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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12일
주: 아래 글은 Mark Beaird 씨의 설교를 독일 사정에 맞게 약간 첨가시켜 번역한 것입니다.
원문: PROCLAIMING JESUS CHRIST TO AN AMERICAN POSTMODERN SOCIETY by Mark Beaird
요절 23절: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오늘날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남과의 갈등을 피하고 좋은 관계를 갖기 위해 노력하며 살지만, 이혼으로 인해 가정이 깨지고 정서적으로 상처받은 가정에서 자랐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포스트모더니즘 사조라고 부르는데, 즉 세상의 모든 것을 주관적으로 보며, 경험적인 관점과 도덕적, 절대적 또는 보편적 진리를 믿지 않는 사고방식입니다.
우리가 전통적이지 않은 세대 사람들에게 교회의 전통적인 접근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상상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를 세상 사람들에게 소개하여 연결시켜 줌으로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한다면 '포스트모던' 시대에 일어난 변화를 이해하고 이에 맞는 접근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I. 우리는 현대 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16-17절).
A. 미국인과 유럽인들은 보편적 경건에서 멀어져 있습니다(16절).
바울이 아테네에 있었을 때, 그는 우상으로 가득 찬 도시를 보았습니다. 이것은 다신교가 이 지방 널리 퍼져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유럽과 미국에서도 우상숭배가 널리퍼졌다는 사실을 우리가 멀리까지 가서 확인할 필요는 없습니다.
누군가는 유럽이나 미국에서 진실된 기독교가 쇠퇴한 원인은 우리 문화의 부패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문화가 더욱 희석되고 다양해짐에 따라 새로운 종교가 자리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이러한 문화의 타당성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습니다.
조지바나(George Barna)는그의저서 <If Things Are So Good Why Do I Feel So Bad> (상황이이렇게좋은데왜기분이나쁠까)에서
"정보 홍수로 인해 문화적으로 벌거벗고, 개인적으로 단절되고, 직업적으로 혼란스럽고, 영적으로 영양실조에 걸리고, 정서적으로 영감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이 유럽과 미국이라는 사회의 구성원입니다. 우리는 방대한 양의 정보를 처리할 수 있는 기계와 수단을 가지고 있지만, 이 정보를 인간 친화적으로 해석하거나, 쉽게 구할 수 있는 정보의 바다에서 축적된 지식을 현명하게 적용하는 방법을 거의 알지 못합니다.“ (바나 26)
B. 미국인이나 유럽인들은 대체로 전통적인 종교적 소속을 버렸습니다(17절).
그렇다고 아무도 더 이상 기독교인이 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바울 시대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아테네에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17절). 오늘날에도 여전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사람들의 사고 방식은 많이 변했습니다.
Barna는 "우리는 세계의 다양한 종교적 신념에 점점 더 많이 노출되고 있지만, 우리가 성경과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는 점점 더 적게 알아가고 있습니다. 미국과 유럽에는 수많은 교회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교회가 서 있다는 것이 오늘날 유럽인이나 미국인에게 어떤 영향을 줄까요? 우리는 물질문화적 성취와 안락에 취해 하나님에게서 오는 역사적 가치와 도덕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의 도덕적 나침반은 새로운 방향을 가리키도록 다시 프로그램되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많이 잃어버려 국가나 사회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나 그분의 법도를 존중하려는 의지를 대부분 상실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신앙생활를 피상적인 종교 활동으로 대체했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을 여러 문화적 우상으로 대체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증심적 생활에서 자아 중심적 생활과 방종으로 바꾸었습니다. 이러한 모든 탈신앙으로 인해 우리는 영적으로 파산하고 도덕적으로 타락했으며 사회적으로 불안하게 되었습니다." (바나 26-27)
II. 우리는 우리 사회의 종교적 인간성을 인식해야 합니다(17-18절).
미국과 유럽의 종교적 사고방식에는 두 가지 극단이 지배적인 것 같습니다.
A. 어떤 사람들은 거의 모든 사상을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일 정도로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17b절).
바울이 직면했던 태도가 바로 이런 것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든 아이디어에 열려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기도록 부르시는 유일한 신앙인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부한 것은 아이러니가 아닙니다.
B. 다른 사람들은 전통 종교를 완전히 거부했습니다 (18 절).
바울이 다루고 있는 두 가지 기본적인 태도를 주목하면 상황이 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테네는 에피쿠로스와 스토아학파의 라이벌 철학 학파의 본거지였습니다. 에피쿠로스(기원전 342~270년)는 쾌락이 인생의 가장 큰 목적이며, 고통, 불안한 마음, 미신적인 두려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는 평온한 삶이 가장 큰 즐거움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신은 인간의 삶에 관심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키프로스의 제노(기원전 340~265년)는 스토아 철학의 창시자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삶에 중점을 두었으며 인간의 이성적 능력과 개인의 자기만족을 강조했습니다. 신학적으로 그는 본질적으로 범신론자였으며 신을 "세계의 영혼"으로 간주했습니다.
에피쿠로스주의와 스토아주의는 인류의 곤경을 다루고 성경의 계시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역과는 별개로 삶에 대처하기 위한 이교도의 대중적인 대안이었습니다. (우리 시대의 비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인들보다 더 나은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III 우리는 오늘날 사람들이 종교에 대해 끝없이 토론하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19-20절).
A. 토론이 끝없는 이유는 절대적인 진리가 거부되기 때문입니다.
대학교수 앨런 블룸은 "학위 프로그램에 입학하는 거의 모든 대학생은 진리가 상대적이라고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오류가 아니라 편협함을 두려워합니다. 그들은 '나나 다른 사람이 어떤 문화나 종교가 다른 문화나 종교보다 낫다고 말할 권리가 있는가'라고 묻습니다.
신성한 것, 참된 종교,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존중은 사라질 정도로 줄어들었습니다." (블룸 26:56)
우리는 텔레비전과 인쇄 매체뿐만 아니라 전국의 많은 대학 캠퍼스에서 각자 만의 "화성 언덕"을 가지고 있습니다. 논쟁은 날로 격화되고 하나님의 말씀은 점점 더 소외되고 있습니다.
B. 우리의 "새로운 세상"은 하나님보다는 사상과 지식을 사랑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로마서 1장 21-25절과 28절은 그러한 사람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결론
우리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회에서도 그리스도를 선포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는 멸망하는 사람들에게 항상 "미련한 것"이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피상적으로 보면 진정한 영성은 이 세상에서 빛을 발하지 못합니다.
A.W. 토저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참된 영성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소원으로 나타납니다.
1. 거룩하게 살되 행복을 첫째로 삼지 않으려는 마음의 자세입니다.
2. 일시적인 불명예나 상실감을 겪더라도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되기를 원하는 영적인 사람입니다.
3. 영적인 사람은 자기 십자가 지기를 원합니다.
4. 다시 말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영적인 사람입니다.
5. 영적인 사람의 소망은 잘못 살기보다는 올바르게 죽는 것입니다.
6.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희생으로 주님 앞으로 나가는 것을보고 싶은 욕망.
7. 영적인 사람은 습관적으로 그 시간이 아니라 영원을 따라 판단합니다. (성경 일러스트레이터 3: CD-Rom)
좋은 소식은 진정한 영성의 핵심이 바로 이 사회에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따라 바르게 살아간다면, 우리 사회의 모든 변화에도 불구하고 주변 사람들이 그 신앙을 인정할 것입니다.
본문 사도행전 17:22-23
전파를 통해 자기 자신의 영성 브랜드를 전파하는 오프라나 케이블 TV를 보면 대다수의 청취자들이 여러 신들을 포용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데이비드 웰스는 "종교적 다원주의는 우리에게 새로운 경험을 제공할 수 있지만, 또한 성경 저자들을 둘러싸고 있었던 세계와 접촉하게 해줍니다. 우리 시대의 다원주의와 이교도는 선지자와 사도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한 것이었습니다. 구약과 신약 시데에 메소포타미아에는 수천의 신과 여신이 있었는데, 그 중 많은 신과 여신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종교적 다원주의의 존재가 기독교의 유일성에 대한 믿음을 완전히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주장을 교회 내에서조차 듣는 것보다 더 놀라운 것은 없을 것입니다. 만약 이 주장이 수많은 다른 종교와 접촉하는 데 따른 필연적인 결과였다면 모세, 이사야, 예수, 바울은 오늘날과 같이 종교적 다원주의가 유행이 되기 훨씬 이전에 성경적 신앙을 버렸을 것입니다." (크리스천 투데이, 38권, 8호).
I. 종교적, 영적 사고는 우리 사회를 하나로 묶습니다(22절).
A. 미국이나 유럽은 지식으로 가득 차 있지만 마음의 평화가 부족합니다.
미국과 유럽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교육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알고 있고, 인터넷과 미디어를 통해 더 많은 정보에 접할 수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경제는 그 어느 때보다 좋아졌고 사람들은 더 오래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들은 무엇보다 마음의 평화가 부족합니다.
B. 교회는 지식에 목말라하지만 자신에게 직접 필요한 참 지식이 결핍되어 있습니다.
다음은 토드 한과 데이비드 베르하겐이 쓴 책 <무모한 희망>의 첫 대사입니다.
„우리는 우리 문화 역사상 처음으로 완전히 탈기독교 세대가 되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세대는 하나님을 모릅니다. 하지만 영적인 실재를 갈망하고 추구하는 세대입니다. 지금까지 교회에서 그것을 찾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교회에서 영적 갈망의 만족을 찾지 못한다라고 했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비극적인 일입니다.
우리는 이 세대의 젊은이들이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과의 관계, 죄 용서, 영적 상처의 진정한 치유, 영원한 심판으로부터의 구원을 경험하지 못한 채 영원한 생명을 잃을 가능성에 대해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그냥 내버려 둘 것입니까?
우리가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려 한다면 우리 주변의 급변하는 문화와, 이전 세대와 같은 방식으로 더 이상 사고하지도 정보를 처리하지도 않는 젊은 세대에 주목해야 합니다. 진리와 현실에 대한 관점 자체가 완전히 바뀌고 있으며, 이 시대 사람들은 여러 면에서 바로 전 세대 사람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와같은 이유로 교회가 새 세대의 많은 사람들에 대해 무관심해진 것은 당연한 결과일 수 있습니다.
영적인 진리를 찾는 젊은이들이 영적 공허함을 채우고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자조 공식과 뉴에이지 및 동양 신비주의를 찾는 것은 당연합니다.“ (자프렌 1)
바울이 상대한 사람들은 다양한 종교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매우 종교적"이었습니다. 분명히 그들은 더 많이 알수록 더 많은 영적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변의 다른 세상 사람들보다 마음의 평화를 더 누리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오늘날 세계에 있는 교회들의 신자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지식이 많아지자 두려움이 커졌습니다. 우리는 더 나은 길을 찾기 위한다고 다양한 견해와 다양한 길을 받아들였고, 그 결과 하나님과의 체험에서 오는 평화를 잃어버렸습니다.
기독교 대신 거짓 종교를 포용하는 사회에 대한 우리 기독교인의 해답은 교회가 모든 면에서 (진리에 기초한) 진정성을 갖는 것이지,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II. 예배의 새로운 대상이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를 대체했습니다 (23a절).
A. (심리적) 불안정은 우리 사회의 (분별력 없이) 열린 마음의 결과입니다.
우리 사회는 이해에 도달하는 대신 그 어느 때보다 이중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해하지도 못하는 것을 숭배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젊은이들에게) 일관성(맥락)의 결핍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젊은이들이 어떤 아이디어를 받아들이기 위해 논리적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역설적으로 보이는 관점을 동시에 가질 수 있습니다. 내가 아는 (젊은) 사람들이 왜 낙태를 옹호하면서 동물에게 스트레스를 주지 말고 또 죽이지도 말자고 주장하는지 궁금한 적이 있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이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자프렌 2)
우리 사회에서는 자신의 신앙에 대해 강하게 느끼기만 하면 누구도 자신의 신앙을 '이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B. 절대 진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하나님은 다른 어떤 것 또는 사람보다 높은 위치에 있지 않으며 각종 신앙이 받아들여집니다.
조쉬 맥도웰은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성경을 믿는 성인으로서 여러분은 의심할 여지 없이 어떤 것들은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 즉 모든 사람, 모든 장소, 모든 시대에 해당되는 진리라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또한 이러한 절대적인 진리는 하나님에 의해 주어졌으며 그분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포스트모던 세계에서는 진리가 받아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며, 각 문화는 그 문화권 안에서만 그리고 그 문화권의 사람들만을 위해서 진리가 무엇인지를 그 문화권 사람들이 스스로 결정합니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진리를 알고 있다고 주장하고 다른 사람의 가치관, 신념 또는 라이프스타일을 부정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편협하고 편견이 지나치다고 주장합니다.>" (맥도웰 17)
아이러니하게도 화성 지성인들(the men at Mars-Hill intellect)이 피할 수 없었던 것은 알지 못하는 하나님(신)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III. 눈먼 사람들 탐구의 결과를 맹목적인 수용하게 하였습니다 (23b절).
A. 많은 유럽과 미국인들이 눈을 가린 채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인들 스스로 인정하듯이 미국인들은 이해가 부족하고 무엇이 옳은지 모르지만, 그들은 "영적 여정"에서 발견하는 것이 무엇이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무엇이며 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라는 제목의 글에서 티모시 켈러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지난 30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포스트모던'이라고 부르는 시대의 출현을 목격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신조는 이성이나 계시가 우리에게 객관적인 진리를 제공하지 못한다는 주장입니다. 대신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모든 진리 주장은 사회적으로 형성되며, 한 집단과 공동체가 자기 공동체에 의미와 정체성을 부여하는 이야기나 진술을 구성할 때 형성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모든 진리 주장은 사실 그러한 집단에 '통하는' 만들어진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따라서 이들에게 '진리'라는 용어는 항상 따옴표로 싸여져 있는 것입니다.
이들에겐 여러 가지 가변적인 진실이 존재합니다. 본질적인 원칙은 없고 상황에 따른 개념만 있을 뿐입니다. 내적 본질은 없고 피상적인 현상만 있을 뿐입니다. 분명한 경계는 없고 조합과 연결만 있을 뿐입니다. 위대한 것도 '메타 내러티브'(거대 담론 또는 큰 이야기의 틀)는 없고 여러 이야기들만 존재합니다. 이들에게는 현실이 아니라 "가상" 현실이 있습니다. (자프렌 3)
B. 세상이 맹목적으로 숭배하고자 하는 것은 사실 참된 신입니다.
궁극적으로 인류는 철학이나 종교를 막론하고 항상 의미를 찾아 헤맸습니다. 아테네인들도 같은 방식으로 의미를 찾았습니다. '알 수 없는 신'의 조각상은 그들이 찾고 있던 것을 찾지 못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증거였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알지 못하고 숭배하던 신이 그들의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하나님이라고 선포했습니다.
결론
얼마 전 한 의사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종교적 신념은 무형적"이며 자신의 믿음을 증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종교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이 의견에 절대 동의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삶의 변화, 평화, 기쁨, 죄로부터의 구원 등 모든 것이 "유형적"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일상 생활에서 관찰하고, 느끼고, 전달하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삶에서 표현되는 믿음을 받았습니다. 저는 심지어 진리를 고백할 수 없다면 그것(믿음)은 존재할 수 없다고까지 말하고 싶습니다. 실지로 우리 사회의 조건이 그러한 믿음을 요구합니다.
본문: 사도행전 17:24-33
우리는 항상 변화의 기로에 서 있어서, 과거에 우리에게 익숙하고 편안한 사고방법을 견지하려고 하면서도, 동시에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에 도전하는 새로운 세계로 떠밀려가는 기묘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버려야 할 사고가 몇 가지 있다고 생각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절대 버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성경 구절에서 세상 물결에 떠내려 가는 사람은 바울이 아니라 아테네 사람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새로운 교리를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된 메시지의 완전한 성취를 설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메시지를 명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인류의 기원으로부터 설교를 시작합니다.
I. 참된 하나님은 사람에 의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24-25절).
A. 하나님은 비인격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아테네의 철학자들에게 하나님은 인격적인 존재라기보다는 관념에 불과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은 관념이 아니라 인격적인 존재입니다.
B. 바울은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검증 가능성을 설교했습니다.
바울은 지식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데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바로 핵심문제를 파악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다면 우리는 그분께 바르게 생각하고 행동할 책임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라면 포스트모던 사고의 특징인 (여러 신이나 다른 무엇에 바치는) 분열된 헌신은 있을 수 없습니다.
II. 참 하나님은 영원의 설계자이며 만물의 아버지이십니다(26-27a절).
A. 하나님의 창조세계에는 "공동체"가 있습니다(26절).
"한 사람으로부터 모든 민족을 창조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새로운 가족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정하셨습니다. 그분의 소원은 우리가 그분을 알고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 되고 그분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이것이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목표입니다.
B. 인류 전체가 하나님을 찾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대부분의 포스트모던 구도자, 특히 젊은이들은 비인격적인 신과 피상적인 인간관을 믿습니다. 무신론자나 무신론자가 아닌 현대의 많은 사람들은 인격적인 신을 믿지 않지만, 존재하지만 증명할 수 없는 신을 믿기도 합니다. 알코올 중독자 익명 단체(Alcoholics Anonymous)는 몇 년 전 이 점을 이용하여 이 신을 <하나님>보다는 덜 배타적이지만 인격적인 '더 높은 힘'이라고 불렀습니다.
포스트모던 사람들은 동양의 신 개념에 따라 신을 모든 사람과 사물에 존재하는 비인격적인 생명력으로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익숙한 이야기같지 않아요?
스타워즈의 재흥행 성공 요인 중 하나는 이 영화에서 동양의 힘 개념을 쉽게 받아들이고 경험하기를 갈망하는 젊은 세대입니다.
이러한 비인격적인 신 개념은 많은 포스트모더니스트들로 하여금 인간이 더 나은 상태 또는 더 높은 상태로 발전한다는 근대적 개념을 포기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냉소적 사상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동물이나 나무보다 더 가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당신은 여기서 오늘날 교회가 직면한 엄청난 도전을 이미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왜 성경 구절을 권위 있는 증거로 인용하는 것이 포스트모던 젊은이에게 의미가 없으며 낙태나 안락사와 같은 것에 반대하는 현대적, 연역적, 논리적 주장이 이들 귀에 들리지 않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자프렌 5).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가 세상의 가치관을 어떻게 변화시키더라도 우리는 결코 우리의 신앙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유럽이나 미국의 현재의 사고방식은 이전의 역사에서와 다양한 문화에서 항상 나타났었지만, 복음, 즉 좋은 소식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이 동일한 것입니다.
III. 참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신을 나타내려고 하십니다(27b-29절).
A.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에게 자신을 나태내신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입니다.
누군가는 "우리가 하루를 예수님과 함께 살게 된다면, 우리는 매일매일 그분과 함께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라고 썼습니다. 그리스도의 다른 이름인 임마누엘은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인간은 드라마틱하게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멀리하도록 설계되었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원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기를 진정으로 원한다면 내 삶은 평범한 삶에서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그 결과는 우리가 노력한 것에 비해 상상을 초월할 것입니다." (트로비쉬, 성경 일러스트레이터 3: CD-Rom)
B. 우리가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해 다른 (믿지 않는) 사람들과의 공통점을 찾아야 합니다.
(28-29절).
포스트모던 세계의 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에게 체험은 어떤 신학적 주장만큼이나 설득력이 있습니다. 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이 가진 신념에 호소해 그들을 설득합니다. 바울의 다음 말을 주목하세요: “여러분의 시인 가운데 몇몇은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다 하고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습니다.” (행 17:28).
바울은 지식인뿐만 아니라 회의론자들과도 경험적 차원의 사실을 연관시킵니다.
이것이 오순절 교회 메시지가 대부분의 정통 교회의 메시지보다 더 적절한 것으로 간주되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재키 데이비드 존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오순절주의는 새로운 지배적인 세계관의 결과라기보다는 하나의 원동력입니다. 따라서 오순절주의는 포스트모던 시대를 형성하는 주류의 일부로 보아야 합니다.
첫째, 오순절주의는 실제로 특정 세계관 및/또는 비전을 대표할 수 있지만 과학적 패러다임의 산물은 분명 아닙니다. 오순절 운동은 전 세계의 다양한 민족들 사이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습니다. 다른 시스템의 실패에 대한 그럴듯한 대응책으로 오순절주의를 구성한 이론가는 없었습니다. 사실 오순절주의는 전 세계, 특히 학계를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초기 참여자들조차도 오순절주의에 놀랐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둘째, 오순절주의가 19세기 후반의 성결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 철저히 입증되었습니다.
오순절 운동이 반문화운동에서 출현하고 표출된 것은 분명합니다. 성결 부흥운동과 초기 오순절 운동의 인물들은 지배적인 문화적 비전의 외부자들이었습니다..
오순절 운동과 그 운동에서 비롯된 성결 운동은 존 웨슬리의 통찰에 기반한 대안적 세계관을 반영합니다. 웨슬리안과 오순절주의자들은 성경, 교회 전통, 이성, 경험을 신앙의 권위 있는 지침으로 삼고, 하나님만이 신앙의 기초가 되십니다." (존스 85-86장)
IV. 참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그분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30-33절).
A. 우리 인간들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제안은 그분 자신과의 만남입니다(30절).
안타깝게도 로이드 존 오길비는 "미국의 제도 교회는 살아 계시고 거룩하시며 용서하시고 은혜로우신 하나님과의 체험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종교인들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한 것이 옳았습니다. (오길비, 성경 일러스트레이터 3: CD-Rom)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의 핵심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빚으시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이 만남을 바탕으로 우리는 개인 삶의 다양한 측면을 총체적인 범주로 정리하여 이해하려고 노력합니다.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죄"와 "은혜", "소외"와 "화해", "무력함"과 "신성한 능력", "잃어버린 것"과 "지금 구원받고 있음"이 포함됩니다. 종교적 경험을 통해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면에서 교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경계 170) 간단히 말해,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개인적 경험이 없다면 교리는 죽은 것입니다.
B.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을 아는 것의 가치를 드러내야 합니다.
결론 우리가 이 세대를 이해하고 섬기고자 한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이 우리의 출발점입니다. 왜냐하면우리가 이 세대를 이해하고 섬기고자 한다면 우리의 출발점은 포스트모더니즘을 이해하고 올바르게 대처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이 세대와 다음 세대가 진리를 바라보고 대하는 방식이 우리가 이제까지 사람들과 소통하고 추론하던 방식을 바꿀 것이기 때문입니다.
설교와 가르침의 낡은 스타일은 변화되어야 하며, “오래되고 오래된 이야기”를 전달하는 새로운 접근 방식으로 대체되어야 합니다. (자프렌 7)
방법은 바뀌겠지만 메시지나 목표는 바뀌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분과 교제하고, 그분을 섬기는 것, 그것이 우리의 목표이자 메시지입니다. 찾으십시오. "우리 몸에 필요한 공기는 우리를 사방에서 감싸고 있습니다. 공기 자체가 우리 몸에 들어가고 싶어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압력을 가합니다. 숨을 멈추는 것보다 숨을 쉬는 것이 더 어려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호흡만 하면 공기가 즉시 폐로 들어가 온몸에 생명을 주는 기능을 하게 됩니다.
우리 영혼이 필요로 하는 영적 공기도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은 풍성한 은혜로 모든 면에서 우리 주위를 에워싸고 계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마음을 여는 것뿐입니다." (Hallesby, 성경 삽화가 3: CD-Rom).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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