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의 영남대로?
아침의 출발시간이 자꾸 늦어진다.
밤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새벽녘에 간신히 잠들기 때문이다.
보통사람에게는 일정한 수면이 필요하기 때문이며 내가 기인이 아니라 보통인임을 의미한다.
내 긴 여정을 무사히 끝내기 위한 당면 과제가 달아나는 수면을 붙들어 놓는 것임을 다시 확인
하는 아침, 7시 45분에 알베르게를 나섰다.
N-VI국도를 만나는 로터리에서 한동안 국도와 함께 서진하는 노르떼 길.
어제 저녁때에 확인해 둔 교회와 공원(Parque Castiñeiro Milenario)을 지나 왼쪽 지근에는
철도, 약간의 거리를 두고는 빠르가 강(Rio Parga) 등과 나란히 걸었다.
주민이 30명(2011년현재)이라는 아주 작은 루가르(Aldea de Arriba)와 주유소를 지남으로서
빠로끼아 바아몬데를 완전히 벗어났다.
우측의 작은 공동묘지를 지나면 바아몬데로부터 3km지점에 국도(N-VI)를 떠나 좌회전하라고
지시하는 안내판들이 서있다.
특히 돋보이는 4각 꼰차기둥의 '100km'는 노르떼 길의 남은 거리를 의미한다.
바야흐로 2자리 수(99km이하)가 카운트되기 시작하는 곳.
노르떼 길의 총 길이가 827km ~ 867km로 각각이라 굳건한 신뢰는 유보할 수 밖에 없지만.
철길과 2개의 아치로 된 옛 돌다리(Puente de San Alberte)를 통해서 빠르가 강을 건넜다.
곧바로 산 알베르떼 예배당(Ermita de San Alberte)으로 올라갔다.
14c에 봉헌했으며 18c에 보수했다는 고색(古色)이 짙은 이 예배당의 소속 기초지자체 이름은
눈에 설지 않은 기띠리스(Guitiriz).
그 이유(설지않은)는 어제 두 기초지자체 빌랄바와 베곤떼 간에 자리한 기띠리스(기초지자체)
의 일부 루가르를 걸었기 때문인데 베곤떼를 지나 다시 그 지자체에 진입하다니.
한반도에서 이같은 지방을 종종 걸었는데(메뉴 '옛길' 40번글 '영남대로(3)' 外) 이베리아반도
에서도 그럴 줄이야.
지자체 간에 이해가 얽혀 있기 때문에 바로잡는 일이 생각처럼 쉽지 않다는 것은 이해한다.
하지만 이로 인해 주민들의 피해 또는 불편이 여간 아니다.
어제 거쳐온 기띠리스의 주민이 공무(公務)를 위해 다운타운에 가려면 베곤떼를 거쳐서 가야
하는데 한 두번이 아니고 평생 그래야 한다면 불편(피해)이 얼마나 크겠는가.
원근(遠近)의 문제가 아니라 월경(越境)에 따른 불편과 경제적 손실을 말하는 것이다.
사적으로는 오손도손하는 이웃이지만 선거 때마다 양쪽 지자체 사이에 끼어서 샌드위치 되는
것도 가벼이 볼 수 없는 일이고.
한 마을의 남과 북에 이어 동까지 경계가 각기 다른 지자체라면 소통이 얼마나 불편하겠는가.
조금전, 바아몬데를 벗어날 때 반대편 도로변에 서서 '기초지자체 베곤떼(Concello Begonte)
에 진입'을 알리는 안내판을 보았는데 기띠리스가 끝남도 동시에 말해주고 있다.
내게는 어제 베곤떼에 들어섬으로서 끝난 기띠리스 길이 재개됨을 의미하고.
동일 기초지자체지만 빌랄바와 베곤떼 사이에 끼어서 풀죽어 보이던 어제의 기띠리스와 달리
태양과 나무와 강이 어우러진 산 알베르떼와 오크(oak) 숲이 주는 생동감으로 걸었다.
예배당 경내의 휴식공간을 알차게 해주는 샘물(Fonte de San Alberte)도 빼놓을 수 없고.
산 알베르떼 숲에서 아스 뻬나스(As Penas), 또아르(Toar), 반돈쎌(Bandoncel), 아 에이레
헤(A Eirexe) 등 산 브레이호 데 빠르가(San Breixo de Parga) 교구마을을 지났다.
14개 루가르에 94명(2012년 현재) 밖에 되지 않는 인구라면 마을 당 6.7명 셈인 빠로끼아다.
청정한 공기만으로 살 수 있다 해도 선호 주거지 순위 다툼에서 상위에 오르기는 어렵겠다.
그 까닭은 밴쿠버(Canada Vancouver)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 곳은 '저렴한 생계비+오염된 환경'과 '청정한 환경+비싼 생활비'중 택일에서 단연코 후자를
택했지만 여기 마을들과 달리 인구가 늘어만 가고 있다.
그들에게는 시애틀(Seattle/미국Washington주)이라는 선린(good neighbor)이 있기에 잡음
없이 가능한 것이다.
밴쿠버와 국경을 이루고 있는 시애틀이 저가의 생필품들을 무제한으로 공급함으로서 그들이
당면한 현안(고비용)의 해결사가 되어주니까.
(밴쿠버에서 일부러 국경을 넘나들어 보았는데 시애틀의 상권이 밴쿠버에 의해서 좌우될 정도
라 시애들 당국이 국경 통과를 까다롭게 하면 선출직 관계자들은 표를 얻지 못한다는 것)
교구교회(Igrexa de San Breixo de Parga)와 묘지가 까미노에서 우측으로 조금 비켜 있다.
까미노를 개설할 때 교회(旣存)는 중요한(필수) 기준점이었다.
황량한 들판 또는 산간 벽지에서 까미노를 잃었을 때에는 교회를 찾아가면 될 정도로.
그런데도 여기 노르떼 길은 왜 교회와 거리를 두었는지?
휴식소(Fonte de Valdobín) 역시 노르떼 길에서 거리가 있기 때문에 뻬레그리노스를 배려한
시설이라 할 수 없지 않은가.
까미노에서 하나뿐인(?) 왁스 스탬프의 주인 기인 조각가 차꼰
이름 없는(unnamed/CP-2303?) 포장도로를 건너는 십자로변에 까인소스(Cainzos)가 있다.
몇가구 되지 않는 루가르인데 스페인의 마을 형태를 돌아보게 나를 자극한 마을이다.
자치지방(Comunidad Autónomas)에 따라서 구조와 표현이 조금씩 다르지만 자치지방과 주
(Provincia)에 대해서는 논외로 하고 까미노와 관련된 기초지자체의 하부구조만 살펴보겠다.
당장에는 그 중에서도 아스뚜리아스와 갈리씨아지방에 국한해서.
무니씨삐오(Municipio)와 꼰쎄요(Concello/Municipi, Udalerria)로 불리는 기초지방자치체
(municipality) 산하 마을들은 빠로끼아(Parroquia/교구마을)로 분류되고 빠로끼아는 루가르
(lugar/자연마을)로 세분된다.
주에는 기초지자체 체제를 뛰어넘는 꼬마르까(Comarca)가 있다.
'co'(together)+'march, mark'의 합성어로 국가적인 행정체제와 무관한 지역(region)단위의
공익(?) 공동체다.
그래서 루가르와 빠로끼아, 지자체, 꼬마르까의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경우들이 있다.
한 빠로끼아에 속한 마을들이 지자체와 꼬마르까를 달리하는 등.
단순체제에 익숙해진 나를 혼란스럽게 하기 일쑤다.
노르떼 길은 기띠리스의 루가르일 뿐 빠로끼아와 꼬마르까가 확인되지 않는 까인소스를 지나
빠로끼아 산따 로까이아 데 빠르가(Santa Locaia de Parga)로 간다.
디가녜(Digañe), 아 라뽀세이라(A Raposeira), 아 꼰차다(A Conchada)와 알다르(Aldar)등
10개 루가르에 146명(2012년 현재)이 거주하는 교구마을이다.
루가르 알다르를 끝으로 기초지자체가 기띠리스에서 프리올(Friol)로 바뀌었다.
첫 교구마을 세이혼(Seixon)의 루가르인 세이혼 데 아바이호(Seixon de Abaixo)에 진입하려
할 때 어디에선가 잔잔하나 호소력을 느끼게 하는 가락(聖歌?)이 동구 밖까지 들러 왔다.
(스페인어에서 x는 ks로 발음하며 뒤에 자음이 오면 s로 발음하나 중남미 등 국외에서는 주로
ㅎ으로 발음한다/examen 엑사멘, extranjero 에스뜨랑헤로, mexico 메히코 등.
나는 까미노 상의 지명들을 내가 발음하기 편한 쪽을 택한다)
가락 따라 들어간 곳은 담장에 사도 야고보의 십자가로 알려진 백합십자가가 다른 조각물들과
함께 박혀 있으며 작은 대문이 활짝 열려있는 집 안의 작업실(彫刻)
뭔가를 하다가(조각마무리?) 불쑥 나타난 나를 떨떠름히 바라보던 영감이 대뜸 세요(sello)?.
반갑지 않은 손인 듯 짜증스런 표정이면서도 스탬프가 필요하냐고 물은 그.
불청객임은 분명하지만 대문을 활짝 열어놓은 것은 아무나 들어와도 무방하다는 뜻 아닌가.
더구나 인력(引力)을 발산하는 가락으로 호기심을 내뿜으면서도 이미 들어와 있는 길손에게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이 영감은 까슬이인가 기인인가.
이야기를 나눌만한 분위기가 아니거니와 조각에 문외한인데다 겨우 일상적 대화나 할 정도인
내 스페인어로 이 까슬이와 무슨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는가.
스탬프만 받고 나오려는 속셈인데 경이로운 전기(轉機)가 올 줄이야.
그도 참을성 없는 성미인지 스탬프를 챙기면서 내 나이를 물어왔다.
'오첸따 이 우노'(81)라는 내 대답에 기겁하며 세요(stamp)를 내려놓은 그.
고무 세요를 들었던 그의 손에는 점화된 토치램프(torch lamp)가 들렸고 다른 손은 붉은 왁스
(red wax/고체)를 들었다.
잠시 후에는 원통형 금속 세요(sello)가 토치램프 불길에 액체가 되어 내 순례자여권(Creden
cial) 위에 떨어진 붉은 왁스를 찍어 눌렀고 곧 멋쟁이 왁스 스탬프가 되었다.
무수한 스탬프들 중에 단연코 군계일학(群鷄一鶴),
7개 루트인 메인 까미노를 통틀어서 최초로, 내게는 유일한 까미노 세요(sello)다.
나는 까미노의 메인 루트들을 모두 완주하였다.
그러나 모든 알베르게와 노상의 세요들을 다 받은 것이 아니므로 내가 놓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