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거창의 역사, 신용균. 2015년. 214쪽.
1862년 철종 13년 3월 21일, 거창읍치에서 농민들이 봉기하였다. 그때까지 지방관과 향리들의 수탈은 여전하였다. 당시 부사 황종석은 세금 1만 냥과 쌀 100석을 횡령하였고 신재문은 관청 곡식 6쳔여석, 장복영은 2천 5백 석을 포탈한 뒤, 지역민들에게 이자를 거두어 메우고 있었다. 견디다 못한 사람들은 부사 황종석이 농민봉기를 진압하러 진주에 간 틈을 이용하여 봉기하였다.
양반 이시규, 최남규, 이승문 등은 먼저 통문을 돌려 농민들을 모았다. 그날은 읍내 영천 장날이었다. 봉기한 군중은 먼저 향리들의 집을 불살랐다. 이어서 도호부 관아로 몰려가 관청 장부에 불을 질러 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부사 황종석은 대구를 거쳐 서울로 도망쳤다. 지역민들은 향촌을 장악하고 향회를 통해 스스로 통치하였다.
그해 5월 10일, 중아에서 파견한 선무사가 거창에 도착하였다. 지역민들은 이튿날인 장날 함께 모여서 선무사에게 폐정개혁을 요구하기로 하고 통문을 돌렸다. 이에 겁먹은 선무사는 성주를 향해서 가조로 꽁무니를 뺐다, 봉기군 수백 명은 점심때쯤 선무사를 따라잡았다. 그들은 가조의 조세창고 앞에서 선무사에게 토지세 감면을 요구하였다. 선무사는 자기는 잘 모른다고 발뺌하는데 급급하였다.
한편, 5월 28일 경상도 관찰사의 보고로 사정을 알게된 정부는 부사 황종석을 파면하고 경상감영군으로 봉기를 진압하라고 지시하였다. 관군은 농민봉기 주모자를 체포하였다. 암행어사 이인명은 이시규, 이승문, 최남규를 대구로 압송하라고 지시하였다.
이때 농민들은 관군에 직접 저항하였다. 그들은 관군을 습격하여 쫓아 버리고 봉기 지도자를 구출하였다. 암행어사 이인명은 관군을 풀어 주모자를 체포하려고 하였으나 오히려 농민들에게 사로잡혀 향청의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농민들에게 애걸하여 5일 후 겨우 풀려났다.
이로부터 두 달 후 이승문, 최남규는 관군의 끈질긴 추적으로 체포되었다. 그리고 8월 10일 진주에 있는 우병영에서 처형당하였다. 이시규도 후에 체포되었다. 탐학했던 부사 황종석은 곤장 100대를 맞고 귀양 갔으며, 향리 신재문과 장복영은 진주 경상우병영에서 장살되었다.
**주동자 이시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