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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첫사랑이란 무엇일까? 봄 언덕 한줄기 훈풍이었을까? 가을 강 한가닥 달빛이었을까? 사람들은 흔히 진주(晉州)를 아름다운 곳이라고 말한다. 남강이 아름답고 촉석루가 아름답다고 한다. 그 아름다운 곳에서 나서 자란 한 소년의 첫사랑을 여기 소개한다.
소녀 이름은 김혜정이다. 소년은 어느날 천전초등학교 동창회에서 그를 만났다.
모처럼 나온 여학생들은 전부 꽃다운 열일곱, 사춘기였다. 가슴에 풋복숭같은 것이 불룩해지는 참이었고, 여성 특유의 꽃봉오리 같은 태가 나타나던 때다. 이성에 대한 미묘한 느낌 때문이었을 것이다. 남학생을 곁눈질하며 공연히 얼굴 붉히고, 저희들끼리 깔깔대며 웃곤 했다.
남학생은 어른스럽게 보일려고 담배를 입에 물고 있었다. 코밑수염이 막 나던 때다. 교복 어깨엔 심을 넣었고, 모자챙은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했다. 번데기가 나비로 우화하는 그런 시기였다. 이제 막 어른티가 박히기 시작하고 있었다.
여학생은 정란이, 전자, 인순이, 영자가 주역이었고, 혜정이는 그 한쪽에 얌전히 앉아있었다.
그때는 위즈위스나 헬만헷세, 그리고 사머셋모음같은 작가를 좋아하던 때다. 그는 도브의 샘가 한송이 수선화 같았다. 곁의 소녀와 전혀 다른 기품이 있는 명작 속 소녀 같았다.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된다.
내가 혜정이 신비한 눈을 처음 본 그 순간이, 아마 큐피트의 화살이 내 가슴을 명중시킨 바로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찰라가 바로 내 운명 갈림길이었다. 나는 불시에 화살 맞은 표범이 되었다. 갑자기 수십만 볼트의 전류가 내 전신을 짜릿짜릿 흩고지나갔다. 생전 처음 경험한 감미롭고 설레는 전율이었다.
첫사랑의 감정이 번개처럼 나를 후려친 그 이후 일은, 나는 아무 것도 기억 못한다. 누가 노래를 불렀고, 어떤 대화가 오가다가 동창회가 끝났는지 모른다.
기억나는 것은, 오직 내 신경이란 신경은 모두 혜정이에게만 집중되었던 일, 아무리 사소한 움직임 하나라도, 혜정이의 움직임 하나하나는, 내마음을 민감한 악기의 현인양 바르르 바르르 떨리게 하였던 일이다.
나는 흥분에 못이겨, 교실 밖에 나가서 감나무에 등을 기대고 서있었다. 쿵쾅거리는 심장의 고동을 듣다가, 이윽고 동창회가 끝나, 혜정이가 떠나는 모습을, 먼 발치에서 꿈결처럼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날 밤부터 나는 혜정이네 집 근처에 날라간 한마리 나이팅게일 새였다. 나는 탱자나무 울로 둘러쌓인 넓직한 진주농대 학장 관사를 향해 나이팅겔 새보다 더 슬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내가 혜정이에게 바친 첫 세레나데는, '불 밝던 창'이라는 곳이다. 도입부가 바리톤 저음으로 시작되는 그 노래 가사는 이렇다. '불 밝던 창에 어둠 가득 찼네. 내 사랑 넨나 병든 그때부터. 그의 언니 울며 내게 전한 말은, 내 넨나 죽어 땅에 묻힌 것을...'.
혜정이가 보일듯 말듯 약간 다리를 저는듯 했다. 그래 땅에 묻힌 넨나로 부른 것이다.
두번째 노래는 엘비스프레슬리의 'Love me tender'다. '나를 부드럽게 달콤하게 사랑해주고, 결코 떠나게 하지말아달라.' 는 노래 가사 자체는 바로 내마음 그 자체였다.
사랑의 신비한 힘에 이끌린 나는 밤마다 혜정이네 집 근처에서 노래를 불렀다. 아마 진주에서 자란 그 어느 소녀도 그렇게 혜정이처럼 밤마다 세레나데를 듣고 자란 소녀는 없을 것이다.
그 집은 봄이면 울타리에 하얀 탱자꽃이 피고, 가을이면 울에 탱자가 노랗게 매달렸다. 그 안에 우물이 있었다. 달 밝은 밤, 우물가 소녀는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망경산 정상에 큰 바위가 있다. 가끔 찔레꽃 향기가 풍겨오고, 주약동 보리밭에서 뻐꾸기 울음소리 들리던 바위다. 바위에 소년이 새긴 '크리스티나로젯티'의 시는 얼마나 애절했던가.
'When I'm dead my Dearest, sing no sad song for me. Plant no roses at my head, nor shaddy Cypress tree.( 내 죽거던 임이여 술픈 노래는 부르지 마오. 장미도 심지말고, 그늘 드리우는 사이프러스나무도 심지마오.)'
혜정이는 로젯티 였다. 영문으로 새긴 그 애절한 시는 내가 혜정이한테 바친 마음이었다.
그러나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내가 손에 피멍이 들면서, 못과 망치로 바위에 새긴 그 시는, 훗날 사라져 버렸다. 망경산에 방송탑을 세우면서, 무정한 사람들이 바위를 발파하여 없애버린 것이다.
사랑의 감정이 싹틀 때 진주는 못견디게 아름다운 도시다. 봄철 신안동 들판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면, '너우니' 버들숲에 은어가 꼬리치며 올라오는 것을 보면, 남풍이 '당미' 언덕의 벚꽃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가는 것을 보면, 진주 소년은 시인이 된다.
촉석공원 벤치에 노란 낙엽이 날라가는 것을 보면서, 의암에 황혼이 내리는 것을 보면서, 지드의 '좁은 문'을 읽고 산책 나가서, 아무도 없는 파란 페인트 칠한 과수원집 대문에 나리꽃 만발한 것을 보면서, 진주 소년은 다정한 청년으로 변한다. 새벽 안개 덮힌 서장대에서 남인수 고음 흉내 내고, 달밤에 이봉조처럼 쎅스폰 불면서, 진주 소년은 자란다. 그래서 진주 사람은, 거짓말을 업으로 삼는 국회의원조차, 감성적이다.
당시 혜정이는 어떤 편이냐 하면, 내가 밤마다 집 앞에 와서 세레나데를 부른 남학생인건 아는 눈치였다. 그를 찬미하는 남학생이 있다는 것은 소녀로선 우쭐한 일이고, 세상 무엇보다 달콤한 비밀이었을 것이다. 한번 그 얼굴을 보고싶은 유혹도 있었을 것이다.
등교시에 다리 위에서, 수줍어하면서 살짝 돌아보곤 했다. 아! 그러면 혜정이가 돌아본 그 일 때문에 나는 얼마나 용기를 얻고, 고무되고 흥분되었던가.
나는 혜정이의 친구 영자가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그가 혜정이와 이야기를 하면서 나란히 걸어갈 수 있었던 그 이유 때문이다.
나는 개천예술제가 열리던 밤, 남강에 유등(流燈) 띄우는 그 수많은 남녀 학생 속에서, 혜정이를 만날려고 얼마나 한없이 쏘다녀 다녔던가. 그러나 한번도 혜정이 얼굴을 본 적 없다.
그때 내 모습은 어떤 편이냐 하면, 가슴이 떡 벌어진 소년 장사였다. 초등학교 때는 백미터 학교 대표고, 고등학교 때는 축구, 농구, 평행봉, 달리기 선수 였다.
공부도 그런대로 잘 했고, 숫끼가 있었다. 쉬는 시간에 교단에 올라가 미치밀러 합창단의 부드러운 목소리 흉내내어, 'The sun shines bright in the old Kentucky home'로 시작되는 '켄터키 옛집'을 멋지게 원어로 부른 사람은, 나중에 뉴욕에서 의사 생활을 한 우영이와 나 밖에 없다.
이렇게 운동이라면 운동, 공부라면 공부, 다 잘하던 내가 혜정이 앞에만 가면 마치 노틀담의 곱추 '콰지모도' 같았다. 혜정이는 짚씨 여인 '에스메랄다' 같았다. 나는 술처럼 부글부글 가슴 속 끌어오르는 감정을 주체못해서 얼굴만 붉힌 말더듬이 추남이고, 컨트럴 불가능한 고압전류에 감전된 중환자 였다. 두방망이 치는 가슴 안고 괴로워한, 젊은 베르테르였고, 가면무도회에서 처음 줄리엩을 만난 몬테규가의 로미오였다.
그런 속에 혜정이에게 보낼 편지 인용구를 찾기 위해 나는 얼마나 많은 책을 읽었던가. 소년에서 청년으로 넘어간 그 격정의 기간에 읽은 책은 아마 백 권도 넘을 것이다.
투르게네프의 '첫사랑' '짝사랑', 헬만헷세의 '페터카멘친트' '데미안' '싣달타', 사머셑모음의 '면도날' '인간의 굴레' '달과 6펜스', 토마스하디의 '테스', 에밀리부론테의 '폭풍의 언덕', 앙드레지드의 '좁은 문' '전원교향악',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 듀마휴이스의 '춘희', 섹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엩' '햄릿', 밀턴의 '실낙원', 나타니엘호손의 '주홍글씨', 릴케의 '말테의 수기' 등이다.
얼마나 많은 책 속의 여인이 혜정이었던가. 혜정이는 매번 '아쌰' '잔느' '줄리엩' '테스' '넨나'로 변해갔다. 그 상대방은 매번 나였다. 나는 점점 사랑의 몸살을 앓는 몽상가로 변해갔다.
수많은 편지는 만들어졌고, 편지는 밤마다 혜정이네 대문 앞에 던져졌다. 달을 보고, 구름을 보고, 낙엽을 보고, 강을 보고, 산을 보고, 꽃을 보고,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들은, 그 모든 감정이 편지에 담겨졌다.
편지 옆에 간혹 꽃다발이 놓인 적도 있다. 그 꽃은, 운동을 잘하던 나같은 소년이 아니면 도저히 닿을 수 없는, 아득한 망경산 절벽에서 목슴을 걸고 꺽어온 꽃이다. 아마 진주에서 자란 그 어느 소녀도, 혜정이처럼 그런 아름다운 원추리, 참나리, 들국화를 선물 받은 적이 없을 것이다.
지금도 내 서재에 그 당시 일기장이 소중히 보관되어 있다. 거기 꽃을 꺽으러 위험한 절벽을 오르내린 소년의 마음과, 절벽 중간에 굴을 파놓고, 혜정이와 둘이 살고싶던 한 소년의 꿈이 적혀있다. 성장하면서 글씨체가 몇번 바뀌고, 영어를 자주 인용한 유치한 내 소년기 그 일기장은, 아직도 60년 전 시간을 가르키는 시계처럼 딱 멈춘채, 내 서재 한구석에 있다. 하지만 한가지 안타까운 것은, 한 소년의 성장과정이 담긴 그 수백통의 편지를, 혜정이가 한 편이라도 간직하고 있어서, 한 편이라도 돌려준다는 가설이 불가능한 점이다.
첫사랑은 한 소년을 일기 쓰는 소년으로 만들고, 철학을 동경하는 청년으로 만들었다. 만일 혜정이가 없었다면, 나는 아마 사대 체육과에 갔을 것이다. 체육선생이 되었지, 결코 철학과를 나와, 신문기자가 되는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한 소녀가 한 소년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바꿔놓은 것이다.
그러나 모든 턴넬은 끝이 있는 법. 혜정이에 대한 짝사랑도 끝이 있었다.
그것은 마치 키엘케골의 자전소설 <유혹자의 일기> 같았다. 키엘케골의 처녀작 <이것이냐 저것이냐>에 실린 그 일기는, 사랑을 관념에서 시작해서 관념으로 끝낸 이야기가 적혀있다. 말한마듸 건네지 못한채, 손 한번 잡아보지 못한, 그점에선 나는 키엘케골과 같다.
<유혹자의 일기>가 짝사랑에서 시작하여 짝사랑으로 끝나듯, 내 프라토닉 사랑도 끝이 있었다.
그때 혜정이는 초등학교 교사였고, 나는 군인이었다.
나는 대학 입학한 그 해에 자원입대했다. 가장 친하던 친구 하나가 재수생으로 진주에 남아있다가, 주약동 굴 속에서 기차에 투신자살한 이유의 대부분이 내게 있었던 때문이다.
철학과에 입학하자, 나는 염세철학 흉내를 내었다. 사흘이 멀다하고 왕래한 편지에, 나는 걸핏하면 허무니 절망이니 실존이니 하는 용어만 썼다. 문학을 동경하는 젊은이가 흔히 그러듯, 허무와 절망을 무슨 값어치 있는 훈장인양 겉에 내비치고 다닌 것이다. 그러다가 친구 하나를 잃은 것이다.
입대하자, 나는 까뮈의 소설 <이방인>의 주인공 '뭐르소'처럼 행동했다. 운전병으로 자원했고, 외출 나가면 서면 하이에리아 부대 근처 사창가를 찾아가 술을 마시고 다녔다. 아무 이유없이 횡으로 빨간 줄 쳐진 헌병완장과 하이바와 장갑을 빼앗아 휴가병 돈을 갈취하고다니다가, 제부지역 전 15P 헌병대에 비상이 걸리게 한 적도 있다.
그러다가 어느날 혜정이 혼처가 정해졌다는 말을 듣고, 나는 부랴부랴 임시휴가를 얻어, 그가 근무한 문산초등학교로 찾아간 것이다.
그 때 내 모습은 이랬다. 군복 상하의는 빳빳이 풀먹여 다려입었다. 모자의 병장 계급장을 광약으로 빤짝빤작 딱고, 파리가 낙상할 정도 군화도 매끄럽게 칠했다. 수송병 빨간 마후라 목에 걸쳤고, 어깨는 떡 벌어졌고, 허리는 잘룩했고, 걷어올린 팔뚝은 구리빛 근육에 덮혀 있었다. 내 일생 그렇게 외모에 신경 쓴 일 두번 다시 없다.
빨간 고추잠자리 날아다니던 문산초등학교 운동장 푸라타나스 나무가 지금도 뚜렷히 내 기억속에 남아있다. 나는 그 큰 느티나무 아래서, 하루종일 화랑담배를 피우며 혜정이를 기다렸다. 그리고 딸랑딸랑 하학 종이 울리고, 재잘거리며 집으로 돌아가는 초등학생들 뒤에 혜정이 모습이 나타나자, 코스모스 하늘거리던 신작로를 따라가서, 칙칙폭폭 석탄연기 품으며 들어온 기차에 몸을 실었다.
'오징어 땅콩이요!' '석간신문이요!' 당시 기차 안은 이런 소리로 요란했다. 이 속에서 통학생들은 여학생에게 닥아가 쉽게 말을 건네곤 했다. 그러나 나는 거기서 그럴 수 없었다. 나는 말을 건넬까 말까를 한없이 망서리는 또다른 햄릿이었다.
기차가 컴컴한 터널 속에 들어갔을 때 말하리라 생각을 해보긴 했다. 그러나 무정한 기차는 주약동 터널을 지나가버렸고, 어느새 속도를 늦추며 진주역에 진입해버렸다.
그때부터 나는 후회하기 시작했다.
진주역은 마중나온 사람들과 택시, 여인숙 호객꾼들로 혼잡했다. 거기가 바로 내가 혜정이에게 말을 건넬 마지막 장소였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도 그러지 못했다. '잠간 좀 봅시다.' 그 센텐스 한구절은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쉬운 문장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도 후회만 반복했다. 도대채 말을 건넬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 오히려 혜정이가 나에게 기회를 주었다. 그는 수업 중에 하루 종일 교정에서 얼쩡거리고, 기차에 올라와서 안절부절 하던 그 군인이 누군지 낌새를 알았을 것이다. 그가 밤마다 집 밖에 와서 <불 밝던 창>과 <러브미텐더>를 초지일관 부른 그 사람인 것을, 초등학교 동창이고, 서울 모 대학에 진학한 동기인 걸 알았을 것이다.
혜정이가 개찰구 방향 아닌 다른 곳으로 나간 것이다. 그곳은 사람이 없고, 노란 벼이삭 사이에서 메뚜기만 툭툭 튀는 망진산 쪽 들길 이었다. 대지엔 감미로운 바람이 불고, 산 허리는 황혼이 덮혀 있었다. 산 속의 외딴 집에서 저녂밥 짓는 연기가 고요히 하늘로 오르던 모습이 지금도 내 눈에 또렷히 보인다.
혜정이는 그 길을 얼마 쯤 걸어가다가, 이윽고 어느 한 지점에서 고개를 숙인채 조용히 그 자리에 멈춰주었다. 그러나 다음이 문제였다.
그 순간 내 가슴 고동은 왜 그렇게 쿵당쿵당 뛰기 시작 했던지. 입술은 왜 그렇게 바짝 마르고, 다리는 마치 허공을 밟듯 휘청거리기만 했던지. 닥아와서 뭔가 말을 해보라는 눈치는 분명한데, 나는 닥아갈 수 없었다. 억지로 한발짝이라도 떼어보려하자, 이번엔 하반신 전체가 마비된듯 움직일 수 없었다. 말이라도 건네보려해도,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턱은 덜덜 떨리고, 이유없이 가슴 속에 숨만 찼다. 나는 그냥 바들바들 떠는 한그루 사시나무였을 뿐이다. 쿵쾅거리는 심장의 고동을 혜정이가 들을까, 오히려 그것만 걱정하고 있었다.
참으로 알 수 일이었다. 나는 자살한다고 차에 칼빈 실탄을 숨기고 다니고, 외출 나가 헌병을 구타한, 남자사회에서 맹견 같던 청년이다. 전혀 겁이 없던 군인이다. 그러나 혜정이 앞에서는 이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마 그 당시 나에게 수소폭탄같은 큰 충격을 가할 수 있는 어떤 힘이 있었다면, 그건 어떤 외부의 강력한 물리적 힘이 아니라, 오직 혜정이의 그 가슴 철렁하게 만들던 시선, 그 신비한 미소였을 것이다. 내 심장에 폭발을 일으킬 유일한 뇌관이 있었다면, 그건 오직 혜정이 뿐이었다. 신(神)이 내 몸 어딘가에 그렇게만 반응할 회로를 심어놓은 것이 분명하였다.
모든 것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나는 혜정이를 만나기 전에 미리 할 말을 준비해 두었었다. 젊은 베르테르가 샬롯테에게 한 말, 라트라비아타에서 알프레드가 비올레타에게 한 말, 로미오가 줄리엩에게 한 말을 미리 읽어두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소용 없었다.
나는 다만 혜정이를 위해 목슴을 바칠 각오를 한 중세의 기사였을 뿐이다. 충실한 종을 자처했을 뿐이다. 그 나에게 혜정이를 사랑한다는 말은 일종의 불경이었다. 지극했기에 말 못한, 그것이 나의 비극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 그 가을 내가 혜정이와 그 들판에 나란히 서있었던 시간이, 몇 분인지 몇 초인지 지금도 나는 알 수 없다. 다만 그 황금처럼 황홀한 일 분 일 초가 내 생애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주변에 점점 어둠이 내려앉고, 먼 동네 등불 별처럼 깜박이기 시작하자, 혜정이가 어느 순간 천천히 발걸음을 떼더니, 내게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마냥 밤새도록 그러고 있을 수 만은 없었을 것이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어가더니, 어느 순간 먼 동네 불빛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 모습을 나는 어둠 속 돌장승처럼 한없이 오래 지켜보고만 있었다.
첫사랑은 이렇게 끝났고,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
혜정이는 어느 먼 유성에서 날라온 요정이었을까. 한 여름밤의 꿈이었을까.
그러나 손자까지 둔 이 나이에도, 아직도 내 가슴 속에, 황혼의 안개 낀 들판과, 어둠 속에서 별처럼 깜빡이던 마을 등불과, 고개 숙이고 서있던 한 소녀 모습이, 천 권의 서사시보다 황홀하게 새겨져 있다.
1944년 생
진주고. 고려대 철학과 졸업
<문학시대> 수필로 등단
청다문학회 회장
남강문학회 부회장
불교신문. 내외경제 기자
아남그룹 회장실 비서실장. 아남프라자백화점(속초)대표이사
동우대학교 겸임교수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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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선배님의 첫사랑이 진주농대 2대 학장하신 김재유 선생 따님이셨군요
수소문하면 지금도 만날 수 있을 텐데요
수소문 좀 해주소
첫사랑에
이토록 매달리는
거사님의 순정소설에
크게 박수 보냅니다
아련한 그리움속에서
늘 행복하소서
안병남
실명까지 거론한 것을 보아 실지 있었던 실화의 내용으로 보았습니다. 그 우람하고 당차신 거사님께서 첫사랑에 대하여 그토록 큰 열병을 앓으면서 수줍은 모습을 보이셨다니 상상이 잘 가지않기도 합니다. 그런 수줍움은 진실한 사랑에서 빚어진 platonic love 였군요. 그 가슴앓이가 오늘날 거사님 생활사의 바탕이 되었을 것이란 생각입니다. 아름다운 추억입니다.
낙양성 십리허에 높고 낮은 저 무덤은 .......
인생칠십고래희가 되어 저승 갈 날이 이제 다 된 판이라, 젊은 시절 실제 상황 그대로, 남강문학에 남겨두고 싶었습니다.
논픽션 소설이군요.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께서도 오래된 첫사랑을 잊지 못하고 계시네요.
누구나 가슴에 남아 있는 사랑이지만 그 절절함은 본인 밖엔 느끼지 못할 겁니다.
건강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