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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내용 |
춤을 위한 음악, 디스코!
디스코 이전의 음악이 노래를 위한 음악이었다면, 디스코는 춤을 추기 위해 만든 음악이었다. 디스코의 강한 비트의 4박자는 심장이 뛰는 박자와 가장 유사하다. 인종과 계층을 불문하고 디스코를 들으면 흥이 생기고 엉덩이가 들썩거리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디스코 열풍은 1978년 영화 Saturday Night Fever가 흥행하면서 시작되었다. 영화의 주인공 존 트라볼타의 환상적인 춤은 전 세계 젊은이들을 열광시켰다. 이어 Funky town(Lipps Inc) In the navy(Village people), Hello Mr. Monkey(Arabesque), I was made for dancin(Leif garrett), Gimme! Gimme! Gimme!(ABBA), Sexy music(Nolans) 등 주옥같은 디스코 명곡들이 젊은이들을 열광시켰다. 디스코텍과 롤러스케이트장에서 디스코 머리와 디스코 바지를 입은 젊은이들이 밤새 몸을 흔들었다. 한국에서는 YMCA(조경수), 날 보러와요(방미) 등 번안곡이 히트를 쳤다. 이어 밤차(이은하) 등 국산 디스코 음악이 선을 보였고 나미, 소방차, 김완선 등 댄스 스타가 등장했다.
한류음악의 뿌리, 디스코
1980년대 들면서 디스코의 중심이 이태원으로 넘어간다. 특히 문나이트(MOOM NIGHT)는 한국 대중음악사에 큰 획을 긋는 역할을 했다. 이주노,양현석, 현진영, 박진영, 이현도, 김성재, 박철우, 강원래, 구준엽 등 90년대 이후 한국의 대중문화를 이끈 젊은 춤꾼들이 ‘문나이트’에서 경쟁적으로 디스코를 췄다. 현재 세계에 진출하고 있는 한류 댄스음악의 뿌리가 바로 디스코였던 것이다.
롤러스케이트장, 그리고 디스코의 추억
디스코 열풍은 80년대 롤러 스케이트장과 함께 절정으로 치닫는다. 도시와 시골 할 것 없이 롤러장이 생겼고, 롤러장에서는 신명나는 디스코 음악이 울려 퍼졌다. 7,8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들에게 롤러장과 디스코는 잊을 수 없는 열정의 기억으로 남아있다. 당시 디스코는 젊은이들에게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그 디스코의 열정은 지금 어디에 남아있는 것일까? 디스코텍과 롤러장에서 청춘을 보낸 40대 동창들이 디스코의 추억을 회상한다. 이전의 음악이 뮤지션 중심의 음악이라면, 디스코는 춤을 추는 대중이 중심이 된 음악이었다. 디스코텍은 프랑스에서 시작되었다. 디스크, 즉 앨범을 틀어주는 곳이란 의미다. 록이나 고고의 경우 대중들은 뮤지션을 바라보며 응원을 하고 춤을 추었다. 그러나 디스코텍에서는 뮤지션이 배제된다. 오로지 앨범을 통해 흘러나오는 음악에 몸을 싣고 대중 자신이 무대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디스코는 음악을 민주화한 장르이기도 했다. 1970년대 디스코의 중심은 무교동이었다. 카네기, 123, 싼다, 다운타운, 코파카바나 등 이른바 잘나가는 디스코텍이 밀집해 있었다. 디스코텍에서는 개인기가 뛰어난 춤꾼들이 자연스럽게 두각을 나타냈다. 디스코텍 업주들은 다투어 디스코 경연대회를 개최했다. 경연대회를 통해 디스코 스타들이 발굴되었다. 서병구, 정원관, 신철, 설도윤 등이 당시 장안을 주름잡던 디스코 춤꾼이었다.
디스코 DJ 전성시대!
디스코의 열풍과 함께 디스코를 틀어주는 DJ가 각광받았다. 이진, 한용진, 이세윤, 김창환, 신철, 유대영씨 등이 스타 DJ로 등장했다. 이들 DJ들은 대중의 기호에 맞는 디스코 음악을 발굴하여 히트시킨 주역이었다. 이들 스타 DJ들에게 청중을 플로어로 끌어내는 자신만의 노하우를 듣는다. 또한 최근 홍대 앞거리에서 디스코 클럽을 운영하는 DJ 슈퍼플라이와 신세대 DJ 타이거 디스코를 만나 21세기 젊은이들에게도 디스코의 신명과 열정이 유효한지 들어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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