는 앞으로 동일한 많은 연구들이 시도되어 관상기도의 과학적 근거확립과 대중화에 기여하여야 할 것이다.
3 하나님 관계의 심화: 영성 지도의 요청.
관상기도는 하나님과의 일치를 지향하는 깊은 사귐의 기도이다. 관상기도의 실천을 통해 기도자는 점점 자신의 뜻보다 주님의 뜻에 수렴 일치하게 되며, 점점 주님과의 깊은 관계에 들어가게 된다. 관상기도는 내면의 의식의 흐름에서 일어나는 내용에 대한 관심을 각성시킬 뿐만 아니라 인간의 치유와 성숙에 통전적인 접근을 지향하는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상담관계에서 문제 중심의 만남을 지양하고, 개인의 실존적 불안의 대처와 성숙한 관계를 통해 인격의 성숙과 영적인 갈급한 면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효과를 낳게 한다.46) 그 중에서도 하나님과 깊고 친밀한 관계를 맺고자 하는 개인의 영적 욕구를 중심으로 관계하는 분야는 전통적으로 영성 지도(spiritual direction)의 영역이었다. 요즘 개신교의 전통적인 목회상담 영역에서는 심리학에 경도되었다고 할 정도로 심리학의 위치가 크게 차지하게 되었던 것에 대한 반성에서, 영적 영역의 회복을 시도하려는 목소리가 높아져 가는 현실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이런 점에서 관상기도를 목회상담의 영역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될 때에 목회상담의 영적 영역에 대한 논의와 실천에 크게 보완하게 될 것이다.
Ⅴ. 나가는 글
필자가 그리스도교 영성에 대한 공부를 하던 중 다음의 내용을 접하고 받았던 강한 인상이 지금도 지워지지 않고 있다. 세계 어느 종교를 둘러보아도 침묵가운데 스스로를 돌아보며 자신의 신앙대상에 마음을 집중하고 신앙심을 표현하는 것에 대해 가치를 두지 않는 종교는 생명력이 길지 못하다는 진술이다. 필자는 이 말을 듣고 한국의 개신교를 생각하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필자는 삶의 어려운 고비마다 관상기도를 통해 필자의 내적 상태와 영성을 보듬고 넘어갈 수 있었던 경험들이 관상 기도의 연구에 진력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희망적인 현상은 관상기도수련회 공지가 나가면, 예전에는 관상기도와 인도자의 개인적 신앙 성향을 주로 물었다면, 요즘은 수련회 참여조건인 시기나 금액을 주로 묻는 것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만큼 이 기도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확산되었다는 반가운 징조로 여긴다. 이런 관상기도 운동의 일익을 감당하고 있는 이경순님의 신앙시로 관상 기도자의 의식의 상태를 소개하며 이 글을 마무리 한다.
조용한 사랑
이 경 순47)
나는 언제나 사랑받고 있습니다.
아침에 상쾌한 바람과 한낮에 밝은 햇살과
어두운 밤에 찾아오는 곤한 잠은
내가 받는 조용한 사랑입니다.
나는 언제나 사랑받고 있습니다.
지저귀는 새소리를 듣고 붉게 물든 노을을 보면서
마음에 평화가 흐르는 것은
내가 받는 조용한 사랑입니다.
나는 언제나 사랑받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깊이 이해하고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을 좋아하며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은
내가 받는 조용한 사랑입니다.
나는 언제나 사랑받고 있습니다.
날마다 지혜가 늘어나고 삶에 대한 애정이 깊어질수록
나를 가르치고 성숙시킨 분들에게 감사하게 되는 것은
내가 받는 조용한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 !!
내가 주님을 찬양하며 사랑함은
하나님만이 받으시는 조용한 사랑입니다.
참 고 문 헌
권명수. “관상기도: 깊은 사귐의 기도”. “영성‘목회’21세기”. 교회와 사회연구원 총서3, 정원범 엮음, 서울: 한들 출판사, 2006: 347-380.
______. “고독에 대한 정신분석적‘종교적 탐구”. ’목회와 상담‘. 7호(2005년 가을): 269-292.
______. “Jung's Understanding of the Numinosity”. The Christian Literature Society of Korea Vol. 42(2005): 243-259.
______. “목회상담과 영성: 목회적 돌봄, 목회 상담, 영성 지도의 관계를 중심으로”. “기독교학의 과제와 전망”. 한중식·한석현 엮음. 서울: 숭실대학교, 2004: 379-404.
______. “관상기도 집중 수련의 효과에 대한 경험적 연구: 자기 개념과 하나님 이미지 변화를 중심으로”. ‘신학연구’. 45호(2004): 199-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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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bstract ’
The Streams and the Healing of Consciousness in Contemplative Prayer
Myungsoo Kwon
This article aims to examine the streams of consciousness in the person praying contemplative prayer in which many Korean Christians are interested these days. For our purpose we need to understand what this prayer really consists in. In Christian tradition prayer is understood first of all as petitioning or supplicating God. Another meaning of prayer is meditation or reflection on the meaning of the Scriptures. Contemplative prayer, however, is different from these two types of prayer. Contemplative prayer is prayer in which the believer rests in the bosom of God without using words, images or thoughts. The intention is to be one with God and for one's will to be one with God's will. The person praying this prayer stays in silence, intending to be one with God's will and with God's loving heart.
This remaining in contemplative prayer without words, thoughts and images results in a movement through five levels of consciousness. The first level of consciousness is like the surface of a river where one is aware of the coming and going of many everyday thoughts. The second level is when one is attracted to a particular idea, image or thought. The third level is when the praying person gives specific consent to the idea, image, thought or feeling in consciousness. The fourth level is when an unpleasant memory slowly arises to consciousness while one is enjoying the peace and calmness in one's soul. The fifth and final level is when a purification of the consciousness takes place dynamically out of the inner silence of the soul. This process, especially at the fifth level, has a therapeutic effect and for this reason Thomas Keating calls it a divine therapy.
It is not easy to clearly distinguish these levels from each other. The idea of the five levels originated from Keating's theoretical position. However, persons praying contemplative prayer acknowledge that during the prayer they recognize inner change and experience peace in themselves and also notice the appearance of a dark part of their unconscious. These changes of consciousness lead to healing called by Keating a divine therapy. Similar phenomena of consciousness are observed in the mindfulness of Buddhist meditation. It is highly recommended therefore that Korean Christians living the busy and complicated life of contemporary society learn and practice contemplative prayer which may lead them to a mature and healthy spiritual life.
Key Words
contemplative prayer, centering prayer, healing, stram of consciousness, spiritual direction
각주)-----------------
이 논문은 한신대학교 학술연구비 지원에 의하여 연구되었음
Urban T. Homles, III, A History of Christian Spirituality: An Analytical Introduction, (New York: The Seabury Press, 1980), 4.
요즘 인터넷 ‘뉴스앤조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논쟁은 긍정 전통의 입장의 신자나 목회자들이 부정 전통의 기도인 관상기도를 ‘동양적 명상’과 유사하다고 비판하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님을 밝힌다. 부정 전통의 신앙생활 전통도 그 뿌리가 1세기 초부터 있었음이 역사적 연구로 드러나고 있다. 이 분야에 대한 연구가 더 많이 요구되고 있다.
이만홍, “영성치유: 정신치료와 영적 지도의 통합을 위하여” (서울: 한국영성치유연구소, 2006), 7.
토마스 머튼/조철웅 옮김, “명상의 씨” (서울: 가톨릭출판사, 1985)의 책의 영어 이름은 The seed of contemplation이다.
토마스 키딩/권희순 옮김, “센터링 침묵기도: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관상기도 입문서” (서울: 가톨릭출판사, 2006). 이 책은 토마스 키딩/엄무광 옮김, “마음을 열고 가슴을 열고: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관상기도 입문서” (서울: 가톨릭 출판사, 1997)로 번역된 것을 개신교학자가 다시 번역한 것이다. 필자는 앞으로 키딩의 주저서를 인용/참고할 때에 권희순의 번역서를 사용할 것이다.
M. 바실 페닝턴/이승구 옮김, “향심기도: 그리스도교 전통의 단순기도를 현대적인 방법으로 제시하는” (서울: 기쁜소식, 2007), 43.
키딩, “센터링 침묵기도: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관상기도 입문서”, 19.
Ibid., 40.
Thomas Keating, Open Mind, Open Heart: The Contemplative Dimension of the Gospel, (New York: Continuum, 1986), 39
아빌라 데레사의 기도의 7궁방을 오먼은 9단계로 나누어 자세히 상술하였다. 조던 오먼/이홍근 옮김, “영성신학” (왜관: 분도출판사, 1987), 366-411를 참고하라.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졸고 “관상기도: 깊은 사귐의 기도” “영성‘목회’21세기” 교회와 사회연구원 총서3, 정원범 엮음, (서울: 한들출판사, 2006), 355-57를 참조바람.
짐 보스트/박금옥 옮김, “관상” (서울: 성 바오로, 1999), 26-7쪽.
키딩, “센터링 침묵기도”, 19.
Ibid., 29.
Ibid., 87.
Ibid., 91.
Ibid., 128.
Ibid., 91.
Ibid.
키딩/엄무광 옮김, “하느님과의 친밀” (서울: 성바오로, 1999), 98.
키딩, “센터링 침묵기도”, 134-5.
키딩, “하느님과의 친밀”, 98.
Ibid., 100.
키딩, “센터링 침묵기도”, 135.
Ibid., 135.
Ibid., 142.
Ibid.
Ibid., 145 이하.
키딩, “하느님과의 친밀”, 99-100.
권명수, “관상기도: 깊은 사귐의 기도”, “영성‘목회’21세기”, 교회와 사회연구원 총서3, 정원범 엮음, (서울: 한들출판사, 2006), 365.
거짓 자기와 참 자기는 키딩의 다루고 있는 관상기도의 효과를 논의하는 주요 주제이다. 관상기도의 수련을 통해 의식이 점점 깊은 내면으로 내려가게 되면, 자신이 의식하지 못했던 여러 가지 부정적 자아상들을 대면하게 된다. 이런 대면을 통해 과거의 경험에 왜곡된 자아상을 인식하게 되고 이에 부가된 부정적 정서의 힘을 깨닫고 정화하는 만큼 과거의 상처에서 자유로워지며 내적 성숙으로 인도하는 긍정적 치유 효과가 있다. 이 주제는 별도의 독립된 연구를 필요로 할 정도의 주제이기에 여기서는 간략하게 처리한다.
키딩, “센터링 침묵기도”, 148.
오먼, “영성신학”, 384쪽 이하.
키딩, “하느님과의 친밀”, 141.
키딩, “센터링 침묵기도”, 143.
Ibid., 127.
키딩, “하느님과의 친밀”, 97.
키딩, “센터링 침묵기도”, 97.
Felicitas D. Goodman, Ecstasy, Ritual, and Alternate Reality: Religion in a pluralistic world. Midland Book Edition, (Bloomington and Indianapolis: Indiana Univiersity Press, 1992(1988), 44-45.
박성현, “위빠싸나 명상, 마음 챙김, 그리고 심리치료,” ?한국인의 종교심리와 목회상담?, 한국목회상담학회 제7차 가을 학술대회 자료집, (2006년 11월 25일, 연세대학교 신학관), 88.
최근에 출판된 이동식의 ??도정신치료 입문: 프로이트와 융을 넘어서?? (서울: 한강수, 2008), 45, 54를 참조하라. 이동식은 심리치료는 동양의 도와 매우 비슷하다며 구체적 사례들을 들고 있다. 지면 관계상 본 논문이 관상기도와 치유와의 관계를 설명하는 맥락과 연결됨을 밝히는 것에 그친다.
박 성현, op. cit., 92-97 참조. 마음 챙김의 경험적 연구의 도구에 대해서는 4요인설과 5요인설이 존재한다. 박성현은 5인설의 입장에 있는 듯하다. 참고로 5인설은 박성현, “마음 챙김 척도 개발”, (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심리학과 박사학위청구논문, 2006)과 원두리·김교현, “한국판 5요인 마음 챙김 척도의 타당화 연구,” ‘한국심리학회지: 건강’, Vol. 11, No. 4 (2006), 871-886. 4요인설은 김정모, “한국판 켄터키 마음 챙김 기술 척도의 타당화 연구,” ‘한국심리학회지: 임상’, Vol. 25, No. 4 (2006), 1123-1139.
Ibid., 94-95.
류충렬, “영성수련의 한 과정으로서의 관상기도에 관한 연구”, (한신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 목회학박사청구논문, 2007), 102-3.
Thomas Patrick Malone &Patrick Thomas Malone, The Art of Intimacy, (New York: Prentice Hall, 1988), 22.
이 시는 필자가 관리자로 있는 관상기도 홈피(www.freechal.com/ctprayer)에 실렸던 글입니다. 훌륭한 시를 올려 읽는 이로 하여금 감동을 받게 하는 이경순 회원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