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 최희명
서른 해가 넘도록 푸른 눈만 보면 달려가 붙잡고 물어본 말은 “Are you Amarican?”이었다. 상대방이 그렇다고 하면 미국에서 사람 찾는 방법을 묻곤 했다. 피디 수첩이라는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공개적으로 찾기도 했다. 미 국무성에 편지도 보내봤다. 지치지 않는 내 노력에 하늘도 감동을 했는지 어느 미국인 선교사로부터 그 방법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인터넷 사이트 ‘화이트페이지’의 사람 찾기 창이었다. 기계가 인간을 찾아주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옷깃을 스쳐간 사람도 그렇거니와 그리움이 공글러진 기적 같은 재회라면 가히 인연 중의 인연이리라.
이 세상에서 자매로 인연을 맺은 특별한 사람, 열일곱 살 이후의 기억은 그리움 밖에 없는 여자, 언니는 삼십 년 넘게 미국 동남부 테네시주의 오클랜드라는 시골에 살고 있었다. 서로 가지를 땅속에 묻은 지 참으로 오래다. 그리움 하나로 먹빛 시간을 통과해서 휘묻이 한 것처럼 자매지정이 새로운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 사이에 태평양이 출렁거리지만 우리들의 뿌리는 깊고 짱짱하다. 또다시 연락이 두절되는 상황을 미리 예방하며 한 땀 한 땀 정을 수놓고 있다.
언니는 어머니를 닮아서 머리카락이 검고 숱이 많았다. 순하고 인정이 많아 늘 손에 쥔 것이 없었다. 아버지를 닮은 나는 숱이 적은 갈색 머리에 희미한 눈썹을 하고 누구에게 지는 걸 싫어했다. 어릴 적 우리의 다툼은 늘 나의 승리로 끝나곤 했다. 그러나 중년의 모습을 웹캠을 통해 마주하니 어쩌면 이리도 쌍둥이처럼 닮았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문화나 음식에 대한 기호는 물론이고 살아가는 방법도 비슷하다. 둘 다 혼자라는 점과 각자 두 아들의 명암까지 닮아 있다. 그리고 나 또한 이미 오래전부터 퍼주는 걸 즐기니 우리는 언젠가는 다시 이어질 가지의 생명으로 살아온 것이 분명하다.
새로 들어 온 아르바이트생이 아들 또래라 궁금한 것이 많다. 소통이 안 되고 있는 자식의 마음이라든가 가치관, 요즘 아이들이 중요하다고 판단하는 문제들에 대해서이다. 대화를 하다가 우연히 그 학생이 다녔던 고등학교가 젊은 날 나의 연인이 근무하던 곳이라는 걸 알았다. 아르바이트생이 그의 제자라는 사실도, 그가 최근까지 예전의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는 사실도 재미있다. 나보다 더 좋은 혼처 만나 결혼해서 자식 낳고 산다는 사실만 풍문으로 들었을 뿐이다. 옷깃을 스친 인연이 아팠던 옛 사랑을 들추어내는데도 아팠던 만큼 단단해진 것인가. 뿌리 깊은 화인과는 달리 마음은 고사목처럼 감각이 없다. 시간의 효력이 놀랍다.
짧은 만남 긴 이별이라는 표현은 우리에게 참으로 적절했다. 인연의 시작은 호감에 대한 동의에서 연결되는 것 같다. 그가 좋아하는 앤 머레이를 나도 즐겨 듣고 내가 좋아하는 글라디올러스를 그로부터 선물 받았다. 그의 시선에서 빛이 나는 파란색 옷을 즐겨 입었고 내가 읽던 김성동을 그 역시 탐독했다. 딱 일 년이었다. 그의 대학졸업이 다가 왔다. 부모가 논 팔고 소 팔아 자식 대학 보내던 시절이었다. 나보다 넓게 열려 있던 그의 앞길에서 물러나 주는 일이 마지막 자존심 같았다. 쿨하게 그를 떠난 후 몇 해를 방황했던가. 그런 나와 상관없이 어쩌다 먼발치에서 스쳐 본 그는 잘 먹고 잘 사는 표정이었다. 모진 마음이 들면서 방황은 끝났다.
딱 서른 해가 지나갔다. 그동안 행여 다칠 새라 그 누구에게도 가슴을 열지 않았다. 칠순의 무용가도 아직 사랑이 아름다워 결혼을 하는 시대가 아닌가. 아무래도 내 사랑은 불구가 된 듯하다. 모든 욕심과 기대와 절망이 탈색하고, 관조의 시간이 되었을 때 우연히 그와 한 번 만났으면 좋겠다. 만나, 내 안에서 경직된 인연의 고리를 해탈한 듯 부드럽게 펼 수 있다면 지난날들이 조금이라도 평탄하게 보이지 않을까. 소중한 인연의 기억을 곱게 마무리해서 묻으면 가뿐해 질까. 소설의 한 장면처럼, 삶을 통과한 주름진 얼굴로 서로에게 은빛 친구가 될 수도 있겠다.
두문불출인 아들의 정서가 걱정돼 강아지를 사 준 적 있다. 하얀 털을 가진 말티즈 수컷이었다. 자주 괴롭히는 두 아들보다 덤덤한 나를 오히려 더 좋아했다. 집에 돌아오면 뒷다리로 서서 애타게 매달려 왔다. 안아줄 때까지 보채어 목구멍에서 바람 소리가 날 지경이니 어찌하겠는가. 짐승 만지는 걸 끔찍하게 싫어했지만 머리라도 쓰다듬어 주는 수밖에. 그렇게 정이 들어가는 수밖에. 목숨 없는 정물들에도 정을 주고 사는 건 어느 시인의 표현처럼 외로워서일 것이다. 한집에서 먹고 자는 생명임에랴. 일 년 가까이 키우다보니 어미의 들고남에 관심이 없는 자식들보다 더 기특한 존재가 되었다. 순하고, 무엇보다 아프지 않아서 우리 집 경제를 해하지 않으니 얼마나 유익한 짐승인가.
낯선 암컷의 유혹에 홀려 집을 나갈 때까지는 그랬다. 지나치게 부산스럽던 반가움의 부재에 대한 허전함이 거의 사라질 무렵이었다. 기다리던 버스가 오지 않아 발을 구르던 내 눈에 그 녀석이 잡혔다. 이름을 부르자 꼬리를 흔들며 달려와 가슴 깊이 안겨 오는 게 아닌가. 모양새가 말끔한 걸 보니 누군가가 데려다 키우는 모양이었다. 이산가족을 만난 듯 반가워 자연스레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때 버스가 도착했고 녀석은 놀라서 달아나 버렸다. 버스를 보내고 강아지를 찾았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망신 좀 당하고 지금까지 녀석과 함께 살고 있을 것인가. 아무래도 인연이 아닌 것인가.
세월이 흐를수록 선연한 기억으로 남는 모습들이 있다. 오매불망 재회를 기다리다 우연히 만나지면 인연을 넘어 필연이리라. 부모자식 간에도 인연의 성향은 다르다 한다. 부부는 또 얼마나 질긴 만남인가. 천만번 스치고 소멸해간 관계이거나 단한 번의 악수로 심장에까지 각인되었거나 운명 아닌 것이 없다. 다시 만나고자 염원하여 이루어진 해원을 말해 무엇하랴. 가다듬고 어루만져 서로에게 고마운 사람이면 재산 중 재산이다. 종이 한 장에 여반장이 되는 세상이라 해도 아직 그리움까지 변질되지는 않았기에 여명이나 노을에 가슴을 담구기도 하는 것이다. 정을 섞으며 살아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