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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근원[본질]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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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기독교- 우주의 본질은 하나님이다
2. 유교- 유교-공자의 천명사상과 주자의 이기이원론
3. 도교-천하 만물은 무에서 나왔다
4. 불교-존재의 본질은 공(空)이다
5. 원자론-만물의 근원은 원자다
6. 빅뱅이론-우주는 150억 년 전에 ‘무(無)’의 상태에서 갑자기 뜨거운 불덩이로써 태어났다(폭발했다)
7. 맺음말(일체유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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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근원[본질]은 무엇인가? 태초에 이 세상은 어떻게 해서 이루어진 것인가, 이 세상은 누가 만든 것인가, 아니면 본래부터 있었던 것인가? 이러한 문제는 인류역사 이래 끊임없이 제기 되었던 문제로, 이에 대해서 기독교, 도교, 유교, 불교 등의 종교와, 진화론, 빅뱅이론, 원자론에서는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그리고 이들 주장에 문제점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1. 기독교- 우주의 본질은 하나님이다
기독교에서는 세계[우주]의 근원[본질] 을 야훼 하나님과 예수님이라고 말합니다. 기독교의 여호와 하나님은 천지만물의 창조자요 모든 생명의 근원자이며 천지를 운행하고 역사와 인간의 운명을 직접 주관하시는 분이며,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로 우리 죄를 대신해 죽으신 메시아{구원자}리고 말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어떤 분인지 『신ㆍ구약성서』 상에 표현된 하나님을 먼저 알아보고, 그에 따른 반론도 들어보기로 하겠습니다.
(1) 하나님
① 창조주(創造主)로서의 하나님
기독교에서는 이 세계는 하나님이 창조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성경 첫 머리(창세기)에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로 시작하여 하나님 6일 동안 천지와 만물을 창조한 과정을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 첫 머리(창세기)에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로 시작하여 하나님 6일 동안 천지와 만물을 창조한 과정을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그것을 정리하여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날-빛과 낮ㆍ밤,
둘째 날-하늘,
셋째 날-육지와 바다ㆍ식물,
넷째 날-해와 달ㆍ별,
다섯째 날-물고기와 새,
여섯째 날-가축과 곤충ㆍ파충류ㆍ짐승ㆍ사람.
이러한 기독교의 창조설은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아 왔습니다. 특히 기독교의 전통에서는 구약의 창세기에 등장하는 창조의 이야기가 생명의 창조에 관한 절대적인 설명으로 간주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창조설은 현대 과학의 발달로 인하여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많은 현상들이 속속 그 베일을 벗어 감에 따라서 그 절대적인 권위를 잃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의 창조설에 대해서 오늘날 대부분의 책임있는 종교 사상가들은 창세기 제1장과 제2장에 나오는 웅대한 창조의 이야기를 과학적인 기술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이해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도대체 누가 창세기 이야기 중에서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해와 달과 별이 없었다고 할까요? 그리고 누가 첫째 날은 하늘조차 없었다고 할까요?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적 상식으로는 지구는 하루에 한바퀴 자전하면서 태양 주위를 공전하고 있습니다. 이때 태양의 빛을 받는 때가 낮이며, 태양빛을 받지 못하는 때가 밤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첫째 날에 빛과 낮, 밤을 만들고, 넷째 날에 해ㆍ달ㆍ별을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성경에는 셋째 날에 식물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식물은 태양의 빛을 받아 탄소동화 작용을 하여 생장(生長)하고 있으므로 태양이 없으면 하루도 생존 할 수가 없습니다. 이는 엄연한 과학적 사실입니다.
그리고 넷째 날에 만든 해와 달과 무수한 별들을 지구 장식품으로 궁창에 메달아 놓았다고 했는데, 이러한 창세기의 기록을 근거로 우주의 중심은 지구라는 천동설(天動說)이 나왔습니다.
기독교의 천동설은 우주의 중심은 지구가 아니라 태양이며, 태양은 우주의 중심에 정지해 있고, 지구는 그 둘레를 자전하면서 공전한다는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의 지동설(地動說)에 의하여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천동설을 축출한 지동설(태양중심설)도 그 자리를 오래 유지하진 못했습니다. 갈릴레오가 죽은 지 3백년 후에, 태양계는 은하수의 한 변방에 자리 잡고 있을 뿐 아니라 우주에는 우리가 속한 은하수 같은 은하계가 수백억 개나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찰스 다윈을 비롯한 진화론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생명은 역사적으로 어떤 시기에 무기 물질로부터 발전하였다고 봅니다. 이 이론은 생명의 출현을 어떤 외적인 힘이나 창조의 힘에 의해 발생한 것이 아니고, 생명체가 적자생존의 투쟁을 통해 자연적으로 진화한다는 것입니다. 진화론자들은 대략 150억 년 전에 우주가 형성되었고 40억 년 전에 지구가 생성되었으며, 2억 년 전쯤에 포유류가 등장하고, 6500만 년 전에 공룡이 멸망한 다음 400만 년 전에 처음으로 원시 인류가 나타났으며, 불과 100만 년 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현재의 인간 종(種)이 나타났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진화론은, 모든 생명을 설계하고 감독하는 절대자의 섭리와 의지를 불필요하게 만들기 때문에 기독교와 심한 갈등을 빚고 있습니다. 생물이 자연환경에 적응하면서 스스로 진화하거나 멸종한다는 다윈의 진화론(進化論)은 완벽한 신이 자연계에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온갖 생명체를 촘촘히 심어 놓았고, 각자의 자리는 단단히 고정되어 있다는 설계론 혹은 창조론의 개념을 뿌리째 흔들어놨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의 성경 기록은 과학ㆍ역사적 사실과의 충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근대 서구에서 성서를 신도의 삶과 신앙생활의 표준으로 받아들이되, 역사ㆍ문화적 맥락 속에서 재해석하고 그 의미를 찾아야 하는 텍스트로 읽는 흐름이 우세해진 건 이런 까닭이었습니다. 근본주의 교회들은 이런 자유주의 신학을 이단시했습니다. 현재 이처럼 꽉 막힌 기독교는 유럽이나 미국 동부에서는 보기 드물고, 오로지 미국에서도 교육수준이나 경제상태가 저급
한 남부 일부지역, 그리고 이 지역출신의 ‘꽉막힌 선교사’ 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한국ㆍ아프리카 등, 일부 피선교 지역에서나 서식하는 기현상입니다.
② 천지를 운행하시는 하나님
기독교의 하나님은 천지 만물의 창조자일 뿐만 아니라 직접 천지를 운행하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천지를 운행하신다함은, 해가 뜨고 지는 것도, 4계절이 바뀌는 것도, 비 오고 바람 부는 것도(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식(氣息)있는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자가 다 죽으리라. 창 6:17/ 그 날에는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 40주야를 비가 당에 쏟아졌더라. 창 7:11), 다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학의 발전은 이런 자연현상들의 원인을 속속 규명하였고, 아직 남아있는 것들도 언젠가는 설명이 가능해질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하였습니다. 결국 기적이나 이적은 비록 연구나 추적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을지라도 신의 존재에 대한 증거로 채택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③ 인간의 역사와 운명을 주재(主宰)하시는 하나님
기독교의 하나님은 인류의 역사와 인간의 운명을 주재하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히틀러가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것도, 공산주의자들이 종교는 아편이라고 하여 교회를 파괴하고 신앙활동을 금지한 것도, 남북이 분단되고 동족끼리 총뿌리를 겨누고 있는 것도, 북에서는 김일성ㆍ김정일이 살아있는 신으로 숭앙받는 것도, 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 달려있다면 인간이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 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며(내가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므로), 사람이 죄를 인간이 죄를 지을 때 그 죄의 책임도 당연히 신의 책임으로 돌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죄도 신의 뜻에 의해 지어졌다고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인간에게 죄가 있다는 것은 분명히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④ 전지전능한 하나님
기독교의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고, 그 능력이 한량없는 전지전능한(全知全能)한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과연 전지전능한 분인지 「창세기」를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3장에는 하나님이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시조인 아담과 이브를 만들어 에덴동산에 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담· 이브에게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대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선악과)는 먹지 말라. 그것을 따 먹는 날에는 너희가 정녕 죽으리라.”고 엄명을 내리셨습니다. 그러나 아담 이브는 사탄(뱀)의 꼬임에 빠져 하나님이 따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써-하나님의 계명을 어김으로써-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고,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단절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아담 이브가 선악과를 따 먹을 줄 알았을까 몰랐는가 하는 점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선악과를 따먹을 줄 몰랐다면 전지전능한 신이라 할 수 없고, 뻔히 알면서도 그런 시험을 했다면 이는 인간에 대한 기만행위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인간의 자유의지에 관한 문제입니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 때 프로그램 된 대로 움직이는 기계나 로봇처럼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만들었다. 따라서 선악과를 따 먹고 안 따먹고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달린 것이며, 그 책임도 인간에게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창세기 어디를 살펴보아도 하나님이 아담에게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는 계명과 선악과 따 먹으면 죽는다는 말씀만 있을 뿐,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기독교인들은 그 근거를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할 때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했기 때문에(창 1:26),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모양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그것은 하나님의 겉모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속성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인간에게 하나님의 속성이 있다면 인간도 하나님처럼 전지전능한 존재여야 할 것이 아닌가요?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을 선악도 모르는 무지한 인간으로 만들어 놓고(인간은 사탄의 꼬임에 빠져 선악과를 따 먹고 비로소 선악을 알게 되었다), 아담ㆍ이브가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을 합리화하기 위해 아담ㆍ이브가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을 두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성경에 아무런 근거가 없는 자의적 해석에 지나지 않습니다.
⑤ 무소부재(無所不在)의 하나님
하나님은 언제, 어느 곳에나 존재하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이것을 편재(遍在)라고 한다) 그렇다면 신은 모든 변화 뒤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게 하는 존재입니다. 이것을 비유적으로 말하면 우주는 하나의 멜로디이고, 신은 끊임없이 연주하는 바이올린 연주자입니다.
이와 같이 신은 세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건들의 배후에 있습니다.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 뒤에 신이 있으며, 아름다운 꽃 뒤에도 신이 있습니다. 우박과 천둥 뒤에 신이 있으며, 화재나 들 끊는 파리떼 뒤에도 신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엽기적인 살인이나, 잔인한 행위의 배후에도 신이 있어야 합니다. 신이 모든 곳에 존재한다는 것은 신이 모든 사건이나 사물의 배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⑥ 사랑과 선(善)의 하나님
하나님의 다른 속성으로는 선과 사랑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선ㆍ사랑ㆍ은혜 등이 실제적으로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보편적인 사랑-인간의 덕이나 공적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무조건 주기 때문에 인간이 받는 아가페적인 사랑-은 다시 하나님이야말로 인간 생명의 마지막 수호자이며 보호자라는 종교적인 신념의 페이스를 이룹니다(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요, 힘이시요, 환란 중에 돕는 자이다. 시편 46:1).
그런데 구약을 제대로 읽어 본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과연 인간을 사랑하고 계시는지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시조인 아담 ․ 이브가 사탄의 꼬임에 빠져 선악과를 따 먹자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내보내 버렸고(창세기 3:22~23),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 좋아하는 여자로 아내를 삼자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않는다고 하시며, 인간의 수명을 120년으로 제한해 버렸으며(창세기 6:1~3), 인간이 타락하고 교만해 졌다는 이유로 노아와 그 가족 외에는 홍수로 쓸어 버렸고, 소돔과 고모라성을 멸망시켰으며, 바벨탑을 부수고 온 민족이 흩어져 살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걸핏하면 유대 민족에게 다른 민족과 싸우도록 명령하고, 무수한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이러고도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요?
그리고 사랑과 선의 하나님이라면 왜 이상에 악이 존재하는가가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의 설명대로라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신의 피조물입니다. 천사도 신의 피조물이요 악마도 신의 피조물입니다. 이 세상에 신의 피조물이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악한 사람이 더 잘 살고, 착한 사람이 어렵게 살아가는 경우를 우리는 주위에서 많이 봅니다. 어떤 어린 아이는 아무런 잘 못도 없이 불구로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십대에 요절하고 맙니다. 만약 신이 존재하고 있고, 또 그가 전지전능하고 최고의 선 자체라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철학자들은 오랫동안 고민해 왔습니다. 특히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는 신학자들은 이러한 문제가 여간 난제가 아니었습니다. 이 세상에 어떤 형태로든 악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 한, 신의 본질과 악의 존재를 양립시키지 못하면, 신의 존재 자체가 부정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⑦ 인격적(人格的)인 하나님
하나님이 인격적이라는 신념은 성서, 후기 유대교나 기독교의 기도문 신학 서적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 신약의 하나님은 구약에 나타나는 하나님과 그 성격이 다르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만의 편을 드는 하나님이요(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나의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네게 노하던 자들은 수치와 욕을 당할 것이요 너와 다투는 자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이 될 것이며 멸망하리라. 이사야 41:8~16), 신앙을 시험하는 하나님이며(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려라…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창세기 22:1~12), 질투하는 하나님이요(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 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3~4대에게 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에까지 은혜를 베푸는 것이라. 출애급기 20:5~6), 때로는 잔인하리만큼 심술궂은 하나님이며(너와 네 열조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너는 쫒지 말며 듣지 말며 긍휼히 보지 말며 애석히 여기지 말며 덮어 숨기지 말고 너는 용서 없이 그를 죽이되, 죽일 때에 네가 먼저 그에게 손을 대고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대라. 신명기 13:6~9), 인간을 창조했음을 한탄하는 하나님으로(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광영 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따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라 하시니라. 창세기 6:5~7)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여호와의 성격도 예수 대(代)에 오자 크게 전환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잃은 양을 찾는 신이 되고, 탕자의 귀가를 기다리는 ‘아버지'로 변모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어느 한쪽 편만을 드는 편협하고, 인간을 시험하고, 곧잘 질투하고, 잔인하리만큼 심술궂고, 자기가 한 행위를 한탄하는(인간과 별반 다름없는), 인격적 존재라는 데 대해서 얼른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밖에도 신학자들은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전지자(全知者), 그 능력이 한량없다는 전능자(全能者), 알파요 오메가로 영원히 계시는 영원자(永遠者), 언제 어느 곳에나 아니 계신 곳이 없으시는 무소부재자(無所不在者) 등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2) 예수님
예수님을 히브리어로는 메시아라 하고, 그리스어로는 그리스도라 하며, 이를 의역하여 구세주(救世主)라고 합니다. 구세주란 인류를 죄악의 굴레에서 구원하신 분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인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① 우리 죄를 대신해 죽으신 분
기독교의 『창세기』를 보면 인류의 시조인ㆍ아담 이브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인하여,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고 낙원(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하고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단절되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어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보혈을 흘리시고 죽으신 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죄를 대신하여 죽을 수 있는 것인지도 의심스럽거니와, 죄를 대신해 죽었다면 인간이 그 전과는 뭔가 좀 달라져야 할 텐데 인간이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오히려 점점 더 사악해져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구원의 길이 열렸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인간의 죄를 대신해 죽었다고 하지만, 예수님의 행적(行績)을 비교적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는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복음서) 어느 곳을 찾아보아도 인간의 죄를 대신해 죽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죄를 대신해 죽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예수의 죽음을 미화한 사실의 왜곡이요 날조입니다. 예수는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죽은 것이 아니라 죽지 않으려고 발부둥치다가 운명하였습니다. 공관복음서는 예수의 임종 내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며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하시고,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시길 원하나이다.’하시고, 제9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하는 뜻이라…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마태복음 26: 39~50)
“제9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는 뜻이라…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시다.(마가복음 15:34~37)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하고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누가복음 23:46)
공관복음서에서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을 찾아보았지만, 예수가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죽겠다는 구절은 눈을 비비고 찾아 볼 내야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다만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는 절규만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요한복음」 에는 ‘세상 죄를 대신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1;29)’, 「로마서」 에는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4:25)’, 「디모데전서」 에는 ‘그가 사람을 위하여 속전(贖錢)으로 주셨으니(2: 5)’등, 대속에 관한 기록이 있긴 하지만, 「신약성서」 는 저자의 신학적 의도에 따라 집필했기 때문에 상이한 내용이 많이 있고, 예나 지금이나 복음서를 해석하는데 기준이 되는 것은 공관복음서입니다. 그 공관복음서에 예수님의 임종 시 대속에 관한 기록이 일체 없고, 신학자들도 공관복음서에 없는 「신약성서」 는 정확성ㆍ신뢰성이 떨어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 처형당했을까요? 그것은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 직접적인 이유였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는 것을 스스로 정당화하기 위하여 부여한 죄명은 신성모독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줄곧 자신이 하나님의 외아들이며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인간과 극단적으로 구분하는 유대인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③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분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해 죽으심으로[代贖], 구원의 길이 열렸다고 말합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태복음 7:7)
“주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사도행전 16:31)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6:6)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고 있지만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가톨릭과 개신교의 입장이 다르고, 개신교 내에서도 사뭇 다릅니다. 가톨릭에서는 전통적으로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함께 선행을 실천해야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쳐 왔습니다. 그런데 루터는 “인간은 선행에 의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신앙]으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였고, 칼뱅은 “인간의 구제 여부는 전지전능한 신의 자의에 의하여 미리 예정되어 있다."는 예정설(豫定說)을 내세웠습니다.
16세기 초 교황의 면죄부 판매에 대한 반발을 계기로 벌어진 이 논쟁은 이후 가톨릭과 개신교가 갈라서며 종교 전쟁의 불씨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칼뱅이 예정설을 내세운 이유는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무조건 천당에 간다면, 이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위를 주장하는 기독교의 교리와 모순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컨대 수능350점을 받으면 서울대학교에서는 그 학생을 불합격시키고 싶어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도 어쩔 도리가 없이 그 사람을 천당에 보내 주어야 하는 자기모순에 빠지기 때문에, 칼빈은 천당에 가고 못 가고는 오직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으며, 그것은 이미 예정되어 있다는 예정설을 내세웠던 것입니다.
③ 예수님은 인간인가, 신인가?
예수, 그는 누군가? 인간인가, 아니면 신인가, 인간이면서 신인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2,000여년을 두고도 풀지 못하는 수수께끼입니다.
『마태복음』에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제자들을 대표하여 시몬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나이다.”(마태 6:16)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와 같이 마태복음에는 예수는 그리스도 즉 구세주(救世主)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예수)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비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한 1:2~3)
“주(예수)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요한계시록 1: 8-20)
이 말은 하나님이 곧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하느님에게 기도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에게 기도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한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관계를 검토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 하느님 안에 성부ㆍ성자ㆍ성신(성령)의 세 위격(位格))이 있다.”는 삼위일체 교리는 콘스탄티누스가 개최한 종교회의[니케아종교회의]에서 투표로 결정된 것으로써, 삼위일체(三位一體) 교리는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이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나 ‘예수=하느님’이라는 등식은 여러 가지 이율배반이 따릅니다. 우선, 성서적으로 볼 때 부활하여 하늘로 올리어진 예수는 하느님과 일체가 되어야 하는데 ‘하나님 우편에 앉았다’(마태 16:19)거나, 예수가 감람산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면서 “십자가 죽음을 면케 해 달라.”(누가 22:42)고 애원한 구절 등은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이들 구절은 예수와 하나님을 엄연히 구분 짓고 있습니다.
2. 유교-공자의 천명사상과 주자의 이기이원론
유교는 공자에게서 비롯된 사상체계입니다. 그러나 유교는 공자에 의해 완전히 새롭게 창시된 것이라고 보다는 은ㆍ주(殷周)시대 이래의 문화적 전통이 공자라는 인물을 통해 집대성되어 하나의 체계로 정비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공자 자신도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 하여 옛날부터 내려오던 것을 그대로 전수할 뿐 새롭게 창작한 것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분명 공자는 ‘창조적 전수자’였습니다. 그때까지 내려오던 전통이 공자에 의해 집대성되어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공자를 유교의 창시자로 보는 것입니다.
공자가 살던 시대는 춘추전국시대로 주나라 왕실의 권위가 무너지고 제후국들이 존왕양이(尊王洋夷), 겉으로는 주 왕실을 받드는 채하며, 세력을 확장하던 난세였습니다.
공자가 제시한 현실 구제의 원리는 붕괴해 가는 서주(西周) 질서의 회복이었으며, 그 방법은 ‘정명(正名)’이었습니다. 정명이란 이름을 바르게 함을 뜻합니다. 당시 사회 정치적 혼란은 군주가 군주 노릇을 못하고, 아버지가 아버지 노릇을 못하고, 아들이 아들 노릇을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신하가 신하 노릇을 하지 않고 임금이 되려는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따라서 공자는 누구나 주어진 이름에 맞도록 바르게 행동하면,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아들은 아들답게(君君 臣臣 父父 子子) 행동하면(논어 12 : 11).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보았습니다.
공자는 귀신과 초인간적인 문제에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지만, 조상숭배를 기초로 한 전통적인 친족윤리[孝悌]로부터 모든 정치ㆍ사회의 규범을 도출하려고 하였으며, 법률과 형벌에 의한 통치를 반대하고 주(周) 봉건사회의 약속규범인 예(禮)의 재확립을 통한 신분질서를 강조하였습니다. 따라서 그의 정치사상은 복고적 색채를 강하게 띠었고, 일반적으로 유가가 전통과 선례를 강조하고 변혁에 소극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공자는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명(命)에 있고 부귀도 하늘에 있다”고 하였으며(明心寶鑑 順命편), 송(宋)에서 환퇴(桓魋)에 의해 죽음을 당할 뻔 했을 때에는 “하늘이 덕을 나에게 주셨거니, 한퇴가 나를 어찌하랴.”(論語 述而편)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명백히 초월적인 존재를 인정한 것이 되며, 자기의 운명을 하늘의 뜻으로 돌린 것입니다.
공자의 천명사상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사람은 맹자이고,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은 ‘유학의 이단자’라고 불리는 순자(荀子)였습니다. 순자는 그의 제자가 “스승님 기우제를 지내니 비가 왔습니다.” 고 물었을 때 “기우제를 지내지 않아도 비가 왔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말은 분명히 천명(天命)에 대한 거부요, 도전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마천 또한 『사기(史記)』 <백이숙제열전〉에서 “천도는 공평무사하여 언제나 착한 사람 편을 든다고 한다. 그렇다면 백이·숙제와 같은 사람을 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들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켰으며, 인과 덕을 쌓고 청렴 고결하게 살다가 굶어 죽었다. 그리고 공자는 칠십 제자 중에 오직 안회(顔回)만을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추켜세워다. 그러나 그는 가끔 뒤주가 비어 있었으며, 지게미나 쌀겨도 배불리 먹지 못하다가 끝내 요절하였다. 한편 도척은 날마다 죄없는 사람을 죽이고 사람의 간을 회치는 등 포악하기가 이를 데 없었고, 수천 사람의 도당을 모아 천하를 횡행하였지만 천수를 누렸다. 그렇다면 나는 의심한다. 천도는 과연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라며, 천도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였습니다.
유교는 송대(宋代)에 와서 정치적 안정이 이루어지고 민족의 주체성에 눈을 뜨면서 소위 정통성에 입각한 전통사상의 재정립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따라서 종래의 선진유학(先秦儒學)에 대하여 새로운 시대와 사회에 맞는 유학을 건설하였으니, 그것이 곧 성리학(性理學)입니다.
성리학은 주돈이(周敦頤)와 정이(程頤)를 거쳐 주희(朱熹, 1130~1200),에 이르러 완성되었는데, 기존의 공자와 맹자의 유교사상에 불교의 이사론(理事論)과 노장사상을 접목하여 유교의 이론체계를 구축한 것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강한 이원론적 성격을 갖게 되었습니다.
서양의 이원론(二元論)이 신과 세계, 정신과 육체 등 통일될 수 없는 상호 대립적인 두 요소로 이루어진 것임에 비해, 성리학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서는 이(理)와 기(氣)의 두 요소를 상대적인 동시에 상수적(相須的)인 것으로 본다는 데, 그 특징이 있습니다.
성리학에서 이(理)는 우주법계의 보이지 않는 절대법칙, 원리, 질서이며. 기(氣)는 우주법계의 보이는 구성 물질과 에너지를 말합니다. 주자는 이의 발현(發現)이 4단(四端: 惻隱之心 · 羞惡之心 · 辭讓之心 · 是非之心)이며, 기의 발현이 7정(七情: 喜 · 怒 哀 · 懼 · 愛 · 惡 · 欲)이라고 했습니다.
맹자에 의하면 이 4단은 모든 사람이 다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일종의 선천적인 도덕적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맹자는 이것을 확충함으로써 인·의·예·지의 덕을 실현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측은지심의 경우 어린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고 할 때 누구나 아무 조건 없이 그 아이를 끌어안고 구하려는 마음이 순수하게 발로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인간의 소박한 자발적인 행위를 보면 인간의 본성이 착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4단설은 맹자 성선설(性善說)의 근본으로서 인간의 도덕적 주체 내지 도덕적 규범의 근거를 이루고 있습니다.
7정은 인간이 외부 사물에 접하면 여러 가지 정이 표현되는 심리 현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리학은 고려 말에 사회개혁사상으로 등장하여, 조선의 개국과 함께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확립되었습니다. 조선 중기의 율곡 이이는 퇴계 이황과 함께 성리학을 집대성한 인물입니다. 여러 학문에 능통했던 그는 주자의 성리학을 뛰어넘어 독자적인 해석을 내놓습니다.
이이는 주자의 주장을 한 단계 발전시킨 퇴계 이황과 달리 독자적인 해석을 보여 줍니다. 성리학에서는 이와 기를 분리해 생각하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기본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이는 여기에서 벗어나 이와 기는 ‘둘 같이 보이지만 사실 하나’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를 ‘일이이 이이일(一而二 二而一, 하나가 곧 둘이고, 둘이 곧 하나이다)’이라고 합니다. 이이는 이는 형체가 없고, 기는 형체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체가 없는 이는 통하고, 형체가 있는 기는 국한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를 ‘이통기국(理通氣局)’이라고 합니다. 이는 형체가 없기 때문에 움직일 수 없고, 기는 형체가 있기 때문에 움직일 수 있으므로(發할 수 있으므로), 이는 기가 움직일 때, 기에 타서 움직인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를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l라고 합니다.
유학자인 이이는 놀랍게도 승려가 되어 불교를 연구하기도 했습니다. 어머니 신사임당의 오랜 병환과 죽음은 그에게 심적, 정신적 충격을 주었고, 시묘살이를 마친 뒤 금강산으로 들어가 승려가 되었지만 출가 후 1년 만에 환속하고 말았습니다. 이이는 환속의 이유를 “불교는 인간이 태어나고 왜 죽는가?에 대한 해답이 없다. 불교는 유교에 미치지 못한다.”고 밝혔지만, 이러한 그의 주장은 입신(立身)을 위한 명분일 개연성이 매우 높아 보입니다. 왜냐하면 불교야말로 처음부터 인간의 생사를 문제 삼는 가르침임을, 이이가 몰랐을리 만무하기 때문입니다. 이이의 승려생활은 고작 일 년에 지나지 않았지만 불교는 그의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것은 화엄사상(四法界: 事法界 理法界 理事无涯法界 事事无涯法界)이 그의 성리학 사상에 짙게 묻어 있는 것을 엿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도교-천하 만물은 무에서 나왔다
도교(道敎)는 엄격하게 따져서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하나는 노자와 장자의 도가 사상이요, 다른 하나는 도교신앙입니다. 도가사상은 정신적으로 누릴 수 있는 절대 자유와 초월을 추구하고, 이와 대조적으로 도교신앙은 육체적으로 불로장수하는 것을 기본 목적으로 합니다.
노자의 철학 사상 중심에는 도(道)가 있습니다. 『도덕경』에서는 도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도라고 말할 수 있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니다. 이름을 지어 부를 수 있는 이름은 참된 이름 이 아니다. 이름이 없는 것이 천지의 시 초이고, 이름이 있는 것이 만물의 어머니이다.
노자는 도를 만물의 기원으로 지칭했으며, 그것에 이름을 붙일 수 없지만 그것을 굳이 명명해야 한다면 '도'라고 했습니다. 또 노자는 도를 '무(無)'라고도 했습니다. 『도덕경』은 '천하 만물은 유에서 나오고, 유는 무에서 나온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노자는 무에서 유가 생성되고, 유가 다시 무로 돌아가는 원리에 따라 만물이 생성되고 멸한다고 보았습니다. 또한 만물의 생성은 의식적인 것이 아니라 불변의 법칙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무위(無爲)의 원리에 따르며, 인간도 천지 만물의 구성체인 만큼 무위를 따르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습니다. 이것이 바로 노자의 정치사상입니다.
노자는 사회 진보는 혼란을 야기할 뿐이고, 생산의 발전은 인간의 탐욕을 부추길 뿐이며, 탐욕은 전쟁의 원인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문화는 지식의 발전을 가져오고, 이는 결국 전쟁에 이용될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문명이 없던 시대, 어리석을 정도로 순박한 자연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하여 탄생한 노자의 이상적 국가 형태가 '소국과민(小國寡民, 작은 나라, 적은 백성)'입니다.
이러한 노자의 주장은 현실에 대한 실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는데, 이 주장은 통치자들의 신랄한 비판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는 크고 강한 것이 작고 약한 것을 지배하는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사회였기 때문입니다.
노자의 사상은 약 200년 후 전국 시대 장자에 의해 계승, 발전되었습니다. 장자는 천지를 창조하고 지배하는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자연을 천지 만물을 생성하고 사멸시키는 원인으로 보았습니다. 자연을 조물자(造物者)로 부를 때, 그것이 인격신의 발견이 될 수 없을 것은 명백합니다. 신이 어딘가에 존재한다면, 거기로부터 힘이 나와서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 되므로 자연의 개념과 모순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작용없는 작용’이라고나 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장자가 그 존재론(存在論)에서 유(有)의 원인을 무(無)로 돌리는 것도, 거기에 이유가 있다고 보아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자연이 저절로 움직이는 것, 바꾸어 말하면 그 ‘작용없는 작용’이 무위(無爲)의 뜻이라고 생각해도 될 것입니다.
이러한 노장의 주장에 대해서 규종 종밀은 『원인론』에서 “노자와 장자가 말한 대로 만물이 허무인 대도(大道)로부터 나왔다면, 생사(生死)ㆍ길흉화복(吉凶禍福)이 모두 도(道)에서 생긴 것이므로, 복을 닦고 덕을 쌓거나 어진 이를 높이고 착한 일을 하는 것도 또한 이익 될 것이 없을 것이다. 도가 만물을 내었다면 범과 이리를 모두 그 도(道)가 길러낸 것이다. 범과 이리가 사람과 짐승을 해치니 어찌 도의 불인(不仁)함이 아니랴. 하의 폭군 걸(傑)과 상의 폭군 주(紂)는 모두 무도한 임금이다. 그렇다면 곧 대도(大道)가 불인(不仁)한 임금을 내놓아서 만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한 것이다. 또 만물이 모두 자연으로 생기(生起)된 것이요 인연으로 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어디든지 인연이 없는 곳에도 모든 것이 생기게 되리니, 말하자면 돌이 풀을 낳거나 풀이 사람을 낳으며 사람이 짐승 따위를 낳을 것이다. 그러나 인연이 없는 곳에는 모두 생화(生化)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라고 문제를 제기하였습니다.
4. 불교-존재의 본질은 공(空)이다
불교에서는 모든 만법의 참 성품인 본체계(本體界=理法界)를 공(空)이라고 합니다. 공이란 결코 어떤 물건이 있다가 없어진 상태나, 텅 빈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범어 슈냐(Sunya)의 음역으로 실체나 자성(自性)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니, 이 세상 모든 것은 인연생기(因緣生起)하는 것이기에 시간적으로 무상하고 공간적으로 무아(無我)여서 결코 어떤 변치 않는 영원의 고정된 실체나 자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연기는 곧 공인 동시에 현상계의 유(有)이며 이것이 또한 중도(中道)이기도 한 것입니다.
부처님은 공(理=존재의 본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습니다.
제법공상 불생불멸(諸法空相 不生不滅)- 모든 존재의 본성은 공하여 생겨나지도 않고 없어 지지도 않으며,
불구부정 부증불감(不垢不淨 不增不減)-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다.(반야심경)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철학도 많고 종교도 많지만, 불생불멸에 대해서 불교와 같이 이토록 분명하게 주장한 철학도 없고 종교도 없습니다. 그래서 불생불멸이라는 것은 불교의 전용이요, 특권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과학이 자꾸 발달하여서 요즘에는 불교의 불생불멸에 대한 특권을 과학에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과학 중에서도 첨단과학인 원자물리학에서 자연계는 불생불멸의 원칙 위에 구성되어 있음을 실험적으로 증명하는 데 성공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이론을 처음으로 제시한 사람이 바로 아인슈타인인데,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相對性理論)에서 등가원리(等價原理)라는 것을 제시했습니다. 자연계는 에너지와 질량, 이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고전 물리학에서는 에너지와 질량을 각기 분리해 놓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등가원리에서는 결국 에너지가 곧 질량이고 질량이 에너지라는 것입니다. 즉 에너지와 질량은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전에는 에너지에서는 에너지 보존의 법칙, 질량에서는 질량불변의 법칙을 가지고 자연현상의 모든 것을 설명하였는데, 지금은 에너지와 질량을 분리하지 않고 ‘에너지 보존의 법칙’하나만 가지고 설명을 합니다. 곧 질량이란 것은 유형의 물질로서 깊이 들어가면 물질인 소립자이고, 에너지는 무형이 운동하는 힘입니다.
이것을 물과 얼음에 비유하면 아주 알기 쉽습니다. 물은 에너지에 비유하고 얼음은 질량으로 비유합니다. 물이 얼어서 얼음이 되면 물은 없어진 것인가요? 물이 얼어서 얼음으로 나타났을 뿐 물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얼음이 녹아서물이 되면 얼음은 없어진 것인가요? 얼음이 물로 나타났을 뿐 얼음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물이 얼음으로, 얼음이 물로 나타났다 할 뿐이고, 그 내용을 보면 얼음이 곧 물이고 물이 곧 얼음인 것입니다. 에너지와 질량 관계도 이와 같습니다. 에너지가 질량으로 나타나고 질량이 에너지로 나타날 뿐, 질량과 에너지는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질량 전체가 에너지로 나타나고 에너지 전체가 질량으로 나타는 이런 전환의 전후를 비교해 보면 전체가 서로 전환되어서 조금도 증감이 없습니다. 곧 부증불감(不增不減)입니다. 불생불멸이니 마땅히 부증불감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서양 사람들은 불교에 대해서 잘 모르는 탓에 이런 표현을 그대로 말하지 못해도, 그 내용은 꼭 같은 말로써 에너지와 질량 관계가 잘 보존된다고 합니다. 보존된다는 것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불생불멸, 부증불감의 세계를 불교에서는 법의 세계, 곧 법계라고 합니다. 항상 머물러 있어서 없어지지 않는 세계, 상주법계라는 말입니다.
그럼 존재의 본질인 공(空)과 현상(色, 물질)은 어떤 관계에 있을까요? 부처님은 『반야심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습니다.
색불이공 공불이색(色不異空 空不異色)- 색이 공과 다르지 아니 하고 공은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색은 곧 공이며 공은 곧 색이니라.(반야심경)
여기서 색(色)이란 유형(有形)을 말하고, 공(空)은 무형(無形)을 말합니다. 유형이 곧 무형이고 무형이 곧 무형이라고 하였는데, 어떻게 유형이 무형으로 서로 통하는가, 어떻게 허공이 바위가 되고 바위가 허공이 된다는 말인가 반문할 것입니다. 그것은 당연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바위가 허공이고, 허공이 바위입니다.
어떤 물체, 보기를 들어, 바위가 하나 있습니다. 이것을 자꾸 나누어 가다 보면, 분자들이 모여서 생긴 것을 알 수 있습니다.분자는 또 원자들이 모여서 생긴 것이고, 원자는 또 소립자들이 모여서 생긴 것입니다. 바위가 커다랗게 나타났지만 그 내용을 보면, 분자→원자→입자→소립자→쿼크입니다.
지금까지 물리학의 성과를 보면, 물질세계의 가장 기본적인 알갱이는 쿼크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소립자까지는 질량을 가진-아주 미세하긴 하지만-물질적 알갱이라 말할 수 있지만, 궤크 자체는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몇 개의 궤크가 결합하면, 물질의 최소단위인 소립자를 구성합니다. 마치 물질과 비물질의 중간자적 위치에 서 있는 셈입니다. 따라서 궤크는 결합하지 않는 상태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대물리학은 궤크가 원자핵 속에서 시시각각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하고 있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5. 원자론-만물의 근원은 원자다
옛 부터 많은 사람들은 만물의 근원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기울여 왔습니다. 그리스 철학은 원래 만물의 근원인 아르케(arche)를 탐구하는 데서 비롯되었는데, 차음 탈레스((bc 624~484)가 그것은 ‘물’이라 대답한 이래, 여러 가지 주장이 나왔습니다.
한편 헤리클레이투스(bc 544~484)는 만물의 본질은 오히려 끊임없는 변화로 보고 “만물은 유전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이러한 자연철학은 메모크리토스(Democritus, B C. 460~370)에 이르러 절정에 도달하였는데, 그는 '모든 물질은 원자라고 부르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아주 작은 입자가 무수히 모인 것'이라는 원자설을 주장했습니다. 그는 "원자는 더 쪼갤 수 없는 작은 입자이며, 원자는 항상 운동하고 있고, 그 운동 때문에 다른 원자와 충돌한다. 또한 원자는 모양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성질도 제각각이다."라고 설명했습니다. 그의 원자설이 전부 옳은 것은 아니지만, 2,500여 년 전에 이러한 원자이론을 말한 것은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한편 그리스의 위대한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든 물질은 흙ㆍ공기ㆍ물의 4원소로 이루어져 있고, 우주 공간은 에테르(ether)가 차지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설'은 1808년에 발표된 돌턴(Dalton)의 원자설이 사실임을 인정하게 된 20세기 초까지 믿고 있었습니다. 돌턴이 제시한 원자의 속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물질은 원자라고 부르는 더 분할할 수 없는 작은 입자로 구성되어 있다.(후에 양성자, 중성자, 전자 등이 발견되어 파기.)
2) 같은 원소의 원자들은 동일하며, 같은 성질들을 갖고 있다.(동위원소들과 이온 발견으로 파기.)
3) 화합물은 다른 원소들의 원자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작은 정수비로 결합되어 있다.
4) 화학 반응은 단순히 원자들이 자리를 옮겨서 다른 조합을 이루는 것이다.
5) 원자는 새로 생성되거나 사라지거나 다른 원자로 바뀔 수 없다.(핵융합, 핵분열의 발견으로 파기.)
6) 두 종류의 원자가 결합하여 만들어지는 화합물이 한 종류라면 두 종류의 원자가 1:1의 비례로 결합한 이원자 화합물이다.
그러나 현대가학이 진전되면서 이 원자설은 잘못된 것임이 드러났습니다. 원자는 더 작은 입자인 소립자들의 모임에 의해 이루어져 있음이 밝혀진 것입니다. 톰슨에 의해 전자가 발견되고(1897년), 리더퍼드에 의해 원자핵이 발견됨으로써(1911년), 보이에 의해 원자의 모형이 제시되었습니다(1913년). 원자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최소의 알맹이가 아니라, 가운데 핵이 있고 그 주위를 전자가 돌고 있으며, 그 중간은 빈 공간임이 알려졌습니다. 이와 함께 원자의 크기도 계산되었습니다.
그리고 일본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인 유카와 히데키(1935년)에 의해 핵은 양성자와 중성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사이를 왕래하며 결합시켜 주는 중간자가 있음도 밝혀졌습니다. 그 외에도 다수의 소립자가 발견됨으로써 이들을 소립자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원자를 구성하고 있는 것은 소립자이며, 바로 이 소립자의 결합 관계에 의해 여러 가지 원자가 마들어 졌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여기서 핵 변화를 발견하게 되고, 핵 변화 과정에 발생하는 어마어마한 에너지 차이를 이용해서 드디어 원자폭탄(핵분열), 수소폭탄(핵융합)을 만들게 됩니다. 원자와 원자가 결합해서 다른 원자가 되기도 하며, 원자가 분열해서 다른 원소의 원자가 되기도 합니다.
자연계는 지금까지 애기한 전자ㆍ양성자ㆍ중성자ㆍ중간자와 같은 이들 소립자의 결합방식과 비율에 따라 아주 단순한 원소에서부터 대단히 복잡한 원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물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소립자가 물질의 근본알갱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자연계에 존재하는 원소의 종류는 92개이지만 언소의 본질이 규정된 이후론 실험실에서 인위적인 조절로 인고원소들이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대개가 방사성 동위원소들입니다.
원자를 인간의 힘으로 만둘 수 있다는 것은 사실 과학의 개가였습니다. 이 같은 원자의 분열이나 융합은 이를 통해 원자가 결코 단독자일 수 없음을 증명한 셈입니다.
그렇다면 소립자도 그 근본을 이루는 다른 무엇이 있지 않을까요? 금세기 중반의 물리학 분야는 소립자를 구성하는 퀘크(quak)의 존재를 밝히는 데 집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80년대 노밸 물리학상의 주종은 퀘크의 발견자들이었습니다. 현재까지 발견된 퀘크의 종류는 6개입니다.
지금까지 물리학의 성과를 보면, 물질세계의 가장 기본적 알갱이는 퀘크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소립자까지 는 질량을 가진-아주 미세하긴 하지만-물질적 알갱이라 말할 수 있지만 퀘크는 그 하나하나의요소만을 보고는 보통의 입자들과는 매우 다른 특별한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학’이라는 글자를 생각해 봅시다. ‘학’은 하나의 글자지만 학을 구성하는 자음과 모음, 즉 ㅎㆍㅏㆍㄱ은 어떤 의미를 갖는 단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퀘크도 이와 같습니다. 퀰크 자체는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지만, 몇 개의 퀘크가결합하면 물질의 최소 단위인 소립자를 구성합니다. 마치 물질과 비물질의 중간자적 위치에 서있는 셈입니다. 따라서 퀘크는 결합하지 않는 상태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대물리학은 퀘크와 비물질이라는 막다른 골목에까지 도달했습니다. 곧 비물질에서 퀘크로, 퀘크에서 물질계의 출발인 소립자로 나오는 과정이 자연계의 근본인 것입니다. 무(無)와 유(有)의 중간을 자르듯 구분해서 끊어낼 수 없음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쿼크는, 존재의 본질은 공(空)이며, 공은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지만(非有非無), 공 가운데는 묘유(眞空妙有)가 있다'는 불교사상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6. 빅뱅이론-우주는 150억 년 전에 ‘무(無)’의 상태에서 갑자기 뜨거운 불덩이로써 태어났다(폭발했다)
우주의 기원에 대해서 과학이 발달한 오늘날에 와서는‘빅뱅(big bang)이론’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받아 왔습니다. 빅뱅설에 의하면 우주는 150억년 전에 높은 진공에너지를 가진 고밀도의 한 점(‘특이점’이라 부름)에서 대폭발을 하여 지금까지 팽창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이론은 우주의 탄생 비밀을 밝히는 데는 어느 정도 성공했으나, 특이점이 어디서 왔는지, 즉 빅뱅이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결점을 보완하여 최근 새로 등장한 이론이 현재 우주 연구의 선두를 달리는 영국의 천재 물리학자 스티브 호킹(StephenW.Hawking)과 소련 출신 비렝킹(현재 미국 국적) 등에 의한 ‘양자 우주론’입니다.
우주 생성 초기단계는 10의43제곱분의 1초라는 아주 짧은 순간을 말하는데, 이것은 양자역학으로만 설명이 가능합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우주는 150억 년 전에 특이점이라는 ‘점’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시간도 공간도 물질도 없는 ‘무(無)’의 상태에서 갑자기 뜨거운 불덩이로써 태어났다(폭발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무’의 상태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고, 소립자보다 작은 초극미의 무한이라 할 수 있는 에너지로 가득 차 있는 상태였습니다.
우주가 팽창해 가는(나선형 모양으로 팽창) 과정에서 은하계와 별이 태어나며 현재에 이르렀습니다. 필요한 온도 등의 조건을 갖춘 행성에서는 생명체가 태어났으며, 우리 태양계는 46~47억 년 전에 만들어 졌고, 지구상에 최초의 생물이 등장한 것은 40억 년 전입니다. 그리고 약 5만 년 전에 현 인류의 조상인 호모사피엔스 사피엔스가 지구상에 등장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공간도 팽창하고 시간도 미래로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현재로는 우주가 영원히 팽창을 계속할 것인지, 다시 수축할 것인지 알 수 없다고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우주는 시작도 끝도 없이 성주괴공[成住壞空]한다고 말씀하였는데, 만약 우주가 팽창과 수축을 반복해 빅뱅이 여러 번 있었다면, 이는 불교의 교설과 상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맺음말(一切唯心造)
지금까지 우주의 근원[본질}에 살펴보았는데, 기독교에서는 우주는 하나님이 창조한 것이라 말하고, 유교에는 천명사상이 짓게 베어 있으며, 도교에서는 천하 만물은 무에서 나왔다고 밀하고 있고, 불교에서는 존재의 본질은 은 공(空)이라 하고, 자연과학자들은 물질의 근본은 원자라고 하며, 우주과학자들은 우주는 150억 년 전에 ‘무(無)’의 상태에서 갑자기 뜨거운 불덩이로써 태어났다(폭발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가르침이 진리인지, 그 해답은 각자의 몫으로 돌리기로 하고, 끝으로 한 말씀만 더 드리고자 합니다.
불교 『화엄경』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약인욕요지 삼세일체불(若人慾了知 三世一切佛)- 만약 어떤 사람이 과거ㆍ현재ㆍ미 래의 부처님들에 대해 알고 싶으면,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마땅히 법계의 성품을 관찰할 것 이니, 모든 것은 마음이 지은 것이니라..
여기서 법계성이란 일체만유의 근본 성품, 즉 마음의 본 성품(涅槃妙心)을 가리킵니다. 만약 사람들이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를 알고 싶다면, 마땅히 법계의 성품을 관하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법계의 성품(우주 존재의 참 모습)이 바로 나의 성품이고, 법계의 근본이 나의 근본이며, 나의 근본은 ‘마음’에 다름 아니기 때문입니다. 일체유심조는 마음이 세상만물은 창조했다는 뜻이 아니라 일체만유는 모두 내 마음이 지어낸 것이라는 것입니다 .
밤하늘의 보름달을 보고 슬픈 감정에 사로잡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럼 달이 그 사람에게 슬픔과 행복감을 준 것일까요, 아니면 자기 스스로 달을 보고 슬픈 감정과 행복감을 일으킨 것일까요? 같은 것을 동시에 바라보는 데도 보는 이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것입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말씀 중에 “밉게 보면 잡초 아님이 없고, 곱게 보면 꽃 아님이 없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세상을 보는 내 마음의 눈이 어떤 상태냐에 따라 그 마음 그대로 세상이 보인다는 의미입니다.
이 지구상에 75억 명이나 되는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75억 명이 보는 세상이 다 다릅니다. 사람은 자기 눈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입니다.
나폴레옹은 유럽을 제패한 황제였지만 “내 생애 행복한 날은 6일 밖에 없었다.”고 고백했고, 두 눈과 두 귀가 멀었던 헬렌 켈러는 “내 생애 행복하지 않은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는 고백을 했습니다.
검은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면 세상이 온통 검게 보이고 푸른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면 세상이 온통 푸르게 보이듯이, 어떤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느냐에 따라서 이 세상은 살 맛 나는 세상이 되기도 하고 괴로움과 슬픔의 세상이 되기도 합니다. “아직 반시간이 남았다.” 는 것과, “반시간 밖에 남지 않았다.” 는 것은 분명 다릅니다.
긍정의 눈으로 세상을 보느냐 부정의 눈으로 세상을 보느냐, 낙관의 눈으로 세상을 보느냐 비관의 눈으로 세상을 보느냐에 따라서 이 세상은 극락이 되기도 하고 지옥이 되기도 하며, 행복한 인생이 되기도 하고 불행한 인생이 되기도 합니다.
행복은 우리의 마음먹기에 달린 것입니다. 어떤 상황이나 조건 때문에 행복하고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나의 마음가짐이 행복과 불행을 좌우합니다.
우리는 행복과 불행은 상황에 따라 또는 환경에 따라 온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착각입니다. 행복은 누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시간), 여기(공간), 자기 인연(인간, 사물)에게, 일심으로 대하게 되면, 그곳이 어디든 여기가 바로 천상이고, 극락일 것입니다.
모든 것이 마음의 산물이라면, 그 마음을 어떻게 쓸 것인가? 그 해답은 스스로가 내려야 할 것입니다.
(2023. 6. 7. 경주관음법회 초청 법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