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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권의 강화가 교회를 튼튼하게 한다: 17세기 영국교회의 상황을 중심으로
이성호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역사신학)
서론: 회중교회론에 대한 정의
필자는 이 글에서 17세기 영국교회에서 회중교회론자의 대표적 신학자라고 할 수 있는 존 오웬을 통하여 그의 교회론, 특별히 교인의 회원권을 살펴보고 오늘날 저성장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 장로교회를 위한 몇 가지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물론 이 작업은 회중교회가 장로교회보다 낫다든지 한국장로교회가 회중교회론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장로교 신학교에서 교회사를 가르치고 있는 필자는 장로교 정치가 가장 성경적이라고 확신하지만 회중교회론이 가르치는 것들이 모두가 다 틀렸다고 보는 것은 올바른 신학의 자세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두 교회론이 완전히 다르지 않을 뿐 아니라 서로가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이 적지 않게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이 회중교회의 장점을 통하여 장로교회의 단점을 보완하는데 사용되기를 바란다.
회중교회론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전에 회중교회파들에 대한 몇 가지 오해들을 먼저 제거하는 것이 필요하다. 개혁주의를 신봉하는 이들 중에 어떤 이들은 장로교 정치만이 개혁파 교회의 유일한 성경적 교회정치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보면 회중교회론은 개혁파 전통에서 이탈한 변종이 되고 개혁신학과 회중교회론은 서로 공생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적어도 역사적으로 증명될 수 없다. 왜냐하면 회중교회파들과 장로교회파들이 본격적으로 생기게 된 17세기 영국에서 두 그룹 모두는 개혁파 신학에 매우 충실했기 때문이다. 즉 개혁파 신학을 따르면서도 어떤 이들은 회중교회 정치를, 어떤 이들은 장로교 정치를 고수하였다. 신학과 교회정치를 완전하게 분리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개혁파 안에서 한 교리에 대해서 여러 다양한 견해들이 있었듯이 (예를 들면 예정론이나 성찬론에 대해서) 교회 정치에 있어서도 개혁파 청교도들은 완전한 일치를 이루지 못하였다.
이 글에서 언급하는 회중교회론자들은 고유명사로 해석되어야 한다. 즉 오늘날 일반적인 의미에서 독립교회를 추구하는 회중교회론자(congregationalists)들이 아니라 17세기 이후 영국과 미국에서 존재하였던 특정한 개혁파 그룹(Congregationalists)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뜻이다. 영국에서 이들을 대표하는 신학자가 존 오웬이었고 미국에서 그와 같은 역할은 한 인물이 조나단 에드워즈였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회중교회주의자들은 절대 다수가 알미니안주의자들이나 심지어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유니태리언주의자들로 바뀌었지만 적어도 초기에는 이들의 절대 다수가 철저한 개혁주의자들이었다.
논의를 보다 정확하게 하기 위해서 회중교회뿐만 아니라 장로교회에 대한 오해도 제거시킬 필요가 있다. 일반인들은 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를 장로들이 다스리는 교회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게 되면 장로가 있는 교회(예를 들면 순복음 교회)는 모두가 다 장로교회라고 부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회중교회와 마찬가지로 장로교회는 개혁파 신학 전통에 서 있는 교회이다. 그렇다면 아무리 장로가 있다고 하더라도 개혁신학을 따르지 않는 교회(예: 성결교회나 순복음교회)는 장로교회라고 할 수 없다.
장로의 유무에 의해서 장로교회를 정의하게 되면 가장 어려운 점이 회중교회와 장로교회를 구분할 수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회중교회도 장로가 다스리는 교회이기 때문이다. 회중교회도 신학적으로는 개혁파 전통을 따르고 장로에 의한 정치를 추구하고 있다. 그렇다면 회중교회도 일종의 장로교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개체교회만 놓고 비교해 보았을 때 두 교회의 실질적인 차이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두 교회 모두 개혁신학에 충실할 뿐만 아니라 장로들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교회이기 때문이다.
장로교회에서 말하는 장로(presbyterian)는 장로회(presbytery)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장로회는 개체교회인 경우에는 당회, 지역교회인 경우에는 노회, 전국교회인 경우에는 총회라고 불린다. 이 회들 사이에는 어느 정도 위계적 관계가 존재한다. 이 교회 정치는 영국교회의 주교제(episcopacy)에 반대하여 생겨난 제도로 주교제가 1인에 의한 교회 정치를 추구하였다면 장로교회는 회(會)에 의한 교회정치를 추구하였다. 회중교회는 더 나아가 어떠한 위계적 교회정치를 거부하고 개체교회만이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라고 보았기 때문에 개체교회보다 더 큰 모든 교회적 직분이나 기관들을 거부하였다.
장로교회가 장로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교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듯이 회중교회 역시 회중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교회를 의미하지 않는다. 회중교회가 장로교회보다 민주적인 특성을 더 많이 가진 점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회중교회는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교회가 아니다. 왜냐하면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회중교회 역시 회중이 아니라 장로들의 모임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심지어 그 당시 어떤 이들은 회중교회를 독립적 장로교회(independent presbyterian), 장로교회를 의존적 장로교회(dependent presbyterian)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이들이 회중교회라고 부른 가장 중요한 이유는 성도들이 모인 모임인 개체교회가 최고의 권위를 갖는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회중교회를 반대했던 이들은 이들을 “독립파”(Independents)라고 불렀다. 여기서 독립이라는 의미는 영국교회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는데 다수를 이루고 있었던 국교회주의자들에게 독립은 분리를 의미하였다. 이들은 영국교회로부터 독립하려고 하는 모든 교파들을 뭉뚱그려서 “독립파”라고 불렀다. 여기에는 침례교, 퀘이커교, 알미니안주의자들이 모두 포함되었다. 독립은 분리주의와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회중교회파들은 독립파라는 용어를 거부하고 “함께 모이는 자들”이라는 회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었다. 이 용어를 통해 그들은 자신들이 분리주의자들이 아니라는 의미를 선명하게 증거할 수 있었다.
국가교회(national church): 회중교회의 역사적 배경
회중교회론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것이 발생하게 된 17세기 영국 교회의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 교회론의 대표주자인 존 오웬을 예를 들어 보자. 오웬은 영국에서 났으니 당연히 영국 사람이었고, 실제로 영국교회(Church of England)의 교인이었고 목회자였다. 그는 노회에서 안수를 받아서 목사가 된 것이 아니라 주교에 의해서 서품을 받아서 성직자가 되었다. 이것이 뭐가 문제인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으나1) 이런 관습적 전통이 거룩한 교회를 타락시키는 주원인이라고 생각하는 무리들이 그 당시 점차적으로 늘고 있었다. 한 세기 전 16세기에 일어났던 종교개혁으로 인해 일부 국가들의 경우 교회가 많은 점에서 새롭게 개혁되었지만 국가교회(national church)라는 개념은 근본적으로 도전 받지 않았다. 즉, 교회와 국가는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교회의 회원과 국가의 회원은 거의 동일하였다. 단적인 예로 어떤 국가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는 교회에서 유아세례를 받고 회원이 되었다. 그 결과 그 아이는 출생과 동시에 국가의 시민이기도 하면서 교회의 회원이기도 하였다.
국가교회를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교구(parish)제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 당시 국가교회는 행정구역에 따라 교구로 나뉘어 있었고, 한 교구에는 하나의 교회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또한 어떤 교구에 속한 사람은 그 교구에 하나뿐인 교회에 소속되어 신앙생활을 하여야 했다. 옆의 교구에 있는 교회가 아무리 자신이 속한 교회보다 좋다고 해도 그 교회로 이명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일반 신자는 자기가 속한 교구의 교회 이외에는 어떠한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신자들은 자기가 속한 교구 교회의 회원이 되어서 평생을 보내야 했다. 이것은 목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목사는 어디까지나 자기가 맡은 해당 교구의 목사였고 다른 교구에서 설교하는 것은 특별한 경우에 한하여 허용되었다. 이런 교구 시스템은 요한 웨슬리의 시대에 와서야 크게 해소될 수 있었다. 웨슬리가 “세계는 나의 교구”라고 외쳤을 때, 그 의미는 말씀의 사역자는 한 교구에 매이지 않으며 어디에서든지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국가교회 개념은 루터파는 말할 것도 없고 개혁파 신학 안에서 큰 도전을 받지 않았다. 로마교회라는 거대한 “짐승”의 위협으로부터 참다운 교회를 지켜줄 수 있는 유일한 피난처는 군대의 힘을 지휘할 수 있는 경건한 위정자들이었다. 이 때문에 종교 개혁자들은 모두가 경건한 위정자들을 복음으로 설득시키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심지어 루터보다 교회와 국가의 구분을 더 강조한 칼빈조차도 자신의 기독교 강요를 개신교를 박해하는 프랑스 왕에게 헌사하였다. 반면, 위정자들의 힘을 전적으로 거부하고 오직 말씀에만 의존하려고 하였던 재세례파들은 교황뿐만이 아니라 세속군주에게도 엄청난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개혁파 교회들은 재세례파와 달리 국가교회을 인정하였기 때문에 세속 군주의 도움으로 자신들의 교회와 교리를 지킬 수는 있었지만, 일단 교회가 세속 군주의 관할 하에 놓이게 되자 교회는 국가의 눈치를 크게 살필 수밖에 없었다. 세속 군주가 경건한 군주일 때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그들의 후계자들이 항상 경건하게 될 것이라는 보장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세속군주의 최우선 관심은 교회의 순수성 보다는 국가와 교회의 안정과 평화 및 번영이었다. 그들이 원한 교회는 단일한 교리와, 단일한 교회 정치와, 단일한 예배 형식 속에서 단일화된 교회였다. 한 국가에서 국가의 공식적인 인정을 받는 하나 이상의 종교가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만약 그런 일이 발생된다면, 국가는 분쟁과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세속군주들은 생각하였다. 이 국가교회의 기본 방침을 문제 삼거나 도전하는 세력들은 이들은 세속 구주의 미움을 살 수밖에 없었다. 국가교회에 대한 반대는 단순히 종교적인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이기도 하였다.
국가교회가 지닌 가장 큰 문제점은 교회와 국가의 구분이 모호해짐으로 교회의 거룩성이 큰 손상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국가교회의 틀 속에서는 교회 안에 신자와 불신자가 뒤섞여 있을 수밖에 없었고 교회는 신자들의 거룩한 공동체가 아니라 죄인들이 뻔뻔스럽게 활보하는 인간들의 사교단체가 되어버렸다.2)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재세례파는 이 문제의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회가 거룩한 공동체가 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국가와 교회를 철저하게 분리시키는 것뿐이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것을 실제로 가능하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은 유아세례를 전적으로 거부하였다. 교회의 회원과 국가의 회원이 일치하는 한, 교회 안에 세속의 물결이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개혁파 신학자들도 국가와 교회의 구분을 강조하였지만, 시민과 교인이 실제로 구분되지 않는 한 신학적인 구분은 재세례파들에게 별 의미가 없었다. 그 결과 재세례파들은 교회의 회원을 오직 자신의 신앙을 스스로 고백하는 사람들로 구성하려고 하였다. 더 나아가 신앙을 제대로 고백을 하고 교회의 회원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회원을 계속 거룩하게 유지하는 것에 많은 힘을 쏟았다. 이를 위해서 말씀의 선포나 성례보다는 권징이 교회의 가장 중요한 표지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순수한 말씀이 선포되고 성례가 그 말씀에 따라 시행되는 곳에 교회가 있다고 가르치는 종교개혁가들의 가르침에 도전하면서, 재세례파들은 참된 교회는 말씀에 순종하는 곳에 교회가 있다고 응수하였다.
종교개혁가들도 재세례파와 마찬가지로 기존 교회가 개혁되기를 원하였지만, 그들의 주 관심은 교회의 구성원이 개혁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교리가 개혁되는 것이었다. 교회가 당면한 급선무는 타락한 로마교회의 거짓 교리를 벗어나서 하나님의 순수한 복음을 선포하고 그 복음에 따라 올바른 성례를 집행하는 것이었다. 교회에서 꾸준히 주의 말씀을 올바로 신실하게 선포한다면, 비록 교회 안에 죄인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교회의 거룩성은 충분히 보장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들은 교회의 거룩성이 교회 회원의 자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선포하는 말씀과 그에 따른 성례의 시행을 통한 성령님의 사역에 있다고 보았다.
개혁파 신학이 신자들의 거룩함을 교회의 거룩함과 동일시하지는 않았지만 신자들의 거룩함에 대해서 무관심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종교개혁이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로마 카톨릭 교회보다 교리의 정통성은 물론이고 도덕적 우위성도 확보해야만 했다. 칼빈은 권징을 교회의 표지로 보지 않았을 뿐이지, 교회를 유지하고 보호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보았다(뼈의 근육이라고 봄). 종교개혁 당시 최고의 신학자라고 볼 수 있는 피터 마터 버미글리(Peter Martyr Vermigli)와 같은 이들은 칼빈과 달리 권징을 교회의 표지 중 하나라고 보았고, 이와 같은 생각은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나 벨기에 신앙고백서에 반영되었다. 요약하면, 개혁파 신학에 있어서 권징에 대한 완벽한 합의는 없었고, 또 권징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교회 안에서 실천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의견이 있었지만, 권징이 교회를 세우는데 매우 중요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 결과 오늘날 개혁파 신학에서 권징은 말씀과 성례와 더불어 참 교회의 3대 표지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영국교회와 청교도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오웬이 속한 영국교회는 기본적으로 철저한 국가교회였다. 대륙과 달리 영국의 종교개혁은 교회 지도자들이나 신학자들이 선도한 것이 아니라, 좀 어처구니없게 들릴지 모르지만 개인적인 야망(정부인과 이혼하고 자신이 원하는 여자와 결혼하기를 원하는)을 이루기 위한 국왕 헨리 8세에 의해서 직접 추진되었다. 왕은 자신의 의도를 성취하기 위해 자신의 이혼을 인준하지 않는 로마교회와 관계를 완전히 끊고, 스스로 영국교회의 머리가 되었다. 영국교회는 그 기원에서부터 철저하게 국가교회의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고 이것은 이후에 영국교회의 가장 큰 특징이 되었다. 왕은 영국이라는 국가의 머리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영국교회의 머리이기도 하였다.
영국 교회는 헨리의 어린 아들 에드워드 시대에 교리적으로 보다 철저한 개혁파 교회로 방향을 틀었으나, 그가 일찍 죽는 바람에 이 개혁운동은 카톨릭 신자였던 그의 후계자 메어리 여왕에 의해서 좌절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그녀 이후에 개신교였던 엘리자베스가 장기간 통치하면서 영국은 완전한 개신교 국가가 되었다. 이 기간 동안 강력한 왕의 통치 하에 국가교회가 정립되었는데, 교리에 있어서는 39개조 신조, 교회정치에 있어서는 주교제, 예배에 있어서는 공동 기도서(Book of Common Prayer), 말씀선포에 있어서는 설교집(Book of Homilies)이 네 개의 기둥으로 굳게 자리를 잡게 되었다.
엘리자베스의 통치 결과 영국교회에 있어서 교회의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위에서 언급한 여러 종교적 형식을 대단히 강조하였다. 이런 형식들은 반성경적인 로마교의 잔재를 완전히 제거하였으나 성경이 명시적으로 금지하지 않은 것들은 여전히 받아들였다. 문제는 분명한 성경적 근거가 없는 (그러나 성경에 명시적으로 위배되지는 않는) 형식들이 모든 교회의 회원들, 특히 목사들에게 강제되었고, 이런 형식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정치적, 교권적 탄압이 시행되었다. 이런 종교적 정책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겉으로만 신앙생활을 마지못해서 하는 형식주의가 교회에 만연하게 되었다. 청교도들은 이러한 종교적 형식주의를 거부하고 진정으로 생명력 있는 활력있는 신앙생활을 추구하려고 하였다.
안타깝게도 청교도들은 교회를 새롭게 하는 방법에 있어서 완전한 일치를 보지 못하였다. 어떤 이들은 기존의 형식을 그대로 두고 성도들의 경건생활을 활성화시키는 것에 만족하였다. 이들은 영국 교회 안에 남아서 개혁운동을 주도하였다. 윌리엄 퍼킨스 같은 인물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영국교회의 정치체제와 예배의식을 보다 성경적으로 개혁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영국교회를 거짓교회라고 정죄하면서 스스로를 영국교회로부터 분리시키면서 자신들만의 교회를 별도로 세우려고 하였다. 이들은 오늘날 분리주의자(Separatists)라고 불린다. 마지막으로 어떤 이들은 영국교회를 떠나지 않으면서 영국 교회의 틀 자체를 완전히 새롭게 재건하는데 관심을 가졌다. 이들 중에서 가장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이들이 회중교회파(Congregationalists)라고 불리는 청교도들이었다.
오웬과 교회재건
오웬의 아버지는 국가교회를 거부한 비국교도에 속한 목사였고, 이 비국교도 전통 속에서 자랐다. 그는 영국교회의 형식주의를 거부하고 영국교회를 초대교회의 모습에 따라 재건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영국교회가 종교개혁을 통해서 교회의 기초는 제대로 세웠으나 그 위에 건물을 제대로 세우지 못했다고 생각하였다. 오웬은 자신이 할 일은 바로 이미 놓인 굳건한 기초위에 튼튼한 건물을 짓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오웬에게 있어서, 영국교회는 로마교회로부터 해방을 했으나, 로마교회적 관습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였다--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고 나서도 여전히 노예근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교회는 교리적으로 새롭게 되었지만, 그 속에 있는 교인들은 달라진 것이 별로 없었다. 단지 로마교회라는 이름이 영국교회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오직, 고위 성직자들만이 로마교회로부터의 해방을 확실히 체험할 수 있었다. 물론, 교회 예배에서 로마교회의 미사는 사라졌고 일반 성도들은 모국어로 된 성경을 읽을 수 있었지만, 회원들의 구성은 큰 차이가 없었다. 성도들의 삶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재세례파는 세속국가와 완전히 단절하고 유아세례를 폐지하여 참다운 신앙을 소유한 사람들로 구성된 거룩한 공동체를 구성하려고 하였다. 물론 이런 방법은 개혁신학에 굳건하게 서 있던 오웬으로서는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웬은 그들이 지적하였던 문제점에 대해서는 충분히 공감하였다. 문제는 개혁신학, 특히 유아세례의 근거가 되는 언약신학을 끌어안고서 어떻게 바른 교회를 정립할 것인가였다.
오웬은 바르고 튼튼한 교회가 성경적 가르침에 근거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점에서 국가교회는 어떤 경우에서도 성경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왕이 교회의 머리가 된다든지 유아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진정한 신앙고백이 없는데 교회의 회원이 되는 것은 성경적 가르침과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였다.
산 돌: 중생한 성도
신약 성경에 교회는 집에 비유되곤 하였다. 집이 바로 서기 위해서는 굳건한 기초가 있어야 하고 튼튼한 벽돌이 서로 굳게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오웬은 이 성경적 비유를 교회 재건에 적용하였다. 교회가 바로 서기 위해서는 교회의 기초가 바로 놓아져야 하고, 튼튼한 교회의 구성원이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이 회원들이 서로 단단하게 하나로 묶여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교회의 기초는 이미 종교개혁을 통하여 확고하게 놓였기 때문에, 이제 필요한 것은 튼튼한 돌과 돌 사이의 굳건한 연합이었다.
오웬은 교회가 부실한 이유 중의 하나는 교회를 이루는 회원들 중에 부실한 돌, 죽은 돌이 구석구석에 끼여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건물을 튼튼하게 짓기 위해서는 오직 제대로 된 돌만을 사용해야 한다. 그런데 영국 교회 안에는, 신실한 신자들도 많았지만 이름뿐인 신자들도 많았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교회가 세례를 받은 사람들을 사실상 거의 자동적으로 회원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비록 영국 교회가 올바른 말씀을 가르치고 성례를 올바로 실시한다고 하더라도 교회의 회원이 부실한 이상 제대로 된 튼튼한 교회가 될 수는 없다고 오웬은 보았다. 교회의 표지도 중요하지만, 교회가 굳건하게 서서 성도들을 바로 세우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였다.
오웬은 교회 회원들을 오직 중생한 성도들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실제로 오웬 자신이 이러한 중생의 체험을 확실히 경험한 사람이도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오웬은 중생과 세례를 동일시 여기는 로마교적인 개념을 거부하고 그 둘의 구분을 강조하였다. 세례는 표지이고 중생은 실체이기 때문에 이 둘은 서로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요한복음 3장 5절 말씀,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가 분명히 말씀하였듯이, 세례뿐만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중생한 자가 교회의 회원이 되어야 한다고 오웬은 거듭해서 강조한다.
중생한 성도만을 통해서 개체 교회를 구성한다고 했을 때 가장 큰 어려움은 중생을 했는지 여부를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이다. 물론 누가 중생하였는지 누가 중생하지 아니 하였는지는 아무도 모르고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예수를 믿는다고 입술로 고백만 하면 회원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회중교회주의자들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들은 비록 인간이 중생 그 자체는 판단할 수는 없으나 중생의 결과인 그 열매들은 볼 수 있으며, 교회의 치리기관은 그 열매들을 가지고 중생에 대해서 합당한 판단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 판단이 절대적으로 옳은 신적인 판단은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교회를 든든하게 세우기에 충분할 정도의 판단은 된다고 보았다.
중생의 열매들을 판단함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사랑의 판단(judgment of charity)이다. 이것을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 상당히 생소한 개념이기 때문에 최소한의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사람의 행동들에 대해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판단을 한다. 지하철에서 어떤 사람이 동냥을 하고 있다고 가정하자. 그 사람이 정말 거지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거지인지 아닌지 확실히 모르니까 동냥을 하지 않는 것이 합리적인 판단일까, 아니면 어차피 알 수 없으니까 동정심이 생기는 대로 동냥을 하는 것이 합리적인 판단일까? 사랑의 판단은 어떤 사람의 행위를 판단함에 있어 그 행위를 반증하는 명백한 요소가 없다면 그 사람을 사랑의 마음으로 호의적으로 보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그 거지가 명품 옷을 입고 최신식 핸드폰을 들고 있다면 그것들은 그 행위(적선)가 적합하지 않음을 증명하는 증거이다. 그렇지 않고 그 거지가 하얀 지팡이를 가진 맹인이며 낡은 옷을 입고 있다면 그리고 적선행위에 반하는 명백한 다른 증거가 없다면 우리는 그 사람이 거지라고 (실제로는 부자일 수 있지만) 판단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우리는 이 사랑의 판단을 중생한 성도를 판단하는 것에 적용시킬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죄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할 뿐 아니라 실제의 삶 속에서 선한 열매를 맺고 중생을 명백히 부정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그를 중생한 사람으로 간주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회중교회론자들은 생각하였다. 반면 여기에 대해서 비판적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은 세례만으로 (17세기 문맥에서 세례는 거의 유아세례를 의미한다) 혹은 신앙고백만으로 교회의 회원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하였다. 회원의 자격을 이보다 더 높이는 것은 성경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중생한 신자들, 즉 가시적 성도들로만 교회의 회원을 구성해야 한다는 오웬의 생각은 그의 비판자들에게 교회를 축소시킨다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오웬의 말을 따르기 위해서는 교회 속에 있는 회원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을 정리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든 교회 안으로 많은 사람을 끌어 모으는 것이 교회가 할 일인데, 안에 있는 교인조차 밖으로 내 모는 것이 교회로서는 할 일이 아니라고 보았다. 이러한 비판에 대하여 오웬은 초대교회를 예로 들면서 강하게 반박하였다. 초대교회는 회원을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철저한 교육을 시켰고, 이미 받아들인 회원에 대해서도 엄격한 권징을 시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오히려 폭발적으로 성장하였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숫자가 모이는가가 아니라 어떤 종류의 신자들이 모이는가이다.
교회언약(church covenant): 성도 간의 굳건한 결속
제대로 된 돌이 단지 모여 있기만 해서 집이 되는 것이 아니듯이, 중생한 사람들이 모이기만 한다고 해서 그것이 교회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벽돌이 시멘트를 통해서 서로 굳게 붙어있어야 튼튼한 건물이 되듯이, 교회도 산 돌인 중생한 신자들이 서로 굳게 연합되어 있어야 튼튼한 교회가 될 수 있다. 교회 회원들인 이 돌들 사이의 연합을 오웬은 교회언약(church covenant)라고 부른다. 보편적 교회도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언약으로 모든 회원들이 연결되어 있듯이, 지역교회도 언약을 통해서 하나로 결합되어 있어야 한다. 교회 언약은 교회의 회원이 되기를 원하는 중생한 신자에게 회원 간의 철저한 헌신을 요구하는 문서이다.
이 결합의 특성은 자발성이다. 언약이라는 것은 언약 당사자들이 자발적인 헌신을 통해서 성립되는 것이다. 만약 언약에 자발성이 빠진다면, 그 언약은 언약이 아니라 강요가 된다. 그렇게 될 경우 강제적 요소가 사라진다면 그 공동체의 결속력은 크게 저하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기가 원해서 가입되지 않은 단체를 위하여 진정한 충성심이 생길 수 없다. 국가교회가 허약한 이유는 성도들 간의 결합이 성도들의 자발적 헌신이 아니라 국가의 법을 통해서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장로교회주의자들과는 달리 회중교회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종교의 관용을 옹호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
이 교회언약의 도입으로 인하여 회중주의교회는, 성공회나 장로회같이 위에서부터(예를 들면 주교나 노회와 같은 권위있는 기관으로부터)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아래에서부터, 즉 신자 회원들의 언약에 근거하여 세워진다. 쉽게 말하면, 교회는 목사가 세우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이 세우는 것이다. 이전에는 목사가 말씀을 선포하고, 그 말씀을 듣고 세례를 받아 신자가 된 무리들이 모이면 교회가 세워졌지만, 이제는 그 반대로 세례 받은 신자들이 성경을 읽고 중생을 경험하게 되면 그 신자들끼리 모여서 목사의 도움 없이도 상호간의 언약을 통해 교회를 세울 수 있게 되었다.
교회언약은 개체교회(congregation)를 최우선하게 된다. 엄밀한 의미에서 개체교회를 넘어서는 교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교회언약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개체교회의 개념도 근본적으로 변하였다. 이 전에는 개체교회라고 하면 보편교회(universal church)와 구분되는 특정교회(particular church)라고 불렸다. 그 특정교회는 주교가 다스리는 일정한 교회들의 모임인 주교좌 교회(diocese)나 혹은 장로교의 경우 지역교회들의 모임인 노회를 지칭하였다. 따라서 지교회는 주교좌 교회나 노회의 한 부분일 뿐 온전한 의미에서 교회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는 교회 언약으로 이루어진 개체교회야 말로 그 자체로 완전한 교회일 뿐만 아니라 그 위에 더 이상의 권위가 있을 수 없는 독립된 교회였다.
오웬이 교회를 이렇게 이해한 이유는 개체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직접적으로 통치를 받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되심이 완전히 확보되기 위해서는 교회 위의 교회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교회가 타락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리스도가 직접 교회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세운 비성경적 제도인 주교나 노회가 끼여들어서 통치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인위적으로 교회의 구역을 만들고, 그 구역에 있는 사람들은 그 구역에 위치한 교회에 자동적으로 가입하게 하는 교구제도(parish system)야 말로 올바른 교회를 세우는데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왜냐하면 전통적으로 1000년 이상 영국에서 유지된 이 제도는 교회언약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자신의 주장을 옹호하기 위해서 오웬은 초대교회의 예를 또 언급한다. 초대교회는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모인 단체였다. 국가가 교구라는 구획을 정리하여 회원들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성도들은 자기가 가고 싶은 교회에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그 교회에 헌신함으로 회원이 되었다. 오웬은 이런 초대교회가 가진 자발성의 원리가 실천되어야 참된 교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오웬은 국가에 의해서 종교가 강요되어서는 안 되며, 무조건 교회 안에 사람들을 모으는 것은 오히려 교회를 망치는 길이 될 수 있음을 역설하였다.
마무리와 비평
17세기 중반에 영국에서는 혁명이 발생하여 왕이 처형되었다. 교회의 머리가 사라졌을 뿐 아니라 그 교회를 지탱하던 주교들도 폐위되었기 때문에 국교가 폐지되었다. 젠트리 계급을 중심으로 한 신흥 세력들이 청교도들의 지원을 업고 정권을 잡았고 최종적으로 군대를 지휘하였던 올리버 크롬웰이 국정 최고 수반의 자리에 올랐다. 오웬은 크롬웰의 신망을 받아 종교에 관한 한 최고의 고위 공직자 자리에 올랐다. 그는 자신의 신념대로 영국의 종교 정책을 추진하였고, 최고의 대학인 옥스퍼드 대학의 학장을 맡아 미래의 주역들을 교육시켰다. 그는 최선을 다하여서 영국의 모든 교회들이 자신이 구상한 대로 교회가 재건되기를 기대하였다.
아마도 모든 청교도들이 한 마음과 한 뜻으로 힘을 모아 오랜 기간 동안 이 일을 추진하였으면 오늘날 영국교회는 많이 달라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크롬웰이 정권을 잡은 기간은 얼마 되지 않았고 그다지 성공적이지도 못했으며 무엇보다 그의 후계자가 될 아들은 국정을 이끌기에 무능력하였다. 결국 대륙에서 피난하였던 차알스 2세(Charles II)가 1660년에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 왕으로 즉위하였고, 새 왕은 이전의 모든 것들을 다시 원위치 시켰다. 오웬이 추구했던 교회의 재건도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나 오웬은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국가적인 규모에서 교회를 중건하는 것은 실패하였지만 시골 작은 마을에서 자신이 생각했던 대로 한 작은 교회를 목회하면 성경적/초대교회적 이상대로 세우려고 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조용히 지나면서 여러 책들, 특히 방대한 히브리서를 주석하였는데, 이런 훌륭하고 탁월한 저술들은 이후 세대들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고 교회의 개혁, 부흥, 중건을 갈망하는 이들에게 끊임없이 솟아나는 신학적 원천이 되었다.
오웬의 교회관은 오늘날 한국교회에 큰 시사점을 던진다. 그 당시 영국교회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는 명목상의 교인들이 너무 많다. 교회의 회원이 되는 것이 너무 쉽다. 대부분의 교회의 경우 등록카드만 작성해도 교인이 된다. 솔직히 교회의 회원이라는 개념 자체가 실제 교회 생활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교인들을 끌어 모으는 데에만 관심을 가지고 각 신자들이 실제로 산돌이 되게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또한 성도들 사이의 유대도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냥 교회당에서 같이 모여서 예배를 드릴 뿐이다. 이런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오웬의 주장이 절대적으로 옳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교회를 바로 세우고자 하는 사람들은 오웬의 고민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오웬은 오늘날 한국 장로교회에 큰 과제를 던진다. 오웬의 말대로 아니 성경의 가르침대로 교회의 본질이 건물(돌)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교회를 세우는 것은 사람을 바로 세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교회를 개척하는 이들은 사람을 세우는 일에 모든 사역을 집중해야 할 것이다. 무조건 교인들을 모으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은 제고해야 할 것이다. 사실 대부분의 교회는 사람을 모으는 것에는 관심이 많지만 모인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할 것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분명한 프로그램이 없는 경우가 많다. 오웬은 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여 중생한 자로 만든 다음 교회 언약을 통하여 굳게 결합하도록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오웬의 교회론 프로그램은 오늘날 대형교회에는 도움이 되지 않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교회를 개척하는 목회자들에게 혹은 작은 교회를 목회하는 자들에게 교파를 초월하여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오웬의 제안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중생은 오직 복음을 들음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목사는 순수한 복음을 전하는데 전심전력해야 한다. 더 나아가 일단 중생한 자들을 확보한 다음에는 성도들끼리의 결속을 강화시키는 것에 힘써야 한다. 그것이 꼭 교회 언약이라는 형식이 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실제로 교회언약은 성경적 지지를 받기가 쉽지 않은 개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식으로든지 교회의 회원권은 지금보다는 더 그 수준을 높일 필요가 있다. 장로교회의 경우 입교를 위한 교리 교육을 강화하고 이명증서만이라도 확실하게 실천하더라도 성도들 사이의 결속력은 지금보다 훨씬 강화될 수 있을 것이다.
회중교회주의자들은 기존의 교회론을 새롭게 해석하였다. 모든 정통 기독교인들은 예배 시간에 사도신경을 고백하면서 교회를 “성도의 교제”로 이해한다. “성도”와 “교제”에 대하여 모든 교파가 해석을 달리 하고 있다. 회중교회주의자들은 성도를 중생의 경험을 고백할 수 있는 가시적 성도라고 보았다. 성도의 교제는 상호간의 철전한 연대인 교회 언약으로 해석하였다. 이런 교회론적인 이해 속에서 회중교회주의자들은 명목상의 신자들이 가득한 영국교회를 기초부터 다시 세우려고 하였다.
오웬이 세우려고 하였던 참 교회의 상은 그가 살았던 시대 속에서 잉태한 산물이다. 아무리 옳은 신학적 견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얼마든지 오용될 수 있다. 그는 영국의 모든 교회를 칼빈주의 신학에 근거한 회중주의 교회로 만들려고 하였지만, 오웬 이후의 실제적인 역사를 볼 때, 조나단 에드워즈와 같이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회중주의교회는 점차적으로 개혁주의를 완전히 떠났고 오늘날 미국에서 가장 좌경화된 신학을 양산하는 중심이 되어 버렸다. 회중주의 교회론에 따르면 개체교회를 먼저 잘 세우면 국가의 전체 교회들이 바로 서게 된다. 이론은 그럴듯하고 전혀 실현 불가능할 것 같지도 않아 보이지만 교회의 역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 점에서 우리는 회중주의 교회론이 지닌 한계를 뚜렷하게 보게 된다. 그 한계는 장로교 교회론에 의해서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1) “우리도 똑같지 않는가?”라고 반문할 수 있으나 꼭 그렇지는 않다. 한국 신자는 한국에 태어나면 한국교회에 속하지 않고, 한국의 특정 교회(장로교, 침례교, 장로교)에 속할 뿐이다. 한국교회라는 말은 한국교회라는 어떤 실체가 존재한다는 말이 아니라 한국에 위치한 어떤 교회라는 뜻이다.
2) 이와 비슷한 예를 오늘날 주로 이민 교회에서 종종 찾아 볼 수 있다.
첫댓글 지난 8월 9일에 우리교회에서 설교하셨던 이성호 교수님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