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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저널 10월호] 날짜 : 2013-10-03 (목) 16:32
“하늘은 한민족을 위해 『환단고기』를 내어 주셨다! 한민족의 장엄한 9천 년 역사 가운데 잃어버렸던 7천 년이 비로소 되살아났다.” 안경전安耕田 증산도 종도사는 일갈한다. 한민족사의 뿌리는 무엇인가. 잃어버린 7천 년 역사는 또한 어떤 것인가.
“일본 헌병들이 『환단고기』를 펴낸 운초 선생의 사지를 잘라 압록강에…”
- 목숨 걸고 지켜온 한민족 9천 년의 정통 유일 역사서 『환단고기』
●대담 박정하 ■ ■ 본지와 대담하는 안경전 종도사
“독립운동가인 운초 계연수 선생은 우리 역사와 옛 문헌에 관심이 많았던 분입니다. 그가 여러 집안에서 소장되어온 신라, 고려조와 조선조 때 다섯 석학이 쓴 다섯 권의 옛 사서들을 한 권으로 묶어 펴낸 것이 바로 『환단고기』입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에 강제 합병된 이듬해, 1911년의 일이지요. 운초 선생은 그로부터 9년 뒤 일제 경찰에 의해 처형, 아니 무자비하게 살해당합니다.”
1920년 만주 관전현, 압록강 부근의 한 후미진 골짜기. 조선인의 사설학교 배달의숙倍達義塾에 일본 헌병대가 들이닥쳤다. 이 학교는 독립운동가인 석주 이상룡 선생과 송암 오동진 장군이 출연, 설립한 뒤 일대 독립군 및 그 자녀들에게 조선의 역사와 혼을 가르쳐오던 터였다. 일본 헌병들은 그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운초를 체포하고 운초와 여러 교사들이 수집하고 연구한 책과 저술, 자료 등 3천여 점을 강탈해 헌병대로 실어갔다. 안경전 종도사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헌병대가 강탈한 온갖 자료들 가운데는 당연히『환단고기』도 포함돼 있었을 것입니다. 일본 헌병들은 운초가 『환단고기』를 펴낸 바로 그 인물인 것을 알고는 온갖 고문을 가하고는 곧 처형해 버렸어요. 그것도 사지를 다 잘라서 압록강에 내다버렸습니다. 너희 조선 놈들 엉뚱한 생각을 하면 어떻게 되는지 봐라, 그랬던 것이죠. 일제는 혹시라도 한국과 중국과 일본은 물론이고 인류의 시원역사가 되는 우리의 뿌리역사가 드러날까 겁먹은 나머지 그런 만행을 저지른 것입니다. 그렇게 토막토막 잘려진 선생의 시신을 우리 동포들이 눈물과 비탄 속에 한 점 한 점 수습을 했습니다. 목숨 걸고 지켜온우리 역사서 ― 『환단고기』압록강 가에서 사람들이 운초 시신을 수습하던 장면을 한 소년이 눈물을 흘리며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열네 살, 그의 제자인 재야 역사학자로 활동하신 한암당 이유립 선생입니다.
이유립 선생은 평안북도 삭주의 유지이자 독립운동가인 해학 이기의 제자 이관집의 아들이고 열세 살
부터 배달의숙에서 운초에게 배웠어요. 물론 운초와 이관집 선생은 일찍부터 친분이 있었고요. 운초와 그처럼 깊은 인연을 가졌던 이유립은 스승의 장례 아닌 장례를 목격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 어렵사리 보존된 『환단고기』 원본 한 부를 품에 안고 1948년에 월남했어요. 그리고는 우리에게 『환단고기』의 생생하고 고귀한 내용을 전해 주었습니다. 오로지 우리 역사를 지키기 위해 자기 목숨까지 다 내놓았던 이러한 분들의 위대한 희생과 노력 덕분에 오늘 우리가 『환단고기』를 만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한국사를 대입 수능 필수과목으로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논란을 벌이더니, 지금은 국가 검정檢定교과서 8종의 현대사 부분을 놓고 우편향이다 좌편향이다, 이념 대결이 벌어지고 있다.
안경전 종도사는 “9천 년 한민족사 가운데 장대한 7천 년 뿌리가 뭉텅 잘려나갔는데도 역사학자나 제도권 인사란 사람들은 그것을 도외시한 채 그저 최근세사를, 그것도 좌우 어느 입맛대로 쓸 거냐 하는 정파 이해를 놓고 티격태격 싸운다.”고 개탄하면서, “그 또한 필요한 일이지만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한민족 정신의 근원 바탕이요 기틀인, 뿌리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지난 100년이 아닌, 통째로 잃어버린 7천 년의 뿌리역사부터 엄정하게 다시 정립해야 한다”고 일갈한다.
한민족사의 뿌리는 무엇인가. 잃어버린 7천 년 역사의 내용은 또 무엇이고, 그 답은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안경전 종도사와의 세 번째 역사 이야기―『환단고기』를 통해 그 답을 찾아본다.
◎ ◎『환단고기』는 언제, 어떻게 쓰인 책인가요?
『환단고기』는 시대를 달리하는 다섯 석학의 글을 모은 것입니다. “시대적으로 가장 앞선 것은 신라 때의 승려 안함로安含老가 쓴 『삼성기』입니다. 안함로는 안홍 법사, 안함 법사 등으로도 불렸던 인물인데 고려 때의 『해동고승전』에 나오는 인물입니다. 그 책에 의하면 안함로는 사물에 통달하고 지혜가 밝아 세속의 속박을 벗어나 왕래와 머무름을 뜻대로 하였다고 합니다. 『삼국유사』에는 그가 『동도성립기』라는 책을 지었다는 것과 이웃 나라들의 침입을 모면하기 위해서는 경주의 대궐 남쪽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울 것을 건의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앞날을 내다보는 문이 고국으로 귀국할 해 등을 모두 정확히 예견하
여 명성이 높았던 승려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불법만이 아니라 우리 고유의 사상과 역사에도 해박한, 유불선을 초월한 당대 최고의 도승이었습니다. 안함로의 『삼성기』와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으나 약간 차이가 있는 책이 원동중의 『삼성기』입니다.
원동중의 『삼성기』에서는 환국이 12개 나라로 이루어져 있었다는 사실, 치우천황과 배달국의 18세 환웅들의 역년 기록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귀중한 기록을 남긴 원동중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조선 전기 이전에 살았던 인물이라는 것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세조실록』에 실린 금서목록에 그의 이름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고려 때 사람이 아닌가 싶지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세 번째 책은 『단군세기』로 이는 47세에 이르는 단군조선의 연대기입니다. 『삼국유사』에는 단군이 혼자서 1,500년을 통치한 전설적 인물처럼 그려져 있지만, 『단군세기』에는 달리 47명의 단군들이 대를 다스린 2,096년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들 47명의 단군들이 모두 같은 왕조의 사람들은 아닙니다.
일부는 백성들의 추대를 받거나 쿠데타로 집권한 사람들이지요. 『삼국유사』보다는 훨씬 더 사실에 충실한 역사서인 『단군세기』는 공민왕 12년(1363)에 행촌 이암이 썼다고 저자와 저술연도가 분명히 밝혀져 있는 책입니다. 행촌 이암은 고려 말의 고위 관료이자 학자로서 재상을 역임한 인물입니다. 그는 홍건적의 난이 끝난 후 관직을 물러나 강화도로 들어가 자신이 그토록 남기고 싶어 했던 우리의 상고사를 썼던 것입니다. 네 번째 책은 『북부여기』로 단군조선을 계승한 북부여의 역사서입니다.
이 책을 찬술한 이는 고려 말, 조선 초의 인물인 복애거사 범장입니다. 그도 이암처럼 고려 조정에서 관직생활을 했는데 벼슬이 간의대부까지 올라갔으나 고려의 국운이 다하자 벼슬에서 물러나 두문동에 은거하였습니다. 조선의 태조와 태종 임금이 여러 차례 벼슬을 권했으나 출사하지 않고 고향인 광주로 내려와 학문에 몰두했던 인물입니다. 범장은 벼슬하기 전 젊은 시절에 행촌 이암, 이명과 함께 소전거사라는 인물로부터 우리 역사기록이 담겨 있는 고서를 전수받았는
데 아마 이러한 고서들이 그가 「북부여사」를 남기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북부여기』는 해모수의 북부여 건국으로부터 고주몽의 고구려 건국까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고, 형식이 『단군세기』와 유사합니다. 다섯 번째 책은 『태백일사』로 조선 중종 때의 관리였던 일십당 이맥이능력이 있어서 천리 밖에서 싸우는 신라 군사가 전쟁에 패할 일, 삼국통일이 이뤄질 해, 왕자 김인편찬한 책입니다. 이맥은 고성 이씨로서 행촌 이암의 현손이었습니다. 『환단고기』를 우리에게 전수해
준 이유립은 이맥의 직계 후손입니다. 『태백일사』를 소장하고 있던 해학 이기 선생도 고성 이씨로서 행
촌 이암의 후손이었습니다. 고성 이씨는 이런 면에서 참으로 우리 역사에 큰 공헌을 한 것입니다. 이맥은 『태백일사』에 붙인 발문에서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를 간단히 적어놓았습니다. 연산군 때 괴산으로 귀양을 갔는데 그곳에서 무료한 귀양살이를 하던 중에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던 고서들과 또 자신이 찬수관으로서 있을 때 내각에 비장하고 있던 옛 사서들을 읽고 쓴 책이 『태백일사』였습니다. 『태백일사』에는 그가 여러 사서들에서 본 내용들을 그대로 전재한 부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귀중한 상고사의 기록들이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데 『환단시대의 옛 경전인 「천부경」, 「삼일신고」 등의 본문이 그 가운데 실려 있고 또 고조선의 일부였던 마한과 번한 통치자들의 명단과 역년이 실려 있습니다. 이맥은 자신이 쓴 책이 당시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용납하지 못할 내용들을 담고 있기 때문에 세상에 내놓기 힘들다는 걸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책 이름을 ‘태백의 숨은 이야기’라는 뜻으로 ‘태백일사’라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환단고기』는 신라 진평왕 때부터 16세기 전반의 조선 중종 때까지 근 천년에 걸쳐 당대의 뛰어난 지식인들이 우리의 주체적 사관에 입각해서 쓴 역사기록들을 모아놓은 책입니다. 1911년에 독립운동가면서 우리 역사와 고서에 관심이 많았던 운초 계연수 선생이 이 기록들을 한권의 책으로 모아 간행하였습니다.”
◎ ◎대부분 책 제목을 보면 그 뜻이 금방 와 닿습니다. 그런데 『환단고기』는 뜻도 모르겠고 해석도 쉽지
않습니다. 어떤 뜻을 담고 있습니까.
“먼저 ‘환桓’은 이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는 하늘의 광명, 즉 천광명天光明을 뜻합니다. ‘환’은 지금도 자주 쓰는 말로서, “달빛이 환하다”, “대낮같이 환하다”라고 할 때의 ‘환’이 바로 이 천광명의 환입니다. ‘단檀’은 박달나무 단 자인데, 여기서 박달은 ‘밝은 땅’이란 뜻입니다. 달은 양달, 응달에서 알 수 있듯 땅을 가리키고요. 단은 곧 땅의 광명, 지광명地光明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환단은 천지의 광명입니다. 그리고 ‘고기古記’는 오래된 옛 기록이란 뜻인데, 『환단고기』 범례를 보면 고기의 인용이 『삼국유사』로부터 시작됐으나 지금은 고기를 볼 수 없어 『삼성기』, 『단군세기』, 『북부여기』, 『단군세기』를 합본하여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환단고기』라 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고기는 한민족사를 우리 손으로 기록한 옛 역사책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역사 문화의 핵심이란 광명사관이기에 ‘환단고기’라 한 것입니다.
『환단고기』란 곧 천지의 광명을 체험하며 살았던 태곳적 한민족과 인류의 삶을 기록한 옛 역사이야기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또 이 하늘, 땅과 더불어 우주를 구성하는 인간의 광명, 인광명人光明을 따로 일러 ‘한’이라 합니다. 그런데 이 ‘한’ 속에는 환단, 즉 천지 광명이 함께 내재돼 있습니다. 인간은 천지가 낳은 자식이므로 그 안에 천지부모의 광명이 그대로 다 들어있는 것이죠. 한은 그 뜻이 수십 가지에 이르지만, 가장 근본적으로는 ‘천지광명의 주인공으로서의 인간’을 말합니다. 하늘, 땅, 인간의 밝음은 『환단고기』의 『태백일사』에서 “대시大始에...언제나 오직 한 광명이 있었다.”라고 말하는 하나의 광명입니다. 그 빛이 3수 원리에 따라 셋으로 나뉘어 우주를 열었던 것이며, 『환단고기』는 우리 옛 조상들이 그 빛을 신의 모
습으로 이해했다고 전합니다. ‘한’으로 산다는 것, ‘한’의 인간이 된다는 것은 내 안의 밝은 본성을 틔
워 천지의 뜻에 따라 이 땅을 광명한 세상으로 이룩하며 사는 삶이 되겠습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게 있는데, 『환단고기』를 『한단고기』로 부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한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그릇된 명칭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한은 인간의 내면에 깃든 무궁한 천지광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본질은 동일하다 하더라도 환과 한은 분명 서로 구별돼야 합니다. 이 책의 제호가 반드시 ‘환단고기’여야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지요. 환·단·한의 광명 정신은 동방 한민족 9천년 역사
에 그대로 실현됐습니다. 환국에서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한민족의 나라 이름들이 한결같이 광명 사상을 담고 있습니다. 환국은 ‘환’ 그 자체고요,
배달은 ‘밝다’를 뜻하는 ‘배’와 땅을 뜻하는 ‘달’이 모여 ‘동방의 밝은 땅’을 뜻합니다. 고조선의 조선
도 ‘아침 햇살을 먼저 받는 곳[朝光先受地]’을 가리킵니다. 고조선의 국통을 이은 북부여의 부여도 ‘불’이란 말로서 광명을 나타내고, 고구려 유민이 세운 대진국, 그리고 우리에게 더 잘 알려진 또 다른 이름 발해 역시 각각 ‘동방의 광명의 큰 나라’, ‘밝은 바다’를 의미합니다. 고종 황제가 선포한 대한제국의 ‘대한’이란 말에도 ‘한’의 광명 정신이 어김없이 담겨 있으며, 오늘의 국호인 대한민국은 이 대한제국에서 나왔습니다.
더불어 각 시대 창업자의 호칭에서도 한·단·한의 광명 정신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환’과 ‘단’이 들어 있는 환인, 환웅, 단군의 세 호칭은 모두 ‘광명문화의 지도자’를 가리키고, 북부여를 세운 해모수의 성씨인 ‘해’ 또한 우리말로 광명의 태양을 의미합니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도 ‘밝다’는 뜻의 박朴 자로 성을 삼았고, 이름에 ‘빛날 혁赫’ 자를 써서 광명 사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양조선의 이성계는 즉위 후 이름을 땅 위에 해가 떠오르는 모양의 ‘새벽 단旦’ 자로 바꿨는데, 이 또한 광명을 뜻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성계는 고조선의 영토와 문화를 회복하여 과거 한민족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웅지에서,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는 것과 함께 자신의 이름을 ‘새벽 단’ 자로 개명한 것이죠. 환국 이래 동북아 한민족의 모든 역사 과정은 실
로 환단, 천지광명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역사를 기록한 책이 『환단고기』입니다.”
◎ ◎일제의 탄압과 한국전쟁 등 굴곡 많은 우리 현대사를 감안하면 『환단고기』가 그런 고비들을 넘어 오
늘 우리에게 전해진 과정이 평탄하지만은 않았을 것 같습니다.
“『환단고기』가 편찬, 간행된 것은 조선이 일본에 망한 후 1년(1911)이 지난 때 였습니다. 『환단고기』
의 앞에 붙어 있는 서문에 해당하는 범례에 따르면 계연수 선생은 자신의 동지이자 벗인 홍범도 장군과 오동진 장군 두 사람의 자금지원으로 30부를 간행했다고 합니다. 범례에 ‘기궐剞劂’이라는 표현으로 보아 목판에 새긴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유감스럽게도 원본은 우리에게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천우신조로서 『환단고기』가 이유립이라는 인물에 의해 우리에게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유립 선생은 1907년생으로서 해학 이기의 제자이자 계연수 선생의 제자였습니다. 그는 13세 때 삭주 지역 독립운동가들이 세운 배달의숙이라는 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했는데 이 학교에서는 계연수를 위시하여 최시흥, 오동진 등이 교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이유립 선생은 조선독립소년단에 참가하여 활동하는 등 소년시절부터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는데 특히 교육운동에 뜻이 있어 33세 때에는 신풍학원도 세워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해방이 되자 신탁통치에 반대했던 그는 1948년 남한으로 월남하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아직 남북한 간의 경계가 완전히 닫히지는 않아 북한을 두어 차례 더 왕래하였습니다. 그는 북한에서 내려올 때 『환단고기』를 가져왔습니다. 이유립 선생은 1963년 대전 은행동에 정착해서 후학들에게 우리 역사를 가르쳤는데 그 때 사용했던 교재가 『환단고기』였던 것입니다. 이는 그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양종현梁宗鉉 씨가 필자에게 직접 증언해준 사실입니다.
양씨는 1966년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이유립 선생에게 사사했던 분입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유립 선생이 갖고 있던 『환단고기』 초간본은 1976년경에 분실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이유립은 월간 『자유』지를 운영하고 있던박창암 장군(1923-2003)의 도움을 받아 의정부에 살고 있었는데 백내장 수술차 5일간 집을 비운 사
이 집주인이 야반도주한 걸로 착각하고 집세 대신에 이유립 선생의 책들을 모조리 팔아버린 겁니다.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환단고기』 원본이 사라지는 바람에 『환단고기』 위서론이 나오게 된 것이죠.”
◎ ◎그렇게 원본이 분실되기까지 했던 『환단고기』가 어떻게 그 내용이 보존되고, 또 대중에 알려지게 되었나요? “『환단고기』가 분실되기 전의 일입니다만 이유립 선생의 제자 가운데 오형기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오형기는 이유립 선생보다 10년 정도 연배가 젊은 사람이었는데 이유립 선생이 오형기의 형과 친한 터라 그를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이는 양종현 씨가 증언해준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오형기가 이유립 선생이 소장하고 있던 『환단고기』를 빌려가 필사를 하게 됩니다. 오형기 말로는 이유립 선생이 자신에게 『환단고기』 정서를 요청했다고 하는데 양종현 씨 증언으로는 오형기가 그 책을 필사하기를
원하자 이유립 선생이 허락하여 필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오형기도 그 책이 대단한 책이라는 것을 알고 자신도 한권 소장하고 싶었던 것이었겠지요.
좌우간 이 오형기 덕에 『환단고기』가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졌어요. 1979년에 광오이해사라는 출판사에서 나온 『환단고기』는 바로 오형기가 소장하고 있던 필사본을 간행한 것입니다. 출판을 했던 사람은 이유립 선생의 문하에 있던 조병윤으로 스승의 허락도 없이 간행한 터라 이유립 선생이 크게 화를 냈다고 합니다. 이유립 선생은 오형기가 필사본에 쓴 발문도 못마땅하게 생각했는데 이 발문을 삭제하고 오자를 바로잡아 1983년에 배달의숙을 발행인으로 한 『환단고기』를 다시 간행했습니다. 배달의숙본이 나오기 바로 전해에는 가지마 노보루(鹿島昇)라는 일본인 변호사가 광오이해사본을 입수하여 일본어로 번역하여 출판하였는데 이 일본어본이 역으로 국내에 수입되어 한국사학계에 상당한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조병윤이 간행한 광오이해사본과 이유립 선생이 간행한 배달의숙본 모두 한문 원문만 실려 있는데 이후 여러 출판사들에 의해 『환단고기』 번역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 ◎아무리 이래저래 소실되고 분실됐다 해도 『환단고기』 말고도 지금도 전해지는 우리 고유한 사서들
이 있기는 있을 텐데요. 이번 기회에 그런 사서들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주십시오.
“예로부터 전해오던 한민족의 고유사서들 대부분은 지금 그 자취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는 우리 역사에서 전란이 빈번하여 사서들이 소실된 경우가 많았고 외적에게 탈취되어 사라진 경우도 적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궁궐과 많은 절, 건물들이 불에 타면서 그곳에 있던 서적들도 소실되었을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유학에 물든 조선 조정은 우리 고유 사서를 민간으로부터 수거하여 궁궐에 비장하였다가 전란이나 화재로 사라진 경우도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환단고기』에는 『신지비사神誌秘詞』, 『진역유기震域留記』, 『삼성밀기三聖密記』, 『조대기朝代記』, 『고기古記』, 『밀기密記』, 『대변경大辯經』, 『삼한비기三韓秘記』, 『삼한고기三韓古記』, 『해동고기海東古記』, 『고려팔관 잡기高麗八觀雜記』 등 현재 전해지지 않는 고유 사서의 이름이 나옵니다. 이렇게 한민족사의 참 모습을 확인시켜 줄 사서들이 거의 다 사라져버린 지금, 『환단고기』와 『단기고사檀奇古史』, 『규원사화揆園史話』, 『제왕연대력帝王年代歷』 등 몇 종의 책들이 겨우 전해지고 있습니다. 『단기고사』는 고구려 유민들을 모아 대진국을 세운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大野勃이 발해문자로 쓴(729년) 책입니다. 전수 과정의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1959년 국한문으로 번역되었지만, 6·25 사변 때 소실되었습니다. 현존하는 『단기고사』는 구전되어온 자료를 토대로 복원된 것입니다. 『규원사화』는 그 서문에 의하면, 북애노인北崖老人이란 인물이 숙종 2년(1675년)에 지었습니다. 총 다섯 부분으로 나눠져 있으며, 환인, 환웅, 단군의 삼성조시대를 모두 다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구체적 내용에 있어서는 『환단고기』와 상이한 부분이 있습니다.
『제왕연대력』은 신라시대 최치원이 지은(890년경)대표적 저술 중의 하나로 신라 역대 왕력입니다. 원본은 일제 때 화재로 소실되었고, 현재 홍종국洪種國이 필사한(1929년) 필사본만 전합니다. 고조선의 1세, 2세 단군에 대한 서술이 나옵니다. 이들 고유 사서 가운데서도 삼성조에서 고려에 이르기까지 한민족의 역사만 아니라 상고시대 동북아 문화권의 정치, 경제, 풍속, 언어, 음악, 국제 관계 등에 대한 귀중한 기록을 전하는 『환단고기』야말로 한민족 고유사서의 최고봉이라 하겠습니다.”
◎ ◎말씀해주신 사서들과 비교해 『환단고기』가 갖는독보적인 특징 같은 것들이 있겠지요?
“『환단고기』의 독보적 가치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지요.첫째, 『환단고기』는 동방 한민족 뿌리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한민족사의 유일한 사서입니다. 『삼성기 상』의 첫 문장은 ‘吾桓建國이 最高라(우리 환
족의 나라세움이 가장 오래되었다)’하여, 한민족이 환국을 세웠으며 그 환국이 인류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나라임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환단고기』는 한민족의 뿌리역사를 삼성조三聖祖 시대로 묶어 전합니다. 이 7천년 삼성조 동안 역대 임금의 이름, 재위연수, 치적 등을 기록하여 한민족 시원역사의 진실을 밝혀주는 책이 바로 『환단고기』입니다.
둘째, 『환단고기』는 한민족사의 국통國統 맥을 명확하게 잡아줍니다. 『환단고기』의 5대 사서 가운데 『북부여기』는 특히 삼성조로부터 고려·조선에 이르는 우리 국통 맥을 바로 세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역사서입니다. 국통 맥의 잃어버린 고리인 부여사(북부여, 동부여를 비롯한 여러 부여의 역사)의 전모를 밝혀, 고조선 이후의 단절된 역사를 이어주기 때문입니다.
셋째, 『환단고기』는 한민족의 고대 종교와 사상인 신교 삼신문화의 실체를 처음으로 밝혔습니다. 배달과 고조선 시대에 신교의 삼신 원리에 따라 전도佺道, 선도仙道, 종도倧道라는 유불선 삼교의 모태가 되는 원형 삼도가 출현하였습니다. 유불선과 신교문화를 회통한 안함로安含老를 위시한 『환단고기』 집필자들에 의해 동북아의 원형 문화이자 인류의 시원 문화인 신교문화는 세상에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신교는 삼신상제님을 모시는 신앙입니다. 환국, 배달, 고조선 시대 이래로 우리 조상들은 삼신상제님께 ‘천제天祭’를 올려 그 은혜와 덕을 칭송하고 상제님의 가르침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넷째, 『환단고기』는 하늘, 땅, 인간 즉 천지인 삼재에 관한 가르침을 통해 사람이 이 우주에서 어떤 존재인가를 밝혀 줍니다. 사람은 세상을 살면서 ‘신은 정말 존재하는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왜 사는가?’라는 의문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에 대한 답을 『환단고기』는 신교의 신관, 인간관, 우주관, 역사관에 바탕하여 종합적으로 정리해 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환단고기』는 신과 기, 신과 천지인, 천지와 인간 사이의 관계, 인간의 탄생 원리 등의 심오한 진리 주제를 총망라하여 싣고 있는 철학 경전이요 문화 경전이라 하겠습니다.
다섯째, 『환단고기』는 천지와 인간의 광명정신인 환桓, 단檀, 한韓의 원뜻을 밝혀줍니다. ‘환’은 ‘하늘의 광명’이요, ‘단’은 ‘땅의 광명’이므로, ‘환단’은 ‘천지의 광명’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천지의 자녀이기 때문에, 자기 안에 천지 부모의 광명을 그대로 다 갖고 있습니다. 그것이 인광명人光明인 ‘한’입니
다. 이 ‘한’ 속에는 ‘환단’, 즉 ‘천지의 광명’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요컨대 ‘환단’은 천지 광명의 역사를 드러냈던 시원역사 시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섯째, 『환단고기』는 삼성조 시대의 국가 경영 제도를 전하는 사서로서 만고불변의 나라 다스림의 지침을 담고 있습니다.
신교의 삼신문화가 국가 경영 원리로 정착된 가장 결정적인 제도는 다름 아닌 고조선의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입니다. 대단군이 중앙의 진한을 다스리면서 두 명의 부단군을 두어 번한과 마한을 다스리게 한 이 제도는 고조선 국정 운영의 핵심 제도였습니다. 고조선은 삼한관경제의 성쇠와 운명을 같이 하였습니다. 『환단고기』는 우리 상고시대의 정치를 드러내주는 정치학 교과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일곱째, 『환단고기』는 배달과 고조선의 문자 창제를 기록하여 한국이 문자 문명의 발원처임을 밝혀줍니다.문자는 문명 발상의 필수 요소로서, 한민족은 배달시대부터 이미 문자생활을 영위하였습니다. 초대 환웅천황(BCE 3897~3784)이 신지神誌 혁덕赫德에게 명하여 녹도문鹿圖文을 창제케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가장 오래된 문자로 평가받는 BCE 3,000년경의 쐐기문자(수메르)와 상형문자(이집트)보다 더 오래된, 세계 최초의 문자입니다. 고조선 3세 가륵단군은 이 문자를 수정 보완하여 가림토加臨土 문자를 만들었습니다. 가림토의 모습은 조선 세종 때 창제된 한글과 매우 흡사합니다. 여덟째, 『환단고기』에는 상고시대 한민족의 대외 교섭사와 함께 중국과 일본의 왕조 개척사가 밝혀져 있습니다. 『단군세기』에는 고조선과 중국의 관계에 대한 적지 않은 기록들이 나옵니다. 중국의 고대 왕조 요·순 시대뿐 아니라 하·상(은)·주 3대 왕조와의 대외교섭사가 나옵니다. 고조선은 하·상(은)·주 왕조들의 개국 과정에 깊이 관련되어 있는데, 그 대표적 예가 단군왕검이 치수治水법을 우禹에게 가르쳐주어 당시 중국을 괴롭히던 9년 홍수를 성공적으로 다스리게 하여 그 공으로 하나라를 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태백일사』에는 아직도 미스터리에 싸여 있는, 일본의 개국 과정을 밝힐 수 있는 단서들이 실려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환단고기』는 왜곡된 한·중·일의 고대사를 바로잡을 수 있는 유일한 나침반입니다.”
◎ ◎『환단고기』가 그처럼 가치 있는 것이라면 우리 역사학계에서도 선뜻 받아들였을 텐데, 어떤 까닭인
지 당장 우리 역사 교과서에 언급조차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동안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서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있습니다. 이 두 사서가 중요한 내용을 많이 담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한편 사서 집필에 있어 사대주의적 관점이나 신라중심의 서술 등의 문제점이 있는 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환단고기』는 기존의 사서와는 다른 파격적인 내용과 상세한 기술이 특징입니다. 그리고 기존에 알려진 역사적 내용들과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기존의 학설을 뒤엎는 내용이 많았습니다. 고조선의 성립 기원에 대한 상세한 기술이라든가 47대에 이른 단군의 명칭과 재위년도 등은 고조선을 지금으로부터 겨우 2,700년 전에 건국된 청동기 시대 부족국가로 보는 식민사학의 논리로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들이었습니다. 아마도 역사학계에서 볼 때 『환단고기』는 눈에 가시처럼 여겨졌을 것입니다. 박병섭 박사가 지적하듯이 그들은 이 책을 해석함에 있어서도 축소 지향적으로 접근하여 그 가치를 폄하하고, 『환단고기』의 허점을 아전인수적으로 해석하고 침소봉대하여 『환단고기』 전체를 근세에 지어낸 책이거나 조작된 책으로 낙인찍으려 했습니다.
강단사학자들의 이러한 주장을 ‘『환단고기』 위서론’이라고 부릅니다. 위서론이라고 하면 무언가 학술적인 이론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그러한 논리적 관점이나 학술적 논증이 담겨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난 30여 년 동안 해 온 『환단고기』 역주본 작업을 마무리 지으면서 지금까지 학계에서 발표한『환단고기』 진위 논쟁에 대한 세미나 자료와 논문, 서책을 하나도 빠짐없이, 체계적으로 점검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위서라는 주장을 그대로 방치할 경우 『환단고기』의 소중한 가치가 정말 부당하게 흠집이 날 수 있다는 염려 때문입니다. 주류 강단사학계가 『환단고기』의 독보적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고 부정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위서론자들은 책 제목인 『환단고기』의 뜻조차 모르고 있으며, 『환단고기』를 단 한 번도 깊이 있게 제대로 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유불선 경전을 비롯한 동북아의 고전과 인류의 시원 종교인 신교의 우주론에 대한 이해가 천박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위서론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환단고기』는 조작된 책이라는 주장입니다. 위서론자들은 ‘1911년에 계연수가 편찬한 『환단고기』의 원본이 없다는 것을 핑계로 『환단고기』는 이유립이 조작한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환단고기』 범례에서도 나오듯이 이 책은 운초 계연수가 1911년에 만주 관전현에서 독립운동 동지인 홍범도, 오동진 두 사람의 자금 지원을 받아, 스승 해학 이기의 문중에서 전해 오던 『태백일사』(8권으로 구성)와 다른 4권의 정통 사서를 한 권으로 묶어 간행한 책입니다. 『환단고기』를 이유립이 조작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오형기가 필사한 『환단고기』 발문을 보면 명백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유립의 제자 양종현은 원본 책을 직접 본 사람인데, 책의 제목이 ‘『환단고기』’라고 분명히 증언하였습니다. 상식적으로 봐도 그 방대한 역사적 내용들을 시기적으로 정합할 수 있도록 창작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둘째, 『환단고기』에 나오는 지명과 인명의 실제 사용연대가 저술 연대보다 훨씬 후대이므로 그 내
용을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영고탑이라는 지명과 잠청배라는 용어를 들어 단군세기나 북부여기가 청나라 이후에나 저술될 수밖에 없는 책이므로 고려시대에 저술된 책이 아니라 청나라 이후에 조작된 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위서론자들의 주장이 얼마나 무지하고 억지스러운지를 반증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고탑은 그들의 주장처럼 청나라 이후에 생긴 것이 아니라 이미 명대明代의 기록에 영고탑이라는 명칭이 나오고 있으므로 위서론자들의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셋째, 『환단고기』에 근대 술어가 사용되었다는 주장입니다. 위서론자들은 국가·문화·평등·자유·헌법·인류·세계만방·산업 같은 근대용어가 쓰였다는 이유로 『환단고기』는 최근세에 쓰인 책이라고 입을 모아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고서에 현대에서만 사용하는 용어가 있다면 당연히 그 저술 연대를 의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근대술어라는 것이 고대에도 사용된 전거들이 무수히 발견됩니다. ‘문화’나 ‘인류’는 최소한 1,600년 전부터 고전에서 사용되었으며, 구마라습鳩摩羅什의『금강경』에는 ‘평등’이란 용어가 사용되었고, 『주역』에서는 ‘국가’, 전국시대 역사서인 『국어』에서는 ‘헌법’이란 용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정말 근대어가 가필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환단고기』 자체가 완전 조작된 위서임을 증명하지는 못합니다. 인류사의 여러 경전을 돌이켜보면 수백, 수천 년의 세월 속에서 끊임없는 가필과 재편집을 통한 보정 작업 끝에 오늘날의 경전이 되었습니다. 백번 양보하여 『환단고기』의 일부 술어와 연대 표시가 사실과 다르거나 다른 사서와 다소 어긋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류의 시원 역사, 한민족의 국통 맥, 태곳적 한韓문화의 다양한 모습을 밝혀 주는 『환단고기』의 독보적인 가치를 결코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계연수가 처음 펴낸 후 70년이 지나 이유립이 스승의 뜻을 받들어 『환단고기』를 다시 펴낼 때 가필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의도적인 조작과 첨삭이 아니라 누구의 손에 의해서든 꼭 이뤄져야 할 보정 작업이라 할 것입니다. 더구나 그 보정도 원전을 훼손하지 않는 아주 미미한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넷째, 후대의 다른 사서의 영향을 받았거나 그 사서들을 표절했다는 주장입니다. 예를 들면 『환단고기』에 나오는 ‘삼조선’이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환단고기』는 『조선상고사』를 베낀 책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환단고기』에는 『조선상고사』에서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삼조선의 배경이 되는 삼한과 삼신관이 동방의 원형 문화로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고, 독창적인 우리 한민족의 역사관이 밝혀져 있습니다. 그
렇다면 어느 것이 먼저 존재했는지는 자명한 것입니다.
또한 광개토태왕비 비문에 나오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의 ‘환지還至 17세손世孫’에 대한 해석만 보아도 『환단고기』와 『조선상고사』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상세한 정보를 담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환단고기』가 『조선상고사』의 영향을 받아서 조작되었다는 위서론은 터무니없는 낭설일 뿐이다. 특히 각종 사서史書에 나타나는 ‘고구려 900년 설’의 진실은 오직 『환단고기』와 대조, 분석해 봄으로써 분명하게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다섯째, 『환단고기』를 구성하는 각 역사서의 저자를 문제 삼는 것입니다. 그들은 ‘안함로와 원동중의 『삼성기』’라는 『세조실록』의 기록은 보지 않고 그보다 70여 년 후에 쓰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안함安咸·원로元老·동중董仲’ 세 사람이 황해도 해주 수양산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삼성기』의 저자를 안함로, 원동중 두 사람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라 주장합니다. 얼핏 일리 있는 말로 들리지만 이 주장에는 커다란 모순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책을 인용할 때 앞서 나온 책을 인용하는 것이 상식인데 이 경우는 『세조실록』을 기록하는 사람이 70여 년 후에 쓰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인용하였다는 상식 밖의 주장을 하는 것과 같
습니다. 이렇게 몇 가지만 지적하더라도 위서론자들의 주장이 얼마나 허구적이고 비양심적인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환단고기』에 대한 태도부터가 잘못되었습니다. 일단 부정하고 보자는 생각으로 꼬투리를 잡다보니 ‘잠청배’를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조선 땅에서 청나라를 몰아낸 일본이 ‘청과 몰래 내통한 무리’를 가리켜 한 말”이라고 잘못 해석하는 웃지 못 할 일들이 벌어진 것입니다. 잠청배는 원래 이암이 『단군세기』 서문에서 처음으로 쓴 말인데 원나라 간섭기 때 고려 인물로 정치적 문제를 일으켰던 오잠과 류청신의 이름을 빗대어 ‘오잠과 류청신 같은 무리’라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위서론자들은 이렇게 잠청배를 잘못 해석하여 『단군세기』 서문은 이암이 아닌 구한말 이후의 사람이 쓴 것이라는 억지 주장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학자가 역사 지식의 부족을 스스로 드러낸 주장입니다. 정말 통탄할 노릇입니다.”
◎ ◎제도권 사학자들이 위서론을 들면서 『환단고기』와 그 내용을 외면하려 한다면 거꾸로 그 내용이 진실임을 보여주는, 가령 ‘진서론’ 같은 주장도 충분히 있지 않겠습니까.“진서론이란 말이 어폐가 있는데 왜냐하면 『환단고기』는 우리 민족의 정통 역사서임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 전체 내용이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 것일 뿐입니다. 『환단고기』가 진서임을 굳이 증명하라고 한다면 중국, 일본, 중동 등지의 고대사 역사 현장을 가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곳을 답
사해 보면 『환단고기』는 진실이 가득 찬 역사서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게 됩니다. 나아가 『환단고기』야말로 한민족과 인류의 잃어버린 태고 역사를 되찾아 줄 유일한 역사서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특히 최근 중국 정부에서도 인정한, 인류 역사상 최고最古의 문명이자 동북아 창세시대의 문명인 홍산문화(일명 ‘발해연안문명’) 유적지에 가본다면 『환단고기』의 내용이 유물과 유적으로 증명됨을 알 수 있습니다. 과연 위서론자들이 그곳에 가봤는지 물어보고 싶네요.
물론 위서론이 하도 판을 치니까 여러 학자들이 그에 맞서 『환단고기』의 내용을 검토하여 진서임을 입증하기도 했습니다. 굳이 말한다면 이를 진서론으로 부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몇 가지 주장들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먼저 『환단고기』에 기록된 단군조선시대 천문현상을 지금의 과학을 통해 증명한 것입니다. 천문학자인 박창범, 나대일 두 교수는 천문현상기록을 근거로 『환단고기』가 진서임을 입증했습니다.
『환단고기』에는 단군시대에 일어난 천문현상에 관련된 기록만도 12회나 수록되어 있는데 이들 기록의 진위를 밝히기 위해 BCE 2333년까지 역추적하여 실제 일어난 자연현상과 사서에 나타난 기록을 과학적으로 비교해 본 결과 사서의 기록이 진실임이 증명되었습니다. 그 한 예가 BCE 1733년 흘달屹達단제 50년 “오성취루五星聚婁”라는 기록입니다. 오성은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등 육안으로 관측 가능한 5개 행성들이고, 루는 24수 중의 하나로 그 주성主星은 양자리의 베타별(β Aries)입니다. 그 두 과학자들이 검증한 결과 BCE 1734년 7월 13일 초저녁에 태양으로부터 금성, 목성, 토성, 수성, 화성 그리고 추가로 초승달 등이 일렬지어 하늘에 나타나 장관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었고, 또 한 번은 1953년 2월 25일 새벽에 한 번 있었다고 합니다. 행성결집현상은 천문학적으로 매우 드문 현상인데 이를 감안해 볼 때 단군조선 때의 기록은 1년 차이지만 주목할 만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외 29세 단군 마휴 9년(BCE 935)에 “남해의 조수가 석자나 물러났다[南海潮水退三尺].”이라는 기록이나 일식기록에 대한 기록도 과학적으로 신뢰할 만한 것으로 입증되었습니다. 이러한 과학적 검토는 『환단고기』가 최근에 저술된 위서라는 주장에 대한 명백한 반론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환단고기』의 기록을 검토해 볼 때 그 내용이 유물로 입증된 사례도 있습니다.
『환단고기』에는 장수왕의 연호와 관련된 내용이 실려 있는데 이 내용이 1915년에 발견된 불상에 새겨진 기록에 의해서 입증된 것입니다. 『환단고기』 『태백일사』에는 장수왕이 즉위하자, ‘건흥建興’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기록이 있는데 건흥 연호가 1915년 충북 충주 노온면에서 출토된 불상의 광배명光背名에서 나
타난 것입니다. 역사기록의 진실여부는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 입증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사례를 과학적 용어로 검증이라고 합니다. 시기적으로 볼 때 기록이 먼저 있고 그 기록의 사실여부를 밝혀주는 유물이 발견되면 그 기록의 진실성이 검증됩니다.
천남생묘지 비문도 그러한 예가 될 것입니다. 천남생은 고구려의 재상이자 영웅인 연개소문의 큰 아들입니다. 그의 묘비명이 1923년에 발견되었는데 거기에는 남생의 아버지 개금, 할아버지 태조, 증조부 자유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는 『태백일사』가 『조대기』를 인용하여 밝힌 기록과 일치합니다. 이 책은 여기에 남생의 고조부, 즉 연개소문의 증조부 이름을 광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록은 다른 곳에서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또 광개토태왕 비문에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의 ‘환지 17세손’이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는 ‘광개토태왕은 추모鄒牟왕의 13세손’이라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다릅니다. 왜 이런 차이가 날까요? 『환단고기』를 보면 그 이유가 밝혀지게 됩니다. 『환단고기』에는 고구려 제왕의 계보가 제1세 해모수(BCE 194년에 단군조선을 계승하여 북부여 건국)로부터 →제2세 고리국의 제후 고진(해모수의 둘째 아들)→제3세 고진의 아들→제4세 옥저후 불리지(고진의 손자)→제5세 고추모(고주몽, 고진의 증손자) … 제17세 광개토태왕(주몽의 13세손)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주몽의 선조는 해모수이며 그로부터 치면 광개토대왕은 17세가 되는 것입니다. 『삼국사기』도 광개토대왕비도 모두 정확한 사실을 담고 있었던 것인데 그것을 『환단고기』가 해명해준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환단고기』가 후대의 창작이 아닌 진서임을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이 외에도 『환단고기』가 진서임을 알려주는 여러 증거들이 『환단고기』 자체 내에 많이 들어있습니다. 문제는 그 증거들을 일일이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환단고기』를 대하는 자세입니다. 왜 자세히 연구하고 검토하지 않고 굳이 위서라고 낙인찍는가 하는 것입니다. 『환단고기』 연구는 완전히 새로 출발해야 합니다. 민족사학자이건, 역사학계의 주류 사학자이건 누구라도 『환단고기』를 연구하는 사람은 우선 『환단고기』에 담긴 한민족과 인류의 시원 문화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려는 열린 태도와 긍정적인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 ◎화제를 좀 돌려서, 종도사님과 『환단고기』의 인연에 대한 이야기도 궁금합니다. 어떻게 처음 책을
접하셨습니까. 또, 직접 역주본을 내신 계기나 이유는 어떤 것입니까.
“이유립 선생과 나의 선친인 안운산 증산도 태상종도사님은 같은 대전에서 살았고 또 우리 역사되찾기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서로 안면이 있는 사이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집에는 이유립 선생이 펴냈던 『커발한』이라는 잡지도 굴러다니고 했는데 그러다보니 내가 10대 소년시절부터 우리 시원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환단, 삼한관경, 삼신일체 등 국사책에서는 볼 수 없던 말들이 어린 나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이죠. 그래서 박창암 장군이 간행했던 『자유』지를 보게 되었는데 거기에 이유립 선생의 역사논문들이 많이 실렸어요. 그러다 내가 『환단고기』 원본을 처음 접한 것은 20대 후반이었던 1980년대 초예요. 내가 이 책을 처음 손에 넣은 날, 그 감동을 잊을 수 없어요. 밥상에 흰 종이를 깔고 경건한 마음으로 정신없이 책을 읽다보니 어느덧 동이 터왔습니다. 우리의 뿌리 역사와 원형문화가 이 책에 담겨 있음을 확인하고 그야말로 전율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책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또 내가 몸담은 증산도에서 이 책을 교재로 삼아 원문강독을 했지요. 내가 1983년에 낸 『이것이 개벽이다』라는 책은 상당한 수의 독자들에게 읽혔는데 이 책에도 『환단고기』의 내용의 핵심 몇 가지를 소개하였습니다. 그 후에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원문 번역을 하고 동서양의 연관서적들을 수집하며 틈틈이 역사현장 답사를 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환단고기』에 입각하여 우리 역사를 한번 정리해보아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한의 뿌리와 미래』라는 책을 집필하기 시작했어요. 이 책은 근 천 쪽에 달하는데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어언 30년이란 세월이 흘렀네요. 이제까지 많은 출판사들이 『환단고기』를 번역, 간행했지만 나는 무엇보다 이 책에 대한 상세한 해설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본문의 번역만으로는 미흡하고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한 상세한 주석과 해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해제를 작성하다보니 중국과 일본의 역사왜곡은 말할 것도 없고 환국과 연관된 수메르문명과 히브리문명, 배달시대의 동이족 문화인 홍산문화, 고대 동북아시아의 주역이었던 동이족, 고조선 시대부터 한민족과 밀접한 연관을 가져온 북방유목민족, 고조선문화와 연관성이 높은 아메리카 인디언 문화, 우리 옛 신교와 연관된 서양의 신관 등 여러 문제들을 파고들다보니 해제의 분량만 약 600쪽이 되었어요. 글쎄 이렇게까지 방대한 해제가 필요할까라고 회의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환단고기』와 연관된 역사문제를 누군가는 폭넓게 다루어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이 작용한 것이죠. 이 책을 간행하고 나서는 인생의 큰 짐을 하나 벗은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이제 이 책을 우리나라 사람들뿐 아니라 온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는 번역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번역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원본의 영어번역은 상당히 진행되어 끝난 상태지만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영어로 번역되어 있는데 『환단고기』는 그보다 훨씬 어려운 작업입니다. 그 안에 우리 옛 문화의 원형, 신교사상이 들어 있는데 번역하기가 만만치 않아요.”
◎ ◎종도사님께서 상고시대 이래 우리 한민족의 종교이자 생활문화인 이른바 ‘신교神敎’ 사상을 바탕으
로 『환단고기』 역주본을 풀어내셨다고 들었습니다. ‘신교’ 혹은 신교사상이란 어떤 내용인가요.
“우리 민족에게 유교, 불교 등이 들어오기 전 고유한 신앙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종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스림과 가르침의 근본이었으며 일상적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그것을 신교라 부릅니다. 신교는 문자 그대로 ‘신의 가르침’을 뜻하고, 구체적으로는 ‘신의 가르침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교라는 말은 『환단고기』에 실린 『단군세기』의 ‘이신시교以神施敎’, 조선 숙종 때 북애자가 저술한 『규원사화』의 ‘이신설교以神設敎’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신교는 달리 풍류風流라고도 불렸는데, 신라의 지성 최치원 선생은 난랑鸞郞이란 화랑을 기리는 비문에서 우리민족 고유의 신앙인 풍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힙니다. ‘나라
에는 지극히 신령한 도가 있는데 풍류라 하며, 유불선의 기본 사상을 이미 가지고 있다.’
신교는 환국 시대 이래 환족의 이동과 함께 지구촌 곳곳으로 퍼져 나가 수메르 문명, 인디언 문화 등 인류 정신문화의 뿌리를 이루게 됩니다. 인류 고대 문명에 대한 연구가 깊어질수록 태곳적 인류의 공통된 기층문화인 신교의 실체가 뚜렷이 드러나고, 인류 역사란 곧 신교 확장의 역사임이 밝혀질 것이라 확신합니다. 신교는 요컨대 인류의 시원종교며 원형문화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교에서 받드는 신은 누구일까요? 그 분은 인간과 천지만물을 모두 다스리는 통치자 하나님인 삼신상제님입니다. 창세 이래 우리 한민족의 신교문화권에서는 천상의 하느님을 ‘상제님’ 또는 ‘삼신상제님’이라 불러왔습니다. 『환단고기』에서는 ‘삼신일체상제三神一體上帝(삼신과 한 몸이신 상제님)’ 또는 ‘삼신즉일상제三神卽一上帝(삼신은 곧 한 분이신 상제님)’라 하여 우주 통치자 하나님의 존재와 본래 호칭을 더욱 더 명확히 알려줍니다.
여기서 삼신이란 우주의 근원인 신성을 말합니다. 대자연의 모든 생명체가 태어나고 살아가는 주된 근거를 이르는 것이죠. 삼신은 우주 만물은 낳아 기르고(造化) 깨달음을 열어 주고(敎化) 질서 있게 다스려 나가는(治化) 방식으로 작용하기에 석 삼三자를 붙여 삼신이라 이릅니다. 이 신의 본질은 광명으로서 앞서 ‘환단’의 설명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천광명, 지광명, 인광명으로 나뉘어 하늘, 땅, 인간과 만물의 생명으로 그 안에 깃듭니다. 이렇게 해서 하늘, 땅, 인간은 각기 별개의 것이 아니라 삼신에게서 부여된 신성과 광명을 가진 삼위일체적 존재가 됩니다. 나아가 천, 지, 인이 살아있는 삼신입니다. 우주 만물과 인간은 단순히 피조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조물주인 그 신의 자기 현현인 것입니다.
우주 통치자 하나님은 이 삼신의 조화권능을 써서 현실 세계를 맡아 다스리시기에 삼신상제님, 삼신일체상제님으로 불리는 것입니다. 신교문화의 우주 사상은 한민족의 3대 경전에 전하고 있는데, 신교 우주관의 정수를 기록한 「천부경天符經」, 신교의 신관이 집약된 「삼일신고三一神誥」, 신교의 인간론을 담은 「참전계경參佺戒經」이 그것입니다. 일찍이 우리 민족은 천제天祭를 올려 상제님에 대한 신앙을 표현했습니다. 천제는 고조선 22세 색불루 단군 때의 제문祭文에서 알 수 있듯, 상제님
께 폐백을 바쳐 나라의 부강과 백성의 번영을 기원하며 상제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국가 행사였습니다. 천제를 올린 뒤에는 모든 백성이 음주와 놀이를 즐기며 대동과 소통을 도모하는 제전祭典의 장을 열기도 했습니다. 9천년 역사의 첫머리인 환국을 연 환인천제를 시작으로 역대 통치자들은 천제 봉행을 국가 경영
의 근원으로 삼았습니다. 특히 환인과 환웅의 제천문화 전통을 계승한 고조선의 역대 단군은 매년 봄 대영절大迎節(음력 3월 16일)에 강화도 마리산에서, 가을(음력 10월 3일)에는 백두산에서 천제를 거행하였습니다. 천제문화는 그 후 부여의 영고, 예맥의 무천, 고구려의 동맹 등으로 이어졌습니다.
고려 때 국가 최고의 의례인 팔관회 역시 불교 행사가 아니라 신라 때부터 이어져 온 제천행사였습니다. 한민족의 제천행사는 비록 일시적인 단절을 겪기도 하지만, 마지막 왕조 조선과 대한제국(1897~1910)에 까지 이어집니다. 한민족은 환국 이래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올려 그 은혜와 덕을 칭송하는 한편 상제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해온 것입니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제천단인 강화도 참성단, 태백산 천황단, 지리산 노고단 등은 천제문화의 흔적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또 상고 시대 우리 조상들은 천제를 소도蘇塗라 불리는 신성한 곳에서 올렸는데 아직도 드물게 마을 어귀에서 볼 수 있는 솟대는 소도의 풍습이 오늘까지 이어져 온 것으로 천제문화의 유산 가운데 하나입니다.
한민족의 천제문화는 일찍이 중국 땅으로 전파돼 중국의 역대 왕들도 천제를 봉행하였습니다. 중국의 대표적 역사책인 『사기』의 「봉선서封禪書」는 춘추 시대까지 72명의 왕들이 현 산동성의 태산에 올라 천제를 지냈다고 전합니다. 산동성은 원래 배달 시대 때 동이족들의 주된 근거지 중 하나였던 곳입니다. 지금도 태산 꼭대기에는 옥황대제玉皇大帝라는 위패를 써 붙인 황금빛 상제님 상像을 모신 옥황전玉皇殿이 보존돼 있습니다. 대진국 이후 만주 땅에 세워진 요나라, 금나라 등 북방민족도 한민족의 제천풍속을 받아들여 국가행사로 거행하였습니다. 또한 천제문화는 일본으로 전해져 신사神社 문화를 탄생시켰습니다. 이밖에도 신교가 퍼져나간 세계 각처의 문화권에서 모두 제천을 행한 흔적을 볼 수 있는데, 수메르 문명과 이집트 문명, 중남미 마야, 아즈텍 문명의 지구라트와 피라미드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교의 핵심은 신의 뜻을 지상에 실현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신의 뜻은 하늘을 대신하여 다스림을 폈던 통치자들의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데 그것은 홍익인간으로 요약됩니다. 홍익인간은 환인천제로부터 환웅에게로 이어진 국가 통치이념으로서 이를 고조선의 국시로 여기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홍익인간의 뜻은 무엇보다도 고조선 11세 도해道奚 단군이 선포한 염표문念標文에 들어있는 다음과 같은 구절의 풀이를 통해 명확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삼신[일신]께서 참마음을 내려주셔서 사람의 성품은 삼신의 대광명에 통해 있으니 삼신의 가르침으로 세상을 다스리고 깨우쳐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하라.’ 인간은 누구나 우주 광명과 통해 있는 신령한 존재이니 삼신의 가르침으로 일깨워서 천지의 뜻과 대이상을 펼치는 존재가 되게 하여 이 세상을 광명한 세계로 만들어라. 이것이 홍익인간의 궁극입니다. 홍익인간의 도를 실천할 때,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위격이 마침내 바로 서게 됩니다.
요컨대 한민족의 나라 다스림과 가르침, 또 생활문화의 중심이었으며, 나아가 인류의 정신문화의 기층을 이뤘던 신교의 대강령은 삼신상제님을 받들고 그 뜻에 따라 나와 이웃이 홍익인간으로 열매 맺는데 있습니다. 신교의 우주 사상, 인간론 등에 대해서는 따로 자세히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겁니다.”
◎ ◎이번 인터뷰를 계기로 『환단고기』에 대해, 교과서에서는 배울 수 없었던 새로운 이야기를 많이 알게되었습니다. 이제 『환단고기』와 관련하여, 군軍과 일반 독자들에게 강조하시고 싶은 말씀으로 오늘 자리를 마무리해 주십시오. “먼저 국민 각 개개인이 무엇보다도 우리 역사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고유 역사서들을 찾아서 많이 읽고 주위에 소개하고 해야 합니다. 역사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 뿌리를 사랑하는 것이고, 우리 조상을 사랑하는 것이며,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지금 일본과 중국은 우리 역사를 도둑질하고 뿌리를 잘라내고 있습니다. 그런대도 우리는 이에 대응하지는 못할망정 스스로 우리 민족과 문화의 시원을 부정하고 국가의 맥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가 역사에 무관심할수록 이러한 일은 더 자주 더 심각하게 발생할 것입니다. 우리 역사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필요하고, 참 역사를 찾고 가르치는 실천이 필요한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