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음악의 대모 이순희
“재능 있는 연주자들에 멍석 깔아줘야죠”
세계적으로 알려진 백건우, 강동석, 조영창, 김대진 등 한인 클래식 연주자 중에 한국음악재단 이순희 회장의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다. 1984년 창단된 이 재단을 통해 뉴욕 데뷔 무대를 가진 연주자가 60여명이 넘는다. 한인 클래식계의 대모 이순희 회장을 만나본다.
▲발품 팔며 무대 마련해
클래식을 전공하는 한인 연주자들은 한국음악재단 이순희 회장을 보면 우선 반갑다. 그리고 그 앞에서 어렵기도 하다. 제아무리 날고 기는 뛰어난 연주 실력을 지닌 자라도 그 솜씨를 발휘할 무대가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차세대 음악 유망주들을 보면 반갑고 기쁘기는 이순희 회장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이 옥석을 다듬고 다이아몬드처럼 빛나게 가공하여 관객들에게 예술에의 감동을 선사할 까 해서이다. “3월 17일 유럽에서 인정받는 바이얼리니스트 김소옥 카네기홀 독주회(한국일보 후원)를 시작으로 5월 돌튼 볼드윈 매스터 클래스 등 다양한 행사가 있다. 특히 요즘 1.5세와 2세 이사진과 스태프를 영입하려고 사람들을 만나고 다닌다.”고 근황을 전하는 이순희 회장.
한국음악재단이 주최하는 연주회의 장소 예약, 티켓 관리, 홍보 등을 모두 직접 하고 있다. 워낙 오래 해서 이 모든 것에 선수가 되었지만 여기저기 발품을 부지런히 팔다보면 만원 객석이 그 보답으로 돌아온다. ‘미니멈 파워 갖고 맥시멈 효과를 본다.’는 그가 무대를 마련해 준 한인 연주자들은 수없이 많다. 세계 음악계에서 인정받는 바이얼리니스트 강동석, 데이빗 김(필라 오케스트라 악장), 김진(메네스 음대 교수), 주디 강, 김영욱, 첼리스트 조영창, 양승원, 피아니스트 백건우, 김대진(한국예술종합학교), 첼리스트 송영훈, 비올리스트 용재 오닐 등등. 누구나 알만한 연주자들이 그의 손을 거쳐 무대에 섰다.
▲문학, 언어, 역사 알아야
“피아니스트 엠마누엘 맥스, 게릭 올슨이 현재 미국에서 일류급으로 활약하게 된 것은 그들의 실력 외에 유대인들의 막강한 후원이 따랐던 덕분이다. 당시 실력이 더 좋았던 백건우는 그런 뒷받침이 없어 유럽무대에 진출했다. 유대인들이 후배를 밀어주는 것에 자극 받아 1984년 음악재단을 결성하게 되었다”고 창단 동기를 말한다. 당시 재단 이사장은 김마태 전문의, 이사는 존 배 부부를 중심으로 뜻있는 몇 명이 모여 결성되었다.
서울대학교를 1년간 다닌 후 2학년 때인 1961년 미국으로 유학 온 그는 오클라호마 대학, 뉴욕 줄리아드 대학, 대학원에서 성악을 전공했다. 세계적인 성악가 제랄드 수제, 엘리 아멜링과 돌튼 볼드윈에게 사사했다. “뉴욕에 온 한인 유학생들은 오페라 아리아들은 잘 해도 예술 가곡부문은 좀 떨어진다. 돌튼 볼드윈 선생이 매년 프랑스에서 뉴욕으로 와 매스터 클래스를 하고 있다. 또 음악을 아무리 잘해도 그 한 가지만 알아서는 안된다. 문학, 언어, 역사, 영화, 미술, 다방면으로 알아야 무대에서 깊은 소리가 나온다.”며 조언한다.
“유학 와서 외로울 틈도 없이 공부했다. 당시 백건우씨가 몇 년 후배인데 한국유학생들이 어울려 영화도 보고 전시회도 가면서 열심히 뉴욕의 문화를 보고 배웠다. 지금도 저녁에 음악회가 없는 날은 모마 영화관에서 영화를 볼 때도 있다”고 한다.
▲한인음악가 소개, 보람 있어
차세대 음악 유망주 발굴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잘한다는 소문이나 추천을 받으면 먼저 연주 CD를 보고 어느 정도 수준이 되면 연주회에 직접 가서 여러 번 들어보고서 결정한다. 흥미 있는 사람은 언제라도 KMF로 연락하면 된다.” 그는 솔로 무대를 열어주는 틈틈이 1990년부터 1997년까지 평창 서머 페스티벌에 줄리아드와 메트의 좋은 선생들과 함께 가서 각 나라에서 온 학생들을 가르쳤고 1995년 세종 솔로이스츠 창단 데뷔, 수원시향, 코리언 심포니 등 6개 오케스트라 뉴욕 데뷔, 2006년 UN음악회 개최로 한국 음악가들을 세계에 알렸다.
2007년 한국 젊은 음악도에게 뉴욕 데뷔 무대를 제공한 공로로 한국문화관광부가 수여하는 화관 문화 훈장을 받기도 했다. 늘 이렇게 사람들을 무대에 세워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해주는 이순희 회장 역시 성악을 전공한 연주자인데 때로 후회하거나 서운한 적은 없었냐고 하자 대뜸 ‘오, 노우’라는 대답이 나온다.
“나도 연주활동을 계속 하면서 도와주었기 때문에 그런 것 없죠”
71년 그의 뉴욕 데뷔 리사이틀을 뉴욕타임스는 ‘예술가곡 해석에 탁월한 음악성이 있다’고 평했고 88년 출반한 프랑스 예술가곡 CD는 타워 레코드에서 인기리에 팔려 나갔다. 해외 연주 틈틈이 91년과 93년 한국에서 이순희·돌튼 볼드윈 초청 콘서트, 2003년, 2007년 카네기홀 와일 홀에서 프랑스 예술가곡을 주로 부른 독창회에서 호평을 받았다.
한국인 최초로 예술 가곡을 정식으로 공부하고 돌튼 볼드윈에게 1년에 1~2번 개인 코치를 25년째 받고 있는 한인은 그가 유일하다. “네 목소리는 프렌치 노래가 맞아.”하고 말한 제랄드 수제 스승의 가르침대로 프랑스 가곡을 주로, 독일을 비롯한 9개곡의 예술가곡을 노래한다. 이순희 회장은 9월부터 다음해 5월까지 이어지는 시즌이 끝나면 여름동안 한국에 간다. 각자 일 하느라고 바쁜 남편이 있는 대구에서 석달간 머무르며 휴식을 취하고 가을 시즌 시작 전에 다시 뉴욕으로 오기를 수십 년째다.
▲명연주자 콘서트 재개 소망해
“작년 10월8일 정상미 피아노 트리오, 12월17일 문화원 할러데이 콘서트, 올 2월16일 진은숙 공연 주선 등 이번 시즌에도 정신없이 바빴다.”는 이순희 회장. 앨리스 털리홀 앞으로 그가 지나는 것을 본 극장 관계자가 ‘미세스 리’하고 목청껏 불러 세웠다. “6월1, 2일이 비었다”면서 무대를 쓰라고 할 정도로 그는 뉴욕 클래식계 유명인사다. “앨리스 털리홀 공사로 2007년부터 중단된 KMF 명연주자 콘서트를 재개하고 싶다. 4년간 차세대 젊은 음악인들을 무대에 세워 뉴욕관객들에게 알렸는데 반응이 좋았다. 지난 몇 년 전부터는 불경기라 무대 마련이 쉽지 않다. 실력 있는 신인들이 무대에 쓰려면 정부 차원이나 대기업의 후원이 절실하다.”고 바람을 말한다.
어깨 양쪽에 무게를 나눠 싣고자 끈 달린 가방 두 개를 양손에 든 채 전철을 타고 뉴욕 곳곳을 오늘도 종종 거리며 누비고 다니는 이순희 회장, “다들 고마워하고, 보람 있고, 이 일이 재미있다” 며 자신의 일에 대한 애정을 표시한다. 개인적으로 “프랑스 에디션에서 나온 연가곡 3권 시리즈가 있는데 한권에 곡 30개, 총 90곡이 수록된 것을 모두 공부하면서 연주도 하고 싶다.”며 나이를 먹지 않는 영원한 청춘을 보여준다.
- 2011년 3월 17일 한국일보 기사에서 발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