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4편은 전체가 10절로 구성된 간략한 시편이나 이것을 읽거나 듣는 이가 모종의 장중한 힘을 느끼게 된다. 절수가 짧으나 복합적인 내용이 담겨 있기 때문에 이 시편 전체를 학자들이 아주 다양하게 이해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느끼는 힘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 결과 이 시편을 그 전체를 가지고 정확하게 설교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 되었다. 이 시편 전체가 원래부터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근거를 가지지 않는 한 이 시편을 전체로 놓고 설교한다고 하더라도 본문이 역사적인 발전을 따라서 덧붙여져서 형성되었다고 믿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예를 들어서 3-6절은 7-10절과 별개의 것이고 1-2절은 더욱 별개의 것으로 나중에 붙여졌다는 주장) 그런 주석의 결과 만들어질 수 있는 설교는 본문편집의 가설적인 역사적인 발전을 의미있는 것으로 제시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필자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시편 24편은 복합적인 내용이 담겨 있으나 원래부터 통일된 하나의 시편이며 다양하게 보이는 내용들이 오히려 이 시편이 말하려는 것의 폭넓고 웅대한 면을 잘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본문의 복합적이나 완벽히 통일된 내용이 설교로 나타날 때 얼마나 내용적으로 풍부하면서도, 고대의 성도들에게 이 시편을 부르면서 발견했을 그 풍성한 의미를 현대의 성도들도 설교를 통해서 완벽히 누릴 수 있게 될 것을 믿는다.
2. 시편 이해에 있어서의 쟝르 인식의 중요성
최근에 성경연구에 있어서 장르 인식은 중요한 과제로 대두되고 있다. 이것은 비단 산문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시에서도 그러하다. 그러나 이런 장르에 대한 관심과 그 연구가 양식사의 두 이론적인 기초개념인 '삶의 정황'(Sitz im Leben)과 '양식'(Gattung, genre)중에서 후자를 그대로 이어받아 발전한 것으로만 볼 때에 양식사 연구의 한계 속에 머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양식사의 여러 가지 전제에 매어달리지 않고 각 시대에 일정하게 유행하던 쟝르에 대해서 연구하는 것은 가능하다.
한 쟝르에 속한 대부분의 내용을 우리가 이스라엘 역사에서 재건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은그것은 본문 이해에 결정적일 수 있다. 물론 모든 시편에서 이것이 쉽게 이루어질 수는 없겠지만 오늘의 본문은 바로 이런 장르 인식으로 해석의 결정적인 단서를 풀 수 있는 것 같다.
필자는 여러 번 오경 더 나가서 구약 전체의 이해를 위하여 출애굽기의 시내산 언약과 신명기의 모압언약을 정당하게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참조 : 학위논문 Sinai Covenant and Moab Covenant, 1992; "시편에 나타난 시내산(모압)언약의 자취를 찾아서," 신학지남 1996년 봄호) 피력하였다. 그런데 언약이 한 번 맺어지고 나서 영속적으로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을 따라서 언약 당사자의 (잘못된) 행동때문에 회복되어야 하고 (covenant recovering 언약회복), 상황의 변화 때문에 갱신되어야 (covenant renewal 언약갱신) 한다.
또 이 시편에서 특히 고려할 수 있는 것은 예배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현대에 사는 우리들이 드리는 예배의 기원과 그 원형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많은 토론을 하여 오고 있다. 사실상 우리의 예배의 근본적인 기원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과 맺었던 언약을 갱신하고 새롭게 하는 것이라는 것이 필자의 연구 결과 가지게 된 주장이다. 그래서 이 시편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를 생각할 때 언약갱신이라는 예배적인 상황을 고려하여야 할 것이다.
오늘의 본문 시편 24편은 이스라엘 속에 정기적으로 이루어졌던 바로 이런 언약 갱신의 역사적인 상황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성경에 나타난 언약갱신은 원래적인 언약 체결의 상황을 다시 재현하는 것이다. 원래적인 언약의 체결 상황은 출 19-24에 잘 나타나 있다 :
(1) 언약 관계 정의 및 형성을 위한 교섭 (출 19:1-8),
(2) 언약 당사자들의 직접 만남 (출 19:9-25),
(3) 언약 조건의 직접 전달 (출 20:1-21),
(4) 언약 조건의 간접전달 (출 20:22-23:33),
(5) 언약 체결 예식 (출 24:3-8),
(6) 언약 체결 후의 피로연 (출 24:9-11).
이러한 해석을 받아들이는 데 어렵게 만드는 것은 일반적으로 시내산에서의 하나님의 나타나심(출 19:9-25)을 단순히 신현(theophany)으로만 이해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B.S. Childs (Exodus, OTL, 370; 비교 : S. Mowinckel, Erwaegnungen zur Pentateuch Quellenfrage, 1964, 75)가 했던 것과 같이 "무엇을 위한 신현인가"라는 질문을 해 보면 이 이해가 일방적이고 전혀 본문 주위의 다른 본문들과 관련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단순히 하나님의 나타나심으로 보지 않고 언약 당사자들이 직접 대면하기 위해서 나타나는 장면으로 볼 수 있다. 이 해석은 이 시편의 통일성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즉 다시 말하면 이 시편의 두 번째 부분(3-6절, 이스라엘이 성전을 향해서 나감)과 세 번째 부분(7-10절, 하나님이 이스라엘 중에 나타나심)은 서로 관련이 없는 시편들의 파편이 서로 무관하게 연결된 것이 아니라 이런 언약 당사자들의 직접적인 만남이라는 이유 때문에 반드시 공존하여야 한다.
시편 24편은 이러한 원래적인 언약체결의 모습을 대부분 담고 있다.
(1) 시 24:1-2 :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여호와의 것이라는 선포는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언약 체결을 이스라엘에게 제시할 때의 가장 먼저 한 말과 관련된다 : 출 19: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양 본문에서의 이 표현은 하나님의 세상의 통치권을 나타내는 말임과 동시에 그런 세상중에서 이스라엘을 선택했다는 의미도 포함된 것이다.
(2) 시 24:3-6 (A) : 여기서 근본적으로 언약의 연약한 상대인 이스라엘이 언약의 막강한 상대인 하나님을 만나려고 모든 준비를 철저히 하는 모습과 관련된다. 이것은 첫 번 언약에서 이스라엘이 철저히 자신을 준비하는 출 19:9-25의 모습과 일치한다. 그리고 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만나려고 나가는 것을 '올라간다'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은 첫 번의 상황과 일치한다 (시 24:3, 출 19:17 '산기슭에 서는 이스라엘'). 또 이렇게 준비된 이스라엘에 대한 선포가 바로 "여호와를 찾는 족속",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 공적으로 인정되는 것이다. 이로서 이들은 언약의 다른 당사자인 여호와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3) 시 24:3-6 (B) : 그리고 이 시편의 상황은 일단 언약의 조건(십계명과 구체적인 법들, 출 20-24)이 시내산에서 공포된 다음이기 때문에 그 언약적 조건에 자신을 비추어 보면서 하나님앞에 나오기 전에 (마음의) 옷을 빠는 행위가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 언약적 조건의 구체적인 항목들로 (!) 마치 십계명을 연상하듯이 제시된 것은 아주 자연스럽다 (시 24:4).
(4) 시 24:7-10 : 이것은 언약의 강한 당사자인 여호와의 언약체결 현장에 오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첫 번 언약에서 하나님이 언약 당사자인 이스라엘과 만나기 위하여 모든 위엄과 권능을 입고 시내산에 강림하는 것과 거의 일치한다 (출 19:17-20).
이 시편에서는 이상적인 (ideal type) 언약체결에 필요한 ㅁ 요소가 보이지 않는다 : (1) 언약 체결 제사, (2) 언약 체결 이후의 피로연. 그러나 이것은 아마 이 시편이 언약갱신의 모든 장면을 다 포괄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주로 언약갱신의 앞부분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이 시편의 쟝르를 언약갱신시편(covenant renewal psalm)으로 볼 수 있다. 이 쟝르의 또 하나의 다른 예는 시편 50편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두 시편의 상황이 언약갱신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러나 시편 50편은 시편 24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점점 피상적이 되어가는 언약갱신 의식에 대해서 거의 파괴적일 정도의 근본적인 비판을 내리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그리고 언약갱신의 상황은 신명기의 모압언약에서 제시되었고 또 첫번째로 여호수아에 의하여 시행되어졌고 (수 8), 여호수아의 생애의 마지막에 한 번 더 시행되어졌다 (수 24). 그리고 이것에 대한 구체적인 지시가 신 31:9-13에 (매 7년마다 장막절) 나와 있다.
3. 단락별 주석
3.1. 구조 (부록 시편 24편의 구조 참조)
이 시편의 구조는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 1-2, 3-6, 7-10.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시편의 현재의 모습은 원래는 독립적으로 되어 있던 세 부분이 나중에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하나로 된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이 세 부분 모두 내용적으로 하나의 상황 즉 이스라엘의 언약갱신 상황가운데서 일어날 수 있는 것들이다.
첫 부분(1-2절)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 모시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위대한 모습에 대한 선포가 나오고 있다. 이것은 언약갱신을 위하여 나아오는 성도들을 향하여 레위인 성가대에가 한 선포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두 번째 부분(3-6절)과 세 번째 부분(7-10절)이 동일한 구조를 가지는데 각각 세가지 내용을 가진다 :
(1) 찬양,
(2) 수사적인 질문,
(3) 수사적인 답변.
이것 모두를 예배에서 볼 수 있는 하나의 교창형식으로 볼 수 있다. 우선 첫 번째 교창인 찬양(1-2,3,7,9)은 레위인 성가대가 언약갱신을 위하여 성전으로 나오는 백성을 향해서 불렀을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교창(3, 8a, 10a)에서 수사적인 질문은 언약갱신을 향해서 나가는 백성들이 부르는 것이고 세 번째 교창(4-6, 8b-c,10b-c)에서 수사적인 답변은 제사장이 불렀을 가능성이 많다.
이제 두 번째 부분(3-6절)은 언약의 약한 당사자인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만나러 성전에 올라가기 위해서 철저히 준비하며 그렇게 준비된 자를 인정하는 선포를 나타낸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부분(7-10절)은 언약의 강한 당사자인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만나기 위해서 오시는 당당한 모습을 나타낸다.
3.2. 1-2절 주석
여기서 '여호와께' (LeYHWH)라는 말이 문두에 나옴으로 강조되어 우주의 모든 것이 다 누구도 아닌 바로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는 점을 나타낸다. 이 점은 출 19:5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언약의 상대방으로 택했을 때 표현했던 내용과 똑같은 것이다. 바로 이어서 (출 19:5b-6) 이스라엘이 언약의 상대방에 대한 표현인 하나님의 보배로운 소유물(SeGuLLaH)이 될 것을 선포하셨다. 그러므로 이 표현은 단순히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반적인 내용이 아니라 이스라엘에 대한 언약적 선택과 관련된 말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모든 세상 중에서 너희 이스라엘만을 하나님의 언약의 상대로 삼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어서 2절에는 그 이유를 상세히 소개하는데 이것은 출 19장에는 없는 새로운 요소이다. 하나님께서 땅 위의 모든 것이 존재할 수 있는 근거를 확실하게 세우셨음을 선포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바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유지하시는 분임을 언약의 백성들에게 선포하는 것이다. 이것을 들은 백성들은 자신들이 언약을 맺고 있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더 구체적으로 알게 되고 그 분께 합당한 언약갱신의 태도를 취할 수 있게 된다.
3.3. 3-6절 주석
여기서 바로 언약갱신의 핵심적인 주제로 들어간다. 3절에서 수사적인 질문이 주어진다. 그렇게 높으신 하나님과 언약을 맺기 위하여 하나님을 만나러 갈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자는 누구인가 ? "하나님의 산"(3절)은 시내산 언약에서 사용되던 명칭이다 (출 3:1,12, 4;27, 17:5, 18:8, 19:2,3). 그러나 여기에 새로운 요소인 "그의 거룩한 처소"가 덧붙여졌다. 이것은 언약의 원래적인 상황인 시내산에서 후대에 성전이 마련되고 난 뒤의 상황이 추가된 것을 나타낸다. 그 곳에 이스라엘은 순례의 행진을 하면서 '올라가야' 하는 것이다.
4절에는 앞에서 했던 수사적인 질문에 대해서 제사장이 하는 수사적인 답변이 들려진다. 이 답변에는 어떤 목록같은 것이 제시되는데 여기에는 두가지 특징이 보인다 :
(1) 십계명의 목록을 그대로 답습하지는 않는다,
(2) 십계명의 목록보다 더 구체적인 내용을 포괄하고 있다.
이것도 첫언약의 상황에서 이스라엘이 역사를 지나고 나서 제시할 수 있는 목록이다. 네가지 목록 중에서 첫 번째와 두 번째가 병행법을 이루는데 각각 두 단어로 결합된 구를 사용한다. 첫 번째로 외부적으로 드러나는 어떤 악한 행동들은 단지 "깨끗하지 못한 손"으로 먼저 소개하고, 이와 병행법을 이루어서 두 번째로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문제를 "청결한 마음"을 가진 자를 소개한다.
세 번째와 네 번째도 병행법을 이룬다. 즉 각각 히브리어의 부정사 (否定詞)인 Lo로 시작하는 구를 사용한다. 세 번째는 본문상 두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
(1) 나의 이름을 헛된 곳에 사용하는 자, 즉 제 3계명을 어기는 자 (Codex Leningradensis),
(2) 헛된 것을 추구하려는 자 (많은 히브리 본문, 번역, 주석), 즉 헛된 우상을 섬기려는 자.
네 번째는 성전에 마련된 법정에서 거짓서약을 하는 자를 말한다 (N.H. Ridderbos). 세 번째와 네 번째를 같은 내용으로 생각하면 세 번째 항목에 있어서 후자의 해석을 택할 수도 있다. 이제 네 번째는 하나님과의 언약갱신을 향해서 나아오는 백성들이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는 말이 신실해야 함을 마지막으로 점검하게 한다.
이제 이런 모든 흠결이 제거된 사람들에게 내려진 축복(5절)과 언약의 백성으로 인정하는 선포(6절)이 소개되었다. 5절 후반은 구원의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된 자라는 의미이다. 6절에서 사용된 '찾고'(darash) / '구하는'(daqash) 이란 짝을 이룬 동사들은 성전으로 순례하는 행동에 대한 전문용어이다 (H.-J. Kraus, Psalmen I, 346; 암 5:5, 삼하 21:1, 호 5:15; 삼하 12:16).
3.4. 7-10절 주석
이 부분은 반복적으로 소개되었다 (7-8 / 9-10). 하나님의 언약을 맺기 위한 임재의 장엄성을 나타내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가장 먼저는 1-2절에서 들었던 레위인 성가대의 찬양의 목소리가 7절과 9절에서 새로운 내용으로 갑자기 크게 들려진다. 그러나 1-2절의 사실의 선포와는 다르게 명령의 선포가 울려난다. 그런데 그 명령을 듣는 주체가 성문과 성전에 들어가는 문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이것을 상징적으로 해석하면 이스라엘의 마음의 문을 열고 들어오시는 하나님을 맞이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을 사실적으로 해석하면 하나님의 법궤가 행진의 과정에서 예루살렘 성문(들)과 성전의 문(들)을 통과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영원한 (혹은 오랜된) 문이 머리를 들어야 하는 것을 또 두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먼저는 오래된 문으로 해석하면 (성)문들이 오랫동안 사용되어 문지방이 내려앉은 경우에 귀한 분이 성에 들어올 때에 그 문을 올리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영원한 문으로 해석하면 오랜 전통을 가진 그 문들이 귀한 분이 성에 들어올 때에 숙이고 있던 머리를 드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8a절과 10a절은 수사적인 질문을 담고 있다. 앞에서 말한 영광의 왕이란 도데체 누구인가 ? 이것은 한 성을 방문하는 왕에 대하여 열광하고 환호하는 백성들이 하는 수사적인 질문으로 쉽게 연상할 수 있다. 이어서 8b-c / 10b-c절에서 두가지 수사적인 답변이 주어진다. 수사적인 질문은 동일하였지만 수사적인 답변은 차이가 나는 것이 특징이다. 8b-c절에서는 전쟁의 신으로 묘사된 여호와를 소개한다. 이것은 여호와의 언약궤가 이스라엘 군대의 행진을 인도하였던 고대의 역사와 관련되었고 (민 10:33-36, 비교 : 출 15:3), 그 언약궤가 이제 언약갱신을 위한 장엄한 행진을 예루살렘 성전까지 하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10b-c절에서 이스라엘의 광야여행 때의 이름이 아닌 그 후대의 역사속에서 소개된 만군의 여호와 그가 영광의 왕임을 구체적으로 소개한다.
4. 이 시편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
4.1. 시편 24편의 신학적인 멧세지는 예배의 진정한 의미를 가르치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이 시편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새롭게 언약을 갱신하려고 모였을 때의 상황 속에서 해석할 수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이 시편과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과연 무엇이고 어떤 식으로 드려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우리 한국인이 익숙한 이교도적인 예배 개념을 완전히 떠난 성경적인 예배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성경이 주는 가장 근본적인 대답은 바로 언약갱신행위가 예배라는 것이 필자의 확신이다. 이 문제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본문이 바로 출 19-24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있다. 먼저 언약 당사자에 대한 쌍방적인 공적선언이 ("이스라엘은 나(하나님)의 백성",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 출 19:5-6, 비교 신 26:17-19)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언약의 당사자들이 상호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확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편에서는 그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옷을 빠는 등의 준비가 필요하다 (출 19:9-25). 이것은 현대적인 예배에서는 말씀이 선포되기 전에 죄의 고백이 필요한 것과 같다. 이어서 언약의 조건이 다시 선포되고 제시되어야 하고 그것에 대해서 상세한 설명과 안내가 필요하다 (출 20-23, 비교 : 신 5-26). 이것은 현대적인 의미의 말씀의 봉독과 말씀의 선포와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이어서 언약갱신 제사를 한다 (출 24:3-8). 여기서 이스라엘이 다시 언약의 조건에 머물기로 생명을 걸고 맹세하여야 한다. 현대적인 의미에서 이것은 선포된 말씀에 순종할 것을 작정하는 결단의 시간과 같은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제 언약갱신의 모든 절차가 마무리 되고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언약관계가 다시 정상화되었고 샬롬의 상태로 돌아온 것이다. 이제 하나님과 함께 이스라엘이 언약적 샬롬에 도달한 것을 기뻐하는 축제에 들어가게 된다 (출 24:9-11). 현대적인 예배에서 이것은 교회가 하나님과 언약적 샬롬을 이룬 것을 즐거워하면서 동시에 성도들 상호간의 샬롬도 즐기는 축복된 교제의 시간인 것이다 (참조 : 엡 2장).
필자의 주장대로 예배가 언약갱신행위라면 이 시편은 오늘날의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따라가야 할 원래적인 순서를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그렇다면 이 시편을 설교할 경우의 제목은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리는 자의 자세"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시편의 설교를 통하여 성도들이 예배에 참석하는 근본적인 자세를 가르치는 것을 하나의 확실한 목표를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이런 점들을 염두에 두고 본문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자.
4.2. 이 시편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
4.2.1. 시편으로서 불러진 말씀의 장르와 설교로서 선포되어진 말씀으로서의 쟝르의 문제
어떤 본문이든지 우리가 설교의 본문으로 잡고 설교를 하려고 하게 될 때에 만나는 문제는 성경 66권이 표현된 각 쟝르를 설교라는 또 하나의 현대적인 쟝르로 어떻게 나타낼 것인가 하는 것이다. 특히 우리는 이전에 공적으로 찬양으로 불리워졌던 본문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시편의 전반적인 문제는 여기서 다루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다. 그러나 바로 우리가 주석한 이 시편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의 문제는 구체적으로 다루어야 한다.
먼저 이 시편의 쟝르를 언약갱신 시편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 이것을 가장 잘 사용하는 길은 우리도 이것을 현대적인 음악을 붙여서 유럽교회의 전통과 같이 시편찬송을 만들어 성도들이 같이 부르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현대적인 찬송을 만들 때도 원래 이 시편이 교창되었다는 상황을 고려하여서 현대에도 교창을 할 수 있도록 만들고 또 그런 상황을 설정하여 불러보는 것이 최선이 될 것이다. 이 시편이 원래 세 파트에 의하여 (레위인 성가대, 백성, 제사장) 교창되었듯이 초기에는 계속 교창되어왔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다가 원래 있을 수 있었던 파트별로의 표식이 없어지고 하나로 합쳐지면서 교창이 아닌 모든 백성(성도)들이 다 함께 처음부터 끝까지 부르는 제창으로 인식되어 현재의 시편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제 이런 "불러졌던 하나님 말씀"이라는 쟝르에서 어떻게 현대에 있어서 설교라는 "들려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는 쟝르로 바꾸어서 나타낼 때 원래의 말씀의 의미를 잘 전달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즉 하나님 말씀의 쟝르전환의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
(제의적으로) 불리워지는 말씀은 아주 적극적으로 자신이 그 말씀을 부르면서 그 말씀을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고대에서 (제의적으로) 능동적으로 참여되던 말씀이 들리워지는 말씀으로 바꾸어질 때 현대에서 성도들이 적극적으로 그 말씀에 참여하여 자신의 것이 되도록 유도하지 않으면 안된다.
4.2.2. 어떻게 각 단락을 설교할 것인가 ?
시편 24편을 단락별로 쉽게 대지를 나눌 수 있다 : 1-2, 3-6, 7-10.
(1) 1-2절
우선 1-2절에서 하나님의 창조주로서의 영광을 나타내고 그 창조물 속에서 이스라엘을 택해서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것에 대한 참다운 감사가 있도록 성도들을 유도하여야 할 것이다. 여기에 정확히 관련된 찬송을 미리 택해서 설교 이전에 불러서 성도들의 마음을 설교로 예비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설교 자체를 통하여 창조주되시며 동시에 우리를 만민중에 택하신 구속주되신 하나님을 높여야 할 것이다. 그 하나님이 세상을 견고하게 지금도 붙들고 계시며 당신의 택하신 영적 이스라엘을 지금도 가장 귀하게 다스리고 계심을 드러내어야 할 것이다. 이 부분은 고대에서 레위인 성가대에 의하여 불리워졌고 그것을 백성들이 (수동적으로) 들었을 것이므로 현대에서 이런 내용으로 선포된 말씀을 (수동적으로) 듣는 것은 고대의 경우와 유사할 것이다.
(2) 3-6절
3절 : 이 부분에서 먼저 백성들의 수사적인 질문이 던져진다. 누가 과연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 분을 뵙고 은총을 입으며 복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 고대에서는 백성들이 이 질문을 수사적으로 자신을 향하여 하였을 것이다. 이제 현대에서 이런 질문을 성도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앞에 나오기 위하여 스스로가 하여야 한다는 것을 강력히 선포하여야 한다. 실제 설교 중간에 설교진행을 잠시 쉬고 성도들이 기도하면서 스스로의 외면과 내면 세계를 들여다 보면서 질문할 시간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4절 : 성도들이 이렇게 기도하기 전에 혹은 중간에 4절에서 말한 것과 같이 우리의 육신이 구체적으로 행할 수 있는 모든 죄악을 자세하게 소개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단순히 십계명의 낭독이 아니라 현실의 사회에서의 삶에 응용된 것들을 구체적으로 소개할 수 있다. 그리고 더 나가서 우리의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서 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많은 행동들을 소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것에 대한 본질적인 회개할 것과 돌아설 것을 적극적이고도 도전적으로 선포하는 것이 필요하다.
5-6절 : 그런 결별 후에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과 의롭다 인정하심을 선포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의 반열에 포함됨을 선언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백성들은 합법적으로 언약 갱신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된 것이다.
(3) 7-10절
이제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준비되고 난 뒤에 하나님이 언약갱신을 위하여 나타나실 차례가 되었다.
7/9절 : 그러나 이 하나님 나타나심은 백성들이 조심스럽고 철저한 준비후에 나타나는 것과는 완전히 반대된다. 모든 성도들이 마음을 다 하여 준비한 후에 하나님은 임재하신다. 그 임재는 갑자기 큰 나팔이 울리며 터가 진동하며 구름이 일어나는 (출 19:16-19) 등의 엄청난 자연현상의 변화가 대동되는 장엄한 임재이다. 이런 터가 진동하는 임재앞에 모든 성문들과 성전의 문들이 다 머리를 들어서 영접할 준비를 하여야 할 것이다. 이제 그 문을 통하여 들어가시는 분은 바로 영광의 왕이기 때문이다.
8a/10a절 : 이제 성도들이 스스로 질문할 때가 되었다. 누가 과연 그 영광의 왕인가 ? 우리는 과연 그 영광의 왕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가 ? 우리는 과연 참 창조주되시고 구속주되시는 하나님 그 분을 예배하고 있는가 ? 아니면 다른 신들을 예배하고 있는가 (참고: 출 32장) ? 이런 질문을 공동체가 모두 스스로 하여야 한다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 이런 공동체의 적극적인 참여가 없이는 제대로 된 언약갱신을 할 수 없고 피상적이거나 수동적으로 따라가는 것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8b-c/10b-c절 : 그 영광의 왕이 바로 모든 전쟁에서 승리하며 또 승리하는 여호와심을 설교자가 웅대하게 선포하여야 한다. 과거의 전쟁에서 그러하셨을 뿐 아니라 미래의 모든 전쟁에서 승리를 하실 분이시다. 모든 육신적인 질병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실 하나님이시다. 모든 의식주의 문제를 해결하실 왕이시다. 세상의 모든 정신적인 어두움을 이기실 영광의 왕이시다. 그리고 모든 영적인 도전들을 극복하고 사탄의 어두움을 물리치실 하나님이다. 그런데 바로 그 왕이 만군의 여호와시다. 바로 그 분이 우리 옆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아무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오직 그 분께 합당한 찬양을 돌려드리는 것 만을 할 수 있을 뿐이다.
-- [부록] --
시편 24의 구조
A. 전체를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I : 1-6
II : 7-10 IIa : 7-8
IIb : 9-10
Section I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나아감을 나타내고
Section II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만나기 위해서) 나아감 을 나타낸다.
B. 각 부분은 세가지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
(1) 찬송
(2) (수사적) 질문
(3) (수사적) 답변
C. 그리고 세 종류의 group이 여기에 참여하고 있다 :
(1) 레위인 성가대들 (cf. 아삽, 고라 자손)
(2) 백성들
(3) 제사장
D. 그리고 각 group이 참여하여서 하는 표현은 다르다. B와 C를 조합하면 :
(1) 레위인 성가대들 --- 찬양
(2) 백성들 --- (수사적) 질문
(3) 제사장들 --- (수사적) 답변
E. 이 분석으로 24편 전체를 보면
단락/절찬 송(수사적) 질문(수사적) 답변 주체 레위인성가대 백성 제사장I (백성의 나아감) 1-2 3 4-6IIa (하나님의 7 8a 8b,cIIb 나아감) 9 10a 10b,c F. 연역 : 이 시편 전체를 통하여 문으로 들어가는 주체는 둘, 즉 백성 (3-6)과 하나 님 (7-10). 한 주체, 백성은 그 곳으로 들어가는 데 철저한 깨끗함이 요구되기때문에 아주 조심스러운 태도로 나가야 한다 (3-6). 그러나 다른 주체, 하나님의 나아가심은 아주 위엄이 있고 당당하시다 (7-10). 이 양자의 태도는 너무 대조적이지만 양자가 모 두 다 한 장소로 나가는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대조적인 태도와 한 장소로 양자가 나가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최초의 언약을 맺었던 시내산의 모습과 거의 동일하 다 (출 19:9-25). 거기에서도 양자가 어떤 목적, 즉 언약을 맺기 위하여 한 장소로 향 하여 나아갔듯이 여기에서도 양자가 동일한 목적으로 만나는 것을 나타내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시편은 실제 언약이 갱신될 때나 (참조 :신 31:9-13) 그 언약속의 축제들 을 즐기기 위하여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만나러 갈 때에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아주 높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