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주인_패러다임의 변화, 누구를 섬길 것인가?
마태복음 6:24-25, 31-33
24.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한 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거나 한 편을 존중하고 다른 편을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
25 ."그러므로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는 무엇을 먹고 마시며 살아갈까, 또 몸에는 무엇을 걸칠까 하고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않느냐? 또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느냐?
(중략)
31.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마라.
32. 이런 것들은 모두 이방인들이 찾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신다.
33.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요즘 제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이 낯설지 않을 정도로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4차 산업혁명은 증기기관 발명과 함께 시작된 1차 산업혁명 이후 네 번째의 혁명적 변화를 말하는데 이전의 3번과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진행될 것으로 보여집니다.
1차 산업혁명은 1784년 영국에서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시작됩니다. 즉, 생산방식이 인간의 손에서 기계로 넘어가며 노동 생산성이 2~3배 이상 급증하게 되는 변화를 말하죠. 19세기 초 기계에게 일자리를 뺏긴 사람들은 이에 반발하여 기계파괴운동을 벌이게 됩니다.
2차 산업혁명은 1870년경, 전기를 활용한 대량생산이 이루어진 시점을 말하는데, 이를 통해 철도 건설과 대규모 철강 생산 등 제조업 등이 크게 발달하게 됩니다.
3차 산업혁명은 1969년 컴퓨터를 활용한 정보화 자동차 생산 시스템의 등장 시점을 말합니다. 특히 1990년대 중반에 들어서는 정보 통신과 신재생에너지 개발이 활성화되면서 3차 산업혁명이 가속화되었습니다.
4차산업혁명은 정보통신 기술(ICT)의 융합을 통해 생산성이 급격히 향상되고 제품과 서비스가 지능화되면서 경제‧사회 전반에 혁신적인 변화가 나타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핵심은 빅 데이터 분석, 인공지능, 로봇공학, 사물인터넷, 무인 운송 수단(무인 항공기, 무인 자동차), 3D 프린팅, 나노 기술과 같은 새로운 기술 혁신과 적용입니다.
제4차 산업 혁명은 물리적, 생물학적, 디지털적 세계를 빅 데이터에 입각해서 통합시키고 경제 및 산업 등 모든 분야에 다양한 신기술을 적용하는 것입니다. 온라인(online)과 오프라인(offline)이 결합하는 O2O방식을 통해 물리적인 세계와 디지털적인 세계의 통합이 가속화되죠. 인체의 정보를 디지털 세계에 접목하는 기술인 스마트워치나 스마트 밴드를 이용하여 모바일 헬스케어도 구현하게 됩니다. 또 가상현실(VR)이나 증강현실(AR)이라는 기술을 통해 물리적 세계와 디지털 세계를 접목할 수도 있습니다.
4차 산업혁명이 진행되면서 가장 우려되는 것은 인간들의 일자리가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이 우려는 1차 산업혁명 때의 러다이트운동 때와는 양상이나 규모가 매우 다를 것이라는데 그 심각성이 있습니다. 인공지능 로봇과 빅데이터, 사물인터넷이 결합하면 그동안 인간이 수행하던 많은 직업들이 사라지게 됩니다. 초 지능형 로봇들이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며 인간을 대신하게 되는 것이죠.
일반 사무원이나 단순 노동 등 반복적이고 예상 가능한 업무 종사자들, 데이터를 기반으로 하는 사무 종사자들도 직업을 잃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각광 받고 있는 법률가, 세무 회계사, 의사들도 위험군에 속하게 되죠.
하지만 자동화 대체 확률이 낮은 직업들, 문화, 예술 분야 등 창의력을 필요로 하거나 간호사, 테라피스트 등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업무는 살아남겠죠?
향후 10년 이내 우리나라에서도 제조업 80만 개, 서비스업 120만 개의 일자리 사라질 것으로 관측되고 있습니다.
직업을 빼앗긴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 냉혹한 자본주의 사회가 쓸모없는 사람으로 전락된 계층을 어떻게 대할까요?
지금 4차 산업혁명시대의 일자리 대안으로 로봇세와 기본소득제가 논의되고 있지만 실험수준에 불과하고 그 재원 마련도 쉽지 않다는 점에서 인간의 미래가 그리 유쾌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4차 산업혁명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인류의 철학적 인문학적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 중론입니다. 패러다임이 변화해야 한다는 것이죠. 우선 삶에 대한 깊은 성찰과 고민이 필요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이 일을 하는가? 내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우리 사회의 가치 기준도 변해야 합니다. 경쟁이 아닌 상생을 중요한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성장보다는 분배를, 성공보다는 행복을 목표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대부분은 먹고 마실 것을 위해 애쓰며 고단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대부분의 아빠들은 자존심도 구겨가며, 때로는 자기의 양심도 감춰가며 일을 합니다.
직장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부당한 상사의 요구라도 어쩔 수 없이 수용해야 하며 설사 그것이 불의한 경우라도 쉽게 저항하고 거절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원치 않는 잘못을 행하게 되고 괴로워하는 경우도 발생합니다. 이 모든 것이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믿기에 생기는 일입니다.
예수님 당시 일반 백성들에게 있어 먹고 마시는 문제는 정말 절박한 문제였습니다. 그 시대의 사회 구조가 민중들을 착취하는 구조였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가난한 일반 백성들은 하루종일 뼈 빠지게 일해도 제 식구 먹이기가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살아남기 위해선 모든 불의와 부정과 억압과 멸시를 하루하루 견뎌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무엇을 먹고 마시며 살아갈까, 또 몸에는 무엇을 걸칠까 하고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않느냐? 또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느냐(25절)”고 반문하십니다.
여러분이 당시 유대의 상황에서 먹고 마시는 것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다면 이 예수님의 말씀에 공감할 수 있을까요? 목숨이 음식이나 옷보다 중요하다는 주장은 그 자체로는 옳으나 음식과 옷 때문에 온갖 수모와 고통을 당하고 있는 당시 민중들에게는 풀 뜯어 먹는 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유대 민중들을 계속 설득하시죠.
“공중의 새들을 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거나 거두거나 곳간에 모아들이지 않아도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 먹여주신다. 너희는 새보다 훨씬 귀하지 않느냐(26절)?”
“너희는 어찌하여 옷 걱정을 하느냐? 들꽃이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 그것들은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꽃 한 송이만큼 화려하게 차려 입지 못하였다(28-29).”
“너희는 어찌하여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꽃도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야 얼마나 더 잘 입히시겠느냐(30-31)?”
그러니 이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목숨을 한 시간인들 더 늘일 수 있겠느냐?” 이런 것들은 모두 이방인들이 찾는 것이라고 책망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고난에 찬 삶을 살고있는 민중들에게 이런 메시지를 주신 참뜻은 무엇일까요?
너희들이 먹을 것, 입을 것을 위해 아무리 애쓰고 수고하여도 그닥 상황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거죠. 세상의 가치와 삶의 패러다임이 바뀌어야만 그들에게 행복이 찾아올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목숨이 음식이나 의복보다 중요하게 여겨지는 세상이 되지 않는 한 민중들의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처지와 삶을 뒤집기 원한다면 먼저 자신들을 돌아보고 생각과 행동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도 30여 년 전까지 민중들의 삶은 예수님 당시와 크게 다를 바 없었습니다. 요즘 1987이란 영화가 큰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며 우리 사회를 새롭게 조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 1987년 6월 항쟁은 우리 사회의 모습을 많이 바꾸어 놓았습니다. 단지 대통령 직선제만 이룬 것이 아니라 경제 민주화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그해 가을에 벌어진 노동자 대투쟁은 민중들의 삶의 지평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간 노동자의 임금은 3~4배 올라 비로소 가장 한 사람의 노동으로 한 가족이 인간다운 삶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위해 너무 애쓰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먹을 것, 입을 것을 위해 애쓰더라도 자신의 삶에 조금 도움은 될지언정 대다수 민중들의 삶을 변화시키기는 어렵다는 말로 들립니다.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사회 질서가 변하지 않는 한 노동은 고통이 되고 가족들은 짐이 되어 세상이 요구하는 모양새대로 살아갈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께서 옳게 여기시는 것을 위하여 힘써 노력하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모든 것들도 함께 너희에게 주어질 것’이라고 힘주어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질서를 변화시키면 우리가 꿈꾸는 일들을 모두가 함께 누릴 수 있습니다. 2016년 겨울에 시작하여 2017년 5월 대선으로 중간 마무리한 촛불 혁명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광장의 촛불이 세상을 바꾸어 가고 있지 않습니까? 촛불이 나라를 바로 잡고, 우리의 삶의 질을 바꾸려고 합니다. 그 기적을 목도하고 살아가는 우리들은 오늘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의 의미를 보다 선명하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위해 너무 애쓰지 말아라. 그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께서 옳게 여기시는 것을 위하여 힘써 노력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들도 함께 너희에게 주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래야만 하는 이유는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한 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거나 한 편을 존중하고 다른 편을 업신여기게 될수 밖에 없다는 것이죠. 그 두 주인은 하느님과 재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4차 산업 혁명의 우울한 그림자 또한 인류가 두 주인 중 누구를 섬길 것인가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인류 대멸종의 위기 시대를 살고있는 지금, 우리들의 올바른 선택이 매우 중요할 때입니다. 나의 선택이 우리 모두의 선택이 되어 삶의 패러다임이 바뀌도록 기도하고 애쓰는 모든 이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함께하시길 축원합니다.
<2019. 7.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