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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징 여행9 - 밍파꽝창에서 난징남역을 거쳐 공항선에 타니 일본인들을 만나다!(끝)
중국 여행 10일째인 10월 28일 난징(남경) 남역 에서 지하철로 한 정거장 거리 인
玉兰路(옥란로) 99号 상가 아파트 인 밍파상예꽝창(明发商业广场) 1동에 개인
이 운영하는 숙소 3,096호 是家公寓(시가공우) Shijia Apartment 에서 일어납니다.
숙소에서 라면을 끓여서 어제 밤에 먹다 남은 식은 밥과 함께 아침을 먹습니다.
그러고는 아침 8시에 배낭을 메고 상가 아파트를 나오는데... 아직 귀국
비행기 시간 이 남은지라 거대한 규모의 마트 영휘초시(永輝超市) 에 들릅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이런 거대한 규모의 마트 는 아침 10시 가 넘어야 문을 여는지라 걱정했더니
여긴 아침 7시 반 부터 밤 11시 까지 영업을 한다니.... 직원들 생각 은 전혀 안하나 보네요?
여름철에 밀라노의 명품거리 몬테 나폴레오네 에 갔더니 오후 7시인데 벌써 문을 닫았더라는?
어젯 밤에 2명이 두끼 먹을 자포니카 쌀 이 우리나라 돈으로 불과 40원 이고 삼겹살 2인분이
3천원 남짓했으니 물가가 얼마나 싼지 알만합니다. 해서 2층 마트 에 들어가서는 마눌이
귀국 선물 을 준비 하는데....석이 버섯 과 건포도며 과자 를 양껏 구입했는데도 푼돈 수준 이라?
그런데 계산대 에 도착해 비닐 봉투 를 하나 달라고 하니.... 직원 아주머니가 줄수 없다며
중국말로 거칠게 말하네요? 아니??? 돈 주면 될것 아니요? 그래도 서로 말이 통하지
않으니 언성이 높아지자 마눌은 비닐 봉투는 포기 하고 그냥 물건을 손에 들고 가잡니다?
아니....... 비닐 봉투 값이 몇푼이나 한다고 손에 들고 가냐? 부피도 많은데? 하지만 시간이 지체
되다 보니 우리 뒤에 줄 선 사람 보기가 민망해 집니다. 옛날에 파리 에서도 봉투값
몇십원 잔돈 이 없어서 둘이서 물건을 양팔에 안고 다니느라 고생했던 생각이 새삼스레 떠오르네요?
해서 혹시나 싶어.... 잔돈 을 내미니 그제서야 받고서 비닐 봉투 를 내주는데 그 값이야 껌값 보다도
못한 수준이라.....그러니까 저 직원 아줌마 는 내가 "공짜로" 비닐봉투 를 달라고 오해 했던
모양 입니다? 우리가 산 엄청 많은 물건은 모두 143元 이니..... 그럼 2만 8천원 정도 되는가 보네요?
그러고는 밖으로 나와 배낭을 메고는 걸어서 디테(지하철) 밍파꽝창 (明发广场) 역에
도착해.... 지하철 3호선 을 타고는 바로 다음 정거장 난징남역 에서 내려서 기차역
인 南京南火車站(남경남화차참) 지하에 있는 난징난짠 南京南站(남경남첨)으로 갑니다.
난징난짠 南京南站 에서 다시 난징 공항 으로 가는 "지하철 공항선 인 S1" 에 올라
타는데..... 지하철 디테 地铁(지철) S1 지창센 机场缐(기장선) 은 요금이 6元
으로 배차 시간은 40분 간격이며 공항 까지는 7정거장에 35분 가량 걸린다고 합니다.
마침 지하철 에는 일본인 관광객 들이 몇사람 탔는데 일본에서는 지하철에서 그리도 조용조용 하게
마치 소곤거리 듯 말하더니만.... 긴자에서 스시를 먹자면 가게 밖에서 20분 줄을 서고 안으로
들어 가서도 긴 의자에 앉아 30분 을 기다려야 하는데.... 입 모양을 보니 두 여자분이 대화 를
하는데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더라는? 하지만 여긴 외국 인 중국 이라 그런지 목소리가 매우 큽니다!
중국 사람들이 시끄럽다고, 또 여긴 중국이라고 일본인들이 크게 웃으며 떠드는 모습에 눈쌀이
찌푸려지면서 생각해 보니...... 일본은 오래전 부터 이민 을 내보냈으니 남미 잉카제국의
나라인 페루 리마에서 1938년에 태어난 후지모리 는 1990년에 페루의 대통령 에 까지 오릅니다.
하지만 2000년 후지모리 대통령의 측근 몬테시노 가 야당의원을 돈으로 매수 하는 비디오테이프가
공개 되고 시민들의 시위가 이어지자 일본으로 달아났다가 몇년 후인 2005년 페루에 입국
하려다가 체포 되었습니다. 그런데 몇년 전에 그의 딸 게이코 후지모리 가 35% 라는 압도적
(2위 후보는 17%) 인 지지를 얻고 있었으니..... 차기 페루 대통령 에 유력하다고 전망 되었습니다?
게이코 후지모리는 1994년 부모가 이혼하자 퍼스트 레이디 가 되어 2000년 까지 대통령의 동반자
로 활동했다는데..... 당선되어도 아버지를 사면하는 일은 없을거라고 말했지요? 하지만
결선투표 에서 상대방 후보 가 민족 감정을 자극 하는 바람에 0.2% 매우 근소한 차로 낙선 했습니다.
그런데 일본인 상인 들은 임진왜란 이전 에 필리핀과 베트남 그리고 태국과 말레이지아 에 진출했으니
나쨩과 호이안 그리고 아유타야와 말래카 등에 "일본인촌" 을 건설했습니다. 예수교 선교사
프란시스코 사비에르 는 인도의 고아에서 말레이지아 말래카 에 도착해 일본인촌에 거주하던
안지로 를 만나 세례를 준 후 1548년 안지로의 안내로 규슈 가고시마에 상륙해 천주교를 포교합니다.
하지만 동남아에 저팬타운을 건설한 일본인들 보다 먼저 동남아 로 진출한 것은 중국인 들입니다?
중국인들은 송(宋) 나라가 남양(南洋)무역 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던 11세기 에 동남아로 진출
했는데 송(宋) 왕조 는 남양(南洋) 무역 을 국가의 수입원 으로 중요시 하고 있던 원(元) 나라
에 의하여 답습되었고... 13세기 이후 동남아로 진출하는 중국 상인의 수도 점차 증가하였습니다.
송나라 시대에 대거 동남아로 진출해 무역을 했던 중국인들이 귀국하지 않고 동남아에
정착 하게 된 계기는 14세기 중엽 명(明) 왕조 가 동남아와의 무역관계를
조공무역 에만 국한시키고 일체의 사무역을 금하는 해금(海禁) 정책 을 취한 때문입니다.
이에 동남아에서 활동하던 중국인들 이 돌아오지 않고 동남아에 정착하면서...... 수가
급격히 증가하였는데 명(明) 정부는 이후 쇄국정책 으로 동남아 접촉이 줄었습니다.
중국인의 유입이 없던 이 기간 동안 동남아 에서 활동하던 화상(華商) 들의 대부분이 현지 토착사회로
동화 되었는데.... 16세기말에 명나라는 다시 해외무역을 부활 시켜 수입을 증대시키고자 했습니다.
이로 인해 중국 상인들 의 남양(南洋) 진출 이 다시 활성화 되었는데... 이는 당시
유럽인들의 동남아 진출 에 따른 새로운 변화에 부응한 것 이라고 여겨집니다.
17세기초 동남아 시장 에 뛰어든 유럽인들 은 중개인으로써 중국인 이 필요했고,
이에 따라 동남아에서 활동하는 중국인의 숫자가 더욱 증가 하게 됩니다.
그후 중국의 혼란으로 피난 오거나 망명하는 중국인 이 증대되었는데... 이들은 필리핀,
베트남, 말레이, 인도네시아, 태국등 동남아 각국 경제의 70% 이상 을 장악합니다.
그중에 싱가폴 은 말레이 반도 남단에 위치한 섬인데 1819년 영국인 래플즈 가 조흐르왕국과
상관 을 설치하기로 협의해 무역거점으로 식민지 가 되었으며 1959년에는 자치령 이 됩니다.
1963년 말레이연방· 사바· 사라와크 와 함께 “말레이시아” 를 결성하였으나 1965년 8월에 인종적·
경제적 대립 으로 분리 독립 하였으며 철교를 통해 말레이시아와 연결 됩니다. 말레이시아 입장
에서도 민주주의 를 해야 하는데 화교 숫자가 많으니 정치권력 문제도 있고 해서 갈라선 것입니다?
현재 싱가폴의 실권자는 중국인의 후예 인 리시엔룽 총리인데 리콴유 전 총리의 아들
로 2004년 8월에 취임하였으니....... 중국인이 대를 이어 통치 하고 있는 것이지요?
중국과 일본의 상인들 이 임진왜란 이전에 동남아로 진출해 무역에 종사할 때..... 조선 상인들
은 단 한발자국도 한반도를 벗어나지 못했으니....... 사신단을 따라 북경에 가거나
부산 왜관 에 찾아온 일본인과 거래 했을뿐으로 바다에 한척의 무역선도 띄우지 못했습니다.
조선 상인들 은 뇌물 을 주고 중국 에 가는 사신단 에 끼여 짐을 등에 메고 만주벌판을 걸어서
북경 에 도착해서는 사신단 숙소로 찾아온 중국인 들과 제한된 무역만 했을 뿐이라....
조선 500년간 탐험가 는 물론이고 배를 타고 해외로 나간 조선 상인 이 단 한명도 없었습니다!
효의 나라 조선은 身體髮膚受之父母(신체발부수지부모) 라고 해서 죽거나 부상을 당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머리카락 하나라도 손상해 부모님 걱정을 끼치는걸 불효 로 알았으니, 무역선을 타고
해외로 나가는 저런 모험 자체를 두려워 해서 조석으로 부모님을 봉양하는걸 미덕 으로 삼았습니다!
한국은 베트남전 때인 1970년경 정주영과 김우중 이 해외로 진출한 이래 쌍용건설이 시공한 싱가포르
래플즈시티 는 동양 최대의 복합건물로 싱가포르의 상징적인 건물이 되고 있으며, 현대건설이
시공한 마리나 센터와 창이공항 건설이 유명한데..... 삼성건설 은 2007년 두바이에 160층 830
미터로 세계 최고 건물인 부르즈 칼리파 를 완공했으니 2010년에 124층 전망대에 오른 기억이 납니다.
2012년 MB 가 독도를 방문하고 일왕(천황) 사과 발언 후 일본의 보통 사람들 이 넌더리를 내고 돌아
서는 바람에 그 대단하던 "한류의 기세" 가 죽어버렸는데...... 2005년에 "한국인에게 친근감을
느낀다" 는 51% 이던게 2011년에는 한류의 영향으로 62% 로 뛰어 올랐지만 MB 이후 39% 로 곤두
박질 쳤으며 그후 30%로 떨어졌는데, 한국인이 일본을 좋아한다는 비율 15% 보다는 배 정도는 됩니다.
번성하던 도쿄 신오꾸보 코리아타운 이 급전직하 쇠락하게 되고..... 서울의 명동과 남대문시장 이며
남이섬과 춘천을 성지순례 하듯 찾던 일본인들의 발걸음이 줄어 들었습니다. 한국을 찾는
일본인들이 줄어들고 일본에 수출도 감소했지만, 일본 현지에서 만큼은 2차 한류에 이어 젊은
마니아들이 트와이스와 BTS 등 한국가수에 열광해 3차 한류 가 일어나 한류가 부활 하니 다행입니다!
일본에 대한 수출마저 감소 하는 이 어려운 절체절명의 시기 에 화이트 엔젤 처럼 한국
에 나타난 것이 바로 중국인 관광객 인 유커(遊客 유객) 들 입니다. 중국의
건강보조식품 업체 아오란 그룹의 직원 6천명 이 158대의 비행기 에 나누어 타고
인천을 방문해 그중에 4,500명 이 월미도 문화의 거리에서 "치맥 파티" 를 열었습니다.
“자지피주멍(치맥의 꿈)! 별에서 온 그대 주인공 천송이(전지현) 처럼.....
치맥 (치킨과 맥주) 을 먹을 거예요.” 여기저기서 환호성 이 터졌습니다.
인천 송도의 석산(石山) 은 과거에는 채석장 이었는데 “별 그대” 의 주인공 도민준
(김수현 분) 이 절벽으로 떨어질 위기에 처한 천송이(전지현 분) 를 구출한 곳 이라?
이날 행사에 동원된 캔 맥주 를 탑으로 쌓으면 높이가 765미터 로
강화도 마니산(469미터) 높이의 1.6배 에 달한다고 하네요?
유커는 그전에 프랑스 니스에서 텐스그룹 직원 6,500명 이 찾은게 기네스 기록 이라..... 기록을
깨기 위해 7천명 이 올 예정이었지만 인천의 숙박시설이 부족해서 규모를 줄였다고 합니다.
2011년에 한국을 찾은 유커는 전체의 22% 인 222만명 이었지만... 2015년에는 45% 인 598 만명으로
폭증 했는데 당시 일본인 관광객 감소와 맞물린 것으로 이후 사드 배치 문제로 중국인 마저 오지않네요?
콜럼부스 이래 바스코다가마 가 인도 항로 를 발견하고 마젤란 이 세계 일주를
할때 유럽은 30미터 짜리 배 4~5척에 선원도 300명 에 불과했지만.....
그보다 수십년 전 에 중국 명나라 정화의 대함대 는 120미터에 이르는 거함 을 중심으로 60척에
선원 2만명의 대함대 가 인도양을 돌아 이란과 아프리카 까지 이르렀던 것이지요?
오늘날 중국의 시진핑 주석 이 육상과 해상 실크로드를 복원 하자는 중국몽 을 외치는데.......
현대의 저 유커들의 무리 는 마치 정화의 대함대 를 연상케 하네요? 그런데.... 미국이 사드
를 한국에 배치 하는 바람에 중국이 반발해서는 한한령 을 내리고 중국인들의
한국 방문 단체여행을 금지 하며..... 한류 연예인들에 제약 을 가하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첫댓글 일본인들도 중국인들이 동남아에 먼저 진출햇군요.
세계 어딜가든 중국인이 없는곳이 없는것 같습니다.
우리나라도 좀 일찍 진출햇으면 좋았을텐데....
가게도 그렇게 일찍열고 오래까지 하고 중국인들이 부지런하기도 합니다.
중국인들은 인구가 폭증하자
동남아등 해외로 진출했고....
일본인들도 임진왜란 이전부터
무역선을 타고 돈남아로 진출해 저팬타운을....
조선인들은 5백년 동안 단 한척의 무역선도 띄우지 못했다는......
아 그렇군요. 우리나라도 저들처럼 좀 일찍 문호을 개방을 햇더라면.....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