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미군 철수는 시간문제다."
안드레이 란코프 강연, "미국의 한반도 전략적 가치 이전과 다르다"
"한반도 통일은 내일 당장 이나 2년 후, 또는 25년 후 언제 올지 모른다. 혁명은 미래에 대한 공포에 따라 아래로부터 일어나기 마련이다. 북한은 김정일 생존, 사후에도 체제를 파괴할 방법은 많다. 하지만 노력을 하지 않는다... 지금 한국 사람들은 미국이 한국에 대한 전략적 의미를 크게 갖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80년대, 90년대 초의 얘기다. (한반도는 미국의) 전략적 가치 하락으로 주한 미군철수는 시간문제다. 미국은 다만 북한의 핵무기가 해외로 확산되는 것을 방지하는데 신경 쓰기 때문에 북핵 문제에 적극적으로 임하고 있을 뿐이다".
북한 핵문제를 비롯해 한반도 문제에 정통한 러시아 출신 역사학자(중국학)인 안드레이 란코프 박사는 유창한 한국말로 외국학자의 시각에서 본 한반도의 오늘과 내일을 예리하게 분석했다.
▲ 안드레이 란코프 박사는 21일 아침 서울 가락동 캘리포니아호텔에서 국제외교안보포럼이 개최한 조찬 강연에서 북한 핵을 중심으로 강연하면서 '북한은 결코 핵을 포기하려하지 않을 것'이고 한반도 또한 예전과 같이 미국으로부터 전략적 가치를 부여받지 못하고 있다 고 말했다. ⓒkonas.net
안드레이 란코프(호주국립대, 국민대 교수) 박사는 21일 아침 국제외교안보포럼(이사장 김현욱, 전 국회의원)이 주최한 조찬 강연회 초청 연사로 참석해 북한 핵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 문제와 관련해 이렇게 말하고, 그 단적인 이유로 북한에 대한 대북방송을 예로 들었다.
란코프 박사는 예전에는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아래 북한에 대한 사회교육방송 등이 지속적으로 방송되고 했지만 지금은 방송내용마저 예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졌을 뿐 아니라 비평 방송으로는 겨우 자유아시아방송만이 하루 1시간 반 정도 방송하는 실정이고 예산도 크게 깎여진 실정이라고 말했다.
란코프 박사는 "북한의 개혁개방은 현실적으로 어렵고 개혁과 개방을 가로막는 가장 큰 요인은 정치, 경제적으로 발전한 남한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즉 남한의 발전된 모습이 북한 주민에게 알려지게 될 경우 주민들은 김정일이 (정치를)잘못했다는 것을 알게되어 가만히 있지만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구 소련에서 러시아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소련 정부에 몸담고 있던 고급 공무원과 자본가 그룹을 대비시켰다. "현재 러시아의 자본가나 사업가, 고급공무원들의 80, 90퍼센트는 과거 소련정부의 KGB(비밀경찰)출신으로 그들은 경험과 지식, 능력도 많았지만 기회주의자로 소련의 몰락과 동시에 합법, 비합법적 방법을 동원해 여러 가지 국가소유 광산이나 재산들을 개인소유로 만들어 잘 살고 있다"고 당시 권력층의 상황을 지칭했다.
하지만 이에 비해 북한 김정일 체제 하에서의 북한 간부들은 비상구가 없다고 했다. 그 이유로 "개혁이 시작되면 체제가 흔들리고 정권 자체가 무너질 우려가 급증해 공포로 다가온다"며 '근거 있는 공포'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는 또 북한의 경제상황을 승용차에 비유했다. 현재 북에서 제일 많이 이용되는 승용차가 지난 1951년 소련에서 생산된 4륜구동 짚차의 복사판이며, 이는 1930년대 미국에서 생산된 차량인데다 각종 시설 또한 60년대 시설로, 이런 것을 개인소유화로 한다해도 북은 남한과 경쟁자체가 이루어지지 못한다고 단정 지었다.
핵문제와 관련해서 "북한은 결코 핵을 포기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영변을 비롯한 핵 생산시설은 동결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즉 김정일 등 측근들도 영변 시설이 해야할 역할을 다했기 때문에 그 시설이 필요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미국이나 국제사회가 북한이 요구하는 대로 돈을 주면 동결할 수 있다고 말해 이미 전문가들이 영변 핵시설 동결조치와 관련한 2·13합의 1단계에 대한 의구심을 표명한 내용과 의견을 같이했다.
그는 이어 북한은 많은 수의 핵무기가 필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핵보유를 통해) 국제적으로 억제수단을 갖기 때문에 프랑스, 중국 등과 같은 다량의 핵무기는 필요 없고 아무도 모르는 비밀 장소에 십여개 이상의 탄두만 있으면 충분하기 때문에 더 생산할 필요가 없기에 동결할 수 있다는 것이고 현재까지 생산된 핵무기는 그대로 두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북한이 하나의 안전보장 장치로 보고있는 '플루토늄'"이라면서 "쉽게 포기하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포기하게 하기 위해서는 아주 많은 것을 요구할 것이고 결국은 어려운 협상이 되어 몇 년을 끌 수도 있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란코프 박사는 "한반도의 미래와 관련해서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한반도 미래를 결정하는 변수는 국제정치보다 북한의 국내문제이며 이는 김정일과 측근 지도부보다는 밑으로부터 이루어지는 변화"라고 지목했다.
또 "현재 북한 경제는 장 마당을 중심으로 한 철저한 지하경제로 한국의 1950년대와 비슷하며 북을 떠난 탈북자는 정확히 5만명에 이르고 신의주나 함흥, 청진, 회령 등 중국 변방과 가까운 지대에서 중국을 오가며 중국을 경험(중국의 개혁개방과 시장경제)한 사람은 50만에서 많게는 100만 여명으로 이들이 (북 주민들의) 사고방식을 바꾸게 하고 개혁 개방을 통해 중국이 잘 산다는 것을 알리고 있으므로 북한 당국은 이들을 막으려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한국에서 북한으로의 지원이 오히려 북한의 이런 변화를 어느 정도 동결시키는 방향으로 사용되어지고 있다고 진단하기도 했다.
그는 "북한의 국내적 위기 초래는 시간문제로 이는 내일 당장 시작될 수도, 아니면 25년 후에 될 수도 있지만 아무도 모르고, 다만 아는 사람은 평양에 있다"고 말해 북의 변화바람에 따라 체제 자체에 대한 붕괴 완급이 조절될 수 있음을 내비쳤다.
이어 한반도 장래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큰 변수는 중국이라고 했다. 중국학 연구 전문가인 그는 "북한 체제가 흔들리기 시작할 때 붕괴체제를 받아들여 흡수통일 할 수도 있고, 또는 친 중국괴뢰정부가 세워질 수도 있다"며,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주변 이웃국가와의 관계를 고려해 완충지대화가 이루어질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웃국가들이 한반도 통일을 그렇게 달가와 하지 않는다는 점을 명백히 했다.
란코프 박사는 이와 더불어 지금도 일부 학자와 국민들 사이에서 거론되고 있는 간도와 만주, 연해주 문제 등을 통일 이후에는 통일한국이 강하게 제기할 것을 중국이나 러시아가 우려하고 있다며, 한국 내에서 한국어로 말하니 이들 국가가 모를 것 같지만 다 알게 마련이라고 말했다. 이런 논의는 통일이후에 얼마든지 가능한 만큼 미리부터 긴장감을 조성할 필요는 없을 것이라는 게 그의 조언이다.
Konas 2007, 6. 21(목) 이현오 기자
6·25란 무엇인가? ②북한군의 남침과 국군의 후퇴
북한군 남침과 국군의 후퇴
6월 25일(주일) 새벽 4시 기습남침
▲ 1943.3 북괴 김일성과 박헌영은 모스크바 소련 최고인민회의에 참석 남침계획을 스탈린에게 설명 허락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북한 김일성 정권은 전쟁 준비를 위장하기 위해 상투적 평화공존 전술을 구사했다. 곧 남한에 있는 남조선 노동당 중책인 '김삼용'과 '이주하'를 북에 계신 우리민족의 지도자인 '조만식'선생과 교환할 것을 제의해왔다.
한편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 신성모 국방장관은 북한군이 남침을 위해 38선에 이동집결하는 위급한 상황을 국민들에게 알리면서, 남침시기를 1950년 4월 또는 5월로 예측하여 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50년 4월 21일 발령한 경계강화 지시가 너무 오래되었고, 농번기도 되었다는 이유로 6월 23일 비상경계태세를 해제하고 24일 토요일 오전 일과를 마친 후 전 부대에 외출·외박을 허가하였다. 바로 이틈을 이용하여 북괴군은 6월 25일 새벽 4시 전 전선에 걸쳐 침공을 개시하였다.
당시 국군 대 북한군의 군사력을 비교하면 아래와 같다.
구 분 |
남 한 |
북 한 |
비 고 |
총병력 |
104,993명 |
203,380명 |
육해고, 해병 |
탱크 |
전무 |
242대(t-34) |
소련제 |
자주포 |
전무 |
176대(su-76) |
소련제 |
곡사포 |
91문(105㎜) |
172문(122㎜) |
1:6 |
항공기 |
22대(연락기 등) |
211대(yak-9,il-10등) |
1:9.6 |
함정 |
28(소행정 등) |
30(수송,고속정) |
1:1.1 |
(1950년 6.24 현재) 자료 : 한국전쟁사 제1권, 국방부
▲ 전쟁이 시작된 위치를 알리는 38선
UN 안보리 긴급 소집·주일미군 출동
북한 침공군은 6월 25일 오전 6시경 옹진, 개성, 의정부, 춘천지역 전 전선에서 38도선을 넘기 시작했으며, 동해안 강릉 남쪽에서는 상륙작전이 이루어졌다.
▲ 1950. 6. 28 인민군 서울입성
병력·장비의 열세에다 경계강화태세까지 해제되어 전투준비태세가 부족했던 국군의 전선은 춘천지구(아군 제6사단)를 제외하고는 파죽지세로 밀려, 서울은 사흘만인 6월 28일 점령당하고 만다.
▲ 전선시찰
북한의 남침으로 대한민국은 물론, 자유세계가 놀랐다. 그리하여 미국시간 25일(일요일) UN안보리가 긴급 소집됐으며, 평화 파괴행위로 규정했다. 이어 ① 북한군의 즉각적 적대행위 중지 ② 군사력의 38선 이북 철회 요구안을 9:0으로 가결한다.
동시에 주일 미군 제24사단 스미스부대가 최초로 참전하게 되었고, 우방 16개국이 우리를 도우러 한국으로 달려왔다. 6월 29일 새벽 맥아더 장군이 도쿄(東京)로부터 수원에 도착하여 이승만 대통령을 만났고, 한강으로 올라가 한강남쪽 제방에서 전투상황을 관측하다가 호 속에서 한국군 병사를 만났다.
「맥아더 장군과 병사와의 대화」
맥 아 더 : "자네는 언제까지 이 호 속에 있을 것인가?"
한국병사 : "예! 각하, 저는 직속상관으로부터 철수하라는 명령이 있을때까지 여기 있을 것입니다."
장 군 : "명령이 없을 때엔 어떻게 할 것인가?"
병 사 : "엣! 죽는 순간까지 여기를 지킬 것입니다."
장 군 : "오! 장하다, 자네 말고 딴 병사들도 다 같은 생각인가?"
병 사 : "옛! 그렇습니다, 각하"
장 군 : "참으로 훌륭하구나! 여기 와서 자네와 같은 군인을 만날 줄은 몰랐네. 지금 소원이 무엇인가?"
병 사 : "옛, 우리는 지금 맨주먹으로 싸우고 있습니다. 놈들의 전차와 대포를 쳐부술수 있도록 무기와 탄약을 주십시오."
장 군 : "음.. 그리고 또 없나?"
병 사 : "옛! 없습니다."
장 군 : "알았네. 여기까지 와 본 보람이 있었군"
이때 맥아더 장군은 병사의 손을 꼭 쥐고 나서 통역을 맡고 있던 김종갑 대령에게 이렇게 말했다.
"대령! 이 씩씩하고 훌륭한 병사에게 전해주시오. 내가 도쿄에 돌아가는 즉시 미국지원군을 보낼 것이라고, 그리고 그때까지 용기를 잃지 말고 훌륭히 싸우라고"(정일권장군 회고록 중에서).
그러나 침공군은 경부선 도로와 철도를 주공격으로 남진을 계속했다. 수원, 조치원, 대전, 추풍령을 넘어 대구 북쪽 왜관까지 거침없이 밀고 내려왔고, 호남지방은 거의 무저항으로 공주, 전주, 군산, 목포, 하동, 진주를 거쳐 마산 서쪽 가야까지, 그리고 동해안은 영일만까지 장악하게 된다.
이제 남은 땅은 낙동강 하류 동쪽으로 동서 100㎞, 남북 130㎞의 자투리 땅 뿐이었고, 그 동남 끝단엔 부산이 있었다.
▲ 1950. 6. 26 새벽 울산 앞바다에서 북한 선박을 격침시킨 PC701(백두산)
여기까지 온 기간이 6월 25일부터 7월 말까지 40일도 못되었다. 전세계는 대한민국이 세계지도에서 지워지는 줄로만 알았다.
그리고 해상에서도 적군은 게릴라부대를 삼척, 울진 등지에 상륙시켜 후방교란을 획책하고 있었는데, 부산지역에 약 600여명의 편의 게릴라(민간복 착용)를 침투시키기 위하여 수송선 1척이 남하하던 중 6월 25일 저녁에 발견하여 계속 추적되어 오다가 26일 새벽 울산 앞 바다에서 한국 해군 백두산호(PC-701함)에 교전 중 격침되었다. 만약 이들 편의 게릴라 부대가 부산근처에 기습상륙 했더라면 한국 방어는 더욱 어려워졌으리라고 본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군이 전면전을 담당하기에는 지휘체제가 미흡하였다. 그리하여 7월 14일 이승만 대통령은 국군의 작전지휘권을 UN군사령관에게 위임함으로써 국군 및 UN군이 단일사령부 지휘아래 통합작전을 수행하게 하였다.
7월 하순 ∼ 8월 초순 약 10일간의 영동·김천지구전투에서는 적 전차부대가 신속한 작전으로 미군에게 계속 타격을 가하면서 추풍령을 넘고 있었다. 이때, (1999년 9월 29일 AP의 첫 기사로 세계에 알려진) '노근리사건'이 7월 26일 영동읍 노근리에서 불행한 사건이 다음과 같이 발생한다.
당시 적군은 피난민 대열속에 게릴라정찰대를 민간복으로 변장 침투시켜 정보수집, 사탄유도(射彈誘導), 지뢰매설, 보급차 습격, 포진지 기습 등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었다. 이렇게 피난민 속에 위장하여 침투하는 북한군을 가려내는 전투중 불행한 민간이 피해자가 발생한 것이다.
작전일지에 의하면 50여명의 피난민 무리가 철도를 따라 남하하는 것을 적군으로 오인, 불가피한 오발포를 한 사고로 기록되고 있으나, 피난민쪽에서 선제공격을 했다는 증언도 있었다. 당시 적군은 이곳에 피난민들을 한 줄로 앞세워 논, 밭등을 지나가게 하여 지뢰매설 여부를 확인하는 작전도 감행하였다는 증언도 있다.
2006년 5월 29일 AP통신은 존 무쵸 전 주한미국 대사가 국무부에 보고한 'UN군 당국은 최전방에서 피난민 집단의 접근에 대한 전투지침을 작전부대에 하달하였다'는 기사를 보도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일부에서 '양민학살'의 근거라고 주장, 여론을 왜곡시키고 있다.(계속)
konasnet@konas.net 2007. 6. 20(수) 김순옥기자
6·25란 무엇인가? ③낙동강전선 방어작전
▲ 1951년 2월 17일 맥아더사령관이 수원비행장에서 한국군의 정일권, 백선엽장군등과 만나다. 이때 백선엽장군이 맥아더사령관에게 "We go togetger!"라고 하고 있다
UN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가급적 북방에서 적군을 저지하고, 인천에 상륙하여 이를 협공한다"는 전략구상 하에, 우선 일본에 있던 미 제24사단을 한국에 급파, 적군의 남하저지를 시도했다.
그러나 북괴군은 최신식 전차와 야포, 그리고 잘 훈련된 보병으로 아군에게 재정비의 시간을 주지 않고 속전을 강행하였다.
후방에서는 게릴라전으로 남한내 불순분자들을 동원하여 UN군 병참선과 통신을 교란시키는 작전을 병행하였으므로 미군은 피아(彼我)분간이 어려워 혼전을 피할 수 없었다.
'부산 교두보'(차후작전을 유리하게 전개시키기 위하여 설치한 지점 : 경상남북도의 ⅓)를 사수하기 위하여 분전한 약50일간의 진지 사수작전(陣地 死守作戰)을 되돌아 볼 때, 풍전등화 같았던 나라가 다시 살아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고 감사한다.
유엔군의 총반격작전·북진
▲ 1950년 8월 낙동강전선에서 적부대 집결지에 융단 폭격하는 미공군 B-29편대
UN 공군의 폭격으로행동이 완전히 제한된 적군은 9월 총공세가 실패하자 전투능력 상실과 최악의 병참지원, 피로 중복, 영양결핍, 패전감, 무자비한 지휘통솔 등으로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어 있었다.
9월 16일 9시를 기해 미 제10군단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에 호응하여, 낙동강 전선에서도 UN군 및 국군이 총 반격작전을 개시하였다.
인천 상륙 작전, 서울탈환
9월 15일 새벽 6시 30분 미 해병 제1사단 제5연대의 289명 병력은 인천의 월미도 상륙작전에 성공했으며 이로써 근 3개월의 전세는 역전되기 시작한다.
6·25남침 3일만에 서울을 잃은 직후, 맥아더 장군은 수원근방 전선을 시찰할 때 이미 인천 상륙작전을 구상하였다. 이 작전이야말로 전략, 전술적인 면 뿐만아니라 정치적, 심리적 효과가 극대에 달할 것이고, 더 나아가 호남 곡창에 있는 전략물자인 쌀을 북괴군에게 빼앗기지 않는 것이 한국 국민에게 더 없는 값이 될 것이라고 장군은 역설했다. 인천상륙작전은 '세기의 大도박'(성공확율 5천대1)이었다.
맥아더 사령부에서는 상륙작전계획을 구체화하여 워싱턴에 보고한다. 워싱턴에서는 맥아더 장군의 계획을 확인 토의하기 위하여 '콜린스' 장군과 '서먼' 제독을 특사로 극동사령부에 파견한다.
8월23일에 맥아더 장군은 특사단에게 약 한시간 동안 인천상륙작전에 관한 타당성 설명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강한 의지를 보이는 결론을 맺는다.
"만일 나의 판단이 빗나가 승리할 수 없는 방어로 돌입한다면, 나는 몸소 그 곳에 나아가 상륙군이 피나는 좌절을 맛보기 전에 철수시킬 것이다. 그때 유일한 손실이란 나의 직업적인 명예뿐일 것이다. 그러나 인천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인천은 성공한다. 그것은 10만명의 생명을 구할 것?."
훗날 콜린스 장군은 그 연설이 '감동적인 연설'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맥아더 장군은 8월 30일 인천상륙작전 명령을 하달한다.
미 해군함정 226척을 포함한 총261척의 상륙작전 기동부대는 약 75,000명을 상륙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낙동강 전선을 돌파하여 북진하고 있는 미 제1기갑사단과 인천으로 상륙한 미 제7사단 병력이 9월 26일 서정리(오산∼평택간)에서 합류한다. 한편 같은날, 한미해병대는 연희동 및 마포 쪽에서 중앙청 쪽으로, 미 제7사단 병력 일부는 서빙고, 뚝섬방향에서 서울시내 쪽으로, 그리고 국군 제17연대는 하왕십리로 진출하여 전략요지인 망우리를 점령한다.
9월 27일 새벽 서울시내 곳곳에서 시가전이 전개되는 가운데 6시 10분 한국해병 제2대대 6중대 1소대는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였으며, 9월 28일 10시경(종군기자들에 의하면) 명동의 교회당을 비롯한 많은 교회에서 서울탈환을 축하하는 종소리가 울렸다.
이로써 89일간 북한 공산군 치하에서 신음하던 서울은 자유를 다시 찾았고, 9월 29일 12시 서울 환도식 이후부터는 눈앞에 다가온 통일만이 남은 과제임을 다짐하며 희망의 10월을 맞는다.
9월29일 맥아더 원수는 서울을 대한민국 정부의 관할 하에 넘기는 식전에서(환도식) 아래와 같은 메시지를 이승만 대통령에게 전달하였다.
"하나님의 은혜로서 인류의 가장 큰 희망의 상징인 UN기 아래서 싸우는 우리군대는 한국의 수도를 해방하게 되었습니다. 공산주의자의 전제적 지배에서 해방된 시민은 다시 개인의 자유와 존엄을 제일로 하는 생활을 영유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귀국이 입은 전쟁의 참화에 대하여 전 세계는 깊은 관심과 우의로 단호히 궐기하여 전력을 다하여 귀국을 구원하기로 맹세하였습니다. 육체를 살리려면 정신을 살리지 않고서는 안됩니다. UN군 최고사령관으로서 본인은 각하에 대하여 귀국 정부의 소재지를 회복하고, 이에 따라 각하가 헌법상의 책임을 충분히 달성할 수 있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지금부터 우리들은 한국 국민에 대한 책임을 각하와 귀 정부에 맡기고 본관과 부하장병들은 다시 군무에 전념할 각오입니다." (계속)
konasnet@konas.net 2007. 6. 21(목) 김순옥기자
6·25란 무엇인가? ④ 북한진격
9월 29일 UN 총사령부는 모든 작전부대에 대하여 일단 38도선에서 진격을 멈추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6·25의 불길 속에서 찾아낸 단 하나의 보람이 있다면 그것은 '국토통일'인데... 이 명령을 못마땅하게 여긴 이승만 대통령은 즉시 군 수뇌들을 불러 비장한 결의를 다짐했다 - [단독북진!!]
「이승만 대통령과 정일권 총사령관과의 대화」
이승만 대통령 : "국군의 통수권자는 맥아더냐? 아니면 이나라 대통령이냐?...UN은 우리가 38선을 넘어가서 국토통일을 이룩할 권리를 막을 수 없다..."
국군 총사령관 정일권 소장 : "... 국군의 작전지휘권은 이미 대통령 각하께서 서명하신 문서에 따라 UN군 총사령관에게 이양되었으므로 지금 다시 이중으로 명령을 내리시게 되면 혼란을 가져올 것입니다. 또한 북진에 관하여는 UN에서도 곧 결정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오니 좀더 형세를 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 의견은 다만 군사지위 계통에서 말씀 드리는 것이고, 대통령각하께서 국가 대계로 보아 꼭 그렇게 하시는 것이 좋겠다고 명령을 내리신다면 저희들은 오직 명령에 따를 뿐입니다."
그러자 대통령은 품안에서 명령서를 꺼내어 정일권 총사령관에게 건넸다.
"내가 이 나라의 최고 통수권자이니, 나의 명령에 따라 북진을 개시하라"['晩'자의 서명]
정일권 총사령관은 강릉지구로 북진하고 있는 1군단장 김백일 소장에게 "작전손실을 방지하기 위해 우리 국군이 반드시 점령해야 할 38선 북방의 뚜렷한 지형지물이 없겠는가?" 정일권 장군은 제1군단장의 회신을 받고, 워커 8군사령관과의 협의, "38선 바로 북쪽 ○○고지로부터 적의 저항이 치열하여 국군이 큰 손실을 입고 있으니 이를 점령 안 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정일권 총사령관은 다음날 제1군단 사령부를 방문, 최전방 제3사단(이종찬 대령) 23연대 작전지역으로 나아가 전선을 시찰, 그곳에서 38선 돌파를 명령했다. 10월 1일 국군 제3사단 23연대(김종순 대령), 22연대(김응상 대령)도 이미 월선 직전에 있었는데, 정일권 소장은 전방시찰 중 23연대장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했다.
"현 전황 어떤가?" "한 사람도 월북 안했습니다." "뭘 꾸물꾸물하고 있어! 빨리 북진해!
맥아더 사령부는 10월 1일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에게 "항복"하라는 성명을 발표했으며, 10월 2일 북진을 명령하였다. 10월 5일 중부전선에서 국군 제6사단이 월선북진을 시작했고, 제3사단 23연대와 24연대는 교호로 선두전진하며 하루 24㎞씩이나 북진하였다.
10월 7일 "한국 평화통일에 관한 8개국 결의안"이 UN에서 찬성47 / 반대5 / 기권8로 가결되었는데, 제2항에 "UN군은 한국 통일정부 수립에 필요한 기간을 넘어서서, 한국의 어떠한 지역에도 머무를 수 있음"이라 했다.
[에피소드] 백선엽 제1사단장은 10월 6일 미 제1군단 본부에서 '작전명령'을 수행하라는 연락을 받고, 단독으로 청주에서 대전으로 가서 작전명령을 받아 보고 매우 실망하였는데; 평양 공략을 포함한 북진계획에 제1사단은 예비대로서 해주 공격의 임무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참으로 억울하고 분통터지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음은 그의 수기의 일부이다.
나는 치밀어 오르는 묘한 감정을 억누르면서 다시 한 번 간청을 했다.
"밀번 장군! 평양은 저의 고향입니다. 그러므로 평양까지의 도로나 지형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장군께서도 아시다시피, 여기 평양까지 가는 도로는 산악지대이기 때문에 차량의 기동에 많은 장애가 있습니다. 이러한 지형에선 어떤 경우에는 차량보다 도보행군이 더 유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사단에게 임무를 주십시오. 그러면 밤낮으로 도보행군을 강행하여 미군보다 먼저 평양에 입성하여 보이겠습니다."
나는 어느새 흥분하고 있었다. 평양 탈환은 기어코 내 손으로 이룩해 보겠다는 의지가 감정을 자극해 버린 것이다.
밀번 장군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두사람의 시선이 어색하게 교차하고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초조와 불안과 분노의 격류가 온 몸을 휘감고 드디어 두눈에서 눈물이 터져 나와 버렸다.
나는 위신도 체면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밀번 장군앞에서 울어 버린 것이다.
"그렇게도 평양 공격의 임무를 원합니까? 제너럴 백" "원랍니다! 꼭 맡겨 주십시오, 밀번 장군!"
나는 나도 모르게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말했다. "제1사단의 기동력으로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문제없이 평양을 탈환해 보이겠습니다. 약속하겠습니다. 훌륭한 전과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좋습니다. 제너럴 백! 당신의 애국심과 용기를 샀습니다."
결심을 한 그는 행동이 빨랐다. 즉시 참모장을 전화로 불렀다.(하략)
10월 20일 평양시내의 수많은 교회당에서 종소리가 일제히 울려 퍼지는 가운데, 국군과 UN군을 환영하는 인파가 평양거리를 메웠다. 10월 21일 오전 이승만 대통령은 인산인해를 이룬 평양시민 대회에 참석했다.
"나의 사랑하는 동포여러분! 만고풍상을 다 겪고 39년 만에 처음으로 대동강을 건너 평양성에 들어와서 사모하는 동포여러분을 만날 적에 나의 마음 속 감상을 목이 막혀서 말하기 어렵습니다. 40년 동안 왜정 밑에서 어떻게 지옥생활을 했던가를 생가갛면 눈물이 가득합니다..."
평양입성의 선봉으로 영예의 대통령 부대 표창을 받은 국군 제1사단은 멸공통일의 결의를 다시 한번 다짐했다.
같은 날 도쿄에서 날아온 맥아더 원수는 미군 첫 평양돌입 부대인 제5기병연대 F중대를 사열했다. 이때 그는 96일전 포항에서 처음으로 상륙했던 200명 가운데 고참병이 있으면 앞으로 나와 보라고 말했다. 나온 병사는 겨우 5명, 그 중에서 3명은 부상을 입고 있었다.
중부전선: 국군 제2군단(제6,8,7사단)은 덕천, 희천, 온정리를 거쳐 10월 26일 초산 압록강까지 진출하였다.
동부전선: 국군 제1군단(제3사단, 수도사단)은 10월 10일 원산 진출(제3사단), 10월 17일 함흥, 흥남에 진출(수도사단)하였다. 10월 26일 미 제10군단이 이원(利原)으로 상륙하여 미 해병 제1사단과 미 제7사단 일부 및 국군3사단 일부는 혜산진까지(11월 21일) 그리고 수도사단은 11월 24일 현재 청진까지 진출한다. (계속)
konasnet@konas.net 2007. 6. 23(토) 김순옥기자
대량살상무기´ 김정일의 無力化
北核문제 해결의 열쇠는 미국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유권자 손에 들려 있다. 칼자루를 잡은 손이 바뀌어야 한다.
미국의 힐 대사가 북한을 방문했다. 잘 속는 데 이력이 난 언론은 또 장밋빛 전망을 하고 있다. 한국의 언론처럼 자기 꾀에 걸려 잘 속는 집단도 드물 것이다. 문제의 본질을 모르고 드러난 현상에 집착하기 때문에 상황을 誤判한다.
한국의 정치부 기자들은 한국 정치를 움직이는 힘인 정치자금의 흐름에 대해서 無知했다. 노회한 정치인들의 조종에 넘어가 인형극의 배역을 맡기도 했다.
국제정치를 움직이는 힘은 國力과 國益, 그리고 집권층의 私益이다. 인기나 당위론이 아니다. 북핵문제의 앞날을 전망하기 위해선 김정일의 의도를 분석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다. 김정일의 최대 관심은 독재권력의 유지이다. 핵개발은 권력유지에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김정일이 핵개발을 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 등 세계 강대국들이 이 실패한 정권에 관심과 호의를 베풀고 있다. 핵개발을 포기한다는 것은 경찰과 대치하고 있는 인질범이 칼을 내려놓는 것을 의미한다. 칼을 버린 인질범의 운명은 무엇인가. 체포되어 감옥에 가는 것이다.
핵무기가 무서운 것이 아니다. 핵무기를 누가 관리하느냐가 핵심이다. 미국, 영국, 러시아, 중국, 프랑스 같은 문명국이나 강대국은 핵무기를 책임 있게 관리한다. 주방장 손에 쥐어 있는 칼은 흉기가 아닌 것과 같다. 利器이다. 김정일 손에 들어가 있는 핵무기는 미친 사람이나 살인전문가 손에 들려 있는 칼과 같다. 凶器인 것이다.
따라서 무서운 것은 핵무기가 아니고 김정일이다. 김정일은 조금이라도 불충한 말을 하면 3代를 강제수용소에 가두어 그런 양심수 수십만을 죽였다. 그는 구제수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자금을 식량구입에 쓰지 않아 수백만을 사실상 굶겨죽였다. 이 자는 또 최소한 12개국으로부터 500명이 넘는 사람을 납치하여 갔다. 김정일이 대량살상무기 그 자체이다. 김정일이란 뇌관을 제거하지 않는 한 북핵문제의 해결은 없고 핵무기가 사라진다 해도 공포는 계속된다. 김정일은 핵무기보다 더 파괴력과 살상력이 강한 생화학무기를 갖고 있다.
미국의 부시 정권은 김정일이 추가 核실험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 외교의 목표를 두고 있는 듯하다. 추가 核실험을 못하게 하면 核개발 기술의 발전을 저지할 수 있다. 지금 북한의 核실력은 실전용 核폭탄을 만들 수 있는 정도가 못된다. 핵폭발장치를 겨우 만든 것이다. 실전용 핵폭탄을 만들려면 核실험을 최소한 대여섯 번 더 해야 한다. 한번 할 때마다 플루토늄이 6kg 정도 없어진다. 김정일이 추가 핵실험을 하면 미국은 강경한 대응을 할 수밖에 없다. 즉, 군사적 대응을 해야 한다. 미국은 이라크에 발이 묶여 그럴 여력이 부족하다.
김정일도 중국의 압력 때문에 앞으로 2년간 핵실험을 할 수 없을 것이다. 2008년 北京올림픽에 방해가 되는 행동을 하기란 어렵다.
여기에 미국과 북한의 타협점이 있을 수 있다. 김정일은 2.13 합의를 실천하는 척하면서 시간을 끌고 미국은 이것을 진전으로 받아들이면서 당근을 주고… 양쪽이 시간을 버는 것이다. 김정일은 문제를 해결하면 별 볼일 없는 존재로 전락한다. 문제를 계속해서 일으키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국제적 긴장을 유지시켜야 내부 단속도 가능하고 존재 가치를 높일 수 있다. 문제가 해결되면 망하고 위기가 있어야 생존할 수 있는 체제인 것이다.
미국과 國益이 같을 수 없는 한국인으로서는 김정일 無力化를 전략적 목표로 삼아야 한다. 막연한 낙관론도 막연한 비관론도 금물이다. ´대량살상무기´ 그 자체인 김정일이 정치적으로, 물리적으로 제거되지 않고선 핵문제 해결은 불가능하다.
김정일을 無力化시키는 것은 간단하다. 한국이 가진 가장 큰 무기인 경제력의 힘, 즉 돈의 영향력을 이용하는 것이다. 북한정권이 한국의 퍼주기에 의존하는 부분이 커질수록 우리의 對北 잠재적 영향력도 강해진다. 권력과 정책의 결정권을 쥔 좌파정권은 굴욕적인 퍼주기로 일관하지만 정권교체로 칼자루를 쥔 사람이 깐깐한 세력으로 바뀐다면 김정일은 한국 눈치를 보아야 한다. 김정일은 한국내 친북세력을 부려 한국 정부의 정책을 좌지우지하려 한다. 차기 정권이 이 친북세력에 대해서 依法조치를 엄정하게 시행한다면 이들도 무력화된다. 40배나 되는 한국의 경제력이 북한을 감싸버린다면 시장의 힘에 의해 북한정권은 녹아버린다.
결국 북핵문제 해결의 열쇠는 미국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유권자 손에 들려 있다는 이야기이다. 칼자루를 잡은 손을 바꾸어야 한다.
독립신문 2007. 6. 23(토) 趙甲濟 조갑제닷컴 대표
´6·25대회´ 저지 나선 선관위
反한나라당 선전·선동은 合法! 반역세력 집권저지는 不法?
6월 25일 시청광장에서 열리는 『工作정치분쇄 6·25국민대회』에 대한 노무현 정권의 압박이 선을 넘고 있다.
서울시선거관리위원회는 21일 비상국민회의, 국민행동본부, 뉴라이트전국연합 등 주요 참가단체들을 개별방문하거나 서신(書信)전달하는 형태로 『6·25국민대회는 不法 事前선거운동이므로 행사를 취소하라』고 경고하고 나섰다.
선관위가 不法의 근거로 든 규정은 공직선거법 제93조. 이 조항은 『누구든지 선거일전 180일부터 선거일까지 선거에 영향을 미치게 하기 위하여 이 법의 규정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정당 또는 후보자를 지지·추천하거나 반대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거나 정당의 명칭 또는 후보자의 성명을 나타내는 광고, 인사장, 벽보, 사진, 문서·도화 인쇄물이나 녹음·녹화테이프 기타 이와 유사한 것을 배부·첩부·살포·상영 또는 게시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공직선거법 제93조는 더 이상의 구체적 규정을 두지 않고 있다. 따라서 실제 어떤 행위가 事前선거운동인지는 일차적으로 선관위의 해석사항이며, 분쟁이 생기면 법원의 재판을 통해 해결된다.
6·25국민대회가 事前선거운동이라는 선관위 해석은 좌파단체들의 反한나라당 선전·선동에 대한 방임행위에 비춰 편파적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6·25국민대회 주의·주장은 反헌법·反국가세력의 공작정치를 저지해야 한다는 것이어서 이것이 不法집회인지도 논란거리다. 선관위는 2002년 대선 당시 김대업 兵風사기사건이나 여중생범대위 反美촛불시위 등 노골적인 反한나라당 선동은 규제하지 않았었다.
허위사실·비방을 계속적·악의적으로 유포하면 처벌
제보를 받은 23일은 공무원 휴무일인 토요일인지라 서울선관위 관계자들과 연락할 수 없었다. 기자는 어렵사리 중앙선관위 공보담당자인 M서기관과 통화할 수 있었다.
그는 『선거법에는 「선거에 영향을 미치게 하기 위하여 정당 또는 후보자를 지지·추천·반대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는데 이는 단 몇 줄의 추상적 규정이어서 선관위 해석을 필요로 한다』고 말했다.
이어 『지금까지 전례에 따르면, 事前선거운동으로 단속되는 행위는 대부분 허위사실, 비방 등의 내용을 악의적·계속적으로 유포하는 경우이며, 일회성의 의견제시나 합법적 주장은 허용돼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6·25국민대회는 허위사실, 비방을 악의적·계속적으로 유포하는 경우라고 보기 어려운데 이것이 事前선거운동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어떤 행사가 事前선거운동이냐 여부는 전반적이고 종합적으로 봐야지 어느 한 부분만을 봐서는 판단하기 어렵다』며 답변을 피했다.
기자가 다시 「소위 좌파단체들은 한나라당의 집권을 막아야 한다며 비방성 주의·주장을 하고 있는데 단속하지 않느냐」고 묻자, 『그 같은 주의·주장이 事前선거운동인지는 전체적인 내용을 살펴봐야 하며 자세한 내용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며 역시 즉답을 피했다.
기자가 추가질문을 위해 잠시 후 전화를 돌렸을 때는 담당자의 핸드폰이 꺼져있었다.
서정갑 국민행동본부장은 『反헌법세력의 工作정치를 규탄하며 헌법을 사수하자는 집회를 事前선거운동이라고 방해하고 나선 것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탄압이자, 또 다른 工作정치』라며 『정권의 어떠한 탄압 속에서도 끝까지 투쟁해 대한민국을 지켜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최인식 국민행동본부 사무총장은 『共産세력, 반역세력의 집권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 선거법 위반이라는 것은 헌법을 무시하는 자의적 해석에 불과하다』며 『노무현 정권의 노골적인 탄압에 결코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독립신문 2007. 6. 23(토) 김성욱 프리렌서 기자
첫댓글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