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월 30일 입대 8일간 훈련받고 중공군과 교전
김근식 / 개성중학교 3학년 17세 입대.330617-*******
나의 고향은 경기도 개풍군 남면 수우 리 한촌 동 446번지이다.
1 4후퇴 시 피난민들과 같이 12월 26일 아침에 피난길에 나섰다.
서울 친척 집으로 가는 길이다.
현재 비무장지대인 장단 임진강 근처에서 하룻밤 쉬고 또 금천 근방에서 하루를 쉬고 12월 28일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에 있는 친척 집에 도착하였으나
이미 친척들은 남으로 피난을 떠난 뒤였다.
김포에 고향 사람들이 모인다는 말을 듣고 가던 중
동대문구 성동파출소 앞을 지나는데 경찰관이 불러 갔더니
현재 사태가 좋지 않으니,
군에 가야 한다며 동대문경찰서로 데리고 가는 것이었다.
<미군지프 포탄 맞아 박살, 나는 이제 죽었구나 생각 들어>
12월 29일 트럭을 타고 대전으로 갔고,
다시 트럭을 타고 12월 30일
대구 동인동 그 당시 제사 공장이었던
제6교육대에 입대하였다. 8일간의 교육을 마친 뒤에
그곳이 보충대로 바뀌어 4일간 있다가
120명을 차출하여 미 제2사단 제38연대 소속으로
한국특공대(일명 ROCK RANGE)를 조직하여
트럭으로 강원도 횡성에 밤에 도착하였는데
아침이 되어 보니 중공군에게 포위되어 있었던 것이다.
생전에 전투가 무엇인지 모르는 나는
상관의 명령에 따라 몸을 움직이며 살기위한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우리 120명의 특공대는 도로변, 논밭으로 은폐하면서
간간히 떨어지는 포탄을 피해가며 후퇴하는 아군을 도왔던 것이다.
달려가는 미군 지프차가 포탄에 맞아 박살이나
하늘 위로 올라갔다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이것이 전투구나하고 실감했고,
나는 이제 죽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中共軍과 교전하며 횡성, 홍천으로 후퇴>
나는 중공군이 오나 하고 총을 겨누고 있었는데
중공군이 횡성읍까지 내려왔다며,
후퇴명령이 내려져 일산 도요다 트럭 두 대에 나누어 타고
원주 비행장까지 후퇴해서 비행장을 사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밤새도록 개인호를 구축하며 전투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그 때가 1951년 2월 3일로 기억된다.
얼마 있다가 부대를 정비해서 딴 곳으로 이동한 곳이
홍천 북방에 있는 가리산(1179고지)이었다.
오후 4시경에 도착하여 개인호를 파고 전투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침 먼동이 틀 무렵, 야간 조명탄이 하늘을 밝히며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중공군이 팔부능선까지 올라와 눈으로 식별할 수 있을 때,
상부로부터 후퇴하라는 명령을 받고 후퇴하였다.
도중에 이곳저곳 계곡에서 2일간 전투를 벌였는데,
옆에 가던 전우가 파편을 맞고 쓰러지는 것을 봤고,
중공군을 포함해 무려 4,000여명이 죽었다는 결과가 나온
미 2사단 전투 결과를 봤으며,
모든 산 주위에는 시체가 여기저기 널려 있어
발로 시체를 밟기까지 하며 가리산 밑에 연대본부(38연대)에 오니
이미 이곳은 중공군이 와 설치고 있는 것이었다.
내 생전 처음 겪는 일이라 목숨을 살리기 위한 노력을
무엇에 비할 수 있을까?
홍천 어느 하천 부근에서 부대를 재편성했다.
그 후 우리 ROCK RANGE특공대는
동안리 북방에 있는 산을 점령하라는 명을 받아
만 3일간의 전투 끝에 미군 1개 대대가 1주일간 싸우다
점령 못한 산을 점령해서 다른 부대에 인계하였다.
<서부전선 고랑포 볼모고지 저격능선에서 일진일퇴>
얼마 후 1953년 6월경 서부 전선인 고랑포에 있는
불모고지로 유명한 저격능선전투에 임하게 되었다.
이 야산은 포탄을 많이 맞아 일명 불모고지라 불리게 되었다.
해질 무렵이면 미군 제2사단 38연대 탱크 1개 중대 중
1개 소대 5대가 고지로 올라가 밤새 싸우다 보니 산이 불모고지가 되었다.
풀은 없고 흙에 발이 묻혀 걸어갈 수 없는 지경까지 오게 된 것이다.
이런 전투가 계속 되던 중, 휴전을 맞게 되었다.
1954년 9월경 영등포에 있는 보충대를 거쳐서
제1사단 제12연대 제5중대에 배치되어 근무하다가
1956년 6월 30일 이등상사로 제대했다.
제대 후 복학을 못하고 친척이 경영하는 직물공장에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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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한 소년병 쏘고 혼자 탈출-- 평생 속죄
박태승 / 경산 하양 중학교 2학년 17세 입대.
330405-*******
6.25당시 내가 살던 곳은 경산군 진량 면이며
경상북도에서도 인민군이 들어오지 못한 곳으로
전국에서 밀려오는 피난민의 대부분이 이곳을 거쳐서 다시 남쪽으로 내려갔다.
<18세 미만은 돌아가라>
8월에 접어들어서는 제3야전병원이
이 곳 진량 북부국민학교에 주둔하였고
모병관들은 지역주민과 피난민을 대상으로 모병활동을
더욱 활발하게 전개했으며 나의 형님도 이때에 입대를 하셨다
(박태창 일병 7사단 51년 2월 11일 전사).
나는 마을 친구 3명과 같이 야전병원에 가서
앰블런스에 실려 오는 전상병을 옮기는 도우미 역할을 하면서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전상병들의 주고받는 말이
당시의 전선은 의성, 군위, 선산, 김천 등지라고 하였으며
전황이 매우 급박하고 불리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의 어린 눈에 비친,
물밀 듯이 밀려오는 피난민의 행렬과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로 실려 오는 피투성이 전상병의 처절한 광경이
나를 야전병원에서피고름이나 닦아주며 있으라고 놓아주질 않았다.
“노도와 같이 밀고 오는 적군을 앉아서 맞이할 수는 없지 않은가?
총 한방이라도 쏴보고 죽어야지, 형님도 출전하셨는데.”
나는 이렇게 결심했다.
내 생각으로는 전쟁이 이기던 지던 3~4개월이면 끝장이 날 것으로 보았다.
“만약 살아서 돌아오면 그때 노부모님을 더 잘 모시겠습니다.”
라고 마음속으로 다짐을 하고 모병장소를 찾아가
모병관이 인솔하는 청장년들 대열에 끼여
집결장소인 경산국민학교로 갔다.
운동장에는 어림잡아 3백 명가량의 청장년들이 와 있었다.
전원을 집합시켜 놓고
모병관의 대표 격으로 보이는 사람이 나와서
18세 미만은 나오라 하기에 무심코 나갔더니
너희들은 집으로 돌아가라 하였다.
나는 여기서 군인은 18세 이상이라야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하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와서 다시 야전병원 도우미 일을 하던 중
가벼운 부상을 입은 대위 한분이 완치되어 원대 복귀를 하게 되었는데
자기는 육군본부직할수색대에 근무한다고 소개하고는
자기를 따라 군대에 가지 않겠느냐고 하기에
그것은 내가 바라던 일이라 즉각 따라나섰다.
그를 따라 간 곳은 팔공산 전투 지역이었다.
<쏘고 가시오, 소년병의 호소>
군번도 계급도 없이 허름한 작업복과 전투모를 쓰고
군인도 민간인도 아닌 어정쩡한 신분으로 약3주가량 종군을 한 연후에
군번을 받고 대한민국 육군 이등병이 된 것이다.
9월 중순에 접어들어 전세는 차츰 호전되어
마침내 북진을 하게 되었으며
우리 수색대는 큰 저항을 받지 않고 안동-원주-동두천을 거쳐 38선을 돌파하여
평강-신게-평양을 거쳐 박천-태천까지 진격을 하였다가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후퇴를 하게 되었다.
1950년 11월 평안북도 박천지구에서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후퇴를 하면서
정신없이 사력을 다해 탈출하던 중
나는 이름도 모르는 청도에 산다는 15세가량의 소년병과 같이
힘이 달려 낙오되었고, 그 와중에 그 소년병 전유는 유탄을 맞고 쓰러졌다.
처음에는 나의 바지가랭이를 잡고 같이 가자고 애원을 하던 그 소년은
차츰 기력이 약해졌고,
자신의 상처가 중상으로 살아날 가망이 없다는 것을 인식하였는지
자기를 죽이고 가라고 애원했다.
해는 이미 서산에 걸치고 사방을 분간할 수 없는 적지의 산중에는
갑자기 무서움과 두려움과 외로움이 엄습해 오는데
순간적으로 죽여주는 것이 그의 고통을 덜어주고 나 자신의 탈출도 용이하게 될 것이라는 판단이 섰다.
나는 눈을 지그시 감고 방아쇠를 당기고 말았다.
<부상이 행운 - 육군본부에>
전쟁터에서 적군을 죽이는 것은 다반사이지만
부상병 전우를 쏘아죽이고
혼자 탈출한 것은 분명한 살인행위로서 용서받을 수 없으며
어떤 명분을 내 세우더라도 도의적인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나는 한평생 죄의식을 떨쳐버릴 수 없어
속죄하는 마음을 한 순간도 잊지 않고 살아왔다.
소년이 아니었다면 낙오가 되지 않았을 것이고
낙오가 되지 않았다면 어린 전우를 쏘아 죽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소년이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희생과 고충이 어찌 이것뿐이겠는가?
전쟁이란 순간적인 판단과 동작으로 생사가 교차되는데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미성숙한 15~6세 소년들이 건강한 장정들과
똑같은 무게의 중무장을 하고 험준한 고지를 오르내리면서 싸워야 하는데
판단과 행동이 민첩하지 못한 소년병들의 희생과
어려움이 얼마나 극심하였겠는가 하는 것은 겪어보지 않고서도
충분히 짐작이 갈 것이다.
후퇴 도중 11월 하순경 황해도 지방을 지날 때
차량이 전복되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서울 수도 육군 병원의 병실이었고 오른팔이 부러져 있었다.
중공군의 총공세로 전황은 다시 반전되어 1.4후퇴를 맞게 되었다.
이에 앞서 나는 12월 중순 대구 제1육군병원으로 후송되었다가
다시 김해군 진영에 있는 수도육군병원으로 이송되어
약 4개월의 지긋지긋한 병원생활을 마치고
3월 중순 대구 제1보충대에 수용되었다.
부대 배속을 기다리면서 지루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중
하루는 육군 본부 인사국에서 왔다면서
행정사무에 경험이 있는 사람은 나오라 하기에
솔직히 나는 나이도 어리고 그 부문에서는 백지요
문외한이면서도 하루빨리 보충대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나갔다.
백지 한 장 씩을 나누어 주면서
靑春(청춘)의 未來(미래)라는 제목으로 작문을 쓰라고 하였는데
응시자는 70여명, 그 중에서 나를 포함해서 7명이 선발되어
육군본부 고급부관실로 가게 된 것이다.
정말로 보잘것없는 나의 학력으로
육본 고급 관 실의 행정사무요원이 된 것을 보면
당시는 전투병충원 못지않게 행정요원 수급도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것 같았다.
이와 같이 소년 학도병들이 행정사무와
특수병과 부문에서 상당한 기여를 했다고 본다.
<그래도 세상에 태어나 「조국과 자유」 수호 보람 느껴>
나는 이 덕분에 비교적 편안하게 군 생활을 마치고
1955년 2월 10일 일등중사로 제대했다.
3~4개월이면 전쟁이 끝나고 부모님 품으로 돌아가서
자신의 푸른 꿈을 펼쳐보겠다는 희망은 4년 6개월이라는 긴 시간이 앗아갔다.
내 꿈은 산산조각이 났고,
형님의 전사로 기울어진 가정에서
노부모님을 봉양해야 할 당면문제로 학업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중학교 졸업장이 없어 마땅한 직장도 구하지 못하고 어렵게 살았지만
그래도 세상에 태어나서 자신의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하여
헌신했다는 것으로 위안과 보람을 느끼며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왔다.
그러나 형이 입대하여 집을 비웠는데
나마저 입대하여 노부모를 돌볼 수 없게 된 것은
큰 아들의 전사통지서를 받고 얼마나 비통하셨을까?
더하여 전선에 나가 있는 나머지 한 아들의 생사가 걱정되어
밤잠을 못 이루셨을 노부부의 심정을 생각하면 가슴이 메어진다.
나의 불효가 너무 크다.
이것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두 번째로 지은 죄다.
어떻게 용서를 구해야 할지,
저 세상으로 가신 부모님께 마음속 깊이 참회하면서 명복을 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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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배 면회 갔다가 학도병 입대
--해평 전투에 백의종군
손한종 / 경북중학교 4학년 16세 입대
340226-*******
국토방위를 책임진 위정자와
국군이 어떻게 했기에 북한공산군의 기습남침을 당하여
하루아침에 전국토가 초토화되고 죄 없는
국민이 생명과 재산을 잃게 내팽개쳐 놓고
낙동강까지 밀려 조국을 풍전등화의 위기에 몰아넣었단 말인가?
<선배 위문 갔다가 학도병 입대>
우리 어린학생들은 17세 이하의 소년으로서
국가비상동원령에 의한 동원대상이 아니면서도
오로지 조국 대한민국을 북한 공산당의 불법 남침으로부터 수호하고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일념에서 자원하여 구국의 전선에 뛰어들었다.
당시 대구에는 경북편성관구사령부 예하의 제3사단이 대구시 신천동에 있는 대구농림중학교와 그 인근 범어동(당시 경산군 경산 면)에 있는 동도국민학교 및 삼덕동에 있는 삼덕국민학교에 제7학도병간부교육대를 설치하고 학도병으로 지원한 학생을 집중적으로 교육시켰다.
대구는 7월 5일 무기한 조기 여름방학에 들어갔다.
이 무렵 전국학생연맹 경북지부와 학도호국단 간부들이 주축이 되어 대구시내의 학생과 피난 온 학생을 대상으로 학도병지원을 권유하였고,
경우에 따라서는 지원하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로 유도하여
많은 중학생들이 경쟁적으로 지원하여
7월 12일부터 이 학도병교육대에 입대하기 시작했다.
나는 북한에서 월남하여 당시 경북중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었고, 16세였다.
<받아주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겠다, 떼써>
7월 15일 동급생 친구 박창동과 함께 동도국민학교에 입대한 선배의 면회를 갔다가 그 곳 분위기에 감동하여 즉석에서 지원을 희망하였다.
그러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받아주지 않았고,
계속 간청을 하자 부모의 동의를 얻어 오라고 했다.
할 수 없이 집으로 왔으나 차마 부모에게 말을 할 수가 없어서
고민하고 있다가 다시 동도국민학교에 찾아가서 장교를 붙들고 사정을 하였다.
그래도 허락하지 않는 장교에게 받아주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겠다고
떼를 써서 입대하였다.
7월 12일부터 15일까지 입대한 학생은
경북지방의 경북중학교, 대구상업중학교,
대구농림중학교, 계성중학교, 영남중학교, 대성중학교, 포항중학교,
포항 동지상업 중학교, 경주중학교, 경주문화중학교, 경주공업중학교,
안동중학교, 안동농림중학교, 풍산중학교, 안동고등 성경학교, 의성중학교,
봉양중학교, 오상중학교, 구미농예중학교, 군위농업중학교,
효령 중학교 등이었고,
경남지역의 경남공업중학교, 서울지역의 동국대학교, 충북 지역의 영동농업중학교, 전북 지역의 군산중학교, 군산업중학교 등이었다.
이들은 전교생들의 출정환송을 받고 대부분
선생님의 인솔 하에 먼 길을 와서 대구농림중학교와
동도국민학교 그리고 삼덕국민학교에 설치되어 있는 학도병훈련소에 입대했다.
7월 15일까지 입대한 학도병은 대구 농림중학교 21개 교실과
동도국민학교 15개 교실에 꽉 찼는데
1개 교실에 40명 안팎의 인원을 수용하였으니까
총 인원은 약 1,400여명에 이른다.
학도병들은 자치적으로 운영하여
대대장에 전국학생연맹 경북지부장인 대구대학 4학년 李祥撥(이상발-수도 사단에 배치되어 안강전투에서 전사)이 맡고,
중대장은 대학생, 소대장, 분대장, 내무반장은 5~6학년을 상대로
학훈단 교육을 시켰었다.
교육대의 대대장은 한산 소령(육사2기 졸업)이었다.
이상발 학생자치 대대장은자기가 무슨 사령관이나 된 것처럼
거들먹거리며 한신 소령은 물론 다른 고급장교와도 맞상대하였는데
결국 그도 한낱 이등병으로 안강전투에서 전사했다.
그러나 그때 학도병들은 장교로 임관한다는 말이 나돌았고,
당시 대학생의 긍지와 희소가치가 충분히 그럴 만 했었다.
<전선에 나간다고 모두 죽는 것은 아니다>
매일 아침 6시부터 저녁 10시까지 강행군으로 2주간 교육을 받았다.
교육내용은 M-1소총, 카빈소총, BAR자동소총, 경기관총, 수냉식 중기관총,
기관포, 60mm 및 81mm 박격포, 2.36인치 로켓포와 3.5인치 로켓포, 57mm 무반동총 등의 조작법과 사격술을 배웠다.
학도병들은 군복에 농구화라고 부른 훈련 화를 신고
학생 모자를 썼는데 모자에는 흰 띠를 둘렀고,
비둘기 문양에 학병이라는 글씨가 쓰여진 휘장을 가슴에 달았는데 이것은 대구시내 여자중학생들이 밤을 새워 刺繡(자수)로 만든 대단히 정성이 깃든 것이다.
교육이 끝나고 어느 날 ‘안강전투에 참가한 희망자는 선착순으로 집합하라’는 전달이 왔다. 서로 뒤질세라 결사적으로 뛰어가서 줄을 섰는데 인원이 차서 나는 끼지 못했다. 그 후에도 그런 일이 여러 번 있었으나 체구에 밀린 나는 매번 실패하여 전투에 참가할 기회를 놓쳤다. 남은 학도병은 대구농림중학교에 모여서 중화기 다루는 교육을 얼마간 더 받고, 일선으로 갔다.
8월 3일 07시, 대구농림중학교를 출발한 학도병들은 선두에 방위군이라고 불리는 청년방위대가 서고 우리는 그 뒤를 따랐다. 구호를 외치고 군가를 목청껏 부르며 도보행군으로 신천교를 건너고 삼덕동로터리를 거쳐서 보무도 당당하게 대구역으로 갔다. 연도에는 대구시내의 남녀 초중학교 학생들이 도열하여 태극기를 흔들며 열렬히 환송해 주었고, 대구역에서는 대한적십자사와 대한부인회 봉사대원들의 위문을 받았다. 우리는 플랫폼으로 들어가서 정렬했다. 정부요인과 육군본부의 참모들이 플랫폼까지 들어와서 환송해 주었고 군악대가 나와서 요란하게 군가를 연주해 주었다.
이때 ‘한종아! 한종아!’하고 내 이름을 부르는 귀에 익은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본능적으로 소리 나는 곳을 돌아보았다. 어머니였다. 나도 모르게 ‘어머니!’하고 소리쳤다. 그리고 어머니와 나는 서로 부둥켜안고 엉엉 울었다. 주위가 삽시간에 숙연해 졌다. 누구도 불청객 어머니를 제지하는 사람없이 모자의 애틋한 이별을 함께 울어주며 눈시울을 적셨다.
어린 자식을 사지로 보내는 어머니의 심정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어찌 짐작이나 하랴. 이때 모자가 실컷 울도록 보고 있던 이종찬 대령이 다가와서 ‘전선에 나간다고 모두가 죽는 것은 아니니 너무 상심하지 말라’며 어머니를 위로하고내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어머니! 죽지 않고 꼭 돌아오겠습니다”>
플랫폼에는 아무나 들어올 수가 없도록 헌병이 경계하고 있는 곳이다. 우리가 삼덕동 로타리를 지나올 때 나를 본 동네분이 어머니에게 알렸고, 20여 일간이나 소식이 없어 애를 태우시던 어머니는 태산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으면서 누나와 함께 나를 찾아 대구역으로 오신 것이다. 그러나 삼엄한 헌병과 경찰의 경계망을 뚫고 플랫폼까지 들어올 수는 없었다. 어머니는 누나를 남겨 놓은 채 역 반대편으로 멀리 돌아서 수 없이 늘어서 있는 열차 사이를 지나고 위험을 무릅쓰고 기차바퀴 사이를 통과하여 내가 있는 곳까지 오신 것이다. 이렇게 나는 어머니와 정확하게 19일만에 상봉을 했고, 그리고 다시 못 뵐지도 모르는 이별을 했다.
09시경 우리는 화물차에 몸을 실었다. 목이 메인 기적소리를 한껏 지르며 우리를 실은 열차는 서서히 대구역을 미끄러져 나갔다. 나는 플랫폼에 서서 아들의 장도를 비는 어머니의 흔드는 손이 안 보일 때까지 뒤를 돌아보며 “어머니 죽지 않고 꼭 돌아오겠습니다.”를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군번도 계급도 없이 해평 전투에>
기차는 영천을 거쳐서 중앙선을 타고 의성으로 갔다. 의성에서 하차한 우리는 트럭을 타고 남쪽으로 다시 내려와서 군위를 거쳐 경북 선산군 장천면 상장리 오상중학교에 주둔하고 있는 白善燁(백선엽) 장군의 제1사단 사령부로 왔다. 그때 약 500명이 온 것으로 기억되고 그곳에서 전입신고를 한 후 일부 학도병은 남고 약 300명이 다시 북쪽 산동면(선산군)에 있는 산동국민학교에 주둔하고 있는 제11연대 본부에 도착했다.
우리 학도병 300명은 포항 동지상업중학교 6학년 崔道基(최도기-종합학교를 졸업하고 소령 예편)군이 지휘하여 ‘학도병 최도기 이하 300명은 1950년 8월 3일부로 제1사단 제11연대에 전입하였습니다. 자이 삼가 신고합니다.’라고 우렁찬 목소리로 연대장 金東斌(김동빈) 대령에게 신고를 했다. 김동빈 연대장은 “오늘 6 25 개전 이래 처음으로 학도병 제군들이 조국을 지키고자 백의종군하여 본관이 지휘하고 있는 我(아) 11연대에 배치되어 참전하게 된 것을 매우 뜻있게 생각하고 학도병 제군들을 환영하는 바이다. 본관휘하 장병들은 40일 동안 북괴군과 밤낮없이 혈전을 벌이면서 38선에서 낙동강까지 무려 300km 이상을 이동하여 왔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 이 낙동강방어선에서 공산군을 격파하여 강물에 수장시켜야 한다. ---학도병제군들은 기필코 이 전선에서 북괴군을 무찌르고 조국 대한민국을 구출하여 부모형제와 학창의 품으로 되돌아가야 할 것이다. 학도병제군들의 무운장구를 비는 바이다.”라는 요지의 훈시를 했다.
그러나 우리는 대구에서 2주일간 교육을 받고 일선부대에 배치되어 전입신고까지 마쳤지만 그때까지 군번과 계급이 부여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첫 전투에 참가하면서 ‘학도의용군의 참전’이라고 내 나름대로의 이름을 붙였다.
이날 17시에 처음으로 부대에서 주는 저녁 식사를 했고, 이어서 철모와 M1소총 및 실탄, 대검, 야전삽, 수통 등 개인장비 일체를 지급받았다. 이날 인동(칠곡군 인동 면, 지금의 구미시 인동 동) 국민학교에 임시로 설치한 미 제8군전방추진보급소에서 새로 수송해 온 무기를 우리가 처음으로 지급받게 된 것이다.
19시경 완전무장을 한 우리는 야간도보행군을 하여 전선으로 출동했다. 하늘에는 별이 반짝이고, 멀리 좌우의 측방고지에서는 포성과 함께 섬광이 번쩍이며, 간간히 콩을 볶는 듯한 총소리가 들여와 전선에 와 있음을 실감나게 해 주었다.
두 시간 행군 끝에 도착한 곳은 더 북쪽에 있는 선산군 해평면 해평 동 금곡 리 옥골이라는 낙동강 변의 야산에 자리한 조그마한 마을이었다.
이곳에 鄭永洪(정영홍)소령이 지휘하는 제3대대 OP가 위치하고 있었다. 누가 누군지도 분간할 수 없는 캄캄한 밤에 고참병들이 군데군데 누워 모깃불을 피워놓고 야영하고 있었다.
제3대대는 38선에서 북괴군이 남침을 받고 고랑포를 거쳐 문산과 봉일천에서 전투를 하던 중 서울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 퇴로가 차단되자 뿔뿔이 흩어진 상태에서 갖가지 수단방법을 동원하여 어렵게 한강은 건너 소속부대와 합류하여 저지 전을 펴면서 이곳까지 이동해 온 역전의 용사들이다. 우리 학도병들은 그들 고참병들 틈에 끼어 밤을 새면서 부대의 전통과 무용담을 들으며 하룻밤을 보냈다.
<피난민 엄호작전>
8월 4일 05시에 학도병들은 대대인사계 高石奎(고석규 중령예편) 특무상사에 의하여 소대까지 배치를 받았다. 대구 학도병훈련소에서 중화기 교육을 받은 30명은 모두 제12중대(중화기중대)에 전속되어 9명은 중기관총소대에서, 나를 포함한 12명은 81mm 박격포소대에서 사수와 부사수, 탄약수를 맡았다. 소총중대에 배치된 다른 학도병들도 대부분 화기소대와 화기분대에 배치되었다.
제11연대는 이때 제1대대(金在命 소령)가 江亭(강정)나루에서 江倉(강창)나루사이의 낙동강 변에 배치되었고, 제2대대(車甲俊 소령)는 강창나루에서 그 북쪽 松堂(송당)나루 사이의 낙동강 변에 배치되어 방어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제3대대는 제1, 2대대의 부족 병력을 충원하고 명목상의 대대로 남아 있다가 학도병들을 보충 받아 대대를 재편성하고 예비대가 되었다. 우리는 낙동강 변에서 고참병들로부터 실전훈련을 받았다.
<저 피난민속에 형제와 친척은 없는지>
07시경에 중대에서 처음으로 김으로 싼 주먹밥을 아침 식사로 먹었다.
제3대대의 우측에서 총포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이날 북괴군 제13사단이 제12연대 정면 洛東(낙동)나루로 도하하여 공격해 와서 낙동강방어선에서첫 전투가 벌어졌다. 우리 화기중대는 3개 소총중대에 중기관총 2정씩을 배치하여 진지를 구축해 놓았고, 내가 있는 박격포소대는 낙동강변 무명고지중턱에 81mm 박격포 진지를 구축하고 언제든지 포를 쏠 수 있도록 대비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겪는 전투라 우리는 많이 긴장했다.
13시경 나는 무명고지에서 경계를 하면서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 물과 그 건너편에 펼쳐진 들판을 바라보았다. 쾌청한 날씨에 우측으로 선산읍이, 좌측으로는 구미시가지가 한 눈에 바라보였다. 강 건너편의 산기슭과 모래사장에 노숙자가 많이 보였고, 나루터에는 피난민 행렬이 몰리고 있었다. 이 피난민 대열은 작전에 지장을 줄 뿐만 아니라 그 속에 북괴군 게릴라가 섞여서 아군의 후방으로 침투하고 있어 여간 골칫거리가 아니었다.
제1사단은 이 무렵에 입대한 경주 문화중학교와 경주공업중학교, 그리고 군위농업중학교 학도병 120명으로 사단 수색중대를 편성하여 사단사령부의 경비를 맡는 한편 이들 학생들에게 학생복과 농민복을 입혀 분대단위로 강 너머에 있는 피난민 야영지와 나루터에 침투시켜 첩보를 수집하면서 북괴 게릴라를 색출하고 있었다.
한편 미 제8군사령부는 피난민이 강을 건너지 못하도록 통제하고 있어 강북에는 많은 피난민이 운집하여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강을 건너려고 안간힘을 쏟고 있어 나루터는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14시경 제2대대 정면 송당 나루 부근에서 포격소리와 함께 장총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고, 제1대대 정면 강정나루 근방에서도 북괴군이 쏘는 포탄이 여기저기 떨어지고 AK소총소리가 들려왔다.
피난민들은 그 틈바구니에서 어쩔 줄 모르고 우왕좌왕하다가 많은 사람들이 강물로 뛰어들어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능숙하게 헤엄을 쳐서 건너는 사람이 있었고, 어떤 부부는 노모와 어린 자식을 찾다가 끝내 보이지 않자 강가에 주저앉아 어머니와 자식의 이름을 부르며 통곡하는 딱한 정경을 보고 있어야 했다.
북한에서 월남한 저 피난민 속에 형제와 친척들이 끼어 있는 것은 아닌지 기대와 함께 걱정이 떠나지 않았다.
<피난민 엄호하라는 명령이 내리고>
우리 국군은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를 지고 있으므로 침략자 북한 공산군을 처 부셔야할 사명을 가지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줄 의무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사명감을 가지고 백의종군한 학도병이 아닌가? 피난민들이 곤경에 처한 딱한 정경을 바라보며 이런 상념에 잠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피난민을 엄호하라는 지시가 내렸다. 우리 학도병들은 고참병들의 지도하에 강 건너에 있는 북괴군을 향하여 박격포와 중기관총을 쏘아댔다. 우리의 사격은 비교적 정확하게 적진에 떨어졌다.
강 건너의 야산에 산개하여 도하의 기회를 노리고 있는 북괴군 제13사단과 제15사단의 대병력이 아군의 포격과 중기관총의 세례를 받고 꼼짝하지 못하는 사이 피난민들은 비교적 안전하게 강을 건너 남쪽으로 갈 수가 있었다.
<북괴군의 역습포격에 희생된 학도병>
피난민 엄호작전으로 14시 30분부터 무려 2시간 동안을 쉴 새 없이 중기관총과 81mm 박격포를 쏘아 적진을 강타했다. 우리 학도병들은 생전 처음으로 신나게 전쟁을 체험하면서 자신감에 도취되어 있었다. 그 후 얼마동안 전장은 침묵하고 있었다.
어둠의 장막이 깃들 무렵, 갑자기 북괴군의 포가 작렬하는가 싶더니 포탄이 우리의 기관총진지와 박격포진지에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낮 동안 우리가 포와 기관총을 쏠 때 위치를 파악해 두었다가 역습을 감행한 것이다. 순식간에 산이 무너지고 호가 뭉개졌으며, 흙덩이와 바위덩이에 파편이 뒤섞인 덩어리가 사정없이 튕겼다. 옆에서 살점이 하늘로 날으고 피가 땅으로 튀었다. 사방에서 ‘아이고!’, ‘어머니!’ 하는 단말마같은 비명이천지를 진동했다. 혼비백산한 신병 학도병들이 이리 뛰고 저리 숨고 했지만 계급도 군번도 없는 학도병들은 많이 쓰러져 갔다.
포항 동지상업중학교 학도병 崔相厦(최상하)군은 교통호에 뛰어들어 납작 엎드렸다. 그 위에 다른 학도병이 포개졌고, 또 그 위에 다른 학도병이 엎어져 이렇게 3중 4중으로 엉켜 엎드렸다. 제일 위에 엎어진 학도병이 파편을 맞아 전사했는데 그 덕에 밑에 깔린 최상하는 무사했다.
16세의 어린 나는 어쩔 줄 모르고 울면서 헤매고 있었는데 순간 ‘빨리 엎드려!’하는 소리와 함께 나는 누군가의 힘에 의하여 호 속으로 나뒹굴어졌다. 선임하사관 余泰煥(여채환) 상사였다.
그는 순간적으로 나를 껴안고 호 속으로 뛰어들었던 것이다. 거의 동시에 폭음이 울렸고, 우리가 있던 자리에 떨어진 포탄은 우리가 뛰어든 호까지 무너뜨렸다. 여 상사와 나는 흙덩이를 뒤집어썼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여 상사의 철모에 파편이 박혀 있었고 나는 여상사의 몸에 깔려 있었다. 여 상사는 철모 덕에 무사했고, 나는 여 상사 덕에 살아났다.
이날 전투에서 제3대대 화기중대에 배치된 학도병 오상태, 이회창, 마숙직, 김연복, 권오릉, 김정열, 정인양, 김경한 등 8명의 학우를 잃었다. 그들은 참전 첫날 계급도 군번도 없이 사라져 갔다.
“삶과 죽음은 한 순간의 일이다. 죽으면 무슨 쓸모가 있으랴? 살아야 전쟁도 이기고, 나라도 구하고, 부모형제와도 만날 수가 있다. 나는 꼭 살아서 전쟁에 이겨 조국을 구하고, 부모형제 곁으로 돌아가 학업을 계속하리라...”
<북괴군의 낙동강 도하와 학도병의 용전>
8월 4일 19시경 북한군 제13사단 제21연대 병력이 운성나루로 도하하여 낙상 리를 거쳐 장사 봉을 점령했다. 이로 인하여 청화산(701고지)을 방어하고 있는 제6사단 제2연대와 우리 제1사단 제12연대 배치지경선 사이에 약 3km의 공백이 생겨 우리 제1사단 우측이 노출되는 위험한 상태에 놓이게 되자 우리 제12연대 주력은 부득이 22시를 기하여 산림동으로 철수하였다.
8월 5일 02시 우리 제3대대 고지에서 바라보니 우측의 북쪽 제2대대 방어지역에서 북괴군 제13사단 1개 대대병력이 비등산(245고지)을 격파하고 25번 국도를 따라 해평 쪽으로 남진해 오고 있었고, 또 다른 북괴군 제134사단의 대대병력이 하도 봉(225고지)을 공격하여 02시부터 07시까지 6시간 동안 혈전이 벌어졌다. 조명탄 불빛이 대낮같이 비치고 예광탄의 섬광이 하늘을 수놓으며 요란한 총포탄의 소리가 낙동 강변을 진동하였다.
한편 북괴군 제13사단의 1개 중대병력이 청화산 남쪽의 구시골 계곡으로 동진하여 신라의 천년고찰 도리사가 있는 냉산(651고지)으로 깊숙이 침투하여 우리 제11연대의 우측 방을 교란하였고, 우리 제3대대의 우측 제1대대는 정면 강정나루로 도하를 시도하는 북괴군 제15사단 1개 연대병력과 격전이 벌어졌다.
8월 5일 08시경 낙동강변의 무명고지에서 우리 제3대대 학도병들은 가랑비를 맞으며 강정나루에서 도하하는 북괴군 제15사단을 향하여 중기관총과 박격포를 집중하여 적의 도하를 저지하고 있었다. 이때 ‘제3대대는 이동하여 냉산을 점령하고 있는 북괴군 1개 중대를 격퇴하라!’는 작전 명령이 내렸다.
우리 제3대대는 비를 맞으며 이동을 개시하여 해평 동과 문량 동을 거쳐 냉산으로 진격해 갔다.
09시경 제3대대는 냉산을 에워싸고 일선중대가 산개한 다음 그 후방의 무명고지에 중화기중대가 포진하였다.
09시 30분 우리 중화기중대는 적진에 81mm 박격포로 집중포격을 하였고, 이어서 10시 정각에 학도병들의 중기관총 엄호를 받은 일선 3개 중대가 냉산을 그물처럼 에워싸고 협공해 갔다. 적도 82mm, 61mm 박격포와 기관총으로 응사하여 치열한 사격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수적으로 우세한 우리 제3대대의 일선중대가 백병전으로 돌진하자 적은 구시골 계곡을 타고 청화산으로 퇴각해갔다. 이렇게 하여 학도병으로 편성된 제3대대는 냉산을 확보하여 우리 제1사단에 대한 북괴군의 우회공격을 막았다.
<낙동강 방어선 뚫은 북괴군과 격전>
8월 6일 14시경 낙동 나루 부근에서 북괴군 제3사단이 전차와 야포를 도하시키기 위하여 수중교를 가설하느라고 낙동강 수위가 2시간 동안 갑자기 줄었다가 원상으로 돌아가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23시 30분경에는 북괴군 제15사단의 2개 대대병력이 강정나루와 강창나루를 지키고 있는 제1대대 진지에 비를 퍼 붓듯 집중폭격을 가하면서 도하작전을 감행해 왔다. 줄기차게 내리는 장대비를 맞으며 긴장하고 있던 제1대대는 조명탄을 하늘높이 쏘아 나루터를 대낮처럼 밝혀놓고 저지 전을 폈다. 밤새도록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 총포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포연이 강을 뒤덮었다.
8월 7일 24시 적 제15사단은 강정나루에서 요란하게 도하하는 척하다가 주력을 상류의 강창나루로 돌려서 도하에 성공했다. 북괴군 제15사단 2개 대대병력이 제1대대의 낙동강방어선을 뚫고, 산양 동 일대까지 진출해 왔다. 24시경 제1대대와 제3대대가 빗속에서 북괴군의 저지에 안간힘을 썼다. 북괴군은 제3대대가 있는 냉산에 포탄을 퍼부으면서 밀어붙여왔다.
<낙동강 건넌 북괴군 탱크 등 유인 격멸>
8월 8일 01시 제1대대의 우측에 있던 제2대대는 퇴로가 완전히 차단되었다.
8월 8일 01시 적이 주평 동을 점령하자 06시 제1대대와 제3대대는 낙동 강변에서 이동하여 해평 천변에 새로운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168고지와 해평 천 사이의 월호 동 일대에 살상지대를 형성하여 진지구축작업에 들어갔다. 14시경부터 북괴군은 우리가 진지구축 작업을 하고 있는 해평천 일대에 122mm 곡사포를 산발적으로 쏘아대기 시작했다. 북괴군의 야포와 전차가 낙동강을 도하해 왔다는 증거다.
19시경 제2대대가 제1대대의 엄호를 받으며 철수하여 22시경에는 무사히 예정된 168고지에 도착한 후 신 방어진지 편성을 완성했다.
8월 9일 03시 북괴군 제13사단의 1개 전차중대가 1개 연대의 대병력을 꽁무니에 달고 살상지대로 설정해 놓은 월호동으로 진입해 오고 있었다. 조용한 밤중에 전차소리만 요란하게 울렸다. 그때 아군은 조명탄을 쏘아 올렸고, 순간 천지가 환해지면서 T-34전차 5대와 그 뒤를 따라오는 보병연대의 대병력이 완전히 노출되었다. 때를 맞추어 신호탄 3발이 연거푸 하늘 높이 날아올랐고, 이어서 우리 제11연대의 전 화력이 적의 전차와 보병부대에 집중 포격했다. 함께 기관총과 소총도 불을 뿜었다.
삽시간에 월호동 일대가 불바다로 변했다. 그러나 북괴군의 전차는 끄덕도 않고 168고지의 제2대대 방어진지는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우리 주저항선의 중앙을 향하여 돌진해왔다. 이때 사단공병대대가 해평교를 폭파하여 화염이 충천하고 그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04시경 북괴군은 전차를 앞세우고 파괴된 해평교를 우회하여 해평천 신방어진지를 발견하지 못한 채 해평천을 따라 문량동으로 진격해 갔다.
05시경 T-34전차 5대와 그 뒤를 따르는 1개 대대병력이 제1중대를 통과하여 그 첨병이 두대동 제3중대의 진전을 통과하고 있었다. 그 순간 제1대대장 김재명 소령이 신호탄 2발을 쏘아 올렸고, 동시에 정영홍 소령이 지휘하는 제3대대 학도병들의 81mm 박격포와 중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이어서 제17야포대대 제2중대의 105mm M-2곡사포와 연대 대전차포 소대의 57mm 대전차포가 가세하였고, 보병들의 개인화기도 집중했다. 金鍾杓(김종표) 준위가 이끄는 제11연대 특공대의 2.36인치, 3.5인치 로켓포가 발사되고, 수류탄도 집중되었다. 순식간에 전장은 화약 냄새와 피비린내가 진동했고, 처참하게 울부짖는 비명소리가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만들었다.
<우리 학도병 몇 일 간의 실전경험 통해 역전의 용사로 변모>
갑작스런 기습공격을 받은 북괴군은 혼비백산하여 도랑가로, 논바닥으로 산산이 흩어졌다. 뒤이어 후속하던 북괴군 제13사단도 같은 경우를 당하여 지휘체계가 무너지고 대형이 흩어졌다. 뒤이어 후속하던 북괴군 제13사단도 같은 경우를 당하여 지휘체계가 무너지고 대형이 흩어져 전투력이 마비되었고, 순식간에 해평 천과 일대의 논바닥은 피로 물들었다.
우리 학도병들은 며칠간의 실전 경험에서 역전의 용사로 변모해 가고 있었다.
제11연대가 해평 전투에서 선전하고 있을 때 좌 일선의 제13연대(崔榮喜 대령)는 석적 지구에서 악전고투하며 선전했으나 북괴군 제15사단의 1개 연대에 밀려 끝내 유학산과 수암산(일명 숲데미산) 선으로 이동하였고, 적 제15사단이 낙동강연안에 교두보를 확보하여 우리 제1사단의 우측을 위협하게 되면서 제11연대와 제17포병대대 및 사단공병대대의 퇴로가 차단될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8월 12일 밤 12시 우리 제11연대는 사단 작명에 의하여 제12연대의 엄호를 받으며 해평 전선을 이탈하여 낙동강방어선 최후 저지선인 다부 동으로 이동했다.
<값진 체험, 이것도 인생이다>
돌이켜 보면 우리 학도병들은 8월 3일 저녁에 일선에 배치된 이래 10일간 처절한 전투 경험을 쌓았다. 마치 몇 년이 된 것 같은 착각 속에서 시간을 보냈고 부모를 떠나 온지가 아득한 옛날처럼 느껴졌다. 하룻밤도 자보지 못하고 눈뜨고 밤을 새우는 버릇을 익혔고 밤이면 매섭게 달려드는 모기떼는 북괴군보다 더 무서웠다. 교육을 받으면서부터 갈아입지 못한 속옷에는 이가 득실거렸고, 군화와 양말은 벗어보지 못하여 땀에 찌들고 때가 끼어 고약한 냄새가 진동했으나 시체 썩는 냄새와 함께 면역이 되어 역겨운 줄도 모르게 되었다.
철모를 베개 삼아 아무데서나 뒹굴러 잤고, 실탄이 장진된 M1소총은 언제나 옆에 끼고 잤으며, 낙엽 구르는 소리에도 벌떡 일어나 총을 겨누는 습관을 익혔다. 적의 소총소리를 듣고 무슨 총인지 분간을 했고, 포탄이 터지면 그 종류를 알고 대피할 수 있는 능력도 길러졌다.
나는 이렇게 10일 동안의 전투경험을 통하여 역전의 용사가 되어 있었다.
8월 3일 제11연대에 배치된 우리 학도병들은 8월 20일, 8월 8일자로 소급하여 군번(제11연대군번 2301862)을 받고 육군 이등병이 되었다.
1954년 5월 15일 제1야전군사령부 제63통신운영중대에서 이등중사로 제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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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3개 중학교 학생 3백 명이 집단으로 입대했다
김삼수 / 경주 중학교 5학년 17세 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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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가 나고 경주 시내 중학교는 무기한 휴교에 들어갔다.
1950년 7월 15일 경주 시내의 3개 중학교 즉 경주중학교, 경주공업중학교, 경주문화중학교 학생들은 경주역으로 집합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소집은 학교에서 했는지 학도호국단이 했는지 알 수 없었다.
경주 시내에 거주하는 학생들은 대부분 연락이 닿았고, 일부 귀가하지 않고 있는 지방 학생들도 소집에 응한 학생이 있다. 이렇게 연락이 닿은 중학생들은 7월 15일 정해진 시간에 경주역으로 집합했다. 일부는 학교에 모여서 오기도 했다.
<같은 날 입대한 학생 6백 명 제25연대에 편입, 1주일간 훈련>
이날 모인 학생은 경주중학교 약 200여명, 경주문화중학교 학생과경주공업중학교 학생을 합한 93명으로 모두 약 300명이다. 이렇게 모인 경주시내 3개중학교 학생은 열차를 타고 대구로 이동하였는데 그때 우리는 시국과 관련하여 학도호국단 교육이 있는 것으로 알고 말없이 따라갔다.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학도호국단 간부가 인솔한 것으로 기억한다. 나중에 학도호국단의 열성 간부가 학생들을 소집하여 학도병으로 지원하게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대구역에서 우리 경주중학교 학생은 당일 신천동에 있는 잠업시험장으로 갔는데 군에서 누군가가 인솔해 간 것으로 기억된다. 잠사시험장에서 신체검사를 받고 인근 범어동(당시 경산군 경산 면)에 있는 동도국민학교에 학도병으로 입대하였다. 같은 날 입대한 학생은 약 600명이었고 제25연대 학도연대라는 이름으로 1주일간 교육을 받았다.
<1주 교육 직후 안강전투에 투입>
1주일 교육이 끝난 후 제1차로 일부가 안강전투에 참가하였다. 어느 날 안강전투에 참전하는데 희망자는 선착순으로 집합하라는 전달이 왔다. 학도병들은 서로 가겠다고 경쟁적으로 집합하여 일부가 출정하였다.
이어서 제2차 제3차 출정이 있었고, 출정에 끼지 못하고 남은 사람은 포병 요원으로 대구상업중학교로 이동하여 다시 1주일간 포병 교육을 받았다. 그때 그 학교에 포병 제16대대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교육을 시켰다. 교육이 끝나고 8월 2일 정식으로 입대하여 약 30여 명은 포병 제16대대에 남고 나머지는 각 포병대대에 배치되었다.
54년 7월 15일 일등중사로 만기제대 하였고,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