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역사속에서 의술로 활동했던 사람들의 이야기
▣ 승의, 충담사와 찬기파랑가 ▣
삼국시대에는 한학이 널리 보급되면서 역학, 의학 등 과학 연구도 활발하였고 공예, 건축 등 기술 부문에서도 상당한 발달을 보였다.
통일신라의 학술은 일반적인 한학은 물론 기술분야인 의학, 병학, 역학, 산학, 율학 등을 포함함으로써 그 범위가 사회생활을 실제로 이끌어 갈 정도로 크게 넓어졌다.
아픔의 치유
옛날 사람들은 몸이 아프거나 병에 걸렸을 때, 어디서 어떻게 치료를 받았을까? 그리고 질병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었을까? 사실 환자가 '어디어디가 아프다' 라고 호소하였을 때 '아픔' 의 상태는 상당히 여러 차원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아픔을 기계적이고 물리적인 경로로 해석하는 오늘날에도 마음의 아픔과 육체의 아픔은 구별되고 있다. 고대인들은 어쨌든 편치 않은 상태는 그것이 심리적이건 물리적이건 모두 '아픔' 으로 표현했다. 따라서 아픔의 원인도 오늘날같이 단순히 병리학적 차원으로 환원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아픔은 아픔을 느끼는 환자를 둘러싼 가족과 마을 공동체, 나아가 사회 차원의 문제이기도 했으며, 환자가 누구이냐에 따라 정치적이면서 국가적인 문제이기도 하였다. 심지어 우주, 삼라만상 모두와 관련 있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중국에서는 일찍이 한자를 생각과 사물을 반영하는 심벌로 사용하였다. 고대 한자에서는 '질' 과 '병' 을 구분하여 '질' 은 화살로 인한 외상의 아픔을, '병' 은 내부의 아픔을 상징하였다.
이렇게 신체 내부의 아픈 상태와 신체 외부 즉 외상은 구분되었지만 여전히 심적 아픔과 장기 내부의 아픔이 크게 구별되지는 않았다. 고대에는 아픔의 원인이 주로 외부에서 찾아졌다. 귀신이 침입하였다든지, 사회가 혼란하다든지, 집안이 편치 못하다든지 하는 외부 환경이 모두 인간생활과 인간에 영향을 미친다는 관념을 가지고 있었던 탓이다. 따라서 의사의 역할은 외부의 사악한 기운을 몰아내는 것이었다.
때문에 그는 심리 치료사인가 하면, 약으로 치료하는 의사이기도 했고, 남의 아픔을 자신이 맡아 싸워 해소하는 카운셀러이기도 했다. 심지어는 정치가이기도 했다.
고대의 의사를 표시하는 '의' 라는 단어는 매우 재미있는 형상을 가지고 있다. 즉 무당이 화살 갑 속의 화살을 들거나 창을 잡고 악귀를 쫓아내는 모습을 재현한 것이다.
우리 나라의 고대에도 이 같은 생각은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제정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당들의 주된 임무는 악귀를 쫓는 것이었고 정치적으로 나쁜 일도 같은 원리로 치료하였다. 그러나 점차 정치조직의 단위가 커지면서 부족이 부족연맹으로 나아가 국가로 발전하자 정치행위 역시 점점 복잡해졌다. 이제는 무당들에게 정치를 맡기기는 어려워진 것이다.
제정이 분리되기 시작했다. 부족들은 서로간의 연맹 단계를 거치면서 점차 국가로 성장하였고, 정치이념으로 불교나 유교 등 선진 사상을 수입하였다. 불교는 고대 국가의 형성기에 도입됨으로써 부족단계의 사상을 넘어 국가적 이념으로서 기능하게 되었다. 동시에 이전에는 무당들이 담당했던 질병 치료를 불교 승려들이 담당했다.
불교의 원산지인 인도가 자랑하는 외과 및 내과 지식들이 중국을 거쳐 수입, 승려 의사들에게 전해졌고 무당들의 기원과 귀신 쫓기 등의 치료방법도 같이 사용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신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승려 의사의 역할
신라에서 화랑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 집단이었다. 화랑은 진골귀족 가운데서 선출된 화랑 한 명과 승려 약간 명 그리고 수백 명의 낭도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서로 단체생활을 하면서 도의를 닦고 무술을 연마했다. 이 집단에서 승려 낭도의 역할은 화랑을 보좌하고 지도하는 것이었다. 즉 청소년 조직이 본래 샤머니즘의 종교적 비밀단체와 같은 성격의 일면을 띠고 있었던 것을 계승, 고양시켜 부족단위의 범주를 넘는 불교의 보편적인 정신세계와 왕에 대한 충성심을 함양시키는 것이 이들의 할 일이었다.
굳이 최치원의 말을 빌지 않아도, 화랑의 사상적 경향은 유, 불, 선 삼교를 넘나들었다. 여기서 살피려고 하는 기파랑도 불교 승려 중 한 사람이었다. 우리들이 기파랑이라는 인물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충담이 지은 '찬기파랑가' 의 주인공이고 화랑이었다는 정도이다.
충담사와 경덕왕과의 만남을 소재로 한 '삼국유사' 의 일화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경덕왕은 주위를 둘러보며 말하기를 "누가 길에 나가 훌륭한 중 한 명을 데려올 수 없을까?" 하였다. (...) 이때 중 한 명이 누비 옷에 벚나무로 만든 삼태기를 지고 남쪽으로부터 오고 있었다. 왕이 그를 맞아들여 통 속을 들여다보니 차를 다리는 도구가 들어 있을 뿐이었다.
왕이 "당신은 도대체 누구인가?" 하고 물으니 중이 대답하기를 "충담이올시다. 남산 삼화령에 있는 미륵 세존님께 차를 올리고 막 돌아오는 길입니다."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 나도 차 한잔을 얻어먹을 인연이 있는가?" 했더니 중은 곧 차를 다려 바치는 데 차맛이 희한하고 찻잔 속에서 이상한 향기가 코를 찌를 듯하였다. (고대에 차는 곧 약을 의미하였다. 따라서 다방은 약방의 역할도 하였다.)
위 기록에서도 충담은 약을 다려 미륵에게 바치던 인물이었고, 그가 찬양한 기파랑 역시 비슷한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사실 기파랑은 인도의 외과 의사였던 지바카(Jivaka)를 음차 표기한 것이다.
기파랑의 활동
그럼 이제 고대 인도로 역사의 현장을 옮겨 석가모니의 담당 의사였던 기파의 활동에 대해 알아보자. 기원 전 5세기경에 살았던 인도의 명이 기파는 불경에 의하면 마가다국의 빔비사라왕과 천한 여자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인도에서는 부모가 어찌되었건 천한 여인의 몸에서 태어난 아이는 버리는 것이 습속이었다. 때문에 기파 역시 태어나자마자 길가에 버려지게 되었는데 다행히도 무외라는 사람이 그를 주워다 길러 주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손에 침약낭(침이나 약을 넣는 주머니를 말함)을 들고 있었다고 전해질 만큼 의학과 밀접하였다. 이후 핑갈라를 스승으로 의술을 배운 기파는 뛰어난 의술을 베풀면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불경에는 그의 활동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적혀 있다. 대표적인 것만 들어보아도, 12년에 걸친 만성두통을 코를 씻어 치료하였다든가, 빔비사라왕의 치질을 수술했다거나, 왕사성에서 두개골 절개수술을 한 것, 구섬미국 왕자의 복부 절개수술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또 그는 소아과 의사로도 유명했는데 그의 이름인 지바카 코마아 랴뷰르타는 '소아를 돌보는 자' 라는 의미가 있기도 하다.
두개골을 절단한다거나 복부를 절개하는 등의 수술은 모두 외과적 기법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기파의 치료술은 대부분이 외과 수술로 고대 인도 의학이 도달하였던 외과 의학의 성과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인도의 전통 의학인 아유르베다에는 내과 의서인 '차라카 본집' 과 '슈슈르타 본집'이라는 외과 의서가 있다. 인도 의학의 가장 위대한 발견은, 이른바 몸 안의 '이물질' 을 개복 또는 절개하여 제거하는 수술이었다. 이런 수술이 가능했다는 것은 당시 외과적 수술기법이 대단히 발달했음을, 또 동시에 내과 의학도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말해준다. 이렇게 발달한 인도의 의학 기술은 해로를 통해 중국과 한반도에 전파되었다. 그렇다면 과연 신라의 기파랑도 인도의 기파랑처럼 의사였던 것이 확실할까? 물론 이 질문에 대한 (어느 쪽이든) 정확한 답변은 불가능하다. 다만 당시 신라의 의학에는 전통의 치료법, 중국의 치료법, 불교와 같이 수입된 인도 의학의 영향 등이 섞여 있었고 이런 상황에서 인도의 명의 기파와 동일한 이름을 사용한 신라의 기파랑이 의학과 무관한 인물은 아니었을 거라는 추측만이 가능하다.
또 당시 의학지식을 가장 잘 흡수, 체득하고 있었던 계층은 유, 불, 도를 포괄하는 승려 낭도 즉 법사들이었을 거라는 점도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해 준다.
현재는 신라 시대 의서가 한 권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당시 의학의 내용을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다. 현존하는 신라 시대 의학관계 자료를 엿볼 수 있게 해주는 자료로는 일본의 한 의학자가 984년에 펴낸 '의심방' 이 있을 뿐이다.
'의심방' 에는 신라법사방이라는 몇 개의 처방이 실려 있는데 이를 통해 승려 낭도의 의학에는 고유의 처방에 더하여 도교 의학 그리고 인도 의학의 영향이 모두 섞여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도 기파랑은 치료의 신으로 기원과 기도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아픈 자들은 모두 기파랑의 이름을 외우면 낫는다고 믿었던 것이다.
나무동방 약사유리광불 약왕약상 보살 기파 의왕 ... (의심방의 주문)
[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기본적으로 질병을 치료한다는 점은 같지만 현재 의사의 역할은 예전과 많은 차이가 있다. 예전에는 '아프다' 는 의미가 지금과 달랐기 때문에 의사는 정치가이기도 하였으며, 심리학자이기도 하였고, 그야말로 오늘날 의미에서의 의사이기도 하였다. 정치가로서의 역할은 의사를 높은 지위에 이르게 하였으나 치료사로 역할이 변해 가면서 지위도 낮아졌다. 물론 오늘날은 전문가 시대가 도래, 의사라는 직업이 다시 각광을 받게 되었다. 고대 의사의 역할이 그렇게 다양했던 이유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보자.
▣ 해부를 하다니, 천벌을 받으려고, 전유형과 임언국 ▣
조선 후기에는 서양 의학의 전래로 18세기에 인체의 해부학적 구조와 생리적 기능에 대한 지식을 얻었다. (이익)
서양 의학, 동양의학
서양 의학과 동양 의학의 가장 큰 차이를 들라면 가장 먼저 해부학을 떠올릴 수 밖에 없다. 그만큼 서양 의학의 탄생과 발달은 해부학의 발달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서양에서는 해부된 장기들을 관찰하면서 동물과 인간의 신체 구조, 장기 구조에 대한 지식을 의학 치료에 응용하였다. 반면에 동양은 장기의 기능론적 측면을 중시했다.
즉 동양에서는 해부학적 특질과 지식보다는 장기들의 기능과 상호 관련에 관심이 집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서양 의학의 원조로 불리는 히포크라테스의 저술에서도 뼈와 근육, 힘줄의 기능과 구조 등이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히포크라테스에 이어 해부학을 본격적으로 의학에 이용한 사람은 갈레노스(129-199?)였다. 페르가몬과 알렉산드리아에서 의학을 공부한 후 로마로 간 그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군의관이 되어 검투사들을 치료했다. 갈레노스는 시합에서 죽거나 다친 검투사들을 치료하면서 신체를 직접 다루어 볼 기회를 가졌다.
특히 심하게 다쳐 내장이 드러나게 된 사람들을 보면서 해부학 실습을 하였다. 그는 나중에 해부학 연구를 더욱 심층적으로 할 수 있는 연습실을 가지게 되었다. 거기에서는 주로 인간과 가장 유사한 동물인 원숭이를 실험 대상으로 삼아 절개하고 해부한 지식으로 인체의 기관과 구조를 유추하였다. 중세 시대에 이르도록 갈레노스가 이룩한 해부학적 지식은 최고의 경전으로 대접받았다.
갈레노스의 해부학은 베살리우스 등을 거쳐 15-16세기에는 더욱 발달하였다. 특히 16세기 말과 17세기 전반에 걸쳐 활약한 하비는 해부학이 의학에서 얼마나 중요했던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해부학을 통한 엄밀한 실험과 그 실험을 통한 의학의 발달은 하비 의학의 정수이다.
당시 이태리의 파도바 대학은 해부학의 메카였다. 파도바 대학의 학생이었던 하비는 해부학 연구에 열중하면서 '동물의 심장과 피의 운동에 대한 해부학적 연구'(1628) 라는 저술을 통해 근대적 의미의 해부학을 시도하였다. 특히 심장을 통한 혈액순환을 해부학과 실험적 사고로 발견함으로써 중세 의학이 근대 의학으로 넘어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서양 의학의 발달은 해부학의 지식에 전적으로 의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서양 의학의 발달과 해부학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었다.
그러면 동양 의학 또는 한의학은 해부학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졌을까? 동양 의학에서는 해부 자체를 금기시하였다. 유교적 전통이 뿌리 깊은 동양에서는 인체를 손상하는 것은 살아서난 죽어서난 자신을 낳아 주신 조상님에 대해 큰 죄를 짓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신체발부 수지부모' 의 이념이 지켜졌던 것이다. 따라서 부관참시나 육시와 같이 육신을 갈가리 찢어 죽이는 것이 가장 무섭고도 지독한 형벌이었다. 동양 의학에서 해부학과 같은 시체의 절개와 장기의 관찰이 발달하지 못한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
산 자와 죽은 자
한편 동양 의학의 기초가 되는 정, 혈, 기의 개념도 해부학 발달을 저해한 중요한 요인이다. 동양 의학에서는 정, 혈, 기를 인간의 생명과 관련하여 중요한 요소로 파악하였다. 가령 정은 사람의 생명이 탄생하고 유지되는 데 필수적인 요소로서 일종의 생령 같은 것이었다.
생령인 정을 담아 온몸을 순환하는 것이 혈이다. 그리고 그 에너지는 기로 표현되었다. 이렇게 정과 혈과 기가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루어 잘 움직여 주는 것이 건강하게 살아 있는 상태였고 이 세 가지가 삐걱거리기 시작하면 병이 날 징후였다.
동양 의학이 중요시 여기고 대상으로 삼은 것은 바로 정, 혈, 기를 모두 갖추고 있는 '생자' 즉 살아 있는 사람이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차이는 이 세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느냐 그렇지 못하냐의 문제였고 건강과 아픔이란 개념, 치료 행위 등은 모두 산 사람을 대상으로 해서만 이루어졌다. 따라서 설령 죽은 사람, 즉 기가 빠져 버린 사람을 절개하고 해부해서 지식을 얻는다고 해도 거기서 얻은 지식은 기를 가지고 있는 산 사람에게는 전혀 소용이 없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처럼 서양 의학과 동양 의학 사이에는 해부에 대한 기본적 관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원자론적 사고방식을 기본으로 하는 서양 의학은 죽은 사람의 절개와 장기 관찰을 통해서 얻은 지식이 살아 있는 사람의 치료와 병증의 적용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물론 유기체적 사고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서양 의학은 원자론적이고 기계적 철학에 바탕을 둔 신체관이 주를 이루었다. 때문에 죽은 사람이나 산 사람의 육체를 구성하는 원자는 기본적으로 물질이라는데 별 차이가 없었다. 물론 영혼의 유무가 문제시되기는 했지만, 영혼은 어차피 물질이 아니었으므로 죽은 사람의 육체를 구성하는 원자 또는 원소가 살아 있는 사람과 다를 이유가 없었다.
죽은 자와 산 자의 차이는 단지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원자의 운동 여부로 파악되었다. 즉 사람을 구성하는 입자들이 운동하는 경우에 그들은 살아 있는 것이요, 그것이 멈추면 죽은 상태로 파악하였다. 서양에서 깊은 잠이 곧 죽음을 상징하는 것도 그 이유이다.
그러나 동양의 경우는 어떠한가. 앞서도 이야기했듯이 기가 빠진 사람은 비록 살아 있다 해도 죽은 사람으로 취급될 만큼 기는 동양 사상에서 중요한 요소였다. 의학에서는 더욱 중요했다. 죽은 사람은 기가 빠진 사람이고, 기가 빠진 사람의 육체는 기가 충만한 사람과는 기본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기의 없고 있음은 중요한 기준이 되었고 장기도 죽은 사람의 것과 살아 있는 사람의 것이 엄연히 다르다고 생각했다. 죽은 사람을 절개하고 해부하여 장기를 들여다본들 거기서 얻은 지식이 무슨 소용이랴. 죽은 사람에 대한 지식은 살아 있는 사람의 육체에 적용하거나 이용할 수 없는, 그야말로 죽은 지식이었다. 당연히 해부는 필요 없는 것이었다. 물론 인체를 해부해서 들여다보고 싶은 충동은 있었을 것이고 동양의 의학자들 가운데도 실제로 해부를 해 본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서양 의학에서의 해부학의 위치와 비교해 보면 동양에서의 해부는 그야말로 임시적이고 호기심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었다. 동양 의학에서 해부학이 관심을 가지고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은 아마도 서양 의학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은 이후의 일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해부 경험자 전유형
해부학에 관심을 가졌던 인물로 조선의 경우 남인 실학자 이익을 들 수 있다.
그는 해부학과 함께 서양 의학에도 어느 정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런 이익이었기에 조선에도 혹시 해부와 같은 서양 의학의 전통을 가진 사람이 없을까 역사에서 찾아보게 되었고 그에 의해 우리는 전유형이라는 인물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이익이 서양 학문과 의학의 방법론에 관심을 기울인 덕분에 임란 때의 전유형이 다시 한 번 우리의 이목을 끌게 된 것이다.
전유형은 양반 출신이었고 자신의 문집도 남겨 놓은 덕에 그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기록을 찾아볼 수가 있다. 1566년 명종 21년에 출생하여 1624년 인조 2년에 사망하였고 본관은 평강, 자는 숙가, 호는 학송이다. 괴산의 유생으로 있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헌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왜군 격퇴에 주력했다. 임란이 끝난 1603년에는 붕당 타파와 세자 보호 등을 포함, 시사에 관해 15조목에 이르는 상소를 올려 파문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전유형은 의술에도 조예가 있어 '오장도' 를 그렸고 광해군과 왕비의 병을 고치는 데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생존시 그에 대한 기록이나 그의 문집 어디에도 그가 해부를 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가 해부를 한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은 사망 후 한참 뒤인 조선 후기, 실학자 이익의 문집에서이다.
이익은 그의 문집인 '성호사설' 에서 전유형이 임란 때 세 번에 걸쳐 사체를 해부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물론 전유형이 서양의 해부학적 지식에 근거해서 사람의 시체를 해부하였는지 단순히 호기심에서 해부하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기본적으로 동양 의학의 신체관이 살아 있는 사람을 중요 대상으로 하였던 만큼 죽은 사람의 해부는 필요가 없었다.
그럼 살아 있는 사람의 해부는 도움이 되었을 것인가? 또 그렇게 생각하였는가? 물론 그렇게 생각한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소중한 신체에 손상을 입힐 수 있겠는가. 아무도 공공연히 자신의 호기심을 드러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유학적 사고에서 이는 도저히 용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의 수술과 해부
그럼 조선의 경우엔 해부학이라고 할 만한 것은 무엇이 있었을까? 비록 배를 가르고 장기를 꺼내는 해부는 없었지만 종기를 째고 치료하는 절개와 같은 외과 수술은 조선에도 있었다. 오늘날에 비해 전근대 사회의 위생환경은 상당히 열악하였으므로 늘 피부질환을 달고 살았다. 특히 외부의 상처를 통해 곪는 종기가 매우 많았다. 수십 몇 년 전만 해도 이명래 고약이니 조고약 등은 종기 치료에 많이 이용됐던 고유의 약품들이었다.
16세기경에 활약한 임언국은 종기 치료로 유명한 의학자였다. 그 역시 신분이 낮았던 관계로 정확한 출생, 사망년도나 활동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몇 건의 기록들을 통해 침구 치료와 종기 수술법을 발전시켰음을 알 수 있다.
임언국은 '치종비방' 이라는 외과 치료법에 관한 저술을 남겼다. 거기에는 다양한 종기들을 분류하고, 치료하는 방법이 소개되어 있다. 특히 침으로 종기를 찔러 피고름을 빼낸 다음 소금물로 소독한다는 내용은 오늘날의 생각과 다를 것이 없었다. 임언국이 외과 치료에 기여한 가장 큰 발전은 십자 절개술의 소개였다. 그는 농양을 절개할 때는 십자형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의 외과 치료법은 그 후에도 계속 전승되어 그의 제자들은 우리 나라에서 보기 드문 '치종지남' 이라는 외과 수술법에 대한 서적을 출간하기에 이른다. 여기에는 수술할 때 사용하는 외용약이 19종이 소개되어 있는 등 수술과 소독 그리고 세척에 관한 많은 임상기록들이 수록되어 있다. 한편 동양 의학에서 해부와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법의학서인 '무원록' 이다. '무원록' 은 글자 그대로 원통함이 없게 한다는 것이다.
역사상 살인 사건은 끊임없이 일어났고 죽음의 원인 규명과 공정한 법 집행을 위해 '무원록' 은 시체 부검 표준서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서양의 부검방법이 배를 가르고 장기를 절개하는 것이었다면 동양에서는 절대로 배를 가르는 일이 없었다. 독살 여부를 추정하는 방법도 상이했다.
서양에서는 위를 해부하였고 동양에서는 밥알을 시체의 입*에 물려 푸르게 변하면 독살로 간주했던 것이다. 이처럼 서양 의학과 동양 의학이 다른 모습을 보인 것은 단순한 기술상의 차이가 아니라 전통적인 철학적 해석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동양 의학과 서양 의학은 인간에 대한 철학이 달랐기 때문에, 의학 발달과정에서 서로 다른 양상을 보였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해부의 전통이다. 해부학이 동양 의학에서 발달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이고 그 결과가 동양 의학 발달에 손해가 되었는지 이득이 되었는지 다 함께 생각해 보자.
▣ 곰보를 막아라, 지석영 ▣
개항 이후 근대 문물과 과학기술을 도입하여 교통, 통신, 전기, 의료, 건축 등 각 분야에 새로운 시설을 갖추었고 이에 따라 생활 양식도 변모하게 되었다. (중략) 새로운 의료 시설과 기술도 도입되었다. 정부는 근대적 병원인 광혜원을 설립하고 선교사 알렌으로 하여금 운영하게 하였다.
이에 앞서 지석영은 종두법을 연구, 보급시켜 국민 보건에 공헌하였다. 그 뒤에 정부는 광제원과 대한 의원 등을 설립하여 신식 의료 기술을 보급하였고, 전국 각지에 자혜의원을 세워 의료 시설을 확장하였다. 한편 세브란스 병원이 세워져 의료 보급에 기여하였다.
곰보를 막자
이후원 : 코 끝에 약간, 이덕수 : 코 주위, 어유룡 : 얼굴 전체, 김상적 : 얼굴 전체, 이성원 : 얼굴 밑, 서유구 : 눈과 코 주위
초상화가 남아 있는 조선 시대 유명인사들 가운데 얼굴에 곰보 자국이 있는 사람을 몇 적어본 것이다. 마마, 오늘날의 병명으로는 천연두이다. 오랫동안 사람들을 괴롭혔던 천연두의 치료 방법은 인두나 우두 예방 접종을 받는 종두법 뿐이다.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종두에 관심을 가진 것은 정약용이었다. 그는 1799년 의주에 사는 한 선비가 종두에 관한 책을 가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 책을 빌어다가 연구하였다. 정약용은 종두의 이론과 방법을 익히고 1800년 종두에 관한 책을 저술하면서 종두 보급에 나섰다. 1799년 가을, 당시 의주 부윤 이기양이 임기를 마치고 돌아왔는데 그의 아들이 정약용에게 말하기를, '의주의 어느 사람이 중국의 연경에 들어갔다가 '종두방'을 얻어 왔다' 고 하였다. 정약용은 급히 달려가 그 책을 보니, 천연두 예방법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천연두가 성한 사람의 딱지 7 - 8개를 사기 그릇에 넣고 손톱으로 맑은 물을 한방울 떨어뜨린다. 그 다음 으깨어 즙액을 만들되 너무 진하지도 묽지도 않게 한다. 그리고 새 솜을 대추씨 크기만큼 뭉친 다음에 가느다란 실로 꽁꽁 매어 단단하게 한 후 오른쪽 콧구멍에 넣는다. 며칠이 지나면 아이가 통증을 느끼면서 턱 아래나 목 주위에 반드시 콩알만한 것이 돋게 된다. 이것이 천연두 접종의 징후이다. 이렇게 며칠 목이나 신체 부위에 부스럼이 생기고 고름이 차다가 아물면 딱지가 생긴다. 이렇게 하여 백 사람이 접종하면 백 사람이 살고 천 사람이 접종하면 천 사람이 사는 것이다. 정약용은 '종두방' 에 나와 있는 천연두 예방법을 연구하여 보급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사람의 천연두 딱지를 떼어내는 과정과 즙액의 농도가 일정하지 않아 문제가 있었다. 한편 북학파였던 박제가도 일찍부터 인두법에 대한 관심이 컸다. 사람들을 보기 흉한 몰골로 만드는 천연두를 예방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천연두로 어린아이들의 사망을 막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어린아이들이 가장 많이 걸리고 치사율도 높았던 천연두를 예방하고자 했던 것이다. 1800년 정약용의 집을 방문하였던 박제가는 정약용이 그 동안 적어두었던 '종두설' 을 보고 기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집에도 인두설에 관한 처방이 있는데 규장각의 책 가운데 일부를 내가 베껴 둔 것이네. 너무도 간략하게 해 두어서 정확한 치료법을 잘 몰랐는데 이 책을 보고 연구하면 좋을 것 같군.
정약용은 위의 저술들을 연구하여 드디어 종두에 관한 작은 책자를 한 편 쓸 수 있었다. 이후 정약용과 박제가는 서로 인두를 어떻게 하면 잘 보관하고 또 채취할 것인가를 연구하고 토론하였다. 그러다가 박제가가 영평이라는 고장에 부임하게 되면서 서로 연락이 뜸하였다. 그 후 어느 날 박제가가 정약용의 집에 찾아와서, 다산, 기뻐하게. 두종(:인두를 오래 보관하고 효과가 좋도록 잘 채취한 것)을 만들었다네. 내가 영평현에 부임하여 인두 접종에 관한 일을 관리들에게 말하였더니 이방이 골몰히 연구하여 두종 하나를 잘 채취해서 관리하는 법을 알아내었네. 먼저 자기 아이에게 접종해서 성공을 보았지. 그리고 두번째로 관아의 노비 아들에게 접종하고 또 계속해서 내 조카에게도 접종하였더니 모두 효과가 좋았다네. 그래 이제 되었구나 하고는 그 마을의 의사인 이씨에게 종두법을 가르쳐 북쪽 지역에 가서 접종케 하였네.
고 하면서 그 동안의 경과를 설명해 주었다. 정약용과 박제가는 종두 접종에서도 실학자다운 학구적 열의를 보였던 것이다. 아마도 정약용과 박제가의 종두 접종이 우리 나라에서 천연두 예방의 첫번째 시도일 것이다. 접종 결과는 꽤 좋았으며 이제 인두 접종을 할 수 있는 기초가 마련되었다. 한편 박제가의 제자였던 이종인은 1817년 '시종통편' 이라는 천연두 치료법을 저술하면서 스승에 이어 천연두 예방과 치료에 대해 연구하였다. 이종인은 북학파답게 청나라로부터 인두 접종에 관한 정보를 수집 연구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주로 천연두균을 사람에게서 채취하여 코를 통해 흡입하는 인두 방식을 사용하였다. 특히 인두의 균을 약화시켜 접종하거나 균을 흡입케하여 약간의 저항성을 가지게 했다. 그러나 사람으로부터 채취한 균의 성능이 일정치 않아 실패할 가능성이 놓았다. 인두의 어려움 때문에 정약용은 우두를 시도하기도 했다. 인두에 비하여 우두법은 소에서 천연두균을 채취하는 방법이다. 정약용은 귀양살이에서 풀려 난 후인 1835년 우두 접종에 관한 여러 가지 자료들을 섭렵하고 어느 정도 우두의 효과를 확신하자 어린 송아지의 마마 부위에서 균을 채취하여 어린아이에게 접종하였다. 그는 우두 접종에서 얻은 효과와 경험에 기초하여 우두 접종법의 발명 경위와 그 효과, 그리고 접종 방법에 대하여 밝힌 '마과회통' 을 내놓았다. 그러나 그가 1835년 처음으로 실시한 우두 접종법은 잘 보급되지 못하였다.
우두를 접종하다
후일 우두법을 본격적으로 수입하고 연구한 사람은 지석영이었다. 지석영의 자는 공윤, 호는 송촌, 본관은 충주로 서울 낙원동 중인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의학 교육을 받은 일은 없었지만 일찍부터 서학을 동경하여 중국에서 번역한 서양 의학책을 혼자서 탐독하였다. 특히 제너의 종두법에 관심을 기울였다. 1876년 평소 잘 알고 지내던 박영선이 수신사로 일본에 가게 되자, 지석영은 일본에서 실시되고 있는 종두법의 상황을 알아 봐 달라고 부탁하였다. 일본에서 박영선은 의사였던 오다키에게 우두법을 배우고, 당시 일본에서 우두법을 연구하고 의서도 저술하였던 구가의 '종두귀갑' 을 얻어다가 전해 주었다. 지석영은 너무도 기뻐 밤도 잊은 채 이 책을 열심히 읽었다. 그러나 아직도 미진한 곳이 몇 군데 있었다. 1879년 일본 해군이 세운 부산의 제생의원 원장 마쓰마와 군의관 도즈카가 종두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지석영은 부산에서 2개월 간 머물면서 그들에게 종두법을 배웠다. 두묘와 종두침 2개를 얻어 가지고 돌아오던 길에 처가가 있는 충주에 들른 지석영은 그 곳을 배운 우두법을 시험하기 위한 장소로 삼았다. 그는 충주에서 동리 사람 40여 명에게 우두를 놓아주었다. 이외에도 서울로 돌아온 지석영은 종두를 실시하여 많은 성과를 보았다.
그러나 종두의 원료인 두묘의 공급이 원활치 않았다. 그는 직접 일본에 가서 종두에 관한 지식을 배우기로 하였다. 1880년 제2차 수신사는 좋은 기회였다. 지석영은 김홍집의 수행원으로 일본 동경에 건너갔다. 그리고 동경 위생국의 우두 종계 소장 기쿠치에게 종두 기술을 익히고 두묘의 제조, 저장법과 어린 송아지의 사육법 그리고 두장을 채취하는 방법을 배운 뒤, 두묘 50명을 얻어 가지고 귀국했다.
서울로 돌아온 그는 두묘를 직접 만들어 종두를 보급하는 한편 서양 의학을 더욱 열심히 연구했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지석영에게 일본에서 종두법을 배웠다는 죄목으로 체포령이 내려졌다. 전통적으로 천연두의 원인으로 알려진 마마귀신은 대접을 잘하고 화가 나지 않도록 달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종두나 인두 등은 오히려 마마귀신을 화나게 해서 더 병을 깊게 만든다는 것이 당시의 미신이었다. 종두장은 난민들의 방화로 불타 버리고 말았다.
이후 다시 정국이 바뀌자, 서울로 돌아온 지석영은 새 종두장의 건설에 힘을 쏟았다. 한편 전라도 어사 박영교의 초청을 받아 전주에 우두국을 설치하여 종두를 실시하고 종두법을 가르쳤다. 이듬해에는 충청도 어사 이용호의 요청에 의하여 공주에도 우두국을 만들었다. 그리고 '한성순보' 에 외국의 종두에 관한 기사를 실어 종두법을 널리 보급하기도 했다.
지석영은 1885년 그 동안 쌓은 지식과 경험을 종합해서 '우두신설' 을 저술하였다. 여기에는 제너의 우두법 발견을 비롯하여 우두의 실시, 천연두의 치료, 두묘의 제주, 독우(송아지) 기르는 법, 두묘 채취법 등이 간단하게 서술되어 있다. 또 같은 해 우두 교수관으로 전라도 지방을 순시하면서 우두 접종을 해 큰 성과를 거두었다. 지석영은 1887년 전라남도 강진의 신지도에 유배되지만, 거기에서도 여전히 우두를 연구 실시하였다. 1892년 유배에서 풀려 서울로 돌아온 그는 이듬해 우두 보영당을 설립하고 많은 어린이들에게 우두접종을 실시하였다.
우두에 대한 치료와 예방에 주력한 여러 사람들의 노력으로 드디어 1894년 갑오개혁 이후에는 우두 접종을 법적으로 인정받았다. 또 1895년 10월 10일에는 '종두 규칙' 을, 1895년 11월 7일에는 '종두 의사 양성 규정' 을, 1899년 6월27일에는 '각 지방 종두 규칙' 을, 1899년 9월 6일에는 '두창예방규칙' 을 계속하여 제정함으로써 정부의 두창 치료와 예방에 대한 의지를 보여 주었다.
당시 우두의 접종 가격은 낮은 편이 아니었으므로 의사들에게는 종두법을 배워 지방 각지에서 우두 접종을 해주고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특히 정부가 강제로 우두의 접종을 권장함으로써 의사들에게는 좋은 수입원이 되었다.
서울에는 '한성종두사' 라는 것이 설치되었고, 1900년 광제원이 설비되었을 때에도 한약소, 양약소, 그리고 종두소가 있을 만큼 우두 접종의 기회가 늘어났다. 1911년의 한 기록에 의하면 전국적으로 종두만을 놓아주는 종두 업자가 1135명에 달했을 정도였다. 곰보, 마마를 극복하려는 조상들의 이와 같은 노력은 꾸준하였다. 오늘날 천연두 환자가 거의 사라지게 된 것은 바로 인간을 괴롭히는 전염병을 막아 내고자 했던 조상들의 노력의 결과인 것이다.
[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곰보' 라는 병은 예전에는 하늘의 벌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어린아이가 천연두에 걸리지 않도록 무척이나 애를 썼다.
특히 천연두신인 호구 별성마마라는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여러 방법을 동원해서 그냥 가기를 청했다. 정약용과 박제가는 천연두에 관심을 갖고 연구했던 학자들 중 하나이고 이종인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지석영은 천연두의 병리학적 이해를 가지고 서양의 의학을 도입하여 왁친을 만들어 치료하였다. 천연두는 오늘날에는 사라진 병이 되어 버렸다. 대신에 에이즈나 암과 같은 병들이 최고의 무서운 병이 되었다. 병도 시대와 역사의 흐름에 따라 다양한 변화를 보인다.
병의 역사와 인간 역사와의 상관 관계는 어떠할까?
자! 열린나무와 함께 다 같이 생각해봅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