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심양 주교좌 성당에서 김패헌주교님을 뵈었다. 주교좌 성당은 리모델링 중이었다. 2년 전 아프셨다는데 지금은 건강해 보이셨다. 주임신부님께서 개포동 성당의 브뤼기에르 현양사업에 대해서 이야기 하시고 그동안 우리들이 만든 출판물 꾸러미를 전달했다. 한국 천주교회 발전에 대해 놀라워하였다. 또 5시간의 버스를 타고 금주성당에서 그 곳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드렸다. 신부님께서 그분들에게 안수기도를 해주셨다. 그 곳 교우들의 신부님을 맞이하는 모습은 마치 예수님이 오신 것처럼 경건해서 우리들의 모습이 많이 반성되었다.
금주 성당에서 미사를 본 후 조양성당으로 이동하였다. 조양성당 신부님께서 톨게이트까지 마중 나와 주셔서 고마웠다. 좁은 버스에서 불편하게 지내시던 신부님께서 좋은 차를 타시고 앞에 가시니 기분이 좋았다. 며칠 만에 불고기와 상추로 맛있는 점심을 먹었다. 조양성당은 새로 신축 중이었다. 양로원 시설도 갖춘 큰 규모의 건축물도 짓고 있었다. 조양성당이 브뤼기에르 주교님의 유해가 머물렀던 곳으로 알고 있었으나 하느님께서 신부님께 지혜와 혜안을 열어 주셔서 조양시에서 40Km 떨어진 송수주자천주당에 갈 수 있었다. 그 곳은 주교님의 유해가 하루 머물렀던 곳으로 열하성의 동몽골 교구청 자리였다. 하느님의 축복이었다.
그 곳에 교회사를 연구하는 신부님이 계셨고 1838년 만주 교구와 동몽골 교구가 합쳐서 교구가 한 개였다고 증언해 주었다. 1840년에 외국주교가 4명 있었다고 증언해 주었다. 성당은 그 앞의 중학교 자리에 있었는데 문화혁명 때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다고 설명해 주셨다. 우리 일행은 벅찬 감동을 가슴에 안고 중학교 자리의 나무 밑에서 중국신부들과 함께 브뤼기에르 주교님 현양기도문을 교송으로 바쳤다. 벅찬 감동이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신부님께서 만주 교무연감자료를 보여주셨고 답사단은 그 것을 복사해 가지고 왔다. 브뤼기에르 주교 현양사업의 또 하나의 징검다리가 놓이는 빛이 보여 우리 모두 기쁘고 보람 있었다. 심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가져간 소주로 건배하며 기뻐하는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나는 행여 이 행복감이 깨질까 두려워 침묵을 지키며 묵주기도를 바쳤다.
5월 25일
이른 아침 심양 주교좌 성당에서 김패헌주교님을 뵈었다. 주교좌 성당은 리모델링 중이었다. 2년 전 아프셨다는데 지금은 건강해 보이셨다. 주임신부님께서 개포동 성당의 브뤼기에르 현양사업에 대해서 이야기 하시고 그동안 우리들이 만든 출판물 꾸러미를 전달했다. 한국 천주교회 발전에 대해 놀라워하였다. 또 5시간의 버스를 타고 금주성당에서 그 곳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드렸다. 신부님께서 그분들에게 안수기도를 해주셨다. 그 곳 교우들의 신부님을 맞이하는 모습은 마치 예수님이 오신 것처럼 경건해서 우리들의 모습이 많이 반성되었다.
금주 성당에서 미사를 본 후 조양성당으로 이동하였다. 조양성당 신부님께서 톨게이트까지 마중 나와 주셔서 고마웠다. 좁은 버스에서 불편하게 지내시던 신부님께서 좋은 차를 타시고 앞에 가시니 기분이 좋았다. 며칠 만에 불고기와 상추로 맛있는 점심을 먹었다. 조양성당은 새로 신축 중이었다. 양로원 시설도 갖춘 큰 규모의 건축물도 짓고 있었다. 조양성당이 브뤼기에르 주교님의 유해가 머물렀던 곳으로 알고 있었으나 하느님께서 신부님께 지혜와 혜안을 열어 주셔서 조양시에서 40Km 떨어진 송수주자천주당에 갈 수 있었다. 그 곳은 주교님의 유해가 하루 머물렀던 곳으로 열하성의 동몽골 교구청 자리였다. 하느님의 축복이었다.
그 곳에 교회사를 연구하는 신부님이 계셨고 1838년 만주 교구와 동몽골 교구가 합쳐서 교구가 한 개였다고 증언해 주었다. 1840년에 외국주교가 4명 있었다고 증언해 주었다. 성당은 그 앞의 중학교 자리에 있었는데 문화혁명 때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다고 설명해 주셨다. 우리 일행은 벅찬 감동을 가슴에 안고 중학교 자리의 나무 밑에서 중국신부들과 함께 브뤼기에르 주교님 현양기도문을 교송으로 바쳤다. 벅찬 감동이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신부님께서 만주 교무연감자료를 보여주셨고 답사단은 그 것을 복사해 가지고 왔다. 브뤼기에르 주교 현양사업의 또 하나의 징검다리가 놓이는 빛이 보여 우리 모두 기쁘고 보람 있었다. 심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가져간 소주로 건배하며 기뻐하는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나는 행여 이 행복감이 깨질까 두려워 침묵을 지키며 묵주기도를 바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