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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내경(黃帝內經) 「황제내경」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의학 저작으로서 줄여서 「내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2천여 년의 한의학 발전 과정에서 중요한 작용을 하였으며 그 지도적 이론은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그래서 수많은 주석서들이 지금도 간행되고 있으며, 한의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필독서라고 할 수 있다. 만들어진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들이 있으나, 전국시대라는 의견이 가장 우세하다. 「내경」은 어느 한 시대 한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게 아니라 수많은 연대에 걸쳐 수많은 의가(醫家)들이 경험하고 깨닫고 이론화한 것들을 개괄·종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소문」과 「영추」의 양대 부분으로 이루어졌는데, 각각 의학 논술성의 문장 81편씩을 싣고 있다. |
[황제내경] |
내용은 인체의 생리·병리·해부·진단·치료 원칙·질병 예방 사상·음양오행 학설 등으로 되어 있다. 「소문」에서는 인체의 생리·병리학과 약물 치료학의 기본 이론에 편중하고 있으며, 「영추」에서는 침구 이론과 경락 학설과 인체 해부를 논술하고 있다. 「황제내경」의 성과를 살펴보면, 첫째, 음양 오행학설을 의학에 끌어들여 정체관념(整體觀念)을 형성하였다. 둘째, 해부와 혈액순환 개념을 성립하였다. 셋째, 다양한 의료 기술을 소개하였다. 넷째, 조기 치료를 강조하는 예방 사상이 발달되었다. 다섯째, 무(巫)와의 결별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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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한잡병론(傷寒雜病論)
중국의 의성(醫聖)으로 일컬어지는 장기(張機)의 저작이다. 장기는 그의 호인 중경(仲景)으로 더 잘 알려져 있으며 2세기 중엽에서 3세기에 걸쳐 활동한 대의학자이자 임상실천가이다. <상한잡병론·서>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역병(돌림병)의 유행으로 말미암아 중경의 일가족이 원래 200여 명이던 것이 A.D.196년 이래 10년도 안되는 기간에 2/3나 죽었는데, 그중 70%가 상한 때문이었다고 한다. 상한(傷寒)은 여러 가지 외감열병(外感熱病)을 통칭하는데 요즘으로 치면 급성 전염병을 포괄하는 의미로 쓰였다. 상한은 옛날에 한 차례씩 크게 유행할 때마다 사람들에게 엄청난 위해를 입혀왔다. 이에 맞서 당대 의사들이 목숨을 걸고 치료에 뛰어들어 경험했던 풍부한 내용들을 널리 수집하고 중경 자신이 개인적으로 임상에서 터득하게 된 내용들을 결합한 다음 그것들을 일정한 이론수준으로 끌어올려 저술한 것이 이 책이다. <상한잡병론>은 원래 16권이었는데 전란중에 산실되었다가 후대에 이르러 왕숙화, 임억 등의 노력에 의해 수집, 교정되어 <상한론>과 <금궤요략>이라는 두 책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상한론>은 상한병을 전문적으로 논술한 책이고, <금궤요략>은 잡병(雜病)을 전문적으로 논술한 책이라고 보면 된다. <상한론>에서는 비교적 정확하게 급성 전염병의 발전규율을 반영하고 있으며, 한대(漢代) 이전에 나온 급성 전염병의 진단, 치료에 관한 풍부한 경험들을 계통적이고도 전면적으로 총괄하고 있다. 중경은 인체의 생리와 병리, 그에 따른 치료법, 이어서 처방과 투약의 결합을 중시하였으며 그가 골라서 기록한 방제(方劑)들도 대부분 실용성 있고 유효하였다. 특히 그가 이용한 육경변증(六經辨證)의 진단, 치료개념은 임상에서 매우 높은 가치를 갖고 있고 심대한 영향을 미쳐서 오늘날에도 한의사들이 임상을 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되고 있다. |
[상한론] |
<금궤요략>은 내과, 외과, 부인과의 잡병을 논술하고 있으며 내과잡병이 주를 이룬다. 중경은 복잡한 병인(病因)을 크게 세 가지로 개괄하였으며 이들 병인과 잡병 발생의 관계를 밝혀놓기도 했다. 이는 한의학사상 최초로 나타난 병인학설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상공치미병(上工治未病)의 원칙을 강조하면서 질병의 예방사상과 조기치료사상을 부르짖고 있다.
이 두 책은 진단학과 방제학 방면에서도 크나큰 공헌을 하였다. 이를테면 두 책에는 20여 종의 맥상(脈象)이 나와있어서 오늘날 사용되고 있는 것과 별 차이가 없으며, 269가지의 방제(처방)와 214종의 약물이 엄선되어 수록되어 있다. 요컨대 <상한잡병론>은 <황제내경>의 기초 위에서 기본이론을 더욱 발휘하고 실제임상을 긴밀하게 결합시킴으로써 한의학의 발전을 위한 크고 넓은 도로를 개설하였다고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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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향약집성방」은 1431년(세종 13년) 가을에 유효통, 노중례, 박윤덕 등이 세종의 영을 받아 제생원에서 이미 간행한 「향약제생방」 30권(태조 7년)에다 민간에서의 질병 예방과 치료 과정을 종합 분류 첨가하여 완성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의학서로 꼽히며, 간행된 뒤에 의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훈육서와 시험 교재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1488년(성종 19년)에는 한글로 풀어서 서민들도 활용하도록 하였다. 이처럼 세종대에서 성종대까지 우리 의서로 중용되었으나, 중종 이후에는 명나라 의학에 의존하여 우리 의학은 점차 소외된 채 백여 년이 흘렀다. 그러나 왜란과 호란으로 대륙의 약재 공급이 두절되자 향약의 사용이 중요시되어, 1633년(인조 11년)에 중간했다. 현존 책들은 대개 이것의 중간본(重刊本)이다. 본서의 편찬 의도는 우리 백성의 질병에 구하기 어려운 중국 약재보다도 우리 풍토에서 생산되는 약재를 사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생각과 세종대왕의 의약제민(醫藥濟民)하려는 큰 뜻이 있으며, 우리 의학의 독립이라는 의미에서 볼 때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될 귀중한 자산이라 하겠다. 본서 편찬에 인용한 책은 중국에서 수집해 온 한대부터 명대까지의 책으로 「태평성혜방」 등 무려 160여 종이고, 우리나라 책으로는 「향약구급방」, 「삼화자향약방」, 「본조경험방」, 「향약간이방」, 「어의촬요방」, 「동인경험방」, 「제중입효방」, 「향약제생집성방」, 「향약혜민경험방」 등이다. 그러나 이 중에서 「향약구급방」 만이 현존하고 나머지는 모두 소실되었다. |
[향약집성방] |
「향약집성방」은 제 1권에서 제 75권까지는 모든 병증(病證)을 57강문(綱門)으로 대별하고 그 아래에 959종의 병증(病症)을 소항목으로 분류했으며, 인용 출전을 명시하고, 병론 및 방약과 침구법을 논하였다. 제 76권에서 제 85권까지는 향약 본초를 개론과 각론으로 나누었는데, 송대의 책을 참고하여 우리나라의 동·식·광물의 약재 630여 종을 편성, 배열하고, 향약명과 출전, 성, 미, 효능, 채취, 포제법을 명시하였다. 이 책은 중국의 의서를 안배하여 경(經)으로 하고, 고려 이후의 우리 의서를 모아 위(緯)로 한 것이다. 여기에 침구법도 더하였으니 그 의의가 더욱 크다.
이밖에도 다른 의서와는 달리 우리나라의 풍부한 자연 자원을 약재로 활용하고 질병의 치료는 물론 예방법도 강조하고 있다. 또한 그 동안 소실된 의서의 내용을 일부분일지라도 상고할 수 있는 문헌적 자료이며, 유능한 의사들의 경험방과 민간에서의 묘방, 비방, 속방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으므로 임상 활용에도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귀중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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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초강목(本草綱目)
중국 명나라 가정 연간에 의업을 이어오던 집안에서 태어난 이시진(1518∼1593)은 어려서부터 병약하였는데, 아버지를 돕는 가운데 전통 의약에 강한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그는 관리가 되는 길을 포기하고 가업을 잇게 되었으며, 생애를 통해서 많은 저서를 남기고 있는데 대표작이 「본초강목」이다. |
[본초강목] |
이시진은 환자를 진찰할 때 고대로부터 전해오는 약학서가 수백 년 동안 고증이나 수정도 없이 전해오고 있기 때문에 많은 오류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시진은 이같은 의학서의 오류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을까 생각하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옛 의약서부터 연구하고 하나하나 검토·고증해 나갔으며, 직접 약초를 채집하여 약효를 시험 확인하였다. 그후 황제가 이시진의 소문을 듣고 그를 수도로 불러들여 어의로 임명하였다. 그는 태의원에 재직하면서 황실의 힘을 빌어 천하의 명의들을 한 자리에 모아 이들이 힘을 합쳐 본초의 수정 사업을 할 것을 계획하고 상주하였으나 오히려 견책 처분을 당하자 사임하고 나왔다. 그리고 27년간에 걸쳐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약초를 채집하여 여러 가지를 조사한 끝에 의약서의 오류들을 수정하여 결국 「본초강목」을 완성하게 되었다.
이 책은 50권, 1백 9십여만 자, 1892종의 약물, 1만 1천 91 예의 처방과 동·식물의 삽화 1110개를 소개하고 있다. 약물 분류는 광물, 식물, 동물의 순으로 되어 있으며, 간단한 것으로부터 복잡한 것의 순으로 배열되어 있다. 또 무기물에서 유기물로, 저급에서 고급의 순으로 하여 자연계의 발전 과정이 반영되어 있다. 「본초강목」은 이시진 사후 3년째에 출간되었으며, 그로부터 약 10년 후에 조선과 일본에도 전해졌으며, 라틴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독일어 등 여러 나라 말로 번역 출판되었는데, 영문판만도 10여 종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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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방유취(醫方類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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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방유취] |
본서의 편찬은 세종 때 김예몽과 유성원 등에게 명하여 자료를 수집·편찬케했다. 그리고 뒤에 다시 김문, 신석조와 이예 및 김수온에게 명하여 전순의, 최윤, 김유지 등을 모아 편찬케하고, 안평대군과 김사철 등에게 감수하게하여 3년을 지나 세종 27년에 365권을 편집하게 되었다. 그후 실제로 간행된 것은 266권 264책으로 편집 당시에 비하여 정리 축소되었다. 그후 계속 수정되다가, 성종 8년에 한계희, 임원준 등이 30부를 인출하였다. 이후 재간되지 못하다가 임진왜란 때에 대부분 없어졌는데, 12책이 없는 252책 1질이 적장에게 약탈되어 일본 궁내성 도서관에 유일한 원간본으로 현존한다. 이를 일본 의관 키타무라가 철종 3년(1852)에 에도에서 10여 년의 세월에 걸쳐 목활자로 축판 재간하였다. 고종 13년(1876) 병자수호조약이 성립될 때에 예물의 하나로서 본 인본(印本)이 우리나라에 헌납되었다.
이 책은 한의학적 지식을 집대성한 백과대사전으로, 당시 자주적으로 의학을 발전시킬 목적으로 조선에 전해져온 국내외 150여 종의 관련 서적들을 참고하고 종류에 따라 정리한 것이다. 내용을 보면, 총론에서는 환자를 진찰하는 방법, 처방을 쓰는 방법, 약을 먹이는 방법, 질병을 치료하는 원칙, 의사가 지녀야 할 품성, 약물의 성미와 효능 및 가공 방법 등을 기록하였다. 각론은 91대 강문으로 나누어 각 문에는 먼저 그 문에 해당하는 병론(病論)을 들고, 다음에는 약방들을 그 출전의 연대순으로 나열하였다. 병문(病門)이 「향약집성방」보다 세분되어 내과, 외과, 급성 전염병, 안과, 이비인후과, 구강과, 피부과, 부인과, 소아과 질병 등과 같은 근대 임상 의학의 각 분과들이 거의 포괄되어 있다. 각각의 병증에서는 먼저 병증의 원인, 증상, 치료 원칙 등의 의학 이론을 서술한 다음 치료 방법에 맞는 처방과 단방 약물, 침과 뜸 치료법, 식사 요법, 안마, 도인, 음식의 금기, 신체 단련법 등을 기록하였다.
본서는 한의학을 우리 의학으로 동화시키고 독자적 의학으로 발전시키는 데 많은 공적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이미 없어진 중국의 고전 의학책들을 고증하는 데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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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보감(東醫寶鑑)
임진왜란이 끝난 후 허준이 선조의 명을 받아 정작, 양예수, 김응탁, 이명원, 정예남과 함께 편찬을 시작하였다가 정유재란에 의해 편찬이 중단되자 허준 단독으로 편찬을 하였으며, 마침내 광해군 2년(1610)에 모두 25권 25책을 완성하게 되었다. 「동의보감」 이전에 있었던 의서 중에 「향약집성방」과 「의방유취」는 내용이 거창하여 활용하기가 어려웠고, 「의림촬요」는 너무 간단하여 미흡하였는데, 이들의 단점과 미비함을 보완한 것이 「동의보감」이라고 할 수 있다. 편집에 있어서 각 병증들을 중심으로 해서 한 병문으로만 나누지 않고, 현대의 임상의학의 분류방법과 비슷하게 5개 부문으로 나누었다. 즉 내경편(내과), 외형편(외과, 안과, 이비인후과, 피부과, 비뇨기과), 잡병편(병리학, 진단학, 대증치료, 구급법, 전염병과, 부인과, 소아과), 탕액편(임상약물학), 침구편(경혈 부위와 침구요법) 등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구체적인 항목의 배정에 있어서는 환자들이 가장 많이 호소하는 병증들을 우선으로 하고, 병증의 증상에서는 원인, 진단, 처방을 손쉽게 참고할 수 있도록 배열하였다. 그 처방들은 내용이 자세하고 출전이 소상하게 밝혀져 있으며, 곳에 따라서는 민간에 전해오는 속방이나 자신의 경험방까지 첨부하여 치료 효과를 높이게 하였다. |
[동의보감] |
더구나 중국 의학의 기본 이론을 완전히 흡수한 바탕 위에서 금나라, 원나라 의학과 우리나라 고유의 의술 및 약재를 합하여 만든 의서로서, 중국에서는 이미 망실된 의서의 내용들까지 일부 수록되어 있는 관계로 그 의미가 더 크다. 그 편집 의도에서는 가장 먼저 위민정신(爲民精神)을 살펴볼 수 있으며, 주체성을 강조한 종합 의서로서의 특색이 잘 드러난다 하겠다.
이 책의 의의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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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째, 종래 의서들에서는 공상적인 이론과 의사들의 편의를 위주로한 편집이 주를 이루었으나 본서에서는 실용성을 중요시하여 접근성을 높였으며, 시대를 앞서가는 과학적 사고와 편찬 방법으로써 당시 의학계에 알려져 있던 모든 지식들을 정리하였다. - 둘째, 우리나라 향약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이의 이용과 보급을 강조하였다. 이를 위해 탕액편에 나오는 향약 중 640가지의 약명을 한글로 표기함으로써 일반 대중이 누구나 쉽게 이용하게 하였는데 이는 민족의학을 부흥 보급시키고자 하는 강력한 바람의 표출이 아닐 수 없다. - 셋째, 80여 종의 국내외 의서들을 참고하여 편찬했기 때문에 이론적 내용이 풍부하며, 임상의에게 매우 유용하게 활용된다. - 넷째, 우리나라 의학 수준을 널리 과시하였다. 즉 병증에 따라 병에 대한 해설과 약 처방을 모두 수록하였고, 출전과 민간처방, 저자 본인의 경험방까지 기록하여 독자들의 광범위한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중국과 일본 등 외국에서도 몇 차례 간행된 바 있다. - 다섯째, 이 책에서 허준은 우리나라 의학을 중국 의학의 일부로 보아오던 종래의 관념에서 탈피하여 중국과 대등한 전통과 수준을 지니고 있음을 주장하였다. 그래서 중국 의학을 북의(北醫)와 남의(南醫)로 나누고 우리나라 의학은 동의(東醫)라 하였는데, 이는 조선이 중국의 동쪽에 있다는 뜻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의학을 연구하고 발전시켜왔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 여섯째, 애민사상과 향약 정책을 바탕으로 민중의학을 고취하고 왜란에 의하여 피폐해진 민생을 구제하려는 거룩한 뜻이 담겨져 있는 조선 의학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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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약합편(方藥合編)
조선조 말기에 나온 책으로 실용적 치료에 근간을 두고 시대적·사회적 요구에 따라 만들어진 의학서적이다. |
[방약합편] |
황도연이 시작하고 그의 아들 황필수가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고종 21년(1884)에 편집 출간하였다. 이 책은 「동의보감」을 바탕으로하고 「의방활투」와 「손익본초」를 합한 다음, 약을 쓰는 근본 요령 및 구급법·금기 등 십여 종류를 보충한 것이다. 그 구성을 보면 책의 상단에 「손익본초」를 두어 총 514종의 약물을 식물성 약초에서 광물성 약에 이르기까지 차례로 배열하여 찾기 쉽게 하였고, 「만병회춘」의 약성가(藥性歌)를 외우기 쉽게 노래로 부르게 하였다. 약초의 우리말을 붙여 참고하기 편하게 하였으며, 외국산 약재는 그 이름을 음각으로 표시하였다. 하단에는 임상에서 효과가 뛰어난 처방만을 골라 상·중·하 삼단으로 분류한 의방활투를 두었는데, 이를 삼통(三統)이라 한다. 상통(上統)은 보약이 될 만한 약재로, 중통(中統)은 기혈을 고르게 하고 속을 편하게 하는 약재로, 하통(下統)은 병의 원인이 되는 독을 치료하는 약재로 구성되어 있다. 또 제조문을 두어 약물의 가공 처리 및 복용법 등을 자세히 기술하였다.
이 책은 우리나라 한의서 중 대표적인 처방집이라 할 수 있으며, 수십 차례에 걸쳐 증보되어 널리 이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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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
조선 후기의 의학자인 이제마가 1893년 57세에 시작하여 1900년 64세에 완성한 사상의학 최초의 원전이다. 이 책은 두 번의 개초(蓋草) 과정 중 많은 부분에 있어서 난해한 해석이 있을 수 있지만, 실증적인 의학을 하고자 하는 그의 노력이 배어 있는 의학서인 것은 틀림없다. 「동의수세보원」은 실증적 학문이 주도가 되는 사상적 배경과 시대적 상황, 즉 1866년 병인양요, 1882년 임오군란, 1894년 동학혁명, 1895년 을미사변, 1897년 대한제국 건국 등이 있었던 혼란스러운 시대이면서, 민심은 극도로 불안정한 상태에서 만들어졌다. 그는 사람들을 살펴서 질병의 심도가 각자의 타고난 본성에 있음을 파악하였다. |
[동의수세보원] |
따라서 「동의수세보원」은 사람의 마음을 살펴 관찰한 논문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하늘의 구조와 인체의 구조가 일치함을 전제로 하였다. 편집에 있어서도 기존 의서와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는데, 전반부에는 자신의 견해를 주장하는 서론에 해당하는 성명론(性命論), 사단론(四端論), 확충론(擴充論), 의원론(醫源論)으로 자신의 생각과 견해가 철저한 자연주의와 인본주의에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특히 의원론에서는 선대 의원들과 의서들을 이름하여 자신의 견해가 철저한 한의학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많은 치험례를 기록하고 있다. 각론(各論)에 해당하는 소음인편(少陰人編)과 소양인편(少陽人編), 태음인편(太陰人編), 태양인편(太陽人編)에서는 기존 의서에서 일부 발췌하여 이를 심도있는 논설과 비판을 가하여 성공한 치험례 뿐만 아니라 실패한 치험례를 설명하였다. 아울러 「동의보감」의 폐비간신(肺脾肝腎)과는 다른 의미로 머리, 가슴, 배, 허리, 엉덩이의 구체적인 부위의 개념이 들어 있어서 새로운 의학의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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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침구갑을경(黃帝鍼灸甲乙經)
「황제침구갑을경(黃帝鍼灸甲乙經)」은 현존하는 침구와 경혈 전문의서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며, 가장 많은 고대 침구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한 중요한 문헌이다. 그 저자는 진대(晋代)의 황보밀(皇甫謐)이며, 저작 시기는 황보밀의 생존연대(215∼282)를 감안할 때 3세기 중엽이라 생각한다. 그는 215년에 태어나 282년 68세에 사망하였으며, 자는 사안(士安)이며, 호는 현안선생(玄晏先生)이다. 20세부터 공부에 뜻을 두고? 책을 읽기 시작했으나, 42세때 풍비증(風痺症)이란 병을 얻어 반신불수가 되었으며, 그때부터 의학에 본격적인 뜻을 두고 배우기 시작하여 갑을경을 저술하였다. 그 당시의 원본들은 모두 실존되어 지금은 볼 수 없으며, 현존하는 갑을경은 다른 서적들에 인용된 부분들을 짜집기하여 다시 구성한 책이다. 1057년에 설립된 송나라의 교정의서국(校正醫書局)에 의해서 「침구갑을경(針灸甲乙經)」이 교정 정리 간행되었다. 현재, 한의학의 가장 오래되고, 뼈대를 이루는 경전은 황제내경으로, 황제내경은 소문과 영추라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그 중 영추는 침구이론과 경락학설과 인체 해부를 논술하고 있다. 이런 영추의 침구이론과 경락학설을 이어받아 최초로 만들어진 침구전문 임상서적이 바로 황제침구갑을경이다. 갑을경은 또한 명당공혈침구치요(明堂孔穴針灸治要)라는 책의 내용도 상당수 포함시켜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갑을경은 그 당시의 침구학과 관련된 주요서적들을 종합하여 임상에 적용할 수 있도록 만든 책이다. 한의학이론 분야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면 인체의 생리기능, 병리론, 인체의 경맥, 각 경혈의 위치를 잡는 법, 각 경혈이 치료하는 질병, 진단법, 침을 놓는 방법에 대해서 자세히 기록하였으며, 임상에 대해서는 내과, 외과, 부인과, 소아과 등 각과를 모두 포괄하고 있다. 그러한 갑을경의 내용상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경혈을 명학한 부위로 묘사하였다. 둘째, 개개 경혈의 주치하는 질병을 명확히 밝혔다. 셋째, 경혈의 위치를 설명할 때 머리와 몸통은 부위에 따라 기재하였고, 팔다리는 12경락에 따라 기재하였다. 이 책을 토대로 후대의 침구학이 발전할 수 있었으며, 현대에서도 침구임상에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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