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분. <공재 윤두서>(1668~1715). 고산 윤선도의 증손자인 윤두서 선생. 다산 정약용의 외할아버지. <윤선도-윤두서-정약용>으로 이어지는 스토리 라인을 이어지게 만드는데는 이 윤두서 선생의 자화상이 큰 몫을 한다.
해남 윤씨 종가에서 이 초상화를 처음 만났을 때의 느낌은, 바라보는 나를 압도한다는 것이다. 38.5(세로)x20.5(가로)cm이어서 참 작은 그림이지만 그 울림만큼은 100호 200호보다도 더 크다. 사진 촬영을 허락받아, 최고로 정성을 다해 찍은 사진을 실물 크기로 인화하여 집안에 모셔두고 즐겨 보고 있다. 무언가 집중하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자 다짐을 할 때 아주 좋다.
종이에 먹으로 그린 이 자화상은 작은 화면 가득 얼굴 부분만 너무도 사실에 가깝게 그려냈다. 이 그림을 그리실 때 모습을 상상해 본다. 윤두서 선생이 마치 자기 자신과 한바탕 대결을 버리는 듯한 정경이 그려진다. 얼굴(안면)은 구륵(鉤勒)보다는 무수한 붓질을 해서, 붓질이 몰리는 곳에서 어두운 형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 숱이 많지 않지만 연발수(連髮鬚) 형태의 수염을 한 올 한 올 그려냄으로써 얼굴 모습을 부각시키는 놀라운 변용의 효과를 거두고 있다. 부리부리한 봉황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찬 기운은 300년 전과 다름없다. 마흔 여덟에 돌아가셨으니, 이 자화상은 40대 중반 모습일 것이다. 한번 보면 평생 잊을 수 없는 인물화를 꼽으라면, 서양은 <모나리자>요, 동양은 <윤두서 초상화>일 것이다. (여기까지는 나의 메모)
<한국의 미술가>(사회평론)에는 이렇게 실려 있다.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의 <자화상(自畫像)>은 널리 알려져 있다. 독특한 구도와 강렬한 눈빛, 인상적인 수염 등에 우선 이끌리는 작품이다. 이 <자화상>만 보더라도, 공재의 인간상에 관심이 간다. 우리의 국보급 문화재가 해외에 소개될 때 공재의 <자화상>이 몇 차례 출품된 적이 있었다. 이때마다 많은 외국인들이 이 자화상에 감탄하고 깊은 관심을 보이곤 했다.
공재는 조선 후기 예술사에 있어서 새로운 시대를 연 인물이다. 그는 유교적 성인을 이상으로 삼아 구도적 자세로 일관하였다. 또 뛰어난 식견을 가지고 당시의 세상을 자신의 책임으로 자각한, 강한 자부심을 지닌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당쟁의 회오리 속에서 이런 포부를 조금도 펼쳐보지 못하고 일생을 마쳐야 했다. 공재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울분과 분노를 수양으로 다스리려고 했지만, 한 인간으로서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화상>에 표현된 울분과 분노 그리고 우수는 바로 공재 자신의 인간상이라고 볼 수 있다.
공재는 다양한 학문적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예술에 대해서도 남다른 신념이 있었다. 앞선 시대의 예술적 경향을 반성하고 다가올 미래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였다. 그래서 당대의 사람들도 공재를 새로운 시대를 연 인물로 평가했고,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는 옛 그림을 배우려고 하면 마땅히 공재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을 정도이다. 공재는 이른바 조선 후기 회화의 새로운 경향인 진경산수화, 풍속화, 문인화를 창조하고 개척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시 조선시대 회화사의 시대 구분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사실상 시대 구분은 연구자마다 다르다. 그러나 대체로 전기, 중기, 후기로 구분하고, 후기에 말기를 추가하기도 한다. 전기(1392~1550)는 안견과 같은 대가가 나와 그의 화풍이 주류를 이룬 시기이다. 중기(1551~1700)는 왜란과 호란을 겪은 혼란스러운 시기로서 회화가 위축된 가운데 김명국의 그림에서 보이는 거친 필치의 절파화풍이 대세를 이루었다. 그리고 후기는 진경산수화, 풍속화, 문인화의 유행과 쇠퇴로 그 특징을 요약할 수 있다.
조선 후기에 이러한 세 가지의 새로운 양식과 장르의 회화가 동시에 등장하여 당대를 풍미한 것은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런 중대한 변화를 그 시대의 벽두에 서서 일으킨 인물이 바로 선비화가 공재였다. 공재는 진경산수화와 풍속화를 새로이 창조하고 문인화를 수용함으로써 조선 후기 화단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면서 그 변화를 주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