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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1_2014년 가람문학기행(2/9), 부석사1
2014.5월 29일. 목요일 / 한국가람문학회
역사학자 최순우 선생의 글 <부석사 무량수전>을 여러 구절로 나누어서 감상합니다. (1~12)
1. 소백산 기슭의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 사람도 인기척이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 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히 젖고 있다. * 무량수전 앞 신라시대 석등, 국보 17호
2. 무량수전, 안양문, 조사당, 응향각들이 마치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 무량수전 ; 국보 18호. 고려 후기 목조 건축이다. <무량수전>이라는 현판은 고려 공민왕의 친필이다. 홍건적의 난 때 공민왕이 안동까지 피난 왔을 때 쓴 것이다.
3.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 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번이고 자문자답했다.
4. 무량수전은 고려 중기 건축이지만 우리 민족이 보존해 온 목조 건축 중에서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오래된 건물임이 틀림없다.
5. 기둥 높이와 굵기, 사뿐히 고개를 든 지붕 추녀의 곡선과 그 기둥이 주는 조화, 간결하면서도 역학적이며 기능에 충실한 주심포의 아름다움, 이것은 꼭 갖출 것만을 갖춘 필요미이며 문창살 하나 문지방 하나에도 나타나 있는 비례의 상쾌함이 이를 데가 없다.
* 무량수전은 외관 못지않게 내부도 아름답다.
6. 멀찍이서 바라봐도 가까이서 쓰다듬어 봐도 무량수전은 의젓하고도 너그러운 자태이며 근시안적인 신경질이나 거드름이 없다.
* 서쪽에 앉아서 동쪽을 바라보는 아미타불이다. 흙으로 구워 만들고 도금한 소조불상인데 10세기경 고려시대 대표적인 불상이다. 이 <무량수전의 소조 아미타여좌상>은 국보 제45호이다.
7. 무량수전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지체야말로 석굴암 건축이나 불국사 돌계단의 구조와 함께 우리 건축이 지니는 참 멋, 즉 조상들의 안목과 그 미덕이 어떠하다는 실증을 보여주는 본보기라 할 수밖에 없다.
8. 무량수전앞 안양문에 올라앉아 먼 산을 바라보면 산 뒤에 또 산, 그 뒤에 또 산마루, 눈길이 가는 데까지 그림보다 더 곱게 겹쳐진 능선들이 모두 이 무량수전을 향해 마련된 듯싶어 진다.
9. 이 대자연속에 이렇게 아늑하고도 눈맛이 시원한 시야를 터줄 줄 아는 한국인, 높지도 얕지도 않은 이 자리를 점지해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한층 그윽하게 빛내 주고 부처님의 믿음을 더욱 숭엄한 아름다움으로 이끌어 줄 수 있었던 뛰어난 안목의 소유자, 그 한국인, 지금 우리의 머리 속에 빙빙 도는 그 큰 이름은 부석사의 창건주 의상대사이다.
10. 이 무량수전 앞에서부터 당간지주가 서 있는 절 밖, 그 넓은 터전을 여러 층 단으로 닦으면서 그 마무리로 쌓아 놓은 긴 석축들이 각기 다른 각도에서 이뤄진 것은 아마도 먼 안산이 지니는 겹겹한 능선의 각도와 조화시키기 위해 풍수사상에서 계산된 계획일 수도 있을 것 같다.
11. 이 석축들의 짜임새를 바라보고 있으면 신라나 고려 사람들이 지녔던 자연과 건축물의 조화에 대한 생각을 알 수 있을 것 같고, 그것은 순리의 아름다움이라고 이름짓고 싶다.
12. 크고 작은 자연석을 섞어서 높고 긴 석축을 쌓아올리는 일은 자칫 잔재주에 기울기 마련이지만, 이 부석사 석축들을 돌아보고 있으면 이끼 낀 크고 작은 돌들의 모습이 모두 그 석축 속에서 편안하게 자리잡고 있어서 희한한 구성을 이루고 있다. <끝> --------------------------------------------------------------------------
* <무령수전앞 팔각석등>은 신라 경문왕(861~874) 때 만들어 진 것. 화사석에는 4구의 보살상이 양각돼 있다. 국보 제17호
13.1300여 년 전 의상대사가 낙산사에서의 수도를 마치고 나서 곧바로 부석사를 창건했다. 문무왕 16년 (676년) 왕명으로 의상이 창건했다고 삼국사기는 전한다. 부석사는 해발 819m 소백산 자락의 봉황산 중턱 에 자리잡았다. 창건 연대와 창건주 고승 의상의 활약을 확실히 알 수있는 드문 절이다. * 안양루 ; 安養이란 극락의 다른 이름이다.
14. * 의상은 서른 여섯 나이에 당나라에 갔다. 종남산 지엄 스님에게서10년간 배웠다. * 무량수전에서 내려다 보는 경관이 장관이다.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2>> 에서 경관을 소홀히 소개하는 것을 안타까와 하면서 <안양루에서 소백산맥을 바라보는 경관을 국보 제0호로 지정하자>고 제안하는 우스개를 하였다. 15. 무량수전 좌측의 뜬돌(부석) 의상이 중국 유학을 갔을 때, 그는 선묘라는 여인을 만난다. 선묘는 스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그 꿋꿋한 신심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가슴을 태우면서 의상이 무사히 공부를 마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의상은 공부를 끝내고 표연히 귀국을 서두른다. 16. 무량수전 좌측의 뜬돌(부석) 선묘는 먼발치에서나마 스님을 뵙고자 했으나 이미 의상을 태운 배는 부두를 벗어나고 있었다. 그 때 선묘는 벼랑 끝에서 발원한다. '내가 죽어 용이 될 수 있다면, 스님의 뱃머리를 지키게 하옵소서 하고 자결한 선묘는 용이 되었고 의상이 탄 배의 뱃머리에서 그를 지켜 무사히 귀국하게 한다.
17. 무량수전 좌측의 뜬돌(부석) 또 부석사 터를 잡으려 할 때, 그 일대의 부랑배들 때문에 절을 세울 수가 없었다. 선묘룡은 집채만한 바위를 허공에서부터 날려 그들을 쫓아낸다. 지금도 부석사 무량수전의 곁에는 큰 바위가 남아 있다. 그 바위를 부석이라고 한다. 선묘룡은 석룡으로 화하여 무량수전과 마당 밑에 묻혔다는 전설이다. 송나라 찬녕이 편찬한 <송, 고승전>에 의상의 이야기다. 13세기 일본인에게 감동을 주었다.
18. 선묘의 사랑이 일인에게도 감동을 주어 일본의 의상 선묘녀 숭배 흔적이 있다. 일본 경도시 서북쪽 50리 밖에 도가노오산 코오지(高山寺)에는 신라 고승 원효 의상 당녀 선묘를 모시고, 고산사 입구에는 선묘명신사가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고 한다. 그 유물은 일본 경도 국립박물관에 옮겨졌는데, 12세기 일본인 작품으로 의상과 원효 일대기 그림과 행장을 장장 80M 장축 6권으로 만든 것이다. 그중에 의상과 선묘도 두루말이 그림 (폭 31.5㎝, 길이 6m)은 일본의 국보이다.
19. 무령수전 우측 뒷편 작은 전각은 선묘각이다.
20. 선묘각 안의 선묘화
21. 선묘각의 선묘 이야기 벽화그림
22. 선묘각의 선묘 이야기 벽화그림
23. 선묘각의 선묘 이야기 벽화그림
24. 선묘각의 선묘 이야기 벽화그림
25. 선묘각
26. 무량수전 우측 언덕의 고탑 의상이 편 화엄사상의 요체는 연기의 정법을 바로 앎으로써 서로 상대적인 관계에 의해서 유지되는 이 세상의 모습을 바로 보고 거기서 하나와 전체, 일념과 무량한 시간, 진리와 현상의 운용을 중도의 관념으로 꿰둟어 본다는 것이다.
27. 무량수전 우측 언덕의 고탑 왜 <무량수전>이라고 칭하는가? ; 불교에서는 스스로의 깨달음을 통해 해탈을 이루려는 자력신앙과 불가사의한 힘을 가진 부처님에게 귀의함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타력신앙의 요소가 있다. 아미타신앙은 타력신앙을 대표한다. 아미타불은 서방극락세계를 관장하는 법신불이다. 끝없는 지혜와 다함없는 수명을 가졌기에 <무량수불>이라고도 하며, 아미타불에 대한 경전을 정토삼부경, 무량수경 등이고, 아미타불을 모시는 불전은 <극락보전, 무량수전, 보광명전, 아미타전> 등으로 칭한다. 부석사는 아미타불을 모심으로써 대웅전이 아니라 <무량수전>이라고 칭하게 됐다.
28.무량수전 우측 언덕의 고탑, 소박하나 아름답다.
29. 무량수전 우측 언덕의 고탑, 소박하나 아름답다.
30. 무량수전 우측 언덕의 고탑, 소박하나 아름답다.
31.무량수전 우측 언덕의 고탑앞의 석등, 소박하나 아름답다.
32. 스님들 사적 공간
33. 스님들 사적 공간
34. 스님들 사적 공간
35. 귀국후 의상은 산천을 섭렵하고 '고구려의 먼지나 백제의 바람이 미치지 못하고 말이나 소도 접근할 수 없는 곳' 이라 하면서 이곳 부석사 지형을 골라,서 여기야 말로 법륜의 수레바퀴를 굴릴 만한 곳이라고 생각하여 터전을 잡았다. .
36. 무량수전 오른쪽 삼층석탑의 위치가 아리송하다.
37.터가 센 곳에 탑을 세워 기를 누르는 비보탑 역할을 생각한다.
38. 최순우 선생의 글 <무량수전> 글을 문학기행 버스에서 읽어 줬다. 유홍준도 최순우 출판기념회에서 읽어 줬다고 한다. 명문이다.
39. 부처님이 열반한 후 약 500년 동안은 무불상 시대, 불상을 만들지 않았다. 부처의 족적이나, 법륜, 깨달음을 얻을 당시에 앉았던 자리인 금강보좌 나 보리수나무가 부처님을 상징했다. 불상 제작은 1세기 말경 헬레니즘 문화(알렉산더 대왕이 인도 서쪽까지 정복하면서 그리스문화와 인도 불교문화의 만남)의 영향을 받아 간다라지방과 마투라 지역에서 시작됐다. 이후 불상 제작은 대승불교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우리나라에서는 대략 삼국시대 불상이 제작되어 독자적 양식으로 발전하였다. 불상의 제작은 신앙심의 고취와 불교 미술의 발달을 가져왔다. 40. 조사당, 국보 제19호. 1377년 건립. 조사당 벽화는 국보 제46호. 제석천 범천 사천왕을 그린 벽화는 벽채로 뜯어서 현재 유리상자에 넣어 무량수전에 보관중이다.
41. 조사당 안내문을 다시 썼다.
42. 조사당의 선비화(골담초) 철망. 단칸 맞배지붕 단아한 주심포 양식이다.
43. 조사당의 선비화(골담초) 철망. 철망은 왜 하였나? 잎을 달여 먹으면 애기 갖는다는 헛소문 때문에 나무가 수난을 당하기 때문이다.
44. 퇴계 이황 선생이 조사당의 선비화(골담초)에 대한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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