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자체가 쇠퇴한 것은 아닙니다. 또한 기존의 작가들이 쇠퇴한 것이지 문학의 광맥이 고갈된 것은 아닙니다.
p11
지금까지 내 가슴속에 어떤 사람이 한 말이나 어떤 책 속의 문장 같은 것이 새겨진 예가 없다.
p12
동물원에서 죽은 지 며칠이나 지나 쪼글쪼글 말라비틀어진 새끼 원숭이를 질질 끌고 가는 어미 원숭이를 보았을 때가 그랬다. 그 광경을 보았을 때 나는 어느 누구의 설명 없이도 커다란 진실을 획득한 느낌이 들었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 없다.
나는 다른 무엇보다 이미지의 세계를 신뢰한다.
젊음이란 육체와 정신의 허세
p13
"자네는 국가니 민중이니 하고 한데 뭉뚱그려 가볍게 말하는데, 스스로 일하여 돈을 번 일조차 없지 않느냐"
"내 말과 그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라고 그는 되물었다. "돈이 문제가 아니죠."
"그럼 그 옷과 구두는 누가 산 거지?" 라고 나는 다시 물었다.
"그야 어머니가 사주셨죠……"
p15
눈앞에 펼쳐져 있는 투명한 세계에서도 실제로 거기에 몸담고 보면 예상한 것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와 전혀 다른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p18
소설은 햇빛이 있는 동안 써야 마땅하다. 낮의 햇살은 문장을 환희 비추어 진위 여부를 명백하게 분별해준다. 진짜 문장은 글에 묵직하고 선명한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가짜 문장은 그림자도 없이 글자를 공중에 띄워버리고 만다.
무(無)는 죽음으로 이어지는 이미지를 부여하고, 죽음은 그것을 자각한 자에게 무를 강요한다.
p23
통신사의 문장은 무엇보다 정확하고, 그 다음으로 간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틀을 넘어서는 내용이라면 마땅히 국제전화를 걸거나 직접 만나 얘기해야 할 것이다. 길고 구질구질한 전문을 볼 때마다 "왜 이렇게 아까운 짓을 하는 거지. 나중에 요금이 많이 나와서 당황해도 난 몰라" 라며 내심 혀를 찼다. 그렇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예술과는 거리가 전혀 멀었는지도 모르겠으나 아무튼 한가지 문체를 터득하게 되었다.
p24
헤밍웨이 소설을 주의깊게 읽게 된 것은 그 다음이다. 읽으면서 얕보아서는 안 될 문체라고 생각했다. 사뭇 가볍고 밋밋하게 느껴지는 문장 하나하나가 실은 충분한 계산과 탁월한 어휘 선택으로 완성되어 있었다.
p27
아무튼 (시인이란) 다를 주둥이만 살아 있는 역겨운 작자들이었다. 가까이 다가가면 이상한 냄새가 나고, 돈 때문에 곤경헤 처해 있어도 일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 다 똑같았다. 소설 운운하는 패거리들도 그 점은 마찬가지였지만, 시가 어쩌구저쩌구 하는 패거들에 비하면 그나마 나았다.
내게 시란 물로 희석하지 않으면 도저히 마실 수 없는 독주같은 것이었다.
p37
무릇 소설가란 이름의 인종은 학교 선생이나 중처럼 끊임없이 인간과 사회를 테마로 살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좋아하는 세계에만 온 신경을 집중시킬 수 있는 홀가분함 덕분에 즉 무절제한 사고에 브레이크를 걸 실질적인 체험이 뒷받침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중요한 테마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나머지 전혀 실태를 모르는 구석이 있다.
p36
다자이 오사무는 자신을 너무 부정한 나머지 죽었고, 마시마 유키오는 자기를 지나치게 긍정한 나머지 죽었다.
소설가가 책을 선전하는 이외의 목적으로 자기 작품 앞으로 나설 때에는 빈틈없는 주의를 기울이거나 아니면 단호하게 소설가이기를 포기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p39
운동이 부족하거나 기분 전환이 안 되었을 대가 집필에 전념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시기라는 것을 알았다. 요컨대 가벼운 노이로제 상태에 빠져 있는 편이 볼티지가 높아져, 글이 쓱쓱 써지는 것이다.
p41
그런데 출항한지 한두 주일쯤 지났을 무렵, 그런 자신이 갑자기 싫어졌다. 주위 사람들은 모두 유쾌하게 일하고 있는데 나 혼자만 잔뜩 찡그린 얼굴로 소설을 쓰다니 일하고 있는 그들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면서까지 취재를 하다니.
p49
나는 한 가지 기묘한 현상을 알게 되었다. 편집자들이 주로 작가의 범상하지 않은 구석에 감탄을 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곤드레가 되어 깊은 밤 대로에서 잠을 잔다거나, 처자식은 내일 먹거리도 없어 고민이라는데 태평하게 놀러 다니는 기행을 아주 대단하게 여기는 듯하였다. 마치 그런 기행의 횟수가 소설의 깊이를 재는 바로미터인 것처럼 여기는 것이었다.
p52
소설가처럼 약간은 남다른 직업이 아무런 의심도 저항도 편견도 없이 간단하게 받아들여지는 도회지에 오래 살다 보면, 요컨대 끊임없이 소설에 착 밀착되어 있는 생활에 길들고 나면, 오히려 소설이나 인간이 들여다보이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고 걱정스러웠다.
엇비슷한 생활에서 엇비슷한 작품이 태어나고, 엇비슷한 가치 판단에 의해 엇비슷한 평가가 가해지고, 마침내 독자의 취향마저 엇비슷해진다.
p53
요즘 작가들은 샐러리맨화 되고 있다는 기묘한 평가를 흔히 듣는다.
p54
자연과 인간의 관계는 훨씬 더 생리적이고 때로는 성(性)적이기까지 하다.
p55
마감 날짜나 생활비, 집요한 재촉 따위를 채찍질 삼아 소설이란 것을 쓰느라 방에 틀어박혀 몹시 긴장된 시간 속에서 작가라는 자신을 감금하는 짓은 산이나 벌판을 뛰어 다니는 도중에 생각하면 소름이 끼칠 만큼 끔찍한 일이다. 그것만으로는 충실한 작품을 낳을 수 없다.
p57
이미 주인공을 '나'로 하든 '마루야마 겐지'로 하든 더 나아가 소재를 자기 체험에서 얻었다고 주석을 달든 아무도 소설을 진실 그 자체라고 믿지 않는다. 만약 믿는 자가 있다면 세상 물정 하나 모르면서 문학에만 심취해 있는 소녀든지, 행복한 인생을 보내다 노망이 들었는데도 문학을 좋아하는 풍류객 정도일 것이다.
p60
공간은 작가의 재능을 백퍼센트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능하면 허상으로 해주었으면 좋겠다. 어딘가 비슷하지만 아무리 찾아 헤매도 없는 그런 공간을 무대로 삼아주었으면 한다.
그런데 공간이나 장소를 무슨 관광 안내 책자처럼 써갈긴 소설이 있는가 하면 제멋대로 감정을 날조하여 마치 공중 목욕탕에 걸려 있는 페인트 그림처럼 쓴 소설도 있는데 그런 작품들은 넌덜머리가 나게 하는 힘밖에 갖고 있지 않고, 독자에게 신뢰감을 주지 못하는 본보기 라고 생각한다.
p61
영화를 예로 들어 공간을 비교하면 상당히 흥미롭다. 왜냐하면 영화는 의식을 하든 안 하든 화면 가득 선명한 공간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문자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의 충격적인 힘을 가지고 영화는 공간을 정확하게 표현한다....... 그러나 그런 강렬한 공간이 있다고 해서 모든 영화가 재미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압도적인 공간이 최대의 장애물이 되는 경우도 흔하다.
로케이션의 경우 있는 그대로의 공간이 감독의 이미지에 충실한 경우는 드물다.
감독들은 공간에 대해 어쩔 수 없는 타협을 강요당하는 것이다.
p71
전문적인 평론가들은 틀림없이 레미콘처럼 튼튼한 위장을 갖고 있든가, 소화제를 대량 복용하고 있을 것이다.
p76
친구는 씁쓸히 웃으면서, 그저 매일매일 별 재미도 없는 일에 열심일 뿐이지, 라고 했다.
p84
등장인물에 대해서 나는 가능하면 적은 편이 좋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많은 인물들을 차례차례 등장시켜 스토리를 불려나가는 것은 현명한 방법이 아니라고.
p86
소설을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해서는 펜을 쥔 순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절제된 문장으로 시각적인 소설을 지향한다. 당시의 나로서는 그것으로 충분했고 그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왜 쓰는가'란 테마에 들러붙어 성공을 하는 사람들은 늘 평론가들이고 절대로 소설가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왜 쓰는 가' 자체가 과연 집필을 촉진하는 정열적인 힘으로 작용할 수 있을까.
p93
새로운 문학을 생산한다는 것은 자신의 체질에 적합한 새로운 문체를 개발하여 체득하는 일이며, 새로운 문체는 곧 인간을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보는 것이란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다.
진정한 새로움이란 강인하고 완고한 문체에서만 태어난다.
p103
좋은 소설이든 좋은 영화든 그것을 만든 작가들은 모두 작품 속에서 진정한 인간의 모습을 속속들이 관찰했다.
p128
나는 화산을 굉장히 좋아한다. 어디 무슨 산이 분화했다는 뉴스를 들으면 그 고장에 사는 사람들의 고생을 생각하기 전에 피가 끓는다, 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흥분을 느낀다.
p129
일본은 어마어마한 화산국임에도 불구하고 화산을 정면으로 다룬 문학작품이 적다. 무슨 연유일까. 대부분의 작가들이 늘 안전한 공간에서 살고 있어서일까.
p142
한 시대나 국가가 붕괴될 때는 젊은이들부터 형편없어진다는 설이 있다. 고대 로마가 그랬고 청나라도 그랬다. 먼저 젊은이들이 거역을 모르게 된다.
p145
동물은 자기 새끼에게 아무런 보답도 기대하지 않는다. 낳아서 기를 뿐이다.
p149
오늘날처럼 저능아까지 대학, 대학하고 외치던 시절이 아니었으므로
p152
그래도 나는 태연했다. 반성 따위는 하지 않았다. 내게 학교는 여전히 유원지였다. 학교측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를 쫓아내려고 애쓴 모양인데 나는 그런 술수에는 넘어가지 않았다.
p223
소설가란 원래 모두가 이색적이지 않으면 안된다.
p228
집까지 찾아오는 치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모두 정상이 아니다. 나는 그들에게 말한다. "내 소설이 좋다면 소설이나 읽고 있을 일이지 뭣하러 여기까지 찾아왔느냐." 그러면 그들은 실망한 표정으로 "매우 친절한 사람인줄 알았는데" 라고 주억거리면서 돌아간다. 그들이 말하는 친절함이란 대체 무엇일까.
p232
그러나 내게도 절대로 상종하고 싶지 않은 부류가 있다. 자신의 힘으로 처자식을 먹여 살리지 않는 남자와는 말도 하고 싶지 않다. 또 있다. 아무 목적 없이 인생을 사는 남자. 그 남자가 제아무리 좋은 성격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부모님 신세를 지거나, 구체적인 목적을 갖고 있지 않은 남자와는 사귀고 싶지 않았다. 그런 남자는 보기만 해도 화가 치민다.
그런 사람들은 나한테 오면 으레 "좋겠습니다. 예술가로 살 수 있다니" 라고 말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무슨 말씀을, 먹고살기 위해 쓰는 것 뿐인데요" 그러면 그들은 노골적으로 경멸스럽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는 "돈은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라고 덧붙인다. 그러면 나는 또 이렇게 말한다. "당신처럼 부모님 덕에 먹고 사는 사람은 모르실테죠. 내게 가장 우선적인 것은 먹고사는 일입니다."
p238
회사란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는 곳이 아니다. 자아를 억제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다.
p239
세상에는 아부 아니면 거만이라는 두 가지 태도밖에 취할 줄 모르는 인간들이 의외로 많다.
p240
사소한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당황한 나머지 소란을 피우고 다 큰 남자가 울기까지 한다. 남자가 이렇게 되는 까닭은 회사라는 조직에 오랜 세월 몸담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흑인지 백인지 분면하지 않은 활자의 세계에 파묻혀 있기 때문이다. 혹은 회사의 간판이 갖는 위력이 곧 자기 자신의 파워인 양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p241
나는 남자 성격의 좋고 나쁨은 일하는 데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본다. 일을 못하는 남자는 별볼일 없고 일을 잘하는 남자는 멋진 남자다. 친구는 또다른 조건으로 만들면 된다.
p244
나 역시 감동을 바라고 있고, 감동적인 소설을 쓰고 싶다. 그러나 내가 쓰려고 하는 소설은 현실을 충분히 파악하고 현실을 기반으로하여 성립하는 소설이며 내가 추구하는 감동은 감동을 위한 감동은 아니다.
p245
나는 독자들로 하여금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은 어쩌면 나 자신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도록 하고 싶은 것이다.
p248
고독하니까 외롭고, 외로우니까 비슷한 인간을 구하여 친구로 만들고, 그와 늘상 붙어다니면서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주는 나날을 나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p250
정도나 모습의 차이는 있어도 결국에는 강한 그 무엇을 지향할 수밖에 없다. 강함 이외의 모든 것은 임기응변이고 거짓이며 착각이고 도피가 아니겠는가. 강한 방향이란 고독이나 외로움을 이겨내는 것이다.
p279
예전에 여름에 소설을 쓴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자연의 섭리라는 대원칙을 배반한 어리석은 행위였다.
p299
요컨대 장편이든 중편이든, 정말이지 단편과 같은 농도와 높은 완성도를 지향하고 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p335
정직하게 산다.
자연은 반드시 필요한 것만을 효율적으로 섭취하며, 불필요한 것을 배제한다. 조금씩 조금씩 성장하며, 마침내 열매를 맺고 새끼를 낳는다. 우리가 자연에서 배워야 할 것은 그 집중력과 지구력이다. 창조적인 일을 하고 조금이나마 나은 작품을 세상에 선보이려 한다면 단조롭고 평범한 나날을 반복하는 수밖에 없다는 엄연한 사실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방탕한 생활 속에서 빼어난 작품이 튀어나온다는식의 신화를 믿는 자가 있다면 그는 분명 바보다. 그런 타입의 예술가라고 해도, 그의 전기를 조사해보면 좋은 작품을 집필중일 때는 보통 사람은 상상하기도 어려울 만큼 진지하고 정직하게 생활했다. 정도에 어긋날 만큼 흐트러진 생활을 했다해도 작품을 쓸 때만큼은 명백하게 자립과 독립의 정신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저자소개
마루야마 겐지 (丸山健二) - 1945년 나가노 현(縣) 이에야마 시(市)에서 태어났다. 1966년 『여름의 흐름』으로 제23회 『문학계』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이듬해 같은 작품으로 일본의 대표적인 문학상인 아쿠타가와 상(제56회)을 수상했다. 이는 아쿠타가와 상 사상 최연소 수상이었다.
마루야마 겐지는 철저히 일본 문학의 영향 바깥에 존재하면서도 일본 문학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특출한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현재 그는 생활비를 줄여서 쓰고 싶은 작품만 쓰겠다는 각오로 고향 오오마치에 거주하며 오직 소설 창작에만 전념하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 장편소설 『붉은 눈』, 『화산의 노래』, 『안령 산갈매기』, 『뇌신(雷神), 비상하다』, 『물의 가족』, 『천일의 유리』, 『봐라, 달이 뒤를 쫓는다』와 소설집 『어두운 여울의 빛남』, 『아프리카의 빛』, 『달에 울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