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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를 통일한 통치자이며 역사상 가장 유명한 정복자 중의 한사람인 징기스칸. 그의 제국은 최전성기의 알렉산더 대왕이나 로마 제국보다 더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물론 나폴레옹이 지배했던 영토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지구의 반 이상을 정복했던 징기스칸, 아직도 새로 태어나는 아기들에게 몽고반점을 남기고 있듯이….
그 애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인 예스게이가타타르의 족장 테무진 우게를 사로잡았기에 그 이름을 따 테무진이라 이름 지었다. 몽고민족은 태무진이 태어난 12세기경 100개 이상의 부족으로 갈라져 생활하고 있었다. 이들 부족은 부계의 혈연관계에 따라 몇 개의 집단으로 분류되고 있었는데 세력관계나 환경에 의해 부족 몇몇이 통일되어 정치적 집단이나 부족연합을 형성하여 각기 칸을 추대하고 있었다. 고비 사막의 북변을 따라 타타르족, 케레이트족, 나이만 족의 3대 부족은 당시 몽고 부족들 중 가장 큰 세력들로 살기 좋은 초원을 찾아 땅따먹기 하듯 세력다툼을 일삼고 있었다. 특히 오논강과 캐룰렌강을 따라 유목을 업으로 삼고 있는 '초원민'과 수렵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삼림인'의 소북족이 살며 서로 항쟁을 되풀이 하고 있었다. 테무진 일가는 이 오논강과 케룰렌강 사이에 낀 땅에서 유목을 하는 몽고족의 한 부족으로작은 부족이나마 명문 귀족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테무진의 아름다운 어머니 호에룬은 그의 아버지 예스게이가 다른 부족 사내의 약혼녀인 그녀를 약탈해와 그 당시로선 비일비재한 결혼풍토로 만나 살고 있었다. 몽고의 비사(징기스칸부터 그의 손자 오고타이 칸까지의 역사를 기록한 책)에 따르면 호에룬이 테무진을 낳았을 때 오른손에 핏덩이를 움켜쥐고 태어났다고 한다. 이것을 그의 어머니는 전쟁을 많이 수행할 비범한 삶의 정표로 보았다. 아버지 예스게이는 아들의 신부감을 정하고 오던 길에 타타르족에 의해 독살을 당하고 만 것이다. 아버지 예스게이가 죽자 동족인 타이치우트 족은 무력해진 테무진 일가를 아랑곳하지 않게 되었을 뿐 아니라 예스게이 밑에서 일하던 사람들까지 빼앗아 갔다. 유목에 종사할 사람을 잃은 테무진 일가는 급속하게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17살이 되던해 약혼녀 보루테와 결혼한 테무진은 흩어진 부족들을 끌어 모으고 병력을 길러 자신의 세력을 넓혀 나갔다. 테무진은 자신과 동맹을 맺지 않거나 반역할 기미가 보이는 부족은 초토화 시켜 세력을 남겨두지 않았다. 그는 공격하여 무찌른 부족의 귀족들을 처형하고 평민들과 병사들은 노예로 삼았으며 결국 자신의 원수인 아버지 독살범 타타르족을 전멸시켰다. 위험한 인물들을 차례로 제거하고 모든 부족을 통일시켜 자신에게만 충성을 바치도록한테무진을 각 지역의 부족장들이 왕으로 추대하자는데 의견을 같이 하게 된다. 그러나 테무진이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고는 있었지만 당시 중국 북부를 통치하고 있던 금나라에 상대가 안되었다. 금나라 또한 테무진이 몽고지역에서 세력을 키우는 데만 몰두할 뿐 별로 위협적인 존재로 여기지 않아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테무진은 연합 세력들을 차례로 쓰러뜨리고 몽고 고원을 통일하여 승자가 된다. 테무진 아래에 모인 부족의 장은 그를 칸으로 추대하고 징기스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그의 나이 27살때의 일이다. 징기스칸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비롯된다. 칸이란 군주라는 뜻이다. 또 징기스란 몽고어의 '강대한'이라는 뜻을, 터어키어로는 탱기스가 와전된 '바다'를 의미한다. 하지만 1206년 그를 칸으로 추대할 때 오색의 서조(瑞鳥)들이 날아와 '징기스 징기스'라고 울었기에 징기스라는 칭호를 받쳤다는 설이 몽고인들에겐 더욱 지배적인 정설로 남아있다. 그리고 샤며니즘으로 해석하는 유럽의 석학들은 하늘의 아들, 즉 신성한 영체의 이름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그의 지위에 종교적인 권위가 직, 간접으로 밀착되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몽고 초원을 통일한 징기스칸의 부대는 몽골 유목군단의 최정예 부대로 만들어져 있었다. 부족장이나 그에 해당하는 권력을 가진자들의 자제나 평민 중에서 재능이 뛰어나고 체격이 좋은 남자로 장병을 뽑아 1만명의 근위군을 창설하였다. 몽골 역사상 그 당시 1만여명이 군대로 모여들기란 힘들었다. 아쉬운것은 당시 고려는 10만의 병력과 2만의 정예군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역사를 단순 비교할수없지만 이민족에게 큰 운세를 놓친듯하여 안타까운 심정일뿐이다
대부분 부족들과 씨족들의 유목민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듬해부터 서하를 침공하고 강대국이며 몽골적의 원수인 금나라를 토벌, 그 수도인 중도(지금의 북경)에 입성하였다. 이후에는 이슬람세계의 패자 호라즘국에 파견한 사절이 살해되자 서정에 올랐다. 자신은 오트랄, 부하라등의 도시를 공략하였고, 제베와 수부타이가 인솔한 별군은 호라즘 국의 왕 무하마드를 카스피해상의 섬으로 내몰아 굶어죽게 하였다. 또 카프카스 산맥을 넘어 남러시아로 출동, 러시아 각지의 연합군을 하르하 강변에서 무찌르고, 크림을 정복한 뒤 본군에 합류하였다. 본군은 앞서 발흐를 점령하고 무하마드의 아들 잘랄웃딘과 인더스 강변에서 싸워 격파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제국 영토는 급격히 확대되어 갔다. 그러나 혹서를 이기지 못해 철군을 결정, 차가타이. 오고타이군과 합류하여 귀국하였다. 이때 이슬람교도의 공예가등 장인기술을 높이 평가한 징기스칸은 그들을 포로로 데리고 와 몽고의 문화를 발전시키는데 이용했다. 그는 정복한 땅들을 아들들에게 나누어주어 4한국의 기초가 되게 하였고 몽골 본토는 막내 툴루이에게 주었다. 그러나 20여년에 걸친 몽골군의 살상과 약탈은 유럽, 아시아 각지를 공포에 몰아넣었다. 공포에 떨수밖에 없는 원인은 몽골인들이 수렵과 전쟁을 동일시 하여 전쟁을 축하의식정도로 생각한다는 데 있었다. 이때 죽은 사람들의 수는 헤아릴 수가 없다. 지구 역사상 전무후무한 살인적 만행을 저지르고 다녔다. 여기에 비한다면 히틀러는 애교였다고나 할까. 일본인들이 잔인하다고 하지만 몽고인들에 비하면 그나마 양반축에 든다. 어느 나라 사람이건 자민족을 살해할 때는 심각한 얼굴을 하게 되는데 몽고인들은 가축을 도축하듯이 재미있다는 듯한 얼굴로 살인을 해나갔다. 이렇듯 수렵과 전쟁을 동일시하는풍토속에 인간사냥 살상을 짐승 사냥하듯이 가볍게 생각한 것이다. 끔찍한 이야기지만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는 고통은 상상만으로도 까무러칠 일이지만 몽고인들에겐 원시시대 구닥다리 체벌에 불과했다. 이들은 온몸을 박아버리든가 해부해버리던가 갈기 갈기 찢어버리기 일쑤였다. 물고문 정도로 살상하는 우리 민족이 보기엔 정말 끔찍한 일이 아닐수 없다. 징기스칸은 상기와 같이 위험천만한 살상으로 가득채워져 있는 부족들 속에서 용케도 살아남아 전설적인 업을 갖게 된다. 그래서 테무진을 평가할 때 영성체로서의 힘이 있었다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당시 전유럽에서는 그를 그렇게 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몇나라가 공동으로 그를 죽이려 음모를 꾸며도 그는 불사조처럼 다른 나라들을 함락시켜갔으니 악마의 대왕이며 공포의 대상이었으리라. 당시 몽고인들에게는 '태양의 아들'이며 '신의 아들'이며 몽고인들의 '영원한 황제'로 칭해졌다. 다시 끔찍한 일화 한가지를 덧붙힌다면 징기스칸은 어려운 고통에 빠지때마다 자신의 몸을 찢어서 피를 빨아마심으로 하여 죽음의 늪에서 빠져 나오곤 했다. 그의 이름(테무진) 글자의 뜻을 다시 풀자면 '길(吉)한 것에서(길한것으로)이루어진다'는 의미이며 곧 그의 사상이기도 했다. 테무진의 생각 자체가 길(吉)하다는 것이다. 적 그리스도로 보는 사람들은 악마로밖에 간주할 수없었던 인물이다. 가축의 도살처럼 살점과 뼈와 대지를 진동하는 피비린내는 징기스칸이 가는 곳엔 언제나 널부러지는 상황이었다. 그의 죽음도 그의 비운의 일생만큼이나 화려하다고 해야 하는 것일까. 현재 전해지는 사인은 서하를 응징하려다 낙마로 부상하여 서늘한 산간에서 병세의 악화에 시달리다가 생애를 마쳤다는 설, 서하에서 병사하였다는 설, 내몽고지방의 푸른 초원이 되었다는 신격화된 설도 전해지고 있다. 몽고인 족장들에 의하면 아들들에게 나라를 물려준 후 실크로드를 다니며 말년을 다복하게 보냈다는 설도 전해지고 있다. 어쨋든 징기스칸의 업적은 그의 타고난 전쟁 행각만큼이나 기억될 만한 것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