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원의 행복, 만원의 외출
한 때는 ‘88만원 세대’라는 말이 유행하더니 요즈음은 ‘達觀世代(달관세대)가 등장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취업난과 더불어 비정규직 공포에 시달리는 20대를 가리키는 88만원 세대는 소극적, 낙망적, 비관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이에 반해 적게 벌고 적게 쓰면서도 행복하게 사는 법을 터득했다는 달관세대는 그래도 적극적, 희망적, 낙관적인 면이 있어 일견 긍정적인 사고로 보이기는 한다. 그러나 경기불황이 나은 달관세대의 연령이 10대 후반에서 20대 중반이라는데 문제가 있다 하겠다.
“덜 벌어도 덜 일하니까 행복하다”, “불확실한 미래에 투자하기 보다는 현재를 즐기겠다”는 식으로 욕망 없는 세대로 비춰지는 게 더 답답한 노릇이다. 그래도 厭世主義(염세주의)보다는 낮지 않느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쾌락주의로 흐를 가 걱정스럽고, 애늙은이가 되거나 패배주의, 退嬰主義(퇴영주의)로 빠질 가 염려스러운 것이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를 ‘挑戰(도전)과 應戰(응전)’이라 정의한 바 있고, 丹齋(단재) 申采浩(신채호)는 ‘我(아)와 非我(비아)의 투쟁’이라고 갈파하지 않았던가? 남은 인생이 구만리 같은 청춘이 살기가 어렵다고 벌써부터 현실과 타협하고 안주하려는 모습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더구나 達觀(달관)은 나이가 든 사람이나 한 분야에 오래도록 精進(정진)한 사람만이 어렵게 도달할 수 있는 경지이거늘, 꿈 많은 젊은이들이 꿈을 이루어 보려고 노력해 보지도 않고서 달관세대라니 천만 부당이다.
누구는 “달관세대 속에 스티브 잡스가 있다”고, “달관세대는 삶을 포기한 세대가 아니라 기성의 가치, 못살던 시대의 가치에 더 이상 매달리지 않는 세대”라고 달관세대를 호의적으로 평하기도 한다. 일본에서도 젊은 세대 사이에 ‘減速生活(감속생활)’이 화제라고 한다. ‘꼭 필요한 만큼 일해서 꼭 필요한 만큼 쓰고 사는 기본적인 생활’이라고 한다. 달관과 감속이 말은 다르지만 한국과 일본의 젊은이들이 지향하는 바는 같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나이 칠십이 넘은 노인세대가 진정한 달관세대가 되려고 노력중인데, 노인의 희망이요 늙은이의 권리(?)마저 젊은 달관세대가 빼앗아 가버리지나 않을까 서글픈 것이다.
노인화시대가 급속도로 진행된다는 얘기는 늙은이의 수명이 길어지고 따라서 노인인구가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늘어난다는 말일 게다. 그런데 10대 20대가 달관세대라니 그들이 벌써 인생을 다 산 노인세대가 됐다는 말인가? 自嘲(자조)적인 용어라지만 뭔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대한민국이 온통 노인천국, 달관세대로 다 채워졌단 말인가?
나는 요즈음 나름대로 달관하려고 노력중이다. 이름 하여 「천원의 행복, 만원의 외출」을 통해서다. 천원으로 어떻게 행복을 찾고 만원으로 행복한 외출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반문할 테지만 나는 요 몇 년 그렇게 하고 있다.
나는 일주일에 두 번 오후에 목욕하러 간다. 차편을 이용하지 않고 운동 삼아 30 분가량을 등에 땀이 베일 정도로 걸어서 간다. 우선 냉탕, 온탕에 사우나로 땀을 빼고 나면 피로와 스트레스가 동시에 풀린다. 때를 밀기 보다는 헬스클럽에서처럼 운동도 한다. 맨손체조는 기본이고 맨발로 걷기, 팔굽혀펴기, 그리고 냉탕에서 수영도 즐긴다. 또 30 분가량 한 숨 자고 나면 몸과 마음이 가뿐해 진다. 단 것을 좋아하는 체질이라 목욕을 마치고 한 입 가득 알사탕 한 알이면 기분은 그만이다.
돌아올 때 다시 30분을 걸으면 갈증이 난다. 동네 구멍가게에서 천 원짜리 不老(불로)막걸리 한 통을 사들고 들어온다. 옛날에는 맥주였지만 이제는 막걸리다. 저녁 밥상에 집사람과 마주 앉아 집사람이 한 잔하고 나머지는 많은듯하지만 내가 다 마신다. 그러면 반찬이 없어도 밥이 술술 잘 넘어간다.
이 순간만은 마누라의 잔소리도 자취를 감춘다. 억만장자의 만찬이 부러울 게 없다. 막걸리 한 잔으로도 그들이 마시는 고급 양주나 와인 맛을 느끼면 그만이다. 이게 바로 칠십이 넘은 노인네의 즐거움이요 행복이다. 나만의 「천원의 행복」인 것이다. 공자도 일찍이 설파하지 않았던가? “거친 밥에 물마시고 팔을 베고 누웠어도 즐거움이 그 속에 있다”(子曰 飯疏食飮水 曲肱而枕之 樂亦在其中矣 : 자왈 반소사음수 곡굉이침지 낙역재기중의)라고 말이다.
행복은 만 원짜리 외출로 이어진다. 우선 집사람과 둘이서 영화 한 편 보는데 만원이면 충분하다. 교통비는 지하철로 때우고 관람료는 경로할인이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천만 관객을 동원하는 영화면 꼭 관람하는 원칙을 세워 놓고 있다.
그런데도 지난해 여름방학 때는 어영부영하다가 영화 ‘명량’을 놓치고 말았다. 그래서 지난 겨울방학 때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公無渡河 : 공무도하)’와 ‘국제시장’을 하루 만에 해치웠다. 그 중간에 푸드코트 – 식당가라 해도 좋을 탠대 굳이 영어를 쓰고 있다 –에서 역시 만원으로 두 사람의 점심식사를 해결했다. 천원의 막걸리 한 잔이 반주로 곁들여 졌음은 물론이다. 대형 쇼핑몰이라 음식의 값도, 질도 괜찮은 편이 라 만원으로 오찬(?)을 해결할 수 있어 좋다. 영화 두 편에 점심식사까지 세 만원으로, 아이들이 놀이동산에서 하루를 즐기듯 두 노인네가 대형 쇼핑몰에서 하루를 즐겁게 보냈던 것이다.
더구나 이날 본 두 편의 영화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특히 노인네 얘기라 나와 집사람이 마치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만원의 영화, 만원의 외식, 이만하면 「행복한 만원의 외출」이 아니던가?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니다. 행복은 내 가까이에, 아니 나에게 와 있는데도 내가 발견하지 못하고 느끼지 못할 뿐이다. 행복이 별 게 아니다.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 행복이다.
「행복한 만원의 외출」은 시내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그래도 도시의 먼지를 털어내기 위해 맛 기행, 멋 기행을 떠나려면 거금(?)을 투자해야 한다. 우리 부부는 한우 고기와 사과를 먹으러 영주를, 찜닭을 맛보러 안동을, 봄 도다리는 포항을, 가을 전어는 마산을, 싱싱한 회 먹으려는 부산 자갈치 시장을 찾는다. 물론 몇 달에 한 번씩, 아니면 제철에 맞춰 이들 지방을 찾곤 한다. 그곳의 온천이나 재래시장도 빼놓지 않고 들른다. 현지까지는 30% 할인 혜택의 기차를 이용하고 그곳에 가면 지하철이나 시내버스를 탄다. 당일치기로 갔다 오면 두 사람이 회나 고기를 양껏 먹고 소주 한 잔 걸치고서도 거금 십 만원이면 너끈하다. 이렇게 하루를 보내면 온 몸이, 五感(오감)이, 飽滿(포만)이다. 이게 우리네 서민들의 즐거움이요 행복이다. 이렇게 행복은 우리 가까이 있다. 내가 찾아 느끼면 그게 행복이다. 1인당 국민소득 2천 달러에 인구 70만인, 히말라야 산기슭의 작은 나라 부탄이 세계에서 국민행복지수 1위라고 하지 않는가? 더 설명이 필요 없다.
“참으면 病(병)이 되고 , 터뜨리면 業(업)이 되고, 그냥 바라보면 사라진다”는 한 스님의 말이 생각난다. 가슴에 와 닿는 말이다. 우리 모두 이를 본받아야 하겠다.
세상만사 마음먹기에 달렸다. 남의 떡은 커 보이기 마련이다. 남의 행복을 부러워 할 게 아니라 내 행복 내가 찾아 만들어야 한다. 남이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다. 내 분수에 맞게 스스로 느끼면 그게 행복이다.
비법 아닌 비법인 나만의 「천원의 행복, 만원의 외출」을 권한다.
단기 4348년 3월 15일 대구에서 抱 民 徐 昌 植