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각지(七覺支), 칠각분(七覺分), 깨달음을 위한 7요소
칠각지(七覺支), 칠등각지(七等覺支), 칠각분(七覺分), 칠보리분(七菩提分), 칠각(七覺)이라고도 한다. 37조도품 중 여섯 번째 덕목.
覺(각)은 ‘깨달음’이라는 뜻이고, 支(지)는 ‘요소’라는 뜻이다. 즉 칠각지란 '깨닫기 위해 꼭 갖춰야하는 일곱 가지 요소'라는 뜻이다. 도(道)와 과(果)를 성취하여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깨달음의 일곱 요소’가 갖춰져야 한다.
① 알아차림[念覺支]: 알아차림[念, sati]. 관찰대상인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알아차림 하는 것. 몸동작, 몸의 느낌, 마음의 느낌, 집중, 집착, 긴장, 초조, 불안, 이완, 고요 등의 마음 상태, 생각, 의도, 느낌 등을 알아차림 해가는 것.
② 관찰, 탐구[擇法覺支]: 택법(擇法)은 몸과 마음[法]에 대한 관찰, 탐구를 의미함. “택법(擇法)”의 ‘擇(택)’은 ‘관찰한다’, ‘구별한다’, ‘식별한다’, ‘안다’는 뜻이다. 擇(택)의 산스크리트원어는 ‘pravicaya'이고, 빨리어 원어는 ‘vicaya'인데, 이것은 ‘관찰’, ‘사유관찰’, ‘고찰(考察)’, ‘조사’, ‘탐구’, ‘분석’, ‘분별(分別)’ 등으로 번역되고, 영어로는 ‘discriminate’, ‘investigate'로 번역된다. 法(법)은 관찰대상인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의미한다. 즉, 택법(擇法)은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法]을 제대로 알기 위해 세밀하게 관찰하여 그 특성을 알아가는 활동이다. 예컨대 ‘이것은 마음이고, 이것은 물질이다.’ ‘이것은 일어남이고, 이것은 사라짐이다.’ ‘이것은 항상(恒常)하지 않는 것’이며, '이것은 '나'가 아니다', '이것은 또한 '내것'도 아니다'는 식으로 대상을 세밀하게 관찰해서 그 특성을 분명하게 알아가는 것이다.
③ 노력[精進覺支] : 노력[精進]. 알아차리고 관찰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가는 것. 不休精進(불휴정진). ‘노력[精進]’이란 매순간 열의를 가지고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알려고 노력[精進]해 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언제나 주의를 자신 안으로 기울여, 깨어있기 위해 노력해가는 것이다. 이런 노력이 없으면 깨어있을 수가 없어, 멍함에 떨어지거나, 졸거나, 단순히 편안함에만 머물러 있게 되어, 깨달음을 향해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 그러나 이 노력도 너무 강하게 하면 기운이 위로 떠서 고요함이 깨지고, 너무 느슨하게 하면 마음이 해이해져 알아차림을 게을리 하거나 혼침, 방일에 떨어지게 된다. 적당한 세기로, 고요한 가운데, 꾸준히, 끊어지지 않고 하루 종일 해가는 것이 중요하다.
④ 기쁨[喜覺支] : 기쁨, 환희, 희열[喜, prīti, piti]. 온전한 집중상태인 선정에서 오는 대단한 기쁨. 삼매에 들어 마음이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에서 벗어남으로써 생기는 대단한 기쁨[喜]. 이것은 초선정과 제2선정에 머물러 있을 때 생긴다. 선법(善法)을 얻은 데서 오는 희열, 법열(法悅). 경전에 ‘離生喜樂(이생희락)’, ‘定生喜樂(정생희락)’이라는 표현이 많이 나오는데, 그것은 탐심[貪], 진심[瞋], 치심[痴]을 완전히 벗어나 알아차림 해갈 때 생기는 기쁨을 말한다.
⑤ 평온[輕安覺支]=쉼[息覺支] : 평온. 몸과 마음이 가뿐[輕]하고 편안[安]한 것. 평온[息, 輕安]은 마음이 바깥 대상을 끊고 자신 안에 고요히 머묾으로써 편안히 쉬어진[息] 상태를 말한다.
⑥ 집중[定覺支] : 집중, 선정(禪定), 정(定), 고요, 삼매. 집중 또는 선정은 마음이 하나의 대상에 고정[定]되어 움직이지 않는 상태다. 온전한 집중, 선정이 이루어지면 마음이 산란하거나 방황하지 않고, 평온, 고요, 희열, 행복 등을 체험하게 된다.
⑦ 평정[捨覺支] : 평정[捨]. 평정(平正)은 마음이 탐내는 마음인 집착과 화내는 마음인 싫어함을 벗어난 상태로서,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들에 대해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마음이 없이,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 단지 알아차려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예컨대, 내 안에 고요함, 편안함, 집중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좋아하여, 그것에 집착하지도 않고, 신체적 통증이나 더위, 잡념, 졸음, 혹은 수행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어떤 감정이 올라온다고 해서 그것에 대해 짜증을 내거나 그것을 없애려 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있는 그대로를 수용하여, 그것을 알아차림 해야 할 하나의 대상으로 받아들여, 그 대상의 특성을 관찰해갈 뿐이다. 이러한 평정의 마음은 수행에 대한 견해를 바르게 가졌을 때 가능하다. 수행의 목적은 집중이나 편안하게 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알아차림의 힘을 키워, 지혜를 얻어, 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의 특질을 바로 아는 데 있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하는 데 있어, 어떤 상태를 원하거나 만들려고 하는 욕심이 없이, 현재 일어나는 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림만 해가는 것이 수행이다. 수행에 대한 견해가 바르고, 욕심이 끼어들지 않은 바른 마음가짐으로 수행하기 때문에 몸이나 마음에서 일어나는 어떤 현상에 대해 좋아하는 마음으로도 반응하지 않고, 싫어하는 마음으로도 반응하지 않는다. 일어나는 것이 어떤 것일지라도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알아차림 할 뿐이다. 그래서 늘 마음이 고요하고, 차분하여,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현상에 대해서도 동요하지 않는다. 이러한 고요를 '위빠사나 사마디'라고 하며, 이 사마디의 상태에서만 지혜가 생겨날 수 있다. 捨(사)는 싫어하는 마음[苦]도, 좋아하는 마음[樂]도 없는 청정한 마음의 상태, 즉 不苦不樂(불고불락)의 상태다. 경전에 ‘捨念淸淨(사념청정)’이라는 표현이 많이 나오는데, 그것은 이러한 평정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무원(無願), 무탐(無貪), 무욕(無欲), 무구(無求), 무착(無着) 등은 모두 같은 말인데,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어떠한 것도 구하지 않는 상태에서, 아무 욕심 없이 알아차림 해간다는 뜻이다.
도(道)와 과(果)를 성취하여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깨달음의 일곱 요소’라는 구성요건이 갖춰져야 한다. 일곱 요소 중 알아차림과 법에 대한 관찰, 노력은 수행을 시작하는데 꼭 필요한 요소들이다. 이 세 가지를 기본으로 하여 수행하게 되면 다음에 나타나는 것이 기쁨[piti]이라는 요소다. 기쁨의 단계에서 기쁨에 빠지지 않고 지속적으로 알아차림 해가면 다음 단계인 평온[息, 輕安]의 단계에 이른다. 일반적으로 수행자들이 평온의 단계에 이르렀을 때 거기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게 된다. 마치 단잠을 자는 것과 같은 평온함이 너무 좋아 그것이 열반인 줄 착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수행자가 가야할 길은 멀다. 이 상황에서 멈추게 되면 퇴보하여, 다음 단계인 집중이라는 깨달음의 요소에 이르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스승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혼자 힘으로는 그 상태에서 벗어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다시 평온에서 벗어나 집중이 되었을 때도 평정[捨]이라는 깨달음의 요소에 이르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집중을 알아차려가야 한다. 수행자에게 휴식은 없다. 편안한 곳에 머물러 쉬고 있다고 해서 저절로 수행이 되는 것은 아니다. 평온 속에 쉬고 있다고 해서 깨달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수행자가 최종 목표점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한 곳에 머물 수가 없다. 마지막으로 평정[捨]에도 머물지 않고, 계속 알아차림 해가면 결국에는 도과에 이르게 된다.
이상의 깨달음의 일곱 요소는 수행을 시작해서 열반으로 가는 깨달음의 전 과정을 순서대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깨달음은 고요한 곳에 머물러 편안히 쉬고 있다가 어느 한 순간에 우연히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칠각지, 즉 깨달음의 일곱 요소라고 하는 일정한 과정을 거쳐야 이루어진다.
이 깨달음의 일곱 요소는 알아차림 명상의 꽃이다. 알아차림이 깊어짐에 따라 이것들이 순서대로 나타나서 결국은 이 일곱 요소가 동시에 고루 다 갖춰지고, 상호 균형 속에서 완전히 자랐을 때 비로소 열반을 성취한다. 또한 이 일곱 요소는 명상상태의 건강성을 진단하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수행이 완숙한 단계에 접어들게 되면, 스스로 이 일곱 요소로써 자신의 명상상태를 점검해가야 한다.
첫댓글 제가 과거에 이 칠각지의 개념을 잡는 데 얼마나 고생했는지 몰라요. 불교전문 사전들에서도 모두 정확한 개념을 잡지 못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말로 횡설수설하며, 얼버무리고 있답니다. 오늘도 좀 더 쉽게 글을 작성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넣었는데, 결과는 아주 만족스럽습니다. 자화자찬(自畵自讚)하지 않으면 저의 수고를 잘 모르니까 이럽니다. 힘들게 작업 해 놓은 것이니, 숙지하시고 수행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혹시 다른 것과 비교해 보시면 이 카페에 연결된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알 수 있을 겁니다. 수행도 정확한 개념을 가지고 법에 입각해서 해야합니다.
해도 해도 자꾸 부족함이 발견되어 보다 더 정확하게 하기 위해 수정에 수정을 더하고 있습니다. 자화자찬 한 것이 지금은 많이 부끄럽네요. 섯부른 자만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