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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락 산성 (여수시)
고락산성은 행정구역산 여수시 문수동 산 35번지, 미평동 산 115번지, 둔덕동 산 176번지 일대에
해발 100~255m 사이의 낮은 산에 분포하고 있으며, 산성의 규모도 264~730m 정도로 소규모인
점이 특징이다
고락산성은 본성과 보루로 이루워 졌는데, 여수와 여천의 경계 지점에 위치한 고락산(해발 335m)
의 정상과 동쪽 사면 중복의 작은 봉우리(해발 200.9m)를 형성하는 곳에 각각 위치하고 있다. 본성
은 능선과 그 사면을 따라 축조되었고, 보루는 고락산의 정상에 위치한다.
고락산성 출토 토기류는 백제 토기가 주종을 이루면서 가야 토기가 일부 포함된 조합상을 보이고
있으며, 그 사용시기는 일부 출토품을 제외하면 주로 6세기 중반 이후부터 7세기 초까지로 편년된
다. 그 가운데 대부분의 출토품은 6세기 중반에 해당하는 것으로 판단되어 고락산성은 이 시기에 가
장 활발하게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사부리성(정읍)
검단 산성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에 있는 산성으로 여수반도와 순천시를 잇는 부분의 길목인 검단산(138.4m)의 정상
부에 위치하며 눈앞이 광양만이 바라보이는 요새지이다.
성곽의 규모는 전체길이 약 430m, 외벽높이 1∼3m(추정 높이 약 4∼6m), 내벽높이 2m이상, 성벽
두께 5m정도이다.
산성의 형식은 전형적인 테뫼식산성(산봉우리에다 마치 테를 두른 것처럼 산성을 쌓은 형식)이다.
이 산성의 축성시기는 체성의 축성기법이나 출토된 외편들과 토기편들로 보아 6세기 말에서 7세기
전반 경으로 추정된다. 검단산성은 이 지역에서 최초로 조사된 백제시대의 산성이며 정유재란 때 조
명 연합 육상군의 지휘부가 주둔했던 임란 전적지로 1598년 9월부터 2개월간 동쪽으로 약 2.7km떨
어진 왜성의 소서행장과 대치 치열한 공방전을 치른 임란전적지이다.
금성 산성 (담양군)
담양군 금성면과 전라북도 순창군의 경계를 이루는 금성산(603m)에 위치한 금성산성은 호남의 3
대 산성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외성은 6,486m, 내성은 859m에 이르며 돌로 쌓았다. 성안에는 곡식 1만 6천 섬이 들어갈 수 있는
군량미 창고가 있었으며 객사, 보국사 등 10여 동의 관아와 군사 시설이 있었으나 동학농민운동 때
불타 없어졌다.
동서남북에 각각 4개의 성문터가 있는데 통로 이외에는 사방이 30여m가 넘는 절벽으로 둘러싸여
통행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금성산의 주봉인 철마봉을 비롯하여 일대의 산지는 경사가 매우 가파르
다. 또 주변에 높은 산이 없어 성안을 들여다볼 수 없게 되어 있으며 가운데는 분지여서 요새로는 완
벽한 지리적 요건을 갖추고 있다.
삼국시대에 처음 축조하였고 임진왜란 후 1610년(광해군 2)에 파괴된 성곽을 개수하고 내성을 구
축하였으며 1622년에 내성 안에 대장청(大將廳)을 건립하고 1653년(효종 4)에 성첩(城堞)을 중수
하여 견고한 병영기지로 규모를 갖추었다.
금오 산성 (화순군)
전라남도 화순군 한천면 한계리 한천면과 춤양면의경계에 걸쳐 있는 해발고도 544.7m의 용암산
에 자리잡고 있다.
금오산성의 유래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능성현의 주성인 비봉산성과 그 외곽 성인 예성산성과 함께 쌓은
산성이라고 한다. 따라서 ‘몽고성지’라고도 부른다.
그뒤 병자호란 때에 다시 쌓았다고 하는데, 향토 방어를 위한 군사훈련 장소와 군량미 보관창고로
사용하였다는 말도 함께 전해져온다.
금오산성의 성터는 화순군 내 산성 중에서는 가장 높은 10m 내외의 석축이 남아 있는 곳도 있다.
산 정상에 60m 정도 길이로 선을 두른 듯이 그 모습이 남아 있는데, 그 규모는 높이 4∼5m, 너비 1.
5∼2m이다. 성의 전체 둘레는 1.5㎞ 정도이다.
성벽의 축성방법은 자연적인 산세를 이용하는 방법을 사용하였으며, 대부분 양면을 돌로 쌓아올린
협축식(夾築式)이다.
나주 자미 산성 (나주시)
전라남도 나주시 반남면 대안리 일원에 있는 산성으로 해발 94.5m이고 산정은 평평하다.
성벽은 본래 안쪽으로 호를 파고 내탁식(內托式)의 성벽을 만들었다고 여겨지며, 둘레가 약 740m
이다.
성문은 3개소의 단절부가 있으나, 지표에 문의 유구는 남아 있지 않다. 성안에는 건물터와 ‘용왕샘
(龍王泉)’이라 부르는 샘이 있다.
성내에서는 백제토기편과 고려 및 조선시대의 유물도 수습되고 있다. 따라서 조선시대까지도 산성
으로서 기능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전해오는 얘기로는 견훤(甄萱)과 왕건(王建)이 접전을 벌였던 곳으로, 견훤은 자미산성에 성을 쌓
고, 왕건은 약 4km 떨어진 영암 신북면의 갈마산에 주둔하고 싸워 견훤이 패하였다고 하며, 삼별초
(三別抄)의 군사가 주둔하였다고도 한다.
이 산성의 주변에는 대안리고분군·덕산리고분군·신촌리고분군 등의 대규모 고분군이 있어서 이들
고분군을 만든 집단들이 이 산성을 축조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영산강 유역의 백제시대 대표적인 테
뫼식 산성(산 정상을 둘러 쌓은 성)으로 지금은 성벽이 토석 혼축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남도 석성(진도군)
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남동리에 고려 원종 때 배중손(裵仲孫)이 삼별초를 이끌고 진도로 남하하
여 대몽항쟁의 근거지로 삼으면서 쌓은 성이라고 전한다.
진도군에는 백제시대에 이미 3개 고을이 있었는데, 그 중에 진도군에 속한 것이 지금의 가흥(嘉興)
인 도산현(徒山縣)과 지금의 임진( 臨准)인 매구리현(買九里縣)과 또 매구리현의 중심인 구도포(九
桃浦)로였을 것이다. 이러한 고을들이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시대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면,
삼국시대에 이미 축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13세기 초부터 창궐하기 시작한 왜구가 연해지방을 노략질하므로 1350년(충정왕 2)에는 진도의
관부(官府)와 백성들이 세종 초까지 내륙지방으로 피하여 살다가 귀향하였다. 남도포(南桃浦)에 만
호부(萬戶府)가 처음 생긴 것은 1438년(세종 20) 정월의 일로, 이로 미루어 보면 현존하는 성은 그
뒤에 쌓은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남도포성은 동쪽에 있는 금갑보(金甲堡)와 더불어 명양(鳴洋)으로 돌아가는 바닷길의 요새에
위치하는데, 이곳은 남해안에서 서해안으로 북상하는 위치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1555년(명종 10)
5월 서해안으로 북상하던 왜적들에게 남도포와 금갑보가 분탕질당한 경우도 있고, 또 이곳의 만호
들이 그들을 격퇴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지리적 특수성으로 말미암아 1683년(숙종 9) 6월에는 육군의 진관체제(鎭管體制)와 같은
수군진관(水軍鎭管)을 현재 전라남도의 위도(蝟島)와 가리포(加里浦)에 두었는데, 남도진(南桃鎭)은
가리포진관에 딸린 수군의 근거지가 되기도 하였다.
남도석성의 본래 규모는 둘레 1,233척, 높이 8척이고 샘과 우물이 각각 1개씩 있었다고 하며, 또한
1765년(영조 41)에는 둘레 1,040척, 높이 12척, 치첩(雉堞 : 성벽에서 돌출시켜 쌓은 성)이 43개나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성터만 부분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남도신성(진도군)
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남동리에 고려 원종(元宗) 때 배중손(裵仲孫)이 진도에 와서 1270∼1273
년에 걸쳐 몽골에 항쟁할 때 근거지로 삼았다.
그러나 성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있었다고 여겨지며, 현재 남아 있는 성은 남도포(南桃浦)에 만호부
(萬戶府)가 처음 생긴 것이 조선 세종 20년 정월이므로, 1438년 이후에 축성하였다고 생각된다.
기록에 따르면, 1214년부터 1259년에 걸쳐 왜구가 연해지방을 침범하여, 1350년(충정왕 2)에는
진도의 관아를 내륙지방으로 옮기고 백성을 옮겨 살게 하였다. 이 교치생활(僑置生活)은 조선시대에
도 계속되어 오다가 세종 때에 이르러 진도로 돌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기록은 축성 시기가 1438년 이후임을 더욱 뒷받침한다. 특히 남도포 석성(石城)
은 동쪽에 있는 금갑보(金甲堡)와 더불어 오른쪽으로 가는 바닷길의 요지이며, 동시에 남해안에서
서해안으로 올라오는 목줄기에 해당되는 요새지이다.
이러한 지형적인 특수성으로 인하여 1683년(숙종 9) 6월에는 수군진관(水軍鎭管)을 위도(蝟島)와
가리포(加里浦)에 둠으로써, 남도진(南桃鎭)은 가리포진관에 부속된 수군의 근거지가 되었다. 이 석
성은 본래의 규모가 둘레 1,233척(尺), 높이 8척이 되었으며, 샘과 우물이 각각 1개씩 있었다고 한
다.
그러나 1765년(영조 41)경에는 석축(石築) 둘레 1,040척, 높이 12척, 치첩(雉堞)이 43개소 있었다
고 하며, 현재는 동문(東門) ·서문(西門) ·남문(南門)과 성터가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남양리 산성 (고흥군)
고흥군 남양면 남양리와 중산리 일대에 백제시대에 조조례현(助助禮縣)이 있었던 지역으로, 남양
리 산성도 조조례현과 관련된 성으로 추정된다.
위치·축성법·출토유물 등의 양상으로 보아 백제시대에 처음 축성되어 조선시대까지 사용된 것으로
판단된다.
해발고도 162m의 산 정상부를 감싸고 있는 테뫼식 산성으로, 산성 동서쪽으로는 바다를 조망할
수 있다. 총둘레 534m, 너비 4m 내외이며, 돌로 축조되었다. 산성의 평면형태는 부정형(不定形)으
로, 남북이 동서에 비해 길며, 성벽의 동벽과 북벽 일부의 보존상태가 비교적 좋다.
성 안쪽은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완만하게 경사가 진 지형으로, 약 12곳의 계단식 평지가 확인된
다. 성의 중앙부에 돌로 쌓은 원형 우물 2곳이 나란히 설치되어 있는데 지금은 물이 나오지 않는다.
성문 터는 현 출입로로 이용되는 성의 남동쪽 회절부(回折部)에서 서쪽으로 약 40m에 있는데 현재
동쪽 외측 모서리부분 약 90cm정도만 남아 있을 뿐 흔적이 거의 사라졌다.
당동리 산성 (곡성군)
정보 미확인
동고 산성 (전주시)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대성동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산성으로 동·서·남문지와 수구문·건물지·
우물터 등의 시설이 남아 있다.
이 성은 전주 동남방 승암산(僧巖山)에 있다 하여 ‘승암산성’이라고도 하는 포곡식(包谷式) 산성인
데, 후백제견훤의 왕성(王城)으로 전해지고 있다.
전주가 후백제의 왕도였음은 여러 문헌에 보이지만 이 산성을 두고 왕궁터라 한 것은 1688년(숙종
14)에 성황사(城隍祠)를 이곳으로 옮기면서 쓰여진 「성황사중창기(城隍祠重刱記)」에 잘 표현되어
있다. 이 성황사는 지금도 성안에 남아 있다.
1980년의 개괄조사 결과 건물터에서 ‘全州城(전주성)’이라 새겨진 연꽃무늬 와당이 발견됨으로써
그 연대와 성격이 후백제의 왕궁터라는 전설과 부합됨이 밝혀졌다. 이밖에도 ‘中方(중방)’·‘官(관)’자
등이 새겨진 암키와 조각도 나왔다.
산성은 서북으로 면한 수구의 남북으로 뻗은 규암(硅岩) 절벽의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동쪽이 높은
삼태기형의 골짜기를 감은 것인데, 남북으로 날개모양의 익성(翼城)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성곽의 너비는 동서 314m, 남북 256m이며, 익성은 북쪽이 112m, 남쪽이 123m이다. 수구는 높이
230m 지점에 있으며 최고봉인 동남우각은 306.6m이다. 석축은 능선 바깥 사면 중턱을 깎아 회랑도
를 설치하고, 그 바깥 밑부분에 쌓았는데 높이는 4m 정도이다.
성안은 사면을 3단으로 깎아서 건물대지를 만들었다. 윗단은 길이 117m, 너비 20m, 중간대지는
길이 133m, 너비 26m로서 그 안에 건물지 초석과 기와조각들이 퇴적되어 있다. 성문은 수구에 서
문지, 북익성 동변 부근에 동문지, 남익성의 양쪽 부근에 두 개의 남문지가 있다.
마로 산성 (광양시)
광양시 광양읍 북쪽의 해발 208.9m의 마로산 정상부를 감싸고 있는 테뫼식 산성이다.
말안장과 같이 양쪽이 높고 가운데가 낮은 마안봉 지형에 자리 잡고 있다. 산성에 올라서면 광양만
을 비롯한 남해안의 바닷길과 주변을 두루 살필 수 있는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
백제가 공주(웅진)에 도읍을 두었던 6세기 무렵에 마로현을 다스리기 위한 중심성곽(치소)으로 처
음 쌓았으며, 통일신라시대에도 고을 이름을 희양현으로 바꾸어 9~10세기까지 사용하였다.
성벽의 길이는 550m, 너비 5.5m이며 면적은 약 18,945m2이다. 부속시설물로는 백제~통일신라
시대의 건물지 17동, 문지 3개소, 돌로 쌓은 물을 모아두는 시설인 석축집수정 5개소, 우물 2개소,
점토로 만든 물을 모아두는 시설인 점토집수정 6개소, 치 2개소, 수구 3개소, 구덩이 30여기 등의
많은 유구와 기와류, 토기류, 철기류, 청동기류 등의 다양한 유물이 확인되었다.
백치 산성 (고흥군)
전남 고흥군 도화면 신호리에 있는 백제의 산성으로, 독치성과 남양리 산성과 함께 전남 동부 지역
의 백제 산성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산성의 총 둘레는 444m이며, 산의 8부능선을 따라 수평되게 둘러쌓은 형태의 테뫼식 산성이다. 잔
돌과 점토를 혼합하여 바닥다짐을 한 흔적이 남아 있고, 출토된 유물로는 격자문, 선문, 무문, 복합문
등의 평기와 조각이 있다. 그러나 축성 연대나 사라진 시기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사실이 없다.
불암 산성 (광양시)
전라남도 광양시 진상면 비평리에 위치한 테뫼식 산성으로 불암산(佛岩山)의 서남 지맥에 해당한다.
불암산성의 축성기법과 수습된 기아와 토기편, 무기의 일종인 석환으로 보아 백제시대 후기에 축
조된 것으로 보인다.
성벽 전체의 둘레는 500m이고, 최대 높이는 334m, 너비는 530~600cm이다. 동서쪽이 장축인 사
다리꼴 형태로 성벽의 안팎을 돌로 쌓아 올리는 협축식으로 축성되었다. 협축부분의 성벽하부는 석
비례층이나 암반 위까지 파서 기초를 튼튼하게 한 후에 별도의 기단을 두지 않고 곧바로 벽을 쌓아
올렸다. 또한 성벽의 하중이 아래쪽으로 몰려 성벽이 붕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경사면 지역을 수
평 쌓기 방식으로 쌓아 올렸다. 성벽의 대부분 무너져 있지만 자연 지형을 최대한 이용하여 축성하
였기 때문에 접근하기가 어렵다.
비봉 산성 (화순군)
화순군 능주면과 도곡면의 경계 지점에 해당하는 해발 195.5m 높이의 비봉산 일대에 자리잡고 있
있으며 자연지형을 이용한 테뫼식 산성으로 산성의 전체길이는 925m 정도이다.
성벽은 능선이나 절벽 등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는데 주변의 자연석을 잘 가공하여 정연하게 편축
또는 협축으로 쌓았다. 성벽은 해발 170∼220m 일대에 분포하는데 서벽과 북벽이 잘 남아 있다.
동벽은 안산 정상부로 가는 능선을 가로지르며 경사면과 돌출된 구릉의 평탄부를 이용하였다. 성
벽은 가파른 능선의 허리를 가로질러 축조하였으며 완만한 산기슭의 평탄한 곳에는 부분적으로 5∼
6단의 돌을 쌓아 축조하였다.
서벽은 나지막한 봉우리에서 비봉산 정상부로 연결되는 가파른 능선을 깎아낸 뒤 가공한 자연석을
양쪽에서 축조한 협축이다.
남벽은 안산 정상부에서 나지막한 봉우리로 연결되는 능선인데 경사면을 깎아낸 뒤 양쪽에 돌을
쌓은 협축으로 능선상에 자연석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다. 북벽은 안산으로 올라가는 능선상에 있는
계곡과 절벽을 이용하여 가파른 능선사면에 3∼4단의 돌을 쌓아 축조하였다. 북벽의 안쪽에는 폐사
지가 있다.
문지와 건물지 두 곳이 있고, 우물은 폐사지 근처에 있는데 해발 180m 지점이다. 건물지 주변에서
는 회청색 경질 기와편과 암갈색 토기편, 백자편 등이 출토되었다.
비봉산성은 문헌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축조 시기와 배경을 알 수 없는데 능주에서 가까운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으므로 유사시에 즉시 입성하여 방어나 역습 등의 전술을 수행할 수 있는 전형
적인 배후산성이다.
상라 산성 (신안군)
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면 진리 흑산면 진리 2구인 읍동마을의 바다와 만나는 상라산 북쪽 능선상에
위치하고 있다.
상라산성 일원에 산성을 비롯한 제사유적, 관사터, 무심사지(无心寺址) 등 4개 유적으로 이루어진
복합유적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고대~고려시대에 국제 해양도시의 기능을 했을 흑산도 읍동마을을
수호하기 위해 축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산성은 전체길이 280m로 남사면만을 반달 모양으로 둘러싸고 있는데 순수 석축부의 길이는 220
m이다. 해안에 면한 북쪽 능선은 약 100m 높이의 깎아지른 해안 절벽을 그대로 성벽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성벽 중간에 있는 커다란 바위 위나 바위 사이에만 성벽을 쌓는 등 험준한 자연지세를 최대
한 활용하여 축조하였다.
성벽은 대체로 남사면의 6부 능선을 반달 모양으로 둘러싸고 있으며, 산복식(山腹式)에 가까운 테
뫼식 산성으로 성벽은 편축법(片築法)으로 쌓았다. 성돌은 기저부에만 장대석을 사용하고 아래 윗단
은 거의 같은 크기의 성돌을 수직으로 쌓아 올렸으며 쐐기돌로 고정하여 수평을 유지하였다. 면석
(面石)은 대충 다듬은 면을 바깥으로 하여 가로쌓기와 세로쌓기를 하였으며, 안쪽에는 잡석으로 뒷
채웠하였다.
수인 산성 (장흥군)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대리에 있는 고려 시대의 산성으로 ‘수인산성(修因山城)’이라고도 한다.
유치면 대리에서 강진 병영면에 걸쳐 산마루를 이어쌓은 포곡식(包谷式) 석성으로, 주위 둘레는 약
6㎞, 높이 4∼5m, 너비 4m이며, 세 개의 성문이 있다.
성의 축조는 천험의 산세를 이용한 협축식(夾築式 : 중간에 흙이나 돌을 넣고 안팎에서 돌 등을 쌓
는 것)으로 양면이 거의 수직에 가까운 석성인데, 성내에는 봉수대와 수인사지(修因寺址)·군고지(軍
庫址) 등의 유적이 남아 있다.
수인산성이 언제 어느 정도의 규모로 축조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으나, 세종실록지
리지에 장성 입암산성(笠巖山城), 담양 금성산성(金城山城), 나주 금성산성(錦城山城)과 함께 수인
산성이 기록되고 있어 이 성의 축조연대는 고려 시대로 추측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수인산성은 둘레가 3, 756척(尺)이고 본래는 도강현(道康縣) 때의 성인데
본조에서 다시 쌓았다.” 하였는데 현 강진군을 고려 시대에 ‘도강(道康)’이라 불렀던 점을 감안한다
면, 이 성은 고려 시대에 쌓았음이 분명한 것 같다.
오성 산성 (화순군)
전라남도 화순군 동면 서성리의 백용리와 화순읍 일심리 오성산성은 화순읍과 화순군 동면의 경계
지점에 해당하는 해발 290.4m의 오성산 일대에 있다. 오성산의 자연지형을 최대한 이용하여 축조한
테뫼식 산성으로 산성의 전체길이는 675m 정도이다.
성벽은 능선이나 절벽을 이용하였는데 해발 250∼275m 일대에 자리잡고 있으며 대부분 주변의
돌을 가공하여 축조하였다. 성벽의 기단석은 큰 돌을 사용하고 위로 올라갈수록 작은 돌을 사용하였
다.
능선의 사면을 이용한 동벽은 경사면을 깎아낸 뒤 자연석을 가공하여 한쪽만을 축조한 편축법으로
이루어졌다.
남벽은 건물지 앞의 능선사면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는데 일부는 경사면을 깎아낸 뒤 양쪽에 돌을
쌓아 만들었다.
서벽은 가파른 능선을 깎아낸 뒤 가공한 자연석으로 축조하였다. 가파른 능선과 절벽을 이용한 북
벽은 능선을 다듬은 뒤 부분적으로 성벽을 쌓았는데 자연지세를 잘 이용하였지만 대부분 훼손되어
있다.
남벽이 동벽과 만나는 지점에서 서쪽으로 20m 정도 떨어진 남벽에 문지로 추정되는 지점이 있다.
해발 250m 지점의 남벽 안쪽 능선사면에 건물지가 있다. 건물지는 반원형이며 앞에는 긴 석축이
조성되어 있다. 성벽일대와 건물지 주변에서 채집된 유물로는 회백색 경질 암기와편과 회청색 경질
토기, 백자, 구연부편 등이 있다.
오성산성에 대한 문헌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산성의 구체적 축조 시기와 배경에 관해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화순읍에 가까운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으므로 유사시에 즉시 입성하여 방어나 역습 등을 할
수 있는 전형적인 배후산성이다.
용장 산성 (진도군)
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용장리의 용장성은 고려시대 무신정권의 군사기구였던 삼별초가 왕족인
승화후 온을 왕으로 세우고 몽골에 항복한 고려와 몽골 연합군을 상대로 항쟁의 거점으로 쌓은 도성
이다. 왕궁을 감싸고 있는 토성과 외곽의 나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외성은 강화도로 도성을 옮기고 몽골을 상대로 항쟁을 펼치던 1243년(고종 30)에 해전에 약한 몽
골군에 대비하기 위해 섬 지역에 처음 산성이 세워지면서 방어용으로 활용되다가 삼별초가 왕을 세
우고 진도에 도성을 건설하면서 나성으로 사용되었다. 내성은 1270년(원종 11) 8월 삼별초가 진도
에 들어서기 전에 이미 완성되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내성의 길이는 425m, 높이 1.5~2m이며 부속 시설물로는 건물지 50개소 등의 유구와 기와, 청자,
금속류 등 많은 유물이 확인되었다.
외성 길이는 13km, 높이 1m 전후, 너비 약 320cm이며, 내부 면적은 8,514,000m2(258만평)이
다.
부속 시설물로는 성문 6개소, 적대 1개소, 치 3개소, 장대, 제사유적 등 많은 유구와 기와 · 청자 ·
금속류 등 많은 유물이 확인되었다.
입암 산성 (장성군)
전라남도 장성군 북하면 신성리에 있는 고려 시대의 산성으로 총길이 약 15㎞, 높이 3m로 노령산
맥에 연하여 전라북도 정읍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해발 687m고지로 기암단애가 많고 산세가 험
준하여 옛날부터 전략요새지로 알려진 곳이다.
산성의 형태는 상봉을 둘러싸듯 하였으며, 지금도 남문과 북문이 옛모습대로 남아 있다. 이 성은
고려 시대 몽고군이 이 곳 전라도에까지 쳐들어오자 1256년(고종 43) 3월에 송군비(宋君斐)가 이
성을 지키면서 큰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1409년(태종 9)에 수축하고 장성현감 이귀(李貴)가 1593년(선조 26)에, 역시 현감인 이유형(李惟
馨)이 1653년(효종 4)에 성의 폭을 넓히고 낮은 곳을 높이 쌓았다. 한편, 정유재란 때에 이 곳 성의
별장인 윤진(尹軫)이 왜적과 싸우다 순직하기도 하였다.
성의 축성법은 협축(夾築 : 중간에 흙이나 돌을 넣고, 안팎에서 돌 등을 쌓음)으로 성벽 내외가 수
직에 가까우며, 넓은 계곡과 산세를 이용한 포곡식(包谷式)이다.
중흥 산성 (광양시)
전라남도 광양시 옥룡면 운평리의 중흥산성은 산 전체가 천연적인 요새로 능선을 따라 흙을 쌓아
만든 토성(土城)이다. 성은 흙을 단순히 쌓아 올린 것이 아니라, 자연지세를 잘 이용하여 흙을 다져
서 쌓은 판축법의 토성이다.
산성의 둘레는 4㎞ 정도이고, 성내 면적은 48만 8823㎡로 광양시의 산성 가운데 가장 크다.
6개의 산봉우리를 아우른 포곡형(包谷形) 산성인데, 외성 안쪽에 약 240m에 이르는 내성을 흙으
로 쌓은 2중성이다.
중흥사(中興寺) 입구 세심정에 남문, 옥룡면 추산리로 넘어가는 오솔길에 북문터가 남아 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의병(義兵)과 승병(僧兵)의 훈련장으로 사용되었으며,의병과 승병의
연합군과 왜군간에 큰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수습유물은 고려시대에 속하는 기와류가 대부분인데, 광양시의 대표적인 포곡형 토성으로서 고려
시대에 축조된 산성으로 추정된다.
철마산성(진도군)
전라남도 진도군 진도읍의 진산으로 ‘북산(北山)’ 또는 ‘망적산(望敵山)’으로도 불리는 철마산(鐵馬
山, 304m)의 정상부를 둘러싸고 축조한 테뫼식 산성의 터이다.
1756년(영조 32) 김몽규(金夢奎)가 편찬한 진도군 읍지인 <옥주지 沃州誌> ‘산천조’에 ‘진도의 북
쪽 20리(2리의 오기로 보임) 지점의 산에 옛날 뇌산현(군) 때 산성을 쌓아 관방처(關防處; 국경을 지
키는 곳)로 삼았다.’라는 기록이 있다.
뇌산현(군)은 진도군 군내면의 통일신라시대 이름인 것으로 볼 때 철마산성은 통일신라시대에 군
사적 목적으로 축성한 산성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 위치상 진도읍성을 보호하는 천연의 요새지
로 기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철마산 정상부는 대체로 분지형의 평탄한 대지를 이루고, 비탈 쪽은 암벽으로 된 급경사를 이루는
지형이어서 성곽 또한 대부분 암벽 사이에 보축하거나 암벽 상단에 2~3단만 축조되었다. 성 중앙에
건물지 1개소, 동북쪽 성벽에 치(雉; 성벽에 기어오르는 적을 쏘기 위하여 성벽 밖으로 군데군데 내
밀어 쌓은 돌출부) 1개소가 있다. 대부분의 성벽이 현재 무너진 상태로 방치되어 있다.
철옹 산성 (화순군)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 안성리, 북면 다곡리, 이서면 장학리·보산리에 있는 철옹산성은 해발 57
2.9m인 옹성산의 자연지형을 최대한 이용한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다. 산성의 전체길이는 5,400m
정도이다. 성벽은 해발 275∼550m 일대에 분포하고 축조방식은 협축법과 편축법을 사용하였고, 대
부분 석재와 암벽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다.
철옹산성은 동복면과 북면을 경계짓는 지리적 요충지인 독재에 자리잡고 있으므로 유사시에 즉시
입성하여 방어나 역습 등의 전술을 수행할 수 있는 지형에 있는 전형적인 산성이다.
내부에 계곡을 포함하여 수량이 풍부하고 활동공간이 넓을 뿐 아니라 외부의 노출도 방지해 줄 수
있는 구조로 유사시 상당수의 군사와 주민들이 농성할 수 있었던 곳이다.
동쪽 성벽은 능선과 암벽을 이용하였는데, 동북쪽 건물지 앞부분과 동문이 있는 곳이 가장 잘 남아
있다. 나머지 부분은 2개의 암봉을 이용하여 암벽 자체가 자연 성벽이 되도록 하였다.
남쪽 성벽은 능선과 절벽을 이용하여 가공한 자연석으로 9∼10단으로 쌓았는데 거의 수직으로 축
조하였다. 남문지 동쪽에는 거대한 암봉이 있어 천혜의 성벽이 되며, 남문지 서쪽으로는 능선 경사
면을 깎아내고 편축하거나 협축하였는데 능선의 굴곡을 따라 성벽이 구불구불하게 이어져 있다.
서쪽 성벽은 옹성산 정상에서 남북으로 이어지는 가파른 자연지형을 이용하였는데, 이곳은 절벽으
로 형성되어 있어 특별한 성벽시설을 갖추고 있지 않다. 북벽으로 이어지는 서북쪽 모서리에는 석축
성벽 일부가 잘 남아 있다.
북쪽 성벽은 예성산 정상부의 평탄한 면에서 동쪽으로 이어지는 능선 사면을 가파르게 깎아내고 1
0∼15단의 돌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는데 높이가 3m 정도이고 폭이 좁은 편이다. 옹성산에서 동쪽으
로 내려오면서 편축으로 이어지다가 잘록한 허리가 형성되어 있고, 거기서부터 다시 동쪽으로 올라
가기 시작하는데 이 부분에서는 협축으로 축조하였다. 북벽 중간의 허리부분에서는 사방이 잘 내려
다보이는데 망루로 보이는 시설물이 남아 있다.
동북쪽 암봉 사이의 작은 계곡을 따라 성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계곡을 차단하는 성벽이 있다. 이
차단벽은 동북쪽 암봉 사이의 계곡을 막은 1차적 방어시설로 높이 2m 정도인데 6∼7단으로 축조하
였다.
성 안에는 문지(門址) 시설이 남아 있다. 동문지는 동북쪽 암봉과 동남쪽 암봉을 연결하는 성벽의
중간으로서 해발 350m 지점이고, 남문지는 남벽과 동남쪽 암봉 사이에 있는데 해발 340m 지점이
다. 그 밖에 건물지 세 곳이 있는데 동북쪽 건물지의 중앙에 우물이 있다. 건물지 주변에서는 회청색
경질 기와편과 회청색 경질 토기편 등이 출토되었다.
회진 산성 (나주시)
전라남도 나주시 다시면 신풍리 사직골에 있는 백제시대의 토성으로 해발 159.2m의 거마산(擧馬
山)을 ‘금생이재’라 하는데, 이곳에서 남으로 뻗은 능선과 동쪽으로 123.6m의 봉우리를 거쳐 서남향
한 능선을 둘러 포곡식(包谷式 : 계곡과 산정을 함께 두른 산성)의 토루를 두르고 있다. 성벽의 둘레
는 남북으로 긴 타원형 평면에 2.4km나 되며, 남쪽은 평지를 가로질러 축조되었다.
성안에 사직제가 있고, 성 밖의 남쪽에 영산강이 흐르고 있다.
성벽은 오랜 시간에 걸쳐 붕괴되었으나 윤곽이 뚜렷하며, 영산강 유역에서는 이 성이 최대의 고대
토성으로 알려져 있다. 1993년과 1994년에 남벽과 남문지가 발굴 조사되었다.
남벽은 판축(版築)으로 축조되었으며, 성벽의 기저부 안쪽에는 2단의 석렬(石列)이 마련되었는데,
1단은 성벽의 방향과 석재의 방향이 직교하고, 2단은 성벽 방향과 일치하고 있다. 성벽은 영정주(永
定柱)를 3.3∼3.8m의 간격으로 세우고 구획된 구간을 마련하여 축조하였다.
그리고 영정주의 옆에도 별도의 버팀기둥 구멍이 있으며, 8∼20cm의 두께로 판축된 성벽은 높이
4.6m, 너비 6m나 된다.
남문터는 남벽의 서단에 있는데, 개구부(開口部)의 너비 8.5m, 초석의 너비 5.6m, 길이 5.6m의 구
조이며, 2.8m 너비의 초석이 있다. 중간 초석에는 지름 22cm, 깊이 16cm의 문짝 지탱기둥을 받는
축수공(軸受孔)과 길이 42cm, 너비 15cm, 깊이 8cm의 장방형 문설주 기둥 홈이 있다.
문구(門口)와 개구(開口) 사이는 석축을 하였으나, 측벽은 정연하지 못하고, 성안 남문 동측에서는
석축한 외연의 안에 토축한 동서길이 11m, 너비 4.2m의 문돈(門墩)이 있었다. 성안에 고인돌이 있
고, 외부에는 석실분이 있어서, 이미 청동기시대부터의 유적지에 백제 후기에 토성을 축조하여 사용
한 것으로 추측되는 유물들이 수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