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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듬의 구조
1965년 8월 9∼14일 제 2차 리듬 및
음률학 국제 학회
(Deuxième Congrès international du rythme et de la
rythmique)에 발표.
언젠가 음악학자이며 민속학자인 콩수땅땡
브라일루와의(Constantin Braïlouiu)가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음악의 제요소 가운데서 리듬만큼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키고, 많은 공론(空論)의
구실을 제공한 것이 없다. 이에 대한 정의는
형이상학으로부터 가장 엄정한 전문적인
것에까지 펼쳐져 있지만, 아직까지 그 어떤
분야에서도 일관된 이론이 나오지는 못했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그 까닭은, 리듬이라는
것이 이미 완전히 구성되어진 것인데도 불구하고
이론가들이 이것을 그들 눈에 보이는 대로 또
실제 그들의 체험 가운데서 그들이 지각하는
대로 검토하기 때문에, 리듬과 그 구조 또 그
조직 법칙의 존재 이유가 그들의 검토
영역으로부터 벗어나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은
분석을 통해서 리듬을 지배하는 법칙과 구조를
알아 낼 수 있었지만, 왜 리듬이 그와 같이 되어
있으며 다르게는 되지 않는가를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또 한편으로 리듬은 음악에서뿐만 아니라
도처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리듬은 시에서나
말투와 제스추어, 또 자연 가운데서도 발견되며,
심지어는 역사적 현상, 산업 혹은 상업의 발달
또는 시장 가격의 변동 가운데서도 발견된다. 또
리듬이 하나의 실체 가운데로 구현되면, 이것은
곧 공간적 구조를 취하게 된다. 이는 우리가
무용에서 보듯, 리듬이 나타나는 것은 그 실체의
공간성을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시간의 척도가
객관화되면 공간의 척도가 된다. 한시간의 공간,
시인의 말대로 '아침의 공간' 이 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지층이나 산맥 혹은 나뭇가지들에
관해 이야기할 때 리듬을 이야기할 수 있고, 또
사실이 순수한 공간적 리듬이란 언제나
지속가운데 고정된 시간적 발달의 결과인 것이다.
그런데 리듬의 이 같은 발현(發現)을 모두
검토해 보면, 이것은 어떤 힘들의 작용이
외적으로 나타난 것임을 알게 된다. 나뭇가지의
리듬의 경우를 예로 들어본다면, 수액(樹液)이
미는 힘, 식물성 섬유가 저항하는 힘, 중력의
작용 등등이 될 것이고, 신체 동작과 무용의
경우에서는 신체의 균형 요구에 의해 교대되는
근육의 긴장과 이완이 될 것이다. 따라서 리듬이
언제나 불연속적인 시공(時空)구조의 측면에서
보여진다는 것은 그것이 언제나 상반된 방향을
갖는 에너지들의 작용인 까닭이며, 에너지란
언제나 한정된 작용 범위를 갖는, 현대 물리학이
말하는 대로 '양자(量子)'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태양의 주변을 도는 지구의
공전이란 지구의 주기적인 자전에 의해 조건
지워지는 것이고, 실상 지구를 구성하는 물질의
입자들이 지구라는 덩어리를 형성한 것은
자전축을 중심으로 한 지구의 자전, 곧 구심력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지구가 태양의 중력장(重力場)내에
위치하고 원심력에 의해 움직이는 지구 덩어리가
태양 주위에 궤도를 그리는 것은, 이 지구의 물질
입자들이 태양이라는 덩어리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에너지는 오직 닫혀진 원주(圓周)
형태를 가져야만 연속선을 그리는 것이고,
시대를 통해 지구의 연속된 지속이 형태를
취하는 것도 역시 닫혀진 원주인 태양 둘레의
공전에 의해서인 것이다.
이제 다시 음악의 리듬으로 되돌아간다면,
제일 먼저 제기되는 질문은 음악 가운데서
작용하는 힘들은 어떠한 것인가 하는 것이 된다.
달리 말한다면, 무엇이 순수하고 단순한 음향
현상을 음악적 현상으로, 순수하고 단순한 조성
구조를 음악적 구조로 만드는가 하는 질문이다.
이 현상을 잘 검토해 보면, 조성 이미지가 음악적
이미지로 변용 하는 것은, 조성 구조에 '감성적'
의미를 부여하는 정서의 활동이 우리의 청각
활동에 접목된다는 사실에 기인함을
확인하게된다. 도음(導音)이 주음(主音)을
지향하도록 하고 음들이 옥타브에 기초한 조성적
전망 즉 옥타브에서 옥타브로 조직된 조성
전망으로 모이도록 하고(따라서 우리는 음들
사이에서 근친 관계를 지각할 수 있다), 화음을
협화음으로 혹은 불협화음으로 느끼도록 하는
것이 바로 이 정서 활동인 것이다. 왜냐하면
음악이 사용하는 그 음들이라는 것이 이
세계에서는 서로 전혀 무관한 것으로 이들은
서로가 당기지도 밀치지도 않는 것이다. 비록
공명 현상(음의 배음렬)이 음들 사이에서의 어떤
유사성을 밝혀 주는 것 같다 해도, 음계들의
일관성을 세워 주는 것은, 옥타브와 5도 그리고 4도를
제외한 다면, 결코 이 유사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음악 청취에 있어서의 이 같은 정서의 개입은 놀라울 것도 없고 전혀 인위적인 것도 아니다. 분명 멜로디란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저절로 자란 것도 아니고, 듣는 사람의 청취 행위 가운데 나타나기 이전에 작곡자의 의식 가운데에서 태어난 것이며, 작곡자에게 있어 서 소리와 이 소리가 형성하는 구조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의 정서(왜냐하면 그의 사유는 오직 그것들을 명명한 뿐―다시 말하면 그 소리들에게 그것들이 담고 있는 의미를 줄 뿐 이고, 음악가로서의 인간이 그것들에게 부여하는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인 까닭에서다. 이와 같이 음악에 있어서 정서란 음들 '이전에' 오는 것이다. 더 정확히 하자면 음들과 정서는 언제나 동시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정서를 결정하는 것은 음들과 음들이 형성하는 구조의 발현이 아니며, 음들과 음들의 구조에 감성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정서라는 사실과 또 이것이 바로 음악적 체험을 감성적 체험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라는 사실은 실로 자명한 것이리라. 작곡가에게 있어서 그의 음악을 이루고 있는 음들과 조성 구조를 그에게 받아쓰게 하는 것은 정서이다. 사실이 그렇다면, 그 음들과 조성구조 가운데에서 그리고 정확히 그것들의 선택에 의해서, 그는 그의 정서 활동을 의미해 내는 어떤 방법을 찾아냈다는 것이 된다. 이는 사람이 어떤 어휘들과, 이 어휘들이 구성하는 말들과, 이 말들이 구성하는 문장들을 선택함으로써 그의 사유 활동을 의미해 낼 수 있음과 같다. 이것은 듣는 사람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여야 할 것이다. 다만, 그의 정서는 지각된 조성 구조들 가운데에서 만든 사람이 갖고 있었던 그 감성적 의미들을 되찾아 내야 하는 것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음악에 있어서는 만든 사람과 듣는 사람 사이의 소통이란 없을 테니까 말이다. 음악이 우리에게 알려 주는 그 정서가 '조성 구조의 지각'에 의해서 우리 내부에 유발된 것이라면, 그것은 음들의 청취에 '부수' 된 정서이고 유쾌함과 불쾌함의 한계 사이에서 형태를 취할 것이며, 또 듣는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는 것이 된다. 게다가 그
것은 어떤 생리적인 기원을 갖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정서는, 비록 우리의 생리적
실존 가운데에서 체험된 것이진 하지만(그리고
이 결과에 관해서는 곧 살펴보기로 한다), 음들을
듣기 이전의 것으로, 우리 내부 그 가운데에
자리하여 음들이 나타날 때 작용할 준비를 다
갖추고 있기 때문에 아무런 생리적 기원도 갖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중대한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음악이 우리 정서의
표현이라는 것은 너무도 자주 이야기되어왔다.
그리고 음악은 기쁨이나 유쾌함 혹은 슬픔이나
우울함 등과 같이 완전히 구성된 우리의
정서들을 표현하는 것이라 믿을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음악이 우리 내부에서 '이미 구성된'
감정들이 실존하기 이전에 태어난다는 사실은
명백한 것이다. 왜냐하면 언어가 우리의 사유
활동을 보여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정서
활동을 그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음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음악은 우리의
내부에서 태어나는 상태의 정서로부터 태어나는
것이 된다. 그리고 만든 사람이건 듣는 사람 이건
`간에, '음악가에게 있어' 그 조성 구조가 담고
있는 감성적 의미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태어나는 상태에서의 정서 활동을 구성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만 한다. 이 정서 활동은
분명히 우리 내부에서 이 세계 내의 실존이
야기하는 감성적 긴장들로 이루어져 있다.
우선은 어림잡아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 이
감성적 긴장들은 한편으로 세계 내에서 결정될
하나의 대상 혹은 이 세계와 미래 가운데서
결정될 우리 자신의 위치를 실현하기 위해
유발된 이 세계로의 긴장들일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세계와 우리 자신과의 관계에
의해서 다시 말하면 우리 앞에 나타난 대상에
대하여 '우리 내부에서' 우리 스스로가 내린
결정에 의해 우리 내부에서 동기를 얻게된
그러한 긴장들일 것이다. 첫 번째 범주의
긴장들을 결국 외향성 가운데서의 긴장 혹은 '외향적'
인 긴장이고, 두 번째 범주의 긴장들은 내향성
가운데서의 긴장 혹은 '내향적' 긴장이다. 그리고
이 긴장들은 두 경우에 있어 '능동적'이거나 '수동적'
인 것인데, 이는 우리와 이 세계 그리고 이
세계에서의 우리의 미래 사이에 세워진 관계
혹은 이 세계와 과거의 우리의 실존 가운데서
우리 사이에 세워진 관계가, 우리 자신의 내적
활동으로부터 비롯되었는가 또는 그것이 단지 '인지된'
관계, 따라서 받아들여진 관계일 뿐인가에
따르는 것이다. 이 네 가지 범주 ―능동·외향,
수동·외향, 능동·내향, 수동·내향
―는 각각의 경우에서 다른 등급의 강도를
가지고서 음악이 우리에게 알려 주는 모든
정서를 이루고 있으며, 이 네 가지 범주는 음악적
체험의 실체 그 자체를 구성하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가 음악 가운데서 알고 있는 것이 실상은 '음악적
정서', 그러니까 이 다양한 감상적 긴장들이
아무런 모호함도 없이 명확한 특성을 부여하는
정서 즉 체험된 조성 관계들에 대한 정서밖에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엄밀히 말한다면, 음악은
우리의 정서의 표현은 아니가.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정서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음악이란
감성적 존재로서 의 인간의 표현이고, 각각의
음악 작품은 우리로 하여금 인간의 감성적
양태들을 알도록 해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어떤 특수한 경우에서 음악이
우리에게 우리의 특정한 정서들, 즉 기쁨이나
슬픔을 표현하는 듯이 보이는 것은 어찌된
것인가 ?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것을 이해해야만 한다. 즉 인간의 정서란 언제나
방금 앞에서 정의된 기초적 긴장들로 짜여져
있기 때문에, 우리가 정서라 부르는 것들은 인간
정서의 다양한 본질들이 아니라, '이 세계
내에서의 우리의 감성적 상황' 에 따라 우리
내부에서 동기를 얻는 기초적 긴장들의 복합체인
것이다. 나의 기쁜, 그것은 충만 되고 꽃이 피며
환대하는 듯한 세계와 유망하거나 혹은
열광시키는 미래가 나의 눈앞에 나타나는 것이고,
나의 슬픔이란 곧 음울하고 사기를 꺾는 듯한
세계와 희망 없는 미래 혹은 견뎌 낼 수 없는
과거가 내 눈앞에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음악적 정서가 우리가 알고 있는 정서에
결합되는 것은 바로 '감성적 상황' 의 굴곡에
의해서인 것이며, 이 감성적 상황은 음악에서의
형식적인 틀, 즉 어떤 화성적 장조 혹은 단조,
어떤 화성적 진행, 어떤 선법에 의한 리듬과 템포
등에 의해서 의미된다. 오페라의 경우, 작가가
그의 등장 인물들을 통해 정서들― 이 세계
내에서 체험된 정서들―을 표현해야 한다는 것은
매우 놀랍다. 그렇게 하기 위해 오페라 작가는
등장 인물의 입장이 되어 그들의 감성적 상황
가운데로 들어간다. 그리하여 '등장 인물의
감성적 상황'을 의미해 줄 수 있는 조성 및 리듬
구조를 찾아내게 되면, 등장 인물의 노래는 그의
가슴속에 담겨져 있는 정서 혹은 여러 정서들을
표현해 낼 수 있는 모든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제 막 리듬에 관한 암시를 했다. 실상
내가 이야기한 감성적 긴장들은 그 음악적
의미를 위치 관계 가운데에서 발견하는 것으로―이
긴장들은 위치 관계 속에서 감성적 긴장으로부터
위치적 긴장으로 변모한다― 지속의 척도를
가져야 하는 것이라고 지금 말하고 있다. 하나의
선율을 따라가다 보면, 4도나 5도가 어떤 때는
다소 빨리 또 어떤 때는 다소 느리게 지나가게
된다. 그리고 이 지속들은 새로이, 밖으로부터가
아니라 안으로부터, 정서의 활동 그 자체에 의해
결정된 것임에 틀림없다.
이 점에 관해서는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의 내적 지속, 다시 말하면 우리의 심적(心的)
지속(그리고 이것과 우리의 정서 활동)은
베르그송이 믿는 대로 '연속된' 흐름이거나
무형적이지도 않고 또 시간성의 구조를 지니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내부에서 호흡의 규칙적 반복성에 기초한 형태를
취하고, 호흡의 규칙적 반복성은 맥박에
기초하여 그 형태를 얻기 때문이다. 맥박 또한
심장의 규칙적 반복성, 즉 수축과 팽창에 의해
결정된다. 이처럼 외적 시간이, 내가 첫머리에서
밝혔듯이 주기적인 기원을 갖는 것이라면, 우리의
신체적·심리적 시간은 규칙적 반복성의
기원을 갖는 것이 된다. 이 말은 심리적 시간의
모든 단위가, 선험적으로 기초적인 이원적 혹은
삼원적인 규칙적 반복성 위에 세워진 상부
구조하는 뜻이다. 실제로 2와 3이라는 숫자는
더하거나 곱함으로써 다른 모든 숫자를 얻을 수
있는(그리고 곱하기란 간략화 된 더하기이다)
진정한 소수(素數)들이다. '하나' 는 언제나
추상적인 요소이며, 모든 경우에 있어서 '숫자'
들과 연관되는 함축적 요소이다. 그리고, 이원적
혹은 삼원적 규칙적 반복성은 호흡의 규칙적
반복성의 최초 두 요소이다. 우리가 계속적이고
규칙적인 어떤 활동을 할 때― 걷거나, 글을
쓰거나, 일반적으로 일을 할 때 ―에 는 우리의
호흡 박자는 저절로, 들이마시고 내뿜는 것이
동일한 지속을 갖는 이원적 형태를 취한다.
이것이 강박(强拍)-약박(弱拍), '아르시스(arsis)-테시스(thesis)'
의 형태―마티스 뤼씨(Mathis Lussy) 가 말한 대로
규칙적인 이원적 반복성이 생겨 나오는 '보정적(補整的)'
형태인 것이다. 반대로 쉬거나 수면을 취할 때의
호흡 박자는 저절로 세 박자의 형태, 다시 억음부(약박)가
양음부(강박) 보다 두 배의 지속을 갖는 보정적
형태를 얻는 것으로, 삼원적 규칙적 반복성의
근원이 된다.
여기서 나는 적은 괄호 하나를 열어 보충 설명을 해야 하겠다.
나는 '리듬의 규칙적 반복성(cadence rythmique)' 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이 규칙적 반복성(cadence)라는 말을 상용되지 않는 영역에다 적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독일어에서는 리듬의 규칙적 반복성이라는 표현을 쓰는 일이 절대로 없다. 다만 박자(Takt)라는 표현을 쓸 뿐
인데 이 단어는 '정적' 인 박자를 나타내는 말이다. 반면에 규칙적 반복성이라는 표현은 '동적' 인 박자를 나타내는 것이다. 독일어에서 이 표현을 쓰는 것은 언제나 으뜸-딸림-으뜸, 혹은 으뜸- 버금딸림-으뜸과 같은 화성의 진행 경우나, 악곡이나 악절의 피날레 부분에서
의 화성적인 종지를 장식하려고 '협주곡' 의
독주자가 연주하는 즉흥곡에 관해서일 뿐이다.
혹은 독일어로 병사들이 보조(步調)를 이야기할
때 쓰이지만, 이때의 규칙적 반복성이란 '강박'
과 '약박' 의 결과라는 사실은 무시한다.
마찬가지로 화성적인 규칙적 반복성이란, 이것이
동시에 리듬적이며 시간성의 규칙적 반복성이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것이리라. 요컨대 음악
가운데에는 리듬적인 규칙적 반복성임과 동시에
조성적인 규칙적 반복성이 아닌 것과,조성적인
규칙적 반복성임과 동시에 리듬적인 규칙적
반복성이 아닌 것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물론
리듬적인 그것이 조성적 우연성으로부터 벗어날
수도 있고, 단지 타악기에 의해서만 생길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이것은 더 이상 음악이 아니라
리듬일 뿐이다. 따라서 리듬의 규칙적
반복성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완전해 합법적인
것이 된다. 그리고 우리로서는 이 용어가 사전
가운데로 편입되기를바란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현상이 갖는 기원과 존재 이유를 찾는 과정에서의 설명과 일단 구성된 현상의 외양 가운데서 그 현상을 목표로 취하게 되는 설명 사이의 차이점을 보게 된다. 이제까지의 리듬 이론가들에게는 음악적 리듬이란 '박자(mesures)' 에 의해 조직된 것이었고, 음악적 시간은 그 측정 단위로서, 박자를 구성하는 지속치(持續値)를 갖는 것이었다. 이런 관점에서는, 음악적 시간이란 그것이 시간의 길이에 의해 측정된다는 의미에서 '정적' 인 시간이 되고, 박자는 하나씩 하나씩 덧붙여지는 지속의 단위이며, 리듬도 마찬가지가 된다. 게다가 이 음악적 시간은 그것이 8분 음표, 4분음표, 2분 음표, 점 8분·점 4분 또는 점 2분 음표의 길이에 기초를 두는 지속 단위에 의해 측정된다는 의미에서 '운율적' 시간이 되고, '템포'란 각각의 특수한 경우에서 채택되는 지속 단위에 달려 있는 속도가 된다. 결국, 이 음악적 시간이란 그저 외적인 시간 이상은 아닌 것이고, 이 세계의 시간과 혼동되고 마는 것이다. 음악적시간은 더 이상 안으로부터가 아니라 밖으로부터 결정되고 메트로놈으로 측정할 수 있는 것일 뿐이다. 그렇게 되면 박자나 리듬이라는 것은 이 세계 내에서의 지속들을 조직해 놓은 것일 따름으로, 조성 요소들에 시간의 척도를 부여함으로써 이 조성 요소들을 정돈 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스트라빈스키가 본 음악 적시간이다. 그에게 있어 음악적 리듬이 '시간' 가운데에 '질서' 를 나타나게 하는 목적을 지니고, 음악이 그 리듬을 통해 '시간과 우리사이에 조화를 이룩하는' 목표를 갖게 되는 까닭은, 그가 음악적 시간에 대해 '운율적인' 개념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시간' 이라고 말했을 때의 그 시간이란 분명 이 세계의 시간, 시계와 메트로놈이 측정해 내는 그런 시간인 것이고, 여기서 삐에르 수브친스키(Pierre Souvtchinsky)가 상상해 낸 '존재론적 시간' 이라는 근거 없는 이론이 스트라빈스키류의 '음악적 시간' 이라는 개념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나타났고, 이것은 또 지젤르 브를레 부인(Madame Gisèle Brelet)의 음악 미학 가운데서 채택되기도 한것이다. 그러니까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이 '정적' 인 것은 이 같은 음악적 시간에 대해 운율적 개념을 가졌다는 이유에서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리듬은 규칙적 반복성을 갖고 있고 바로 여기서 역동적인 힘이 느껴진다. 적어도 세부적으로는 말이다. 그러나
그의 이론에서 본다면, 대체 그 역동적인 힘이
어디서 생겼는지를 알 수가 없게 된다.
음악적 시간이 본질적으로 규칙적 반복성을
갖는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되면, 모든 것은
변화하고 만다. 규칙적 반복성이란 그 자체가
규칙적 반복성을 갖는 내적 에너지의 외향적
발현인 것이고, 또 이것은 음악적 시간에 하나의
'척도'를 부여하는 지속의 단위, 두박자 혹은 세
박자의 규칙적 반복성의 양태로부터와
마찬가지로, 규칙적 반복성 혹은 그의 내적
분절의 지속으로부터 얻어지는 '에너지의 특성'을
음악적 시간에 부여하는 지속의 단위를 정하면서
하나의 단단한 총체를 이루는 것이다.
이같은 하여 음악적 시간의 최초의 지속치는 2와 3이 되는데. 2 는 경우에 따라 8분, 4분, 2분 혹은 온음표로 표시되는 것으로 기본이 되는 이원적인 규칙적 반복성이 갖는 상부 구조이며, 3은 경우에 따라 점 8분, 점 4분, 점 2분 또는 점 온음표로 표시되는 것으로 기본이 되는 삼원적인 규칙적 반복성이 갖는 상부 구조가 된다. 그러나 우리의 능동적 실존은 맥박이나 호흡인 규칙적 반복성의 한계 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내적 지속의 최초의 요소에 기초한 구조, 그 역시 이원적이거나 삼원적인 규칙적 반복성을 갖는 구조인 소위 '박자' 가운데서 자체의 형태를 취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중추신경에 의한 근육의 수축성이 규칙적 반복성을 갖기 때문이다. 또 만일 음악이 그 자체의 고유한
시간을 창조하고, 시간이라는 것이 박자를
가져야 한다는 이유로 음악이 우리의 내적 혹은
외적 근육 수축을 어쩔 수 없이 도식화해야 하는
것이라면, 음악이 그같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것이 이원성 혹은 삼원성 또는 이원성과
삼원성의 혼합으로 이루어져 있는가에 따라
규칙적 혹은 불규칙적인 것으로 결정되는
반복성의 구조를 통해서일 뿐이다. 그렇게
때문에 박자는 2/8 나 3/8, 또는 2/4 나 3/4 이 되고, 4/4,
2/2 (알라 브레베, allabreve)가 될 수 있으며 3/2이나
4/2 혹은 6/16(두 개의 점 8분 음표), 6/8, 6/4, 6/2 (이원적인
것 모두) 그리고 9/16, 9/8, 9/4(삼원적인 것 모두),
또 12/16, 12/8 또 때로는 12/4 등이 된다. 사원적인
반복성은 두 개의 이원적인 반복성 의 상층
구조이지만 그것은 하나의 총체를 이루는 것으로,
비록 다소간 드러내 보여지는 이원성의 하부
구조를 포함하기는 해도, 우리 의 기본적 규칙적
반복성이 갖는 최초의 초월 행위가 된다.
'온음표'와 '점 온음표'는, 비록 규칙적 반복성의 구성에는 관계하지 않지만, 다른 모든 지속치가 연관될 수 있는 지고치(至高値)이며 절대가 된다. 불규칙적인 반복성을 갖는 박자들로 5/16, 5/8, 5/4, 또 때로는 5/2 등이 있을 수 있는데, 이것들은 2가와 3가로 구성된 이원성에 의한 규칙적 반복성이거나 혹은 그 반대의 경우가 된다. 또 7/16, 7/8, 7/4, 때로는 7/2이 있을 수 있는데, 이들은 3가 하나와 둘로 구성된 삼원성에 의한 규칙적 반복성이다. 또 이원
성에 의한 다른 반복성도 가능하다. 즉 3+3+2의 형태를 갖는 8/8 이 그것으로, 미요(Milhaud)의 작품〈프로테우스 Protee〉에서 그 좋은 예를 찾을 수 있다. 농담을 즐겨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차이코프스키의 〈비창〉의 5/4 박자를 처음으로 연주하게 된 지
휘자들은 다섯 번째 박자를 어찌할 줄을 몰라,
네 박자를 젓고 나서 다섯 번째 박자를 표시하기
위해 따로 한 동작을 붙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곧
그것이 불규칙적인 알라 브레베(,alla breve : 2/2박자)
즉 2+3 인 것임을 알게 되었다. 쟈크 달크로즈(Jacques-
Dslcroze)가 스위스 곡조에 붙인 변주곡들 가운데서
좋은 예를 보여준 5/8 역시 하나의 총체를 이루는
것이지만, 시간의 단위를 정하고 이원적인 혹은
삼원적인 새로운 규칙적 반복성을 만들기 위해,
뒤따르는 박자들과 조합을 이루는 것은 그 박자
자체인 것이다. 어쨌든 이 모든 박자들이 지속
단위의 정수(整數)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니까 메씨앙이 '가점(加點, point d'ajout)'
이라 부르는 것을 도입해서 만들고자 했던 또는 , 혹은 같은
박자는 있을 수가 없다. 그 까닭은, 음악
가운데서의 우리의 실존은 정수를 형성하면서
동질적으로 반복되는 정확한 지속 단위를 '가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내적 실존 그
자체가 맥박이 뛰는 지속 단위에 의해 전개되기
때문이다. 물론 맥박도 '변화할 수 있는'
것이지만, 각각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래도 역시
우리의 지속의 형태를 취할 수 있게 해주는
박자의 단위가 된다. 그리고 맥박이 뛰는 데는
오직 정수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또 한번의 '그러나' 이다―'이 세계 내에서의' 우리의 활동은 우리의 시간성이 갖는 규칙적 반복성의 구조를, 다시 말하면 박자의 연쇄를 초월하는 것이다. 그것은 멜로디에 의해 의미되는 우리의 의식 활동의 음악 가운데서의 자유로운 전개이고, 이 멜로디는 몇 개의 박자들을 포함할 수 있는, 우리가 동기라 부르는 동형 진행(sequences)들에 의해 형태를 추하고, '동기들' 의 연쇄는 '악구(樂句)'를, 악구의 연쇄는 '악절'을 그리고 악절의 연쇄는 전체 형태를 이루게 된다. '리듬' 이 나타나는 것은 바로 여기서이다. 따라서 음악에서의 리듬이라는 것은 박자의 규칙적 반복성이 갖는 구조가 아니다. 이 구조는 단지 그것의 기초가 될 뿐이다. 리듬이란 시간 가운데서 멜로디의 노정이 그려 나가는 지속의 구조이고, 이 지속의 구조라는 것은 우리의 모든 근육의 수축이 규칙적 반복성을 갖기 때문에 그 역시 규칙적 반복성을 갖는 것이다. 다만 박자의 틀 가운데에서 전개된다는 사실에 의해 조건 지워지는 이 구조는 그 자체의 고유한 규칙적 반복성을 갖는다. 그렇게 때문에 멜로디의 리듬은, 박자에 의해 고정된 규칙적 반복성의 틀과 합리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동일한 지속 단위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고, 이렇게 해서 멜로디는 셋잇단 음표에 의해서 2/4 박자를, 그리고 일반적으로 2가의 박지들을 뛰어넘어 갈 수가 있는 것이다. 또 지속 내에서의 실존의 자유로운 전개가 리듬 가운데에서 문제되는 이상, 우리는 여기서 예를 들어 2/4나 3/4에 포함될 수 없는 의 길이를 갖는 음표 나 의 길이를 갖는 음표와 같이 분수값을 갖는 박자들을 만나게 된다. 또 다른 한편으로 음악 의식이 멜로디가 의미하는 바를 포착하는 것은 멜로디 가운데에서이므로, 운율과 일치할 수 있는 음악의 진정한 액센트를, 그러나 멜로디의 길 그 자체 가운데에 근원을 두는 음악의 진정한 액센트를 발견할 수 있는 것도 바로 멜로디의 리듬 가운데에서이다. 그 '리듬'의 액센트는 멜로디의 규칙적 반복성을 눈에 띄게 강조한다. 〈전원 교향곡〉의 첫 번째 동기에서 파(fa)음에 놓여진 액센트가 그 좋은 예가 된다. 마티스 뤼씨라면 아나크루즈 (anscrouse : 양음절로 시작되어야 할 시행 첫머리에 놓인 하나 또는 두 개의 약한 음절―역주)에 의해 예비된, 여성 어미를 가진 이원적인 멜로디의 규칙적 반복성이라고 했을 것이다. 또 때로는 '표현적' 액센트(accent expressif), 비장(悲壯) 액센트(accent pathetique) 등과 당김음(syncope) 등도 음악의 진정한 액센트를 드러내 주는 것이 된다. 그
가운데에서 이 당김음은 규칙적 반복성의
구조에 있어서 모순적인 것으로, 규칙적
반복성의 재배로부터 벗어나려는 의식의 한
방책이 되는 것이다.
리듬에 관해 해야 할 이야기를 다했다고
생각할 수는 없지만, 여러분들의 눈앞에 음악적
시간의 뼈대를 그 본질적인 부분까지 드러내
보일 만큼은 충분히 이야기되었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이 같은 복합 구조 속에서 우리가 '템포'
라 부르는 것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 나는 템포란
속도가 아니라 음악의 진행에 있어서의 에너지의
특성이며, 이는 규칙적 반복성의 양태와
마찬가지로 그 반복성이 형태를 얻게 되는 지속
단위의 길이에도 관련이 되 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렇기는 하나 이 지속 단위가 그것의
길고 짧음에 따라, 바로 우리로 하여금 '템포' 에
관하여 이야기하게 하는 '동력학적(cinetique)'
특성을 음악의 진행에 부여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따라서 가장 긴 단위에서 가장 짧은
단위로 가면서 템포는 '느린 것'에서 '빠른 것'으로
변화하게 된다. 그러나 느린 것과 빠른 것의
한계는 어디에 나타나는 것인가 ? 무엇이 그것의
위치를 정하는가 ? 예를 들어 '안단테' 저편으로 '빠른
것' 의 범주인 '알레그레토', '알레그로', '프레스토'
가 있고, 이편으로는 느린 것의 범주인 '아다지오'
'렌토', 그리고 '라르고' 가 (이 표현들과 장
어울릴 수 있는 모든 뉘앙스를 지니며) 있게
하는가 ? (주: 라르고,
비바체, 안단테 등을 빠르기를 지시하는
이태리의 박자이다. 느린 순서 대로 열거하면
가장 느린 라르고- 아다지오- 안단테- 모데라토-
알레그로- 프레스토- 프레스티시모가 된다.) 이것의
이해를 위해 우리는 화성 시대의 음악으로부터
몇 개의 예를 차용해야 하겠다. 그 까닭은
템포라는 '문제' 가 제기된 것은 화성 시대(화음과
화음의 연쇄 위에 음악이 기초한 시대)의 도래
이후인 까닭이고, 이는 당시에 선율적인 것과
화성적인 것 사이에 분화가 생겨났고 화성적
진행에 비해 선율적 전개가 엄청난 자유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 바로 이 시기에 와서 '템포'
의 특성을 나타내 주는 것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태리의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했던 것이
다.
자, 그러면 모차르트의 〈쥬피터 교향곡〉의
느린 악장을 생각해보자. 멜로디는 4분 음표 세
개에 의한 규칙적 반복에서 그 형태를 취하고
있으나, 멜로디의 첫 번째 도약은 두 개의 마디를
감싸고 있고 따라서 점 2분 음표 두 개에 의한
규칙적 반복 위에서 형태를 취한다. 그러나 이
멜로디는 '4분 음표'를 기본적인 지속 단위로
삼는, 8분 음표 두 개에 의한 규칙적 반복이라는
화성적 토대 위에서 흘러간다. 이 8분 음표 두
개에 의한 규칙적 반복이 곧 우리 내부에서
고동치는 것이고, 우리가 멜로디 앞에서 실존해
내는 그것이다. 나는 이것을 점 2분 음표 두 개에
의한 '선율적 반복성(cadence melodique)' 에 대비해서
'실존적 반복성(cadence existentielle)' 이라 부른다.
이제 다시 모차르트의 〈G단조 교향곡〉의 '피날fp'를
생각해 보자. 멜로디는 2분 음표 두 개에 의한
규칙적 반복성 위로 비상하는 반면에 저음부는
각 마디 가운데에서 침체해 있다. 그러니까
멜로디는 온음표 두 개에 의한 규칙적 반복의
토대 위로, 2분 음표 두개에 의한 2중의 규칙적
반복성을 가로질러 간다. 혹은 첫 번째 선율의
비약의 끝까지 간다면, 멜로디가 2분 음표 두
개에 의한 네 개의 규칙적 반복을 가로지르는
동안, 우리는 온음표에 의한 두 개의 규칙적
반복을 내적으로 실존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첫
번째 경
우, 선율적 반복성은 실존적 반복성의 상부 구조로서 우리의 맥박 보다 더 느리고 따라서 우리에게는 '느린' 진행이 되고, 두 번째 경우에서는 선율적 반복성이 실존적 반복성의 하부 구조가 되어 우리에게는 빠른 진행이 된다. 그러니까 느린 것과 빠른 것을 구별하는 것은, 전자가 우리의 내적인 근육 수축성 앞에서 '지속'을 밝히는 것이고, 후자가 우리의 내적 지속 앞에서 '근육의 수축성'을 밝힌다는 사실인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것으로, 때로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리의 실존 시간에 비해 느리게 흘러가는 사건들을 겪기도 하고, 또 때로는 우리의 실존 시간 가운데서 서둘러 가는 사건들을 겪기도 하는 것이다. 이제는 모차르트의 〈E?교향곡〉의 '안단테' 악장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멜로디는 4분 음표
두 개에 규칙적 반복성 위로 흘러가고,
저음부도 마찬가지가.
양쪽이 모두 2분 음표를 그의 기본적인 지속
단위로 삼는다. 그러므로 선율적 반복성과
실존적 반복성은 일치되거나 혹은 합치된다.
나의 외적 활동은 내 맥박이나 호흡의 규칙적
반복성의 정상적인 흐름 위에서 펼쳐진다.
이것이 바로 정상적인 상황으로, 이 이외에서는
우리는 빠른 것 가운데 있거나 느린 것 가운데에
있는 것이된다. 이제 우리는 〈C장조 교향곡〉의
라르게토에서의 '4분 음표'와 〈G단조 교향곡〉의
피날레에서의 '온음표', 그리고 〈E? 교향곡〉의
안단테에서의 2분 음표 사이의 차이라는 것이
그렇게 큰 것이 아님을 알 수가 있고, 이 지속의
단위들은 대략 1분에 60에서 80정도 인 사람의
맥박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음악에서의
우리의 '실존적 반복성' 은 결국 우리의 맥박에
연관된 것으로 '느린 것' 은 우리를 다소 안정된
맥박 쪽에, 그리고 '빠른 것' 은 다소 급한 맥박
쪽에 있게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느린 것'과 '빠른
것' 의 뉘앙스를 결정하는 것은 멜로디
가운데에서의 지속의 길이이다. 〈쥬피디
교향곡〉의 '라르게토'에서 베토벤〈제4번
교향곡〉'아다지오'로 넘어가게 되면, 여러분은
상당한 리듬의 움직임에서 '4분 음표' 에 의한
조용한 움직임으로 넘어가게 될 것이고, 거기서
다시 베토벤 9번의 '아다지오 몰토' 로 넘어가게
되면 여러분들은 '2분 음표' 에 의한 한층 더
조용한 움직임 앞에 있게 될 것이다. 또
모차르트의 〈G단조〉의 '피날레'에서
〈피가로의 결혼〉 서곡으로 넘어가면, 여러분은
4분 음표의 진행에서 8분 음표의 진행으로, 그리고
'알레그로 비바체'에서 '프레스토' 로 넘어가게
될 것이다. 이때 두 번째 작품의 8분 음표들은 4분
음표 네 개에 의한 규칙적 반복성을 드러내
보여주고, 첫 번째 경우에서는 2분 음표 두 개에
의한 규칙적 반복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프레스토'
의 4분 음표들은 알레그로의 2분 음표들보다 더
빠른 것이 된다.
이 예들은 우리에게 '템포' 란 '리듬의 내적
구조' 에 의해 결정되고 특성을 부여받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훌륭한 음악가는 악곡의 정확한 템포(tempo giusto)를
찾기 위해 메트로놈을 사용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 작곡가가 '템포'를
지정하는 것은 상황을 좀더 분명하게 하는 것이
될 것이고, 메트로놈 표시를 해줌에 따라 8분
음표나 4분 음표 혹은 2분 음표 등 작곡가가
의도하는 기본적 박자의 단위를 지시하고, 이
단위의 평균 정도로 희망하는 길이를 연주가에게
제시함으로써 애초의 오해를 피할 수는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해석 가는 일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더 이상 외적으로 주어진 바를 따라갈
수가 없고, 스스로가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 '템포'를
만들어 내야 한다. 그가 〈쥬피터 교향곡〉의
라르게토를 지휘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는 화성
반주의 8분 음표에 의한 진행을 대단히 느리게
연주하고 싶어질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멜로디는 어울리지 않는 둔하고 질질 끄는 듯한
모습을 띠게 될 것이다. 만일 반대로 멜로디의
움직임에다 좀더 대담한 모습을 부여한다면,
이번에는 반 주부의 8분 음표에 의한 진행이 이
라르게토의 장중함에 걸맞지 않는 경박하고
쓰잘데없는 듯한 성격을 갖게 될 것이다. '정확한(giusto)'
템포란 결국 선율적 반복성과 실존적 반복성
사이의 관계가, 멜로디에게나 혹은 규칙적
반복성을 갖는 멜로디의 토대에게나 모두 그것의
진정한 성격을 주는 순간에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또 한번 음악적 리듬의 규칙적 반복성이라는
본질이 이 리듬으로부터 모든 기계적 성격을
제거해 버린다는 점을 주목하기로 하자. 물론
선율적 표현이 리듬이 구조에 기인하고, 음악적
진행의 동력학적(cinetique) 특성이 하나의 악구나
악절을 통해 계속 유지되어야 하는 한, 규칙적
반복성은 엄격하게 지켜져야만 한다. 그러나 '규칙적
반복성의 구조가 정적이고 일관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템포의 약간의 변동은 가능한 것이다.
비엔나의 왈츠의 경우, 반주 부분의 엇박(contretemps)
은 약하게 당겨진(syncope)것이 된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왈츠의 삼원적인 규칙적 반복성의 특수한
성격을 강조하는 것뿐이다. 그러니까 선율적
반복성 그 자체는 왈츠의 규칙적 반복성이 그
구조에 있어 아무런 변화를 갖지 않아도, 맥이
풀려 버리거나 혹은 활기를 띨 수가 있는 것이다.
브라암스의 제3번 교향곡 의 제2악장에서 두 번째
테마(9/4박자)의 템포는 첫 번째 테마와 비교 할
때 두 테마의 성격적 차이 때문에 첫 번째
테마보다 아주 조금은 더 차분할 수도 있지만, 4분
음표 세 개(점 2분 음표)에 의한 실존적 반복성(cadence
existe tielle) 은 두 테마 가운에서 공통적인 것이
까닭에, 두 테마 사이의 내적 관계는 자명한
것이다. 이와 같이 템포의 유동성은, 규칙적
반복성이 자유롭게 내적으로 빚어지거나 혹은 이
규칙적 반복성의 가속되거나 감속됨으로써
비롯되는 것으로, 후자의 경우는 이를 정당화할
표현적 의도가 리타르단도(rit, 점점 느리게)나
아첼레란도(accell. , 점점 빠르게) 의 경우와 같이,
일반적으로 작곡가에 의해 명시되어 있을
경우에만 감지될 수 있다. 그러니까 음악적
시간이란 결국 메트로놈적인 것이 아니다.
음악적 시간은 규칙적 반복성을 갖는 것으로 이
음악적 반복성은 살아있는 반복성이지 기계적 인
반복성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리듬이 풍부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리듬이 사용하는 규칙적
반복성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규칙적
반복성과 리듬을 규칙적으로 반복하게 만드는
가운데에서의 리듬 전개의 자유로움에
기인한다는 점에 주목하기로 하자. 불규칙적인
반복성 (5 혹은7)이 규칙적인 반복성보다 더
풍부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다른 것일 뿐이고, 또 다른 표현 의도에 부합되는
것일 뿐이다. 리듬이 갖는 자유로움은 규칙적
반복성이 갖는 자유에 의해 나타날 수도 있고―예를
들어 이원적인 규칙적 반복성
과 삼원적인 규칙적 반복성이 교대하는 평성가(平聲歌, plain-chant) 같은 경우나 혹은〈봄의 제전〉의 종무곡(終務曲)에서처럼 불규칙적이지만 계속 그 구조를 변화해 가는 반복성을 사용하는 경우―또 는 주어진 반복성 가운데서의 그 전개의 자유에 의해서 나타날 수도 있다.(후자의 경우는 〈목신의 오후〉 전주의 첫 번째 테마를 생각하면 된다) 첫 번째 경우에서는 엄밀한 의미에서 본다면, 반복성에 의한 자유이지 리듬에 의한 자유는 아니며, 이 반복성에 의한 자유는 리듬에 의한 자유들 잠식하기 때문에 거의 약점이 되고 있다. 또 〈봄
의 제전〉 가운데서 위에서 언급된 악절에서는
다른 리듬은 없고 단지 반복성만을 드러내
보여주는 리듬만이 생길 뿐이고, 바르토크의〈현과
타악기 그리고 첼리스타를 위한 음악〉의
피날레에서도 멜로디가 박자를 바꿔 가며
연속적인 진행 가운데로 뛰어드는 그 순간에는
오직 박자만을 드러내 보여주는 리듬이 있을
뿐이다. 복합 리듬(polyrythmie)이란 오직 계속적인
반복성의 토대 위에서만 있을수 있는 것이고,
원칙적으로 규칙적인 반복성의 토대 위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또 진정한 리듬의 자유란 그
규칙적 반복성을 만드는 그의 방식 가운데에서
표현된다. 이 점에 관해서 나는 드뷔씨의〈봄의
론도〉의 가운데 악절을 예로 들고 싶다. 이
작품을 보면, 그 첫 박자는 오케스트라에 의해
강조되지도 않는데도, 삼원적인 규칙적 반복성의
토대 위에서 기악성부의 대단히 다양한
반복성들과 리듬들이 생겨난다.
내가 여러분에게 이 같은 발표를 한 것은, 음악의 리듬과 박자의 본질이 운율적(metrique)인 것이 아니라 규칙적 반복성을 갖는 것이라는 점을 납득시키기 위해서였다. 물론 운율(le metre)이란 이 규칙적 반복성에 의한 균형의 결과이긴 하지만, 필연적인 결과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다면 시간의 단위란 있지도 않을 것이다. 바로 이점을, 박자에 박자의 파편을 덧붙여 (메씨앙의 '가점(point d'ajout)'이 그 증거가 된다) 리듬을 제조해 내는 소위 전위 음악가들은 완전히 잊어버리고 만 것이다. 메씨앙은 과거의 음악가들이 리듬의 원천을 제대로 이용하지 못했다고 주장하지만 과거의 음악가들이야말로 '리듬' 과 '운율'을 혼동하는 이 젊은이들로서는 알지 못하는 리듬의 자유(내가 정의한 대로의 의미에서)를 입증했던 것이다. 이 젊은 음악가들이 그와 같이 한 것은, 이들이 리듬의 구조와 조성 구조를 분리했기 때문이다. 이 정도로 음악의 의미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들은 진정한 음악 속에서는, 마치 우리의 육체와 영혼이 그렇듯이 리듬 구조와 조성 구조가 함께 태어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또 비록 이 두 구조들이 동일한 법칙에 의해
지배받는 것은 아닐지라도 서로서로 분리 될 수
없는 것임을 보지 못했다. 그들은 리듬 구조를
따로 다루어 운율 구조로 격하시켜 버렸을 뿐
아니라. 설상가상으로 리듬 구조에다가 조성
구조와 마찬가지의 음렬 조직법칙을 적용한
것이다.
같은 오류가 기악 연주자나 오케스트라 지휘자
할 것 없이 수많은 젊은 해석 가들에게 퍼졌다.
그들은 음악적 리듬에 대해 운율적 개념을 갖게
되었고, 이는 때때로 그들의 연주에다 기계적인
성격을 부어하곤 했다. 같은 이유에서 그들은
너무 빠르게 아니면 너무 느리게 연주하였고,
정확한(giusto)템포를 전혀 찾지 못하였다. 그
까닭은 운율이란 것이 확실한 것이 못되고
하찮은 그 무엇이라도 잘못되게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규칙적 반복성은
균형 원칙에 입각해 있기 때문에 확실한 것이다.
고백컨대, 이 모든 생각들은 나로 하여금 리듬 훈련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갖게 한다. 분명 쟈크 달크로즈도 규칙성 반복성에 대한 센스를 갖고 있었지만, 그의 학생들을 모든 상투화된 규칙적 반복성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는 그의 우려는 그로 하여금 리듬의 운율적 측면을 강조하게 하였고, 단순히 규칙적 반복성만을 느끼는 대신 운율을 세어 가면서 연주할 수 있는 연습곡들만을 쓰게 했다. 나는 여기에 대해서, 규칙적 반복성을 더욱 더 발전시켜 달크로즈식의 리듬에 관한 것을 한 발자욱 앞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 학생들에게 마디마디마다 변화하는 규칙적 반복성을 갖는 연습곡을 연주하게 하는 대신에, 같은 마디에 두 개의 박자를 갖는, 예를 들어 셋잇단 음표나 넷잇단 음표 혹은 일곱잇
단 음표 등과 같이 대단히 다양한―자유롭거나
혹은 규칙적인 리듬들을 연습시키는 것이다.
이미 이야기했듯이, 리듬은 멜로디를
운율적으로 정리해 놓은 것이 아니라 마디와
마디 내의 박자수를 내적으로 빚어 놓은 것이다.
〈목신의 오후〉 전주의 피날레 악구의 다음
부분을 보라. 첫 번째 마디에서는 세 박자, 두
번째에서는 두 박자, 그리고 뒤에 이어지는
마디들에서는 두 박자와 세 박자가 교대로
나타난다. 연주자에게 있어서의 가장 큰
어려움은 단지 네 번 박자를 세는 가운데, 연주자
자신이 멜로디에다가 리듬이 그려 놓은 그
곡선을 씌워 주어야 하는 일이다. 학생들에게
키워 주어야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리듬의
내적 의미인 것이다.
우리는 조성감도 리듬감도 완전히 병든 시대에
있다. 우리의 모든 음악적 정서의 진실한 회복이
우리 예술의 미래 그 자체를 위해 서도 필요한
것이다.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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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