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민회의 공식 해외독립군 기지는 밀산 학술 재조명, 항일운동기념관도 세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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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념비 제막식은 한국대표단과 밀산시 당서기 등 주민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연변방송국 여성 아나운서가 고운 한복을 입고 중국말과 우리말을 통역하며 진행됐다. |
10월 17일 아침 일찍 일행은 십리와로 향했다. 십리와는 홍범도 도랑을 사이에 두고 한흥동과 골짜기가 나뉘어 있었다. 또한 《대한독립군단》 총재 서일이 자유시사변을 피해 밀산으로 돌아왔으나 일제의 사주를 받은 토비들의 습격을 받아 부대원들이 몰살하고 그 충격으로 곡기를 끊은 채 영면한 자리가 십리와 바로 옆 상촌과 하촌 중간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 모든 자리에 기념비를 세워야 하나 굳이 이곳 십리와의 뒷동산 소나무 숲에 십리와항일투쟁유적지기념비를 세운 이유는 1908년 이강, 1909년 김성무가 사전답사하고 1910년 3월 신민회가 중국 청도에서 간부회의를 열어 독립전쟁 전략을 공식적으로 채택하고 밀산에 약 300만 평의 토지를 사들이고 무관학교를 세워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로 한 자리이며, 실제 1911년에야 대한인국민회로부터 거금인 5만 달러가 도착하여 토지를 매입해 5백여 가구 2천명의 마을을 만들고 동명학교를 세웠기 때문이다.
물론 한흥동도 초기 정착촌이기는 하나 지금은 마을이 사라지고 없는데 반해 십리와에는 지금도 조선족마을(고려영)이 굳건히 자리하고 있었다.
학계에서는 광복군의 뿌리를 1911년 4월 길림성 유화현 삼원보에 세운 신흥무관학교(처음에는 신흥강습소로 개교하여 신흥중학교, 신흥무관학교로 발전됨)로 보는 게 일반적인 시각인데 그렇다면 십리와항일투쟁유적지기념비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특히 신흥은 신민회의 ‘신(新)’과 구국투쟁이 다시 일어난다는 뜻의 ‘흥(興)’을 합친 것으로 명칭만으로 보면 신민회의 정통을 계승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밀산 십리와의 동명학교와 한흥동의 한민학교, 그리고 홍범도가 1913년에 한흥동에 세웠다는 밀산무관학교 또한 원래 모두가 1910년 3월 신민회의 공식결정에 따라 설립된 학교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도 왜 아직까지 우리에게는 밀산의 십리와 동명학교와 한흥동의 한민학교, 무관학교들은 알려지지 않았을까?
KBS 역사스페셜에서는 신흥무관학교를 다루면서 “1909년 봄 이동녕·이동휘·안창호·양기탁 등 신민회 주요 인사들이 상동교회에서 비밀모임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해외독립군 기지론의 중요한 내용이 논의된다. 이 모임을 주도한 이가 우당 이회영이었다.”고 말하며, 여기에 근거하여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강습소가 세워졌음을 주장하고 있다.
1907년에 이미 조선군대마저 해산당한 터였기 때문에 당시 신민회 주요 인사들이 해외독립군 기지론을 주장했음은 여러 문헌에서도 확인된다. 그러나 설혹 그러한 논의가 있었다 하더라도 1910년 3월 신민회가 중국 청도에서 간부회의를 열어 독립전쟁 전략을 공식적으로 채택하고 밀산에 약 300만 평의 토지를 사들이고 무관학교를 세워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로 한 결정사항이 있는 한 신민회의 공식적인 해외독립군기지는 밀산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신흥강습소를 만주에서 한인들을 군사교육시킨 교육기관의 효시로 알려져 있는데 이 또한 밀산이 앞서고 있을 뿐 아니라 중심이었다는 사실도 바로잡아야 한다. 1909년 가을 이승희가 밀산부의 봉밀산 아래 흥개호반에 45방의 비옥한 토지를 사들여 집단이민 100호를 정착시켰다는 기록이 있고, 1913년에 이상설과 이승희의 지지 하에 평민출신 의병장 홍범도가 한흥동에 밀산무관학교를 세우고 직접 교관을 담임하였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신흥강습소의 경우 1911년 4월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 마을 뒤 대고산에서 천인대회를 열고 이 자리에서 자치단체인 경학사가 설립되었으나 토지를 매입하지 못하여 고심하다 이회영과 원세개의 담판으로 해결되었다는 기록을 보면, 실제 신흥강습소는 천인대회 후 상당한 시일이 지나고서야 문을 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중요한 사실들을 기억하고 올바른 역사를 복원하기 위해서 밀산에 십리와항일투쟁유적지기념비를 세우게 된 것이다.
독립운동 사상 최대 비극 자유시 참변
십리와 주변에는 온통 고려영(조선인 동포마을)과 항일투쟁유적지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도 《대한독립군단》 총재 서일의 죽음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 있었다. 서일은 3·1운동 후인 1919년 8월 김좌진 등과 함께 흑룡강성에 산재한 대종교도들을 중심으로 북로군정서를 조직, 총재가 되어 총사령관에 김좌진, 참모장에 이장녕, 사단장에 김규식, 연성대장에 이범석을 임명하고 본영을 왕청현에 두고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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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신 대학살 - 1920년 10월, 일제는 2년 만에 정규군을 동원해 봉오동, 청산리 전투 참패의 보복으로 연변에 대한 대규모 토벌을 감행하여 장암동 학살사건, 의란구 학살사건, 송인동 학살사건 등 참안을 빚어냈다. 무고한 조선이주민에 대한 토벌과 살륙은 12월 20일까지 연변 전역에서 자행됐다. 사진=연변 민족 출판사 제공 <사진으로 보는 중국 조선족 이주사> |
1920년 6월 홍범도가 이끈 대한독립군이 왕청현 봉오동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북로군정서군이 청산리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자, 일본의 대부대가 만주 전역에 걸쳐 강력한 보복작전을 전개하였다. 이에 각처에 산재한 독립군은 이를 피하여 밀산의 평양진으로 집결하였다.
밀산에 모인 독립군부대는 북로군정서·대한독립군·간도국민회·대한신민회·의군부·혈성단·광복단·도독부·야단·대한정의군정사 등 10개 단체로 1920년 12월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고 총재로 서일이 추대되었다. 대한독립군단은 일본군의 대대적인 토벌을 피해 연해주 자유시로 들어가 분산된 모든 독립군들을 자유시로 불러 모은다.
그러나 독립운동 역사상 최대의 비극이자 불상사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자유시 참변이 발생하여 사실상 조선의 독립군 세력이 모두 괴멸되고 만다. 1921년 6월 27일 레닌의 적군이 대한독립군단의 소수파와 함께 대한독립군단에게 무장해제를 요구하며 공격하여 모두 사살되거나 부상당하거나 강제노역소로 끌려간 것이다.
서일은 분산된 북로군정서부대의 남은 성원들을 불러 모아 밀산으로 돌아와 백포자를 중심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서일의 소부대는 대종교 신도가 많은 당벽진에 거주하며 부대를 훈련하고 농사일을 하면서 시기를 기다렸으나 1921년 8월 17일 저녁 친일파 토비들의 습격을 받아 대부분의 장병들이 피살된다. 부하들의 죽음에 책임을 느낀 서일은 살아남은 부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곡기를 끊은 채 자결하였다.
자유시 참변으로 밀산의 독립군기지건설은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그러나 자유시 참변 이후 북로군정서 부총재 현천묵과 조성환, 사령 김규식은 줄곧 백포자 일대에서 활동하며 독립군을 조직하며 재기의 기회를 기다렸으나 김좌진 등 많은 독립군은 만주 깊숙이 이동하여 끊임없이 조직을 만들고 활동을 이어갔다.
임시정부 직속군단인 참의부, 북만주 영안의 신민부, 길림성 부근의 정의부 등은 20~30년대의 항일무장투쟁을 이어갔고 1940년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이 창립되자 대부분 광복군에 흡수된다. 그리고 마침내 1945년 9월 국내진공을 준비했지만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우리 군대의 힘으로 광복을 이루지 못한 채 분단의 질곡에 빠져들고 말았다.
항일운동 중심 상해에서 밀산으로 바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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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념비는 사천성에서 백옥돌을 높이 2m, 너비 1m로 깍아 한글비문과 중국어비문을 함께 새겨 넣었다. |
기념비 제막식에는 한국대표단과 밀산시 당서기, 인민대회 대표, 시정부, 정치협상회의 등 4단위와 주민 100여 명이 참석하였다. 공식행사는 연변방송국 아나운서 출신 여성 두 분이 고운 한복을 입고 중국말과 우리말을 통역하며 진행되었다.
밀산시 당국은 기념비 건립 장소 선정과 환경조성 작업을 진행하여 십리와 뒷동산 소나무 숲 안에 기념비 건립 장소를 확정하고 모금한 돈으로 진입로와 기념비 둘레 조성사업을 완료했다. 그리고 기초부분은 산동성에서 대리석을 가져오고 기념비는 사천성에서 백옥돌을 높이 2미터, 너비 1미터로 깎아 한글비문과 중국어비문을 함께 새겨 넣었다.
비문내용은 중국시 당국의 공식사업임을 감안하여 신민회 지도자 안창호 선생 등이 밀산 십리와 항일독립운동근거지 건설작업을 시작, 미주 대한인국민회가 5만불을 모금, 이강, 김성무, 정재관 선생 등을 파견, 토지를 매입하고 500여 가구 건립 등의 사실을 분명히 하되 용어 등은 현지사정을 고려하여 결정하기로 하였다. 몇 차례 초안을 주고받은 끝에 어투 등에서 아쉬운 점은 있지만, 중국 측 의견을 존중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하여 밀산시 지역에 최초의 한글비문이자 항일유적기념비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십리와 항일투쟁유적지 기념비는 첫째 100년 만에 조국의 광복을 위해 천리 먼 길인 북만주 밀산 지역에서 고군분투했던 애국지사들의 숭고한 정신을 후손들이 추모하고 영원히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둘째는 국외의 항일운동이 3·1운동 전후 정치적으로 상해를 중심으로 진행돼 많은 국민들이 상해 중심의 항일운동인식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 그동안의 현실이었다. 일제와 목숨 걸고 싸웠던 많은 독립운동이 북만주 밀산 지역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는 사실조차 우리의 뇌리에서 잊혀져갔다. 직접 목숨을 던졌던 선열들의 치열한 실천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항일독립운동의 지평을 넓혀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오늘날의 한반도 주변 정세가 한말의 정세와 유사한 측면이 많아지고 있는데, 지난 과거의 역사에서 성공과 실패를 제대로 배우지 못하는 민족에게 내일이 없다는 역사의 철칙에 비춰볼 때 고군분투한 선열들의 성공과 실패를 교훈삼아 오늘의 우리에게 자성의 거울로 삼자는 것이다.
넷째, 일제시대 중국의 항일인사들과 함께 싸웠던 역사를 소중히 하고 이를 발전시켜간다면 한·중 간의 우애친선도 돈독해질 것이다.
다섯째, 광주는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전두환 신군부에 맞서 무장봉기를 한 도시이다. 마찬가지로 밀산은 이미 상해보다 10여 년 전에 항일무장투쟁의 기지가 되어 독립운동을 전개해 왔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은 상해보다는 오히려 밀산의 항일무장투쟁과 일맥상통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제 항일투쟁유적지 기념비를 십리와에 세웠지만, 이것으로 사업이 끝난 것은 아니다. 항일운동과정에서 북만주 밀산지역이 차지했던 독립운동사상의 위상과 역할도 좀 더 학술적으로 재조명해야 한다. 동시에 밀산지역의 십리와, 한흥동, 신한촌, 홍범도 부대의 둔전지, 한때 3,500명에 달했던 대한독립군단의 근거지와 서일, 홍범도, 김좌진, 이범석, 이청천 등 이곳에서 활동했던 항일운동을 기념하는 기념관도 세워야 한다. <끝>
/김상집 5·18구속부상자회 광주시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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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개인적으로 사진 3번째 (마지막) 백발의 젊은 형아, 前 보건복지부 장관 이태복님의 엄숙한 모습이 인상 깊습니다, ...밀산특집-십리와 항일투쟁유적지 기념비를 제막하다 글 감사합니다, 홧팅
하나님, 역사의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지기 마련인데,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작금의 현실들은 또 다른 가면을 뒤집어 쓰고 더욱 교묘한 방법들과 억지와 치졸함과 뻔뻔스러움으로 히히덕 거리는 모습들을 보고 있노라니 제 삶이 마냥 부끄럽습니다. 제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지나온 세월을 거울 삼아서 후손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고 싶지않습니다. 저만의 욕심일까요? 님의 의지와 수고스러움에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힘을 모으고 연대를 기원합니다.
우리민족의 독립운동사는 소중하고 귀한 역사이며 민족의 앞날을 위한 디딤돌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