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파더 감상문
2024250160 홍준우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는 영화이다. 영화 타이틀을 왜 ‘파더’가 아닌 ‘더 파더’라고 했는지는 아마 아버지가 치매를 앓고 있다는 특수성 때문이 아닐까. 주인공인 앤소니의 시점에서 파편화된 기억들로 구성된 비선형적인 플롯을 따라가다 보면 마치 영화를 관람하는 것이 아닌, 체험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몰입도가 굉장히 높다. 하지만 플롯의 구성에 치중되기 보다는 그러한 과정 속에서 보여지는 앤과 앤소니의 부녀(父女)관계에 집중해주는 것이 연출자의 의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앤에게 과연 아버지라는 존재의 의미는 무엇일까. 치매를 앓고 있는 아버지를 외면하고 남자친구가 있는 파리로 떠난 앤에 대해서 우리는 비판할 수 있을까? 이 중에서 떳떳하게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나는 앤을 비판하고픈 마음이 없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 나에게는 측은하게까지 보인다. 만약 앤이 아버지를 아버지로서 존중해주었다면. 이 영화의 핵심이 바로 이러한 점인 것 같다. 우리는 영화에서 보다시피 절대로 치매 환자의 생각과 세계관을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중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을 그들 자체로서 존중해주는 것이다. 치매라는 질병이 현재로서는 불치병의 형태이고, 주변 많은 이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모습을 나는 보았다. 앤이 앤소니를 요양원에 보내는 것을 버려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많은 요양원들이 시스템을 제대로 구축해놓지 않아 인식이 안 좋아진 부분도 있으나, 요양원이라는 시설이 오히려 치매 환자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영화에서 앤소니의 집으로 그려지는 공간은 앤소니가 지키고 싶은 기억이자 그만의 세계관이라고 볼 수 있다. 앤소니가 계속 ‘자신의 집’에 머물러 있을수록, 사회와의 접촉은 줄어들고 병은 악화될 수 밖에 없다. 억지로라도 계속해서 ‘자신의 집’에서 나오게 하고, 바깥 세상과 접촉하는 빈도가 많아져야 병의 악화를 막을 수 있다. 그러한 점에서 여러 활동과 프로그램이 구축되어 있는 요양원에 보낸다면 간호인들도 마음이 놓이고, 투병인에게도 병의 진전을 늦추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치매에 걸린 ‘아버지’더라도 우리는 그를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아버지로서 존중하는 태도를 배워야 하고, 앤의 행동을 꼭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바라볼 필요는 없다고 말하고 싶다. 그녀도 그녀의 삶이 존재하고, 자유롭게 영위할 권리 또한 가지고 있다. 요양원에 보내는 것 또한 그녀의 숭고한 선택이고, 우리는 이를 비난해서도 가치를 저울질해서도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