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본문 말씀을 통한 더 깊은 묵상
아마 이 땅에 처음 사람들이 나타나면서 그들이 행했던 행동중에 대표적인 것은 바로 결혼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들이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그 가정에서 또 다른 생명을 탄생하게 하여 그들이 성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게끔 양육하는 일련의 일들이 바로 결혼을 통해서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살다보면 마음이 맞지 않을 때도 있고 이런저런 일들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결혼의 반대말인 이혼이라는 단어도 생겼습니다. 즉 결혼했던 사람들이 갈라서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이혼을 했을 때 단순히 결혼한 상태였던 두 사람의 마음이 찢어지고 아픈 일이 생기는 것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로부터 수군거림을 당하는 그런 일들이, 특별히 여자들에게 생겼습니다. 남자들에...게도 있었지만 특히 여자들에게 이혼이란 큰 수군거림으로 남는 일이 흔했습니다. 하지만 어찌했든 결혼과 이혼은 아주 오래 전 고대로부터 이루어졌던 일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모세를 통하여 결혼의 이야기들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들려주셨습니다. 또한 더불어 이혼에 대한 것도 이야기해주셨습니다. 어느 때에 이혼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특별히 신명기 24장 1-4절에서는 결혼과 이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이혼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일단 남자가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남자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혼할 수 있다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매우 불합리하고 불공평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주셨고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는 이 말씀을 잘 따르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특별히 남자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다는 것이 명확하게 정의내려지지 않았기에 이후에 유대인 랍비들은 이것이 무엇인지를 더욱 더 분명하게 세분화하여 정의하는 일들을 행했습니다.
그런 찰나에 예수님께 질문이 들어왔습니다. 남자에게 수치가 되는 일이 과연 무엇인지, 과연 합당하게 이혼을 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다른 랍비들에게 하는 것처럼 대답을 원한 것입니다. 보통의 랍비들은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사항들을 열거해 왔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정말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는 것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달랐습니다. 그건 애초부터 하나님께서 정말 원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던, 모세에게 주셨던 율법보다 더 먼저되는 창세기의 이야기를 가지고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구절만 놓고 보았을 때도 하나님께서 동성간의 결혼을 금지한 적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다시 한 번 재고해 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이 되어 한 가정을 이루고 그 가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그 분과 함께 펼쳐나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결혼을 누구도 나눌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이혼이 가능하다고 말한 것은 너희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한없이 멀어졌던 죄인들로서 배우고 형성해온 마음이 하나님께서 원래 원하시는 그것과 다르기에, 원래는 원하시지 않지만 그 마음의 문제를 따라 이혼을 할 수도 있는 길을 형성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이 율법은 주어졌던 그 당시에는 불완전한 것이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남자에게 수치가 되는 것이 있다면 이라는 단서조항을 두셨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분명하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생각하기 나름이었습니다. 마음먹기에 따라 달린 것입니다. 즉 남자가 그 마음에 그 어떤 것도 수치스럽게 여겨지지 않는다면 이혼은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그저 자신의 완악한 마음을 따라 그냥 행동했습니다. 그렇게 많은 여자들에게 아픔을 주었습니다. 깨어지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율법이 주어진 이 시기는 하나님께서 사람들과의 언약적 관계를 완전하게 세우신 것이 아니라 그 분의 거룩하신 뜻에 따라 제한적으로 맺으셨던 것이었기에 이혼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오히려 만약 사람들이 이 구절을 가지고 수치가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남자들을 위한 것이 아닌 여자들과 다른 사항들을 고려하며 생각했었다면, 즉 마음의 완악함이 아닌 하나님께서 보이셨던 무제한적인 사랑에 의거하여 해석하고자 하였다면 그들은 이 구절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이혼을 허락하셨다고 생각하지 않고 아, 이 말씀이 우리의 완악함 때문에 이렇게 주어진 것이었구나로 생각하며 오히려 이혼을 하지 않는 방향으로 생각을 발전시켰을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말씀하신 누가복음 15장의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로 말입니다.
돌아온 탕자에서 나오는 아버지의 모습은 바로 예수님께서 설명하시는 그 하나님이셨습니다. 사랑으로 안으시고 마음의 완악함을 깨뜨리고 회개하며 돌아오는 아들을 무조건적으로 용서하며 또한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질투하는 큰 아들을 끌어안고 위로하며 사랑을 표현하는 그 아버지가 바로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그 크신 사랑으로 아무런 조건이 없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을 전적으로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에 대한 율법을 허락하신 것이었습니다. 눈높이를 맞추어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또 깨달을수록 그 율법은 갱신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님을 통하여 갱신하셨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이 바로 사람에게 주어진 그 마음의 문제라는 것을 지적하시고 성령 하나님으로 하여금 바꿔 가시며 말입니다.
-이은성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