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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사평론 - 정론직필을 찾아서 원문보기 글쓴이: 허허공공
Korean Impact on Japanese Culture출판사: Hollyn International Corp |
일본천황 혈통은 한국이며 일본의 시조는 통설대로 기원전 660년이 아닌 서기 369년임을 밝히는 [부여기마족과 왜(倭)]라는 이 책의 저자는 10년 전 세상을 떠난 미국인 여성 사학자 존 카터 코벨이 쓴 책이다. 이 책은 이 책은 바다 건너 일본을 정벌한 부여족과 가야에 대한 글들을 묶은 것이다.
부여족의 야마토 정벌 과정과 왕권 수립의 증거, 일본에 남아있는 한국문화의 흔적, 한국이 일본에 전한 영향, 일본의 역사왜곡 등을 다룬 62편의 칼럼이 수록돼 있다. 그리고 부여의 일본 정벌을 뒷받침하는 학자들을 거론하는데 미국의 그리피스, 페놀로사, 게리 레저드 등 코벨보다 앞서 일본문화의 근원이 한국이라고 주장했던 사람들이었다. 일본인 학자 중에도 에가미 나미오,기다 사다기지 등이 기마민족 정벌론을 인정했다.
한국 사학자로는 북한의 김석형과 남한의 천관우,최태영의 연구 결과를 소개하면서 한일 간의 다양한 문제를 역사적 관점에서 다루고 부여기마족이 일본에 가져간 말, 일본정벌, 한일관계, 역사왜곡 등을 다루지만 핵심 주제는 서기369년 진구왕후가 이끄는 부여기마족의 일본정벌로 인한 중앙집권적 정치제도와 역사 이야기들이다.
본문에서는 "일본 사가들은 369년 가야 부여족의 왜 정벌 이래 700년까지 한국이 정치적, 문화적으로 일본을 전적으로 지배했다는 사실을 완전히 감춰버렸다(313쪽)"고 했다. 일본이 초기 역사부터 8세기에 이르도록 문화에 있어서는 한국이 떠주는 음식을 받아먹고 자란 어린아이였다는 것이다. "정말 배은망덕한 사람들이다(314쪽)."라고 하면서 일본의 역사왜곡을 비판했다.
코벨 박사는 또 "솔직히, 나는 중동이 세계문제의 중점이라고 보지 않는다. 석유는 중요한 것이지만 세계는 지난 수천 년 간 석유 없이도 지내왔고 앞으로 대체연료를 찾아낼 것이다. 내가 보기에 동아시아 문제야 말로 중요한 것이며 한국은 거기서 중심축 역할을 하고 있다(320쪽)."고 했다.
코벨은 1978년부터 1986년까지 말년을 한국에서 머물며 한국문화를 탐색하는 1천4백여 편의 글을 남겼다. 이 책에는 부여족의 야마토 정벌과 왕권장악, 일본에 남아있는 한국문화와 일본에 끼친 한국의 영향력과 임진왜란, 조선통신사, 일본의 역사왜곡을 학문적으로 밝히는 내용을 담은 62편의 글을 수록했다. 한국문화가 어떻게 해서 일본문화의 근원이 되었고 고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어떻게 도움을 주었는지 한국과 일본 고대문화사를 다루었다.
일본문화를 연구하면서 그 근원으로 인식하게 된 한국문화 연구를 위해 1978부터 8년간 한국에 머물며 연구에 몰두하여 한일고대사, 고려불화, 도자기 회화를 포함한 한국미술과 불교 등에 대한 1천여 편이 넘는 칼럼을 썼다.[한국이 일본문화에 미친 영향][조선호텔 70년사][한국문화의 뿌리]등 5권의 한국문화 관련 영문저작을 냈고, 일본문화와 미술에 관한 16권의 저작이 있다. 대표적인[대덕사의 선(禪)][일본 선정원 연구][이큐 선사 연구]등이 그것이다.
코벨의 연구는 한일간 역사전쟁의 한복판을 관통하는 한일 고대사 분야로 일본은 한국으로부터 문화를 전수받았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임나일본부설을 통해 자신들이 한국을 지배했었다는 주장을 한다는 것이었다.
일본 미술사 분야의 거장을 꿈꾸던 코벨은 일본에서 발굴되는 고대 유물의 대부분이 한국 땅에 뿌리를 두었다는 `고대사의 진실`을 알게 되면서 한국미술사에 집중되고 일본의 고대유물에 남아있는 한국의 흔적들을 찾아냈던 것이다. 일본은 과거 500년이 넘게 역사를 왜곡해왔고, 대부분의 사람이 이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내가 공부한 한국의 고대사와 고고학에 따르면 바로 한국인들이 고대의 지도자들이었으며 당시 중국인에게 난쟁이들, 혹은 왜구로 알려진 지금의 일본인 이야말로 선진문명을 감지덕지 받아들인 수혜자라고 했다.
코벨은 또 "4세기경 한국인들이 일본에 건너가 문화를 전수했을 뿐만 아니라 국가 건설을 주도했다" "일본인의 조상 중 상당수는 한국에서 건너간 한인이다" "일본 왕실은 한국에서 말을 배에 싣고 건너간 모험가들이 건국한 왕실에서 시작된 것이다" 등 그녀의 주장 대부분이 영문으로 발표되어 일반 대중에게 닿기 어려웠다. 그러나 코벨의 번역자 김유경은 1980년대 경향신문 문화부기자 출신으로 코벨의 글을 받아 1년간 신문에 연재를 했던 사람으로 "한국문화를 세계에 알리는데 코벨만한 사람이 없다. 코벨은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한국문화 해설자"라고 소개했다. 제3국의 학자라는 객관적 위치에서 유물과 예술품을 통한 고고학적 접근으로 누구나 읽기 쉬운 칼럼형식이었다.
코벨은 이렇게 말한다.1980년 나는 유네스코 강당에서 3대의 영사기로 컬러 슬라이드를 비춰가며 한국ㆍ중국ㆍ일본의 예술형태를 통해 극동의 세 나라를 비교하는 강연을 했다. 세 나라의 특성을 한마디로 요약할 말을 찾다가 영어의 C자로 시작하는 낱말을 떠올렸다. 중국은 통제(Control), 한국은 무심함(Casual), 일본은 작의적(Contrived)이라고. 이런 대비는 삼국의 도자기를 비교해보면 뚜렷하게 드러난다.
중국 도자기는 가마와 유약의 사용을 철저하게 관리한 결과 특히 도자기에서 완벽의 경지를 이뤄냈다. 한국의 도공은 언제나 자연스럽기 짝이 없고 무심해서, 이들이 만들어낸 도자기에는 도공의 기질과 불이 어떻게 작용했는지가 그대로 반영된다.
일본인들은 15세기 이도다완 전쟁에서 보듯, 이러한 한국적 무심함을 높이 취해서 과도하게 발전시킨 나머지, 그들의 도자기는 자의식이 담긴 작의적인 것이 됐다. 일본인들은 가마에서 구워낸 화병의 한 귀를 일부러 구부리거나 깨버림으로써 한국 도자기가 갖는 것 같은 `무심함`의 미를 주려고 한다.
미국인이 보기에 한국 도자기의 이런 무심함은 솔직함과 통한다. 내가 일본의 교토보다 서울에서 더 편히 지내는 이유는 지극한 미소로 일관하는 교토 사람들보다 상대적으로 솔직한 서울사람들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나는 10여 년 동안 매년 여름과 겨울을 교토 대덕사(大德寺)의 유명한 선사찰 진주암에서 보냈는데, 그 무렵 나는 주지스님과 삶에 있어 `솔직함`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로 자주 다투곤 했다. 면전에서 하는 말과 등뒤에서 하는 말이 다른 일본인의 이중성에 대해 지적하면 그는 그래야만 하는 것으로 정당화하곤 했다.
그리고 일본인들은 두 세대 전 한국인들에게 한국문화는 열등한 것이라며 일본말과 일본 이름, 일본식 제도를 따라야 한다고 강권했다. 한국의 수많은 서책이 불에 타 없어지고 예술 활동도 금지됐다. 숱한 보물이 나라 밖으로 실려 나갔다. 석굴암을 해체해 돌 하나하나를 일본으로 옮기려고까지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일본은 거짓말과 날조를 통해 한국인에 대한 문화적 대량학살을 감행했다. 그러나 진실은 일본이 초기 역사부터 8세기에 이르도록 한국이 떠주는 음식을 받아먹고 자란 어린아이였던 것이다.
박정애 시인 ysnews0900@hanmail.net
출처:http://m.yangsan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59776
우리의 보편적 역사인식보다 더욱 진실에 다가선 학자들이 있군요.
부여의 영향으로부터이겠지만 삼국시대의 고구려, 백제, 신라가 다 왜에 관여하였고 그 중 백제의 귀족들이 일본을 접수하였다고 생각됩니다. 백제의 멸망시 일본의 원군까지도 저항하였으나 한을 품고 대거 일본으로 건너갔고 그들은 끝없는 고토회복의 꿈을 꾸어왔습니다.
그러한 역사의 긴 흐름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싶습니다.
사실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의 쿠테타(물론 삼봉의 위민과의 콜라보지만)로 또 분서로 역사의식이 쇠퇴하였었고 일제의 역사말살 정책으로 우리의 역사인식이 스스로를 돌아보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적폐인 식민 강단사학을 바로 잡으면 역사인식의 새로운 지평이 열리리라 봅니다. 이제 고구려, 백제, 신라를 넘어 동이족이 주체가되어 구리족 대통합의 세계사가 씌여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