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현산(七賢山) 칠장사(七長寺)
[대한불교 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의 말사]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 764
1. 칠장사의 연혁
636년 신라 자장스님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지지만, 불분명하다. 본격적인 역사는 고려초 혜소국사(972~1054)가 머물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고려 우왕 9년(1383년)에 왜구의 침입으로 충주 개천사에 있던 고려조의 역대실록을 이곳에 옮겼을 정도로 당시 교계에서는 중요한 사찰이었다.
공양왕 1년(1389년)에 왜구의 침입으로 전소되어 폐허로 내려오다가 조선 중종 1년(1506년)에 흥정스님이 중건했다. 이후 인종 1년(1623년)에 인목대비가 아버지 김제남과 아들 영창대군의 원찰로 삼아 사세를 크게 중창했다. 그때 칠장사에서 직접 써 내려준 ‘인목왕후어필칠언시’(보물)와 10년간 사경한 ‘금강경최승왕경10권’과 1628년에 하사한 ‘오불회괘불탱’(국보)은 현재 칠장사에 보존되어 있다.
1675년 어떤 세도가가 명당이 이 절터를 자신의 장지로 쓰기 위해 절의 건물을 전부 불태우고 스님들을 쫓아내었다. 이후 중창과 중수가 반복되었다.
궁예와 활터, 혜소국사와 나한전, 갓바치 병해대사와 임꺽정, 인목대비와 영창대군, 나한전과 어사 박문수 등 많은 일화가 생생히 전하여 오고 있다.
2. 칠장사의 전각과 성보
철당간(유형문화재 제39호)
새로 세운 일주문
사천왕문(1726년)
종루 누각
응향각(선방), 홍제관(혜소국사기념관), 종무소, 요사채
대웅전(조선 후기 추정, 1703년), 원통전(1725년), 명부전(1703년)
혜소국사비(보물), 나한전, 산신각
안성 봉업사지 석조여래입상(보물)
대웅전 옆에 야외 법당에 자리한다. 원래 죽산의 봉업사지에 계셨는데, 죽산중학교로 모셨다가 1980년경 칠장사로 모셔왔다.
불상과 광배가 같은 돌로 만들어졌으며, 불상 높이는 166.6cm이고 총 높이는 206cm이다. 옷 주름은 여러 겹의 둥근 모양을 이루며, 자연스럽게 흐르고 있다. 불상의 뒷면에는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가 있는데, 주위에 불꽃무늬의 화불을 새기고 있다.
이 불상은 고려 초기에 유행했던 이 지방 불상 양식의 특징을 살필 수 있는 자료로 높이 평가한다.
3. 칠장사에 전해지는 이야기
1) 칠현산(七賢山) 칠장사(七長寺) 이름의 유래
고려 제9대 덕종의 왕사(王師)였던 혜소국사(972~1054)가 칠장사에 부임할 무렵, 인근에 일곱 명의 도적이 있었다. 새로 오신 스님으로 인해 자신들의 운신의 폭이 염려되어, 한 사람 한 사람씩 절 사정을 알아보고자 왔다. 때마침 도적은 목이 말라 우물가로 갔다. 그곳에 금으로 된 물바가지가 있었다. 도적은 얼른 물을 마시고는 금바가지를 몰래 가지고 왔다. 그리고 자신만의 비밀장소에 숨겨두었다. 다른 도적들도 각각 절에 왔다가 금바가지를 보고 숨겨 돌아와 자신만의 비밀장소에 숨겨두었다. 도적들은 각각 다시 절 우물가에 가보았다. 자신이 가져갔는데도 그곳에는 또 금바가지가 있었다. 도적들은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하도 이상해서 비밀장소에 가보니 자신이 가져다 둔 금바가지가 감쪽같이 없어졌다. 한 도적이 이 사실을 다른 도적들에게 말하였다. 그러자 다른 도적들도 똑같은 사실을 실토하였다. 혜소국사가 신통을 부린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도적들은 혜소국사의 도력에 두려움을 느꼈다. 이에 도적들은 스님을 찾아가 용서를 빌고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도를 이루었다. 그 뒤 혜소국사가 열반하자 이들도 사람의 형상을 한 일곱 개의 돌만 남기고 종적을 감췄다. 이들이 현재 칠장사 나한전에 모셔져 있는 일곱 분의 나한이다. 이때부터 산 이름을 칠현산(七賢山)이라고 하고, 절 이름을 칠장사(七長寺)라고 하였다. 이전에는 아미산(蛾嵋山) 칠장사(漆長寺)였다.
2) 철당간에 담긴 이야기
칠장사 입구의 부도밭을 지나 언덕을 오르면 좌측에 솟을 듯이 높이 서 있는 철당간이 있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9호인 칠장사 철당간은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철당간 가운데 하나다. 계룡산 갑사의 철당간, 속리산 법주사의 철당간, 그리고 청주시내에 있는 용두사지 철당간 정도다.
칠장사 철당간은 현재 14층의 철제 원통 당간지주가 남아 높이 11.5m에 이르고 있지만, 원래는 철통이 28개가 있었다고 한다. 만약에 철통 28개가 다 남아 있었다면 높이 20m가 넘는 거대한 철당간의 위용을 자랑했을 것이다. 이 일대가 배의 형국이라 중앙에 돛대의 역할을 하는 철당간을 세웠다는 이야기도 있다.
당간을 고정시키는 지주는 남북으로 마주하고 있으며, 별다른 장식이나 글이 보이지 않는 단순하고 소박한 모습이다. 지주와 지주 사이 아랫부분에는 구멍이 있어 당간을 꽂아 둘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지주 사이에 세워지는 당간은 본래 절에서 불보살님의 공덕과 위신을 기리는 당(깃발)을 달기 위한 깃대를 말하며, 당간을 고정하고 지탱하는 것이 당간지주다.
3) 명부전 외벽에 그려진 궁예, 임꺽정
<궁예 이야기>
신라 왕실의 서자였던 궁예는 유모의 손가락에 눈이 찔려 한쪽 눈을 잃는 기구한 운명이었다. 이후 이곳 칠장사에서 유년기를 보내며 활 연습을 했다. 명부전 뒤편의 궁지(弓地)가 바로 궁예가 활 쏘는 연습을 하던 곳으로, 활을 잘 쏘아 궁예라 불렀다. 처음 이곳 안성땅 죽주에 근거를 둔 기훤에게 의탁하였다. 그 후 미륵신앙을 기반으로 크게 세를 떨친 궁예는 스스로 미륵을 칭하고, 백성들은 또한 자신들의 구원의 대상으로 궁예를 선택하였다.
<임꺽정 이야기>
명부전 벽에 그려진 임꺽정은 부리부리한 눈에 울퉁불퉁한 근육을 자랑하며 스승 갓바치의 혼이 깃든, 천릿길도 한걸음에 내칠 것 같은 칠장마를 타고 있다. 병해대사와 임꺽정을 중심으로 왼쪽에 이봉학, 박유복, 배돌석이 병해대사의 오른쪽으로 황천왕동, 곽오주, 길막봉이 호위하고 있다. 일곱 의적(도적)들은 자신들의 특기에 맞는 철퇴나 활 도끼, 바위 등을 들고 당당히 서 있다.
임꺽정은 조선시대 대표적 의적, 벽초 홍명희의 대하소설 주인공.
16세기 중반 몰락 농민과 백정·천인들을 규합하여 지배층의 수탈정치에 저항, 정국을 위기로 몰아넣었다. 홍길동(洪吉童)·장길산(張吉山)과 함께 조선의 3대 도적으로 일컬어진다. 일명 임거정(林巨正)·임거질정(林居叱正).
경기도 양주에서 백정 신분으로 태어나 황해도에서 생활했다. 뜻을 같이하는 비슷한 처지의 농민 수십 명과 그 가족으로 집단을 이루어 황해도의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도적 활동을 시작했다. 날쌔고 용맹스러우며 지혜로웠던 그는 1559년경 황해도·경기도·평안도까지 활동영역을 넓혀 이 지역의 관청이나 양반·토호의 집을 습격, 이들이 백성에게 거두어들인 재물을 빼앗았다. 서울·평양 간 도로와 그 밖의 주요교통로를 장악하여 정부가 농민들로부터 거두어들인 토지세·공물·진상물 등을 탈취했다. 이와 함께 관군의 방비와 토벌의 허점을 교묘히 찌르며 세를 확장하였다. 빼앗은 재물을 빈민에게 나누어주어 의적으로서의 성과를 높이고, 이들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았다.
그가 구월산에서 체포되어 처형되기 직전까지 정신적 지주로 삼았던 스승 갖바치가 머문 곳이 칠장사다. 갖바치 역시 가죽신을 만드는 백정 출신이다. 그는 칠장사에 은둔해 있으면서 주민들에게 가죽신 깁는 법을 가르쳤다. 가죽신은 안성유기와 더불어 안성 특산물이다. 도력이 뛰어난 갖바치는 주민들에게 병해대사로 불리며 추앙을 받다가 85세에 입적하였다. 주민들은(또는 임꺽정) 병해대사를 위해 목상(목불, 꺽정불)을 만들어 칠장사에 모셨다고 전한다.
(칠장사 홈페이지) 임꺽정이 봉안한 것으로 전해져 ‘꺽정불’로 불리고 있는 안성 칠장사 소장 목조불상이 충북대 연구팀의 연대측정결과 1540여 년인 조선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밝혀졌다.
벽초 홍명희의 대하소설에서 <임꺽정>과 병해대사 이야기가 널리 알려진 가운데 임꺽정이 스승 병해대사를 위해 조성했다는 꺽정불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지만, 그 동안 불상의 진위를 놓고 의견이 엇갈려왔다.
그러나 충북대 연구팀이 꺽정불 밑 부분에 ‘봉안 임꺽정(奉安 林巨正)’이라고 쓰여 진 삼베 조각 등을 연대측정 한 결과 “1540년을 중간연대로 ±100년의 방사선 연대측정”이라는 결론을 내려 실제 임꺽정(?~1562)이 불상을 봉안했을 것으로 확실시 된다.
꺽정불은 예전부터 전란과 수많은 화마를 피해 내려온 칠장사의 귀중한 유물로서 문화재지정을 앞두고 있다.
4) 나한전과 나옹송
지금 칠장사에 나한전에 모신 나한은 이전에는 경내 노천에 있었다. 1703년 법당을 마련하고 모신 뒤, 2015년 나한전을 새롭게 조성하였다. 1363년 고려 공민왕이 죽산 봉업사에 와서 왕건진영에 제를 올리고 갈 때, 왕사로 동행한 나옹선사가 칠장사를 찾아왔다. 그때 나한님들이 야외 멍석바위 위에 모셔져 해가림이 없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내가 해가림이 될 소나무를 심고 가야겠다.’고 하시며 소나무를 심었다. 뒷사람들이 이 소나무의 이름을 나옹송(懶翁松)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5) 칠장사 나한과 어사 박문수
박문수(1691~1756)는 32세기 되도록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박문수가 과거시험 볼 때 이야기다. 박문수가 과거를 보기 위해 길을 나서는 날 아침, 어머니는 박문수에게 조청으로 만든 유과 보따리를 주며 당부하였다. “꼭 가는 길에 칠장사 나한전에 유과를 공양하고 기도를 드려라.” 어머니 말씀대로 박문수는 칠장사에 들러 나한전에 기도하고 그곳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그런데 그날 꿈에 칠장사 나한이 나타났다. 나한은 이번 과거시험의 내용이라고 하면서 여덟 줄 중 일곱 줄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줄은 알아서 쓰라고 하였다. 꿈에서 깨어난 박문수의 뇌리에는 그 게송이 또렷하게 남았다. 며칠 후 과거시험장에 들어간 박문수는 깜짝 놀랐다. 과거시험과 관련된 내용이 바로 꿈속에서 나한이 가르쳐준 바로 그 게송이었다. 꿈속의 글을 기억하고 있던 박문수는 일곱 줄을 그대로 쓰고 나머지 한 줄은 본인이 덧붙여 제출하였다. 결과는 장원급제! 박문수가 써 내려간 시를 ‘꿈속에 나타난, 과거에 오른 시’라는 뜻에서 ‘몽중등과시(夢中登科詩)’라고 한다. 문헌마다 약간 차이가 있지만, 그 시는 이렇다.
落照吐紅掛碧山 (낙조토홍괘벽산) 낙조가 붉은 기운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려있고
寒鴉尺盡白雲間 (한아척진백운간) 까마귀는 흰 구름 자 모습을 그리며 날아가네
問津騾客鞭應急 (문진나객편응급) 나루터 묻는 나귀 탄 나그네의 채찍은 다급해지고
尋寺歸僧杖不閒 (심사귀승장불한) 절로 찾아 돌아가는 스님의 지팡이는 한가롭지 않네
放牧園中牛帶影 (방목원중우대영) 방목하는 목장에는 소가 그림자를 두르고 있고
望夫臺上妾低鬟 (망부대상첩저환) 망부대 위 아낙네의 쪽이 뒤로 젖혀지네
蒼煙古木溪南里 (창연고목계남리) 푸른 연기 고목 사이로 피어오르는 시내 남쪽 마을에
短髮樵童弄笛還 (단발초동농적환) 짧은 머리 나무꾼 아이가 풀피리를 불며 돌아오네
6) 혜소국사의 비석 이야기
나한전 앞에 혜소국사(慧炤國師, 972~1054) 비가 있다. 안성에서 태어나 칠장사의 조사를 지내고 여기서 생을 마친 혜소국사를 기념하기 위해 고려 문종 14년(1060)에 세운 비다. 스님은 1049년 문종의 스승인 왕사가 되었고, 1504년에는 나라의 스승인 국사가 되었다. 어느 때부터인지 위에서 아래로 비스듬하게 잘려있던 비를 1976년 비각복원공사 때 보수하였다. 지금도 비를 보면 대각선으로 금이 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긴 세월 속 비바람 때문이라고도 하고, 조선시대 이 지역의 세도가들에게 파괴되었다고 하고, 머릿돌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그렇다고도 한다. 그런데 이 금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임진왜란 때였다. 적장 가토 기요마사가 북상하다가 칠장사에 침입하였다. 적장은 부하를 시켜 절을 뒤지고 무례하게 구는 등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그때 노스님이 나타나서 적장에게 신성한 법당을 더럽히지 말고 썩 물러가라고 크게 나무랐다. 화가 치민 적장은 갖고 있던 칼을 빼 노스님을 내려쳤다. 그러나 노스님은 홀연히 자취를 감추고 적장의 팔만 아팠다. 그 순간 비석이 갈라지며 피가 흘러내렸다. 그것을 보고는 왜적들은 혼비백산하며 칠장사를 떠났다.
<참고> 칠장사 홈페이지
http://www.chiljangsa.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